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마바라의 난

島原の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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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군의 근거지였던 하라 성을 공격하는 막부군

1 개요

1637년 일본 규슈 북부의 시마바라에서 천주교인들이 일으킨 반란. 도쿠가와 막부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츠의 치세에 일어났다. 시마바라·아마쿠사 잇키(島原·天草一揆), 시마바라·아마쿠사의 난(島原·天草の乱)이라고도 부른다. 사실 천주교 박해만이 문제는 아니었고, 당시 막부의 세금 정책에 반발했다는 이유도 있다. 종교적 성격에 민중 저항적 요소까지 갖추고 있어 역사적으로 꽤 중요한 사건.

2 진행

원래 시마바라는 키리시탄(キリシタン)[1]이었던 아리마 가문#s-1이 다스렸는데, 당시 영주인 아리마 나오즈미(有馬直純)가 노베오카(延岡)로 전봉된 이후[2] 마츠쿠라(松倉) 가문이 들어오면서 문제가 생겼다. 마츠쿠라 시게마사(松倉重政)는 키리시탄을 무지막지하게 탄압했고, 농민에게 엄청난 세금을 물린 데다가 키리시탄의 본거지인 필리핀루손을 공격하겠다면서 전쟁세까지 부과하는 등 학정을 일삼았다. 그리고 운젠지옥(雲仙地獄) 고문[3]이라 부르는 그 악명 높은 악행을 저질렀다. 그 아들인 마츠쿠라 카츠이에(松倉勝家)는 더한 막장으로, 아버지보다 더욱 학정을 일삼아[4] 시마바라의 난의 실마리를 제공했다.

이 외에도 아마쿠사라는 곳도 반란의 근원지였는데, 이 곳은 고니시 유키나가의 옛 영지로, 유키나가 자신이 가톨릭 신자[5]였기 때문에 그곳도 가톨릭이 융성했다. 하지만 유키나가가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처형되고 그 뒤는 테라자와(寺沢) 가문이 들어섰는데, 이 쪽도 만만치 않은 천주교 박해를 자행했다. 그나마 이 쪽은 마츠쿠라 가문처럼 농민들을 수탈하지는 않았고, 그래서 이후의 처분도 가벼웠다.

이에 천주교를 믿던 농민 2만여 명이 들고 일어나 무장봉기를 일으킨다. 당시 반란의 지도자는 하느님의 대리인이라고 불리던 세례명 '예로니모'의 아마쿠사 시로 도키사다라는 16세 소년이었다. 또한 막부의 영지 재배치로 인해 주군을 잃고 낭인이 되어 떠돌던 천주교 신자 사무라이들도 대량으로 참가했다고 한다.[6]

병력은 확실한 기록은 없으나 대략 2~3만의 키리시탄들이 시마바라를 요새화하여 농성하지만 막부는 대략 12만 정도의 진압병력을 보내고 결국 4개월 만인 1638년 4월에 몰살당하게 된다. 항복한 자들도 단 1명도 빠짐없이 처형당했으며, 반란 주동자인 아마쿠사는 '100년 후에 부활하겠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고, 반란에 참가한 키리시탄들도 모두 죽었다. 야마다 우에몬사쿠라는 단 한 사람만이 생존했다고 하는데, 내통자였기에 가능했다.

난이 진압된 후 막부의 천주교 박해는 더욱 심해져서, 성화나 성물을 밟고 지나가게 한다거나 하는 정책이 시작되었다. 이것이 바로 가장 악질적인 천주교인 색출 방법으로 알려진 후미에.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에도 나오니 한번쯤 읽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이런 박해를 피하고자 생긴 것이 카쿠레키리시탄.

시마바라의 난의 책임으로 주범인 마츠쿠라 카츠이에는 난이 진압된 이후 상술한 악행을 이유로 개역(改易)[7]당한 후 참수되었다. 다이묘가 처형된 것은 극히 이례적인 사례로, 그가 벌인 폭정이 반란의 주 원인이라는 게 밝혀졌기 때문이다.[8]

훗날 시마바라를 발굴할 때 나온 반란군들의 시신에서 십자가를 세긴 탄피가 입 부분에서 발굴되었는데, 죽기 직전 사제가 없는 상황에서 노자성체를 대신하여 입에 물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시마바라의 난이 실은 도요토미 가의 마지막 발악이었다는 주장을 제기하기도 한다. 이 주장의 출발점은 아마쿠사 시로 도키사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손자이자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숨겨진 아들이라는 데서 시작한다. 알려진 바로는 히데요리는 1615년 오사카 여름의 진 때 도쿠가와에게 패배하여 자살했다고 하나 일설로는 사츠마로 도망쳤고[9] 사츠마에서 아들을 하나 낳았는데 그게 바로 아마쿠사 시로라는 것. 이 주장을 펴는 이들에 의하면 16살의 아마쿠사 시로가 반란군을 이끌 수는 없었을 것이고 배후에는 도요토미 가의 잔당들이 있었다고 본다. 실제로 도요토미 가를 지지하던 이들이 수없이 죽거나 추방당해 로닌(낭인)으로 전락했으며, 오사카 성의 전투에 참여하여 전사한 자들도 있으나 요도도노가 싫다고 참여하지 않았다가 나중에 이 반란에 참여한 자들도 많기 때문이다. 게다가 무사들은 그 신분을 아예 박탈당하지 않는 이상 낭인이 되더라도 무사의 지위를 유지할 수는 있었으므로 그 자손들이 무사의 신분으로 집안을 회복하겠다고 참여했을 가능성도 있다.

