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비 아브레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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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Attachment/바비 아브레우/Bob Kelly Abreu.jpg

이름바비 아브레우(Bob Kelly Abreu)
생년월일1974년 3월 11일
국적베네수엘라
출신지베네수엘라
포지션좌익수,우익수,지명타자
투타우투좌타
프로입단1990년 휴스턴 애스트로스 자유계약 입단
소속팀휴스턴 애스트로스(1996~1997)
필라델피아 필리스(1999~2006)
뉴욕 양키스(2006~2008)
LA 에인절스(2009~2012)
LA 다저스(2012)
뉴욕 메츠(2014)
2005년 메이저리그 올스타전 홈런 더비 우승자
미겔 테하다
(볼티모어 오리올스)
바비 아브레우
(필라델피아 필리스)
라이언 하워드
(필라델피아 필리스)

1 소개

메이저리그에서 외야수로 활동했던 선수. 좋은 선구안을 바탕으로 2000년대 수준급 외야수로 명성을 떨쳤던 선수다.

2 경력

베네수엘라에서 야구를 배워 나이 16세 때인 1990년 휴스턴에 자유계약으로 입단했다. 이 당시 존재하던 휴스턴의 베네수엘라 아카데미를 통해 입단한 듯. 마이너리그와 베네수엘라 인터리그를 통해 야구 경력을 쌓으면서 실력을 키웠다. 그 결과 1996년 메이저리그에 입성해 두 시즌 동안 휴스턴에서 74경기를 뛰었다. 하지만 성적은 그렇게까지 빼어난 편은 아니었기 때문에 1998년 신생팀 창단에 따른 확장 드래프트에서 휴스턴은 아브레우를 보호하지 않았고, 그 결과 탬파베이 데블 레이스가 그를 지명했다. 하지만, 탬파베이는 결정적인 실수를 저지르는데, 아브레우를 그날로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유격수 케빈 스토커와 맞트레이드해 버린 것. 물론 당시에는 트레이드의 결과를 알 수 없었겠지만, 이 트레이드로 인해 필라델피아는 1990년대 말과 2000년대 팀을 대표하는 타자를 얻을 수 있었다.

필라델피아 시절 매년 3할에 가까운 타율, 4할대의 높은 출루율과 4할 후반의 장타율을 기록했고, 홈런은 20개 내외로 많지 않은 편이었지만 다수의 2루타와 3루타를 생산해냈던 중거리 유형의 타자로 좋은 선구안으로 매년 100개 이상의 볼넷을 얻어내며 투수들이 상대하기 가장 까다로운 타자로 군림했다. 아울러 성공률이 아주 좋은 것은 아니었지만 30도루를 기대할 수 있는 주력까지 보여주며 다재다능한 모습으로 필라델피아의 공격력을 이끌었다. 1999년 이후 8년 연속 20-20을 기록한 호타준족.

2006년 트레이드 데드라인에 전격적으로 뉴욕 양키스로 트레이드되었다. 현지 언론에서는 필라델피아의 실책이라고 맹비난했지만, 그 뒤 필라델피아가 잘 나간 것을 보면...[1][2] 다만 트레이드 자체로 필리스가 얻은 선수들은 다 성공하지 못했다. 트레이드된 이유는 2003년 체결한 5년 6400만 달러의 계약 후반에 몰린 3년간의 고액연봉때문이다. 이 상황에 필리스는 외야에 공백이 생겼는데, 룰5 드래프트에서 LA 다저스에서 밀려난 셰인 빅토리노가 OPS 9할을 찍으며 등장하여 2000년대 후반부터 2011년 현재까지 내셔널리그 최고의 중견수 수비로 필리스 핵심 멤버로 자리잡았다.

뉴욕 양키스로 이적한 이후에도 꾸준한 모습을 보였지만, 연평균 1500만 달러의 고액연봉 선수로서는 불만족스러운 기록이었다. 특히 중심타선에서 뛰었지만 2007년 악몽같은 찬물질을 제대로 했고[3], 30대에 접어들어 운동능력이 떨어지며 장타력과 수비력이 감소한 이후 최대의 강점으로 꼽히던 선구안마저 꾸준히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던 것을 우려한 양키스의 GM 브라이언 캐시맨은 그와의 재계약을 포기한다. 그리고 2008년 포스트시즌에 탈락하면서 제대로 지름신이 강림하여 CC 사바시아, 마크 테세이라, A.J. 버넷 등 거물급 FA를 대거 영입했으며 아브레우의 빈자리는 시카고 화이트삭스와의 트레이드를 통해 닉 스위셔를 영입하여 해결했다.

