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쿠가와 이에미츠

에도 막부 역대 쇼군 & 도쿠가와 씨 종가 역대 당주
2대 도쿠가와 히데타다3대 도쿠가와 이에미츠4대 도쿠가와 이에츠나
이름도쿠가와 이에미츠
德川家光 (とくがわいえみつ)
생몰년도1604년 8월 12일 ~ 1651년 6월 8일 (46세)
재임기간1623년 ~ 1651년

(풍채를 보면 아버지 히데타다보다는 할아버지 이에야스를 더 닮았다.)

1 개요 및 가족 관계

에도 막부의 제3대 쇼군. 2대 쇼군인 도쿠가와 히데타다오에요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 센히메는 그의 큰누이 스겐인의 어머니인 오이치는 외조모(外祖母), 아자이 나가마사에게는 외조부, 스겐인의 둘째언니 죠코인은 백모(伯母), 스겐인의 첫째 언니 요도도노에게는 이모다. 이복 누이는 사다코 이며 앞에서 이야기 했듯이 사다코는 도요토미 히데카츠의 장녀이지만 도요토미 멸망 이후 스겐인의 부탁을 받아 히데타다의 양녀가 되었다. 사다코는 공가(公家)인 쿠죠 가문에 시집 가므로 이에미츠는 쿠죠, 니죠, 덴노 가문에는 외숙이 된다. 게다가 에도 막부의 쇼군 15명 중에서 아버지의 '적자(첩의 소실이 아닌 정실 소생)'인 쇼군은 도쿠가와 이에야스, 이에미츠와 마지막 쇼군 요시노부 세 명인데 그나마 '쇼군의 적자'로써 쇼군직을 계승한 유일한 인물이다. 나중에 제도를 정비, 완성하고 이에미츠가 " "나는 날 때부터 쇼군이다!, 이에 반발하는 자는 ~" 자신감이 넘친 말이 나온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이다.

2 쇼군이 되기까지

히테타다의 적자이자 장남으로 유력한 후계자였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장자가 반드시 후계자가 되야 한다는 룰은 없어, 센고쿠 시대에는 여러 아들이 있으면 그 가운데 우수한 인물이 후계자가 되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그래서 이에미츠는 쇼군이 되기 까지 우여곡절을 겪어야했다.
어린 시절에는 병약하고 얼굴도 못생긴 데다가 말까지 더듬었다고 하는데 유모(乳母)인 카스가노 츠보네[1]한테 젖먹이일 때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보살핌을 받았다.
기록에는 어머니인 오에요가 차남인 쿠니마츠(도쿠가와 타다나가)를 더 총애해[2] 사랑을 별로 받지 못했고 후계자 자리마저 쿠니마츠가 될 뻔했지만,후계 자리에서 탈락해 폐적될 것을 우려한 카스가노 츠보네가 목숨을 걸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직접 이를 호소해서[3] 이에야스가 '장유유서'의 원칙을 명확히 해 후계자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고도 전한다.
이에야스는 이즈음 스루가의 슨푸 성에 거처하며 유학자들에게서 유학을 배우고 있었고, 손자간의 후계자 다툼은 나중에 도쿠가와 집안의 분란과 후환이 될 것을 염려해서 유학의 장유유서의 서열을 정착시키고자 장자인 이에미츠를 후계자로 정하기로 마음먹었다. 쇼군에서 물러나 오고쇼가 되어 아들 히데타다와는 2원정치를 하고 있었지만, 큰 정책은 이에야스가 결정하고 있었다.

실은 에도 막부의 가신들은 장남인 타케치요파와 차남인 쿠니마츠파로 갈라져서 후대의 쇼군이 누가되느냐로 분열 상태였다. 카스가노츠보네와 면담을 가진 뒤, 1611년 10월 24일, 할아버지 이에야스는 에도 성으로 찾아와서 아들인 히데타다가 지켜보는 앞에서 두 손자를 불러 이에미츠가 후계자라는 것을 확실시했다.
기록에 의하면, 타케치요(이에미츠의 아명)에게 이리로 이리로 오라고 상석으로 불러 앞으로 나와 앉으라고 하자, 쿠니마츠(타다나가의 아명)가 따라 앉으려고 하자 이에야스는 "쿠니는 거기 있거라."라고 하석에 앉게 했다. 또 두 아이에게 과자를 대접하면서, "먼저 타케치요가 먹어라, 쿠니마츠는 그 다음."이라고 말했다. 이로소 도쿠가와 가문의 후계자는 이에미츠이며 둘 사이에는 넘어서는 안되는 차이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에야스는 두 아이의 어머니인 오에요에게 편지를 보내 쿠니마츠만을 편애하는 것을 질책하기도 했다.[4][5]
여러 정황으로 볼 때 이에미츠가 후계자로 선택된 것은 아버지 히데타다보다 할아버지 이에야스의 의중이 결정적으로 작용한 것은 분명한 듯 하다.

