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사다하루

(왕정치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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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타격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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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에 누군가공중부양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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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팬사인회를 앞두고.

1 프로필 및 소개

이름오 사다하루 (王貞治)[1]
생년월일1940년 5월 20일
국적중화민국
출신지도쿄 도 스미다 구
포지션1루수
투타좌투좌타[2]
소속팀요미우리 자이언츠 (1959~1980)
지도자요미우리 자이언츠 코치 (1976~1983)[3]
요미우리 자이언츠 감독 (1984~1988)
후쿠오카 다이에/소프트뱅크 호크스 감독 (1995~2008)
프런트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단장 (2005~2008)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최고고문 (2008)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회장 (2009~)
기타NPB 커미셔너 특별 고문 (2009~)
1964,65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리그 MVP
나가시마 시게오
(요미우리 자이언츠)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자이언츠)
나가시마 시게오
(요미우리 자이언츠)
1967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리그 MVP
나가시마 시게오
(요미우리 자이언츠)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자이언츠)
나가시마 시게오
(요미우리 자이언츠)
1969,70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리그 MVP
나가시마 시게오
(요미우리 자이언츠)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자이언츠)
나가시마 시게오
(요미우리 자이언츠)
1973,74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리그 MVP
호리우치 츠네오
(요미우리 자이언츠)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자이언츠)
야마모토 코지
(히로시마 도요 카프)
1976,77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리그 MVP
야마모토 코지
(히로시마 도요 카프)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자이언츠)
와카마츠 츠토무
(야쿠르트 스왈로즈)
요미우리 자이언츠 역대 감독
후지타 모토시
(1981 - 1983)
오 사다하루
(1984 - 1988)
후지타 모토시
(1989 - 1992)
후쿠오카 다이에/소프트뱅크 호크스 역대 감독
네모토 리쿠오
(1993 - 1994)
오 사다하루
(1995 - 2008)
아키야마 코지
(2009 - 2014)
요미우리 자이언츠 영구결번
134141634
오 사다하루나가시마 시게오쿠로사와 토시오사와무라 에이지카와카미 테츠하루가네다 마사이치


한국식 독음인 왕정치라고 많이 알려져 있는 일본 야구 역대 최고의 강타자. 1960-70년대 세계를 향해 성장하는 일본의 상징과 같은 존재였다. 일본 도쿄에서 중국음식점을 운영하는 화교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출생지는 일본이지만 현재까지도 중화민국 국적을 소유하고 있다. [4] 아버지는 저장 성 출신의 중국인 왕사복(오 시후쿠)이고 어머니는 일본인인 오 토미이다. 창씨개명 정책에 따라 집안 전체가 어머니 쪽 성(도즈미)을 따르기도 했지만 일본의 패전 후 원래대로 왕씨 성으로 복귀했다.

원래는 돈을 번 뒤에 본토로 돌아가 큰 아들은 의사[5]로, 작은 아들인 오 사다하루는 전기 엔지니어로 키울 생각이었다고 하나 중국이 공산화된 후 그냥 중화민국 국적을 취득하고 일본에 정착했다고 한다.

오 사다하루는 자신을 중국인이라고 생각한다고 WBC출정 인터뷰에서 밝혔다. 오늘날에야 중화민국=대만으로 인식되지만 원래 중화민국은 중국 대륙의 국가였고, 대만인들 중에서도 중국 대륙에서 공산당을 피해 대만에 온 사람들이 많으며 이들은 자신을 중국인이나 중국인(국적 개념)이면서 대만인(지방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가계도 원래 중국 대륙 출신이니 그의 인식이 특이한 건 아니다.

2 선수생활

와세다 실업고를 졸업하고 1959년 요미우리 자이언츠 야구단에 입단하였다. 그러나 입단 첫 해 부진한 모습을 보이며 타율 0.161, 7홈런이란 성적을 남겼는데, 삼진이 많아서 팬들로부터 그의 성을 본따 "왕, 왕, 삼진왕"이라고 야유를 듣기도 했다. 그러나 아라카와 히로시 코치가 그를 전담 지도하면서 타격 스킬이 눈에 띄게 좋아졌고[6] 특히 전설에 남은 외다리(一本足) 타법의 힌트를 준 이가 바로 아라카와 코치이다. 결국 피나는 훈련 끝에 오 사다하루는 1962년 38홈런으로 센트럴리그 홈런왕에 등극하며 본격적으로 스타덤에 올랐다."왕, 왕, 홈런왕"

