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령도

서해 5도
백령도대청도소청도연평도우도

1 개요

  • 백령면 진촌리 선착장 근처에 발달한 동네다. 진촌1~7리까지 일개 섬마을 읍내치곤 꽤 큰편이다.

백령면사무소부터 상업시설과 의료시설[1] 금융시설과 하나로마트[2]등 있을건 다 있다. 이 작은 동네에 마을버스택시도 자주 다닌다.

즉 황해도 소속이었다가, 경기도 소속으로, 지금은 인천광역시 소속으로 바뀌었다.

2 역사

백령도에서도 선사시대부터 농경과 어로를 하며 사람이 살았다. 한사군의 일부였다가 고구려에 편입된 이후 곡도(鵠島, 따오기섬)라 불리었고(고려사), 고구려 멸망 후에는 신라의 영토인 한주 장구진이 되었다가 고려 태조 때 백령진이 되어 '백령'이라는 이름을 얻었다(해주 소속). 유금필이 잠시 유배되기도 하였다.

현종 9년(1018년)에는 을 설치하고 진장을 두었으나, 고려 말기 왜구의 침략이 심해지자 폐쇄되어 주민들은 육지로 이주되어야 했다. 고려 고종 때 백령진장 이세화에 의해 최초로 유교가 들어와 향교가 세워지고 과거 응시자를 배출했다고 한다. 최충헌이 박진재를 유배보냈고, 또 김경손의 유배지인데 나오지 못하고 죽었다고 하니 백령도는 당시 한번 들어가면 나올 수 없었던 최악의 귀양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개국 후에는 세종대왕 때 잠시 수군진(영강진과 통합하여 강령진, 이후 강령현으로 해주 목사 관할)이 생겼으나 이후 다시 폐지, 광해군 때야 본격적으로 백령진이 제 구실을 하기 시작했다(지금의 진촌리 소재). 조선 중후기 백령도는 황해우도 옹진의 병마절도사 휘하로 있었으며, 백령진에 파견된 백령 진장(첨사)은 수군첨절제사(정3품, 당상관)를 겸하며 수령이자 군사령관으로서 즉결심판권 까지 있었다. 첨사는 부장까지 두고 항상 군관 5인의 호위를 받았으니 백령진장은 가히 백령도의 군주였던 셈이다. #[3]

고종갑오개혁으로 진제가 폐지되고, 23부제에서 해주부에 속했으며, 이때 귀양온 반정부 인사들이 개신교를 전파한 게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중화동 교회의 시작이다(1898년 건립, 한국의 두번째 장로교회).

광복 이전까지 황해도 장연군 백령면이었다가, 광복 직후 38선으로 분단될 때 장연군 본토가 북한 관할이 되면서 경기도 옹진군으로 편입되었고, 한국 전쟁 이후 옹진반도마저 빼앗기면서 경기도에 소속한 이름뿐인 옹진군의 소속이 되었다. 남쪽의 대청도소청도가 같은 면에 속하였으나 1974년 대청면으로 분리되었다. 1995년 3월 1일부로 인천광역시로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2.1 야사와 역사적 인연

삼국유사 진성여왕 때의 "활을 잘 쏘는 거타지"로 알려진 설화가 백령도를 배경으로 한다. 역사적 배경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며 후백제 해적을 막으려고 거타지를 함께 태웠다는 것인데, 풍랑으로 점괘에 따라 홀로 남겨져 신선의 딸을 넘보는 늙은 으로 둔갑한 여우를 퇴치하고 신선의 대접을 받으며 신선의 딸을 아내로 얻고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다. 후삼국시대인데 행복하게 살 수 있었을까만은 그런 건 차치하자 심청전의 배경 무대로 이 섬과 황해도 본토 사이의 바다 일대를 인당수라고 불렀다고 하며 심청각이 이 섬에 존재한다. 때문에 심청전의 원본이 거타지 설화였을 것이란 추측도 존재한다.

광해군 때부터 귀양지로 종종 사용되었으며, 조식의 제자인 이대기(李大期.1551-1628)는 귀양 와 <백령도지(白翎島誌)>를 지으며 백령도를 '늙은 신의 손 끝에서 나온 마지막 작품'이라고 평했다. 1802년 간행된 <백령진지>는 두무진이 "해로의 지름길이요. 배 대기 편리하여 해적의 출입하는 문지방"이라고 표현했다.

