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1], 우주선이 태어났다!
미국 시절
1 소개
Walter Robert Dornberger (1895년 9월 6일 ~ 1980년 6월 27일)는 독일의 항공우주공학 엔지니어로, 베르너 폰 브라운과 함께 V-2 로켓 개발의 총책임자로 활약한 인물이다. 어릴적부터 그냥 우주덕이었던 베르너 폰 브라운과 달리 젊은 시절부터 직업군인으로 활동하다 폰 브라운을 만나 입덕(...)한 인물로, 나이도 폰 브라운보다 17세 연상이었지만 폰 브라운에 못지 않은 덕력과 열의를 보였던, 그리고 사회성이 떨어지진 않더라도 어른의 사정에 어두웠던 폰 브라운의 약점을 커버해주는 후견인으로서 하인리히 힘러를 위시한 슈츠슈타펠의 마수로부터 폰 브라운을 지켜준 큰형님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그의 연구는 우주왕복선이라는 개념으로 불멸하였다. 폰 브라운, 도른베르거, 아더 루돌프(Arthur Rudolph) 그리고 오스트리아 출신으로 함께 덕질을 한 오이겐 젱어(Eugen Sänger)를 비롯한 많은 독일 과학자들의 연구는 스페이스 레이스와 그 이후 NASA의 역사를 만들었다 할 수 있다.
2 입덕 이전
생년월일에서 알 수 있듯이, 폰 브라운보다 상당히 나이가 많다. 제1차 세계대전부터 포병 병과에서 활동한 직업군인이었고, 패전 이후 프랑스의 포로수용소에서 몇번씩이나 탈주했다가 붙잡히는등 사고를 치다가 독방생활 끝에 석방되었다. 이후 국방군 대령이자 항공공학 교수였던 칼 베커 대령을 만나 샬로텐베르크 대학에서 엔지니어링을 공부하고 베르사유 조약의 군비제한 대상에서 빠져있던 로켓의 무기화를 연구하게 된다.
그러던 도른베르거는 1930년대에 정신나간 우주덕들을 만나게 된다. 로켓밖에 모르는 또라이들이 뻑하면 불장난을 해서 주민들이 치를 떤다고 전해들은 뒤 베커 대령과 함께 우주비행 동아리를 찾아간 것. 이 Verein für Raumschiffahrt (VfR, 우주비행협회)라는 동아리는 스폰서 없이는 도저히 못 굴러감에도 오로지 덕심 하나만으로 밥을 굶고 집기를 팔아가며 로켓을 만들던 모임인데, 이들에게 베커 대령은 그 기술로 군사무기 개발에 도움을 주면 쏘고 싶은거 맘껏 쏘게 해준다고 꼬셨다.
이 중에서 도른베르거는 한 스무살짜리 청년을 만나게 된다. 선배들보다도 어린 나이에 엄청난 천재성과 덕력으로 갖가지 로켓을 쏘아올리며 기록을 작성하던 고작 석사학위 뿐인 핏덩이였다.
단란한 한 때
이후 폰 브라운의 무궁무진한 상상력에 반한 도른베르거는 그를 따라 우주여행을 상상하게 된다. 폰 브라운이 크고 아름다운 로켓을 그대로 달, 화성에 꼬라박는 외계 탐험을 꿈꿨다면, 도른베르거는 우주'여행', 그리고 우주를 날 로켓 비행기, 로켓 글라이더를 꿈꿨다. 지나치게 시대를 앞서갔다 하지만 명목상 민간인이라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던 폰 브라운과 달리 도른베르거는 엄연히 현역 독일군 장교 신분이었고, 아돌프 히틀러의 제3제국이 출범하며 재무장이 공식화하자 군사무기로서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고, 나치 정부의 군비 배정의 우선순위를 높여야만 했다. 일단 쿠머스도르프의 기존 연구소를 벗어나 발트해 연안의 페네뮌데로 옮긴 그들은, 육군은 물론 공군의 헤르만 괴링,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2] 등에게도 관심을 받았지만, 정작 제일 중요한 아돌프 히틀러를 만난 자리에서 총통가카가 영 심드렁한 태도로 일관하며 예산을 받아내지 못했다. 그래도 그들을 탐낸 조직이 아주 없지는 않았으니, 이들이 바로 슈츠슈타펠.
