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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 1 반랑, 어우락 (~ BC 207)
- 2 남 비엣(Nam Viet)/남월(南越) 시대 (BC 207 - BC 111)
- 3 중국의 지배 (BC 111 - AD 938)
- 4 안남 응오 왕조(吳朝, 938년 - 968년)
- 5 다이비엣(大越,대월국) (968년 - 1802년)
- 6 월남越南 응우옌 왕조(阮朝, 1802년 - 1945년)
- 7 현대 베트남사 (1946년 - 현재)
1 반랑, 어우락 (~ BC 207)
일단 역사적으로 어떤 시점이 먼저인가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베트남 역사상 최초의 국가는 베트남 북부 델타 지역과 현재의 광서 장족자치구 인근에 있었던 락 비엣이라는 민족이 세운 봉건적 공동체인 반랑(Văn Lang, 文郎, 문랑)인데, 기원전 2919년에 훙브엉(Hùng Vương, 雄王, 웅왕)에 의해 건국 되어 18명의 홍브엉의 2621년을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우리의 고조선, 특히 단군 조선과 비슷한 상황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동 썬(縣,Dong son) 문화가 발견되면서 실존은 인정받고 있다고 한다. 동 썬 문화는 기원전 2350±100년으로 추정되며, 타잉 호아성(省) 동 썬(縣)에서 발견되었다. 이 동 선 문화는 청동기 말기와 철기 시대를 대표하는 문화이다(송정남, 2001). 전해져내려오는 설화도 그리 많지않고 계보도도 자세히 전해져 내려오지 않은 단군조선과 다르게 전해져내려오는 설화는 많고 계보도도 자세히 전해지지만 구전되어서 내려져온다는 설화도 신화적인 성격이 강한데다가 각 왕들의 재위기간이 너무 길다는 점 때문에 베트남 학계에서는 반 랑이 대체적으로 기원전 7세기경에 건국된 것으로 추측한다.
여하튼 반랑 왕국이 수백년간 이어져 내려오다가 촉의 왕자로 전해지는 툭판(蜀泮,촉반)이 반랑을 멸망시키고 어우 락(甌駱,구락)(B.C 228)을 건국한다. 툭판이 촉의 왕자라는 설은 베트남 학자들로부터 중국인이 아닌 베트남인이라고 부정되기도 한다. 툭판이라는 이름에는 석궁의 신이거 뭔가 겹치는데이라는 의미가 있다는 것. 위만조선도 그렇지만 외지에서 세워진 왕에는 조금 부정적인 분위기가 거기도 있는 모양이다. 그리고 이 촉은 중국의 파촉지방이 아닌 베트남 북부로 보고 있다. 구전에 의하면 지금의 까오 방(高乎, 고호)지역이라고 한다.
어우락은 진시황에 쫓겨 남하한 북쪽의 어우(Au,甌구)족과 남쪽의 토박이 락(Lac,駱락)족이 결합한 이름이다.
안양왕(安陽王, 안드엉브엉, 재위 BC 257~207) 툭판은 진시황에게 잘보이려고 장사 이옹중(한국과 중국에서는 완옹중이라 전해짐)을 보내기도 했지만 자신의 대에 멸망하였다. # 이옹중 이야기 안양왕은 백살까지 살았다고 한다.
반랑은 중국의 하나라 정도고, 어우 락은 은나라와 비슷한 위치이다. 반랑의 경우 동 썬 문화의 존재로 국가의 존재까지는 몰라도, 독자적 문화권의 형성까지 알 수 있고, 어우 락은 대규모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꼬 로아 성으로 좀 더 분명해진다.
그 나라에도 유사역사학, 즉 환빠류는 있는 모양인지, 반랑의 영토를 추산한 지도도 있다.
말 그대로 후덜덜하다. 초나라와 오나라, 월나라는 누가 잡아먹었나요 환빠들은 모두 중국이 만만한가보다.[1] 황하 이북은 우리땅이라는 한국 환빠랑 잘 어울릴듯
실제로는 이 정도 크기다#. 출처는 영문위키피디아(...)
2 남 비엣(Nam Viet)/남월(南越) 시대 (BC 207 - BC 111)
진대에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며 광동과 광서지방도 진의 영역에 들게 되었다. 이때 이곳에 파견된 이가 사령관 임오와 부관 조타#s-4(趙佗, 베트남식으로는 찌에우 다(Trieu Da))였다. 그러나 진시황 사후 진이 혼란에 빠지자 이들은 독립을 꾀하였다. 도중 임오가 고령으로 사망하면서 그의 부관 조타에게 그 대업을 넘겼다. 조타는 남방 3군을 통합해서 국가를 세우니 이 국가가 바로 남월이다. 월은 당시 중국 남쪽의 월족, 혹은 월나라에서 따온 것이다. 당시 중국 남부 해안지방의 민족을 중국에서는 주로 월이라고 불렀다. 항목 참조.
그러던 와중 유방에 의해 한이 건국되고, BC 206년 한고조 유방은 조타를 남월왕으로 임명했다. 한동안은 별 일 없이 지내다가, 고황후가 철기 교역을 금지하면서 한과 남월은 대립관계에 들어갔고, 조타는 스스로 무제(武帝)를 칭하였다. 이 때 베트남 북부의 툭판 왕조 어우 락을 정복했는데, 스토리가 우리나라의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와 동일한 플롯이다(…)
베트남 제국의 남부 확장. 남월(지도의 Nam Viet) 영토 중 현대에는 중국에 속하는 쪽은 표시가 안 돼 있다.
남월의 최대강역
남월은 최전성기에는 현재 오령산맥 남부, 베트남 북부, 광둥 성, 푸젠 성(중화인민공화국) 서부를 다스리는 국가였지만 2대 국왕인 문제 조호 이후에는 황제직을 페지하고 외왕내제 형식으로 가 제국이라고 부르기는 약간 애매모호. 홍콩은 이때 남월의 영역이었고 이때문에 이 시대 홍콩 등 광둥인은 본토 중국인보단 베트남인이랑 하나의 나라를 이뤘다.
- 조타는 중국인이기 때문에 중국인의 지배 아니냐고 할 수 있지만, 베트남사에서는 자국 왕조로 인정한다. 애초에 고대로 갈수록 민족 개념이 지금보단 모호해진다. 구분이 아예 없지는 않았어도 민족주의 개념이 정확히 나타난것과 역사나 혈통을 기반으로 한 민족 개념으로 구분이 강해져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근대에 들면서부터. 그러니 그런 배경을 고려하면 별 상관이 없는 문제이다. 다른 나라가 또 다른 나라를 지배한 것이면 몰라도 그냥 어디서 온 사람이 왕이었다는건 자국 역사로 인정하기에 큰 문제가 되지는 않는 셈. 중국왕조에도 황제가 이민족인게 확실하거나 이민족으로 의심되는 경우는 있고 한족도 여러 민족이 혼합된 개념이라 고대는 최남방 중국인과 현재 베트남인의 조상을 정확히 혈통으로 구분하는 것도 어려웠을 것이다. 따라서 인종이나 민족보다 나라와 계승 개념이 중요하다. 조타가 한족이라도 남월이 다른 정체성을 갖고 분리된 뒤 남월의 정체성을 계승하면서 현재의 베트남까지 왔으니 그냥 현재의 베트남에 이르게 한 베트남 왕조라고 할 수 있다.
- 어우락이 역사적 실체가 애매하여 실제 최초의 국가로 인정할 수 있느냐가 문제이고, 지배층이 중국인이긴 하였지만 한화(漢化)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기보다는 현지민과의 협력과 공존을 택해 연합정권의 성격을 띄고 있었던데다 한나라에 대항하였다는 점에서 대중국 투쟁의 시작이었다.
- 마지막으로 베트남 역사를 관통하는 이름 비엣이 최초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베트남 역사의 국명은 남월, 대월 등 비엣=월(越)이 거의 끝까지 가다가 결국 남비엣(南越)에서 순서만 뒤집어서 비에트남(越南)=월남이 된 것이기 되었다. 때문에 베트남의 역사는 거의 대부분을 왕조로 구분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우리네 위만조선과 매우 흡사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시각과는 별개로 현재 베트남에서는 남 비엣을 자신들의 역사로 보지 않는다고 한다. 왜냐하면 남 비엣이 한족과 토착민의 연합정권이었다 해도 군주는 중국계였던데다가, 현 베트남 북부에 있던 토착민족 국가[2]인 어우 락을 정복했기 때문.[3] 하지만 남 비엣이 멸망한 후 세워진 교주(交州)의 정치적·경제적 중심지가 남 비엣의 수도 번우(番禺)가 있던 남해군(南海郡)이 아니라 현 하노이를 중심으로 하는 베트남 북부 교지군(交趾郡)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아이러니하다. 베트남이 중국을 얼마나 증오하는지 알 수 있는 부분.
3 중국의 지배 (BC 111 - AD 938)
한문제 시기에는 화평도 맺어졌지만 한무제가 즉위한 뒤 천하질서를 재편하기 시작하자 남월 역시 공격대상이 되었는데, 조타가 살아있을 적에는 한의 군대를 막아내어 한동안은 화친관계가 지속되었으나 4대 국왕 애왕 조흥과 토착민 출신인 재상 여가(呂嘉)와의 대립이 불거져 쿠데타가 일어나 5대국왕이자 마지막 국왕인 조건덕이 추대되자 이에 한은 노박덕을 위시한 원정군을 파견하였고, BC.111년 남월을 멸망시키고 9개 군을 건설했다.한구군?
그 소식을 들은 남월 남부의 쟈오 찌(교지)와 끄우 쩐(구진)의 대표도 저항하지 않고 항복하여 9개군이 설치되었다. 이것이 약 1천년에 이르는 중국의 베트남 지배의 시작이다.
한나라가 베트남을 공격한 이유는 자국 변방의 안정이라는 목적도 있었지만, 나중에는 경제적인 목적이 더 중시되었다. 이 지역은 화북지방을 중심으로 한에서는 구경할 수 없는 남방물자의 산지인 동시에 동남아시아와 인도, 동아시아를 연결하는 물자의 집산지였기 때문에 막대한 이권이 존재하였다. 근데 다 실패했다. 동남아로 가던 사신을 죽이자 그 지방사람 수십만을 죽이는 행동까지 했지만 끝내 사신 파견은 실패 이후 한은 기본적으로는 간접지배의 방식으로 이 지역을 다스리면서 경제적 이득을 취했는데 워낙에 원지라서 수시로 탐관오리들이 등장하는 문제가 생겼다. 결국 탐관오리로 인한 반란, 괜찮은 관리와 이 지역 출신들의 통치로 인한 선정을 반복하다가 결국 AD 40년 쯩짝(徵側), 쯩니(徵貳) 자매의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다.
이때 후한의 개국공신이자 복파장군 마원이 쯩짝 쯩니 자매의 반란을 진압하고 베트남의 통치를 간접지배에서 직접지배로 바꾸었다. 이 사람은 그 유명한 삼국지의 마등, 마초 부자의 조상이다. 마원은 또 행정제도를 조정함으로써 중국의 지배통치력을 높이고 동화정책을 실시하였다. 이 조치로 기존의 락장, 락후의 통치력은 약화되었고, 중국인 이주민의 힘이 늘어났다. 복파장군 마원의 후예를 자처하는 사람이 한명 또 있었지 근데 남만왕 맹획은 운남 쪽이라는지라
한편 137년 베트남 중부의 원주민인 구련(區憐)이 중국령 베트남을 공격하였다. 구련은 베트남인이 아닌 참족으로 보인다. 남부 원주민의 공격은 계속되어 192년 중국령 베트남 최남부 녓남(일남)군을 점령하고 나라를 세운다. 이 국가가 베트남의 숙적 참파의 전신인 임읍(林邑)이었다. 참족은 말레이-폴리네시아 인종에 인도문화의 영향을 크게 받았고, 베트남인의 동 썬 문화와는 다른 싸 후인 문화의 민족이었다. 임읍 남쪽에는 프푸난(부남,扶南) 왕조가 번성했다.
