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헴(밴드)

1 개요

왼쪽부터 네크로버처(베이스), 유로니무스(기타), 데드(보컬), 헬해머(드럼)

블랙 메탈의 전설
놀라운 음악성과 함께 경악스러운 이력을 보여주는 밴드.[1]

노르웨이 출신의 블랙 메탈밴드이다. 블랙 메탈계에서는 가히 레전드로 받들어지고 있는 밴드이며, 어둠과 오컬트적인 색채를 가장 잘 표현한 밴드라고 알려져 있다.

이렇듯 음악적인 면으로는 블랙 메탈의 레전드라고 칭송받는 밴드이지만, 정작 멤버들의 문제로 시끄러운 게 많았다. 그 중 가장 유명한 두가지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유명한 유로니무스 살인사건과 바로 보컬리스트였던 데드의 자살사건이다.

활동 당시 이들의 나이가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이었다는 사실과[2] 본문을 보면 당시 노르웨이 블랙 메탈씬 자체가 10대에서 20대 초반의 사춘기 특유의 중2병 내지는 허세장난을 넘어 극단적으로 치달은 결과물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음악적인 면은 몰라도 행동적인 면은 절대 따라해선 안될 일이다. 집단괴롭힘, 방화 등 안좋은 짓은 다 하고 다닌 밴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사람까지 죽였다.

나머지 멤버들의 정신상태가 괴랄의 끝을 보여주어 그렇지 헬해머의 똘끼도 일반인은 가볍게 뛰어넘어준다.

2 바이오그래피

2.1 밴드의 결성

1984년 오슬로에서 베놈켈틱 프로스트의 곡들을 카피하는 스쿨밴드로 처음 결성 되었으며 1986년 데모 <Pure Fucking Amageddon>과 1987년 EP <Deathcrush>를 1000장 한정으로 발매하면서 데뷔하였다.[3] 유로니무스에 의하면 밴드의 이름은 베놈의 곡 Mayhem with Mercy에서 따왔다고 한다. 결성 당시 멤버는 유로니무스(기타, 보컬), 네크로버처(베이스, 보컬), 맨하임(드럼)

1984년 메이헴 결성 당시 리더였던 네크로버처는 평소 가오를 매우 중요시하고 여자를 밝히는 것으로[4], 유로니무스는 허영심이 매우 강하고 독선적인 성격을 가진 것으로 유명했다고 한다.[5] 밴드는 악기에 노르웨이 국기와 역십자가를 그려놓고 무대위에 등장했으며 해골, 돼지 머리 등의 소품과 얼굴 분장을 적극적으로 사용하였다. 참고로 메이헴의 멤버들은 당시 노르웨이의 청소년 공산주의자 클럽 Rød Ungdom의 일원으로 활동하고 있었고 그곳에서 알게된 스탈린을 숭상하고 있었으며 각종 사건들을 통해서 밴드를 홍보하는 것을 활동의 지향점으로 삼았다고 한다.

<Deathcrush> 앨범의 녹음이 완료된 후, 음악을 업으로 삼고 싶지 않던 매니악과 밴드 생활에 지친 맨하임이 밴드를 나갔고 네크로버처와 유로니무스는 프로 뮤지션으로 전향하고자 새 멤버들을 모집한다. 그 결과 스웨덴의 Morbid(모비드)라는 데스 메탈 밴드의 리더이자 보컬이었던 데드와 노르웨이 여러 지역의 메탈 밴드에서 세션 뮤지션으로 활동하고 있던 드러머 헬해머가 밴드에 가입하고 메이헴은 1988년부터 본격적으로 리허설과 작곡을 시작한다.

2.2 보컬리스트 데드의 자살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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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드 생전의 모습.

본명이 페르 잉베이 올린(Per Yngve Ohlin)인 데드는 태어나자마자 부모가 이혼한데다가 학교에 입학해서는 또래들과 잘 어울리려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집단괴롭힘을 당했다. 그러던 어느 날 참다못한 페르가 평소 그를 괴롭히던 일진들에게 반항을 시도했다가 보복으로 린치를 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의료진의 노력으로 구사일생한 페르는 이후 레코드 가게 및 메탈 팬진 등을 통하여 데스 메탈에 깊게 빠져들었고 아예 1986년부터는 Morbid(모비드)라는 밴드까지 결성하여 보컬리스트로 데뷔하게 된다. 페르는 작사는 물론 연기 발생장치, 무대 조명까지 직접 신경쓰는 등 밴드의 프론트맨 역할을 도맡아했고 이 때부터 데드라는 닉네임을 쓰기 시작한다. (모비드의 멤버들은 닉네임과 기믹을 하나씩 설정하고 무대에 나왔다.) 그러나 1987년 12월, EP <December Moon>을 마지막으로 밴드의 주작곡자이자 기타리스트인 John 'Lennart" Hagström이 부모님에 의해 반강제로 밴드에서 탈퇴하고 이에 실망한 페르가 메이헴에 가입하기 위해 노르웨이로 떠나며 모비드는 해체된다. 1, 2