SS의 두목 하인리히 힘러는 폰 브라운과 도른베르거, 그리고 이들의 무기를 매우 탐냈다. 특히 실질적인 최고의 브레인이라 할 수 있는 폰 브라운을 몹시 탐냈는데, 너무도 집착한 나머지 게슈타포를 보내 사보타주 혐의를 들이대는가 하면 SS에서 귀찮은거 절대 안 시킬테니 다른 누구도 거치지 않고 나한테만 보고하라는 식으로 회유하기도 했다. 폰 브라운은 힘러의 얀데레스러운 집착에 부담을 느꼈고, 도른베르거도 로켓은 쥐뿔도 모르면서 훈수나 드는 힘러를 자주 보는게 불쾌했지만 힘러의 말을 들어야 돈이 들어올거라며 SS 가입 권유를 받아들이라 조언했다.
폰 브라운은 그렇게 SS에 가입했지만, 이후에도 곤란한 일이 생길 때면 도른베르거에게 문의를 하곤 했다. 물론 도른베르거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뒤에는 V1 등 여러 로켓 개발에 지원이 더 많아질 것이라 예상했지만 총통이란 작자가 이걸 재미없어하고 관심 있다는 놈은 호시탐탐 V2를 탐하니(...) 할 말이 없다, 1943년 하이드라 작전[3] 같은 것은 도른베르거도 어쩔 수 없이 도망쳐야 했지만... 그렇게 1943년 페네뮌데가 폭격을 당한 뒤 SS의 협조로 강제수용소에서 노동자들을 징발하여 비밀 공장에서 로켓을 만들 수도 있었지만[4], 정작 그 결과물은 비전문가들의 강제노동으로 만들어진 조잡한 물건들이었다.[5]
어쨌든 도른베르거는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히틀러가 V2를 마법의 무기 비슷한 존재로 여기며 뒤늦게 전폭적인 지원(노예 수급을 포함해서)을 받을 수 있었다.[6] 1942년 고도 80km를 뚫으며 실질적인 우주의 범위까지 이르기도 했기에[7] 지원은 진작에 받아 마땅했지만 힛총통이 보통 꼴통이 아니라(...) 게다가 힘러가 히틀러를 세치 혀로 구워삶아 로켓 개발팀은 결국 SS 관할로 확정되었다.
이 과정에서 도른베르거는 계속해서 영전했지만, 최고 권한은 폰 브라운도 아니고 자신의 육군 라인도 아닌 하인리히 힘러, 그리고 그 부하 한스 캠러(Hans Kammler)[8]에게 있었고, 어차피 로켓 기술 따위 쥐뿔도 모르는 힘러가 아니더라도 전세는 악화일로로 치닫는데 로켓 공장을 급조해서 노예를 갈아넣어봤자 어쩔 수가 없지... 계속 도망다녔다. 알베르트 슈페어 군수장관이 협조해주기도 했지만[9] 별 소용이 없이 정처없는 방랑의 연속이었다. 그 와중에 도른베르거는 상당한 기지를 발휘한다. 포르투갈의 독일 대사관을 통해 미국의 제너럴 일렉트릭 측과 접촉하기도 했고, 전세가 기울자 Bad Sachsa의 야산에 수 톤(!)의 로켓 연구 문건을 보관한 것이다. 이렇게 히틀러가 V2의 가치를 알게 되었을 때부터 도른베르거는 현실을 직시하고 전쟁이 끝난 뒤 덕질(...)을 계속할 길을 궁리했다. 연합군 나라들이 모두 로켓 기술을 탐내고는 있었지만, 자신들이 무사히 덕질을 할 곳은 V2로 직접 얻어맞은 영국, V2 제작에 많은 국민이 갈려간 프랑스, 히틀러에 버금가는 또라이가 수틀리면 너 숙청을 시전할 소련이 아닌, 자신들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적이 없는 미국 뿐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 무렵, 히틀러는 미쳤다. 이런 양반을 주치의로 둔 놈이 언젠 안 미쳤겠냐만 가질 수 없다면 잿더미로 만들어버리겠다는 의도로 연합군에 노획당할만한 것은 다 때려부수고, 꼴리는대로 즉결처형을 단행했다. 그리고 그 반달의 선봉에는 힘러가 있었다. 그 온갖 불장난과 공습 속에서 살아남았던 폰 브라운이 숙청의 두려움에 떨었을 정도. 그렇게 미쳐돌아가던 히틀러는 1945년 4월 말 자살했고, 캠러마저도 SS 최후의 대장 진급자로서 충실히(?) 숙청을 이행했다. 결국 페네뮌데를 떠난 후 방랑하던 엔지니어들은 SS의 감시 속에서 오스트리아에 도착, 미군을 발견하기만 고대했다.[10]
그리고, 5월 초, 베르너의 동생 마그누스 폰 브라운이 알프스에서 미군을 발견했다.