확실히 오 사다하루는 일본 야구에서 홈런하면 떠오르는, 홈런에 관해서라면 몬스터 기록을 남겼던 일본의 전설적인 거포이다. 그의 최다 홈런 기록은 행크 아론을 넘어선 기록이지만 당시의 미국과 일본 야구의 레벨 차이와 당시 일본 구장들의 평균 거리와 미국 구장의 평균거리가 거의 10미터 가깝게 차이가 난다는 점을 들어 미국 쪽 에서는 그다지 인정하고 있지는 않다.[7]



오 사다하루가 756호 홈런을 쳐서 행크 아론의 기록을 깨는 장면. 그러고보니 천조국756호 홈런자이언츠가 쳤다.



행크 아론과의 홈런 더비

이후 행크 아론이 일본에서 그와 홈런 대결을 벌이기도 했는데 이때가 1974년. 행크 아론은 40세였고 선수생활을 마감하던 시점(2년 뒤인 1976년 은퇴했다), 오 사다하루는 34세였고 그해 시즌에도 타격 3관왕을 했을 정도로 절정의 기량을 유지하던 때[8] 그러나 체격부터 행크 아론의 압승이고 영상에서 보듯 타구 비거리의 수준이 다르다. 슬슬 휘둘러도 담장을 가볍게 넘기는게 행크 아론. 오 사다하루와 행크 아론의 홈런 개수를 가지고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라고 하겠다. 차원이 다른 리그와 구장환경에서 뛰었으니까. 1970년대와 1980년대까지는 일본 선수가 메이저리그에서 통할 수 있다는 걸 상상도 못하던 시기. 그만큼 미일 야구의 격차가 크던 시점이다. 오 사다하루는 행크 아론과 우열 비교가 가능한 레벨 자체가 못 된다고 하는게 정답이다.

거기다 당시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홈구장이었던 고라쿠엔 스타디움은 현재 기준으로도 심하게 탁구장이었다. 공식 발표로 좌우 펜스가 91m/88m(러키존 시절)에 중앙 120m인데 실측결과는 그보다 훨씬 작았다. 더군다나 당시 일본프로야구는 배트 규정이 강하지 않았던 시절이라 압축배트를 쓰는 선수들이 꽤 있었다고 한다. 물론 오 사다하루도 압축배트를 사용했다.[9] 여담으로 베이브 루스가 홈런을 쳐낸 양키 스타디움도 좌타자들을 위해 당겨놓았기 때문에 우측펜스까지의 거리가 메이저리그에서도 짧은 편이라고 까였는데, 그게 97m로 고라쿠엔 구장과의 차이는 무려 10m. 마지막 4할 타자 테드 윌리엄스는 "기록에는 국적과 인종의 차가 없다."고 말하며, 자신의 개인 박물관에 오 사다하루의 방망이를 받아 보관하였다. 홈런 개수만으로 오 사다하루의 역량이 메이저의 유명한 강타자보다 높다고 할 수는 없으나, 기록이 평가 절하될 까닭은 되지 못한다. 무엇보다도 같은 조건에서 뛰었을 동시대의 선수들보다 거의 2배에 가까운 홈런 수치를 기록하며[10] 넘사벽의 위업을 달성했다는 점에서 당시 오 사다하루의 기량 또한 적어도 탈 NPB급이었다는 것만큼은 인정받아야 한다. 탈 NPB라고 해서 그게 MLB 수준으로 직결된다는 건 아니지만

입단 후 은퇴하기까지 22년간 시즌 통산 868홈런을 쳐냈으며, 시즌 외의 기록까지 합치면 1000개 이상의 홈런을 쳐낸 경이로운 기록을 보였다. 일본시리즈 29개, 올스타전 13개, 미일 올스타전 23개, 시범경기 93개. 그러면서도 8년 연속 40홈런이라는 전혀 기복없는 플레이와 통산타율 .301로 절대 홈런만 노리고 친 타자도 아닌 타자로써의 능력이 정말 뛰어난 기록을 남겼다. 당시 나가시마 시게오ON타선을 구축하면서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9년 연속 우승(1965~1973)을 이끌었다. 지금도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오 사다하루가 현역 때 달고 있었던 등번호 1번은 영구 결번이다.

