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톈진 터다 No. 5 | |
리웨이펑(李玮峰/Lǐ Wěifēng) | |
생년월일 | 1978년 12월 1일 |
국적 | 중국 |
포지션 | 수비수 |
등번호 | 5번 |
프로입단 | 1998년 선전 핑안 |
소속팀 | 선전 핑안(1998~2002) 에버턴 FC(2002~2003) 선전 젠리바오(2003~2005) 상하이 선화(2006~2008) 우한 광구(2008) 수원 삼성 블루윙즈(2009~2010) 톈진 터다(2011~) |
국가대표 경력 | 112경기/14골 |
1 클럽
중국의 국가대표 수비수이자 톈진 터다의 센터백 겸 오른쪽 풀백. 한자 그대로 읽어 '이위봉'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1998년에 선전 핑안에서 프로 생활을 시작하였으며, 당시 선전 핑안의 감독은 98월드컵 대회 중 경질되었고 당시 K리그의 경기 담합 의혹 등을 지적하는 바람에 국내에서 자리를 잃고 중국으로 쫓겨난 차범근 감독이었는데 당시 어린 나이의 리웨이펑의 가능성을 높이 보고 많은 기회를 부여하였다고 한다.
2002 한일 월드컵 당시 중국은 브라질, 코스타리카, 터키 등에게 관광을 당했으나 리웨이펑은 전 경기에 출장하며 무난한 활약을 보였다. 이에 중국 스폰서를 뒤에 업고 당시 중국 스폰서 물기에 열을 올리던 에버턴 FC로 임대이적을 하면서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로 진출한다.[1] 하지만 에버튼에서는 리그 1경기와 리그컵 1경기, 이렇게 총 2경기 출장에 그쳤고, 결국 02-03 시즌 후 선전 젠리바오로 이적하게 되면서 그의 프리미어리그 도전은 실패로 끝났다.
하지만 이후에도 중국 국가대표팀의 주전 센터백이자 중국 슈퍼 리그의 에이스급 센터백으로 꾸준히 활약을 하며 선전의 2005년 AFC 챔피언스 리그 4강 진출에 힘을 보탰다. 2006년에는 상하이 선화로 이적했는데, 그 해 AFC 챔피언스 리그 8강 광탈의 주범이 되기도 했지만 어쨌든 주전 수비수로 꾸준히 나섰다. 그러나 2008년, 상하이에서의 출장시간이 불규칙적으로 변하게 되자 우한 광구로 이적하게 되었다. 하지만 우한 광구는 그 해 중국축협의 편파성 징계에 반발해 남은 리그일정을 포기하면서 2부리그 강등 처분을 받았고,[2] 자연히 고액주급자인 리웨이펑은 이적 명단에 오르게 된다.
이 때 아시아축구연맹(AFC)에서는 아시아 쿼터제를 시행하게 되는데 이 쿼터제를 노리고 한국 및 중국, 일본 등 3개국의 팀들이 리웨이펑에게 관심을 보였으나 그는 선전 시절에 자신의 가치를 알아준 차범근 감독 밑에서 뛰기를 희망하여 수원 삼성 블루윙즈로 이적하면서 K리그 최초의 중국인 선수가 되었다.
당시 수원 팬들의 반응은 별로 좋지 않았는데, 기본적으로 중국인 선수들의 실력에 대한 불신도 있었겠지만 리웨이펑의 경우 특유의 거친 플레이로 한국 팬들 사이에서 악명이 높았던 선수였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마토의 빈자리에다가 중국에서 사고만 치던 싸움꾼 수비수 데리고 와서 뭐하자는 겅미?' 라는 볼멘소리가 나왔고,[3] 게다가 수원에서의 데뷔전인 프리시즌 경기에서 퇴장까지 먹자 'ㅉㅉㅉ 흥분 잘하는 짱깨 수비수는 좀 아닌듯'하는 반응까지 나왔다.
그.러.나. 2009시즌 동안 차범근 감독으로부터 많은 기회를 부여받았으며 마토의 빈자리를 파이팅 넘치는 모습으로 메우려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서 한 시즌만에 수원의 팬들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특히 이전까지 보여주었던 자기 성질을 못이겨서 상대에게 거친 태클 및 폭력을 남발해서 카드를 수집하는 모습이 K리그에서 활약하는 동안 많이 줄어들었으며 마토만큼은 아니지만 타점 높은 헤딩으로 필요한 타이밍에 골을 기록하기도 하는 등 어느새 수원에 없어서는 안 될 수비수로 거듭났다. 그랑블루 사이에서는 인기를 독차지하는 존재가 되었는데, 이 당시 수원 꾸르바에 가면 항상 오성홍기를 볼 수 있었으며, 리웨이펑이 좋은 플레이를 보일 때마다 '리웨이펑 짜요!'라는 중국어 구호가 나왔다. 그리고 중국 유학생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좋아서 리웨이펑 이적 후 수원 삼성 블루윙즈 경기장에 중국인 관중이 늘어나기도 했다.
특히 리웨이펑이 수원 팬들에게 높게 인정받는 이유는 그 충성심인데 2009시즌이 끝난 후 전북 현대 모터스에서 고액의 주급을 부르며 이적을 요청하였으나 수원과 차범근 감독에 대한 의리 때문에 이적할 수 없다는 말과 함께 잔류를 선택하여 그랑블루들의 눈에 땀이 고이게 만들기도 했다.
2010년에는 황재원, 강민수 등의 수비자원들이 새로 들어와서 자리를 잃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였으나 윤성효 감독 밑에서 오른쪽 풀백이라는 새로운 자리를 맡아서 그동안 중앙수비수로 서면서 숨겨왔던 공격본능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수원 삼성 대 FC 서울 전에서 보여주었던 한중일대통합슛[4]은 백미.
