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방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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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方慶
1212~1300

1 소개

본관은 안동(安東)이지만 조선 말의 세도정치를 떨친 '신 안동 김씨'가 아닌 '구 안동 김씨'의 중시조가 된다. 자 본연(本然). 시호 충렬(忠烈).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에 참가한 고려의 장군으로 신라 경순왕의 10대손이다. 일본 원정에서 놀라운 지휘력을 발휘해 고려군의 피해를 최소화시킨 장군. 또한 고려의 노익장 중에서 한 명이고 고려인 기록상 매우 오래 장수했다. [1][2]

2 성장

어린 시절에는 한 고집 했는지 자기 마음에 안 드는 일이 있으면 길바닥에 나가서 드러누워 울어제끼곤 했다고 한다. 방경이 꺼야! 우와아아아앙!! 그런데 길바닥에서 이랬는데도 지나가는 소와 말이 어린 김방경을 피해서 지나가서 주위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고 한다. 우마도 피해다니는 개초딩의 위엄... 보통 눈에 뵈는게 없을만큼 달리는게 아닌담에야 다 피해가지 않나?

김방경이 태어나서 조부 김민성의 집에서 자랐는데 뜻에 조금만 마땅치 않고 노여운 일이 생기면 반드시 거리에 나가서 울었으나 오가는 소와 말이 그를 피해서 다녔으므로 사람들이 이상한 일이라고 여겼다. -<고려사열전> 김방경

1229년 처음 관직을 받고 1248년에 서북면 병마사에 임명되어 위도(葦島)[3]에서 한차례 소규모 접전에서 몽고군을 물리친 적이 있다. 1263년에 지어사대사(知御史大使)에 임명, 진도에 침입한 왜구를 물리치기도 했고 이 공로로 상장군에 올랐다.

위도에 주둔할 당시 위도에는 경작할 만한 땅이 10여개 정도 있었으나 조수물이 들어와서 경작을 못하고 있었는데 김방경은 방파제를 쌓고 이 땅에 파종을 하도록 시켰다. 그래서 처음에는 백성들에게 원망을 샀으나 가을이 되자 추수한 식량이 많아서 백성들을 먹여 살릴 수 있었다. 또한 위도에는 샘이나 우물이 없어서 식수를 구하기 위해 백성들이 육지로 나갔다가 몽골군에가 잡혀가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김방경은 비가 오면 그 물들을 받아다 저장해 뒀다가 그 물로 저수지를 만들어서 식수 걱정을 없앴다. 정치 수완도 제법 뛰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

모함을 받기도해 좌천되기도 했으나 다시 지어사대사로 임명되어 삼별초 토벌에 앞장섰다. 삼별초의 난 당시 함락직전이던 광주와 나주를 지켜내고 1273년 탐라도에서 농성중이던 삼별초 잔존 세력까지 모조리 해치워 이에 문하시중에 올랐다.

삼별초 토벌 중에는 진도에서 진도 해협[4]의 물살에 휘말린 데다가 대장선에까지 삼별초군이 뛰어올라 달려들었으나 김천록[5]이 단창으로 이를 저지해 위기를 모면했다. 직후 "고기밥이 될지언정 어찌 반적에 손에 죽겠느냐"며 바다에 몸을 던지려 했으나 부관들이 말렸고 부상당해 쓰러진 병사들이 김방경을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분투했다. 김방경은 생각을 고치고 병사들을 지휘했는데 안색이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고 한다. 이 때는 간신히 장군 양동무가 몽충으로 포위망을 돌파하여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 후 진도를 함락시킬 때는 원종의 명을 받고 삼별초가 세운 왕인 승화후 온을 살리려 했으나 아버지가 고려 출신인 홍다구가 먼저 온을 잡아 죽여버렸다.

3 1차 일본 정벌

1273년 삼별초의 난이 제압되고 1년도 채 지나지 않아서 원나라의 요구로 합포현(현재의 창원)에 성을 쌓게 되었는데 이때 감독관으로 가게 되었다. 그해 10월 1차 원정군이 출발하였고 도독사로 임명된 김방경은 박지량, 김문비 등과 함께 고려군 8000여명을 이끌고 원나라 정벌군과 함게 출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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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9일. 모모치바라에 상륙한 김방경이 이끄는 고려군은 사와라(삼랑포)를 넘던 도중 기쿠치가 이끌던 일본군을 맞았으나 근처에 있던 원군과 합심해 격파하였다. 이때 고려사에는 고려군은 분전하였으나 원나라 병사들은 꼬리빼며 도망갔는데 이것은 몽고군이 전진만 외치는 김방경을 질투해서다...라고 적혀있다.