3 탈출, 그러나...
페네뮌데 시절부터 함께한 엔지니어들이 미군에 항복한 다음 찍은 사진. 깁스를 한 사람이 폰 브라운이고, 옆에 있는 중절모 쓴 사람이 도른베르거, 그리고 도른베르거의 왼쪽에 있는 형이랑 몹시 닮은 젊은이는 베르너의 동생이자 미군을 찾아내며 미군에게 자초지종을 알린 마그누스.[11] 베르너 폰 브라운은 SS를 피해 오스트리아까지 오면서 교통사고로 왼팔과 어깨가 작살나있었는데 도주 과정에서 부목이 빠지며 상처가 덧나는 바람에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폰 브라운이 성치 않은 몸으로 덕력을 뽐내며 미군 병사들을 홀리는 동안, 도른베르거는 패장의 모습처럼 침묵을 지켰다. 미국에서는 일찍이 도른베르거가 접촉한 제너럴 일렉트릭 사의 관계자들과 당시 미국 항공역학의 권위자 테오도르 폰 카르만의 연구진[12]을 아이크가 귀찮아하는데도 장군, 대령, 중령으로 신분 세탁해가면서 파견, V2 로켓 발사시설[13]과 장비를 참관하고, 연구진을 인터뷰했고, 도른베르거의 증언으로 산동네에 꿍쳐놓은 수 톤의 항공우주공학 문건을 획득했다.[14] 폰 카르만 등은 독일 엔지니어들의 능력이 지구상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히틀러가 V2를 더 진지하게 여겼다면 초반부터 V2 불벼락이 떨어지며 흠좀무했을 것이다는 높은 평가를 내리며 페이퍼클립 작전에 이들을 포함시켰다.
그러나 도른베르거는 어쨌든 군인, 그것도 장군이었고, 민간인 과학자들을 포섭한다는 페이퍼클립 프로젝트에서 하자가 있다고 판단되어 미국이 주저하는 사이 영국이 데려갔다. 그리고, 자기네 V2 연구 프로그램인 백파이어 작전에서 잠깐 자문을 시킨 뒤, 전범재판에 회부했다. 어쨌든 힘러의 지시로 V2 로켓무기를 쏴제낀 책임자는 도른베르거가 아닌 캠러였지만, 본 항목을 읽어내려오며 이미 언급되었듯이 캠러는 패망을 앞두고 언제부턴가 증발해버렸기 때문에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했다. 그 결과 명색이 국방군 소장인 도른베르거가 총대를 매고(?) 전범 혐의를 뒤집어쓰게 된 것. 도른베르거는 자기도 한낯 공돌이일 뿐이라고 하소연했지만 오래 전부터 군인 신분이었던 그의 말은 V2에 시달린 영국에게는 설득력 없는 설득일 따름... 그 결과 웨일즈의 수용소에서 2년을 복역하게 된다. 수용소에서는 간수들의 조장 내지 묵인이 있었는지 어쩐지 몰라도 동료 수감자들에게 엄청나게 따돌림당했다고...
폰 브라운이 이후 뉴멕시코 화이트 샌즈 미사일 발사장과 앨라배마 헌츠빌[15]에서 미합중국 육군의 레드스톤 조병창을 책임지며 상당한 권한을 얻은 것과 달리[16], 수용소에서 2년을 구르다 페이퍼클립 작전의 수혜를 뒤늦게나마 받으며 출소한 도른베르거는 갓 독립한 미합중국 공군과 벨[17]의 고문으로 선임되어 도미했다. 이 때 도른베르거는 아끼던 후배 폰 브라운에게 연락하여 막 독립해서 높으신 분들도 의욕이 넘치는 공군에서 함께 일하자고 설득했지만, 막 VfR, 페네뮌데 시절부터 함께한 동료들을 데리고 레드스톤 팀을 꾸렸기 때문에 폰 브라운은 이를 거절한다. 이 과정에서 도른베르거는 동료들이 모두 폰 브라운에게 향하는 것을 보며 못내 섭섭함을 느껴야 했다.
