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고려시대의 인물
崔沆, (1209 ~ 1257)
무신정권의 집권자 | ||||
최씨 정권 | ||||
6대 최우 | ← | 7대 최항 | → | 8대 최의 |
1.1 개요
초명은 최만전(崔萬全)으로 그의 어머니는 폐출 기생이었던 서련방이라는 여인으로 천민 출신이었다. 그가 정권을 잡기 이전에는 송광사의 승려 생활을 하면서 쌍봉사의 주지로 있었다.
자기 형인 최만종과 마찬가지로 송광사의 승려일 때 문도들을 모으거나 재산을 모으는데만 일삼아 많은 액수의 금, 비단과 50만 석에 해당하는 쌀을 모았다.
이 쌀들을 백성들에게 대여하면서 이자를 만들어 추수가 되면 독촉하여 백성들의 재산을 마구 걷어가 백성들은 낟알이 남지 않아 조세를 바치지 못할 정도였다.
이 때문에 그가 거느린 문도들은 몽골인들을 모방하여 서로를 관인이라 칭하였으며, 유부녀를 강간하거나 역마를 자신의 것처럼 타는 등 제멋대로 불법적인 행위를 하였는데 최만전과 그의 제자이었기 때문에 각처 부서에서는 감히 간섭하지 못했다고 한다.
1.2 후계자 지명
고종 35년인 1248년에 환속하면서 환속한 이후부터 좌우위상호군, 호부상서 등을 거쳐 추밀원지주사 등의 벼슬을 하게 된다.
원래는 정권을 이어받을 후계자가 자신이 아니라 아버지인 최우의 사위였던 김약선으로 지목되었지만[1] 최항의 음모로 김약선이 최우에게 숙청당하면서 후계자 자리를 차지하였다. 아버지인 최우가 대제 임익에게는 글, 시랑 권위에게 글을 가르치게 하여 이를 배웠으며, 아버지에게서 가병 500인을 받았다고 한다.
1.3 정권 계승
1249년 11월에 아버지인 최우가 사망하자 은청광록대부 추밀원부사 이병부상서 어사대부 태자빈객, 동, 서북면 병마사를 겸하는 교정별감이 되어 최씨 정권 3대 집권자가 되었으며, 아버지가 사망한지 이틀 만에 상복을 벗고 아버지의 첩과 간통을 한 패륜을 저질렀다.
민심을 얻기 위해 무당들을 성 밖으로 내쫒거나 각 지방의 특산물을 바치는 것과 선박세를 면제하고 가렴주구를 일삼는 교정별감의 수획원을 소환하면서 안찰사에게 그 임무를 맡겼으며, 선지사용별감으로 임명한 나득황, 하공서, 이경, 최보후 등이 백성들을 착취하자 이들을 파직했다.
그러나 수 년 후에 이들을 임용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분개하였다고 하며, 또한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사택의 확장 공사를 하는 등 점차 사치와 향락에 빠져서 민심을 잃는다.
1.4 반대파 숙청
고종의 명으로 재상에 임명받으면서 이미 사망한 그의 어머니는 정안 택주에 봉해졌으며, 이후 고종이 최우의 식읍이었던 진주의 녹전세포, 요역, 공납 등을 바치려고 하자 이를 사양하였다. 장봉택에 군사를 거느리고 견자산 진양부로 옮겨 간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였다고 한다. 이전에 대경 최온의 딸에게 장가를 들었다가 병이 있었기 때문에 이를 버렸다.
대경 최온의 딸 대신에 좌승선 조계순의 딸에게 장가를 들자 고종이 견룡, 중금도지, 순검백감, 내시, 다방 등에게 최항을 호위하도록 명하면서 어좌의 견여, 등불 뿐만 아니라 황금경렴, 장구 등을 하사하자 여러 왕족들과 신하들도 금을 바치면서 축하하였다. 또 최충헌의 초상화, 최우의 초상화를 각각 창복사와 선원사에 옮겼을 때 참상별감, 참외별감 및 문관, 무관 등 각 20명이 인도하여 따랐는데 태조(왕건)의 초상화를 옮기는 의식과 같았다고 할 정도였다.