또한 난이 진압된 이후에 아마쿠사 시로의 목을 베었다고 하나 실상 막부군은 아마쿠사 시로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다라고 한다. 막부군이 아마쿠사 시로를 붙잡아서 처형한 게 아니라 하라성의 반란군을 모조리 베어버린 뒤에 시체들을 뒤지다 보니 훌륭한 옷을 입은 어린 소년의 시체를 찾아내서 그것이 아마쿠사 시로인 걸로 생각하고 목을 베었다는 것. 이 때문에 아마쿠사 시로는 죽지 않고 탈출해서 '루손'(현재의 필리핀을 부르던 명칭)이나 마카오로 도망쳤다는 일설도 있다. 그 주장의 근거가 되는 게, 막부군의 보고서에 적힌 아마쿠사 시로의 어머니의 말에 의하면 "시로는 남만이나 루손으로 도망쳤다"라는 것. 당시 남만은 마카오를 말하는 거였다.
당시 루손(필리핀)에는 일본인이 거주하는 마을이 있었다. 이 마을을 만든 사람은 도쿠가와 이에야스한테 추방당한 키리시탄 다이묘 다카야마 우콘.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이었다.

물론 이는 지나친 억측이란 반론도 있다. 애당초 히데요리의 생존부터가 증명되지 않은데다가, 아마쿠사 시로가 히데요리의 아들인지도 명백한 증거는 없다. 또한 남만으로 도망쳤다고 증언한 아마쿠사 시로의 어머니에게 하라 성의 시체에서 베어낸 어린 소년의 목을 보여주자 그자리에서 그녀가 통곡했다는 기록이 호소카와번의 기록에 전하기 때문에, 무리한 추측이라는 것.

이 반란 때문에 일본 그리스도인 대부분은 죽어 버렸고 카쿠레키리시탄들만 외딴 섬이나 산악지대로 숨어 버렸으며 대부분의 일본인 신자들은 마카오로 망명을 택해 포르투갈인들을 따라 나갔다. 현재 마카오의 중국계 원주민인 마카이엔사 중에는 이렇게 도망친 일본인 교인의 후손들도 있다.[10]

3 여담

  • 시마바라의 반란 수년 후 에도에 자리잡고 있던 엄청난 규모의 유곽을 다른 곳으로 옮기는 프로젝트가 도쿠가와 바쿠후의 주도하에 시행됐는데, 뭇 남성들이 여기에 의심을 품고 '바쿠후가 이전을 핑계로 은근슬쩍 유곽을 없애려는 것 아니냐'면서 상당히 거센 시위를 펼쳤고, 그 시위의 규모가 시마바라의 난과 비견될 만(...)하여서 이후 유곽을 시마바라라는 은어로 부르는 것이 당대 일본 사회에서 유행이었다 카더라(...).
  • 난이 진압되고 꼭 보름 뒤에 동래부사를 거쳐 조선에까지 전해졌다고.
  1. 크리스천일본어 발음으로 옮긴 것이다.
  2. 웃기게도 아리마 나오즈미는 전봉된 후엔 천주교와 인연을 끊었고, 시마바라의 난이 일어나자 예전 영지의 농민을 토벌하는 데 앞장섰다.
  3. 운젠 지역에 있는 유황 온천에서 유래한 탄압. 펄펄 끓는 유황 온천에 키리시탄을 넣어 강제로 개종시켰다. 이러한 잔인함에 천주교와 척을 지었던 네덜란드인조차 고개를 저었다고 한다.
  4. 세금을 내지 못한 농민에게 도롱이를 풀지 못하게 입혀 놓고 불을 지르는 고문인 미노오도리(蓑踊り)가 이때 나왔다.
  5. 세례명은 아우구스티노. 외손자 고니시 만쇼는 훗날 신부가 되었다.
  6. 천주교에 관계없이 반 도쿠가와파 낭인들이 대거 합세했다는 설도 있다.
  7. 개역된 뒤의 시마바라 번은 코리키(高力)가문이 맡았지만, 이쪽도 2대째인 타카나가(隆長)이 무거운 세금을 거둬 영지의 농민들에게 상소를 받고 영지가 몰수됐다.
  8. 반면 똑같은 난의 주범인 테라자와 카타타카(寺沢堅高)는 개역으로 4만석을 몰수당하는 선에서 그쳤다. 다만 그는 이 처분 때문에 정신적 동요가 일어서 1647년에 자살한다.
  9. 오늘날에 가고시마에는 히데요리의 묘라는 것이 전한다. 몇몇 기록에도 히데요리가 사츠마나 류큐로 도망쳤다는 이야기가 적혀있다고 한다.
  10. 마카오의 교회들 중 망명 일본인 신자들이 만든 것도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