결국 흐지부지되다가 삼국시대에는 교지의 실질적 독립세력이었던 삼국지 덕후들이 좋아하는 사섭(士燮, 베트남식으로는 시 니엡(Sĩ Nhiếp)이다.)이 등장하여 안정이 되는가 싶더니 다시 사섭이 죽고 오나라에 편입되는 과정에서 다시 찌에우 티 찐 부인의 대규모 반란이 터지는 등 어수선한 분위기를 이어간다.
베트남의 중앙이자 교주자사부의 최남단에 위치한 일남군(日南郡)은 기후가 아주 끝내줬는데 일남은 덥기도 매우 더운 데다가 온갖 풍토병이 창궐했다. 당시 후한에서는 수도인 낙양으로부터도 가장 먼 곳이 일남인데 일남군은 낙양으로부터 13,400리나 이격되어 있었다. 그래서 당대의 사족들이나 관리들은 유배를 당할 경우 유배지에 따라 자신들의 행보를 예상했는데 일남으로 유배당하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한나라의 삼수갑산 실제로도 일남으로 유배가 확정되면 고향에서 장례식을 먼저 치르고 일남으로 출발했다. 교주자사였던 사섭조차 건드리지 않은 곳이 일남군이다. 그래도 일남군에는 현이 5개나 되었고 인구가 10만명 정도 되었다.
중국의 혼란기 사이에는 잠시 찌에우 비엣 브엉과 전리왕조(544년–602년)가 세워지기도 했지만, 오래가지 못했고 당에 의해 안남도호부가 세워진다.
3.1 당의 기미지배 시대(602년 – 880년)
당나라가 건국되자 당시 이 지역을 다스리던 태수 구화가 곧 투항하면서 이 지역에 안남도호부가 설치되었으나, 리 뜨 띠엔, 딘 끼엔, 풍흥 등 꾸준한 반란을 겪어야 했다.
당은 훗날에 대리국으로 성장하는 현재의 운남성 지역의 국가 남조(南詔)와 전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전선기지였던 이 지역에 청해군(靜海軍)을 설치하고 고병을 절도사에 임명하면서 완전히 통합정책에 나선다. 고병은 고왕이라고 불릴 정도로 선정을 펼치기는 했지만 결국 도교를 중심으로 한 통합정책은 좀 늦은 감이 있어서 결국 실패. 결국, 880년 황소의 난을 계기로 안남도호부를 철폐하는 수준에 이른다.
3.2 청해군절도사 시대(880년 – 938년)
이후 906년 쿡 트아주(곡승유)가 절도사를 자처하면서 곡씨 절도사 시대 개막. (907년 중국도 오대십국시대에 접어드는 헬게이트 상황이었기 때문에 여기 신경쓸 상황이 아니었다.) 역시 청해군절도사 유은이 세운 남한과 전쟁을 벌이면서 툭탁툭탁 하는 시기를 보냈다.
4 안남 응오 왕조(吳朝, 938년 - 968년)
그러다 938년 응오꾸옌(吳權, 오권)이 바익당강 전투에서 중국군을 물리치고 이듬해인 939년 베트남계 왕조인 응오 왕조를 세우게 된다. 왕 이름도 권이고 이거 상당히 오나라 삘이네 이때를 기점으로 월남은 중국에게서 독립하게 된다. 응오 왕조를 월남 최초의 독립왕조로 들기도 한다.
944년 응오꾸옌이 사망하고 태자의 외삼촌인 양평왕(楊平王) 쯔엉 탐카(楊三哥, 양삼가)의 찬탈이 있었다. 찬탈은 6년만에 종결되었지만, 이후 5대를 넘기지 못하고 응오 왕조는 곧 망했다. 남진왕(南晉王) 응오 쓰엉반(吳昌文, 오창문)이 965년 승하하자, 그 직후 일어난 12명의 사군(장군)의 난이 결정적이었다.(십이 사군 시대)
5 다이비엣(大越,대월국) (968년 - 1802년)
5.1 딘 왕조(丁朝, 968년 - 980년)
십이 사군 시대는 장군 딘 보린(丁部領, 정보령)에 의해 정리되었다. 응오 왕조의 마지막 왕인 오대왕(吳代王) 응오 쓰엉씨(吳昌熾, 오창치)로부터 왕위를 넘겨받은 딘 보린은 968년 다이꼬비엣(大瞿越, 대구월)을 건국하면서 딘 왕조가 시작된다.
이른바 대월(大越, 다이비엣)의 시작이다. 응오 꾸옌의 응오왕조가 중국 지배의 여파를 완전히 종식하기 전에 붕괴되었고 이후 혼란기를 겪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베트남 최초의 독립왕조로 대월을 드는 사례가 많다. 딘보린은 스스로 황제를 자처하고 송과 통교하였으며 연호까지 사용했다.
5.2 전 레 왕조(前 黎朝, 980년 – 1009년)
979년 딘 보린은 아들의 반란으로 살해당했고, 둘째 아들이 왕위를 이었으나 결국 병권을 쥐고 있던 레 호안(黎桓, 여환)이 섭정으로 실권을 장악하면서 결국 전(前) 레 왕조가 열렸다. 레 호안은 바익 당 강 전투와 찌란 전투에서 북송의 침입을 막고 984년에는 전통의 숙적 참파마저 공격하면서 베트남은 독자적인 전통을 지키며 이후 동남아의 강대국으로써의 기틀을 다지게 되었다.
이렇게 성세를 누린 전레왕조이지만 역시 수명은 짧았다. 레 호안이 사망하고 나서 3남 레 롱비엣(黎龍鉞)이 즉위하였으나, 3일만에 5남 레 롱딘(黎龍錠)의 반란으로 시해당했고, 레 롱딘이 왕위에 오르지만 악정으로 인심을 잃었다. 결국 와조가 붕어한 후 다음 제위 계승자가 겨우 10살이었기 때문에 호위대장인 리 꽁 우언(李公蘊)이 추대되었다.
5.3 리 왕조(李朝, 1009년 – 1225년)
1100년 경의 지도
이것이 리 왕조로 베트남 최초의 장기왕조이다. 리 왕조는 1009년 탕롱(지금의 하노이)로 천도를 했고 9대 215년간 베트남을 통치하였다. 이어 타인 똥(Thánh Tông 聖宗)시기에는 국호도 딘 왕조 시기의 다이꼬비엣(大瞿越)에서 중간의 꼬(구)를 뺀 다이비엣(大越,대월)으로 바꾸었다. 중국과 참파와의 대립도 계속되었다.
예를 들어 북송의 왕안석은 중국 남부 눙족의 금광에 대한 욕심과 그 뒤를 후원한다고 추정하는 다이비엣을 정벌할 목적으로 교류를 금지시키고 전쟁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1076년 리 트엉 끼엣(李常傑,이상걸)이 송을 먼저 선빵선공하면서 송과 전쟁이 벌어졌다. 이때 리 트엉 끼엣은 군사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남국산하(南國山河)'라는 노래를 지어 부르게 하였는데, 이 시에서는 중국의 황제에 대해 리 왕조의 군주를 '남제(南帝)'라고 칭하여 중국에 대한 대등 의식을 과시하고 있다.
남국산하(南國山河) 南國山河南帝居 : 남국의 산하에는 남제가 거한다고 截然定分在天書 : 천서에 분명히 정해져 있거늘 如何逆虜來侵犯 : 어이하여 너희 역로들이 침범하는가 汝等行看取敗虛 : 너희는 참담한 패배를 보고야 말 것이니라 |
이 전쟁이 길어지자 서로 득 볼 것이 없다고 판단한 양국은 서로를 인정하는 형태로 화평조약을 맺게 된다. '
이 과정에서 송 황제는 이전까지 베트남을 가리키던 교지군의 왕이라는 칭호 대신에 안남安南국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다. 이 이후 이조는 스스로를 안남이라고 칭했으며, 베트남은 동아시아 세계에서 안남이라는 칭호가 굳어지게 된다. 베트남 쌀을 안남미라고 부르는 것이 여기서 비롯된다.
이정도로 잘나갔으니 참파는 수도 없이 털었다(...) 하지만 리왕조 후기 왕족들의 사치와 부패가 이어지면서 민심이 날로 악화되어갔고 전국적으로 반란이 일어났다. 이때 쩐투도(陳守度 진수도)라는 사람이 나타나 자신의 딸과 리 왕조 혜종(惠宗)을 자신의 일족의 딸과 결혼시키고 외척이되면서 실권을 휘두르기시작했다. 곧이어 일어난 반란도 평정하였으며 1224년 혜종을 폐위시키고 그의 딸 리팟킴(李佛金 이불금)을 황제로 옹립하였다. 그녀가 리왕조 마지막황제 소황제(昭皇帝)이다. 이후 폐위된 혜종을 자살로 내몰았다. 쩐투도는 자신의 조카인 쩐까인(훗날 쩐 왕조의 태종 혹은 진태종)과 소황제를 결혼시키고 1225년에는 자신의 조카인 쩐 왕조 태종에게 선양하는 방식으로 황위를 탈취하였다. 이로써 리왕조는 멸망하였다. 이때 리씨일족들은 쩐씨에 의해 몰살. 소황과 그녀의 언니는 살려두었지만 베트남에서 리씨의 가계는 이 둘을 끝으로 끊겨버렸다.[4]왠지 여말선초 삘
베트남에서 과거 제도를 처음으로 실시했던 왕조이다. 1070년에 문묘를 설치하고 1075년에 과거제를 실시했으며 1076년에 국자감을 설치했다. (과거 제도#s-2.3 참조)
5.3.1 리 왕조의 후손
하지만 놀랍게도 베트남에서 멀리 떨어진 고려로 망명하여 살아남은 후손이 몇몇 있다. 리 왕조 인종(仁宗)[5]의 셋째 아들 이양혼(李陽焜)이 리 왕조가 멸망하기 훨씬 이전, 왕위 쟁탈전에서 밀려 북송으로 망명했다가 북송마저 금에 멸망하자 고려로 망명해 정착, 그를 조상으로 삼는 정선 이씨가 있고, 쩐 씨가 왕위를 찬탈하고 리 왕조가 멸망 할 때 멸족을 두려워한 혜종의 숙부 리롱뜨엉(李龍祥 이용상)이 자신의 가족들을 데리고 일족이 몰살당하기 전에 고려로 망명, 귀화하면서 고려에 정착, 그를 조상으로 삼는 화산 이씨가 있다. 하지만 워낙 화산 이씨 시조 이용상의 이야기가 스펙터클한 지라 정선 이씨는 상대적으로 묻혀버린 감이 있다.그래도 정선 이씨는 고려 무신 정권기 인물인 이의민이 워낙 유명해서
1996년에 베트남에서는 770년만에 리 왕조 후예들이 왔다고 화제가 된 적도 있다. 베트남 정부에서 화산 이씨와 정선 이씨를 리 왕조의 후예로 공식 인정했으며, 베트남에서 살 경우 출입국관리, 세금, 사업권 등에서 베트남인과 동일한 특혜를 주고, 리 왕조가 출범한 음력 3월 15일이면 공식 행사까지 연다고 한다.
5.4 쩐 왕조(陳朝, 1225년 - 1400년)와 원나라(몽골)의 3차 침공
이처럼 즉위 과정에서는 도덕적으로 욕을 먹을 짓을 한 쩐 투도와 쩐 태종이지만 리 왕조 말기에 일어나 있었던 반란을 진압하고 사회의 안정을 되찾게 하는 한편, 정치 제도와 군사 조직을 개혁하고 강화하였고, 무엇보다도 원의 침입을 막아내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13세기 중엽부터 몽골 제국의 침공을 받았다. 당시 몽골족이 중국을 통일해 원나라가 세워지고 한족 남송과 여진족 금나라, 그리고 탕구트인의 서하가 모두 엎어진 직후였으며 원은 남쪽 방면의 안정과 진정한 중국 통일을 위해[6] 베트남 침공을 한족 위주의 수군을 대규모로 동원해 시작했다. 물론 결과는 알다시피 베트남이 중국을 무찌른 사례 1에 추가되었을 뿐이다.
