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카다 아키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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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역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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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신 타이거스 감독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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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릭스 버팔로즈 감독 시절. 뀨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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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큐 브레이브스 올드 유니폼을 입은 모습.

이름오카다 아키노부 (岡田彰布)
생년월일1957년 11월 25일
국적일본
출신지오사카 부 오사카 시
포지션2루수, 3루수, 1루수, 외야수
투타우투우타
프로입단1979년 드래프트 1순위
소속팀한신 타이거스 (1980~1993)
오릭스 블루웨이브 (1994~1995)
지도자오릭스 블루웨이브 2군 조감독 겸 타격코치 (1996~1997)
한신 타이거스 2군 조감독 겸 타격코치 (1998)
한신 타이거스 2군 감독 겸 타격코치 (1999)
한신 타이거스 2군 감독 (2000~2002)
한신 타이거스 1군 내야수비주루코치 (2003)
한신 타이거스 감독 (2004~2008)
오릭스 버팔로즈 감독 (2010~2012)
1980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리그 신인왕
후지사와 키미야
(주니치 드래곤즈)
오카다 아키노부
(한신 타이거스)
하라 타츠노리
(요미우리 자이언츠)
한신 타이거스 역대 감독
호시노 센이치
(2002~2003)
오카다 아키노부
(2004~2008)
마유미 아키노부
(2009~2011)
오릭스 버팔로즈 역대 감독
오이시 다이지로
(2008.5.~2009)
오카다 아키노부
(2010~2012)
모리와키 히로시
(2013~2015.6.)


일본프로야구 선수, 코치, 감독이자 해설가.

그리고 어쩌면 가장 성공한 한신 타이거스 팬.[1]

33-4의 사나이

1 아마 시절

오사카 태생으로 작은 공장을 경영하던 아버지가 무라야마 미노루한신 타이거스 선수들과 친분이 두터워서 오카다가 꼬꼬마 시절에 한신의 주전 3루수 이던 미야케 히데시와 캐치볼을 할 정도였고, 그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한신 타이거즈를 동경하게 되었다. 이후 오카다가 한신에 입단할 때 등번호 16번을 희망한 것도 미야케의 현역 시절 등번호 였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난카이 호크스의 유소년 팀 격인 리틀 호크스에 들어가면서 본격적으로 야구의 길에 들어섰고, 한편으로 아버지 회사에서 결성한 동네 야구팀에서도 투수로 활약한 적도 있다.[2] 당시 한신으로선 오카다의 아버지가 프리미엄 고객이었던 지라 집안에 고시엔 구장의 특석 지정 입장권이 있었음에도 오카다는 고시엔에 갔다 하면 유독 3루 벤치 근처의 자리만 고집했는데, 이유는 라이벌인 요미우리 자이언츠3루수 나가시마 시게오를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고...

이후 메이세이 중학교에 들어가서 학교를 오사카 부 대회 우승으로 이끌었고, 호쿠요 고교에 진학해서는 1학년 때 PL학원 고교와의 지역예선 결승에서 선제 투런포를 날리는 등 맹활약하며 고시엔 본선에 진출하는 데 힘을 보태기도 하였다. 이듬해 여름 고시엔 대회에서도 2경기에 출장, 6타수 3안타의 맹타를 날렸다. 그러나 3학년 때엔 지역예선 결승에서 탈락하며 고시엔 그라운드를 밟지 못했다. 고교 졸업 후 와세다대학에 입학하여 주전 3루수로 뛰면서 졸업반이던 1979년 도쿄 6대학 리그 우승에 기여하고 같은 해 미일 대학야구 선수권 대회에서는 4번타자로 활약한 바 있다.[3]

2 프로 시절

1979년 신인 드래프트 때 6개 구단으로부터 동시 지명을 받을 정도로 오카다에 대한 영입 경쟁은 치열했고[4] 결국 추첨을 통해 오카다가 평소 바라 마지않던 한신 타이거스의 유니폼을 입게 되었다. 원래 포지션은 3루수 였지만 이미 카케후 마사유키가 떠억 자리잡고 있었던지라 오카다는 2루수로 전향할 수 밖에 없었고, 그럼에도 데뷔 시즌인 1980년에 108경기에 출장하여 109안타, 18홈런, 54타점, 타율 0.290이란 굉장히 준수한 성적으로 센트럴리그 신인왕을 수상하였다. 이듬해인 1981년엔 130경기를 풀 타임 출장하며 20개의 홈런을 기록하였고, 1982년엔 딱 0.300을 채우며 생애 처음으로 3할 타율을 기록하기도 하였다. 1983년 시즌엔 다리근육이 파열되는 부상으로 한동안 슬럼프를 겪었다.

