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역사

< 태국
동남아시아의 역사
미얀마라오스베트남
말레이시아태국캄보디아
브루나이필리핀
싱가포르인도네시아동티모르
태국의 역사
ประวัติศาสตร์ของ ประเทศไทย
몬족부남크메르 지배기란나톤부리시암타이
수코타이아유타야

1 고대

태국은 현재 타이족의 국가이나 타이족은 외부에서 이주해 온 민족[1]이며 선주민은 그들과 다르다. 중북부에는 현재 미얀마 남부에 분포하는 몬족들의 왕국 드바라바티[2], 하리푼자야[3] 등이 있었고, 동남부는 앙코르 제국을 세운 크메르족이 지배, 남부는 스리비자야가 진출하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전체적으로 보면 중부, 북부, 서부에 몬족이 분포하고, 동남쪽에 크메르족, 남부 말레이 반도 일대에 말레이족과 스리비자야의 영향이 공존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었다.

3세기 경에는 남부 대부분의 지역이 부남의 영향하에 있었고, 크메르족의 앙코르 제국이 전성기를 맞자 북부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앙코르 제국의 영향권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 무렵 타이족의 진출에 관한 증거가 보이기 시작한다. 유명한 것이라면 12세기 중반 수르야바르만 2세가 만든 앙코르 와트의 부조에 기록된 타이족 병사들이다.

태국의 주민족인 타이족의 기원은 확실하지 않으나 황하 상류지역에 살던 몽골로이드 계통으로 보고 있다.[4] 그 외에도 설이 많지만 공통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중국 윈난에서 동남아시아로 들어왔다는 것이다. 10세기경부터 이주의 흔적이 나타나나,[5] 본격적인 이주는 13세기 대리원나라에 멸망한 이후였다.[6]

1.1 수코타이 왕국

13세기에 수코타이, 란나[7]등의 왕국이 성립되었다. 수코타이의 람캄행 대왕은 태국 문자를 만들고, 란나, 파야오, 수코타이로 대표되는 타이족 3국의 동맹[8]을 맺고 앙코르와 치열한 전쟁을 해서 지금의 태국땅에 타이족의 입지를 탄탄히 하였다. 그는 중국에 대해 사대외교를 벌여 원나라에 조공국을 자처해 베이징에 입조하기도 했다. 13세기 말 앙코르를 방문한 중국 한족 주달관은 그의 기록 진랍풍토기에서 크메르족이 섬이라고 기록된 타이족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다고 기록했다.

1.2 란나왕국

란나는 13세기말쯤 태국 북동부 치앙마이일대에 세워진나라로 란나는 원나라의 침입을 막아내었으며[9] 남쪽의 수코타이와 태국을 양분하였고 수코타이 멸망이후에도 존속하다 버마에 정복되었다가 시암에게 멸망한다.

2 아유타야

항목참조

3 시암

400px
위 국기는 방콕을 수도로 하는 시암의 국기로 라마 1세가 채택하였다.

아유타야가 함락되기 직전 아유타야를 탈출한 딱씬 대왕은 시암 동남부의 짠따부리로 피신하고 그곳을 근거지로 삼아 중국인의 지원을 받아 힘을 길러 반년 만에 아유타야를 탈환한다. 하지만 아유타야는 초토화 된 상태이고 더이상 버마군을 막기에도 적절하지 않아 수도를 현 방콕 서부인 톤부리로 했다. 톤부리-방콕은 17세기 프랑스군이 주둔했을 때 요새를 만든 곳이고, 아유타야에 비해 방어가 용이한 편이었으며, 해상으로 진출하기도 편했다. 이런 이유로 딱신 대왕은 1768년에 톤부리를 수도로 정한 후, 구-아유타야에 웅거한 제세력들을 모두 통합한다. 1769년에는 태국 중부는 물론이고, 캄보디아 서부지역까지 통일시키는 등 빠르게 뻗어나갔다.

1774년부터는 북부의 버마 세력을 공격하기 시작하여, 1776년에는 치앙마이 지역의 란나 왕국을 영구히 통합시키는 쾌거를 이뤘다.