본래 중이었을 때 보주부사 조염우, 도강감무 박장원 등에게 원한이 있어서 이들을 섬으로 귀양보냈으며, 평소에 이 두 사람과 친하게 지내던 시어사 이선이 경상도 안찰사에 임명되자 이 두 사람을 불러 잔치를 하여 현령 권신유도 이에 참여하였다. 그런데 어떤 중이 이선이 권신유와 더불어 조염우 등을 불러 반란을 모의한다고 하자 이들 4인을 강에 던져 죽였다.
1250년에 정적인 송국첨을 우산기상시로 삼았으며, 평소에 마찰을 빚던 김지대를 죽이려고 했지만 죽이지 못하였다. 강화도 중성을 쌓은 공으로 고종이 문하시중에 임명하면서 진양후에 봉하려고 하자 이를 사양하면서 받지 않았다.
달이 방에 상상을 범하면서 사천대에서 점서에 따르면 임금에게 걱정이 있어 상상이 베임을 당하면 난신이 그 임금을 대신한다고 말하였다. 이 때 고종이 몽골의 사신을 맞이하기 위해 제포궁에 행차하려고 하자 사천대에서 왕에게 마음을 가다듬어 반성하고 행차하는 것을 정지시키려고 하자 어사대를 통해 사천대에서 별의 변화를 함부로 아뢰었다는 이유로 이들을 탄핵하여 판대사 최윤단, 태사승 오안구 등을 파면시켰다.
1251년에 계모인 대씨가 김약선의 아들이자 자신에게 반기를 들었던 김미를 돕자 이를 원망하여 대씨의 작호인 택주를 빼앗으면서 그 재산을 몰수하였다. 야별초 황보준창을 시켜서 대씨의 전 남편의 아들인 의붓동생 오승적을 바다에 던져 죽이려했지만 살아남아서 오승적이 금강산에 들어가 숨었다가 어머니에게 그 편지를 보냈다.
그런데 집의 노비가 밀성에서 이를 누설하면서 부사 이서에게 이를 보고받자 오승적을 잡아 강에 던져 죽이고 황보준창 등 6인을 처형시켰으며, 대씨를 해도로 귀양보냈다가 후에 독살하였다. 또한 대씨의 족당, 여러 노비 등 70여인을 죽이거나 귀양보냈다.
또한 지추밀 민희, 추밀원부사 김경손[2] 등이 민심을 얻자 이를 시기했는데 이들을 해도로 귀양을 보냈고, 김경손은 후에 장군 송길유를 보내 배소의 바닷물에 빠뜨리는 방법으로 처형시켰다. 그 밖에도 좌승선 최훤, 장군 김안, 지유 정홍유, 최항의 시첩 13인을 귀양보냈으며, 남도로 귀양보낸 자들 중에 참지정사 정안 등 대다수를 물에 빠뜨려 살해했다.
최우의 남동서이자 전(前) 추밀원부사인 주숙이 일찍이 자기에게 붙었기 때문에 대우를 후하게 하면서 자문을 구하였는데 견자산으로 집을 이사하면서 주숙에게 이를 알지 못한 일로 서로 의심하면서 싫어하게 되었다. 낭장 임경을 보내 주숙을 섬으로 귀양을 보내던 와중에 웅천에서 물에 빠뜨려 살해했다.
주숙이 귀양지에서 죽기 전에 장군 김효정이 왕에게 정권을 회복시켜 주고자 모의했다고 하자 김효정도 똑같이 귀양보냈다가 죽이고, 주숙의 사위인 장군 최종필, 나주부사 이윤 등을 귀양보냈으며, 고종이 후에 봉하자 이를 사양하였다.
1.5 몽골 침입과 항전
자신의 반대파들을 숙청하던 1251년에 몽골에서는 몽케 칸이 출륙 및 개경 환도와 국왕의 입조를 요구하자 1252년에 이현을 몽골로 보내면서 그에게 금년 6월에 출륙하겠다고 얘기하도록 지시하였다. 이현이 몽골에 이르면서 몽케 칸에게 최항이 지시한 바에 따라 대답하였으며, 몽골에서 출륙을 확인하기 위해 이현을 몽골에 머물도록 하면서 도케, 아투 등을 보내 고종이 육지에서 나오지 않으면 돌아오는 대로 군사를 보내겠다고 얘기한다.