3 지리

서울과의 거리는 직선거리 기준 210km이지만, 북한 평양과의 거리는 직선거리 기준 150km이며 장산곶에서는 직선거리 기준 15km밖에 되지 않는다. 또 중국 웨이하이와는 직선거리 기준 226km이고, 산동 반도 최동단에서는 직선거리 기준 180km, 압록강에서는 직선거리 기준 215km 정도 된다. 참고로 인천 연안부두까지의 항로 거리는 직선거리 기준 220km. 당연히 미국유엔의 대 공산권 거점으로 중요했으며, 지금도 대북 최전선 군사거점으로 대한민국 해병대 제6해병여단이 주둔하고 있다. 중국 화북지역과 해외를 오가는 항로상에 버젓이 있기에 중국 입장에서도 피할 수 없는 섬.

백령도 서북단 항포구인 두무진의 경도는 남한 최서단 지점이다. 섬 전체 면적은 50㎢로 과거에는 46㎢ 정도였으나 90년대 초반 사곶과 콩돌해안 사이를 막고 간척과 더불어 내해를 담수화하여 면적이 넓어졌다. 면적으로 남한의 섬 중 8위에 들며(간척 전에는 12위) 옹진군 관내 섬 중 최대 크기를 자랑한다. 참고로 울릉도가 72.89k㎡ 정도이니 울릉도의 2/3 정도 면적이 되는 셈.

전체적으로 섬이 평탄하고 최고 지점이 200m도 되지 않는 등 고산 지대가 없다. 도서 지역이나 위도가 높고 대륙에 가까운 관계로 대륙성 기후와 해양성 기후의 단점만을 고루 갖춰(…) 황해도 타지역과 비슷하게 연교차가 심하면서 안개나 해풍도 모질다. 해무가 연중 3분에 1을 차지할 정도로 심하다. 물안개로 배가 못뜨는 상황이 잦으니 유의. 게다가 대륙황사의 제 1저지선이기 때문에 황사로 인한 피해가 전국에서 가장 심하다. 그나마 위도가 높아 이 섬까지 오는 태풍이 드물어서 태풍의 영향은 거의 없다.

천연 활주로가 있다. 사곶해안으로 불리우며 전투기가 내려앉아도 모래가 아스팔트처럼 유지된다. 옛날에는 수송기가 이착륙을 주기적으로 했지만 담수화 과정으로 면적을 넓히며 모래 지반이 많이 약해져 지금은 관리만 되는중. 하지만 비상시에는 얼마든지 활주로로 이용이 가능한 백령도의 명물 중 하나다. 실제로 RKSE라는 ICAO 공항코드까지 부여받았다.참조

4 인문

인구는 5000여명 정도로 주민의 대부분은 1차 산업(농어업)에 의존한다. 그러나 옹진군 관내의 다른 섬들의 주민이 어업에 강하게 의존하는 반면 백령 주민들의 어업 종사 비율은 10% 남짓으로 어업의 의존도가 낮다. 원래는 홍어잡이나 전복, 해삼 등으로 제주도 해녀까지 부를 지경이었으나 1980년대를 피크로 남획으로 인해 어업량이 극감하였다. 그 대신 평지가 많고 농업수의 공급이 풍부하기 때문에 농축산업이 상당히 활발하며 본토의 지원 없이도 농산물의 자급이 가능한 수준. 해병대원 수가 주민만큼 되는데 백령도내 해병대에서는 백령도의 농산물을 우선적으로 수매한다. 쌀은 거의 밖에서 들여오지 않고도 군인들까지 먹을 만큼 생산된다.

다만 상기한 군사적 문제로 인하여 이 곳의 민간인들은 군의 통제를 많이 받는다.

5 교통

섬의 면적이 크기 때문에 버스택시가 운행하며, 섬 밖으로 가는 교통은 여객선. 여객선의 경우 기상 상황에 따라 운항 여부에 변동이 있을 수 있으니 인천항 운항정보를 참고하는 것이 좋다. 풍랑이나 시정주의보 같은 기상특보가 잦아 1주일에 하루 정도는 결항된다고 봐야 한다.[4][5] 이런 문제로 인해 용기포 여객선 터미널 인근에 3,000톤급 선박이 드나들 수 있는 신항만이 구축되었고 현재 대형 카 페리가 취항해서 웬만한 악천후에도 배가 오고갈 수 있지만 여전히 기상이 많이 좋지 않으면 카 페리마저 결항되고 있다.