딱신은 버마의 공격을 물리치고 아유타야를 통합하고 라오스, 캄보디아를 다시 속국화하는 쾌거를 누렸으나, 안타깝게도 말년에 정신병에 걸려 부처로 자칭하고 포악한 정치를 펼쳐 강제로 구금되었다.[10] 이 반란은 딱신의 친우이자 딱신과 함께 정복전을 펼치던 프라야 짜끄리 장군에 의해 정리되고[11] 그가 새로운 왕으로 즉위했다. 유폐되었던 딱신은 반란 와중에 살해당했다. 짜끄리 장군이 세운 왕조가 현 태국의 왕조로 지금 왕조는 짜끄리 왕조, 라따나꼬신 왕조, 방콕 왕조 등으로 불린다. 라마 1세로 즉위한 프라야 짜끄리는 딱신의 정복전쟁을 이어나가고 1782년에 수도를 톤부리 건너편인 방콕으로 이전했다.[12] 이 때 구-아유타야의 폐허에서 자재를 운반하여 건설함으로써 방콕이 아유타야를 대신하는 수도를 의미를 명확히 하였다.

라마 1세의 시기 시암의 영토는 더욱 확장되어 캄보디아와 라오스는 완벽한 속국이 되었고[13] 치앙마이를 중심으로 한 란나도 복속되어 자체적으로 영토회복을 할 수 있었으며[14] 버마와의 전쟁에서 비록 테나세림의 탈환(?)에는 실패하였지만, 이후 이어진 보도파야의 14만 4천명 규모의 5개방면 침공도 성공적으로 막아낼 수 있었다. 라마 1세 때의 영역은 그 이전 최대규모였던 나레쑤언 시기의 영토확장을 능가하는 것으로써, 명실상부한 동남아의 패자의 위치를 재구축 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태국보다 더 넓을 정도)하지만 라마 1세의 유일한 실패는 바로 대-베트남 전선으로 응우옌 푹 아인의 요청을 받아 4만여 명의 군대를 파견하였으나 떠이 썬의 응우옌반후에에게 대패하여 응우옌푹아인과 함께 철수할 수 밖에 없었다. 이후 응우옌푹아인은 방콕에서 라마 1세 밑에서 싸우다가 독자적으로 베트남으로 귀환한 후 프랑스, 라오스의 도움을 얻어 베트남을 통일하였다. 그리고 시암군이 점령하였던 하띠엔의 반환을 요청하여 평화적으로(?) 받아내었다.[15]

라마 2세, 라마 3세 시기에도 딱씬-라마 1세 시기만큼의 영토확대는 아니었으나 계속되어서 시암의 라마 3세의 사망 무렵 시암의 영토는 역대 최대를 자랑하게 되었다. 1827년 영국군이 버마를 공격한 후 시암을 공격할 것이라는 소문을 믿은 위앙 쨘의 차오 아누의 공격은 순식간에 진압당해 위앙 짠은 철저히 파괴되고 라오족들은 메콩강 서쪽으로 강제이주 당했으며,[16] 1836년 베트남에게 합병당했던 캄보디아의 저항운동을 지원하여 1845년 재독립 시키고 캄보디아를 시암의 강한 영향력 하에 둘 수 있었다. 하지만 라마 4세가 즉위하면서 제국주의의 물결을 맞닥뜨리게 된다.

3.1 라마 5세 (쭐랄롱꼰 대왕)

라마 9세의 할아버지인 라마 5세 쭐랄롱꼰 대왕은 태국과 시암 역사를 통틀어 가장 뛰어난 업적으로 평가받는 왕이다. 해외에서는 라마 대왕이라고도 불렀다. 1905년에 노예제를 폐지하고, 교통망과 법체계를 선진화하는 등 빠른 속도로 근대화를 추진하여 특별히 돋보였다. 이러한 개혁적 성격은 그가 서구식 교육을 완전하게 이수한 최초의 시암 국왕이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는 처음 즉위했던 1868년에의 나이는 15세였기 때문에, 초기에는 섭정을 맡겼다. 이후 성인이 된 1873년 부터 섭정을 그만두고, 직접 통치를 통한 개혁적 추진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제도적으로는 추밀원과 내각평의회, 재무부를 신설했다. 물론, 이러한 개혁에 대한 귀족의 저항도 적지 않았으나, 그가 추진한 유학 장려를 마치고 돌아온 세력이 복귀하자 저항은 곧 수그러들었다. 그는 국가 제도를 비롯한 문화에 이르기까지 서구적인 개혁을 선호했다. 왕자들에게는 정부의 요직을 맡기는 동시에 유럽 파견을 통해 선진 제도와 문화를 도입했다.