- 1차는 1257년의 침공으로 대리국을 점령한 몽골족의 원나라 군이 정송가도(;;)를 요구하며[7] 한족 수군이 대부분이고 일부 거란과 여진족 혼성부대로 구성된 3만의 군대로 침공하여 수도인 탕롱(Thang Long昇龍,승룡,지금의 하노이)를 점령하였으나, 전염병으로 철수하였고 이를 틈타 공격하여 원나라 군을 물리칠 수 있었다.
- 2차 침입은 1284년으로 원을 세운 세조 쿠빌라이 칸은 참파, 운남, 광동에서 삼로로 공격을 했다. 이 가운데 참파는 당시 이미 원군이 침입한 상태였다. 수도는 당연히(;;) 점령당했지만 하리짓 왕자를 중심으로 한 게릴라전을 진행 중이었다. 원은 쩐왕조의 수도인 탕롱을 또 점령하고 베트남을 멸망직전으로 밀어넣었다. 그러나 쩐흥다오(陳興道,진흥도)의 계속되는 항전과 전염병, 게릴라전 등으로 결국 실패하였고, 결국 베트남군은 원나라군 포로만 5만명을 잡을 정도로 대승을 거뒀다. 이 사이 1285년, 다시 이름을 안남에서 대월로 돌려놓아 자주성을 강조하였다.
쩐흥다오(1228년 ~ 1300년), 쩐 왕조 태종의 형의 아들로, 태종의 조카이자 2대 성종의 사촌형.
- 하지만 근성의 원세조는 1287년 3차 침공을 감행한다. 이걸 위해서 진행 중이던 일본 원정까지 중단시켜 버렸다. 이때도 쩐흥다오가 병량을 수송하던 원의 수군을 바익당강(백등강)에서 격파함으로써 (1288년) 원의 침공을 물리칠 수 있었다. 이로서 독립 직후 중국 세력을 모두 물리쳤다!
- 당시 황제였던 인종(仁宗,년똥)은 더 이상의 충돌은 막기 위해서 조공을 바치고 당시 잡아두고 있던 원나라군 포로를 전원 송환하는 등 최대한의 예우를 갖췄지만, 오로지 직접 통치만을 외쳐던 세조 쿠빌라이의 근성은 끝이 없어서 또 4차 침공을 준비하였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근성의 쿠빌라이가 사망하면서 정벌은 중단되었다.
진조는 이후 참파의 쩨봉응아의 공격으로 수도가 연이어 털리고 10대 황제 예종(睿宗,즈에똥) 황제가 전사하기까지 하는 사태를 겪자, 9대 황제 예종(藝宗,응에똥) 황제의 외척이었던 권신 호꾸이리(胡季犛,호계리)가 득세함으로써 1400년 10대 175년만에 멸망당한다.
학살로 즉위한 쩐 왕조는 다시는 다른 성씨의 찬탈이 벌어지지 않기 위하여 태상황 제도나 근친혼 등을 적극 활용했다. (9대 황제 예종(응에똥)도 태상황으로 아들 즈에똥과 폐제의 폐위를 지켜보고 사망했다.) 하지만 과거 제도나 외척 등으로 멸망하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5.5 호 왕조(胡朝, 다이응우(大虞), 1400년 - 1407년)
호꾸이리는 국명을 다이응우(大虞,대우)로 바꿨다.조선왕조삘 이후 수도를 방비가 쉬운 타인 호아(청화,淸化)로 옮겨 새로 성을 쌓고, 중앙 집권화를 꾀하는 한편으로 조세 문제를 개혁하고 최초의 화폐를 만드는 등 명에 대응할 수 있는 힘을 기르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하지만 애초에 이 지역을 노리고 있던 명은 쩐 왕조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쩐 티엔 빈(陳天平, 진천평)이 명 조정에 들어가 호꾸이리의 찬탈을 규탄한 것을 계기로 20여만 원정군을 이끌고 다이 응우를 공격하였다(1407).
호꾸이리는 명의 침략군에 맞서서 선봉으로 출전한 쩐 티엔 빈을 붙잡아 죽이는 등 선전하였지만, 명이 호꾸이리의 가혹한 정치를 비판하는 한편 쩐 왕조를 복권시키겠다고 선전한 결과 다이응우 군대는 전의를 상실하고 결국 패퇴하였다. 다음해 상황 호뀌리와 아들 황제 호한트엉(胡漢蒼,호한창)은 명군에 잡혀서, 명의 수도 북경에서 처형되었다. 1408년 베트남이 다시 중국에 합병당한 것이다. 중국식으로는 영락제 6년이었다.
5.6 중국의 재지배(1408년 - 1428년)
시즌 2
다이응우를 점령한 명은 1413년까지는 쩐왕조를 복원한 것처럼 굴었지만(후後쩐왕조), 쩐왕조의 후계가 반란을 일으키자 폐지시킨다. 이후 송대부터 사용하던 안남이라는 호칭을 다시 교지(交趾)로 돌리고 명의 일부로 통합하면서 철저한 동화정책을 실시하였다. 교지는 만다린으로 자오지'쟈오지'Jiao Zhi, 광둥어 발음으로 '코찌'였다. 혹은 말레이어에서 유래했다는 말도 있다. 이것이 서양인에게 코치Cochi로 바뀌고, 인도의 "코친"과 비교하기 위해 '코치 인 차이나' Cochi in China, 즉 "중국의 교지 땅"이라고 부른 것이 코친차이나 지방의 유래이다. 인도의 코친 + 중국의 차이나라고 코친차이나라고 그러는데, 그건 인도차이나 이야기고 원래 목적은 구별이었다.
그리고 명은 교지(베트남)에 본토와 같은 부, 주, 현 제도를 설치하는 한편, 과중한 조세를 거두고 모든 남자를 군역과 도로 공사, 광산 채굴, 염전, 진주조개 채취, 어로, 수렵 등의 부역에 동원하였다.
명은 한편으로 전통과 풍습을 금지시키고, 기존의 책들은 모두 불태우거나 명으로 가져갔다. 1414년에는 모든 부, 주, 현에 공자묘인 문묘를 설치하였고, 학교를 세워서 사서오경(사서삼경 + 예기 + 춘추)을 배포해서 성리학과 유학을 가르쳤으며, 승려를 파견하여 불교와 도교를 전파하였다. 더구나 명에서 파견된 관리들은 성실하게 일한다기 보다는 권력을 휘둘러 사리사욕을 채우는데 열중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민중의 불만이 증가하여 저항운동이 발생한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고 할 것이다.
5.6.1 람썬의 난(1418년 - 1428년)
명의 지배를 이겨내고 독립을 쟁취한 인물은 타인호아 지방의 토호였던 레 러이(黎利, 여리)였다. 레 러이는 사상적인 기반과 실질적인 전술을 세운 응우옌짜이(阮廌, 완채) 등과 혈맹을 맺었다. 완채는 문과 무가 모두 뛰어난 인물로, 난후도곤산감작이라는 시를 남기기도 했다. #. 그리고 1418년부터 스스로를 빈 딘 브엉(平定王, 평정왕)이라 칭하고 10여년에 걸친 게릴라전을 전개하였다. 이것이 바로 람썬의 난이다. 1422년 일시적으로 명과 화친한 예도 있었지만, 영락제가 사망한 1424년부터 다시 대명항쟁을 계속하였다.
명의 베트남 정책도 변화가 있었다. 영락제의 뒤를 이은 홍희제는 베트남에 대한 정책을 바꾸어 선정을 통한 교화를 추진하였지만 얼마 뒤 죽고, 1425년 즉위한 선덕제는 쟈오 찌의 정세가 악화되는 것을 보고 철수를 생각하기 시작한 상황이었다.
결국 1426년 레 러이의 군대가 찌랑(支稜,지능) 전투에서 명이 레 러이 군대를 상대하기 위해서 파견한 왕통(王通)과 유승(柳升)의 군대를 크게 이기면서 대세는 기울었다. 결국 명이 화의를 통하여 퇴각로를 열어 줄 것을 요구했고, 레 러이가 명 군대가 안전하게 후퇴할 수 있도록 처리하면서 명의 베트남 지배는 끝을 맺게 된다.
5.7 후 레 왕조(後 黎朝, 1428년 - 1788년)
1428년 4월, 레 러이는 황제의 자리에 올라 국호를 다이 비엣(대월)이라 하고, 동낀(東京, 동경, 지금의 토쿄 하노이)을 수도로 삼았다. 이 왕조는 과거 레 호안이 세운 전 레 왕조와 비교하여 후 레 왕조라고 부른다. 동낀, 즉 통킹은 훗날 베트남 북부 지방을 통칭하는 유래가 된다.
레 태조(레 러이) 사 후에는 무신 세력이 득세해 혼란기가 찾아왔다. 1442년, 20살 밖에 되지 않았던 태종이 지방 순행을 하던 도중, 이미 정계를 은퇴한 후 은둔 생활을 하고 있던 응우옌짜이의 집을 방문했다가 급사[8] 하는 일이 발생했다. 후 레 왕조 개국 공신이자 당대를 대표하던 문인 응우옌짜이는 황제를 시해했다는 모함[9]을 받아 삼족이 멸족 당했다.네토라레도 억울한데 끔살 그 뒤를 이어 생후 14개월밖에 되지 않은 인종이 황위에 올랐으나 몇년 뒤 레 태조의 아들인 폐태자 레 응이 전(Lê Nghi Dân - 黎宜民,여의민)이 인종과 섭정 황태후를 죽이고 황위를 찬탈했다. 이런 혼란기는 성종이 황위에 오르고서야 끝이 났다.
레 왕조시기에 베트남은 철저하게 유교화되었고, 남쪽으로 확장을 하여 숙적 참파를 철저히 잉여화 시켰다. 1470년 참파 제15왕조 제2대왕인 반 라체트안이 화주에 침공하자, 5대 황제 성종(聖宗,타인똥,재위 1460년~1497년)은 25만 군사를 이끌고 참파의 수도인 비쟈야를 공략하여 라체트안을 포로로 잡고, 참파를 예속 하였다. 사실상 참파는 멸망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더불어 라오스에도 세력을 뻗쳐 루앙프라방에 간접통치를 시행한다. 성종은 중국의 제도를 모형으로 삼아 베트남을 13개 도(道)로 나누었고 3년마다 과거제를 실시했다. 또한 새로운 법전인 홍덕(洪德) 법전을 공포했다.베트남판 세종대왕 후 레 왕조는 역사서인 대월사기전서를 편찬하는데, 리 왕조의 계보가 실린 가장 오래된 책이다. 다만 여기에 실린 리 왕조의 계보는 쩐 왕조가 정리한 것으로, 대월사기전서에는 황제가 아닌 왕자들이 많이 누락되어 있다. 고려로 망명한 리 왕조의 왕자들도 대월사기전서 기록에는 없으나, 화산 이씨 족보에 나온 리 왕조의 계보가 대월사기전서의 기록과 일치하여 리 왕조의 후손으로 인정하고 있다.
성종은 후 레 왕조의 전성기를 열었지만 그의 사후, 현종(히엔똥), 숙종(뚝똥)이 뒤이어 요절함으로서 급속히 힘을 잃은 결과 1519년부터 왕을 칭했던 무인 막당중(莫登庸,막등용,1529년 사망)이 1527년 6월 제위를 찬탈하면서 대월은 걷잡을 수 없는 분열에 빠진다.
