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바이어던

1 토마스 홉스의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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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raham Bosse가 그린 표지.확대판. 잘 보면 수많은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

1651년 1월 런던에서 발표된 사회계약론자 토마스 홉스의 저서.

계몽주의 사상 연구에 매우 중요한 책이지만 국내에는 2008년 말에야 진석용 교수의 번역으로 나남출판에서 2권으로 나뉘어 출간되었다. 명칭은 레비아탄에서 따왔다.

학습만화인 서울대 선정 인문고전 50선Why? 인문고전에서 다뤘다.

리바이어던은 총 4장으로 되어있으며 1장은 인간에 관하여, 2장은 국가에 관하여, 3장은 그리스도 왕국에 관하여, 4장은 어둠의 왕국의 관하여로 구성되어 있다.

성서에서는 이 동물을 혼돈과 무질서한 동물로 표현하지만 홉스는 반대로 리바이어던을 통치와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막강한 권력의 소유자며 사람들을 복종시킬 수 있는 존재로 여겼다.

홉스는 이 책을 통해 국가사회계약론에 대해서 설명하였다.

그는 그의 저서 리바이어던에서 인간은 본디 이기적 존재이며, 자기보호를 최우선시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연적인 상태,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거나 자기 보호를 위해 폭력적 성향을 드러내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상태가 된다. free for all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들의 보호를 위해 강력한 힘의 형체를 정하게 되는데, 이 형체는 사회사람들의 계약을 통해 통치자의 권리가 성립된다. 사람들은 그들의 일부 권리를 통치자에게 양도함으로써 복종해야 한다고 보았으며, 그 사람은 국가의 통치자가 된다고 보았다.

사회구성원들은 그들 자신의 보호를 위해 서로 임차적 계약을 맺는데, 이것은 말 그대로 임차적 계약이라, 확실한 구속권을 가지지 못 한다. 그러기에 사회구성원은 계약을 불법적으로 이행하지 않을 때, 자신들이 가질 수 있는 이익보다 큰 처벌을 가하기 위해 강한 대리인을 세우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리바이어던'이 된다. 이 강력한 괴수는 국가가 되며, 국가라는 울타리 안에 있는 구성원들은 국가에 복종하게 되며, 그 과정에 일부 권리를 국가에게 양도하면서 사회계약설에 의거한 국가가 탄생한다고 보았다. 현대에 사는 우리들이 보기엔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이 책이 쓰여진 17세기는 중세가 저물고 막 근대가 탄생하려는 시점으로 홉스는 이 책을 통해서 지극히 중세적인 가치 기준인 신의 권력으로부터 결별하고 근대 정치 철학의 장을 열게 된다. [1]

즉 쉽게 말하면, 사회의 평화를 위해서는 위치가 보장받는 강력한 절대 권력자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말을 쉽게 오해해서는 안 된다. 흔히 홉스의 리바이어던이 강력한 왕을 말하며, 이전의 "왕권신수설"처럼 군주의 권력을 옹호하는 것처럼 오해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홉스에게 국가 및 국가권력의 존재는 인간 사이의 계약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이는 곧 권력의 근원이 신이 아닌 인간이라는 의미이며, 신의 대리인인 국왕이 하느님의 은총으로 국가를 다스린다는 기존의 인식을 아득히 넘어서는 혁명적인 발상이었다.[2] 또한 홉스는 아무리 평화를 위해 강력한 권력이 보장받아야 한다고 할지라도, 계약의 목적을 넘어서는 행위, 즉 인민의 생명을 마음대로 빼앗는 행위는 할 수 없다고 권력의 한계를 정하였다. 그리고 절대권력의 대가로 행해야 하는 인민의 안전을 보장하지 못하는 것 같이 정부가 자신의 의무를 다하지 않을 경우, 그 정부는 교체돼도 된다고 명시했다.[3]

이러한 것은 존 로크에게 영향을 주게 되며, 비록 로크의 사상은 홉스의 사상과는 많은 차이점을 보이지만, 훗날 미국과 같은 근대 국가 체제로 나아가는 이론적 시발점이 된다. 그렇기에 그의 사상이 한계가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그러나 그의 획기적인 사상은 당대인들에게 대차게 까였다. 왕권신수설을 옹호하는 왕당파는 말할 것도 없고, 교회[4]도 비난했으며 무신론[5]라고 까지 불렸다. 심지어 의회파에서도 그가 강력한 왕권을 옹호한다며 비난할 지경이었다.즉 왕당파에겐 왕권을 약화시킨다고 까이고 의회파에겐 왕권을 옹호한다고 까였다.

존 로크는 홉스의 사회계약을 이어받았음에도(물론 두 사람의 사상은 큰 차이점은 존재한다) 저서에서는 의도적으로 일절 언급하지 않았을 정도.