유로니무스, 데드, 네크로버처

데드와 유로니무스는 밴드를 실질적으로 운영하는 두 축이 되었지만 둘은 점차 성격 차이, 밴드에 대한 방향성 차이로 대립하기 시작한다. 특히, 유로니무스의 지나친 허영심이 매우 심각한 문제였는데 네크로버처의 증언에 따르면 유로니무스는 데드의 가입으로 밴드내에서 자신의 영향력이 옅어질까봐 은근히 그를 따돌리려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결국, 데드는 1989년 스톡홀름에서 활동하던 여러 메탈 밴드들이 연합하여 Entombed라는 이름의 새 밴드를 조직했다는 소식을 듣자 메이헴을 탈퇴하고 스웨덴으로 귀국하여 Entombed에 가입한다.

Entombed가 밴드 홍보 겸 데뷔 앨범을 녹음하기 위한 돈을 마련하고자 투어 계획을 짜던 시기, 유로니무스는 데드에게 연락하여 1990년부터 밴드의 해외 투어 스케줄이 예정되어 있고 투어가 끝나면 곧바로 자신이 설립한 레코드 회사 D.S.P.(Deathlike Silence Production}에서 메이헴의 데뷔 앨범 녹음을 시작한다는 소식을 알린다. 그러자 데드는 다시 노르웨이로 가서 메이헴에 재가입하기로 결정, 밴드를 떠난다.[6] 데드 사후에도 Entombed의 멤버들은 활동을 이어가서 포제스드Seven Churches, 데스Scream Bloody GoreLeprosy 등으로 대표되는 보다 스래쉬 메탈의 형태에 가까웠던 미국의 데스 메탈과 당시 유럽 언더그라운드 시장에서 쏠쏠한 재미를 보고 있었던 하드코어 및 크러스트 펑크의 사운드 포징을 결합한 스웨덴 데스 메탈장르의 대표주자로서 활동하였다. 특히, 1993년 10월 4일 발표한 3집 앨범 <Wolverine Blues>부터는 멜로딕 데스 메탈의 성공을 본받아서 기존의 스웨덴식 데스 메탈에 좀 더 리듬 위주의 리프 전개를 기반으로 하는 빌드업을 특징으로한 Death 'n' Roll 장르를 개척하였다.

데드(좌)와 유로니무스(우)

하지만 데드가 노르웨이에 도착한 이후 그의 앞에 놓여있던 것은 메이헴의 리더였던 네크로버처의 부재와[7] 친하게 지냈다고 생각했던 유로니무스를 주축으로한 노르웨이 뮤지션들의 괴롭힘이었다. 헬해머의 증언에 의하면 데드는 처음에 그들의 이러한 행동을 그냥 무시하거나 묵묵히 참고 넘어갔지만 점차적으로 그들에게 저항하기 시작했는데 그럴때마다 유로니무스는 데드에게 메이헴의 연습실은 오슬로의 외곽에 위치해있으며 자금 문제로 자동차와 전화기가 없다는 점을 상기시키며 "너를 편들어줄 사람은 이제 이 세상에 아무도 없어. 아무도 너를 생각하거나 그리워 하지 않을거야!" 같은 언행을 통해 그를 굴복시키려는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1990년 2월 28일, Sarpsborg에서 펼쳐진 공연 막바지에 갑자기 데드는 콜라병으로 자신의 손목을 그었다. 데드는 손목을 치료하기 위해서 스웨덴으로 귀국하였고 아들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란 그의 아버지는 아들의 밴드 복귀를 막기위해 스웨덴 예술대학 진학을 권유했지만 데드는 아버지의 제안을 거부하고 치료를 끝내자마자 메이헴의 해외 투어를 준비한다며 다시 노르웨이로 떠났다고 한다. 데드가 다시 돌아오자 평소 데드의 취미가 글쓰기와 그림 그리기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그들은 수시로 그가 숙식하고 있던 방을 뒤지기 시작했고 만약 그런 내용을 발견하면 파기시켰다고 한다.

그러자 데드는 '자신은 이미 예전에 한번 죽었다'라며 자신의 옷을 땅속에 묻었다가 꺼내입고 얼굴에 분장을 한채로 투어를 하러 동독으로의 여행길에 올랐다. 투어의 첫 공연인 Annaberg 공연에서 관객들이 밴드의 공연에 무반응을 보이자 이러한 반응에 실망한 데드는 돼지머리 등의 무대장치를 관객에게 던졌고 Zeitz 공연에서는 '시체가 된 자신의 체취를 관객들에게 느끼게하고 싶다'면서 공연장 근처 정육점에서 얻은 동물 내장을 비닐봉지에 담고 무대에 올려 놓은다음 공연을 시작했다고 한다. Leipzig 공연에서는 자신의 손목을 그은 뒤, 흘러나오는 피를 앞줄의 관객들에게 뿌렸다고...