3 지도자 생활

은퇴 이 후 후지타 모토시 감독 휘하에서 조감독이 분이 생각나는 건 기분 탓이다.을 맡으며 감독 수업을 받은 뒤 1984년부터 5년 간 1군 감독을 맡았다. 그러나 시기가 워낙 교진군은 우승 아니면 죽음 이라는 극단적인 시기여서[11] 5년 동안 리그 우승 1회(1987년)[12]에 그친 책임을 물어 감독직 사퇴,[13] 이후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의 감독을 맡을때까지 야구해설가, 평론가의 길을 걸었다.[14][15]

1994년, 퍼시픽 리그의 막장 중의 막장팀(...)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감독직을 제의받은 오 사다하루는 처음엔 요미우리 와의 관계 때문에 취임을 망설였지만 다이에의 GM 네모토 리쿠오가 "거인이란 집안은 이미 장남인 나가시마가 대를 이은 셈이다. 당신은 차남이니 부담 가질 필요가 있는가?" "이제 시대는 나가시마 vs 오 사다하루 의 라이벌전을 원한다" 라고 간곡히 설득하여[16] 결국 오는 다이에 감독직을 받아들였다. 다이에의 수장이 된 오는 3년 간 필사의 리빌딩 끝에 1998년 무려 20년 만에 A클래스(리그 3위 이상)를 달성한 후 1999년에 후쿠오카 이전 이후 처음이자 35년만의 일본시리즈 우승을 달성했고, 이 후 감독직에서 용퇴하는 2008년까지 일본시리즈 2회 우승, 퍼시픽리그 3회 우승, 9년 연속 A클래스를 기록하며 팀을 퍼시픽 리그의 끝판왕으로 환골탈태시킨다. 그리고는 2006년에 위암으로 수술을 받은 후 체력적인 문제로 더 이상 팀의 지휘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2008년 시즌을 끝으로 9년연속 A클래스 팀을 시즌 막판 리그 꼴찌로 꼬라박고 마는 흑역사를 기록하며 진정한 야구인생의 끝을 내게 된다.

이 캐막장 팀을 퍼시픽 리그를 대표하는 최강팀으로 만들어낸 전적 때문에, 후쿠오카 팬들에게 오 사다하루 감독은 평생 까임방지권(...)을 득템. 감독 마지막해인 2008년에 꼴찌로 시즌을 끝냈음에도 불구하고[17] "왕감독 까지 말죠. 왕감독 까는 놈 캐뉴비"라는 말이 나오는 에피소드도 있었다. 물론 처음부터 이랬을리 없고 부임 3년 간 팀 리빌딩을 하던 기간 중 1996년 5월 9일에 일본 야구계에 유명한 에피소드인 날계란 투척사건(...)을[18] 당하기도 했다[19] 어쨌든 '비 온 뒤 땅 굳어진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말인 듯 싶다.

현재는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회장과 NPB 커미셔너 특별고문으로 있다.

4 이야기거리

4.1 플레이 스타일

앞서 말했듯 외다리타법으로 유명하며 한때 이승엽의 주 타법이였다. 1루수로서의 수비능력은 리그 최고. 시즌 수비기회 연속 무실책 991회(1980년 4월 25일~10월 10일)를 기록, 1루수로서의 센트럴 리그 기록을 기록할 정도였다. 일본 골든 글러브가 1972년 처음 생긴 이래로 은퇴시즌까지 9년 연속 수상을 했다.

4.2 WBC우승 감독

WBC 1회 대회 때 일본 감독을 역임하여 일본을 WBC 초대우승으로 이끌었다. 그런데 WBC 1회 대회 감독 지명 당시 상당한 우려의 목소리가 있고, 극우-보수적인 일본인들에게 '대만인에게 일본팀의 감독을 맡길 수 없다'라는 시대착오적인 비난도 들었지만 결국 우승을 해냈고, 요미우리 시절 동료였고 동갑내기 절친인 장훈은 "지금까지 사다짱(오 사다하루의 애칭)을 비웃은 바보들은 전부 머리를 밀고 사죄하라!"라는 명언 아닌 명언을 남겼다. 사실 장훈 옹이 한 이 말은 다이에 호크스의 3년 리빌딩 시절 때 처음 했다.