그러나 대망의 1985년, 오카다는 선수회장(주장)을 맡아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시즌을 맞이하였고 최고의 외국인 타자 3번 랜디 바스, 기존의 4번 카케후 마사유키의 뒤를 잇는 5번 타자로 자리잡으며 한신은 말 그대로 사상 최강의 클린업 트리오를 구축할 수 있었다. 그 해 오카다는 한신 클린업 트리오의 멤버로 거칠 것 없이 그라운드를 누비며 157안타, 35홈런, 101타점, 타율 0.342란 기록을 남기며 리그 최강의 5번 타자라는 명성을 드높였고[5][6] 한신은 세이부 라이온즈를 격퇴하며 1935년 창단 이후 최초로 일본시리즈 제패를 달성하였으니, 물론 한신의 클린업 트리오, 그리고 오카다가 큰 공로를 세웠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더불어 같은 해 4월 17일 요미우리 자이언츠 와의 홈 경기 7회말 때 상대 선발 마키하라 히로미를 상대로 바스가 역전 라뱅쓰리런포, 카케후가 솔로포로 백스크린을 두들긴 다음에 나온 오카다도 이에 질세라 중월 솔로홈런을 쏘아올리며 이룩한 이른바 고시엔 백스크린 3연발[7]은 아직도 한신 올드 팬들 사이에서 최고의 명장면으로 입에 오르내리고 있을 정도이다.

1986년 시즌에는 26홈런을 기록했지만 타율은 0.268로 다소 부진했고, 이듬해 1987년에는 14홈런, 타율 0.255로 오카다 답지 않다는 평이 나오기도 했으나 1988~1990년 3시즌 연속 20홈런을 기록하며 건재함을 과시하였다. 주전 3루수이던 카케후의 은퇴로 1989년 부터는 원래 위치이던 3루수로 복귀하였으나 1990년 부터는 후배인 야기 히로시의 등장으로 다시 2루수로 되돌아 가기도 하였다. 1992년 일본 프로야구 선수회 회장을 맡아 FA 제도 도입에 주력하였고 선수로서는 와다 유타카에게 2루 자리를 넘기고 1루수로 전향하였지만 30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기량이 쇠퇴하였는지 그 해 타율이 1할대로 추락하는 수모를 겪었다. 결국 1994년 한신으로부터 자유계약 선수로 공시되며 오릭스 블루웨이브 유니폼을 입게 되었는데,[8] 입단 직전 한 여성과의 불륜 스캔들이 터지며 현역에서 물러날 지경까지 올 정도였으나 결국 오릭스의 자체적인 정보 수집[9]경찰 수사를 통해 그 여성은 꽃뱀임이 밝혀져 체포되면서 오카다는 홀가분하게 오릭스 유니폼을 입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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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웨이브 시절.

그러나 오릭스에서도 이렇다 할 활약을 보이지 못한 채 1995년 퍼시픽리그 우승의 기쁨을 맛보고[10] 그것을 마지막으로 현역 생활을 마감하였다. 16시즌 동안 통산 성적은 1639경기 출장, 1520안타, 247홈런, 836타점, 타율 0.277.

3 은퇴 이후

3.1 코치 시절

은퇴 이듬해인 1996년 오릭스의 2군 조감독 겸 타격 코치로 임명되어 2년간 재임하였고, 1998년엔 2군 타격 코치로 친정인 한신 타이거즈에 복귀하였다. 이후 한신의 2군 감독을 지내고 2003년엔 1군으로 올라와 내야수비 겸 주루 코치를 맡아 3루 베이스 코치로 활동하였다.

