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오스/역사

동남아시아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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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서는 라오스의 역사를 다룬 문서이다.

라오스의 주민족 라오족은 따이(Tai)족의 일파로, 태국의 타이(Thai)족과는 친척관계에 있는 민족이다. 따이족은 5~8세기부터 동남아의 강국들의 지배가 닿지않는 인도차이나 북부 외곽지역에서부터 점진적으로 서쪽으로 이동하여 동남아시아에 자리잡았는데, 11세기부터 동남아 각국의 기록에 나타나면서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들은 무앙(Muang)이라고 통칭되는 여러 소국들을 세웠는데, 이 시기 라오스 지역에는 루앙 프라방과 비엔티안의 무앙들의 세력이 두드러졌다[1]. 이들은 각기 베트남으로부터 각기 남 쯔엉(Nam Chưởng 南掌: '란 쌍'의 음차표기로 추측됨.), 반 뜨엉(Vạn Tượng 萬象: 비엔티안의 음차표기로 추측되며, 란 쌍의 뜻인 '100만 마리의 코끼리'를 훈차한것으로도 보임.)으로 불렸으며, 이 두 음차표기가 등장하기 전에는 각각 로과(老檛)나 애뢰(哀牢)[2]라는 명칭으로 불렸다고 한다.[3]

1 란 쌍 왕국 시대


(진녹색이 란쌍)

역사에서의 등장 이래 계속해서 여러 소국들이 각축전을 벌이고 있던 라오스 지역은 파 응움(Fa Ngum)의 등장으로 인해 통일된다. 파 응움은 루앙 프라방에 위치해있던 한 무앙에서 변란을 피해 앙코르로 망명했던 왕자의 아들로, 크메르 왕의 명령을 받들고 현 라오스 일대를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이어 그는 루앙 프라방에 수도를 정하고 크메르 제국으로부터 독립하여 1353년 란 쌍(Lan Xang) 왕국[4]을 세운다.

하지만 그는 화려한 초기치적에도 불구하고 무수한 전쟁과 코랏(Korat)고원 이주 정책과 병적인 탐색(貪色)으로 인해 민심을 잃고 귀족들에게도 미움을 사 끝내 1374년에 왕위에서 쫓겨나고 말았고, 왕위는 그의 큰아들이 계승하게 된다. 동남아시아사를 다루는 학자들은 이에 대해서 파 응움이 귀족세력을 통제하는 데에 서툴렀던 것을 방증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란 쌍은 쌈 쎈 타이(Sam Saen Thai, 1374-1416)왕 시대에 안정기를 맞는데, 이 왕의 이름의 '30만 명의 따이인'이라는 뜻에서도 보이듯이 이 시기의 란 쌍 왕국에서 체계적인 인구조사가 시행되었던 듯 하다. 이 인구조사에 따르면, 성인 따이족 성인 남성 인구수는 30만 명이었고 비따이계의 성인 남성 인구는 40만 명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동아시아에 비해 전통시대에 국경이란 개념이 불분명[5]했던 동남아시아의 특성상 인구조사범위가 어디까지인지 불분명하기 때문에 과장이 섞였을거라 보는 이들도 많다.

쌈 쎈 타이 왕 사후 라오스는 왕위계승분쟁에 시달린다. 그러다가 쌈 쎈 타이의 아들 차카팟 팬 피오(Chakkaphat Phaen Phaeo 1442 - 1480)가 비엔티안에서 루앙 프라방으로 돌아와서 왕위에 올라 란 쌍을 부흥시켰으나... 하필 그 시기에 이웃 베트남의 타인 똥(Thánh Tông 1460–1497)이 정복전쟁을 하는 바람에 현 씨엥 코앙(Xieng Khouang)지역을 뺏기고 말았다. 씨엥 코앙 분쟁은 베트남과 라오스가 치열한 전쟁[6]을 벌이고 난 후 라오스에서 베트남의 씨엥 코앙 영유권을 인정하게 되면서 일단 일단락되었다.

이후 16세기 들어 란 쌍 왕국은 전성기를 맞게 되는데, 편집자의 귀차니즘으로 인해 자세히 서술하기는 힘드니, 간략하게 이 시기 왕들의 업적만 써보겠다.

  • 비쑨 왕(Vixun, 1501-1520): 비엔티안에 있던 프라방 불상을 루앙 프라방으로 이치시킴, 라오스의 건국신화 쿤 보롬 신화 정리
  • 포티사랏 왕(Phothisarat, 1520-1547): 힌두교 사원·정령신앙 금지(불교 발전을 위한 조치), 탓 파놈(That Phanom) 사원 건설, 비엔티안에 궁전 건설(다음 대에 비엔티안이 라오스의 수도가 되는 기반이 됨)
  • 세타티랏 왕(Sethathirat, 1547-1571): 비엔티안 천도(AD 1563), 버마 침공 격퇴[7], 치앙마이에 있던 에메랄드 불상[8] 비엔티안으로 이치, 루앙 프라방에 탓 루앙(That Luang) 사원 건설