결국, 이러한 데드의 기행과 유로니무스의 공산단체 활동 이력으로 밴드의 투어는 도중에 중단되었고 투어가 중단되자 네크로버처는 멤버들에게 연락을 끊고 잠적, 헬해머는 다시 예전처럼 노르웨이 전역을 돌며 세션 활동을 시작한다. 멤버들이 밴드를 이탈하자 유로니무스는 부모님 집에 머물면서 앨범 녹음 등 밴드 활동 자체를 취소하고 밴드의 라이브 장비들을 팔아서 본격적으로 D.S.P.의 활동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고 메이헴의 연습실에서 지내던 데드는 1991년 4월 5일, 칼로 손목과 목을 긋고, 샷건으로 머리를 쏴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1969년 생이었으니 그의 나이 22세 때였다.

다음은 데드의 유서 전문이다.

Excuse the blood, but I have slit my wrists and neck. It was the intention that I would die in the woods so that it would take a few days before I was possibly found. I belong in the woods and have always done so. No one will understand the reason for this anyway. To give some semblance of an explanation I'm not a human, this is just a dream and soon I will awake. It was too cold and the blood kept clotting, plus my new knife is too dull. If I don't succeed dying to the knife I will blow all the shit out of my skull. Yet I do not know. I left all my lyrics by "Let the good times roll"—plus the rest of the money. Whoever finds it gets the fucking thing. As a last salutation may I present "Life Eternal". Do whatever you want with the fucking thing.

P.S. I didn't come up with this now, but seventeen years ago.

/ Pelle.[8]

1991년 4월 8일 연습실에 갔다가 데드의 자살 현장을 처음으로 발견한 유로니무스는 그의 죽음을 경찰에 신고하기 전 근처 상점으로 달려가 일회용 카메라를 산 후 데드의 시신을 훼손시키고 그 주위에 일부 사물을 늘어놓은 뒤 '사진을 찍었고 동료 뮤지션들에게 자살 현장에서 모은 데드의 뼈조각들을 선물한 뒤[9] 연락이 끊긴 상태였던 네크로버처에게 "데드 녀석이 진짜 멋진 행동을 했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내가 자살 현장의 사진을 찍었는데 이걸로 밴드를 홍보하면 엄청날 것 같지 않아?"라는 엽서를 보냈다.

네크로버처는 유로니무스의 엽서를 받고 그의 행동에 혐오감을 나타내며 "멋진 일이라니 너 제정신이야? 그 사진들 파기하고 앞으로 나에게 연락하지마. 그리고 만약 그 사진들이 레코드점이든 어디든 눈에 띄이기만 한다면 당장 가서 너를 반죽여버릴거야 " 라는 답장을 보내서 밴드와 관련된 사람들에게 절교를 선언했지만 유로니무스는 자신의 계획대로 레코드 회사의 사장에게 데드의 시체사진을 보낸 다음 그 사진을 자켓으로 삼아 부틀랙 앨범 <Dawn of the Black Hearts>을 발매하고[10] 앨범이 발매되자 기자들에게 인터뷰 약속들을 잡아서 "나는 메이헴이라는 블랙 메탈 밴드의 기타리스트 유로니무스라고 한다. 밴드의 보컬인 데드가 블랙 메탈을 널리 알리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나는 데드의 뇌 일부분까지 먹을려고 시도했다. 우리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데드는 좋은 가수에다 중요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그의 자살을 통해 메이헴이 세상에 널리 알리질 것이라는 점이다." 같은 발언을 하며 데드의 자살을 언론에 대서특필되게 하고 <Dawn of the Black Hearts> 앨범을 홍보하였다.

그러자 평소 유로니무스와 그를 따르는 뮤지션들이 데드를 살해했다고 확신하던 스웨덴 뮤지션들은 데드의 복수를 하기 위해 노르웨이로 원정 갈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다만, 일이 너무 커질 것을 우려한 데드의 유족들이 말려서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고... 엠페러의 드러머이자 유로니무스의 레코드샵에서 점원으로 일한 경력이 있던 파우스트 또한 유로니무스 사후 인터뷰에서 "유로니무스가 데드를 자살하게 만들기 위해 일부러 그를 배척하고 그의 정신을 괴상한 상태로 만들었다."고 증언하였다.