"비록 몽고군이 전투에 익숙하다고는 하나 어찌 고려군보다 더 낫겠느냐" 여몽연합군 총사령관 흔도 - 고려사 김방경전

이때의 승리 이후 김방경은 "우리 쪽수가 후달리긴 한데 지금 여기서 싸우는건 배수진 친거라 이길수 있엉"이라고 제안하나 하지만 흔도가 "우리 피곤한데 더 들어가면 아주 좆 되는거야" 라고 말하며 쿨하게 쌩깟다.

참고로 이때 나이는 62세이며 당시 정벌동안 고려인이지만 몽골의 앞잡이로 유명한 남양 홍씨 (당홍) 홍다구와의 마찰이 매우 잦았다고 기록되어있다.

4 1차 정벌 이후

1차정벌의 실패후 고려로 복귀한 김방경은 원나라 간섭을 줄이기 위해 고심하던 충렬왕의 명령으로 상절사에 임명되어 수차례 원나라를 왕래하고 고려의 뜻을 전하였다. 1276년 7월에는 쿠빌라이 칸의 생일 축하 사절단으로 가기도 했다.[6] 1277년에 위득유, 노진의, 김복대[7]가 사람을 모아 김방경과 그의 가족 및 측근들을 모함했다. 당시 몽고에서 고려를 제어하기 위해 보낸 다루기치를 죽여 역모를 꾀한다고 흔도에게 익명의 투서를 보내 모함한것. 결국 왕에게까지 일이 알려져 충렬왕은 이를 의심스러워 하면서도 위득유 일당과 김방경, 그리고 그 측근들을 소환하여 심문을 하게 되었다. 심문 중 위득유 일당에 동조했던 자들 중 일부가 위득유의 강압에 못 이겨 김방경을 무고했다며 자백하자 위득유가 뒤늦게 김방경이 자신에게 '관군을 다 죽이고 해도(海島)[8]에 들어가 머물 것이다.'라는 말을 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유경[9]이 '그렇게 중요한 사실을 왜 진작에 말하지 않았냐'고 강경하게 따져 묻자 위득유 일당은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고 김방경의 부장 김천록이

"너희들은 개돼지같은 놈들이다. 진도(珍島)를 칠 때에 너희 두 사람이 군법을 어겨 중찬(中贊)[10]이 너희 장물을 몰수하여 관에 들였는데 너희들은 이를 원망할 뿐이다. 이제 거짓 말을 꾸며서 대신(大臣)을 모함하고자 하니 하늘이 너희를 죽이지 않으면 하늘이 없다 할 것이다." - 고려사 김방경전

라며 크게 꾸짖으니 김복대 등의 나머지 일당들도 무고를 실토하며 발을 빼버렸고 이에 충렬왕은 김방경이 결백하다고 판단, 그를 석방시켰고 그렇게 무사히 넘어가나 했으나 홍다구가 다시 이 일을 꺼내들어 기어이 김방경을 심문대에 다시 세워서는 아주 매몰차게 고문한다.

"다구는 쇠사슬로 그의 머리를 감고 못질을 할 것처럼 하며, 매질하는 자에게 그 머리를 치라고 소리쳤다. 종일 알몸으로 서서 추운 날씨에 살이 얼어서 먹장빛처럼 되었다." - 고려사 김방경전

그럼에도 거짓 자백을 받아내지 못하자 홍다구는 충렬왕을 협박해 "자백하면 귀향으로 끝내겠다"라는 말을 하게 하지만 김방경은 거절했다.

"왕께서 이렇게 말씀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신이 군졸 출신으로 재상의 자리에까지 올랐으니 이몸이 짓이겨 없어질지라도 국가에 보답하기에 부족합니다. 어떻게 저의 몸을 아껴서 허위로 자백하여 나라를 저버리겠습니까? 홍다구야! 나를 죽이려거든 바로 죽여라. 나는 정의에 어긋나는 일로 너에게 굴복하지는 않겠다."

결국 그는 대청도로, 그의 아들 김흔은 백령도로 귀향을 갔지만 쿠빌라이 칸이 이를 이상하게 여겨 홍다구와 위득유등을 소환하여 꾸짖고 김방경을 풀어주라 이른다.

5 2차 일본 정벌

1280년 벼슬에서 물러날 것을 요청했지만 믿을 건 김방경 밖에 없던 충렬왕은 거절한다. 이때도 고려군의 물자 준비를 준비하던 건 김방경이었는데 이때 원나라식으로 만들려고 했던 배들은 전부 고려식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강력 주장했다. 1281년 2차 일본 정벌군의 고려군 도원수로 임명, 고려군을 이끌고 공을 세운다.

