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만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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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준영정.

金萬德, 1739 (자세한 날짜 불명)~1812.10.22

1 개요

조선 시대 제주도여자 거상. 남존여비 사고관이 만연해 있던 조선에서 드물게 대부호이자 대인이였던 것으로 유명했던 인물이다.

2 생애

제주도에서 양인(良人)인 아버지 김응열과 어머니 고씨(이름 불명) 사이에서 태어났다. 12살 때 부모 모두 세상을 떠나자 외삼촌 집안에서 잠시 얹혀 살다가, 은퇴한 기생에게 수양딸로 맡겨져 기생 수업을 받았다. 이후 제주 관가의 기생이 되었지만, 가문에 누가 된다는 친가 쪽의 강요를 받고 그만두고 말았다.

결국 다시 양인 신분으로 돌아온 뒤 중간 상인에 해당하는 객주 일을 시작했고, 본토와 제주도 사이의 물자 유통에 상당한 수완을 발휘해 도에서 알아주는 대부호가 되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다른 객주들의 시기심 때문에 부정축재로 허위 신고를 당해 투옥되었다가 지역 주민들의 상소로 풀려나는 등 고초를 겪기도 했다.

이 당시 심로숭이란 문인은 제주 목사인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제주도를 방문했다가 김만덕에 대한 이야기들을 듣고 이를 글로 남겼는데, "만덕이 기생 노릇을 할 때 품성이 음흉하고 인색하여 남자가 돈이 많으면 따랐다가 돈이 떨어지면 떠나되 옷가지마저 빼앗아서 그녀가 지닌 바지저고리가 수백 벌이었다고 한다. 그 바지를 늘어놓고 햇볕에 말리는 것을 보고 동료 기생마저 침을 뱉고 욕했다. 그렇게 벌어서 만덕은 제주에서 가장 큰 부자가 되었다."라는 글을 썼다. 아마도 김만덕과 경쟁 관계였던 객주들이 퍼트린 루머 중 하나인 모양.[1]

1795년에[2] 태풍제주도를 강타하면서 가뜩이나 식량 생산이 저조했던 도내 농사에 큰 타격을 입혔다. 이 때문에 수많은 아사자가 발생하자, 김만덕은 자신의 재산을 털어 본토에서 500섬을 사와 도민의 구호에 써달라고 관가에 헌납했다. 이 소식은 얼마 후 제주 전임 목사였던 유사모에 의해 조정에도 전해졌고, 당시 왕이었던 정조가 제주목사를 통해 소원을 물으니 "서울에 한 번 가서 왕이 계신 곳을 바라보고, 이내 금강산에 들어가 일만이천봉을 구경한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정조는 김만덕을 불러 명예 관직인 의녀반수에 봉하고 직접 만났으며 [3] 금강산 유람을 하고 싶다는 청도 받아들였다.

기생 출신 양인이 왕을 알현한 것은 전례없는 일이었고,[4] 이 때문에 당대 지식인이자 정치인들의 관심을 한몸에 받았다. 채제공은 김만덕의 생애를 다룬 '만덕전'을 집필했고, 정약용 같은 실학자와 김정희,[5] 조수삼 같은 문인들도 김만덕의 구휼 사업을 칭송하는 시와 글을 남겼다.

금강산 유람을 마친 뒤에는 다시 제주도로 돌아가 객주 일을 계속 했고,[6]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대신 양아들을 들여 키웠다. 1812년에 고향 제주에서 향년 74세로 세상을 떠났고, 유언으로 양아들의 기본 생활비를 제외한 모든 재산을 제주도의 빈민들에게 기부했다. 장례는 고으니모르라는 곳에서 치뤘으나 현대에 도로 공사로 인해 제주시 건입동 사라봉오름 근처로 이장했다. 그녀의 묘와 사당은 모충사라는 이름으로 성역화되고, 그 곳에 김만덕 묘 외에도 공덕비[7]와 기념관이 있다. 비교적 크고 아름답게 만들어진 공덕비에 비해서 묘와 기념관은 구석에 초라하게 있어서 대략 안습이다.

여담으로 기록에 따르면 외모는 체구가 크고 칠순의 나이에도 얼굴과 머리가 신선이나 부처와 같았다고 한다. 또한 당대엔 겹눈동자라는 소문이 퍼졌으나 정약용이 직접 그녀를 만나 확인한 결과 사실이 아니라고 경세유표에 기록을 남겼다.

3 사후

황진이신사임당, 허난설헌 같은 여타 조선사를 장식한 여성들 만큼의 이름값은 아직 없지만, 혼자 힘으로 사업을 시작해 부자가 되었다는 입지전 스타일 인물에 대인배 업적까지 더해져 페미니스트들에게는 '자수성가한 여성'의 대표 격으로 여겨지고 있다.