지금의 두싯 지역은 1897년에 라마 5세가 만든 것으로, 유럽 풍과 태국 풍이 적절한 조화를 이뤄내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이렇게 라마 5세는 유럽에 대한 동경이 각별하여, 지식인과 왕족의 유학이 적극적으로 이뤄졌다.

라마 4세는 라마 3세가 전쟁을 선호하지 않았던 것 처럼, 외세의 칩입도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쪽을 택했다. 당시 위협적인 두 국가는 프랑스와 영국이었는데, 이 둘 사이에서 대나무 외교를 펼쳤다. 과거 루이 14세부터 이어져 온 프랑스와의 관계 덕분에 같은 편이라고만 생각했던 프랑스는 어느덧 가장 위협적인 국가가 되었다. 이런 프랑스로부터의 위협을 막기위해 영국을 끌어들이는 방식으로 국가의 안전을 보장받아 독립을 지켰다.

3.2 대나무 외교

파일:XSr4EHQ.gif
시암은 주변국에게 영토를 떼어주면서 독립을 지켰다.

노란색은 오늘날의 국토로, 과거 전성기에는 사실상 인도차이나 반도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했었다.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기념하는, 전승기념탑

4 타이

4.1 1932년 시암 혁명

시암은 군부가 일으킨 시암 혁명을 계기로 절대왕정에서 입헌군주제로 변화하였고, 국명 역시 시암에서 타이로 바뀌었다. 이를 주도한 인물은 놀랍게도 국왕이 아닌 '피분 송크람'이라는 인물이다.

'쁠랙 피분송크람'은 '시암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쿠데타를 주도했으며, 시암 최초의 헌법을 공포하기에 이른다.

당시 국왕이던 '라마 7세'는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군사의 통제권마저 지속적으로 잃는다. 국왕은 이 사건에 대해 유감을 표명했으며, 정부와 왕실은 사이가 틀어졌다. 결국 방콕을 떠난 국왕은 1935년에 무력함 속에서 스스로 퇴위한다.

정부는 스위스에서 유학 중이던 어린 '라마 8세'를 새로 추대했지만, 국가는 완전히 '피분'의 것이 되었다. '피분'의 정치는 독재적이었다. 출판물과 방송 등은 검열을 받았고, 그들을 견제할 세력은 아무도 없었다. 1938년에는 '피분'이 총리가 되었다. 명목적으로 '피분'과 '삐디' 두 명이 정치를 이끌던 것에서 더 나아가서, 완전한 독재를 원했다. 많은 사람들이 정치적으로 처형되었고, 망명했다. 화교계에 대한 탄압또한 이어졌다.

1939년에는 국호를 '시암'에서 '쁘라텟 타이(자유의 나라)'로 바꾼다. 그는 민족주의적 이념으로 타이족에 대한 단결을 강조했다. 한편, 이는 중국계에 대한 배제를 의미하기도 했다.

1940년에는 독일 나치에서 영감을 받아 국토의 회복 계획을 내놓게 된다.결과가 뻔해 보인다 1941년에는 프랑스와의 전쟁까지 겪는다.[17] 이러한 과정 속에서 일본태국과 긴밀해진다. 1942년에는 태국일본이 완전한 동맹관계를 맺는다.

그러나 1944년이 되자 일본을 패망의 길을 걷게 되고, '피분'은 지지를 잃어 정부과 와해된다. 새로운 총리가 임명되었고, '피분'의 시대는 막을 내린다. 새로운 정부는 반일적인 정서를 통해서, 연합국으로 부터의 전쟁 책임을 회피 받을 수 있었다. 또한, 피분이 국토 회복 계획 중에 확장했던 국토도 모두 반환하기에 이른다.