5.7.1 막 왕조(莫朝, 1527년 - 1593년)와 남북 분열
막 당 중이 제위를 찬탈하자 레 왕조의 신하들은 레 왕조를 부흥시키기 위해 나섰는데,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이 응우옌 낌(阮凎,완김)이었다. 응우옌 낌은 1531년 레 디유닌(黎維寧,여유녕)을 장종(莊宗,짱똥)으로 복위시키고, 총사령관이 되어 병사를 이끌고 북상하던 중 1545년 항복을 위장한 막 왕조의 장군에게 독살되고, 실권은 사위인 찐 끼엠(鄭檢, 정검)에게 돌아갔다.
그러나 그에 불만은 품은 인물이 응우옌 끼엠의 둘째 아들인 응우옌 호앙(阮潢,완황)이었다. 막 왕조의 전투에서 전공도 세웠고, 형이 사망했기 때문에 자신이 후계자라고 믿고 있던 응우옌 호앙과 당시 실권을 장악한 찐 끼엠은 겉으로는 레 왕조의 부활을 주장하면서도 속으로는 권력을 두고 다투게 되었다.
그러나 병력에서 밀렸던 응우옌 호앙은 당시 막씨 세력과 참파의 침공이 잦았던 푸 쑤언(富春,부춘,지금의 후에시 낀타인)으로 옮겼다. 이 때가 1558년으로 이 시기를 기점으로 응우옌 정권과 찐 정권의 대립, 곧 베트남의 남북 200년 전쟁이 시작되었다. 결국 찐 정권은 1593년 막왕조의 마지막 황제(莫茂洽, 막무습)를 무너뜨리고 레 왕조를 중흥시키는데 성공하지만, 다이 비엣의 통일은 일시적인 것이었고 재건된 레 왕조도 이름뿐이었다. (대신 막씨의 잔당은 17세기 후반까지 북부 까오빵에서 버텼다.)
5.7.1.1 찐 정권(鄭王, 1545년 - 1787년)
1570년, 찐 끼엠의 뒤를 이은 찐똥(鄭松,Trinh Tong,정송)은 1572년에는 영종(英宗,아인똥)을 살해하고, 다섯 번째 아들인 세종(世宗,Thế Tông,테똥)을 옹립 하여 스스로는 평안왕이 되었다. 또 세종이 죽고(1599년) 경종(敬宗,낀똥)을 옹립 하였고, 1619년 경종을 살해하고 신종(神宗,턴똥)을 옹립하였다. 최충헌 쩌네요
또 1653년 6월부터 찐똥의 후계자인 찐짱(鄭梉,Trinh Trang,정장)은 멸망 직전의 남명으로부터 부왕으로 책봉되었다. 또 1657년 계승한 그 아들인 찐딱(鄭柞,Trinh Tac,정작)은 서왕을 자칭 하는 등, 탕롱(하노이)를 거점으로 하여 실질적인 통치자가 되었다.
5.7.1.2 응우옌 정권(阮王, 1558년 – 1777년)
한편, 응우옌 정권을 개창한 응우옌 호앙(완황)은 군사력의 열세로 인해 북의 권력을 탈환할 수 없음을 인식하고 남쪽에서의 기반을 확실히 다질 필요를 느꼈다. 응우옌 호앙이 남하하여 아이뜨(愛子)에 자리를 잡고 푸 쑤언(부춘)을 거점을 삼음으로서 남진은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다.
사실 응우옌 호앙 때 만 해도, 둘의 사이는 공통의 적인 막왕조도 있고 해서 그렇게 최악은 아니었다. 하지만 찐 정권이 후레왕조의 이름을 빌려 응우옌 호앙의 아들인 응우옌 푹 응우옌(阮福源,완복원)에게 조세를 바칠 것을 요구한 것을 계기로 전쟁에 접어들게 되었다. 이 와중에 도착한 한 명의 유럽인이 존재하였다. 알렉산드로 드 로드 신부. 알렉산드르 드 로드 신부는 프랑스 인으로 1624년에 다이 비엣에 도착하여 반년 후에는 베트남어로 포교할 수 있을 정도로 언어능력이 뛰어났다고 한다. 1627년 북부로 옮겨서 포교하던 중 다이비엣(대월)의 전통적인 지도이념이었던 유교 교의나 의식을 거부하라고 설교했다는 이유로 찐 정권으로부터 추방됐다가 다시 입국하기를 반복하였다. 약 7년 동안 다이비엣에 머물면서 드 로드는 다이 비엣의 언언, 풍속, 역사, 자원 등에 대해 많은 저작을 남겼다. 라틴어와 프랑스어로 쓴 ‘통킹의 역사’가 유명하며, 베트남어를 로마자로 표기한 ‘베트남어, 라틴어, 포르투갈어 대조사전’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이후 찐 정권과 응우옌 정권은 령 강(송 강)을 국경으로 서로 대치하게 된다.남북조시대? 구전자료에 의하면 이 북-남 양국을 당시에는 쓰 당응와이(Xứ Đàng Ngoài), 쓰 당쫑(Xứ Đàng Trong)이라고 불렀고, 문헌에서는 북하, 남하라고 불렀다. 중국, 일본의 사료에서는 교지국, 광남국이라고 불렸다. 국호나 연호는 여하간 명목상은 후레왕조 황실의 신하였기에 쓰지 않았다.
5.7.1.3 응우옌 정권의 남방 확장과 베트남 영토의 완성
한편, 응우옌 호앙이 기반을 닦자, 참파는 더 이상 위협을 좌시하지 못하고 1611년 먼저 공격하게 된다. 그러나 1471년 후레 왕조 성종에게 격파당한 뒤 완전히 쇠퇴기에 있었던 참파의 공격에 응우옌 호앙은 마치 기다린 것처럼 반격에 나서서 영토를 다이 라인 갑까지 확대하였다.역관광 1653년 참파가 다시 공격해오자 당시 응우옌 정권의 수장인 응우옌 푹 떤은 다시 참파군을 격파하고, 영토를 판랑강까지 영토를 확장하게 된다.안습 이제 응우옌 정권의 영토가 오늘날의 카인 호아 성을 넘어 판두랑가까지 확대되자 참파는 수도를 남쪽으로 옮길 수 밖에 없게 되었다. 7대인 응우옌 푹 주(완복조阮福凋)의 시기에 이미 참파는 판리를 중심으로 명맥만 유지하는 상황이었다.지못미
1650년경의 베트남 영역
이후 응우옌 정권은 캄보디아로 눈을 돌렸다. 당시 캄보디아는 시암(후의 태국)의 속국이었고, 시암의 지배에 벗어나기 위해 당시 캄보디아 국왕인 체이 쳇타 2세는 혼인 동맹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늑대를 몰아내려고 호랑이를 불러온 것이었다. 사돈 관계를 빌미삼아 응우옌 정권은 캄보디아로 세력을 확장시켜 나갔고, 당시 잦았던 왕위 계승 분쟁 때마다 개입하여 영역을 확장시킬 수 있었다. 동남아판 무왕? 1690년 캄보이다의 부왕(副王)인 앙논이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응우옌 정권은 1698년까지 쁘르이 노꼬(ព្រៃនគរ)를 비롯한 쟈 딘, 미 토, 동 나이, 비엔 호아, 바 라이 등을 병합하였다. 이것으로 응우옌 정권의 영토는 메콩강에 이르렀고, 다이비엣(대월)인, 화교의 이주도 장려되었다.
1714년에는 시암만에 인접해 있으며 과거에는 캄보디아의 영토였던 하 띠엔을 다스리던 이주 중국인인 막구(鄚玖)가 시암의 위협으로 투항하였고, 1757년에는 캄보디아에서 일어난 반란을 구실로 델타 북부까지 할양받았다. 그 외에도 바 싹, 쩌우 독 등도 세력에 넣어 베트남의 남부 영토가 완성되게 되었다. 이 응우옌 정권에 의해 베트남은 극적으로 확장을 하여 현재의 베트남 영토가 완성되었다. 더 나아가 현 캄보디아의 시아누크빌, 캄포트, 케프, 스바이리엥 서남부 해안지대까지 빼앗는다.
1760년, 완성된 베트남 영토
그런데, 이런 남북국의 대립에 전혀 다른 형태의 변수가 발생한다.
5.8 떠이썬당의 난과 떠이썬조 西山朝(1771년 ~ 1802년)
바로 베트남 중부 떠이 썬(西山, 현재의 빈딘平定 성)지방에서 일어난 응우옌 3형제(응우옌 반 냑(阮文岳, 완문악), 응우옌 반 르(阮文呂,완문려), 응우옌 반 후에(阮文惠,완문혜))가 세운 떠이썬 정권(1771년)이다. 성이 응우옌이지만 원래 성은 호씨로써 남쪽 응우옌 정권과는 관계가 없다. 첫째 왕문악은 일부에선 응우옌 원웨로 오독하기도 한다. 응우옌 3형제의 이 봉기가 베트남 역사상 최대 규모의 농민운동인 ‘떠이썬당의 난(西山黨, 서산당의 난)’이다.
이것이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사회의 문제점을 파악하여 고통받는 농민을 구제한다는 목적을 밝힘으로써 농민의 참여를 이끌어내는 한편으로, 찐 정권에 복종하는 척 하면서 응우옌 정권을 먼저 멸망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역시 복고운동은 만고의 인기 떡밥
1773년 옛 참파의 수도 꾸이년(비자야)을 손에 넣어 이곳을 근거지로 삼았고, 1774년에는 응우옌 정권의 수도인 푸쑤안을 함락시켰고, 1777년에는 남부 자딘(Gia Định,가정嘉定,옛날 사이공 = 지금의 호치민)을 함락하면서 남 응우옌 정권은 일족이 모두 도륙되었다. 이 때, 진주군 부사령관이 된 레꾸이돈이 저술한 「무변잡록」(撫邊雜録)은, 동시대 사료가 부족한 광남 응우옌 씨 연구의 중요한 사료가 되고 있다.
이후 떠이 썬 정권은 응우옌 반 냑(阮文岳,완문악)이 찐 정권에게 훼이크다 이 병신들아를 날리고 중부 지역의 황제를 선언한 다음(1778년), 막내 응우옌 반 후에(阮文惠,완문혜)가 레 왕조에 대해 북벌을 선언하여 찐 정권마저 몰아낼 수 있었다. (1786년) 중부의 응우옌 정권과 북부의 찐 정권을 차례로 물리치면서 남북국시대가 종식된 것이다. 이때 라오스 방면으로 세력 확장을 하던 서산 왕조 태조 응우옌반후에는 응에안에 있던 카이산이 병력을 이끌고 씨앙쿠앙에 침입하게 하여 그곳의 영주에게 서산 입공을 요구했다. 이에 열받은 원래 주인 위앙쨘 왕국(라오스의 란쌍 왕조의 후예이자, 라오스 삼왕조시대의 하나, 한글판 위백의 비엔티안) 국왕 차오 난타센은 씨앙쿠앙에 파병해서 카이산 군을 제압했다. 그러나 다음 해인 1788년에도 3000의 병력을 거느린 카이산이 다시 침입하여 결국 차오 난타센은 씨앙꾸앙의 서산 입조를 인정했다. 그리하여 씨앙쿠앙은 위앙쨘 왕국의 영토이면서 베트남 왕조의 세력 하에 놓인 반독립적인 매우 불안정한 지역이 되었다. 결국 이리저리 설치고 들쑤시고 다녔다는 이야기 위앙쨘 왕국이 멸망하면서 씨앙쿠앙은 시암 짜끄리 왕조의 영지가 되었지만, 1893년에 프랑스가 이전 루앙프라방 왕국의 종주권을 시암에서 획득하면서, 1899년에 시앙쿠앙은 통킹과 루앙프라방으로 분할된 형태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편입되었다. 지금은 양국 국경에 나뉘어져있는 동네다.