세타티랏 왕 사후 란 쌍은 버마의 침공을 받으면서 점령과 독립을 반복하고 왕위계승분쟁에도 시달리다가 수린야봉사(Surinyavongsa, 1637-1694)왕 때 다시 안정기를 맞는다. 이 시기의 비엔티안은 많은 사원이 건설되고 화려한 예술품이 제작되었고, 라오스 문자로 쓰인 문학도 발달하였으며, 서양 국가들과의 교역도 활발하였다. 수린야봉사 왕 시기 란 쌍 왕국을 방문했던 네덜란드 상인 부이스토프(Gerrit van Wuystoff)가 1641년 비엔티안 외곽의 사원에서 본 왕의 행렬을 쓴 기록이 있는데, 이를 보면 이 당시 란 쌍 왕국이 화려하게 번영했음을 알 수 있다.

흰색 코끼리를 탄 왕이 도심으로부터 와서 우리들 천막 앞으로 지나갔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하듯 길 위에 무릎을 꿇었다. 왕은 23세 정도 되어 보였다. 약 300명의 군인들이 창과 총으로 무장한 채 그의 앞에서 행진했고, 뒤로는 코끼리를 탄 병사들이 따르고 다시 그 뒤로는 악대들이 지나갔다. 이어서 2000여 명의 군인들이 지나갔고 왕의 다섯 부인을 태운 16마리의 코끼리가 나타났다. [9]

2 분열 시대


수린야봉사(Surinyavongsa, 1637-1694)왕 사후 란 쌍 왕국은 루앙 프라방 왕국, 비엔티안 왕국, 참파싹 왕국으로 분열되는데, 여기엔 복잡한 사정이 있다. 수린야봉사 왕에겐 아들이 한 명 있었는데, 그 아들이 고위 관료의 아내와 간통을 해서 처형되는 바람에 왕위계승을 할 사람이 딱히 없었다. 이 혼란은 수린야봉사의 손자가 왕위를 계승하고 수린야봉사 왕의 사위가 섭정을 하게되면서 잠시 가라앉았다가, 1700년에 남부의 실력자에 의해 찬탈당했다.[10]

이렇게 왕실이 무너지고 찬탈자가 활개치는 가운데 베트남으로 망명했었던 수린야봉사의 형이자 수린야봉사의 선왕이었던 비차이(Vichai)의 아들[11]이자 수린야봉사의 조카인 싸이 옹 후에(Sai Ong Hue)가 비엔티안으로 돌아와 찬탈자를 몰아내고 왕위를 차지했다. 수린야봉사의 손자들이 살아있었음에도 그가 손쉽게 왕위를 차지할 수 있었던 데에는 손자들이 루앙 프라방으로 도망가있었기 때문.

상황이 이렇게 되자 루앙 프라방에 망명해있던 킹킷싸랏(Kingkitsarat)은 한 무앙 지배자의 도움을 받아 루앙 프라방을 수도로 정하고 루앙 프라방 왕국을 세우고(AD 1707), 수린야봉사의 다른 손자였던 노카싸드(Nokasad)도 남부에서 참파싹을 세워 비엔티안에서 독립(AD 1713)하였다. 이렇게 해서 란 쌍 왕국이 분열된것이다.


비엔티안에 있는 아누 왕의 동상

란 쌍 왕국이 삼국으로 분열되면서부터는 베트남과 태국의 간섭이 전보다 심해졌다. 이에 라오스판 공민왕이라 할 수 있는 비엔티안의 아누 왕(Anu Vong, 1804-1827)[12]이 태국에 맞서 이 상황을 타개해보려고 베트남과 손을 잡고 태국 공격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아누의 계속되는 태국 공격에 진저리가 난 베트남의 민 망 황제가 배신을 하는 바람에 수세에 몰리고 말았다. 아누 왕은 당시 베트남의 영역이었던 씨엥 코앙(Xieng Khouang)[13]으로 망명해 다시 한 번 베트남의 지원을 요청했지만 실패하고 그곳의 수장이었던 노이(Noi)에게 잡혀 방콕으로 보내졌고 이로써 비엔티안 왕국은 멸망하였다. 한편 방콕으로 보내진 아누 왕은 감옥에서 숨을 거뒀다고 한다.

한편 태국과 친했던 루앙 프라방 왕국은 비엔티안 왕국 멸망 후인 1830년대부터 1860년 초까지 안정기를 누리게 된다. 이 시기에 베트남과 태국이 서양세력의 침략에 대응하는 틈을 타 베트남으로부터 빼앗겼던 쩐 닌을 되찾고, 태국으로 옮겨졌던 프라방 불상도 다시 되돌려받았다.

하지만 1860년대 이후 중국의 정세가 불안(태평천국의 난)해지기 시작하면서 운남에서 이슬람교도들의 반란이 일어나고(두문수의 난=판데의 난) 중국인들이 라오스로 망명해와 도적으로 변해 약탈을 하기 시작하면서 라오스의 정세도 똑같이 불안해지기 시작하였다.

