1 고려시대의 성균관
북한 개성특급시에 위치한 유교 교육기관. 북한의 국보 제127호. 입구에 있는 표지판에 따르면 992년에 창설된 '세계 최초의 교육기관'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름이 비슷한 고려성균관은 근처에 있는 대학교 이름이다.
과거 개성관광이 시행될 때 들리는 코스 중 하나였다.
2 역사
고려 초기에는 달리 특기할 만한 교육기관의 존재가 보이지 않지만, 930년에 태조가 서경에 행차하면서 그곳에 학교와 학원을 창설하고 공식적으로 학업을 진흥시킨 일이 있었다. 이를 근거로 삼아 개경에도 일찍부터 학교가 있었으리라 추정하는 견해가 있지만, 그럼에도 그것이 아직 전국적 차원의 고등교육기관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뒤로 유교사상을 기반으로 하는 문벌 집단이 형성되면서 고등교육기관에 대한 내부의 수요가 증폭되었고, 이에 비로소 성종이 체제 정비의 일환으로 신라의 국학을 본뜬 태학을 개경에 건립했다. 서기 983년에 박사 임노성(任老成)이 북송에서 종묘사직과 문묘의 설계도를 가져온 것을 시작으로 적어도 987년에는 태학이 완성되어 260명의 학생으로 교육이 시작된 것으로 보이는데, 고려사에는 다음과 같은 성종의 교서가 실려 있다.
짐이 평소 박덕함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유학을 숭상하려는 마음이 간절하여, 주공과 공자의 학풍을 일으키고 요순의 치세를 이루고자 하였다. 이에 학교(庠序)를 세워 인재를 양성하고 과목으로 선발하는데, 지금 각 주에서 올라온 학사(學士)들 가운데 고향을 그리워하는 사람이 있을까 염려되니 모두 임의대로 떠나거나 남거나 하라. 귀향하는 학생 207인에게는 베 1400필을 하사하고, 잔류하는 학생 53명에게도 복두 106매와 쌀 265석을 하사한다.
</br>- 『고려사』 선거지, 성종 5년 7월
근자에 널리 뭇 주군현의 자제들을 모아서 개경으로 불러다가 학업을 익히게 했더니, 과연 바람을 타듯 이르고 조서에 응해 몰려와 학교 안이 학도들로 북적이게 되었다. 무릇 집을 등지고 먼 길을 와서 손님이 되어 많은 날을 보낸지라 또한 태산을 이루려는 뜻이 게을러지고 고향을 그리는 마음이 더욱 깊어가고 있다. 그 객지의 외로움을 가엾이 여겨서 유지를 내려 보살피나니, 머물기를 원하는 자는 개경에 머물기를 감내하고 물러가길 구하는 자는 고향으로 돌아가길 허락한다. 각자에게 하사품을 내릴 것이니 받은 뒤에 떠나거나 머무르라.
</br>- 『고려사』 성종세가, 성종 6년 8월
이후 992년에 성종은 다시 태학과 별도로 국자감을 세우고 독자적인 전장(田莊)을 운영하도록 하여 고등교육기관의 질적인 제고를 꾀했다. 또한 여기에서 나아가 전국에 널리 학교를 세우도록 함으로써, 국자감을 정점으로 하는 일원적인 공교육 체계를 지방으로 파급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현종대부터는 본격적으로 문벌귀족사회가 정착되면서, 이러한 명문가의 학생들을 중심으로 더 이상 국자감에 입학하지 않고 자기 집으로 개인교사를 초빙하는 사교육 문화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따라서 이전까지는 과거급제자 대부분이 대체로 중앙과 지방의 차별이 없는 공교육(국자감) 출신이었으나, 점차 사교육을 받은 중앙의 문벌귀족들이 과거급제자 대부분을 차지하기 시작한 것이다. 과연 사교육 문제도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이러한 현상은 고려가 태평성대를 누리던 덕종, 정종, 문종 시대를 거치면서 계속 심화되었고, 그 끝판왕이 다름아닌 최충의 문헌공도(9재 학당)와 그를 비롯한 사학 12도.
때문에 이 시기에 이르면 국자감은 껍데기만 남아 학생들이 이름만 걸어놓고는 국자감시(국자감생 한정 특채) 때에만 모이는 대기소처럼 되어버렸다. 이를 개선하고자 정종 2년에는 입학한 지 3년이 지나야 국자감시에 응시할 수 있도록 규정을 만들었으나, 이는 오히려 학생들이 국자감에 이름을 걸어놓는 것조차 기피하는 역기능으로 작용하고 말았다.