3 쇼군으로서

어쨌든 여러 곡절 끝에 1623년 쇼군이 되었지만 아버지 히데타다는 오고쇼(大御所)가 되어 물러앉아 실권을 휘둘렀고 1632년 아버지가 죽자 실권을 되찾아 친정을 실시한다. 쇼군으로써의 업적은 주로 막부의 중앙집권을 강화하여 안정시키는 데 힘을 쏟았는데 다이묘의 처자를 에도에 살게 함으로써 다이묘가 1년마다 에도와 영지를 왕래하도록 하는 제도인 산킨코타이(參勤交代,참근교대제)[6]를 실시한 것도 이에미츠의 시대였으며, '무가제법도'를 개정하여 쇼군의 허락 없이는 다이묘 가문끼리의 결혼을 금하는 조항을 만들었다. 또한 덴노의 권한과 자유를 대폭 축소하여 막번 체제에 위협이 되는 요소를 완전히 제거하고자 노력했다. 결국 막부와 쇼군의 위세는 절정에 달해서 말년에 이에미츠는 다이묘들을 불러다 놓고 "나는 날 때부터 쇼군이다!"라는 선언을 하기에 이르렀다.

대외적으로는 다이묘의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제한하기 위해 쇄국 정책을 실시했으며 기독교 탄압을 더 강화했는데 이 때문에 1637년 '시마바라의 난'이라는 대규모 반란을 겪기도 했다.(사무라이 스피리츠에도 등장하는 아마쿠사 시로 도키사다가 이 반란과 관련되어 있다.) 다만 이 시기에 조선, 네덜란드와는 교역을 계속 했다.

이렇듯 에도 시대의 정치체제인 '막번 체제'를 완성하고 정권을 공고히 다진 후 1651년 에도에서 사망했다. 향년 48세. 그의 치세에 도쿠가와 막부의 일본 지배는 굳건히 다져졌기에 일반적으로는 막부의 지배를 안정시킨 명군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는 인물이지만, 다른 평가로는 '이에미츠 휘하의 유능한 가신들이 다한 일이고 이에미츠는 한 게 없다'는 비판도 있다.[7] 하지만 유능한 가신들을 활용하는 것도 당주의 역량 나름이었던 만큼 쇼군으로서의 능력은 확실했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치세는 조선의 인조(1623~1649), 효종(1649~1659) 재위기와 일치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원가광(源家光: 미나모토노 이에미츠)'이란 이름으로 나타나며[8], 인조 때 조선 통신사를 통해 조선에 외교 문서를 보낸 기록이 있다. 인조실록에서는 그를 '성격이 날카롭고 사람 죽이기를 좋아해서 많은 이들이 원망하며 괴로워했다.'고 소개하고 있다.

그가 죽은 후에는 장남 도쿠가와 이에츠나(재임 1651~1680)와 4남 도쿠가와 츠나요시가 각각 4,5대 쇼군을 역임했다.

4 인물됨과 일화

개인적으로 조선의 성종이나 숙종처럼 밤에 몰래 시장통에 나오는 미행을 좋아해서 이와 관련된 일화도 많이 남겼으며 무예와 풍류를 좋아했다고 전해진다.[9] 특히 당대의 유명한 검호인 야규 쥬베이와는 그럭저럭 친밀한 편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위태로웠던 후계자 자리를 지켜줘서인지 몰라도 할아버지 이에야스를 대단히 존경하여 때마다 할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하는 발언을 자주 하고, 유언도 "나는 죽어서도 할아버님을 모시고 싶으니, 닛코(이에야스의 무덤인 '도쇼구'가 있던 곳)에 나를 묻어달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이에미츠의 무덤은 이에야스의 무덤 근처에 있다. 오죽하면 이에미츠가 쇼군이 된 후 '간밤에 할아버님을 꿈에서 뵈었다'면서 그리게 한 영몽(霊夢)도가 현재에도 여러 점 남아있다. 다만 몸은 대체적으로 병약해서 몸이 아플 때마다 이불을 5, 6겹이나 껴 입고 잤다고까지 했을 정도. 거기다가 입도 짧아서 카스가노 츠보네가 식사 때 일곱가지 밥을 준비했다고 한다.