유로니무스의 이런 기괴한 행동은 정신나간 똘끼와 더불어 그의 허세, 그리고 돈 욕심을 극단적으로 드러내 주었다. 결국 다섯 살 아래의 청년 손에 죽어가는 결과로 이어진 것도 예견된 일일 것이다. 데드는 자살을 택했지만, 카운트는 살인으로 보답했으니까.

2.3 사타닉 서클의 결성과 유로니무스 살인사건

카운트 그리쉬니크와 유로니무스

데드의 자살로 자신에 대한 사회적인 평가가 하락하자 유로니무스는 1991년 6월부터 Helvete(노르웨이어로 '지옥'이라는 뜻)라는 이름의 블랙 메탈 전용 레코드샵을 개장하고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을 규합해서 《사타닉 서클》이라는 조직을 결성, 본격적으로 교회 방화를 비롯한 범죄를 저지르기 시작한다.[11] 특히 유로니무스는 리더 Padden과의 싸움 끝에 반강제적으로 Old Funeral이라는 밴드에서 쫓겨난 상태였던 카운트 그리쉬니크라는 10대 소년을 자신의 후계자로 삼는다면서 Pytten과 함께 D.S.P.에 소속된 뮤지션들의 앨범 프로듀싱까지 맡기는 등 신뢰했고 카운트도 이런 유로니무스의 명령을 충실히 받들어서 범죄 행위를 가장 많이 저지르는 조직의 행동대장 역할을 하기 시작한다. (참고로 카운트는 이미 1987년부터 네오 나치 사상에 심취해서 스킨헤드 복장을 하고 다녔고 호전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고 한다.)

1992년 한해에만 노르웨이의 국보로 지정된 대형 교회들이 방화로[12] 연이어 소실되자 사회에서 블랙 메탈과 사타닉 서클에 대한 경각심이 한껏 높아진 것을 본 유로니무스는 가끔 연락을 주고받던 핼헤머와 Blackthorn(Snorre Ruch)라는 기타리스트의 도움을 받아서 데드가 남긴 가사들을 바탕으로 곡 작업을 진행하여 메이헴의 데뷔 앨범 De Mysteriis Dom Sathanas 발매 준비를 시작한다. 앨범에 수록될 곡들이 완성되자 유로니무스는 카운트를 베이스 포지션으로, 평소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메탈 뮤지션들이 좋아하던 헝가리의 메탈 밴드 Tormentor의 보컬리스트 아틸라를 보컬 포지션으로 영입하여[13] 베르겐의 그리그홀에서 프로듀서 Pytten의 프로듀싱으로 De Mysteriis Dom Sathanas 레코딩을 진행한다. (사족으로 다른 D.S.P. 소속 뮤지션들의 앨범들도 마찬가지로 베르겐의 그리그홀에서 녹음되었다.)

1993년 1월, 앨범 녹음이 완료되자 카운트는 블랙 메탈과 메이헴의 앨범을 홍보하기 위해 노르웨이의 대형 언론사인 Bergens Tidende지 기자와 인터뷰를 하게되는데 그는 인터뷰에서 "자신이 현재 진행되고 있는 방화 사건의 용의자이며 Lillehammer라는 사람도 살해했다는 내용을 자랑스럽게 떠벌렸고 1993년 4월에 앨범을 발표한 뒤, 앨범 표지처럼 노르웨이의 국보인 니다로스 대성당 (Nidaros Cathedral)을 폭파시킬 것이라는 계획까지 말했다. 당연히 이 내용을 들은 기자는 깜짝 놀라서 인터뷰를 마친 다음날 경찰에 카운트를 신고하였고 카운트는 경찰에 잡혀서 감옥에 갇히게 된다. 카운트의 인터뷰를 통해서 그제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노르웨이의 각종 언론들은 본격적으로 사타닉 서클에 대해 취재를 시작하여 기사들을 내보내기 시작했고 유로니무스의 아버지는 사타닉 서클의 두목으로 지목된 유로니무스의 얼굴과 아들의 얼굴이 비슷하다는 것을 발견하고 아들이 경영하고 있다는 레코드점을 직접 방문, 깜짝 놀라서 정부에 신고했다.[14] 신고를 받은 노르웨이 정부는 Helvete를 강제 폐쇄시켰다.