도로 사정은 나쁘지 않은 편으로 90년대 말의 방조제 건설로 섬의 일주가 가능해졌다. 그러나 해안가는 군사지역으로 통제되는 곳이 많아 아직까지는 내륙 순환에 그치는 수준. 서해 5도에서 사실상 유일하게 택시가 운행하는 섬으로 도서 지역 특유의 험준한 지리적 특성 때문에 일반 승용차량 대신 SUV 차량으로 운영된다. 또한 2016년까지만 해도 군사적인 이유로 GPS 수신이 되지 않았으나 현재는 섬 내 공사로 인해 일시 허용된 상태.

2016년 4월 21일, 백령도에 공항을 세운다고 결정이 났다!

여담으로 대형버스가 무리없이 다닐 수 있다! 전체적으로 지형이 험하지 않아서 그런듯하다. [6] 몇 년 전 백령도를 방문했을때는 BH116이 다녔는데 지금은 어떤지 백령도 주민 혹은 최근에 방문한 사람이 추가바람

6 통신

지역번호는 인천광역시 고유번호인 032번. 인천 본토와 강화군, 경기도 부천시와 같은 번호이다. 오래전부터 광케이블 공사를 벌여놓은 KT가 공사를 마무리해놓고 2015년 초고속 인터넷이 지원된다. 기가인터넷 여부는 좀더 기다려 봐야 한다. 그 전의 ADSL은 매우 느렸다.

7 의료상황

주요 의료 시설로 백령병원, 백령보건지소, 제6해병여단 의무중대가 있다.
1960년에 지어진 낡은 건물에서 업무를 보던 백령병원이 30병상 급으로 2014년 신축하여 운영중이다. 그러나 도서지역의 특성상 업무환경이 열악하여 페이닥터를 구하기 힘들기 때문에 공중보건의가 배치되어 진료를 한다. 특히 일반외과 및 정형외과 전문의는 대부분사실상 100% 군의관으로 차출되는 탓에 외과의사가 크게 부족하여 수술실은 있어도 실제로 수술이 이뤄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따라서 수술이 필요한 응급 환자가 생길 경우 119구조헬기를 통해 육지의 인하대병원, 길병원 등의 병원으로 후송하여 치료한다. 안과나 이비인후과 등 공보의가 배치되지 않은 진료과는 차로 5~10분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는 대한민국 해병대 제6해병여단 의무중대로 의뢰하여 치료한다[7]. 2015년 12월부터 CT를 도입하여 운영중이다. 기존에는 의무중대까지 후송하여 촬영했기 때문에 위급한 상황에는 CT를 찍기 힘들었다. 또한 MRI가 없기 때문에 MRI 촬영을 위해서는 육지로 나가야 한다.의료기기의 특성상 초기도입 비용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8]
군 관련 응급사고일 경우, 해병대 의무중대에서 대처가 불가능할 경우 군용 헬기가 환자를 국군수도병원까지 이송한다.