몽골에서 국왕의 출륙을 요구해오자 응하는 척 하면서 승천부에 새로운 궁궐을 짓고 도케 등을 따라온 이현의 서장관인 장일이 이를 고종에게 비밀리 알리면서 고종이 이를 묻자 강 밖으로 나가면 안된다면서 몽골 사신 접견을 반대하자 공경들 모두가 최항의 뜻에 맞추었다. 고종이 이를 따라서 신안공 왕전을 육지로 나가게 했으며, 이에 도케 등이 왕이 명을 듣지 않았다고 노하여 몽골로 돌아갔다.
1253년에 고종이 문하시중 판리부 어사대사에 임명하자 이를 사양하였으며, 고종이 후로 봉하였다. 구요당을 대궐 서쪽에 지어 완성하자 고종이 이를 관람하였는데 친시 20인, 구사 20인, 진배파령 20인 등에게 처음으로 벼슬을 주었으며, 또한 감독관인 상장군 박성재의 아들 1인에게 진배파령을 허락하면서 공장들도 차등에 따라 상을 주었다.
이 때 천도하면서 몽골이 출륙을 독촉하면서 예케, 아무칸 등이 홍복원을 대동한 몽골군이 제5차 침입을 하면서 가는 곳마다 잿더미가 되었으며, 영령군 왕준과 이현 등이 몽골의 황제가 노하여 출륙 요구를 하는 서신을 보낸다. 이에 대부분이 태자 또는 안경공을 보내어 출영하자는 의견을 내세우자 출영하면 태자나 안경공을 잡아서 항복을 요구할 것이라 설득하여 출영하자는 의견을 중지하도록 하였으며, 충주성 전투에서의 몽골군의 패배, 예케의 병으로 인한 철수로 몽골군이 불리하면서 안경공 창을 인질로 보내어 몽골군이 철수하게 된다.
1254년 음력 7월에 자랄타이가 이끄는 제6차 침입을 개시하여 몽골군이 침공한다는 북계병마사의 보고를 받자 전국에 계엄령을 내리고 5도 안찰사, 3도 순문사에게 지시하여 각 지방의 백성들을 독촉하여 산성이나 해도로 들어가게 하였다. 몽골군은 계속 남진을 하면서 고종의 출륙과 항복을 요구하였으며, 이에 회의에서는 태자나 안경공을 보내자는 의견이 다시 나왔지만 실권자였던 자신이 이를 반대하고 계속 사신을 보냈다.
이 때문에 몽골군에게 철수를 하면 요구를 들어주겠다고 하였으며, 몽골군에서는 자신들의 요구를 실행해야 철수하겠다는 등의 외교적인 마찰이 계속 되었다. 그러는 와중에 크나큰 피해를 입었음에도 충주성, 상주산성의 승리로 강화를 체결하게 되는데 이 해에 몽골에 항복한 수령을 처벌하고 이현을 처형한 걸 구실로 삼아 다시 출륙을 요구하자 자신을 비롯한 이응렬, 주영규, 유경 등은 이를 가지 않고 오로지 국왕인 고종만이 출륙하게 된다.
이렇게 몽골군이 출륙을 요구하면서 침입하는 와중에 집에서 잔치하여 재상과 추밀원이 격구를 관람하였으며, 왕족, 재상과 추밀원, 승선, 문무 4품 이상 등을 대접하였으며, 1255년에 고종이 식읍을 더 봉하면서 박성재 이하 공장에 이르기까지 상을 내리자 이를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이후 중서령 감수국사에 올랐으며, 신급제 곽왕부 등이 자신을 만나자 누각에 올라가 그에게 화주를 주었다.
그러나 1255년에 자랄타이를 대장으로 하여 부장인 예수타이, 보포타이와 홍복원, 영녕공 왕준을 대동하여 제7차 침입을 하여 여러 곳을 공격하였으나 몽골에 갔던 김수강이 몽골군이 철수하면 출륙환도와 국왕의 입조를 한다는 조건으로 몽케 칸을 설득하여 이 해에 몽골군이 철수하였다.