Helvete를 찾은 유로니무스의 아버지.
왼쪽부터 아틸라의 부인 노라, 핼헤머, 유로니무스, 유로니무스의 아버지

한편, 증거 불충분으로 감옥에서 풀려난 카운트 그리쉬니크는 유로니무스가 몸을 사리는 모습, Helvete가 폐쇄된 것을 보고 본명을 크리스티안에서 Varg Qisling Larssøn Vikernes[15]로 개명한 뒤, '나는 행동파다. 범죄행위에 직접적으로 가담하지는 않고 동료 뮤지션들에게 범죄를 지시하기만 하는 유로니무스와는 다르다.'라고 주장하며 서클의 각종 범죄 활동을 재개시키고 새로운 레이블 Cymophane Productions까지 창설하여 그동안 자신이 음반 작업에 참여했던 밴드들을 그의 새 레이블로 옮기려고 한다. 이 소식을 들은 유로니무스는 전화와 편지들을 통해서 카운트를 협박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자 카운트는 1993년 8월 10일, 같이 메이헴의 데뷔 앨범 작곡에 참여했던 Blackthorn라는 기타리스트에게 유로니무스가 살고있는 Tøyen가(街)에 위치한 공동주택의 위치를 알아낸다음 유로니무스를 무참히 살해한 후[16] 도망치다가 노르웨이 경찰에게 붙잡혀서 살인, 방화, 강도 등의 혐의로 기소되었다. 노르웨이 사법부는 범행의 잔혹성을 고려하여 징역 21년을 선고했는데 21년은 노르웨이 법정 유기징역 최고형량이며 훗날 노르웨이 연쇄 테러의 범인 브레이빅 또한 징역 21년을 선고받았다. 다만 카운트가 잡혔을 당시에는 무기징역이 있었기 때문에 예방적 구금 처분은 받지 않았다.

카운트는 법정에서 묵비권을 행사하였고 모든 혐의도 인정되었지만 2년 뒤 교도소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갑자기 자신의 행위에 대한 정당성을 주장하며 유로니무스가 전화로 자신을 포함한 주위 사람들에게 살해협박을 자주 했으며 이에 따른 보복을 했을 뿐이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후 카운트의 인터뷰들을 보면 그 뿐만 아니라 교회 방화 등 자신의 범죄 행위까지 다 정당방위를 주장하고 있어서 그의 주장이 어디까지 사실인지 알 수 없고 노르웨이 법은 오히려 그것을 가중 사유로 적용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노르웨이 사회 특성상 일부 위험인물을 제외하면 징역형을 만기까지 채우거나 형기를 연장하지 않는 관행 때문인지 카운트는 16년 만인 2009년 5월 24일 가석방으로 출소했다. 2014년 가석방 기간 종료 예정. 다만 범죄의 동기가 극도로 불순했던데에다가 살인 방식의 잔혹함,그리고 그 전의 국보급의 교회 방화,사보타주 등의 혐의도 있어 살인범으로 전세계에서 입국 금지 블랙리스트에 올렸기 때문에 그 뒤에도 해외 입국은 불가능할 전망이라 현재도 노르웨이에서만 지내고 있다.

이렇게 해서 블랙 메탈계의 구심점 역할을 했고 인성도 엉망이었던 유로니무스의 생애는 25세로 끝나고, 각종 범죄 행위를 실천할만큼 호전적인 인성을 지닌 카운트는 살인자로 전락하여 사회에서 영구 추방당하게 되었다. 꼴 좋다. 역시 사람은 착하게 살아야하는 법이다.

2.4 밴드의 해체와 재결성

유로니무스가 죽은 뒤 드러머인 헬해머는 1994년 5월 24일 데뷔앨범 De Mysteriis Dom Sathanas를 재믹싱하여 발매하고 공식적으로 해체를 발표하게 된다. 밴드결성 10년만의 일이었다. 참고로 레코딩 멤버는 유로니무스(기타), 카운트 그리쉬니크(베이스)[17] 헬해머(드럼), 데드(작사), 아틸라 (보컬).

이후 1995년 유일하게 남은 멤버인 드러머 헬해머가 다시 전 멤버들을 설득, 규합해서[18]메이헴을 재결성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

2008년, 재결성 때 부터 참여한 기타리스트 Blasphemer가 밴드를 탈퇴하였고 Blasphemer 탈퇴 후 밴드의 기타리스트 자리는 Morfeus와 Silmaeth(프랑스 출신이라고 한다.) 라는 두 명의 멤버가 투어멤버로 들어왔으며 2011년 2월 Silmaeth가 나가고 노르웨이 기타리스트 Teloch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2012년에는 Teloch도 나가고 밴드는 4인으로 감소했다. 2014년 기준으로는 네크로버처, 헬해머, 아틸라를 빼면 누가 들어오고 나갔는지가 정확하지 않다. 영문 위키피디아에서는 Teloch가 여전히 같이 활동중이라고 말하는 반면, 노르웨이 위키피디아에서는 나갔다고 서술하고 있다. 노르웨이어 위키피디아도 내용이 둘 다 달라서 하나는 모르페우스와 Teloch 합쳐 총 5명이라고 서술하고, 하나는 3명이라고 서술한다. 자세히 아는 위키러가 추가바람.

2012년 밴드의 리더인 핼해머는 지금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음악은 정말로 사악하지는 않다(즉 다 컨셉이다.) 라는 인터뷰를 하였다.