1788년, 떠이썬의 세력을 두려워한 후레조 황제 민종(愍宗, 찌우쫑)(민제는 마지막 황제에게 붙이는 이름) 소통제(昭統帝)에 의해서 청군이 들어오자 떠이썬군은 청군 20만도 박살냈다. 후덜덜 일단 선봉군을 몰아낸 떠이 선 정권은 청에 사대하는 조건으로 베트남 지방에서의 통치권을 확인 받는다. 응우옌 3형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던 후레 왕조마저 멸망시키고 새로운 왕조를 수립하였다. 레조의 황제는 청으로 도망하고, 떠이썬은 일시적으로 베트남을 통일하였다.
하지만 응우옌 씨에게는 최후의 생존자이며 근성가이인 응우옌 푹 아인(阮福映,완복영)이 있었다.
5.8.1 근성의 응우옌 푹 아인(阮福映)
- 응우옌 푹 아인은 떠이썬 정권이 중부로 물러나 경비가 허술해진 틈을 타서 일시적으로 응우옌 정권 시절의 일부 영토를 수복하기도 하지만 다시 떠이 썬 정권에 밀려서 도주하게 된다. (1차 시도)
- 이후 시암 세력을 끌어들여서 떠이 썬 군과 싸우게 하지만, 1785년 떠이 썬 군과 시암 군 사이에서 벌어진 전투가 떠이 썬의 압승으로 끝나면서 실패한다. (2차 시도)
- 이후 응우옌 푹 아인은 당시 선교활동을 위해 베트남에 있던 프랑스 아드랑의 주교인 피에르 피뇨 드 비엔느(Pigneau, 1741년~1799년)를 통하여 프랑스에 원군을 요청하게 된다. 응우옌 푹 아인의 부탁을 받아들인 아드랑 주교는 1787년 프랑스에 도착하여 루이 16세를 알현하고, 베르사유에서 다이비엣과 프랑스의 공수 동맹 조약에 조인했다. 이 조약은 프랑스 국왕이 군대를 다이비엣에 파견하여 도와주면, 다이비엣은 다낭과 뿔로 꼰도르(지금의 꼰 다오)섬의 영유권 및 주권을 양도하고, 다이 비엣 전역에 대해서 프랑스가 상업권을 독점한다는 내용이었다.
전격 전쟁 이기려고 나라팔기그러나 이 조약은 원정군 편성을 위임받은 인도 주재 프랑스군 사령관이 원정이 어렵다고 판단하여 원정 자체를 취소하면서 실현되지 못하였다. (3차 시도)
- 그러나 하지만 근성인 응우옌 푹 아인에 못지 않게 근성인이었던 아드랑 주교는 포기하지 않고, 자기 힘으로 무기와 탄약을 구입하고 군대를 조직하여 다이비엣 원정군을 조직하였다. 응우옌 푹 아인도 포르투갈과 영국에도 원조를 청하는 한편, 캄보디아 병력을 징병하여 기회를 노렸다. (이 정도 되면 다국적군이 따로 없다. 엮인 나라만 베트남, 프랑스, 영국, 포르투갈, 캄보디아의 5개국이다(;;)
그런데, 떠이썬 왕조가 핵분열 분열을 시작했다!
5.8.2 떠이썬 왕조의 분열과 멸망
떠이썬 세형제로 돌아가자. 1787년 찐 정권 멸망 후, 응우옌 3형제는 전국을 나누었다.
차례로 응우옌 반 후에, 응우옌 반 냑, 응우옌 반 르
- 쿠앙남(廣南,광남) 이북의 북부는 북벌을 완수한 셋째 북평왕(北平王) 응우옌 반 후에에게 주었고,
- 남부는 동정왕
마법사(東定王) 둘째 응우옌 반 르 (阮文呂,완문여)에게
- 꽝응아이(廣義,광의)에서 빈투언(平順,평순)까지의 중부는 첫째이자 황제인 응우옌 반 냑이 먹고, 중앙 황제를 칭했다.
그런데 둘째 응우옌 반 르가 1787년에 급서하고, 둘만 남은 것이다. 북벌을 감행했고, 북부의 알짜배기 땅을 먹은 응우옌 반 후에는 1788년 기어이 형과 대립했고, 기어이는 푸쑤안에서 황제를 칭했다. 이른바 푸쑤안 조정(富春朝廷, 부춘조정. 현 후에)의 꾸앙찌응 황제이다. 남쪽의 중앙 황제의 조정은 뀌년 조정(歸仁朝廷, 귀인조정)이라고 불렀다. 떠이선 정권에서 푸쑤안이랑 뀌년이 대립하였지만 푸쑤안 조정이 더 힘이 쎘기에, 이후의 연호는 귀인조정의 태덕泰德에서 푸쑤안 조정의 광중(光中 = 꾸앙찌응 Quang Trung)으로 옮겨가게 된다. 응우옌 반 후에는 전 베트남의 통일에서 더 나아가 옛 베트남의 고토인 광동, 광서를 수복하고자 하였다.(...)환빠 쩌네
꾸앙찌응(꽝쭝) 황제
1788년 쟈딘(가정)이 도로 응우옌 정권에게 넘어가면서, 꾸앙찌응 황제는 토벌 군사를 계획했지만 마흔을 채우지 못하고 병사했다(1792년). 향년 39세. 셋째에게 뒤통수 당했던 형 중앙 태덕 황제는, 다음 해 죽고, 이로서 푸쑤안 정권에서는 완광찬(阮光纉, 완홍서(阮弘瑞))가, 귀인 조정에서는 효공 완문보(孝公 阮文寶)가 뒤를 잇지만 두 형제의 분열로 힘을 잃은 뒤였다.
응우옌 푹 아인은 차례로 싸 덱, 빈 롱, 미 토, 사이공을 점령하고 세력을 형성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1802년, 수도 탕롱이 떨어지면서 떠이 썬 당은 멸망했다. (마지막 4차시도) 응우옌 푹 아인이 세운 응우옌 왕조가 전 베트남을 통일하여 지배하게 된다. 결구 떠이썬은 죽쒀서 응우옌 정권 준거지 뭐
남북분열의 기나긴 역사가 끝이 나고, 베트남의 마지막 왕조 응우옌 왕조가 열린 것이다. 그리고 외국 군대 빌릴 때는 마음대로지만, 공짜는 아니란다. 이것이 또다른 복선이 되기 시작한다.
6 월남越南 응우옌 왕조(阮朝, 1802년 - 1945년)
쟈롱 황제의 깃발.
뜨득(사덕,4대 황제인 익종(翼宗) 사덕제(嗣徳帝) 황제 때인 1863년 공식 국기가 된 롱띤(long tinh, 용정(龍情). 노란색은 황제의 황색이고 붉은 원은 남쪽을 의미한다. 1878년까지 사용.
응우옌 푹 아인은 연호를 쟈롱(嘉隆,가륭)이라고 짓고 황제에 즉위하니 곧 세조世祖 고황제高皇帝(1762년 - 1820년)다. 쟈롱은 남조의 수도 쟈딘(사이공)의 "자"와 북조의 수도 탕롱(하노이)의 "롱"을 따서 지은 것으로, 통일 베트남의 황제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수도는 중부의 푸쑨이었다.
응우옌 왕조는 건국 뒤 청나라에 사신을 파견하며 자국을 인정할 것과 함께 자국의 호칭을 앞서 한대에 존재했던(혹은 새 이름 남과 이전의 월을 합쳐서) '남월'로 고쳐불러줄 것을 청했는데, 이것이 중국 남부 지역을 점령한 과거의 남월과 연결 지어 생각될 것을 우려한 청나라 조정은 '남월'을 뒤집어 '월남'이라 부르는 건 어떤지 제안했고, 응우옌 왕조 역시 이에 찬성하면서 베트남은 비엣남(월남)이 되었다.마치 조선삘 이후 조선, 류큐 왕국, 미얀마와 함께 청나라의 제후국이 되었다. 그러나 이후 국호를 다이 남(大南, Dai Nam)으로 변경하였다.
응우옌 왕조는 베트남의 최후 통일 왕조이자 최대의 왕조였다. 이미 작은 속국으로 전락해버린 참파를 완전히 멸망시켰으며 캄보디아까지 침략하여 종속시켰을 뿐만 아니라 꼭두각시 여왕을 세워 진서성(鎭西城:쩐떠이성), 프놈펜은 진서부(鎭西府:쩐떠이부)로 베트남의 한 지역으로 완전 병합하여 버렸고, 캄보디아의 모든 문물을 베트남식으로 고쳐서 완전 동화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캄보디아인들이 봉기를 일으켜 태국이랑 함께 베트남을 몰아내자 다시 캄보디아를 속국으로 만들었다. 결국 캄보디아는 태국에는 1년, 베트남에는 3년에 한번씩 조공을 하는 속국셔틀이 되어 완전 종속이 되었으며 더 나아가 베트남은 태국이랑 메콩강(구룡강)을 경계로 캄보디아를 분할하자고 꾸미기도 하였다. 또한 라오스에도 타인 호아에서 꾸앙 찌까지 접해있는 란싼에 진녕부(鎭寧府:쩐닝부) 등 6부(府)를 설치하여 간접 통치를 하였다.
18세기 중반에 제국주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프랑스의 본격적 개입이 시작된다. 이후 1787년 베르사유 조약까지 맺을 정도로 프랑스는 베트남에 대해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영국이 청나라와 아편전쟁과 같은 무력 수단을 통해 난징 조약을 맺는 것을 보고, 인도차이나에 대해서도 무력을 앞세운 정책을 구사하게 된다.
6.1 다낭 항구의 시위와 제1차 사이공조약(1862년)
1847년 2월 26일, 프랑스는 베트남이 선교사를 박해하는 것을 구실로 비슷한 행동을 한 조선에 병인양요를 일으킨 것처럼 다낭 항구에서 무력시위를 하면서 사형 선고를 받은 프랑스 선교사 5인의 석방을 요구한다. 당시 베트남의 황제였던 티에우 찌 데(紹治帝, 소치제)는 프랑스의 요청을 받아들여서 선교사들을 석방하라고 명령하였고, 프랑스 함대는 3월 16일 다낭을 떠났다.
그러나 4월 15일 다시 선교사들의 석방을 요구하면서 프랑스 함대는 다낭에 정박 중이던 베트남 함대 5척을 격파시켰고, 그 결과 베트남은 사망자 40여명, 부상자 90여명, 행방불명 1000여명의 피해를 입었다. 티에우 찌 데는 이미 약속대로 선교사들을 석방한 상태였기 때문에 매우 격노하였으나, 군사적인 힘에서 밀려 대책이 없었다. 그 해 11월에 티에우 찌 데는 아들 뜨 득 데(嗣德帝, 사덕제)에게 모든 외국인을 사형에 처하라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이후 뜨 득 데도 티에우 찌 데의 정책을 계승하여 쇄국적인 태도를 유지하였다. 그 과정에서 많은 선교사들이 처형되었다. 이후 프랑스는 무력으로 베트남을 공격(1858년 ~ 1862년)하였고, 결국 황제는 판 타인 잔(반청간潘淸簡) 등을 사이공에 파견해 프랑스, 에스파냐와 베트남 사이에 제1차 사이공 조약(1862년 6월 5일)이 맺어졌다.
조약에 따라 다낭 등 세 항구가 개항되었고, 콘손섬 및 플로콘도르와 코친차이나의 동부 3성省이 프랑스에 할양되었으며, 프랑스인에게 전국에서 그리스도교 포교의 자유와 메콩 강의 항행권을 부여하기로 결정하였다. 뭐 다낭 준 건 옛날 계약대로네요 조약이 비준된 뒤 응우옌 왕조의 황제는 3성의 상환을 요청하기 위한 특사를 파리에 파견하였고, 프랑스 외무당국도 한때 조약의 재검토를 시작하였으나(1864년 반환조약), 비준하지 않고 오히려 사이공 현지의 프랑스군이 캄보디아에서 그들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코친차이나의 서쪽 3성을 마저 점령함으로써(1867년) 남부의 6성은 사실상 프랑스령 코친차이나가 되었다. 베트남은 프랑스의 식민지로 전락하기 시작한다. 프랑스는 베트남에게서 란싼 6부 땅을 뜯어서 라오스에 되돌려 주었고, 역시 프랑스의 보호령이 된 캄보디아에게 베트남이 뜯어간 시아누크빌, 케프, 캄포트, 스바이리엥을 뺏어서 캄보디아에 돌려주었다.