김방경ㆍ김주정ㆍ박구ㆍ박지량ㆍ형만호 등이 일본군과 힘껏 싸워 일본 군사의 머리 3백여 급을 베었다. 일본군이 돌진하여 오니 관군이 무너져 다구가 말을 타고 달아났는데, 왕만호가 다시 측면에서 공격하여 50여 급을 베니, 일본군이 마침내 불러가고 다구는 겨우 목숨을 구하게 되었다. - 고려사

이후 전염병[11]과 악조건[12]으로 연합군이 밀리게 되자 철군을 고민하던 때에 "우린 너네 왕이 3달이면 된다고해서 3달 먹을 쌀 가져 왔는데 지금 도망가자고? 아직 1달 먹을꺼 남았고 남송 병력이 오면 저 일본군 놈들 잡아 족칠수 있으니까 기다리셈" 이라며 강력 제안해 퇴각을 막았다.[13]

이때 나이는 69세이다. 흠좀무

6 그 이후

87세 나이인[14] 1298년에 관직에서 물러날때까지 이시기 고려의 암흑기를 지탱한 유일한 위인이라고 불러도 될만큼 활약이 많았다. 사망했을 때의 나이는 89세였다. 현재 기록에 남아있는 고려인에서 가장은 아니고 매우 장수한 사람이다. [15] 아니 그 시대를 생각하면 전세계적으로도 장수한 나이이다.

사후 1307년 공로를 인정받아 "충렬"이라는 시호를 받는다.[16]

7 등장하는 매체

여몽연합군의 고려군 대장으로 참전했기 때문인지 일본에서도 유명해서 칭기즈 칸 게임 등에서 고려의 장수로 나오는데, 문제는 고증을 잘못 해서 열전에 삼별초의 장수라고 기록되어 있단 거다(...). 김방경은 삼별초를 토벌한 장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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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기스칸 4 일러스트[17]

원조비사에선 유저 시나리오의 장수들중 그나마 가장 강한 장수. 지휘가 B 정도였던가... 이 게임은 능력치가 5 종류(A, B, C, D, E)뿐이라 C 이상이면 그럭저럭 괜찮은 장수이니 말이다. 징기스칸 4에서 고려 최강의 장수(...)의 자리는 김통정에게 빼앗겼다. 초기판에는 전투가 꼴랑 54였지만 플스판에선 62로 올라갔다. 사실상 이 게임의 고려 장수 중 부당할 정도로 피해를 본 장수 중 하나인데 특기도 등용 특기밖에 없고 군인인데도 전투 특기는 하나도 없다.[18]

이노우에 야스시[19]의 소설 <검푸른 해협>[20]에서는 원종, 충렬왕과 함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1963년에 나온 이 소설은 미군정하의 일본을 몽골 지배하의 고려에 빗대어 냉전 때 군사기지화된 일본의 상황을 비판하기 위한 작품이지만, 작가는 이 책을 쓰기 위해 원사와 고려사를 탐독하는 것은 물론 한국에도 세 번 방문했다고 한다. 김방경은 냉혹한 매국노인 홍다구와 대립각을 세우는 열렬한 충신으로 등장해서 어떻게든 원이 고려에 끼치는 피해를 최소화하고 고려를 살아남게 하려고 애를 쓴다. 소설의 형식이 굉장히 특이한데, 사료를 거의 나열하다시피 하면서 사이사이에 창작 신을 끼워넣는 식이다.

8 기타

충직하고 근엄했다고 하나, 일본원정 도중 부하들의 민폐를 막지 못해 민심을 잃었다고 한다. 그래도 사실 이 시대의 인물들 중 최고의 인물 중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인물로 통솔력은 물론 정치 수완까지 겸비한 인물이다.

하지만 삼별초 토벌군의 지휘관을 맡았던 탓에 삼별초를 높이 평가하는 민족주의 역사가들에게는 몽골의 앞잡이라고 비난을 받고 있기도 하다.

참고로 진주 대첩의 영웅인 충무공 김시민이 김방경의 12대손이며 백범 김구가 25대손이다.