4 우주비행기를 향하여
도른베르거는 50이 넘어 미국으로 향했다. 하지만 젊어서 로켓을 공부할 적부터, 그리고 폰 브라운을 만났을 때부터 상상한 로켓추진 항공기의 로망을 버리지 않았다. 마침 척 예거, 스캇 크로스필드 등의 로켓추진 초음속 비행이 이뤄지며 판이 점점 꾸려지고 있었다.
이 때 도른베르거는 자신의 로망과 나치 시절 V1, V2를 개발한 노하우, 그리고 프랑스에 머물던 동료 오이겐 젱어(Eugen Sänger)[18]의 리프팅 바디와 램제트 연구를 총동원, 간단히 말하자면 로켓추진 대륙간 탄도 여객기(...)라 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내놓는데 그 내용이...
1. 크고 아름다운 글라이더를 만든다. 여기에는 승객을 태운다. 날개? 필요없다.[19] 날개 따위는 장식이다.
2. 크고 아름다운 로켓 부스터를 만든다.
3. 퐈이야!
4. 발사 얼마 후 연료 다 태운 부스터는 분리된 뒤 원래 장소로 돌아가서 적절히 착지한다.
5. (준)궤도에 올라간 뒤부터는 우주관광... 야 신난다! 하지만 원래 이 비행 자체가 엄청나게 짧은 비행이라 관광 자체는 별 의미가 없을 것이다.
6. 그렇게 황홀경에 빠진 사이 목적지 근처 상공에 도달하면 재돌입한다. 제트 엔진이 없는 글라이더는 적절한 조종으로 적절히 공항을 찾아 적절히 착륙한다.
이런 상상을 하고서 한계도 함께 지적했다. 연료가 존나 미치도록 무거워서 승객은 얼마 태우지도 못할거야...[20] 이거 타는 놈들도 돈 썩어나는 자본주의의 돼지들이겠지... 그래도 미래에는 존나 짧은 시간 덕에 여객기를 넘어설 최고의 교통수단이 될거야...라는 얘기.
한 덕질 하는 우주덕이라면 이게 뭔 말인지 모를 리는 없을 것이다.
놀랍게도 미 공군은 이 시절 X 실험기 시리즈의 일부인 X-15를 통해 정말로 도른베르거의 이론을 실험하고 있었다. 조 워커, 조 엥글, 빌 데이나, 피트 나이트, 닐 암스트롱, 밀트 톰슨 등 여러 테스트 파일럿들이 로켓추진 비행기 X-15로 극초음속/초고고도 비행을 성공시키며 그의 로망에 다가서고 있었다.
하지만 1960년대, 효율을 중시하던 로버트 맥나마라 국방장관은 군사용 우주정거장 운용이라는 구체적인 목적이 있는 제미니가 더 낫다는 판단 하에 공군에게 더 심도있는 사업 재검토를 요구하고, 공군은 이에 수긍하고 GG 선언 후 MOL에 집중하기로 한다.
이렇게 자신의 로망이 무너진 것을 보던 도른베르거는, 어느새 70세의 나이가 되었고, 더는 일하기 힘들었는지 결국 은퇴하였다. 1965년 은퇴한 뒤 자기보다 17살 어린 폰 브라운과 10살 어린 아더 루돌프가 NASA에서 새턴 V의 개발을 이뤄낸 것에 열폭하였는지, 미국을 떠났다. 멕시코를 거쳐 서독으로 돌아간 뒤, 자신을 보고 배운 미 공군의 후배 엔지니어들이 NASA에 합류하여 자신의 로망을 진지하게 연구하고 엔터프라이즈의 활강 테스트를 통해 그 결실이 맺는가 했지만, 도른베르거는 미처 그 결실을 보지 못한채 1980년 사망했다.
5 평가
베르너 폰 브라운이 인류의 외계 탐사라는 로망을 이뤄냈다면, 그의 우주비행기라는 로망은 NASA의 상징이 된 우주왕복선으로 결실을 맺었고, (비록 자신이 제시한 한계는 후세의 엔지니어들도 아직 극복하지 못하고 있지만) 20세기 인류 우주 진출의 아이콘으로 남았다. 그러나 그는 미처 결실을 보지 못한채 눈을 감았다. 나치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며 로켓에만 환장하여 수많은 인명을 갈아넣은 매드 사이언티스트라는 비판은 전혀 틀림없는 온당한 평가일 것이나, 그의 항공기, 로켓, 우주 여행에 대한 열정과 재능을 폄하할 수는 없을 것이다.- ↑ 1942년 10월 3일, A4(V2)가 우주에 준하는 고도까지 상승한 날.