2014년 밴드 결성 20주년을 맞아 새 앨범 <Esoteric Warfare>이 6월에 발매했다.

3 메이헴의 투어 기록

February 3rd 1990 - Jessheim, Norway (The Great War bootleg)
February 28th 1990 - Sarpsborg, Norway (Dawn of the Black Hearts bootleg)
November 23th 1990 - Annaberg, Germany
November 24th 1990 - Zeitz, Germany (War and Sodomy bootleg)
November 26th 1990 - Leipzig, Germany (Live in Leipzig album)
December 9th 1990 - Izmir, Turkey

4 디스코그래피

4.1 Deathcrush


메이헴의 첫 EP Deathcrush. 17분짜리의 소규모 EP로 초판은 1987년, 1000장 한정 발매되었으며 이 앨범과 밴드의 데뷔앨범 De Mysteriis Dom Sathanas의 주요 곡들은 여전히 밴드가 공연에서 연주 중인 레퍼토리 중 하나이다.
레코딩 멤버는 매니악(보컬), 유로니무스(기타), 네크로버처(베이스), 맨하임(드럼).

4.2 December Moon


모비드의 유일한 EP. Deathcrush와 마찬가지로 17분짜리의 소규모 EP이다. 1987년 12월에 발매되었으며 앨범의 녹음을 마지막으로 모비드는 해체되고 데드는 메이헴에 가입한다.

4.3 Projections of A Stained Mind


The Freezing Moon



Carnage

노르웨이의 인디 레이블 CBR에서 발매된 컴펄레이션 앨범으로 발매는 데드 사후인 1991년에 되었지만 녹음은 1990년에 이루어졌다. 데드가 메이헴 제적시 남긴 유일한 스튜디오 트랙인 The Freezing Moon과 Carnage가 수록되었다. The Freezing Moon은 거의 라이브처럼 녹음되었다고 한다.
레코딩 멤버로는 데드(보컬), 유로니무스(기타), 네크로버처(베이스), 헬해머(드럼).

4.4 Live in Leipzig


메이헴의 유명한 라이브 앨범 Live in Leipzig. 위 공연은 1990년 11월 26일에 녹음되었으며 (리허설 음원을 제외하면)데드의 목소리가 마지막으로 녹음된 공연이다.
공연 당시 멤버로는 데드(보컬), 유로니무스(기타), 네크로버처(베이스), 헬해머(드럼).

4.5 De Mysteriis Dom Sathanas


2008년 발매된 EP <Life Eternal>에 담긴 앨범의 러프 믹스 버전. 카운트의 베이스 소리가 뚜렷하게 들린다.

유로니무스가 있었던 시기의 유일한 앨범이자 밴드의 첫 정규 앨범.
레코딩 멤버는 유로니무스(기타), 카운트 그리쉬니크(베이스), 헬해머(드럼), 데드(작사), 아틸라(보컬).

4.6 Wolf's Lair Abyss


유로니무스 살인 사건이 발생한 후 메이헴은 해체되었는데, 헬해머가 매니악과 네크로버처, 그리고 새 기타리스트인 블래스패머를 영입하여 밴드를 다시 꾸리게된다. Wolf's Lair Abyss는 처음으로 유로니무스가 참여하지 않은 곡들로 채워진 EP로, 원래의 메이헴 사운드와 상당히 다르다. 이 앨범부터의 메이헴을 "뉴 메이헴"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레코딩 멤버는 매니악(보컬, 작사), 블래스패머(기타), 네크로버처(베이스), 헬해머(드럼).

4.7 Grand Declaration of War


유로니무스 사후에 처음으로 나온 정규 앨범. Wolf's Lair Abyss EP에서의 테크닉 위주 블랙 메탈 사운드를 더욱더 끌어올렸다. 1집과 그 이전의 메이헴 팬들에게는 대부분 혹평을 받지만, 오히려 메이헴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 이 앨범을 최고로 꼽기도 한다.
레코딩 멤버는 매니악(보컬, 작사), 블래스패머(기타), 네크로버처(베이스), 헬해머(드럼).

4.8 Chimera


정규 3집 앨범. 매니악이 방출되기 전에 마지막으로 녹음한 앨범이기도 하다. 1집과 2집의 사운드를 적절하게 섞어서 많은 팬들에게 호평을 받았고, 명반으로 불리기도 한다. My Death는 공연 때마다 빼놓지 않는 레퍼토리가 되었다. 앨범 크레딧에는 네크로버처가 베이스를 녹음한 것으로 나와있지만, 실제로는 블래스패머가 기타와 베이스를 모두 녹음하였다.
레코딩 멤버는 매니악(보컬, 작사), 블래스패머(기타, 베이스), 헬해머(드럼).