1.6 말년과 최후
몽골군이 철수한 1256년에 고종이 제중 강민 공신호를 하사하였으며, 전(前) 서해도 소복 별감인 송극현에게 낭실 309곡을 뇌물로 받자 송극현을 어사로 임명하면서 사람들이 이를 낭실어사라 불렀다. 전(前) 학록 정성이 하동 감무 노성이 향인 이규, 이창과 혀제를 맺으면서 부사 설인검, 남해 현령 정고, 급제 유여해, 중 명취 등을 불러모아 국정을 비방한다고 말하자 노성, 이규, 이창 등을 참수하고, 설인검, 정도 등을 해도에 유배하였는데 사람들이 정성을 식인자라 하였다.
1257년에 중서령감사국사의 벼슬을 지내다가 병이 위독하여 고종이 그를 위해 감옥의 죄수들을 석방하였으며, 병든 몸을 부축하여 후원 소정에 올라 사세구를 지은 후 침석에 돌아와서 사망하였다. 향년 49세였고 사후에 진평공에 추증되었다. 본처에게는 후사가 없었기 때문에 처음에 중이 되면서 송서의 여노에게 사통하여 낳은 최의를 후사로 삼았다.
1.7 사후
강화도 진강산 일대에 안장되었으나, 김준이 무오정변을 일으켜 최의를 살해한 후 공신전 회수를 비롯한 재산 전체가 몰수되었다. 그의 무덤은 발견되지 않았으나, 강화도에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1963년 도굴꾼에 의해 도굴되어 부장품으로 나온 고려청자가 일본으로 반출되었다. 다행히 경매를 통해 다시 돌아왔으며 이것이 국보 제133호 '청자진사연화문표형주자'이다.
1.8 여담
죽기 직전 남긴 사세구를 보면 아비인 최우를 닯아서인지 글을 꽤나 잘 쓴 인물임을 알 수 있다.
복사꽃 향기는 수천 집을 감쌌는데
비단 휘장 향취는 십 리에 빗겼구나.
난데없는 미친 바람 좋은 자리에 불어와
붉은 꽃잎 마구 몰아 긴 강을 지나가네.
1.9 평가
그의 정권은 집권 초기부터 불안정할 수 밖에 없었는데 그가 승려 생활 때 했던 불법행위들로 인해 관리들로부터 그의 자질이 의심을 받았으며 또한 앞서 후계자로 지목되었던 최우의 사위인 김약선은 신종 대에 문하시랑평장사을 하던 김봉모의 손자이면서 평장사 김태서의 아들이 었던 것에 비하면 그는 어머니가 천민 출신이라는 점이 작용했다.
이는 고려 신분사회의 한계를 드러낸 것이었으며 또한 이러한 점들 때문에 그는 정권을 계승했음에도 불구하고 최씨 정권의 내부 인물들의 반발을 살 수 밖에 없었으며, 정적인 송국첨을 우산기상시로 삼거나 1251년에는 내부 반대파들을 제거하였는데 이 때문에 세력이 약화되어 최의가 뒤를 잇지만 곧 암살당하여 최씨 정권은 막을 내린다.
사실 최항의 집권은 집권과정부터 꽤나 진통이 심했다. 아버지인 최우의 경우에도 동생인 최향과의 권력투쟁이 있었지만 최항의 경우에는 이보다 더 심한 권력투쟁을 겪었다.
최충헌, 최우 시대의 문제점들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상황이었고, [3] 최우 권력승계의 강력한 라이벌이었던 김약선은 제거하는데 성공했다. 후에 김약선의 아들인 김미가 최항을 제거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전 추밀원부사 주숙도 최우가 사망하자 왕정복고를 노리며 거병했으나 역시 실패하고 살해당했다.
문제는 최항이 자신의 권력독점을 위해 제거해야만 했던 이들이 모두 최우 정권의 기반들이었다는 점으로 이들의 제거는 최씨정권의 분열을 의미하였다. 실제로 최항의 권력은 아버지인 최우에 비해 매우 약화된 상태였다. 최우에게 힘을 실어준 여몽전쟁도 전쟁이 매우 장기화 되면서 고려의 피해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자 몽골과의 강화를 통해 전쟁을 끝내자는 여론이 일고 있는 상황이었다.