- ↑ 붉은 남작의 사촌동생으로, 2차대전기 루프트바페 원수였다.
- ↑ 페네뮌데에서 흠좀무한 연구가 진행됨을 알아낸 뒤 모스키토를 대거 투입하여 페네뮌데를 조진다는 영국군의 공습작전으로, 설비는 어떻게 파괴했지만 정작 중요한 개발자급을 처치하지 못했다.
- ↑ 특히 한스 캠러(Hans Kammler) SS대장이 이 부분을 책임졌다.
- ↑ 오늘날에는 이 부분이 폰 브라운의 적극적인 요구가 있었다는 생존자들의 증언이 잘 알려져 있지만, 여전히 의문의 여지는 남는다. 폰 브라운 문서 참조.
- ↑ 폰 브라운의 전기에서 히틀러에게 V2에 관한 기록 영화를 보여주러 대본영에 가는 부분이 있는데. 히틀러는 이 영화를 보고 몹시 감격해서 '이것이 1940년 이전에 되어 있었다면 독일군은 승리했을 것이다' 라는 말을 한다. 진작에 관심을 가지던가..
- ↑ 도른베르거는 1942년 10월 3일 테스트 발사에서 80km의 고도를 뚫자 드디어 우주에 진출하는구나 하며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고... 오늘날 FAI의 우주 기준은 100km지만 이 시절에는 기준이 좀 달랐다.
- ↑ 힘러와 달리 이 사람은 그래도 토목공학 공부한 공돌이 출신이라 최소한 말은 좀 통했다. 하지만 전쟁 말기에 갑자기 증발해버리며 도른베르거에게 빅엿을...
- ↑ 슈페어는 전후 정복지의 주민들을 강제 노동에 부려먹은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는데, 이 때 주민들을 도른베르거의 V2 제작팀에도 배분해줬다.
- ↑ 이 과정에서 캠러의 행방이 묘연하다. 정말 증발했다. 많은 이들은 캠러가 5월 초에 사망했을 것임엔 동의하지만, 이것이 자살인지, 아니면 힘러의 지시에 의해 전속부관이 그를 살해한 것인지, 레지스탕스에게 린치당해 죽은 것인지, 폰 브라운이나 도른베르거가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그를 미리 죽인 것인지(...) 전부 불명이다. 음모론에서는 아예 죽음으로 위장한 뒤 신분을 세탁하고 미국에서 로켓 개발에 협조했다는 주장도 있다. 다만 이 사람은 공돌이라고는 해도 토목공학 전공자라서 일선 엔지니어들만큼의 지식이 있지는 않았을 것이라...일단 정설은 자살로서 이는 캠러의 개인 운전사가 증언함
- ↑ 마그누스는 2003년까지 장수했다. 따지고보면 형이 갑자기 암 걸려서 너무 일찍 죽은 것.
- ↑ 이 중에는 첸쉐썬도 있었다!
- ↑ 심지어 콘스탄틴 로코솝스키의 제2벨라루스 전선군이 도달하기 며칠 전까지 페네뮌데에 후딱 갔다왔다.
- ↑ 폐광된 광산에 쑤셔박고 입구를 폭약으로 뽀개서 숨겨놓았었다.
- ↑ 지금의 마셜 우주비행센터.
- ↑ 하지만 이 당시 육군은 미사일 개발에 별다른 열의를 보이지 않았기에 폰 브라운의 권한이래봤자 그냥 형식적인 권한에 불과했다. 이후에도 나치 출신 항복자들이라고 깔보는 시선이 많았고.
- ↑ 초음속 테스트 비행기 X-1A 제작사.
- ↑ 이 사람은 FAI의 초대 회장이 된다. 프랑스에서는 조지아의 인간백정이 그를 흠모하여 아들 바실리와 NKVD를 닦달하여 납치하려 들길래 고생을 좀 했다고.
- ↑ 정확히는 수직미익만 남겨놓는 형태. X 실험기 시리즈에서 X-24 사진을 보면 이 또한 훗날 계승되었지만, 우주왕복선의 디자인에서는 미군의 잔소리 때문에 델타익을 추가했다.
- ↑ 실제로 1990년대 록히드 마틴 엔지니어들이 준궤도 우주비행체 X-33을 연구하면서도 연료가 잡아먹는 하중 문제는 끝끝내 해결하지 못했다. 우주왕복선도 연료탱크 하중부터가 무시무시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