아내와 사이가 좋지 않았고[10], 남색가[11]라는 말도 있다. 어쨌든 여자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기에[12] 유모인 카스가노 츠보네가 후계자를 얻기 위해 여성을 소개시켜 주느라고 고생했다.

5 창작물에서

막부를 번영시킨 명군이라는 위치에 있는 데다가 출생에 얽힌 비화나 쇼군직에 있을 때 남긴 많은 일화들과 맞몰려 지금까지도 일본의 시대극이나 에도 시대를 배경으로 한 만화나 게임 등 2차 창작물에도 자주 등장한다.

요시나가 후미대체역사만화 오오쿠에서는 이에미츠가 남자만 걸리는 전염병에 걸려 죽은 후, 카스가노 츠보네가 이에미츠의 사생아 치에[13]를 쇼군 대리[14]로 만든다. 카스가노 츠보네는 치에가 낳은 아들[15] 로 쇼군가의 대를 잇게 하려고 했지만, 치에가 여쇼군 이에미츠가 되면서부터 쇼군가는 여쇼군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시구루이는 시대적으로 이에미츠의 치세 시기를 배경으로 삼고 있으며, 작품의 클라이막스에 해당하는 스루가 성 어전시합의 주최자이자 제1화에서 미리 보여준 바와 같이 이후 할복으로 생을 마감하게 되는 스루가의 암군 '도쿠가와 타다나가'가 바로 앞에서 언급한 이에미츠의 동생 쿠니마츠다. 이에미츠는 타다나가와는 그간에 악연이 있었던 탓인지 할복이라는 형식으로 제거해 버렸지만, 이복동생인 호시나 마사유키를 매우 총애하였고, 그를 중신이면서도 아이즈 번의 다이묘로 발탁하였다.

徳川家光.jpg

노부나가의 야망에서는 혁신 기준으로 지력 73, 정치 84만 좀 괜찮고 통솔과 무용은 5,60대를 찍는 그저 그런 인남캐. 능력치가 자기 아버지 판박이다. 어차피 군웅집결 아니면 최후반대에 등장하니 볼 일도 얼마 없다.

스마일 프리큐어! 16화에서 문제집과 융합한 아칸베큐어 마치와의 퀴즈 대결에서 역사문제로 등장. 그러나 역사에 약한 큐어 마치는 답으로 도쿠가와 이에난토카[16]로 대답해 아칸베에게 처절한 응징을 당했다. 뒤늦게 도착한 큐어 뷰티는 평소에 공부를 열심히 한 덕에 같은 문제가 나오자마자 바로 맞춰 역으로 아칸베를 털었다.