4.9 Ordo ad Chao


정규 4집 앨범. 1집에서 보컬을 녹음했던 아틸라가 다시 돌아온 후 처음으로 녹음한 앨범이다. 기본적으로 3집의 사운드를 이어받았으나, 3집에 비해서는 별로라는 평이 많다. 앨범 크레딧에는 네크로버처가 베이스를 녹음한 것으로 나와있지만, 실제로는 블래스패머가 기타와 베이스를 모두 녹음하였다.

레코딩 멤버는 아틸라(보컬, 작사), 블래스패머(기타, 베이스, 작사), 헬해머(드럼).

4.10 Esoteric Warfare


정규 5집 앨범. 블래스패머 탈퇴 후 새롭게 영입된 기타리스트 테로크와 찰스 헤드저가 처음으로 녹음할 앨범이다. 역시 3집부터 계속되고 있는 뉴 메이헴식 블랙 메탈을 들려준다. 4집 앨범 Ordo ad Chao에 비해서 더 낫다는 의견이 많긴 하지만 다소 지루하다는 평들이 대부분이다. 그래도 팬들은 메이헴이 계속해서 앨범을 내주고 있는 것을 고마워하는 듯하다.
레코딩 멤버는 아틸라(보컬, 작사), 테로크(기타), 찰스 헤드저(기타), 네크로버처(베이스), 헬해머(드럼).

5 메이헴의 영상 자료 모음


그야말로 극 초기 시절 메이헴의 공연영상. 태동기의 블랙메탈 모습이 어땠는지를 알 수 있는 영상이다.
멤버로는 메시아(보컬)[19], 유로니무스(기타), 네크로버처(베이스), 맨하임(드럼).


메이헴의 전성기 때의 리허설 모습이 찍힌 유일한 영상. 참고로 영상은 1989년에 찍혔으며 처음에 비친 금발의 청년이 바로 데드이고 밴드 연주 시 오른쪽에 기타를 연주하는 사람이 유로니무스이다. 촬영은 Lasse John Henry Olstad라는 사람이 했다고 한다. 참고로 이 비디오의 배경이 된 오두막이 바로 데드가 자살한 곳이다. 유로니무스는 자신의 가족 별장이었던 오슬로 외곽의 오두막 한 채를 밴드의 연습실로 만들어서 사용하고 있었는데 당시 스웨덴에서 무일푼으로 노르웨이에 온 데드는 이 곳에서 머무르며 밴드 활동을 하고 있었다.

당시 멤버로는 데드(보컬), 유로니무스(기타), 네크로버처(베이스), 헬해머(드럼).



전성기 시절 메이헴의 라이브 모습이 담긴 유일한 영상. (February 28th 1990 - Sarpsborg, Norway) 공연 막판에 <Buried by Time and Dust>를 부른 뒤 데드가 손목을 그었는데 상처가 너무 깊어서 공연이 끝난 직후 응급실로 실려갔다고 한다.
당시 멤버로는 데드(보컬), 유로니무스(기타), 네크로버처(베이스), 헬해머(드럼).



스웨덴 데스 메탈씬의 양대산맥인[20] 스톡홀름의 Death 'n' Roll 장르를 개척한 Entombed의 초기 라이브. (1990. 8 12.)



임모탈버줌이라는 두 밴드의 전신이 된 노르웨이 베르겐 출신의 밴드, Old Funeral의 리허설 영상.


90년대 초반까지의 스칸디나비아 반도 메탈씬을 풍자한 뮤직비디오.