4.3 시즌 55홈런 저지 논란

문제라면 그의 '한 시즌 55홈런' 기록 등 워낙 일본 야구계에 남긴 영향이 크다 보니, 이 기록을 갱신하려는 선수에게는 여러가지 불이익이 있었다. 한신 타이거스의 랜디 바스라든가, 긴테쓰의 터피 로즈라든가, 세이부 라이온즈의 알렉스 카브레라라든가.

2013년 오랜만에 그의 기록에 도전한 이가 등장했는데,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블라디미르 발렌틴이 그 주인공으로 8월달 월간 18홈런을 쳐내면서 이미 30경기 넘게 남은 시점에서 50홈런을 돌파했다. 더불어 9월 15일 한신 타이거스와의 홈경기에서 56호와 57호 연타석홈런을 작렬시키면서 오 사다하루 기록은 49년만에, 이승엽의 아시아 기록은 10년만에 모두 갈아치웠다. 그리고 60호 홈런까지 치면서 아시아 처음으로 60홈런에 도달했다.

2013년에 기록을 달성할 즈음 발렌틴을 상대하는 투수들이 그에게 볼넷만 주는 등 홈런을 칠 빌미를 주질 않자 국내 야구 팬덤에서도 "그따위 기록 하나가 신성하다고 볼로 보내버리냐"는 악평을 많이 들었다.

4.4 트리비아

  • 일본 야구계의 또 하나의 레전드인 장훈과는 여러 이유로 둘도 없는 친구지간이다. 1940년 용띠 동갑내기에 1959년 프로입문 동기이고 거기다 프로데뷔 전부터 많은 구단의 스카웃 표적이 됐다든지, 국적 문제라든가, 외국인 대접을 받는 타자라든지... 그렇게 막역지우가 된 장훈과 오 사다하루는 프로 데뷔시절부터 서로의 집을 오가면서 친분을 쌓았다고 한다. 어느 날은 오 사다하루가 장훈의 히로시마 집에 놀러와서는 장훈의 어머니가 끓여준 수제비를 먹고 목욕까지 한 뒤에 자고 갔을 정도로 절친한 사이라고. 오 사다하루가 선수 시절 딱 한번 요미우리 구단에 대든적이 있는데 장훈이 1979년 시즌 종료 후 롯데 오리온즈로 트레이드 될 때 였다. 그 해 납회식 때 장훈이 구단주에게 "그동안 고마웠다"고 인사를 하자 오 사다하루는 발끈하여 "장훈이 거인에서 3000안타를 칠 수 있게 해달라"고 구단주에게 대들었다고 한다. 그때 구단주가 '자네 술 취했나?' 라며 불쾌해했고 장훈은 오 사다하루의 소매를 잡아끌면서 "이제 거인에서 내가 할 몫은 없다. 롯데로 가겠다" 라면서 사태를 일단락 지었다. 이런 깊은 인연 덕택인지, 오 사다하루 감독이 욕을 대차게 먹으며 실시한 리빌딩이 성공해 99년 우승에 성공하자 장훈은 공중파 방송에 출연해 "그동안 왕짱(애칭)을 욕한 놈들은 모두 머리를 밀고 사죄해라!"라고 대차게 일갈하기도 했다.
  • 일본의 국민적 영웅[20]인 만큼 그에 대한 방송과 잡지, 책, 그가 출연한 광고가 많다. 광고 몇 개를 살펴보면...




[21]