2010시즌 종료후 팀이 전면 재개편을 단행 마토를 복귀시키면서 수원을 떠나게 되었다. 중국에 가 있는 동안 구단에서 일방적으로 방출을 통보했고(계약기간이 아직 남아있었다.) 리웨이펑 본인은 이를 전혀 몰랐다고 밝혔으며 수원을 떠나기 싫어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덕분에 수원팬들뿐만 아니라 모든 K리그팬들에게 동정을 받고 있으며 그와 동시에 수원은 엄청난 욕을 먹고 있다. 쓸때 쓰고 필요 없으면 버리는 삼성의 마인드 수원으로 오는 데 인연을 제공한 차범근 전 감독이 없지만 수원에 대한 충성심은 아직도 막강한 듯. 하지만 수원을 떠나게 되더라도 아시아쿼터가 적용이 되는 선수라 수비가 취약한 팀에서 언제든지 콜을 받을 수 있는 선수다. 중국 리그에서 데려가려 하지 않는 이상 2011년에도 K리그에서 볼 확률은 높은 편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결국 중국 텐진 터다에 입단하면서 고국으로 돌아가게 되어 한국에서 그의 모습은 더 이상 볼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수원 팬들은 마토의 느린 발과 약해진 수비에 절망하면서 리웨이펑을 그리워하고 있는 중.
수원 삼성에 입단해서 첫 시즌을 보내던 2009년에 중국 언론과 '한국 축구를 인정하고 따라 배워야 한다'는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수원 용병 리웨이펑의 축구, 그리고 한국 이야기 (1)(2)
중국에서 있으면서 송종국의 C리그 텐진 터다 입단을 추천하기도 했다.
의외로 드라마 대장금의 팬이라고 한다.
수원 삼성 블루윙즈 대 알 사드 난투극 이후로 한번 더 재평가를 받고 있다. 만약 리웨이펑이 그 현장에 있었다면 알 사드 너네는 빅버드에서 UFC 찍는거였어[5]
2016년 4월 30일, FC 서울과의 슈퍼매치에서 정장을 입고 경기장에 등장하여 큰 박수를 받았다.
2 국가대표
중국 대표팀에서 100경기 넘게 출전한 센추리 클럽 멤버. A매치 데뷔전은 1998년 11월 22일에 열린 대한민국과의 친선경기였다. 2008년 이후로는 국가대표의 부름을 받지 못하고 있었으나 2011년에 중국 국가대표로 재발탁되었다.
한국 팬들에게 이름을 알린 계기는 1999년 던힐컵 결승전인데, 리웨이펑의 거친 플레이를 참다 못한 이동국이 리웨이펑의 얼굴에 팔꿈치를 휘둘렀고 리웨이펑도 맞받아치면서 결국 두 선수는 동반 퇴장당했다. 그리고 동아시안컵 대회에서의 유경렬과의 충돌 역시 회자되는데, 당시 유경렬의 도발에 넘어가서 얼굴을 밀쳐서 넘어뜨려버렸다. 하지만, 심판은 리웨이펑이 아닌 가오린[6]에게 레드카드를 줬으며, 리웨이펑은 후반에 심판에게 계속 항의하다가 레드카드를 먹었다. 여기 레드카드 한장 추가요
그 유명한 을용타 사건 때는 이을용이 리이의 뒷통수를 때려 눕히자, 리웨이펑이 분노하면서 이을용을 밀치는 모습이 나온다. 이 경기에서 리웨이펑은 경기 내내 안정환과 신경전을 벌이기도 했다. 이렇듯 이래저래 한국 축구 팬들에게 비호감 이미지만 쌓아올리던 선수였는데, K리그에 온 이후에는 이미지가 많이 좋아졌으니 사람 앞날은 모를 일.
3 플레이 스타일
데뷔 시절부터 '수비에 대한 천부적인 감각이 있다' '마치 중국의 홍명보 같다'라는 칭찬을 들을 정도로 위치선정을 통해 상대 공격수를 묶는 플레이를 잘 하며 좋은 피지컬을 이용해서 상대 선수와의 헤딩경합에서 잘 밀리지 않는 편이긴 하지만 발이 빠른 편은 아니라서 빠른 공격수들에게는 잘 털리는 편이고 잔실수가 좀 있는 편이다.
터프하다못해 지나치게 거친 플레이가 지적받기도 했는데, K리그에 온 이후에는 플레이의 거친 정도를 조절하기 시작하면서 필요할 때는 거친 플레이로 상대 공격수를 위축시키고, 상황에 따라서는 필요한 정도의 몸싸움만 수행하기도 했다.- ↑ 당시 에버튼의 스폰서는 중국 휴대폰 회사였고 에버튼이 원하던 선수는 미드필더인 리티에였으나 하필 그 휴대폰 회사의 경쟁사가 리티에의 소속팀인 랴오닝 FC를 후원해서 리티에를 임대 못하게 막았고, 결국 대신 선택한 게 리웨이펑이었다는 후문이 있다. 물론 리티에도 얼마 지나지 않아 에버튼으로 이적하긴 했지만.
- ↑ 이후 등록 취소와 함께 축구 리그 참가 자격을 박탈당하면서 해체된다.
- ↑ 동아시아축구대회에서 일본의 스즈키 게이타의 멱살을 잡았다.
- ↑ 다카하라 힐패스 - 리웨이펑 크로스 - 이상호 골
- ↑ 자세한 것은 해당 항목 참조.
- ↑ 심지어 가오린의 첫 A매치였다. (...) 일본인 주심이 상황을 제대로 못봐서 북한인 선심에게 확인을 했는데, 선심이 그만 가오린을 지목하는 바람에..... 안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