6.2 하노이 침공과 제2차 사이공조약(1874년)
따이남끼(대남기大南旗), 1878년부터 프랑스령 코친차이나의 사실상 속국인 대남으로서 사용.
프랑스가 코친차이나를 정복한 목적 가운데 하나는 메콩 강을 거슬러 올라가서 중국 원난(운남성)으로 통하는 무역로를 개척하려는 것도 있었다. 그러나 2년 동안 메콩 강을 탐험한 두다르 드 라그레(Doudart De Lagree)는 메콩 강 상류가 급류와 암초가 많아 무역로로 적당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대신 통킹에서 홍하를 통하는 편이 좋다는 의견을 내었고, 프랑스는 다시 통킹의 델타 지방을 정복하여 홍하를 지배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결국 프랑스 상인 뒤퓌의 문제(통킹만 사건 혹은 통킹 사건)로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를 정복한 프랑스군은 제2차 사이공조약(뒤프레 조약)을 맺는다.
프랑스는 이 조약에서 베트남의 주권과 독립을 인정하는 대신, 코친차이나 6성의 완전한 식민지배와 함께 하이 퐁, 하노이 등의 항구와 홍하(송코이강)를 통상을 위해 개방하게 하였다. 또 하노이에 영사관을 개설하고 위에 에는 이사관을 주재시킬 권리를 얻었다.
6.3 청의 개입과 제1차 텐진조약(텐진 담판, 1882년)
베트남과 프랑스 사이의 새로운 관계에 대하여 베트남의 종주국을 자처하던 청은 아르망 조약이 체결된 것을 계기로 자신들이 승인하지 않은, 베트남과 외국사이의 조약은 무효라고 선언하게 된다. 당시 청 조정은 베트남에 파견한 유영복이 이끌던 흑기군에 더하여 새로 3만 5천의 군대를 파견하면서 방위 체제를 강화하였다. 그에 대하여 프랑스 군 원정군 사령관인 쿠르베와 그 후임인 밀로는 청 국경과 인접한 랑 썬과 뚜엔 꽝을 점령하는 강경한 모습을 보였다.
프랑스의 강경 대응에 당황한 청은 결국 이홍장을 파견하여 프랑스 대표 푸르니에와 제1차 텐진조약(텐진 담판, 1882년)을 맺어서, 베트남 북부(통킹)에서의 양국 주둔군의 철수와 베트남과 외국사이의 조약을 존중할 것을 약속하였다. 또 베트남 국왕의 위신을 떨어뜨리지 않을 것이며, 보승(保勝)을 개항하여 중국과 프랑스가 여기에서 무역하며, 또한 베트남을 중국의 영토와 같은 비율로 세금을 징수하고, 중국과 프랑스는 경계를 설정하여 베트남 북부(통킹)의 자치를 보호한다고 하였다.
이어서 1883년 제1차 후에조약(계미조약, 알만 조약)으로 베트남이 프랑스의 보호령이 되었다. 남부의 빈트안(평순)을 코친차이나 식민지에 할양하고, 북부의 타인호아(청화), 게안(예안), 하틴(하정)의 3성을 통킹에 편입하며, 안남 지방은 관세, 토목을 제외하고 응우옌 왕조의 황제에 의해 통치되며, 수도 후에에는 프랑스 대사관을 둘 것, 통킹은 보호령으로서 실질적으로 프랑스의 관리하에 둘 것 등이 내용이었다.
이어서 다음 해에는 제2차 후에조약(갑신조약, 파트노톨 조약)으로 프랑스의 대표인 총독이 베트남국의 외교권을 총괄하고, 후에 황궁에 프랑스 수비대를 상주시키는 것 등을 추가하였다. 베트남판 을사조약 이때부터 베트남은 안남(Ahnam)국이라는 이름으로 돌아가게 된다. 안남이 안남도호부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을 이용한 프랑스의 노림수였다. 안남은 지방이름으로 사용 될 때는 수도 후에를 포함한 중부지방을 의미하는 것이었지만, 베트남 전체를 의미하는 의미로도 프랑스 서적에서 자주 사용되었다.
6.4 청불전쟁(1884년 8월 ~ 1885년 4월)과 제2차 텐진조약(1885년)
그러나 당시 청의 실권을 쥐고 있던 서태후가 ‘베트남을 프랑스에게 넘길 수는 없다’는 훈령을 발표하고, 통킹 주둔군의 철수를 거부하면서 1884년 8월 6일 청의 선전포고로 프랑스와 청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게 된다. 이것이 바로 청불전쟁이다. 청일전쟁 프리퀄
이 전쟁은 청조가 우세한 상황이었으나 장기전에 따른 피해를 우려한 이홍장의 화의로 최종적으로 중국에 어떠한 요구도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전쟁을 끝냈다., 영국, 미국, 독일의 조정으로 청은 1885년 6월 9일 프랑스와 제2차 텐진 조약을 맺고 안남(황제가 다스리는 중부)과 통킹에 대한 프랑스의 보호권을 승인하고, 베트남의 두 곳을 청과 프랑스의 무역 구역으로 지정하고, 베트남에 대한 종주권을 포기하였다. 그 외 중국 내부로는 프랑스 화물은 베트남과 광서 변경에서 관세율을 감하기로 하고, 이후 중국에서 철도를 건설할 때 프랑스와 협상하도록 하였다.
이것은 베트남에 대한 오랜 2100년간의 중국의 영향력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프랑스의 본격적인 식민지가 되었음을 의미하고, 청 내부에서도 이 결과로 인하여 큰 충격을 받게 되고 아편전쟁의 패배 만큼이나 청나라에 큰 충격을 주었고, 이후 양무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이마저도 박살나는 것이 바로 마지막 제후국이었던 조선을 잃는 청일전쟁으로 이 3차례의 전쟁을 거치면서 청은 완전히 몰락한다.
바로 전 해에 조선에선 갑신정변이 일어나, 청과 일본은 양국 모두가 조선에서 물러난다는 텐진 담판과 비슷한 필의 "텐진 조약(1885년)"을 체결하게 된다.왜 이렇게 텐진조약이 많냐 그리고 청불전쟁을 거친 뒤 그랬듯이, 청일전쟁(1894년 7월 ~1895년 4월)을 거친 후 시모노세키 조약(1895년 3월)을 통해 조선도 마찬가지로 사이좋게 식민지로 굴러 떨어진다.
이제 베트남은 프랑스의 반(?) 식민지가 되었다. 앞서 말했지만 응우옌 왕조는 이후에도 괴뢰 왕조로 1945년, 아니 베트남국까지 하면 1955년까지 살아남았다.(정권은 살아남아도 중앙정부의 역할을 재대로 할수없었음. 만주국보다도 못했던것...) 중부지방, 즉 안남에서의 명목적 자치만이 보장되었다. 프랑스의 지배는 중국보다 더 가혹한 형태로 나타났다.
6.5 프랑스 식민지시대(1887년 - 1954년)
당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지도.
Indochine francaise(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깃발.
1923년부터 썼고, 일본의 베트남제국이 세워진 1945년 3월 9일까지 사용. 베트남 어로는 동즈엉투옥팝(Đông Dương thuộc Pháp(동양속법東洋屬法)이라고 읽었다. 대략 번역하면 프랑스(법국)령 동양.
우선 총독들이 문제였다. 초대 베트남 통감인 사르네 제독은 정치를 전혀 모르는 인물이었고, 당시 코친차이나의 상황은 후에 조정이 임명했던 관리나, 조세 명부, 관청 문서 등이 전혀 남아있지 않은 최악의 상황이었다. 결국 실질적인 통치가 시작된 것은 1863년 부임한 그랑디에 제독이었다. 그랑디에 제독은 5년간 지배하면서 조세제도를 개혁하고, 공공사업을 벌이는 한편 통역 학교를 설립하는 등 통치의 기초를 다졌다. 본격적인 통치는 인도차이나에 총독부가 설립된 이후였고, 그 총독들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이 1897년 인도차이나 총독으로 부임한 폴 두메이다.
폴 두메는 강력한 동화 정책과 본국 중심의 식민지 정책을 단행하였다. 당시 적자 상황이었던 인도차이나 경영을 위해 예산을 높이 책정하고, 이를 조달하기 위해 인두세를 500%, 토제세를 150% 인상하고 각종 간접세를 신설하기 시작했다. 우선 술에 관한 법률을 개정하였다. 모든 술 제조와 판매에 관한 권한을 프랑스 기업인 퐁텐느에 부여하고, 마을마다 소비량을 할당하여 강제로 술을 마시게 하였다. 집에서 술을 마시는 것은 금지되었고, 술을 만들다 발각되면 감옥에 가거나 재산이 몰수되었다. 이 조치로 퐁텐느는 자본금 350만 프랑을 투자하여 연간 200에서 300만 프랑의 이익을 거둘 수 있었고, 그에 비례하여 베트남의 술값은 1902년 5센트이던 것이 1906년에는 29센트로 4년 사이에 6배 가까이 폭등하였다. 소주가 천원에서 6천원 돼서 한잔 먹기도 버거워지는 수준의 폭등
또 베트남인들은 명절마다 집에서 담은 술로 축제를 벌이던 관습이 있었다. 따라서 총독부의 술 제조 금지령은 베트남 생활 문화의 핵심을 파괴한 행위였다.
이후 폴 두메는 소금을 전매하였고, 소금 값은 10년 만에 5배로 상승하였다. 거기에 아편마저 독점 판매하여 폴 두메가 물러났을 때 총독부의 아편 수입은 취임할 때의 2배인 150만 프랑이었고, 아편 흡연자 역시 2배 이상으로 늘어있었다. 바로 다음 시기 조선총독부 역시 토지조사 이후 높아진 세금 + 소작료, 술 제조 금지, 소금, 담배, 인삼의 전매 등으로 마구 식민지 조선인들을 쥐어짜게 된다.
폴 두메가 취임 전에는 적자였던 인도차이나의 예산을 흑자로 돌렸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하는 인물들도 있는 것 같지만, 전체 예산의 25%를 술, 아편, 소금의 전매로 조달했다는 문제점도 안고 있었다. 폴 두메의 가장 큰 악정은 베트남의 토지를 프랑스에서 이주해 오는 기업과 사람들에게 나눠주면서 베트남 민중들의 생활 기반을 빼앗은 것이다. 이 결과 코친차이나의 토지 중 총 36만 헥타르가 프랑스인 이주자에게 불하되었다. 여기에 소수의 대지주가 동참하면서 토지 집중은 심화되었고, 전체 국민의 90%에 달했던 농민층의 양극화와 극빈층의 붕괴를 초래하였다. 이런 악조건은 나중에 인도차이나 공산당 조직이 결성되는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정말 어디선가 많이 본 것 같다
여기에 프랑스 식민통치자들은 베트남을 지배할 때 베트남의 전통적인 유교 사상을 말살하기 위해서 베트남어를 로마자로 표기하는 국어(꾸옥응으)를 사용하게 하였다. 근데 사실 그 자체는 그렇게 탄압 정책으로 보기 힘들다. 중국이 한국을 동방예의지국이라고 불렀다면, 베트남은 남방예의지방이라고 불렀다. 그만큼 유교화 된 지방이었다는 이야기. 검색창에 쳐보세요
오히려 꾸옥응으가 베트남 독립운동에 기여한 것도 적지가 않다. 애초에 꾸옥응우 자체는 17세기 초에 기본적인 표기법이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그전에 쓰이던 쯔 놈은 매우 불편했다. 우리나라로 치자면 꾸옥응으는 한글(훈민정음)이고, 쯔 놈은 이전에 쓰이던 이두와 향찰 수준이었다. 오히려 프랑스는 베트남어 알파벳 표기법이 아닌 프랑스어 전용을 계획하고 있었고, 이에 베트남인들이 반발하자 차라리 꾸옥응으를 쓰자고 한 것이다. 일어 전용을 계획하던 일제가 일단 한동안은 한글이나 출판을 지원하면서 한문을 몰아내려한 것에 빗대면 이해가 되...려나? 꾸옥응으의 보급 이후 인쇄나 출판이 활발해지면서 계몽운동은 더욱 용이해졌고, 베트남인들의 저항의식은 더더욱 확산될 수 있었다.프랑스: 어 이게 아닌데;;
6.5.1 베트남 독립운동의 발아
베트남 지식인들은 이에 분노했고 서양 학문을 배우자는 것과 외세를 몰아내자라는 의견이 높아졌다.