  • 은혼사다하루는 이 사람에게서 모티브를 땄다. 미묘하게 공격적인 성향이 강하다던지, 야구장에 가서 진정이 됐다던지. 사다하루 장편 에피소드에서 야구장이 나온건 바로 이 때문.
  • 2010년 7월 3일 후쿠오카의 야후돔에 "오 사다하루 베이스볼 뮤지엄"이 개관했다.
  • 요미우리 감독시절에 주니치와 벤치 클리어링이 잦았는데, 카리스마로 유명한 오 사다하루였지만 상대감독이었던 성질머리 고약한 호시노 센이치오 사다하루 앞에서 주먹을 쥐어보이면서 '너 님 나랑 맞짱뜰거삼?'하고 도발을 하자 위축된 모습을 보이기도 해서 당시 팬들이 조금 실망했다는 카더라도 있었다. 실제 상황을 설명하자면 <돌격 크로마티 고교>로 유명한 요미우리의 워렌 크로마티가 빈볼을 맞자 주니치 투수를 주먹으로 가격했고, 호시노가 오 사다하루에게 주먹을 쥔 제스쳐를 취하며 "주먹으로 치는건 너무하지 않습니까"라고 했다고 한다. 호시노는 안티 요미우리로 유명하지만 나가시마나 오 사다하루 같은 선배격에게는 굉장히 깍듯하다고 한다.
  • 팬 서비스는 확실했던 선수. 선수시절에도 팬들의 요청에 인상 찌푸린 적이 없었으며, 당시 팀 동료였던 도이 쇼조가 "왕이 싸인 안하고 연습만 했으면 홈런 1000개는 더 쳤을 것이다. 다만 싸인도 홈런도 성실히했으니 기록과 기억 모두 가져간 남자가 됐다."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또 다른 일화로는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감독 시절, 당시 신인이었던 고쿠보 히로키가 팬들의 사인 요구에 힘들다며 "경기전에는 악수나 사인 요청을 하지 말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라는 인터뷰를 했는데 이를 전해들은 왕이 "바보 같은 자식, 너에게 부탁하는 팬의 용기를 생각해라!"라고 불호령을 내린적이 있었다. 왕 본인의 회고에 따르면 어릴 때 고라쿠엔 구장 앞에서 퇴근하는 거인 선수들에게 싸인을 요구했는데, 다른 선수들은 본 척도 안하고 지나갔으나, 요나미네 카나메 선수가 미소를 띄며 싸인을 해 주었고, 이 요나미네를 보고 감명을 받아 나중에 스타가 되면 웬만해선 팬들의 요구를 거절하지 않고 잘 응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고 한다. 고령인 현재도 팬들의 사인 요청에는 기분 좋게 응하지만 최근 유명인의 사인을 받아서 인터넷 경매에 내놓는 세태를 의식한 듯 사인을 하면서 "난 (현역시절부터) 하도 사인을 많이 해서 내 친필 사인이라고 해도 워낙 흔하기 때문에 인터넷 경매에 내놔봐야 1엔의 가치도 없단다."라고 한다 카더라.
  1. 한자 독음 시 왕정치, 중국어 병음 시 왕전즈 (Wáng Zhēnzhì)
  2. 원래 좌투우타였다가 학창시절 좌투좌타로 전향
  3. 플레잉 코치 겸임 (1976~1980)
  4. 절친 장훈의 1990년대 인터뷰에 의하면 오 사다하루에게 귀화압력이 상당했으나, 그는 이를 모두 거부했고, 영주권 취득도 거부하였다. 그리하여 계속 취업비자를 갱신해가며 일본에 거주한다고 한다.
  5. 10살 터울의 형인 테쓰히로는 게이오기주쿠대학으로 진학해 의사가 되었다.
  6. 오 사다하루 관련 사진을 찾아보면 방안에서 진검을 휘둘러 아라카와 코치가 떨어뜨려 주는 종이를 베는 훈련을 하는 이미지도 있다.
  7. 지금이야 미국에서도 미일 통산 홈런을 쳐주기는 하지만(마쓰이 히데키의 500홈런이라든지) 그건 그 선수가 그만큼 야구를 오래했다는 것을 인정하는거지 일본야구가 미국야구와 대등하다고 인정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그나마 오늘날에는 그 격차가 줄어들었으니 이 정도지 과거에는...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8. 1974년 행크 아론의 성적은 20홈런 .268 .341 .491, 나쁘진 않지만 40홈런을 밥먹듯 때리던 전성기와는 비교도 안되는 성적. 반면 당시 오 사다하루의 성적은 무려 49홈런 .332 .532 .761라는 본즈급 성적으로, 그의 커리어 하이 시즌이었다.
  9. 구체적으로는 대나무 압축 배트. 이 때문에 이후 일본 야구에서 자주 대나무 압축 배트를 볼 수 있었다.