양키스와의 계약이 끝난 후, 하마터면 백수가 될 뻔 했지만[4] 2009년 LA 에인절스와 1년 계약을 맺고 합류했다. 장타력은 더욱 떨어졌지만 출루율을 다시 끌어올려 좋은 활약을 했고, 특히 포스트시즌에서 그간 에인절스의 천적으로 군림하던 보스턴 레드삭스를 맞아 5할이 넘는 불방망이를 휘두르며 징크스를 앞장서서 깼다. 이 때문에 팀과 연장 계약[5]을 체결했고, 2011년엔 (나이 때문에) 과거와 같은 장타력이나 컨택은 보여주지 못하였지만, 여전히 좋은 선구안과 발을 바탕으로 활약했었다.

그러나 2012년에는 주전이 아니면 트레이드를 바란다는 투의 발언을 하여 까였고, 실제로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로 트레이드될뻔도 하였지만 앤젤스의 연봉보조 범위를 놓고 논의가 오간 끝에 트레이드가 무산되었다. 이래저래 입지가 많이 약화되었다. 그리고 4월 26일 방출되었다. 안습. 그리고 5월 4일 LA 다저스와 계약을 맺었다.

하지만 세월은 무시 못하는지 극악의 수비력을 보여주며 왕년의 활약에는 한참 못미치는 성적을 냈다. 결국 트레이드 데드라인 때 필라델피아 필리스에서 데려온 쉐인 빅토리노에게 자리를 내주고[6] 웨이버 공시에 몰렸으나 다행히 구단이 이를 철회하고 트리플A로 내려보냈다. 돈 매팅리 다저스 감독은 9월 로스터 확장 때 그를 콜업시켜서 포스트시즌 진출시 베테랑의 역할을 기대할거라고 말하기도... 2012년 9월 1일 기준 그의 성적은 70경기 출전 타율 .251 2홈런 17타점. 2013년에는 메이저리그에서 활동하지 못했다. 사실상 은퇴한 선수라고 보여졌으나...

2014년 1월말 필라델피아 필리스와 마이너계약을 맺었다. 하지만 3월 28일에 필리스에서마저 방출되고 4월 1일 뉴욕 메츠와 마이너계약을 맺었다. 이후 콜업되어 4월 27일 미네소타 트윈스와의 경기에서 홈런을 쳐냈다. 그러나 이후 부진하며 마이너리그행을 거부하며 방출되었다. 나이가 나이다 보니 고전하는 모양새. 결국 이번 시즌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했다.

3 플레이 스타일

원조 출루 장인
초구를 절대 건드리지 않고, 공을 끝까지 보면서 타격하는 인내심[7]과 정교하면서도 동시에 준수한 장타력, 아울러 선구안과 빠른 발, 괜찮은 수비력을 가졌던 전성기에는 그야말로 5툴 플레이어의 전형이었다. 전성기 시절엔 꾸준히 5~6WAR를 찍어주면서 연봉값 이상을 해주는 모범적인 예로 자주 불리우는 케이스. 존 안에 들어오는 공에 한해 Z-Swing이 평균 50% 중반을 항상 유지했으며, 대신 Z-Contact은 거의 90%에 달한다. 이에 반해 존을 벗어나는 공에 대해선 거의 건드리지도 않으며 (O-Swing: 15%), 스윙 삼진을 당하는 경우도 보기 드물다 (SwStr = 6.4%). 게다가 이 시기엔 현재에 비해서 스트라이크 존이 더 좁았던 관계로 투수들 입장에서는 상대하는 것 자체가 고역인 경우가 나온다. 선구안과 장타툴이 있는데 여기에 2~30개 정도의 도루까지 가능한 준족이라 거르기도 힘들고, 그렇다고 상대하기에는 생각보다 높은 컨택률이 걸리고, 여기에 밀어치기와 당겨치기 모두 능수능란한 스프레이 히팅이 장점인 타자라 수비 시프트도 잘 안통한다. (AVG.BABIP = .339)[8] 이 점 때문에 한국에서도 전문가들과 기자들이 추신수의 성장 롤모델로 가장 많이 꼽던 선수가 이 바비 아브레우다. 실제로 타격 메커니즘이 상당히 비슷했던 부분도 있고. 게다가 풀타임 데뷔시즌인 1998년부터 2010년까지 꾸준히 150경기 이상 출장할 정도로 꾸준했다는 것도 대단한 부분이다. 통산 287홈런 399도루 2437안타 1349 타점 .292/.396/.477.