결국 이를 보다못한 예종이 공교육을 활성화하고자 나섰다. 예종은 국자감을 7개 전공으로 나누어 전문화시켰는데, 이것이 바로 7재다. 이는 각각 주역, 상서, 모시, 주례, 춘추, 예기, 무학(!)[1]을 전공하는 것이었으며 7재 전체는 '국자학', 무학을 제외한 6재는 '태학'이라 통칭되었다. 이렇게 정비된 공교육 체제는 오래지 않아 맞이한 무신정변으로 사학 12도가 철퇴를 맞으면서 다소 반사이익을 보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관리들이 인맥빨로 채용되는 정국에서 공교육이라고 제 역할을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 이규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림(士林)으로 말하면, 옛날에는 벼슬에 나가는 길이 매우 어려웠으므로 선비가 반드시 학문에 힘써서 과거에 응시하는 자가 많았는데, 지금은 벼슬에 나가는 길이 매우 쉬우므로 반드시 과거를 보아야만 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학문에 종사하는 자가 적다. 그 벼슬에 나감의 어렵고 쉬움이 고금이 같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 폐단을 개혁하여 옛날대로 회복하는 방법은 또 어떻게 해야 옳겠는가?
</br>- 『동국이상국후집』 제11권, 갑오년에 예부에서 시험한 책문.
마침내 몽골의 침입으로 조정이 강화로 천도하자, 국자감은 한동안 강화향교 건물에 더부살이하다가 1251년에야 건물을 따로 가지게 된다. 전쟁이 끝나고 조정이 개경으로 환도하면서 다시 돌아오기는 했지만, 쑥대밭이 된 개경의 교육여건은 그야말로 절망적이라 별도로 경서와 사서에 능통한 사람을 뽑아서 교육을 위탁해야 할 지경이었다.(...) 이 당시 국자감이 얼마나 피폐한 상황이었는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원나라의 사신으로 온 야율희일(耶律希逸)이 고려의 국자감 건물이 너무 좁고 누추하다고 충렬왕에게 지적할 정도였다.
더욱이 당초의 이름인 국자감도 1275년에는 국학(國學)으로, 1298년에는 성균감(成均監)으로, 1308년에는 다시 성균관(成均館)으로 자꾸만 수정되었다. 이는 원나라에서 그들의 국자감과 동일한 이름을 쓰지 못하도록 간섭했거나 아니면 고려 스스로 그 이름을 피하려고 한 데에 기인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다만 성균감에서 성균관으로 이름을 고친 시기와 주체에 관해 다소 혼란이 있는데, 고려사 백관지에서 '충렬왕 34년에 충선왕이 성균관으로 이름을 고쳤다'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충렬왕 34년은 충렬왕이 죽고 충선왕이 복위한 해이므로 충선왕이 복위하자마자 성균관의 이름을 고쳤다고 보는 것이 옳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공교육 복원에 가장 현저하게 공헌했던 인물이 바로 안향이었다. 안향은 1289년에 충렬왕을 따라 원나라에 들어가서는 그곳에서 주자학 서적과 공자와 주자의 초상을 가지고 돌아왔고, 1303년에는 관리들의 돈을 추렴해 성균관의 장학재단격인 섬학전에 충당했으며, 그 가운데 남은 돈으로는 중국에서 문묘제례에 사용할 각종 용구와 교육에 쓰일 각종 경전들을 구해오게 하는 등 동분서주했다. 위와 같이 원나라 사신의 지적을 받고 성균감 건물을 정비한 것도 바로 이 시기의 일.
이후 성균관은 공민왕이 공교육을 대대적으로 정비하고 성균관의 이름도 국자감으로 복원시키면서 다시 잘 굴러가는가 싶었지만, 이내 홍건적의 침공으로 개경이 함락되자 다시 쑥대밭이 되었다.(...) 이에 공민왕은 국자감을 다시 성균관으로 되돌리고 이색을 중심으로 성균관을 복원했는데,[2] 물론 이것도 공민왕이 시해되고 정국이 이인임을 비롯한 권문세족에 의해 주도되면서 대부분 도로아미타불.(...) 징하다
결국 성균관은 이인임과 최영이 축출되어 신진사대부들이 집권하고, 공양왕이 즉위한 뒤에야 비로소 공교육의 정비와 함께 그 위상을 갖추게 된다.
조선이 건국된 후 성균관은 한양으로 옮겨지며, 개성성균관도 성균관이라는 이름은 유지했지만 실질적으로는 하나의 향교에 지나지 않게 된다.
3 고려박물관
성균관 옆에는 고려박물관이 있다. 고려시대의 각종 문화재 천여점이 전시돼있다.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성균관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div></div>- ↑ 시험에서 고려시대에 '무과'가 없었다는 선택지가 오답인 이유. 하지만 오래지 않아 폐지되고 만다. 폐지된 이유는 다른 재(전공)들은 졸업시험을 통과해야 했지만 무학재는 수행평가만 채우면 되었기 때문.(...)
- ↑ 이때 이색을 중심으로 등장한 인물들이 고려 말 삼은이라 불리는 이색, 이숭인, 정몽주와 정도전 등의 신진사대부들이었다.
공민왕이 호랑이 새끼들을 키웠다따라서 실질적인 유교교육기관으로서의 성균관은 이때부터를 그 효시로 삼는다. 물론 이것도 온전히 맞는 말은 아닌것이, 공민왕이 재위 20년에 성균관에 무과를 설치했던 적이 있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