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탈리아 보디아노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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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나탈리아 보디아노바 (Natalia Vodianova)
본명나탈리아 미하일로브나 보디아노바
(Наталья Михайловна Водянова)
국적러시아
출생1982년 2월 28일, 소련 니즈니노브고로드
신체176cm, 52kg
BWH86–61–86
소속DNA 모델 매니지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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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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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대를 화려하게 장식한 러시아의 유명 슈퍼모델. 통칭 Supernova.

젬마 워드나 릴리 콜 등등 베이비페이스 모델들의 전성기 시대 직전, 베이비페이스의 매력에 패션계가 열광하게 만든 유명 모델이다. 보디아노바가 처음 등장했던 시기(2000년~2002년 초반 즈음.)는 사실 베이비페이스의 모델들의 활약이 두드러지는 시기는 아니었다.[1] 하지만 투명한 도자기같은 순수한 모습에 부러질 듯 가는 몸매의 보디아노바는 단번에 세계 패션계를 접수 한다. 그녀의 등장을 계기로 젬마 워드같은 베이비페이스 모델에 대한 에이전시의 발굴 욕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볼 수 있다.

신데렐라의 기회도 평소 마음씨가 고와야 하늘이 내려줌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 신데렐라의 기회도 평소 이뻐야 하늘이 내려줌을 보여주는 사례겠지.

2 데뷔 이전

모델로서의 성공이전의 생활은 가난하고 어려웠다. 본인 스스로도 한 인터뷰에서 어린시절은 진짜 힘들었다고 말한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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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와 아버지가 다른 두 여자형제와 빈민가에서 지냈으며, 형제 중 한명은 중증 뇌성마비를 앓고 있었다. 마땅한 직업도 기술도 없는 어머니[2]는 빈민가에서 과일을 팔면서 생계를 이어갔고, 보디아노바가 어머니를 도와 장사를 했는데 이 때 모델캐스팅 매니저에게 발탁된 것. 그것도 저녁에 장사가 끝나고 남은 과일이라도 팔아야 한다면서 보디아노바가 저녁 늦게 길거리에서 과일을 파는 도중에 이루어졌다.

3 데뷔 이후

15세에 러시아에서 모델로 일을 시작한 후 파리로 진출했고 불과 2년만에 세계적인 모델로 성장한다. 그러나 무명 시절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극적으로 상황이 바뀌게 된 것은 후에도 서술된 결혼과 첫 아들을 출산한 후였다. 출산 후 불과 몇 달만에 3대 도시 컬렉션에 등장했는데 당시 이브 생 로랑과 구찌라는 거대한 패션하우스의 수장이었던 톰 포드[3]가 보디아노바를 눈여겨보기 시작한 것. 그리고 그녀는 파리 컬렉션의 중요한 쇼 중 하나인 이브 생 로랑의 2002 F/W 컬렉션의 엔딩과 오프닝 모델로 세우면서 상황이 역전하기 시작한다.[4] 그리고 2003년 S/S 컬렉션 부터는 보디아노바가 정ㅋ벅ㅋ. 이러면서 패션계는 그녀에게 완전 열광하기 시작한다.[5]

하지만 보디아노바가 모델에만 그치지 않고 셀레브리티로서 더 이름을 알릴 수 있게된 계기는 2003년에서 2007년까지 유지된 캘빈 클라인과의 독점 계약일 것이다. 저 기간동안에는 다른 컬렉션과 광고는 일체 등장하지 않고 오로지 캘빈 클라인의 쇼와 전 라인의 광고에만 등장해야 한다는 것. 그래서 그녀가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리게 된 계기도 바로 저 캘빈 클라인 광고였다.[6][7]

캘빈 클라인과의 계약 종료 이후로도 간간히 친분이 있는 디자이너들의 쇼에 광고에 등장하면서 전성기만큼은 아니지만 간혹 활동을 하는 중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여배우들이 표지에 더 많이 등장하는 미국보그에서 모델로서 표지에 등장한 몇 안되는 모델이기도 하다.

4 사생활 관련

아버지는 보디아노바가 아기일 때 집을 나가버려 본적도 없었지만... 유명 모델로 성공하자 딸이 그리웠답시고 나타났다고 한다. 천하의 개쌍놈이 따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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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에 열아홉 살의 나이로 영국 귀족 가문의 자제인 13살 연상의 저스틴 포트만과 결혼하면서 패션계의 신데렐라가 현실에서도 신데렐라가 되었다고 화제를 모았다. 실상은 전업주부 남편 만난 것(...) 하지만 보디아노바의 결혼을 남자 하나 잘 만나서 팔자를 바꾼 것으로 보는 것은 그녀에 대한 모욕이다. 그 시점에서 보디아노바는 자신의 경력에서 세계적인 성공을 거둔 성공한 여성이었고, 어린 나이임에도 자신이 획득한 부와 명예를 흥청망청 놀자판에 퍼나르지 않고 각종 사회문제 캠페인에 힘쓰는 등 모범적인 셀레브리티로 인정받고 있었다. 특히 2005년부터는 러시아의 전역에 어린이 놀이터를 짓는 것을 목적으로 시작한 네이키드 하트를 설립, 단순한 셀레브리티 모델로만 머무르지 않고 있다.