프랑스의 침략 초기부터 계속된 게릴라식 무장투쟁이 모두 실패로 돌아가면서 두 가지 움직임이 새롭게 등장하였다. 하나는 특정지역에만 국한 되었던 투쟁을 전면적이고 조직적인 투쟁으로 발전시켜 나갈 것을 지향하는 움직임으로 다시 국내의 모든 저항세력을 규합해서 무력 투쟁을 벌이자는 부류와 국제 사회의 지원을 기대하는 부류로 나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이래 벌어진 외교파와 무장독립파의 논쟁에 비유할 수 있으..려나?), 다른 움직임은 프랑스 식민 지배는 물론이고 응우옌 왕조를 비롯한 봉건체제 자체를 타도 대상에 포함시키는 형태였다.
여기에 프랑스에 대한 저항의식이 가미되면서 초기 베트남의 민주주의와 독립운동은 판 보이 쩌우(潘佩珠,반패주)와 판 쭈 찐(潘周楨,술주정반주정)에 의해서 주도되었다. 판 보이 쩌우가 군주제를 옹호하고 외세의 힘(특히 일본)을 빌려 프랑스를 물리치려는 생각으로 동유 운동(일본으로 유학가자는 운동)을 전개한 반면, 판 쭈 찐은 군주제를 부정하고 프랑스의 도움으로 근대화를 이룩하려 하였기 때문에 군주제를 비판하는 글을 발표하고, 프랑스를 도와서 개혁을 이루려는 모습을 보여주게 되는 것이다.
6.5.2 베트남 국민당(1927년 - 1930년)
베트남판 신간회/사실 신간회보다는 효과가 좋았네요
이렇게 분열된 운동을 하나로 규합시킨 계기가 된 인물이 응우옌 타이 혹(Nguyễn Thái Học, 阮太學 완태학)이었다. 응우옌 타이 훅은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하노이의 인도차이나 대학을 다니면서 사회주의에 의한 사회개혁에 흥미를 가지기 시작하였다. 1926년에는 친구들과 남 동 서사를 설립해서 유럽에서 발생한 사회 개혁 주장을 게재한 출판물을 제작, 판매하였고, 1927년에 지지자를 모아 무력 혁명을 통한 베트남 독립을 위하여 베트남 국민당을 창설한다. 이것이 베트남 국민당 운동이다. 베트남 국민당은 1929년에 당원수가 1500여명에 이를 정도로 빠르게 성장하였지만, 하노이에서 발생한 프랑스인 바쟁 살인 사건의 주범으로 지목되면서 인도차이나 총독부의 탄압을 받았다. 상황을 타개 하기 위하여 1930년 엔 바이에 위치한 프랑스 군 막사를 공격하면서 무장 봉기를 일으켰으나, 프랑스군의 반격으로 결국 실패하였다. 이 결과 몇천명의 당원이 체포되고, 응우옌 타이 훅은 사형에 처해졌다. 이 사건을 계기로 베트남의 독립운동은 민족주의, 비공산주의 계열에서 공산주의 계열의 주도로 바뀌게 된다.
그리고 이를 주도한 베트남 근대사 최고의 먼치킨 호찌민의 지휘로 베트남 민족주의 세력은 공산주의의 세력의 영향력 속으로 규합된다.
6.6 제2차 세계대전(1941년 - 1945년)과 독립전쟁 확산
제2차 세계대전 1940년 비시 프랑스의 페탱 정권이 독일에 항복하자 일본은 이 기회를 틈타 대다수가 유럽국가의 식민지였던 동남 아시아로 세력을 확장시켰다. 그 명분은 당시 일본에 저항하던 중국 장개석정권을 압박하는 것이었고, 그 과정에서 당시 비시정권이었던 프랑스의 허락을 받아 최대 25000명의 인도차이나 파견군을 베트남에 진주시켰다.
1941년 말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자 히틀러는 일본이 연해주를 공격하여 전쟁수행에 도움을 주기를 원했다. 일본의 환심을 사기 위해 비시 프랑스 정부를 압박하였다. 이에 따라 25000명의 파견제한이 사라졌고, 인도차이나의 군사시설을 마음껏 이용할 수 있으며, 인도차이나에서 생산되는 물품을 마음껏 수탈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상 프랑스 총독부와 일본군 사령부 간의 이중권력이 생긴 셈이다. 공납을 프랑스 따로 일본 따로 바쳐야 하니 베트남 국민들이 바쳐야 할 것들이 엄청났고 이것이 독립운동이 확산되는 계기를 가져온다.
1941년 베트남 공산당은 독립운동 조직인 베트남독립동맹(Việt Nam Ðộc Lập Ðồng Minh Hội , Viet Minh)을 결성하고, 호치민이 지휘를 맡았다. 공산당에 의해 창건되었지만 성향에 관계없이 조직원을 받아들여 1943년쯤 가면 베트남 내에서 가장 활발한 독립운동 세력이 된다.
1944년 전세가 불리해져 일본군이 필리핀에서 패망하자 일본 제국 남방군 사령부를 사이공으로 옮기게 되면서 인도차이나 지역의 중요성이 커졌다. 그러나 비시 프랑스 정부가 몰락하자 프랑스 총독부는 자유프랑스쪽에 갈아타려는 움직임을 보였고, 이에 불안감을 느낀 일본이 쿠데타를 일으켜 프랑스 총독부를 폐지시키고 행정권까지 장악한다. 그리고 바오다이 황제를 수반으로 한 괴뢰국인 베트남 제국만주국 짝퉁을 만들었다.
베트남 제국(Đế quốc Việt Nam, 데 꾸옥 비엣 남) 국기. 건곤감리 중에 꾸에리(리괘)를 사용했다.태극기?
일본어로 베토나무 테이코쿠(ベトナム帝國).
그리고 일본의 태평양대전으로 엄청난 식량수탈을 당하면서 1945년 초 인구의 10%에 가까운 200만명이 굶어죽는(...) 대기근을 겪으면서 일본에 대한 저항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10]
참고로 프랑스는 1945년 끝물인 일본에게 무릎을 꿇었다. 당시 프랑스군에는 베트남인들이 많았는데 이들은 계속되는 핍박에 질려 있었다. 이들은 일본군에게 투항[11]했고, 프랑스군이 어디있고 무엇을 하는지에 대한 정보를 일본측에 제공하였다. 이는 프랑스가 참패하게된 원인이 되었다. [12]
비시정부가 1945년 3월에 몰락하고, 더군다나 바오다이 황제는 프랑스를 적대하는 일본군에게 협력을 했다. 이 사이에 일본군의 명호작전에서
베트남인들이 프랑스군에 대한 정보를 넘겨준데다 베트남인이 대부분인 이 프랑스군에서 사기가 낮을대로 낮은 이들이 일본군과 제대로 싸울리 만무했다.
일본에게 프랑스가 무릎을 꿇은 이 사건은 동남아 국가들에게는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고, 이는 베트남을 포함한 동남아 국가들의 연쇄독립을 촉발시켰다.
여기에 절대적으로 보이던 프랑스가 일본에 굴복했다는 것부터가 베트남의 독립 투쟁을 더욱 고무시켰고, 호치민과 인도차이나 공산당이 중심이 된 가운데 인도차이나 공산당과 그 전위조직, 베트남 문화 강경 지지파, 베트남 국민당(VNQDD)의 일부세력, 군소집단 및 중국으로 망명한 소수의 개인들이 참가하였다. 이후 모든 정치활동은 베트민의 이름으로 행하여지고, 공산당은 뒷전으로 물러나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다. 후에 군대 조직도 완성되는데, 그 중에서 베트남 해방군 선전대가 월맹군으로 발전하였다. 결국 일본이 항복하기 직전 호치민이 이끄는 베트민이 봉기하면서 일시적으로 베트남을 해방하였다. 베트남 민주 공화국의 성립이었다.
베트남 민주 공화국 국기
1954년 7월 20일 제네바 합의 때까지 사용. 이후엔 현재 베트남 깃발(좀더 샤프한 별)을 쓴다.
7 현대 베트남사 (1946년 - 현재)
7.1 베트남 독립 전쟁(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1946년 - 1954년)과 제네바 평화 협정
하지만 전후 프랑스가 돌아왔다. 미국은 베트남의 즉시독립을 주장하였으나 샤를 드 골은 크고 아름다운 프랑스 제국을 원했다. 미국은 악화일로로 치닫는 소련과의 관계를 고려할때 하나라도 우방국을 끌어들일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결국 프랑스의 입장을 지지하게 된다.
처음은 베트남을 자유국가로 인정했다.자유월남? 이것은 프랑스 연방 내의 자치령으로 남는 것을 의미한다. 그대신 프랑스군이 1952년까지 단계적으로 철수하는 것을 골자로 협상이 맺어졌으나, 사실 프랑스는 베트남에 공산주의자들이 통치하는 것을 묵인할 생각이 없었다. 마찬가지로 호치민 역시 이 협상을 두고 같은 공산당 내부에서 매국노(...)라고 욕을 들어먹고 있던 상황이었고, 결국 양국간에 전면전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1946년 11월 20일 베트민과 프랑스군 사이 세관업무를 가지고 충돌이 있자, 프랑스가 함포로 쏴제껴 베트민군을 공격하고 수많은 시민들을 학살하는 하이퐁 사건이 터지면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시작된다.
프랑스가 코친차이나 지역에 세운 코치차이나 자치공화국 임시정부 기. 베트남말로는 꽁호아 뜨찌 남끼(Cộng hòa tự trị Nam Kỳ, 남기(=코친차이나)자치 공화국 共和自治南圻)이라고 한다. 후에 의회와 프랑스의 동의로 남베트남(베트남국 - 왕정)에 자치를 전제로 흡수된다. 프랑스 시민권자였던 응우옌 반 틴(Nguyễn Văn Thinh, 阮文廳 완문청)이 대통령이었으나, 1946년 11월 10일 죽음으로서 큰 의미는 없었다. 이 깃발은 1948년 6월 2일까지 썼다.
뒤는 1949년 바오다이 황제(1913~1997, 재위 1925~1955)가 이었다. # 바오다이는 즉위 직후 프랑스에서 유학을 하고 돌아와 1932년까지 머물렀으며, 보고 배운 것을 바탕으로 즉위 초에는 내정개혁과 자치독립에 힘썼으나, (당연히) 프랑스의 방해로 갈수록 성과 없는 이런 노력에 지쳐 이후엔 사냥과 자동차등 향락에 빠지게 된다. 왠지 고종을 보는 느낌이다. 베트남 민주공화국의 독립으로 호치민에 의해 고문으로 밀려났지만 1946년 홍콩에 망명했다가 3년만에 다시 돌아온 것.[13]
한편 같은 시기 남베트남은 온건한 독립겸 꼭두각시들 자리 유지을 준비중이었다. 현대식 무기로 무장한 프랑스군은 응우옌조의 황제를 명분으로 친프랑스 정부를 세우려 한 것이다. 1948년 베트남의 여러 세력과 프랑스가 절충을 한 결과, 같은 해 5월 27일에 잠정 정부로서 베트남 임시 중앙정부를 설립했다. 그 후, 1949년 3월 마지막 황제 바오다이(보대제保大帝)는 프랑스-베트남 협정을 체결하여, 같은 해 6월 14일에 정식적 《베트남국》이 설립했다.