3.2 한신 타이거스 감독 시절

2004년 전임 호시노 센이치 감독이 건강상의 이유로 사퇴하면서 후임 감독에 취임, 2005년 팀을 센트럴리그 우승으로 이끄는 수완을 보였지만 일본시리즈 에선 치바 롯데 마린즈에 4전 전패로 떡실신 당했다(...). [11] 그리고 이 사건은 33-4 사건 혹은 하얀 안개 사건으로 흑역사로 남겨지게 되고, 후일 일본 인터넷에서 컬트적인 인기를 얻게된다. 그리고 한신 팬들은 영원히 고통받게 되었다. 그 후 2006~2008년 3시즌 동안 팀을 A클래스(2위-3위-2위)에 랭크시켰고 2007, 2008년 클라이맥스 시리즈까지 진출했으나, 전부 주니치 드래곤즈에게 패퇴하는 바람에 우승을 원하던 구단 방침에 의해 결국 감독직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특히 2008년엔 2위 요미우리에 13게임 앞선 1위를 하다가 단 한 달 만에 그 차이가 다 따라잡혀 요미우리에게 역전 우승 허용이라는 못 볼 꼴을 봐야 했다. 그리고 7년 후에 비슷하게 재현에 성공했다

3.3 해설가 시절

한신에서 퇴단한 이후 1년간 아사히 방송의 해설가 및 데일리 스포츠 객원 평론가로 활동하였다. 평론가 활동과는 별도로 NPB 조사위원으로 임명되었는데 조사위원 임기는 통상 2년 이지만 2010년 오릭스 버팔로즈 감독으로 영입되면서 1년만에 조사위원에서 사퇴하였다.

3.4 오릭스 버팔로스 감독 시절

현역 말년을 보낸 제 2의 친정팀 오릭스와 연봉 1억엔에 3년간 감독 계약을 맺은 오카다는 감독직과 동시에 팀 편성과 홍보책까지 맡으며 사실상 오릭스의 GM을 겸직하게 되었다. 그러나 시작부터 액운이 꼈는지 외야수 오제 히로유키가 스프링캠프 때 숙소에서 추락해 사망하는 사건이 있었다.[12] 2010년 감독 통산 400승을 기록하는 기쁨을 맛보기도 했으나 투수 코치이던 호시노 노부유키가 시즌 도중 건강문제로 휴양을 신청하고 후임으로 임명된 고바야시 히로시는 코치로서의 경험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오카다 자신이 투수 코치까지 겸직하는 우여곡절을 겪으며 팀은 시즌 5위에 그쳤다. 2011년에는 시즌 중반까지 리그 2~3위를 지키며 어느 정도 선전했으나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와의 시즌 최종전에서 깨지는 바람에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에게 클라이맥스 시리즈 진출 커트라인 3위를 내주며 또 좌절(...). 그래도 그 해 감독 통산 500승을 채우며 개인적인 소득은 거두긴 했다. 그럼 뭐해 가을야구를 못했는데

계약기간 마지막 해인 2012년을 맞이하여 한국을 대표하는 거포 이대호를 영입하는 등 팀 전력 상승에 힘을 기울였지만...오릭스는 시즌이 거의 끝나가는 시점에도 5위 라쿠텐 골든이글스와 압도적인 차이로 최하위를 마크하며 재계약이 가능할지 의문스러울 정도였다.

결국 시즌이 끝나기도 전인 2012년 9월 모가지경질되었다. 후임으로 한큐를 대표하는 프랜차이즈 스타 투수 출신이며 주니치 드래곤즈 감독, 2009년 WBC 일본 대표팀 투수 코치를 지낸 야마다 히사시 등이 거론 되었으나, 수석 코치이던 모리와키 히로시가 정식 감독으로 승격되었다.