전쟁이 장기화 되면서 몽골에 항복하는 고려인들이 매우 늘어났는데 지방관들을 살해하고 몽골에 투항하는 사례가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는 때가 이 때부터 시작되었으며, 집권 8년 만에 사망해서 나타나지 않았지만 사실상 최씨정권 붕괴를 예고하는 시대였다.
1.10 관련매체에서의 모습
드라마 무신(드라마)에서는 배우 백도빈[4]이 생양아치로 열연하며 역사 고증에 상당히 충실한 연기(…)를 보여주고 있다. 주인공 김준의 첫사랑인 월아를 노렸지만 최항이 권좌에 오르는데 김준의 도움이 컸다는 것을 감안하면 갈 데까지 가진 않았으며[5] 사실 최항은 잠시 월아에게 관심을 가졌지만 곧 포기했고 최항의 형 만종이 계속해서 월아에게 집적대고 있었으며 결국 춘심의 꼬드김으로 일을 저지르자 월아가 그 충격으로 죽게 되면서 사건과 관련되어 처형 직전까지 가지만 일부 가담자들만 처형되며 중이 되어 쫓겨 난다.그럼 자기 첫사랑을 강간하고 죽게 만든 놈의 동생을 돕는 드라마 주인공?
하지만 10년이 지난 후에도 별 달라진 것 없이 고리대금업으로 평민들을 쥐어짜내고 있었으며 이후 최우의 명령을 받은 김경손에 의해 부하들은 죄다 처형당하고 또 다시 다른 절로 보내지지만 이때 김경손에게 나중에 반드시 죽여주겠다고 저주를 남기는데 물론 실제 역사에서도 나중에 진짜로 제거해 버리며 후계자 논의에 고심한 최우의 밀지를 받은 김준을 만나서 위장된 모습으로 평민들에게 빼앗은 쌀을 공짜로 나누어 주어 생색 내더니 다시 고려 조정으로 돌아갈 의지를 품어서 강화도로 돌아와 힘을 키우며 최양백을 자신의 수하로 끌어들여 반대파를 없앨 기회를 찾는다.
그리고 최우가 죽고 정권을 이어 받은 직후 이틀 만에 상복을 벗고 놀자판을 벌이는 막장 연기를 역사 기록에 매우 충실하게 재연(…)한다. 그리고 광기 어린 숙청극 또한 매우 충실하게 재연하고 있다. 양아치 도령에서 광기의 폭군으로 진화한 모습을 소화하는 백도빈의 호연이 일품. 다음엔 누굴죽일까…♥
하지만 김준의 최항 죽이기 프로젝트에 말려들어 결국 독약이 든 음식(전)을 먹다가 배를 쥐어짜며 멀쩡했다 아팠다 하는 고통의 병을 호소하다가 결국 천민 출신인 아들 최의에게 그 대를 잇게 하며 사망했다. 숨을 거두기 직전 자신이 저지른 짓을 반성하며 참회의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마지막에는 김준이 보고 싶다고 말했지만 [6] 보지도 못하고 죽다니. 게다가 김준이 그 일을 저지를 거라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지만 보고 싶다고 했다.
2 조선시대의 인물
- 최항(조선) 문서 참고.
3 야구선수
- 최항(야구선수) 문서 참고.
- ↑ 고려시대 당시에는 원칙적으로는 남자 후손이 대를 이어야 하지만 최항은 어머니가 천민인 폐출 기생으로써 그의 신분 자체가 서얼이었기 때문에 사위인 김약선이 후계자로 지목된 것이다.
- ↑ 여몽전쟁의 영웅이었지만 김약선의 동생이자 오승적의 사돈이라는 이유로 죽임을 당하였다.
- ↑ 교정도감 개설로 인한 국정 운영의 혼잡함과 삼별초의 정예화로 인한 고려군의 질적 하락, 게다가 최씨 정권 구성원들의 부정부패까지
- ↑ 아버지는 중견배우 백윤식이다. 그리고 아내는 탤런트 정시아, 심지어 동생 백서빈도 배우다.
- ↑ 명색이 드라마 주인공이 자기 첫사랑을 강간한 놈을 도울 리가 있었겠는가?
- ↑ 참고로 이렇게 만든 원인이 김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