1946년에 '라마 8세'는 젊은 나이에 의문의 죽음을 맞고, 이후 현 국왕인 '라마 9세'가 왕위를 계승한다. 그러나 '피분'은 다시 등장하였으며, 전후 호황을 맞았기 때문에 다시 지지를 얻었고, 1957년 까지 그 자리를 지킨다. 그렇지만 1973년까지 군부 정권은 이래저래 계속되었다.

4.2 1973년 민주화 운동

군부 정권에 반대하여 학생들은 1968년 시위를 하게 된다.1968년 부터 시작되었던 시위는, 1973년에 가장 격화되었다. 휴교령이 내려지기도 하며, 총격이 이어졌다. 이런 상황 속에서 국왕은 이런 비참한 상황을 만든 현 정부를 탓하며, 총리에게 사임을 권유한다.

이후 새로운 총리는 군부가 아닌, 대학에서 나왔다. 탐마삿 대학의 법학 교수인 '산냐 탐마삭'이 새로운 총리로 임명되었다. 군부 정권의 종식이었다.

4.3 민주화 시대

민주기념탑

1973년 이후의 타이는 민주화 시대다. 하지만 민주주의의 한 순간에 완전히 정착하지는 못 한채, 종종 군부의 집권이 반복되었다.

유혈 투쟁또한 심심치 않게 벌어졌다. 다양한 유리한 조건과 역사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고있다. 학생들의 운동은 '공산주의', 달리 말해 '빨갱이'로 낙인을 찍었다. 군부는 이런 방식으로 다시 정권을 잡았다. 학생들뿐만 아니라 많은 노동자들도 '빨갱이' 낙인이 찍혔다. 많은 이들이 '빨갱이'라는 이유로 목매어 죽여졌다. 외신은 이를 통해 끔찍한 참상을 보도했다.
쿠데타는 태국 내에서는 마치 보편 문화처럼 받아들여졌다. 베트남 전쟁도 있었다. 1983년이 되어서야, 공산주의 견제는 더 이상 불필요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군부가 물러갔고, 관광을 비롯한 새로운 분야를 개척해 나갔다. 도시화가 가속화되었고, 농촌의 소외가 진행되었다.

하지만 쿠데타와 군부는 틈만 나면 다시 집권을 반복하며, 정치 불안은 또다시 계속되었다. 이런 반복은 뾰족한 수는 없는 채로 현재 진행형이다.

그러나 현 국왕 라마 9세의 효과적인 대응력 덕분에 국민들은 크게 동요하지 않고 상당히 평화로운 시기를 보내고 있다.

라마 9세는 입헌군주제 하에서 절대왕정에서 처럼은 영향력을 펼치지는 못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접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영향 내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있다.

태국은 태국적인(Thainess) 개혁을 통해 살기에 행복한 국가를 만들어 나가고 있다. 높은 삶의 질과 외국인들이 가장 살고 싶어하는 곳으로 성장해 나가고 있다. 이미 관광 세계 1위를 여러 해 달성하며, 사실상 아시아에서 가장 국제적인 곳이 되었다.

그런데 라마 9세가 2016년 10월 13일에 승하하면서 이런 분위기도 조금씩 풍파의 조짐에 휩싸이고 있다. 일단 정식 왕위계승자로 선정된 와치랄롱꼰 왕세자가 사생활도 현란하고 감정기복이 불같은데다 악명 높은 탁신 친나왓 전 총리와도 친분이 있었는지라 국민들에게 인기가 좋지 않다. 정작 많은 국민들은 둘째공주 짜크리 시린톤을 지지하는 분위기이다.