8 각종 트리비아

  • 복불복의 주요 아이템으로 우려먹는 까나리액젓이 바로 이 섬에서 나오는 백령도 특산품이다.
  • 한국의 도서 중 몇 안되는 자급자족이 가능한 섬으로, 상상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들을 본토 공수 없이 자체 생산한다. 특히, 농업이 가능하여 과 같은 식량의 경우 3년간 자급자족이 가능하다. 이 섬에서 본토 수급이 필요한 것들은 군인이나 경찰과 같은 제복 근무자, 의사양반,[9] (군 가족의 경우, 간단한 치료는 군부대 내의 의무실에서 치료받기도 한다..) 공산품이나 차량, 전자제품 같은 공장제 물건 정도이다.
  • 위에서 서술했듯이 황사와 해풍의 영향을 매우 심하게 받기 때문에, 각종 관광안내처에서는 백령도로 관광을 오고자 하는 이들에게 본토에서 차를 가지고 들어가기보다는 렌터카를 이용하기를 권하고 있다. 차량의 피로도가 쉽게 증가하고 차체도 쉽게 더러워지기 때문. 카페리가 2003년부터 중단되어 차를 가지고 갈 수가 없었으나 2012년 새로운 대형 카페리가 취항되어 현재는 차를 가지고 올 수 있다.
  • 감람암이나 규사 해변 등으로 인해 지질학적으로도 가치가 높고, 물범이나 가마우지, 저어새와 같은 동물들의 번식지이기 때문에 생태학적으로도 가치가 굉장히 높은 섬이기도 하다. 특히 사곶 해변은 항공기의 이착륙도 가능할 정도의 단단한 강도를 자랑하나, 사곶과 콩돌해안을 잇는 방조제의 건설 이후로는 해류의 변화로 강도가 약화되고 있다고 한다.
  • 전시 바로 지원을 하기가 매우 어려운 위치에 있기 때문에 장기간 자체 방어를 해야 하는 관계로 섬 자체가 요새화되어 있다. 북한이 유사시 투입 가능한 해상육전대 병력이 1차로만 1~2만에 달하는데 그걸 자력으로 방어해야 하기에 해병대만 해도 4,000여 명이 주둔하고 있는 상황.
  • 천주교의 영향이 매우 강하다. 1970년대 이후에는 개신교 신자의 수가 천주교 신자를 추월했지만 천주교 신부님들의 영향력은 백령도에서 면장 이상이라고 할 만큼 절대적이다. 그 이유는 1959년에 백령도에 미국인 선교사 '부(夫) 에드워드 신부'가 선교를 나왔기 때문이다. 그는 미국에서 소문난 부호의 아들이었고 존 F. 케네디 前 미국 대통령과 소꿉친구였다. 집안의 재산과 케네디 대통령과의 친분을 이용해서 백령도에 수많은 원조를 끌어올 수 있었고 전후 피폐했던 백령도와 대청도, 소청도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는데 일조를 하였다. 한 때 섬 전 주민의 95%바티칸인가?가 천주교 신자였었고, 현재도 전 주민의 30%가 천주교 신자이다. 물론 현재 개신교 신자가 급증하면서 영향력이 그 때보다는 많이 줄기는 했으나 현재도 특이하게 주민들은 지역유지에 백령성당 주임신부, 해병 6여단의 군종신부를 꼭 집어넣는다. 이는 아직까지도 영향력이 상당하다는 뜻이다. 천주교와 개신교의 성공적인 선교 때문에 섬 전통의 무속신앙은 거의 절멸한 상태이다.[10][11] 인접 연평도와는 많이 다르다고 할 수 있겠다.
  • 백령도에서 근무하는 해병제6여단 장병 중 집이 울산, 부산인 경우 상륙 한 번 가는 데만 최소 10만 원(!!!)이 든다고 한다. 백령도에서 인천까지 가는 뱃삯이 5만 원이 넘고 인천에서 서울로 이동할 때 2,500~3,000원, 그리고 서울역에서 울산/부산까지 가는 KTX 요금이 5만 원이 넘으니 상륙 1회당 최소 10만 원, 왕복으로는 20만 원이 드는 셈. 전라도에 거주하는 해병대 6여단 장병들도 역시 비슷한 사정을 겪고 있는데 이들은 서울역이 아닌 용산역에서 KTX를 타는 탓에 부산/경남권 거주자보다는 돈이 덜 드는 편.
  • 잘 알려지지도 않고 관심도 못받는 사실이지만 공군 부대가 2개나 있다.
  1. 백령병원
  2. 농협, 신협, 새마을금고
  3. 사정은 현재도 마찬가지이다. 해병 6여단 병력이 백령도 주민을 먹여살린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라서, 해병 6여단장의 입지가 가장 강하다. 면장님 지못미
  4. 여름에는 해무, 겨울엔 강한 바람 때문에 며칠씩 여객선이 운항하지 않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5. 배가 뜬다고 해도 안심하지말자. 파도가 높다면 헬게이트를 맛볼 수 있다.
  6. 울릉도는 지형때문에 대형버스가 못다니고 중형버스만 다닌다.
  7. 군인 가족이 아닌 경우 백령병원 의사의 진료의뢰서가 필요하다
  8. MRI는 응급 상황에 사용할 일이 거의 없는 고가의 의료 장비이다. 상주 인구가 만 명 정도밖에 안되는 섬에 도입할만한 장비가 아니다
  9. 외과수술을 할 수 있는 민간 의사는 아예 없어서, 민간인이 크게 다치면 무조건 인천으로 후송해야 한다.
  10. 사실 백령도의 원래 소속이었던 장연군도 개신교와 천주교세가 강한 지역이었다.
  11. 하지만 해병 6여단 신병들은, 귀신은 바다를 건널 수가 없는데 백령도에서는 귀신의 힘이 너무 세서(과거 섬 내 마을 간 극심한 좌우대립 등으로 죽은 사람이 많다) 무당들도 못 다스린다고 섬에 들어오지 않아서 무당이 없다는 말을, 부두에서 내린 직후부터 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