아이돌 마스터 신데렐라 걸즈/애니메이션 9화에서도 미무라 카나코가 맞춘 퀴즈의 정답으로도 나왔다. 프로그램 녹화 전에 카나코가 퀴즈 프로그램 예상문제의 답으로 에도시대 역대 쇼군들의 이름을 외웠는데(한국으로 치면 태정태세문단세를 외운 격), 우연히 퀴즈에서 "도쿠가와 막부 3대 쇼군은 누구?"라는 문제가 나왔던 것. 어째 애니에서는 퀴즈의 답으로 많이 쓰이는 것 같다?
  1. 이 시대를 다룬 일본 시대극에서 자주 등장하는 여인이며 본명은 사이토 후쿠(齋藤福). 카스가(春日)는 태어나고 자란 고향이름. 우리식으로 치면 춘일댁 아케치 미츠히데의 가신인 사이토 도시미쓰의 딸로 도쿠가와 3대를 모신 여걸로 유명하다. 사실 이에미츠는 이 여인과 이에야스 사이의 아들이라는 도 있을 정도로 도쿠가와 3대와 얽힌 많은 이야기거리를 남겼으며 이에미츠가 쇼군이 된 이후로도 여러 뒷바라지를 해서 그녀가 죽었을 때 이에미츠는 친부모가 죽었을 때 이상으로 애통해 했다고 한다.
  2. 오에요가 차남을 편애한 것은 남편인 히데타다와 오후쿠(카스가노 츠보네) 사이를 의심해서, 그 질투로 오후쿠가 기르다시피한 장남 이에미츠까지 싫어했다는 이 있다.
  3. 일개 유모가 천하의 오고쇼 이에야스와 독대해서 직소가 가능했다는 점에서 실은 이에미츠가 이에야스와 카스가노츠보네사이의 자식이라고 보는 설도 있긴 하다.
  4. 이 둘의 후계자 자리 갈등을 토대로 한 만화가 바로 "바질리스크 코우가인법첩" 이다. 물론 픽션이 많이 가미되었다.
  5. 후계다툼에 패한 이들이 대부분 그런 거처럼 쿠니마츠도 결국 영지롤 몰수당하고 자결하라는 명령을 받아 죽는다.
  6. 산킨코타이는 한국의 세계사 교과목에서도 나오는 말이다. 수험생이라면 알아두는 게 좋다.
  7. 이에미츠 수하에는 유능한 행정관료들이 많아서 이들이 막부의 안정에 공헌한 것이 대단히 많기는 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이에미츠의 이복동생인 호시나 마사유키.
  8. 도쿠가와 씨는 미나모토 씨의 후예를 자칭했는데 그 영향으로 보인다. 현대 일본에서는 '성씨'라고 하면 묘지(名字)밖에 없지만, 전근대에는 이미 고대부터 시행된 우지카바네(氏姓) 제도에 의해서 카바네(姓)와 묘지, 두 가지의 성씨가 따로 있었다. 즉 도쿠가와(마츠다이라) 가문의 경우, 카바네는 미나모토(源), 묘지는 도쿠가와(마츠다이라)였던 것. 다만 천황에게라던지 하는 공식적인 자료나 장소에서는 카바네를 쓴다. 애초에 우지카바네 제도가 시행될 때 카바네는 천황이 내려주는 것이었기 때문. 즉 에도 시대 쇼군들은 바쿠후에서는 도쿠가와라는 성을 가진 다이묘들의 우두머리, 조정에서는 미나모토라는 성을 가지며 천황에게서 임명받은 쇼군 직을 맡고 있는 신하가 되는 것이다. 도쿠가와가 미나모토 씨를 자칭했던 것은, (실은 거짓이지만) 원칙상 미나모토 씨만이 쇼군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9. 인물상은 조선의 성종과 닮은 점이 많다. 자신의 치세가 자기가 다스린 나라의 안정기였다는 것도 그렇고, 많은 일화를 남긴 것도 그렇고, 주변에 유능한 신하들이 보좌를 했다는 점 등... 특히 '여자'들과 얽힌 이야기가 많다는 것. 기가 센 어머니를 두었다는 것과 뒷바라지 해 준 여인(성종-정희왕후 윤씨, 이에미츠-카스가노 츠보네)의 덕을 봤다는 것도 공통점. 중국의 황제 중에서는 북송의 인종과도 비슷한 면이 많다.
  10. 특히 미다이도코로였던 정실 타카츠카사 타카코. 하지만 카스가노 츠보네가 이에미츠가 비구니였던 오만노카타(お万の方)를 설득, 환속시켜 오오쿠에 불러낸 후 여성혐오증이 많이 가라앉았다고 한다. 하지만 오만과의 사이는 좋았지만 안타깝게도 자식이라고는 한명도 없었다(...)
  11. 그것도 바텀... 천하제일인이 남색하는 건 상관없는데 바텀이라니! 라면서 상대가 마에다 토시이에의 증손자이라는 거.. 측근들도 난감해했다고. 야사에서는 아들을 얻지 못했다면 상속자 1위가 바텀 상대를 해준 마에다 가문이라고...
  12. 대가 센 어머니에게 질린 나머지 여성들을 싫어하게 되었다고 한다.
  13. 쇼군으로서는 아버지의 이름을 쓴다.
  14. 치에가 정식으로 여쇼군이 되기 전까지는 이나바 마사카츠가 대외적 행사에서 쇼군 역할을 수행했다.
  15. 하지만 치에가 낳은 아이는 모두 딸이었다.
  16. 직역하면 도쿠가와 이에뭐시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