5 기타

동남아시아의 국가들 중 유일하게(그리고 아시아에서 일본, 네팔과 더불어 단 둘 뿐인) 제국주의 시대 당시 서양 열강의 식민지가 되지 않은 국가이기도 하다. 서쪽, 남쪽에서 미얀마,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를 식민화한 영국, 네덜란드와 동쪽에서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를 식민화한 프랑스가 서로 부딪치지 않기 위한 완충 지대로 태국을 남겨두기로 합의한 것이기 때문에 운이 좋은 케이스라고 보기도 하나, 뮤지컬 '왕과 나'로 유명한 몽꿋 왕(라마 4세)부터 서구에 처발리기 전에 미리 자발적으로 서구 문물을 받아들여 근대적인 개혁을 추진했고, 또한 군주들의 국제정세를 읽는 능력은 주변국에 견주어 확실히 뛰어났다. 한 예로, 당시 이웃나라 미얀마는 영국 식민세력에게 무력강경노선으로 맞서다가 전투에서 이기고, 전쟁에선 져서 결국 나라를 넘겨주고 말았고, 다만 인도네시아는 네덜란드의 식민지로 전락한 뒤에도 네덜란드의 통치에 맞서 디포 느고로, 수카르노 등 강경 민족운동 지도자들이 주도하는 독립 운동이 줄기차게 이어졌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이 패망하고 네덜란드가 다시 재침략하려고 하자 독립전쟁을 일으켜 네덜란드군과 싸워 이겨 식민지 독립에 성공하였고, 베트남의 경우는 식민지배를 겪고 난 후, 호치민의 등장 이후로 강경노선으로 나가 2차 세계대전 무렵에 일본을 상대로 싸워 내쫓고 냉전 중에도 프랑스, 미국, 중국과 싸워 승리하였다.[18], 그리고 인도네시아와 베트남은 이후에 근대화와 경제 개발을 추진하여 태국과 비교해선 상당히 파란만장한 근현대사와 동남아시아 역내에서의 강력한 패권을 가지고 있다.

유럽 군사력의 무서움을 알고 있었던 태국 군주들은 열강들에게 무력개입의 빌미를 주지 않으려 무척 노력해서 당시 태국영토에 속했던 라오스나, 버마와 인접한 지역의 영토를 조금씩 프랑스, 영국에 떼어주고 "옛다 영토~" 전략을 구사했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당시 태국 군부가 일본과 동맹을 맺은 흑역사가 있으나, 정작 일본에게 별로 협조해주지도 않았고, 일부에서는 일본군과 손 잡은 걸 반발해 게릴라 활동까지 했다. 그리고 왕측은 이 양쪽 '둘 다' 지원했다. 패색이 짙어지자 슬그머니 태그를 풀어서 역시 연합군에게 빌미를 주지 않았다.[19]