제주도에서도 1976년 제주시 건입동의 모충사 경내에 김만덕기념관을 만들고 1980년부터 매년 탐라문화제 개최일에 맞추어 만덕제라는 제사를 지내고 있다. 2004년에는 김만덕기념사업회가 결성되어 국내외 소외 계층들에 대한 지원과 봉사 활동을 하고 있다. 2010년에는 KBS에서 김만덕의 일생을 거상 김만덕이라는 사극으로 각색해 방영하기도 했는데, 반응은 다소 미온적이었다.

같은 해 10월 8일에는 국립합창단에서 한국 합창곡 창작 지원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극작가 김문환과 작곡가 이영조에게 위촉한 칸타타 '만덕할망'이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초연되었고, 같은 달 22일에는 순천시에서도 공연되었다.

제주도에선 "김만덕 할망"으로 불리며 도내 유치원, 초등학교 등에서 지역위인들을 가르칠 때 많이 언급되어 온데다, 70년대 고두심[8] 주연의 MBC 드라마 <정화> [9] 덕분에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회자되어 신사임당만큼 많이 알려진 인물이다.
한편, KBS는 김만덕 이야기를 당초 100부작으로 기획됐으나 시청률 부진에 시달려 70회로 조기종영시킬 계획이었던 장희빈 후속으로 편성할 계획이었지만 2TV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젊고 밝은 드라마를 만들겠다는 취지에서 편성이 무산됐으며 SBS 올인 종영 후 시청률이 계속 상승하자 장희빈의 조기종영 계획은 취소됐고 이 과정에서 여주인공으로 낙점된 이영애의 안방극장 복귀 계획은 무산됐으며 이영애는 이 작품 외에도 KBS 2TV 명성황후 장희빈 여름향기 등에서 캐스팅 제의를 받았으나 모두 고사했고 우여곡절 끝에 MBC 대장금으로 안방극장 복귀를 했다[10].
최근에는 뭐든지 알고있는 존재로 환생한것 같다

4 관련 문서

  1. 이 설을 전한 심로숭이 또 노론측 사람이다 보니 '노론의 꼴통스러운 보수성'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간혹 들먹이곤 하는 듯하다.
  2. 이 해가 간지로 갑인년인데 제주 속담에 "갭인년 숭년에두 먹당 남은 게 물이여(갑인년 흉년에도 먹다 남은 게 물이었다=갑인년 흉년에도 물 없어서 고생한 적은 없었다가만, 제주도는 물이 귀한 섬이라고 했는데)."라는 속담이 남아 있을 정도. 여기서 말하는 갑인년이 바로 만덕 당시의 갑인년 흉년이다.
  3. 의녀반수 자체는 그야말로 명예직이지만, 왕인 정조를 만나려면 뭐든 벼슬을 달아야하는데, 여성인 김만덕에게 내리기엔 가장 적당한 벼슬이기도 햇다. 일성록 정조 20년 11월 25일 기사를 보면 '제주(濟州)의 기녀(妓女) 만덕(萬德)을 내의원의 차비 대령(差備待令)인 행수 의녀(行首醫女)로 충원하고 금강산을 구경하고 나서 되돌아갈 때 연로(沿路)에 분부하여 양식과 경비를 넉넉히 주게 하라고 명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에도 같은 날 김만덕에 대한 기사가 있다.
  4. 더군다나 제주도 출신 여성이다. 제주도 사람(특히 여성)들은 조선 인조 7년(1629년)에 내려진 출륙금지령 때문에 제주에서 태어난 이상 평생 제주 섬을 나갈 수가 없었다. 사실상 김만덕은 제주 여자로써 이례적으로 서울을 밟아본 거의 유일한 여성인 셈. 출륙금지령이 폐지된 것은 김만덕 사후 11년이 지난 순조 23년(1823년)의 일이다.
  5. 이 사람은 나중에 제주도로 유배되어 대정현(지금의 서귀포시 대정읍)에서 유배 생활을 하게 된다.
  6. 김만덕의 객주 터는 제주항에서 내려서 시내 쪽으로 걸어올라가다 보면 나오는 갈림길 왼쪽으로 보인다. 이 김만덕 객주터를 지나는 길은 제주 올레길 제18코스에 포함되어 있기도 하다. 35억 원을 들여 2016년에 복원.
  7. 김만덕 공덕비 외에도 제주도 항일의병활동과 독립운동가 공덕비도 같이 모셔져 있다. 서울로 치면 효창공원과 비슷한 셈.
  8. 고두심은 실제로도 제주도 출신이다.
  9. 거상 김만덕의 오리지날 격
  10. '올인'의 외주제작사인 초록뱀미디어가 이 작품과 '장희빈'을 동시에 외주제작한 바 있었으나 당시에는 초록뱀미디어가 '장희빈'의 외주제작사인 이스타즈에 후발주자로 참여한 바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