다만 운이 없게도 약물시대(...)에서 활동하던 시기의 슬러거들은 평균 30홈런에 110타점을 넘기는게 다반사였던 점과, 그 시점에서 딱히 강호로 인정받지 않는 필리스에서 전성기의 대부분을 썼다는 부분 때문에 당시에는 꽤 저평가를 당했다. 사실 이런 타자들의 경우 투고타저가 심한 시기일수록 그 가치가 빛나는 법이라, 어찌보면 운이 없는 케이스.

4 명예의 전당 입성 여부

명예의 전당급 선수와 그렇지 않은 선수의 경계에 있는 선수다. 메이저리그에서 250홈런 이상, 2000안타 이상, 1000득점 이상, 1000타점 이상, 1000볼넷 이상, 300도루 이상 기록한 선수는 역사상 그를 제외하고는 오직 다섯 명 뿐인데, 이는 명예의 전당 멤버인 윌리 메이스, 조 모건, 리키 헨더슨, 크레익 비지오, 그리고 약물이라는 오점이 있는 배리 본즈뿐이다. 아울러 4할에 근접한 출루율까지. 하지만, 스타성이 다소 떨어지는 관계로 올스타전 출전 2회, 골드글러브 1회, 실버슬러거 1회라는 수상 경력에서 알 수 있듯이 다소 부족한 임팩트와 누적 스탯은 약점.[9] 꾸준하기는 했지만, 화려했던 시즌이 거의 없었던 점도 약점으로 작용할 듯하다. 무엇보다 그는 타격 실력이 좋으면 좋을수록 더 유리한 외야수가 주 포지션이었다.

5 기타

한국과 관련해 흑역사가 있는데, 2009년 2회 WBC 준결승 한국전에서 우익수로 출장해 1회 한국 공격때 무사 1루에서 정근우의 플라이볼을 떨어뜨리는 에러를 저질러[10] 이후 추신수의 3점 홈런 포함 1회 대거 5실점의 빌미를 제공하며 한국전 대패의 원흉이 되었다. 체이스 어틀리와 함께 뛰어난 수비수임에도 불구하고[11], 국내 라이트한 야구 팬들에게 수비 못하는 선수로 깊은 인상을 남긴 케이스.
  1. 다만, 당시 양키스로 같이 트레이드된 선수가 4,5선발을 맡은 우완투수 코리 라이들이었는데, 트레이드 후 10월 11일 비행기 운전 중 뉴욕 빌딩에 충돌하여 사망하는 사고가 있었다. 당시 야구계 뿐만 아니라 9.11 테러가 반복되는 게 아니냐며 뉴욕과 미국 전역이 충격과 공포에 떨었고, MLB 양키스와 필리스 외 전 구단이 그를 추모하였다.
  2. 이는 팻 길릭 단장이 전임 단장인 호구에드 웨이드의 똥을 치우느라 단행한 트레이드라 보면 된다. 웨이드 단장은 그간 나이 많은 베테랑들을 트레이드 거부권도 없이 장기계약으로 묶어주며 노쇠화와 세대교체에 실패하며 필리스의 암흑기를 이끌었다.
  3. 소위 클러치 상황이라는 C/L 상황, 하이 레버리지 상황에서 아브레우는 제대로 찬물을 끼얹었다. 2006년의 트레이드 이후의 뜨거움을 기억하던 양키스 팬들에게는 당혹스러웠던 상황.
  4. 이는 아브레우 본인이 인정한 것이다. 에인절스 이전에 오퍼한 팀이 없었다고.
  5. 참고로 이 당시 단장은 토니 리긴스였다.
  6. 필리스를 떠날 때도 어브레유의 후임은 빅토리노였는데, 이번에는 빅토리노 때문에 자리를 뺏기게 된 것.
  7. 닉 스위셔제이슨 지암비보다도 스윙확률이 낮은 선수이다.
  8. 슬러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장타율이 평균 4할 후반대를 유지한 것은 그만큼 2,3루타를 많이 쳤다는 얘기가 된다. 다만 ISO 수치가 .183정도로 생각보다 크게 높은 편은 아니다.
  9. 통산 WAR기준으로 이치로, 게레로보다도 앞서는 수준인데 인지도는 가장 쳐진다.
  10. 그래도 대처를 빨리 해서 주자는 잡을 수 있었는데 내야수가 그 송구를 못잡는 덕에...
  11. 아브레우는 골드글러브를 수상했을 정도로 뛰어난 외야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