한국전쟁UN군의 일원으로 참전했다. 당연히 대한민국 정부는 휴전 후 최우선 수교대상국으로 지정. 1959년 수교. 당시 태국은 미국과 사이가 상당히 안 좋았는데, 한국전쟁 파병을 미국과의 관계 개선의 도구로 삼았다. 파타야의 우타파오 공항에 미합중국 공군이 주둔한다. 필리핀 주둔 미군이 철수 후 재배치된 곳이 태국이다.
  1. 중국의 운남지방이 고향이다.
  2. 왕국인지 문명인지 문화권인지는 불분명하다. 드라라바티란 이름도 드바라바티라고 적힌 동전이 발굴됨으로써 알 수 있었다.
  3. 란나에게 멸망당함으로써 알려진 왕국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왕국의 멸망과정은 승려 도림과 개로왕의 이야기와 동일하다. 란나에서 사람을 보내 하리푼자야 왕의 친우가 되게 하고 하리푼자야 왕은 사치에 빠지고 하리푼자야는 쇠약해져서 란나의 침공을 받자 순식간에 멸망했다는 스토리다.
  4. 황하 상류설 이외에도 양쯔강 상류설, 윈난 성설, 중국 강남지방 설, 토착민 설, 해양유입설 등이 있다. 대체적으로 황하상류지역에서 양쯔강 상류와 쓰촨성, 운남성쪽으로 이주했다는것이 정설이며 남하과정에서 남방계 주민들과 피가 많이 섞여서인지 중국 남부지역 주민들과 유전적으로 비슷하다고 한다.
  5. 9세기 경 부터 이주를 할 동기가 보인다. 9세기 경 남조는 전성기를 맞아 동남아 각지를 뒤흔들었으며 이 전쟁의 여파로 동남아 북부의 민족구성이 바뀐 듯 하다. 다만 이 것은 추론의 단계이다.
  6. 대리가 타이족의 왕국이었다는 말을 많이 볼 수가 있는데 대리를 세운 민족은 바이족이다. 타이족은 대리의 한 구성원정도로 보이며 한재도 운남성 일대에 수십여개의 소수민족들이 공존하며 살고있다.
  7. 이 왕국들의 성립년도는 여러 설이 있으므로 생략한다. 각 설마다 수십년 씩 차이가 나기 때문에 책마다 다들 년도가 다르다(…).
  8. 하지만 얼마 안 있어 파야오는 란나에게 멸망한다. 동맹이고 뭐시고 안습.
  9. 중국과 태국이 충돌한 유일한 사례이며 그나마 몽골인 정복왕조인 원이었다.
  10. 딱신이 중국계 혼혈이라는 점에서 나오는 콤플렉스나, 아유타야 구 귀족층의 반발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선교사의 기록을 보면 정신병적인 증상으로 포악한 정치를 펼쳤다는 것은 사실로 보인다.
  11. 진압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얽혔다.
  12. 현재 태국의 행정구역상 톤부리는 방콕에 포함되어 있다. 짜오프라야 강을 마주하고 있으며, 배를 타고 5분이면 바로 도착할 수 있는 거리이다.
  13. 왕이나 왕자가 방콕에 있어야 할 정도이니 캄보디아와 라오스를 시암의 영토로 표기하는 것이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이다.
  14. 란나가 처음 복속되었을 때 란나의 중심인 치앙마이도 란나의 땅이 아니었다. 하지만 란나의 영주 차오 까윌라는 시암에 의지한 후 독자적으로 구-란나의 땅을 수복하였다. 물론 이 과정에서 시암의 도움은 있었고, 버마의 대규모 침입 때는 차오 까윌라가 시암의 한 장군정도의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구-란나의 회복은 시암의 지원을 받은 차오 까윌라의 독자적인 행동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15. 평화적은 맞다. 하지만 배은망덕의 느낌이 올 뿐. 라마 1세의 사후 베트남은 캄보디아의 종주권을 두고 다시 시암과 긴장관계를 가지기 시작했다.
  16. 덕분에 현재 라오스에 사는 라오족은 300~400만 정도지만, 태국에 사는 라오족은 2000만명에 육박한다. 물론 그 이전에 평화적으로 이주한 수도 상당히 많고 영토의 상실 문제도 크지만 강제이주의 여파를 결코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태국 인구조사 통계에는 라오족은 그냥 타이족으로 분류된다는 것. 인구 5500만에 소수(?)민족이 2000만으로 분류되는 사태를 누가 원할까.(...) 그리고 태국에 사는 라오족 또한 본토인 라오스가 워낙 가난하다 보니(...) 자기도 태국인으로 생각하고 살아간다. 태국인이지만 라오족입니다. 정도로. 그리고 애초에 라오족도 타이족과 인종적으로나 언어적으로 가깝고, 타이족과 비슷한 시기에 중국에서 내려온 민족이기도 하다.
  17. 결과는 썩 좋지 못해서 오히려 태국 해군이 비시 프랑스 해군에게 털렸다
  18. 일본과 중국은 그냥 체면 잃고 도망나오긴 했지만 프랑스와 미국은 베트남에게 패전했었다..
  19. 사실 영국과 프랑스, 네덜란드등 서유럽 열강들은 일본의 항복 이후에도 태국을 적국으로 분류하고 있었지만 태국의 필사적인 노력(예를 들면 선전포고를 했는데, 그 작성문을 대사가 빼돌린다든가, 혹은 자신들은 원치 않았는데 일제가 강제로 전쟁 참전을 시켰다고 세계 여러 나라들에게 호소하기도 했다.)과 이 동네에 관심이 없었던 미국이 태국을 지지한 덕분에 일제나 나치 독일처럼 제2차 세계 대전 전범국으로 전락되는 걸 막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