  1. 농담이 아니다. 어렸을 때부터 ①유복한 가정환경에서 야구광 아버지 밑에서 자라서 ②본인이 응원하는 팀 홈구장의 명당자리의 시즌 티켓을 가지고 마음대로 야구경기를 구경할 수 있었고, ③꼬꼬마 시절부터 그 팀의 선수들과 캐치볼을 할 정도로 개인적으로 교류를 했으며, 야구선수의 꿈을 가진 후로는 ④고교 시절에 코시엔 진출, ⑤명문 와세다 대학 진학 후에는 중심타자로서 프로 스카우트의 표적이 되고, ⑥드래프트에서는 본인이 가장 가고 싶어하던 그 팀의 1순위 지명을 받은 후에 ⑦1년차부터 주전 자리를 차지하면서 신인왕 획득, ⑧중심타선의 일원으로서 팀 역사상 유일한 일본시리즈 우승의 주역 중의 한 명으로서 팀에 공헌한 레전드의 길을 걷고, ⑨은퇴 후에도 그 팀의 감독으로서 팀을 리그 우승으로 이끄는 등 그야말로 특정팀의 팬이이라면 가장 이상적인 인생역정을 걸어온 사람이다. 물론 본인이 사랑해 마지않은 그 팀에서 선수로 은퇴를 하거나 감독으로서의 커리어를 마무리하지 못한 것은 그리고 거대한 흑역사를 사랑하는 팀에 싸지른 건 옥에 티이지만 일본 프로야구에 입문하는 대부분의 선수들이 저 조건 중에 최소 한 두가지는 꼬이는 것이 기본이다. 특히 에가와 스구루
  2. 당시 무라야마 미노루의 등번호이자 현재 한신의 영구결번인 11번을 달았다고 한다.
  3. 전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인 오카다 타케시와 와세다대 동기고, 각각 야구부와 축구부 주장을 맡았다. 그런데 더 흠좀무한 건 둘 다 어렸을 적 야구소년이었다는 점인데, 오카다 타케시는 야구부의 똥군기가 싫어서 축구를 선택하게 된다. 이렇게 공통점이 많았음에도 접점이 없어서 2009년에 스포츠 잡지 Number의 와세다대 특집 기사 인터뷰에서 처음으로 만났다. 대담 요약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선 야구 오카다 감독이 축구 오카다 감독에게 응원을 보내는 훈훈한 모습을 남기기도.
  4. 이 때 오카다는 "한신 입단이 최대의 희망사항 이지만 한큐 브레이브스 같은 구단도 좋다. 그 외의 구단이라면 생각해 보겠지만 프런트가 견고하고 우승권에 가까운 팀이라면 기꺼이 입단하겠다" 라고 털어놓기도 했다. 근데 오카다는 훗날 정말로 한큐의 후신인 오릭스에서 은퇴하게 되었다.
  5. 참고로 그 해 랜디 바스는 174안타, 54홈런, 134타점, 카케후 마사유키는 143안타, 40홈런, 108타점을 기록하였다. 클린업 트리오 세 명이 474안타, 129홈런, 343타점을 한 해에 합작한 것이니 몰라 뭐야 그거 무서워(...).
  6. 그뿐인가, 1번 타자이던 마유미 아키노부 또한 말이 1번이지 타율 0.322, 34홈런, 84타점 이란 웬만한 팀 4번 뺨치는 ㅎㄷㄷ한 스탯을 수립했다.
  7. 해당 동영상은 카케후 마사유키 항목 참조.
  8. 오릭스로 이적하기 전 기자회견에서 오카다는 "난 앞으로도 한신의 팬이다"라면서 눈물을 흘릴 정도로 한신에 대한 남은 애정을 숨기지 않았다고.
  9. 오릭스 구단의 모기업은 좋게 말하면 금융회사고 나쁘게 말하면 사채업자이다. 더 이상의 설명이 必要韓紙?(...)
  10. 그러나 오릭스 블루웨이브노무라 카츠야가 이끌던 야쿠르트 스왈로즈에게 일본시리즈에서 패배했다. 다음 해엔 나가시마 시게오요미우리 자이언츠를 꺾고 우승했지만..
  11. 이 당시 롯데 소속이던 이승엽이 시리즈에서 홈런 3개를 폭발시키며 롯데의 일본시리즈 우승에 크게 일조한 바 있다.
  12. 2009년 12월에 결혼해서 신혼이었다고 한다. 향년 24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