일본쪽 위키에는 원정 도중에 쿠빌라이가 금지한 양민학살을 여러차례 자행한 무법자로 기록되어있다. 일본 위키에서는 入對馬島、撃殺甚衆라는 고려사의 기록을 예로 들지만 여기서 衆은 백성 외에도 무리라고도 번역이 된다. 따라서 이 기록만 가지고 김방경이 양민학살을 저질렀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리고 팔만우동훈(八幡愚童訓)이라는 기록 역시 김방경이 양민학살을 했다고 하고는 있으나...기록의 신빙성이 의심된다. 팔만우동훈은 하치만신에 대해 가르치는 아이들용 교과서인데 출전부터가 불명인데다 실제로 거짓으로 판명된 일부 기록들도 있다. 가령 신공황후의 삼한정벌이 대표적이다. 저런 기록들은 실제로 저랬다기보다는 그냥 '옛날옛날에 무시무시한 마녀가 살았대.'라는 수준의 기록으로 봄이 타당하다.

9 관련 항목

  1. 당시 평균수명으로 치자면 고려인이 아니라도 전세계적으로 오래 살았다. 여담으로 중국 역사상 가장 오래산 왕이 청나라 건륭제(1711~1799)로 김방경과 같은 만 88살이라는 걸 생각해보자...
  2. 하지만 뛰는 이 위에 나는 이가 있는 격으로, 놀랍게도 김방경보다 더욱 장수하여 90대까지 산 이도 있고, 심지어 100살을 넘은 이도 엄연히 존재한다. 김방경보다 27세 연하인, 정승 최유엄(1239-1331)은 93세까지 살았고, 현종 4년 계축년 1013년 9월 경술일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보국대장군 송능과 표기대장군 유손은 태조를 섬겼던 무인으로 당시 나이가 100세에 달하여 대광의 품계를 받았다.
  3. 지금의 평안북도 안주에 있는 섬. 청천강 하구에 있다.
  4. 김방경의 시대로부터 약 300여년 뒤에 명량 해전이 일어나는 그곳이다.
  5. 김방경의 부장, 이후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때도 김방경의 부장으로 동참하였다
  6. 이때 김방경은 호두금패라는 물건을 하사받는데 이게 원나라 문무 2품이상이 차는 상징 아이템으로 고려인중에선 유일하게 받았다고 하며, 쿠빌라이 칸이 좋게 보았는지 생일잔치 당시 멸망한 남송의 황제보다도 높은 자리에 앉혔다고 한다.
  7. 셋 모두 김방경에게 원한이 있는 인물들이다. 위득유는 일본정벌때 자신의 주장(主將)인 김신이 물에 빠져 죽었는데 이를 두고 부장으로서 그를 구하지 않았다고 김방경이 책임을 물어 파면된 적이 있었고 노진의는 김방경과 함께 삼별초 토벌에 참가하였으나 전투에 집중하긴 커녕 약탈이나 저지르고 다니다가 김방경에 의해 약탈한 재산을 나라로 몰수당했다. 김복대는 자세한 내용은 나와있지 않으나, 하여튼 개인적인 원한이 있었다고 한다.
  8. 강화도를 지칭.
  9. 최항의 측근이었으며 김준을 도와 최의를 몰아내며 공신이 되었으나 이후 원종때 유배보내졌다. 삼별초의 난 때 강화도에 있다가 간신히 탈출하여 왕을 알현했고 이에 삼별초와 함께 모반을 할 줄 알았던 유경이 제발로 찾아오자 원종이 기뻐하며 그에게 다시 관직을 내렸다.
  10. 첨의중찬(僉議中贊) 고려의 관직 이름, 여기서는 김방경을 지칭한다.
  11. 이때 사망한 고려군이 3000여명에 달한다고 한다
  12. 애초에 참전하려고 했던 남송의 병력이 6개월이 지나도 참여하지 않았다
  13. 하지만 태풍으로 인해 남송의 10만 병력은 익사 크리(...)
  14. 여담으로 황희도 87세에 은퇴했다.
  15. 숭의전에 배향된 고려 인물 가운데 향년을 알 수 있는 이 가운데 두번째로 장수한 사람은 강감찬이다.
  16. 그런데 이거 충렬왕과 같다. 어?
  17. 저얼굴은 시나리오 3에서 등장하는 몽골 장수인 곽간의 얼굴로 쓰인다.(...)
  18. 물론 보오르추도 마찬가지이지만, 보오르추는 김방경보다 능력치가 높아서....지못미 김방경
  19. TV 드라마로 제작된 풍림화산의 원작자로, 역사소설계의 거장 중 한명이다.
  20. 원제는 풍도風濤. 쿠빌라이가 고려에 내린 조서의 한 구절에서 따온 말로, 원래 구절은 '바람과 파도가 험하다는 걸 변명으로 삼지 마라'라는 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