결혼한 그 해에 부부는 첫 아들을 낳았고, 2005년에는 딸, 2007년에는 아들을 낳아 2남 1녀를 두었다. 출산 후 모델계에 복귀하려던 보디아노바는 임신 후 자기관리부족으로 살을 빨리 못 빼고 있다는 패션계의 뒷담화에 큰 충격을 받았고, 이로 인해 심각한 식이장애에 시달렸다고 한다.[8] 비만율은 점점 더 높아지고, 사람들의 체중 역시 점점 늘어나는데, 유명인들에게는 출산후 막바로 이전의 몸매로 돌아갈 것을 요구하는 아이러니한 세상 때문에 피해를 입은 셈.

하지만 이들 부부는 2011년에 10년간의 결혼 생활을 마무리하고 결국 이혼했다. 이것과 관련해서 여러 설들이 있는데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는 알아서 생각할 일이다. 그리고 이 결혼은 13세 연상의 서유럽 귀족 남성과 이제 막 10대를 지난 동유럽 빈민 출신 미인의 결혼인지라 신데렐라의 꿈이 이루어진 것 같이 생각되겠지만 실상은 반대다. 이미 엄청난 부와 명예를 얻은 나탈리아와 귀족 가문 이름만 물려 받은 무능하고 재산 없는 영국 남자의 결혼이었고, 결혼 후 생계는 전적으로 여자 몫이었다. 나탈리아의 첫번째 남편인 저스틴 포트만은 부동산 재벌인 9대 포트먼 자작의 아들에 현 포트먼 자작의 이복동생이다. 2006년 기준으로 이 가문의 재산은 12억파운드, 즉 한화 약 2조원 가량으로 나탈리아가 성공한 모델이긴 하지만 남편을 먹여살려야 했다는 건 말도 안된다. 지금이 중세시대도 아니고 가문의 재산이 단 한푼도 안 갔을 거라 믿는 사람이 있다면.. [9] 그래서 이혼 후에 세 아이의 양육권은 나탈리아에게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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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부터 LVMH사 CEO인 베르나르 아르노의 아들로 5살 연상인 앙투완 아르노와 결혼을 전제로 동거 중이다. 전남편 사이에서 태어난 2남 1녀도 나탈리아와 함께 거주지를 파리로 옮겨 어머니, 어머니의 약혼자인 아르노와 함께 살고 있다. 그리고 2014년 6월에 나탈리아는 아르노와의 사이에서 그녀에게는 넷째 아이이고, 아르노에게는 첫째 아이인 아들 맥심을 낳았다. 여담이지만 넷째 출산 이후 나탈리아를 하이디 클룸의 뒤를 잇는 "모델계 다산의 여왕"이라고 농담조로 언급하는 사람들도 종종 있다고(…)
2016년 5월 현재 다섯째 아이를 임신중이므로 하이디 클룸을 뛰어넘었다.

간혹 저 결혼 때문에 열폭하는 몇몇 기자들에게 안 좋은 대접을 받았다는 말도 있지만 보디아노바에 대한 업계의 평가는 좋은 편이다. 미국판 보그의 실력자들 중 한명인 그레이스 코딩턴도 그녀의 성격이 아주 좋다고 인증을 해줬을 정도.[10]

5 활동

  • 루이비통 : 2002 S/S, 2008 S/S, 2010 F/W
  • 샤넬 보떼 : 2008 S/S. 2008 F/W[11]
  • 겔랑 코스메틱 : 2009 S/S ~
  • 캘빈 클라인 전 라인[12] : 2004 S/S ~ 2007 F/W
  • 필로소피 디 알베르타 페레티
  • 마크 바이 마크 제이콥스
  • 스텔라 매카트니
  • 다이앤 폰 퍼스텐버그
  • DAVID YURMAN
  • 이브 생 로랑 리브 고쉬[13]
  • 지방시
  • 구찌
  • 피렐리 캘린더
  • Pet Shop Boys PV - I get Along[14]