그러나 프랑스의 이러한 전쟁지속 정책은 월맹군의 대반격과 2차 대전이 종결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 오는 재정적인 문제에 국제여론 마저 악화되면서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1954년 인도차이나 문제로 제네바에서 회의가 개최되었고, 결국 디엔비엔푸 전투(Điện Biên Phủ, 奠邊府)에서 병력 대부분을 상실하면서 베트남을 포기하고 철수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벌어진 것이 바로 제네바 평화 협정이다.
프랑스와의 제네바 협정(1954년4월 26일 ~ 7월 20일)의 결과 그해 8월 1일 부로 전쟁은 끝났고, 10월 프랑스 군이 철군하면서 한시적으로나마(1956년 7월에 남북총선거로 통일 베트남을 세우기로 했다.) 정전선 설정에 관해서 논란이 치열하게 벌어졌는데 프랑스는 18도선을 고집했고, 월맹은 13~14도선을 주장했다. 주은래가 16도선[14]을, 몰로토프가 16~18도선 중간인 17도선을 중재하여 베트남은 북위 17도를 군사경계선으로 하여 월남에는 남북으로 2개의 정부가 들어섰다.
그리고 1955년 10월 26일 남베트남에 쿠데타로 왕정이 축출되고 응오딘지엠 정부가 수립되었다. 베트남 공화국의 건국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달 1월을 기점으로 내전은 다시 시작되었다.
베트남국(quoc gia Viet Nam, 꾸옥 기아 비엣남) 국기이자
베트남 공화국(남베트남/비엣남 꽁호아) 국기
1948년 6월 2일부터 1975년 4월 30일 패망때까지 사용. 꺼방바속도(Cờ vàng ba sọc đỏ, 한역하면 황저삼선기黃底三線基) 노란색은 베트남과 베트남인, 빨간색은 베트남인의 피를 상징하며, 민유 민치 민향民有 民治 民享(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의 삼민기라고도 한다. 하지만 이런 의미는 뒤에 붙은 것으로 원래는 타인타이 황제(성태제成泰帝, 1888년~1907년)의 깃발로 카이딘 황제(홍종 계정제啓定帝)가 고친 1920년까지 썼다. 카이딘 황제의 기도 롱띤이라고 부른다. 바오다이 황제 때까지, 즉 1920년부터 1945년까지 사용했다. 사실상 1890년부터 1975년까지 85년을 이어진 국기인 셈이고, 지금도 남베트남계 혹은 베트남 공산정권 반대 세력에선 이 국기를 쓴다. 하지만 식민지 시절 만들어진 깃발이라 베트남인들에겐 그다지 애정없는 깃발이라는게 함정.
7.2 베트남 전쟁(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 1955년 - 1975년)과 미국의 참전(1964년 - 1973년)
월남판 한국전쟁
남베트남과 미국은 제네바 협정 결의안을 채택하지 않았고, 그에 따라 총선거도 없었다. 결국 남베트남 내의 이에 반대하는 공산분자들은 테러 공격을 감행하였고, 1960년 12월 남베트남에서 '남베트남 해방민족전선'이란 이른바 '비엣콩(베트콩)'빨치산을 결성하였다. 이들은 또한 호치민이 이끄는 '베트남 민주공화국(북베트남)'의 원조를 받아 더욱 세력을 확장하였고, 선거를 통해 베트남 전역을 장악할 수 없게 된 공산측은 군사적인 수단을 사용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제는 미국(1964년 8월 2일)이 중국 공산화와 연이은 한국전쟁 등으로 공산주의가 동남아로 퍼질까봐 통킹만 사건을 핑계로 전쟁에 돌입하지만(베트남 전쟁 혹은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 미국 역사상 최초의 패전이라는 치욕을 남긴 채 떠나야 했다. 자세한 것이나, 이 당시 베트남 전쟁이 벌어지기까지의 자세한 베트남 현대사는 베트남 전쟁 항목 참조.
1973년 1월 27일으로 파리 휴전협정이 체결되었지만, 이는 미국이 발을 뺄 핑계거리나 다름 없었다. 무엇보다 워터게이트과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사임으로 미국 정국이 혼란에 빠진것이 결정타였다. 1975년 3월 10일 협정을 깬 북베트남의 침공으로 보름만인 3월 26일 다낭 함락, 1달 20일만인 1975년 4월 30일 사이공 함락과 함께 전쟁은 끝났다.
남베트남 공화국(남베트남 공화국 임시혁명정부) 국기
비엣콩(남베트남 해방민족전선, (남)월맹)임시 기와 같다. 적성홍기(赤星紅旗)라고도 한다.
1975년, 북베트남은 기어이 남베트남을 드디어 멸망시켰고, 남베트남 공화국이라는 괴뢰국을 세웠다. 다음 해의 총선거로 2400만명의 북베트남과 2000만명의 남베트남이 합쳐져 4400만명의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이 출범했다.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 국기
이로서 독립국 베트남은 통일을 완성했다. 물론 통일이후 들어서 중국과의 관계로 인해 사실상 추방 당하여 난민이 되거나 공산주의 정권 하에서 재교육 등으로 고생한 수많은 사람들이 생기기도 했다. 덧붙여 두는 이야기지만 베트남 공산정권이 호치민 같은 미담으로만 설명될 수 있는건 절대 아니고, 정치적 탄압이나 수용소같은것도 분명 존재했긴했다. 1950년대 중반에 토지개혁을 결정과정같은건 생략한채 강제로 시행했다가 수만명이 죽거나 다치고 수십만에 이르는 난민이 대거 월남 했고 또, 권력투쟁과정에서 트로츠키파를 숙청했던게 그 예다. 단지 소련이나 캄보디아나라들보다 막장성이 덜하다 보니 덜 알려졌을 뿐.
7.3 통일 후의 베트남사(중월전쟁 = 제3차 인도차이나 전쟁, 1979년 - 1988년)
미국과의 전투로 자신감을 얻은 베트남은 이후에는 캄보디아까지 침공하여 완조 이래의 대월남제국 그리고 동남아 전체의 패권을 쥐고자 했고 동남아시아를 아울러 인도차이나 공산연방을 세우려 하였다. 이에 분개한 중국이 침공해 중국-베트남 전쟁(제3차 인도차이나 전쟁, 1979년 2월 17일 ~ 1988년 1월)이 벌어졌지만 한타를 맞고 물러난다. 뭐 여러 가지 상황이 겹치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프랑스, 미국, 중국을 발라버린 셈. 양반학살
하지만 통일 이후에는 계획경제체제의 경직성과 막대한 통일 비용을 떠안은 데다가 동시기에 크메르루즈를 퇴격하겠다고 캄보디아를 점령했는데 캄보디아의 경제 상황은 베트남보다 훨신 안 좋은 데다가 크메르루주가 장기간에 걸쳐 저항했기 때문에 전비를 지속적으로 지출해야 했고, 덕택에 통일 비용을 감당하기에도 모자를 판에 캄보디아에 상당량의 예산을 투입해야 했다. 그런 데다가 전쟁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중국과의 전쟁도 터지는 바람에 전비가 추가로 지출된 건 덤이었고, 소련과 동구권의 경제 침체로 인해 통일 베트남에 대해 충분한 지원이 이뤄지지 않았다.
이런 연유로 통일 이후 베트남은 경제 파탄 상태에 놓이게 되었고, 매년 수십만 명의 인민들이 먹고 살기 위해 보트피플이 되었다, 이들 중 상당수는 엘리트였기 때문에 두뇌 유출도 통일 베트남에 상당한 타격이 되었다. 결국 1986년 말 도이모이 (Đổi mới; 𣌒𡤓; (易+對)(始+買)) 개방정책을 실시, 베트남의 캄보디아 철군으로 종전하고, 공산주의 정책을 사실상 포기하면서 상당한 경제성장을 이록하고 있다. 하지만 성장률에 비해 소득이 상당히 낮은 편인데다가 물가 상승률도 높다는게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는 듯하다. 이후 1989년부터 ASEAN에도 1992년 옵저버가 되었고, 1995년 가입했다. 1967년에 일종의 반공정권 5개국 간의 단결기구였던 ASEAN은 그렇게 동남아 전체를 포괄하는 기구가 되었고, 뒤따라 여러 공산국가가 가입하면서 실질적 경제-정치적 공동체가 구성될 힘을 얻게 되었다.- ↑ 물론 당시 중국남부에 한족들이 정착해 살던때는 아니고 오스트로아시아계나 오스트로네시아계를 비롯한 남방민족들이 주도권을 잡던때이기는 했으며 당대 중국에서 이들을 월이라고 싸잡아서 불렀는데 월이라는 단어만 보고 의도적으로 오독해서 환빠식 해석을 하는 것이다.
- ↑ 물론 어우 락의 건국자 툭 판도 촉(蜀)출신이라고는 하는데, 현 사학계는 이를 오류로 보고 있다.
- ↑ 출처: 유인선, 『베트남과 그 이웃 중국』
- ↑ 다만, 조선에서 왕씨가 다른 성으로 바꿔서 목숨을 보존했듯이, 리 왕조의 후손들은 성을 '응우옌(Nguyễn, 阮)'으로 바꾸고 숨어살면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 ↑ Nhân Tông. 리 왕조의 제 4대황제. 본명은 리깐득(李乾德, 이건덕). 시호는 헌천체도성문신무숭인의의효자순성명효황제(憲天體道聖文神武崇仁懿義孝慈純誠明孝皇帝). 약칭 효자신문무황제(孝慈聖神文武皇帝) 또는 신문무황제(神文武皇帝). 북송에 의해 남평왕#s-4(南平王)으로 책봉됨.
- ↑ 몽골도 베트남 북부를 중국 땅으로 인식했다. 그래서 쳐들어간것. 왜냐하면 자신들이 송나라를 계승했다고 생각하고, 송의 잃어버린 땅인 베트남 북부를 되찾아야 한다고 봤기 때문이다.
- ↑ 물론 여기로 가는게 더 멀다. 베트남 북부에서 광시좡족자치구 및 윈난 성, 구이저우 성 등 중국 남부로 갈려면 안남산맥을 넘어야 하는데 이게 엄청난 고산이다.
- ↑ 복상사(...) 했다는 설도 있고 응우옌짜이 등 문신 세력과 대립하던 무신 세력들의 음모라는 이야기도 있다.
- ↑ 태종은 응우옌 짜이의 첩을 마음에 들어해 응우옌 짜이가 자신의 첩을 태종에게 바쳤는데 응우옌 짜이의 반대 세력들은 첩을 태종에게 빼앗겨 열받은 응우옌 짜이가 마침 자신의 집을 방문한 태종을 독살했다고 주장했다.
- ↑ 물론 2차대전 당시 일본군은 미군의 잠수함 작전으로 인해 수송력이 떨어져서 이로인해 베트남의 기근이 극히 심해진 것도 크다. 기근의 큰 이유가 남부의 쌀을 북부로 수송하지 못했기 때문에. 즉, 굶어죽은 지방은 북부이다(…)
하지만 수송력이 정상이었다면? 식민지들의 화려한(…) 전과를 보면 그만큼 더 뜯어갈 것이 뻔하다(…). - ↑ 이들 사이에서는 프랑스에게 핍박을 당하느니 차라리 같은 동양인 일본에게 투항하는 것이 나을 거라고 생각하는 심리가 있었다고 한다.
- ↑ 이것을 일본에서는 명호작전(明号作戦)이라고 한다.
- ↑ 바오다이는 공화국화 되면서 퇴위된 후 남베트남의 멸망, 도이모이까지 다 보고 1997년 파리에서 죽는다. 향년 84세. #
- ↑ 이 경계선대로라면 후에랑 다낭은 월맹이 가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