메이헴의 2011년 Freezing Moon 라이브

멤버로는 아틸라 (보컬) 모르페우스 (기타) 네크로버처 (베이스) 헬해머 (드럼).
  1. 이전 문서에서는 시궁창같은 유로니무스의 인성으로 나락에 빠졌다고 서술되었지만, 오히려 이런 이력이 블랙메탈의 아이덴티디를 확립했다는 아이러니 때문에 단언할수는 없다. 하지만 후술하듯이 유로니무스의 성격으로 한 인재를 죽음으로 몰았고 본인도 목숨을 잃으며 밴드가 흔들리게 된 점은 사실이다.
  2. 유로니무스가 1968년생이고 데드를 포함한 나머지 멤버들은 1969년생, 그리고 훗날 유로니무스가 키운 카운트는 겨우 1973년생이었다.
  3. <Pure Fucking Amageddon>은 네크로버처와 유로니무스가 번갈아서 보컬을 맡았고 <Deathcrush>를 녹음하기 위해 밴드는 처음으로 매니악이라는 보컬리스트를 고용하였다.
  4. 1995년 메이헴 재결성에 참여한 이후에도 무허가 총기소지, 마약 밀반입 등으로 잡혀가서 감옥 생활을 여러번 했다고 한다.
  5. 메이헴의 드러머였던 멘하임은 유로니무스가 살해된 뒤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생전의 유로니무스를 "자신이 주위 사람들에게 '멋진(Cool한) 놈'이라고 불려지기만 한다면 하바네로를 가득 넣은 샌드위치도 먹을 사람"이라고 회상했다.
  6. Entombed의 보컬 자리가 공석이되자 밴드의 드러머였던 Lars Göran Petrov가 대신 보컬을 맡기로 하고, 밴드의 드러머로는 Nicke Andersson이 가입하였다.
  7. 당시 네크로버처는 동거중인 여자친구가 임신한 상태여서 돈을 벌기 위해 밴드에서 탈퇴하고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네크로버처는 해외 투어 시에는 세션 자격으로 밴드 활동에 참여하였다고 한다.
  8. Pelle는 Per(페르)의 애칭 중 하나이다.
  9. 데드의 뼈조각을 선물받은 이들은 자신들이 유로니무스에게서 데드의 뼈조각을 받은 사실을 계속 부인하다가 2005년 선물받은 사실을 인정했다. 물론 사체손괴는 범죄인 만큼 당연히 법적 책임을 져야 정상이지만 유로니무스는 이미 그 전에 카운트에게 살해당했으니.
  10. 절대로 해당 앨범의 표지를 링크 혹은 jpg로 걸지 말 것. 굉장히 참혹한 광경이라 정상적인 성인 남녀의 눈으로도 비위가 상해서 눈 뜨고 제대로 보기가 엄청 거북할 정도고, 임산부나 아이들에게는 심각한 정신적 외상을 초래할 수도 있다. 하지만 톨소퍽이나 Disgorge보다는 나으므로(?)이미 이런 쪽에 익숙한(?)사람들은 찾아봐도 괜찮다.
  11. Helvete가 위치했던 공간은 한동안 빈터로 남아있다가 유로니무스 사후, 빵집이 자리잡았고 2013년부터는 일종의 관광 명소로 사용한다며 Helvete의 모습으로 다시 재건되었다.
  12. 이들이 방화한 가장 오래된 교회는 노르웨이 판토프트 목조 교회로 12세기에 건축된 교회이다. 12세기 교회 자체로서 의미도 있었던 건물이지만 목조 건축 양식을 찾아볼 수 있는 몇 남지 않은 노르웨이 건축물이었다.(다른 목조교회들은 세계대전 중 많은 수가 전소, 파괴되었다.)
  13. 참고로 아틸라는 앨범 녹음을 위해 노르웨이에 와서 난생 처음 경험한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문화와 육식위주의 식생활(아틸라는 채식주의자라고 한다.)에 적응하지 못해서 한 동안 굉장히 힘들어했으나 데드의 일대기와 자신이 몸담고 있는 밴드를 존경한다는 그들의 말에 감동을 받고 이를 악물고 끝까지 보컬파트의 녹음을 끝마쳤다고 한다. 이후 아틸라는 헝가리에서 교사로 일하고 있다가 메니악이 해고된 후 메이헴의 정식 멤버로 합류하여 활동 중이다.
  14. 2012년에 노르웨이의 한 저가 항공사가 승객들에게 '노르웨이하면 떠오르는 유명한 인물'이라는 주제로 설문조사를 하고 1등을 한 인물을 자사의 비행기에 그려 넣겠다는 이밴트를 열었는데 유로니무스가 1등으로 선정되자 유로니무스 부모님의 요청으로 이밴트가 중지된 적도 있었다.
  15. 참고로 Varg는 늑대(Wolf)라는 뜻을 가지며, Qisling은 비드쿤 크비슬링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16. 당시 현장에서 발견된 유로니무스의 시체에는 칼로 찌른 자국이 23군데나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카운트의 증언에 따르면 살려달라며 도망치는 유로니무스를 계속 찌르고 또 찔렀다고 한다.
  17. 유로니무스의 부모님이 믹싱 작업을 하고 있던 헬해머에게 베이스를 다시 녹음해달라는 부탁을 하였으나 헬해머는 베이스를 연주할 줄도 모르고 베이스 세션을 다시 구하기 귀찮아서 베이스가 녹음된 트랙의 볼륨만 낮추었다고 한다. 즉 가해자와 피해자의 연주가 동시에 실린 앨범이라는 것. 한마디로 고인드립인 셈인데 유로니무스에 대한 평이 전 멤버들에게조차 얼마나 나빴는가를 알 수 있는 부분이다.
  18. 네크로버처, 매니악(메이헴의 초대 보컬, 2004년 알콜 중독 때문에 팀에서 해고되었다. 현재는 아틸라가 정식 멤버로 들어와서 활동 중)
  19. 해당 공연을 위해 영입한 세션 보컬리스트.
  20. 다른 하나는 주로 예테보리에서 발전한 멜로딕 데스 메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