결론은 지금 적용하기에도 큰 무리가 없을 만큼의 훌륭한 정부론을 제시했지만, 정치적 이유로 많이 평가절하된 경우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평가절하라는 것도 어디까지나 그의 사상을 겉핧기 식으로 소개한 윤리 교과서만 접한 일반인들에게나 해당되는 것일 뿐이며, 학문적 영역에서 그의 사상의 중요성은 지금까지도 확고부동하게 인정받고 있다.

동양에서는 비슷한 사상을 가진 철학자로 맹자가 있다. 맹자의 경우 왕의 권한은 하늘이 내린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여기까지만 본다면 서양의 왕권신수설처럼 보일 수는 있으나, 맹자는 하늘의 의지는 '민심'에 의해서 드러난다고 보았다. 즉 실질적으로 '민심=천심'이라는 등식이 도출되며, 왕의 권력은 인민들이 왕에게 부여한 것이 된다.. 따라서 인민들에게 패악질을 하여서 민심을 잃은 왕은 이미 왕이 아니라고 보았으며, 이러한 경우에 왕을 갈아치우는 것은 '역적질'이 아니라 '정당한 권력교체'로 보았다. 이런 면에서 보자면 시대도 지역도 차이가 크지만, 홉스와 통하는 면이 많다. 다만 맹자사상은 당대에 철저히 씹혔고, 후대에 주희에 의해서 재평가가 되었으나 재해석이 너무 심하였다. 안습

다만 전체적으로 보면 가장 비슷한 사상가는 역시 순자이다. 순자는 이익 관심을 근거로 한 성악설을 주장하였고, "군주는 배요, 백성은 물이다.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고, 배를 뒤집기도 한다"라는 언급 등으로 직분을 다하지 못하는 군주에 대한 민중의 저항을 옹호하였으며, 엄정한 예치禮治로서 백성을 교도하는 전제적 성왕聖王의 정치를 정당화하였고, 학문에 접근하기에 앞서 정확한 명칭[正名][6]에 대해 이해할 것을 강조하였다. 이는 홉스의 인간론, 정치론, 학문론과 상통하는 부분이 크다.

2 판타지 수학대전의 등장인물

무한의 마왕 문서 참조.

3 러시아 영화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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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는 분은 추가 바람

2014년에 개봉한 러시아 영화
러시아의 평범한 중년이 자신의 땅을 노리는 권력자에게 맞서 싸우다 결국 몰락하는 과정을 그리는 영화이다.
안드레이 즈비아긴체프 감독의 영화로 프랑스 칸 영화제에서 최우수작품상, 미국 골든글로브에서 외국어영화상을 받았다.
그 이외에도 러시아의 황금독수리영화상 시상식에서 감독상, 남우조연상, 여우조연상, 극본상 등 여러 부분을 수상하였다.

부패한 정부, 종교, 사이의 결탁에 꿈도 희망도 없어가 절로 나오는 내용인지라 러시아의 보수층에게 상당한 비난을 받았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런 영화를 러시아 문화부에서 지원했고, 아카데미 영화상에 추천한 것도 러시아 문화부라는 점.
가뜩이나 푸틴을 비판하면 매장당하는 러시아 사회라 러시아 문화부장관은 "개인적으로 리바이어던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변명을 했다.

한편 러시아 정교회의 진보진영을 포함한 진보측에서는 리바이어던을 높게 평가하는 시각도 있는 듯 하다.
정교회의 안드레이 쿠라예프 신부는

"즈비아긴체프 감독은 '리바이어던'으로 비난받고 있는 것을 영광으로 여겨야 한다." "푸쉬킨, 그로보예도프,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도 같은 이유로 비난받았기 때문"
라고 뼈 있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1. 다만 집필 당시, 당대인들에게는 절대 왕권을 주장한 부분만 강조해서 왕권신수설과 엮거나 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2. 17세기에 출현한 근대 정치 사상들에게서 등장하는 공통적인 부분은 '단일한 권력'의 존재가 왕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왕정이냐 귀족정이냐 민주정이냐의 차이는 그 '단일한 권력'을 어느 계층이 향유하게 되는가에 따라 결정된다는 측면이 강하다.
  3. 단, 리바이어던의 이 부분을 홉스가 저항권을 인정하였다고 볼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으며, 현행 교과서에서는 저항권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보고 있다.
  4. 리바이어던에서 성경을 고증하며 교회는 영적권력이고 뭐고 없으며, 혹세무민이나 하고 있다고 깠다.
  5. 신앙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비난하기 위한 비하적 측면이 강했다. 물론 영혼의 존재를 부정하는 등 유물론적 입장도 있었지만, 실제로 홉스는 죽을 때까지 신자였고, 예배에 빠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6. 이는 공자의 정명론과는 다르다. 공자의 정명론은 어긋난 명칭의 교정을 통한, '명칭'과 '순리로서의 실질' 간의 정합을 요청하는 것이지만, 순자의 정명론은 논리학적 사유를 위한 올바른 언어 개념의 정립을 요청하는 것이다. 문자상으로는 같은 正名論이지만 애초부터 전자는 '名을 正함의 論'이라는 의미, 후자는 '正한 名의 論'이라는 의미로, 문장성분의 용법이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