  10. 이는 곧, 당시 리그의 선수들이 대체적으로 지금에 와서는 지극히 좁아보이는 규모의 그라운드도 넘기기 힘들어 했다는 얘기가 된다.
  11. V9 이후 1975년에 교진군 사상 처음으로 세리그 꼴찌를 찍었고, 그 뒤 1976~77년 2년 연속으로 세리그 우승은 했으나 일본시리즈에서 한큐 브레이브스에게 쳐발리고, 그 뒤 세리그에서 히로시마 도요 카프, 야쿠르트 스왈로즈 등 전통의 약체들이 갑툭튀 하는 바람에 우승을 못했다, 그 뒤 1981년에 나가시마 시게오에서 후지타 모토시로 감독이 바뀐 뒤 리그 우승을 한 뒤 일본시리즈에서 같은 고라쿠엔 구장을 홈구장으로 쓰던 닛폰햄 파이터즈와의 덕아웃 시리즈에서 승리해 간신히 V9 이후 첫 일본시리즈 우승을 차지했으나, 그 뒤 리그 우승은 별로 이루지 못하고, 일본시리즈에 가면 한큐처럼 V9 시절에 탈탈 털린 팀이나 요미우리만 만나면 명승부를 만들어내는 세이부 라이온즈에게 당하는 바람에 코칭스탭은 그만큼 압박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12. 일본시리즈에선 같은 교진군 OB 모리 마사아키가 이끄는 세이부 라이온즈에게 2승 4패로 패배했다. 여담으로 이 해 일본시리즈 5차전은 고라쿠엔 구장에서 마지막으로 열린 NPB 공식 경기였다.
  13. 사실 성적은 5년연속 A클래스를 찍을 정도로 좋았다. 문제는 프런트가 원했던 건 일본시리즈 우승이란 거.. 반도의 사자의 2002년 이전이 연상되면 기분탓이다?
  14. 사실 1992년 경 닛폰햄 파이터즈의 감독 제의를 받았으나, 당시 2번째로 거인군의 감독을 맡았던 후지타 모토시 감독의 경질설이 돌자 거인군 감독 컴백을 염두에 두고 거절했다.그러나 오 사다하루가 거인군 감독으로 컴백하는 일은 없었다. 거인군 감독직을 나가시마 시게오에게 뺏긴 오 사다하루는 결국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감독 취임이라는 선택을(요미우리 감독과 성골직도 포기하게 된 건 덤.) 하게 된다.
  15. 여담으로 오 사다하루는 요미우리 감독시절 준우승 책임을 지고 사퇴가 기정사실화 될때 요미우리가 선수치고 후임 감독 후지타 모토시를 발표해버리는 병크를 저질렀다(....) 사퇴가 확실시 되어도 공식적 발표를 안한 상태서 바로 후임을 발표한건 아직까진 감독신분이자 요미우리의 레전드 출신인 오 사다하루를 물먹이는 짓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필 인물이 후지타 모토시의 컴백이라(......) 팬들도 "나가시마에 맞먹는 레전드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라며 비난을 했지만 소용없는 일.. 오 사다하루도 이런 병크에 꽤 불쾌했을 만하지만 무덤덤하게 사퇴 기자회견을 하고 나갔고 그뒤에도 요미우리 감독을 기다렸으니 진짜 대인배중의 대인배..
  16. 여기에 위에 얘기한 감독 사퇴 및 선임과정서 벌여놓은 요미우리의 병크를 얘기하며 오 사다하루를 자극했다는 얘기도 있다.
  17. 사실 후반기까진 상위권이었지만 시즌 막판 분위기를 잘못 타 연패를 거듭해서(...) 꼴찌로 꼬라박고 말았다(...)
  18. 이날 경기를 패배하고 돌아가면서 분노를 참지 못한 한 팬이 날계란을 던진 사건.
  19. 참고로 이 날은 긴테츠 버팔로즈의 옛 홈구장이었던 일본생명구장(日本生命球場, 줄여서 닛세이 구장日生球場)의 마지막 프로야구 경기였다. 이후엔 사회인야구고교야구 경기 등에 쓰이다가 1998년을 끝으로 철거되었다.
  20. 1977년에 처음 생긴 국민영예상을 최초로 받았다. 2014년까지 22명, 1개 단체 밖에 받지 못 한 문화스포츠관련 상훈이다. 일본에서는 바비 발렌타인일본시리즈를 우승했을 때 외국인 감독으로 최초 우승이라 말했을 정도.
  21. 선수시절 오 사다하루는 닛산 자동차 모델로 활약했는데, 당시 일본시리즈에서 MVP 수상자 상품으로 수여된 토요타 자동차를 타게 될 경우에 닛산과의 계약파기를 우려하여 일본시리즈 MVP를 고사했다고 한다. 대표적인 예가 1971년 한큐 브레이브스와의 일본시리즈 3차전 9회말 끝내기 쓰리런을 치고도 MVP를 포기했던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