결국 이에 시달리다 못한 루앙 프라방은 프랑스에 도움을 요청하여 1893년에 보호국이 되었다. 1893년에 루앙프라방을 보호국으로 만든 프랑스는 태국에 군함으로 무력시위를 하여 메콩강 이동의 영유권을 얻어냈다. 이렇게 해서 현재의 라오스 영토가 형성되었다.

3 프랑스 식민지 시대

4 현대

같은 식민지로 묶인 게 베트남이었기 때문에 베트남의 독립운동에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1950년 왕국으로 독립했다. 그러나 불과 4년 뒤 북베트남이 대 프랑스 전쟁에서 승리하자 급속히 좌경화하게 된다. 결국 베트남 전쟁 이후 완전히 공산화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당시 왕자공산주의 운동을 지휘해 권력을 잡았다.

그가 바로 초대 대통령 수파누웡. 왕의 사생아였다고 한다.

사실 이 나라의 진짜 문제는 미군이 저지른 폭격. 베트남 전쟁에서 호치민의 밥줄이 라오스라는 이유로 내전 크리에 1964년부터 1973년까지 50만 회, 2억 7천만 개, 200만 의 폭격을 퍼부었고, 최소 5만명이 죽었다. 사실 미군 사망자가 6만이고, 베트남 공화국에서 160만, 캄보디아에서 70만이 죽은 것에 비하면 적은 편이긴 하지만...

진짜 문제는 불발탄. 아직도 불발탄은 낙후된 고산지대에 산재해 있으며, 제거하는 데만 100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충격적인 것은, 1990년대만 해도 연간 사망자 가운데 절반을 넘는 2만 명이 불발탄으로 사망했다. 그것도 대부분이 아이들이다. 결국 저 불발탄 때문에 2020년까지 최빈국 탈출은 사실상 망했다고 보는 평이 지배적이다. 에이즈 문제도 있다.

1975년 이후 공산주의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1986년 라오스 정부는 경제정책을 수정해 중국이나 베트남과 비슷한 노선을 가고 있으며, 2000년대 이래 조금씩 발전하고 있으며, 현재는 전 대통령인 추말리 샤야손이 퇴임 함에 따라 분냥 보리치트가 대통령으로 승계 작업을 끝남과 동시에 통룬 시술릿를 총리로 임명하여 완전한 권력 이양을 끝맺혀 새로운 라오스를 표방 하고 있으며, 라오스의 큰 변화가 보일 것이다. 그 예로 중화인민공화국처럼 정치는 공산주의지만 경제는 자본주의를 도입하여 국민들의 경제권을 보호하는 등의 유연하고 실용적인 정책을 만들고 있다.
  1. 비엔티안의 경우 11세기 중반부터 베트남과 교류했다고 한다.
  2. 정확한 베트남식 표기를 찾을 수 없어 한국식 한자음으로 표기함. 후에 베트남식 발음으로 수정 바람.
  3. 왜 라오스의 초기 역사를 설명하는데 베트남이 계속 언급되냐면, 베트남이 라오스에 관한 정보를 많이 남겼기 때문이다. 실제로 란 쌍 왕국이 성립됐던 시기를 자세히 설명하는 외국 사서는 베트남의 역사서들이 대부분이다. 중국이 자기들 주변의 수많은 국가들에 대해서 기록한 『명사(明史)』 외국열전에서조차도 란 쌍 왕국에 대한 정보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4. 란 창(Lan Chang)이라고도 함.
  5. 당연히 중국의 영향을 받은 베트남은 예외다.
  6. 단순한 국경분쟁 정도가 아니라 아예 베트남군이 라오스의 수도 루앙 프라방까지 쳐들어갔던 대전쟁이었다. 곧바로 라오스의 반격으로 베트남군이 물러나긴 하지만.
  7. 당시 따이계 국가중에서 유일하게 버마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내면서 독립을 지키고 있었다.
  8. 현 태국 방콕의 그 녹색 옥으로 된 불상 맞다.
  9. 최병욱 교수의 『동남아시아사』에 기록된 내용을 재인용
  10. 최병욱 교수의 『동남아시아사』에서는 찬탈년도가 1700년이라 나오지만, 영문위키에서는 수린야봉사 사후 왕위가 1694년(혹은 1695년)에 고위관료 티안 탈라(Tian Thala)에게 찬탈당하고, 그 뒤에 수린야봉사의 손자 옹 로(Ong Lo)가 왕위를 되찾은 것으로 서술되어있다. 어느 쪽이 정확한지 수정바람.
  11. 영문위키에는 수린야봉사왕의 또다른 형인 Som Phou 왕자의 아들로 나온다. 어느 쪽이 정확한지 추가 바람. 나무위키 본문의 서술은 기본적으로 상술된 최병욱 교수의 책에 근거(책에 나와있지 않은 부분은 영문위키를 출처로 함)한다.
  12. 흔히 짜오 아누(Chao Anu)로 불림. 한국어로 직역하면 아누 정도?
  13. 정확히 말하면 원래 라오스 영토였는데 베트남쪽에서 삥뜯은 땅이었다. 당시 베트남 쪽 명칭은 쩐 닌(Trấn Ninh 鎭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