6 기타

  • 국내에서는 미란다 커보다 인지도가 낮아서 그런지 몇몇 커뮤니티에서는[15] 미란다 커랑 자주 비교당한다. 오죽하면 그녀의 보그 화보를 보고 미란다 커냐고 질문한 사람도 있을 정도다. 이래저래 미란다 커가 여러 사람 잡는다(…) 그래서 이 업계가 돌아가는 것을 약간이라도 아는 사람들은 화낸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커는 전남편 올랜도 블룸 덕분에 빅토리아 시크릿 엔젤로서 주목받았지만 하이패션 쪽에서는 성공하지 못했으며 블룸과 이혼하기 전에 이미 매상 부진을 이유로 빅토리아 시크릿과 재계약이 결렬됐다. 블룸과 이혼이 발표된 후에는 이미지가 나빠져서 커머셜 쪽에서도 평판이 좋지 못하다. 하지만 보디아노바는 CK와의 독점 계약이 끝난 후에 기다렸다는 듯이 여러 유명 캠페인에 모습을 드러내며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이런 설명 다 필요 없고 그냥 밑에 나탈리아가 찍은 보그 표지 수만 봐도 얼마나 넘사벽인지 알 수 있다

7 커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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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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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 때는 케이트 모스뽕맞은 퇴폐적인 헤로인쉬크와 지젤 번천같은 글래머러스한 모델들이 공존하던 시기였다. 런웨이에서는 자퀘타 휠러, 카르멘 카스, 캐롤리나 쿠르코바, 브라질 출신의 캐롤라인 리베이로가 서로 각 컬렉션의 오프닝과 엔딩을 열심히 점령하고 있던 시기.
  2. 90년대 초중반 러시아의 상황은 사실 의사핵무기 기술자라도 해외로 가는 일 외엔 마땅한 생계대책이 없는 암울함 그 자체였다.
  3. 지금은 본인의 브랜드를 만들어서 열심히 활동 중이다. 특히 유명 남성 셀러브리티들이 그의 수트를 입고 각 행사에 등장할 정도로 인기 폭발이다.
  4. 파리 컬렉션 이전에 뉴욕밀라노 컬렉션에서도 각 도시의 유명한 쇼에 등장하면서 얼굴을 알리기 시작한 상황이었다.
  5. 어느 정도였나면 망해간다는 말이 나오고 있는 파리 쿠튀르 컬렉션에서도 칼 라거펠드샤넬 쿠튀르 컬렉션에서 엔딩 모델로 2시즌에 세웠을 정도였고, 2003년의 컬렉션의 엔딩과 오프닝도 거진 그녀가 정복했을 정도였다. 오죽하면 한 인터뷰에서 너무 많은 쇼에 등장해서 세어보지 않았다고 말했을 정도.
  6. 비록 광고는 좀 완성도면에서 평이 갈리기는 했지만 테리 리차드슨의 언더웨어 광고는 상당한 반향을 이끌어내냈다.
  7. 이 시기에 칼 라거펠드도 그녀를 샤넬 광고 모델로 결정하려 했으나 보디아노바가 선택한 것은 캘빈 클라인.
  8. 2002년 F/W 컬렉션 당시 보디아노바의 외모를 보면 심각하게 마른 체형이었다는 것이 보인다. 문제는 이 시기가 바로 그녀의 리즈 시기였다는 것. 175cm에 46kg까지 찍었다. 다시는 몸을 망가뜨리면서 까지 일하지 않겠다고 했고 어린 모델들의 강박적인 다이어트까지 걱정해줬다.
  9. 한때 왕세자빈이었던 다이애나 스펜서를 배출한 스펜서 백작 가문처럼 부와 명예를 모두 갖춘 귀족 집안도 있지만 가문 이름만 있는 귀족 집안도 많다. 일례로 타이타닉의 여주인공 로즈 드윗 부카터를 들 수 있다. 극중에서 로즈는 영국 귀족 집안의 딸이지만 아버지의 사치로 가산을 다 탕진해서 가문 이름밖에 남지 않은 상태라 어쩔 수 없이 미국 졸부 집안의 아들과 자기 의사와는 상관 없이 결혼할 처지에 처했었다.
  10. 물론 유명 후원자를 얻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만큼 이 바닥은 성격도 아주 중요하다.
  11. 메이크업 라인 한정
  12. 독점 계약 체제.
  13. 다만 이 때의 광고는 스테파노 필라티가 이브 생 로랑의 수석 디자이너로 있던 시기였다.
  14. 광고 촬영 중 남자 모델이 빵 먹었다고 노발대발했다는 포토그래퍼 브루스 웨버가 감독. 이 PV로 그녀를 알게된 사람들이 있을 정도로 전성기 시절 그녀의 매력이 두드러진 비디오다.
  15. 정확히 말하면 다음 '스타존'의 '할리우드스타' 게시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