裵基賢
Constantine Bae Ki Hyen
역대 천주교 마산교구장 | |||||
4대 안명옥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주교 | ← | 5대 배기현 콘스탄틴 주교 | → | 현직 |
대한민국 가톨릭 교회의 제5대 마산교구장. 세례명은 '콘스탄틴'이다.[1]
사목표어는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Caritas omnia sustinet, 1코린 13,7)이다.
1 생애
1.1 사고뭉치 학창시절
1953년 경상남도 진주시에서 2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난 배기현 주교는 아버지가 대학교 영문학 교수, 어머니가 의사라는 그 시기에 보기 힘든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다른 주교들이 대부분 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나고 자라난 것과 달리 배 주교의 아버지는 종교가 없었고 어머니는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다. 5살 때 마산으로 이사했는데, 집 근처에 마산 월남동 성당이 있었고 예수님이 있는 곳이라면 장소는 상관 없다고 생각한 어머니는 성당에서 자녀들을 위해 기도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배 주교는 학창시절을 상당히 방황하면서 보냈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담배를 피웠고, 마산고등학교에 다닐 때는 4번이나 정학을 당할 만큼 문제아로써 학창시절을 보낸 것이다. 자유로운 종교관을 가지고 있던 어머니는 아들이 종교를 가지고 마음을 잡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성당에 다녀볼 것을 권유하였으며, 고등학교 1학년 때 어머니께 용돈을 받는다는 조건으로 마산 월남동 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세례명은 당시에 유행했던 영화인 콘스탄틴 대제의 주인공을 보고 콘스탄틴이라고 정했다고 한다.
1.2 방황했던 신학생 시절
대학 입시에 떨어지고 재수를 하던 배 주교는 문득 신부님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으며, 신학교를 목표로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집안이 천주교랑 관련이 전혀 없었고 어머니가 개신교 신자였지만 배 주교의 신학교 입학을 전혀 막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학창시절에 유명했던 불량한 행실로 인해 성당 신자들에게 "네가 신부가 되면 개도 신부가 되고, 소도 신부가 된다."(배 주교 교구장 착좌 연설 중) 라거나 "저런 망나니 같은 애가 무슨 신학교냐? 절대 오래 못 있는다."고 할 정도로 걱정을 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게다가 주교님까지...
당시 마산교구 신학교였던 대건신학대학의 면접에서도 0점에 가까운 교리시험 점수와 학적부에 적혀 있는 4번의 정학을 보고서 면접관이던 교수 신부가 "네가 어떻게, 왜 신부가 되려고 하느냐?"라고 묻자 "저는 친구를 좋아하는데, 친구들을 만나고 들어와서 혼자 앉아 있으면 그렇게 쓸쓸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을 찾아가면 '왜 쓸쓸한가?'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라고 답변하였다고 한다. 비록 행실과 교리시험 점수에서 낙제점을 받았지만 진심 어린 답변으로 인해 신학교에 합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자유분방했던 그에게 엄격한 신학교 생활은 고역이었다고 한다. 특히 새벽 미사 시간이 고역이었는데 미사에 거의 매일 빠졌다고 전해진다. 담당 사감신부는 당시 마산교구장이었던 장병화 요셉 주교에게 "신앙심이라는 것은 단 한 톨도 없다."라고 적은 평가서를 보내기도 하였다. 하지만 신학생이었던 배 주교를 아꼈던 장 주교는 그 평가서를 책상 속에 집어넣고 모른 척했다고 한다.
그러나 주변에서 우려했던 것처럼, 배 주교는 신학교 생활을 버티지 못하고 2학년 1학기 때 신학교를 나오게 된다. 원래는 1학년 2학기 때 퇴학 위기까지 갔는데 1972년 10월 유신으로 모든 학생들에게 귀가조치가 내려져서 퇴학은 면했다고 한다.[2] 자퇴한 것이 아니고 휴학했는데, 이 때 어머니가 가장 슬퍼하셨고 아들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천주교로 개종까지 하게 된다.[3]
"그동안 너무 편안하게 살았다."는 생각을 한 배 주교는 군대에 입대하였다. 그래도 다시 신학교에 돌아가고 싶었는지 "신학교에 돌아가려면 고생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특전사 공수부대병으로 지원하였다. 낙하훈련을 받던 중에 허리와 무릎을 심하게 다쳤고,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했던 그는 평생 허리통증을 얻게 되었다.[4] 제대 후 신학교에 돌아갔다. 제대 후 신학교의 생활은 이번에는 부상으로 인한 건강상 사유로 휴학을 자주 하였지만 그렇게 행복했다고...
1.3 마산고 사고뭉치, 신부가 되다
남들은 신학교 입학 후 10년의 양성과정을 거치면 신부가 되었지만, 배 주교는 신학교 시절 방황과 건강상 사유로 인해 12년 만인 1985년 사제서품을 받았다. 어머니는 "죄 많은 집안에서 신부가 나왔다."며 눈물을 흘리며 기뻐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출신 성당인 마산 월남동성당에서 첫 미사를 집전하는데, 제대 위에서 미사를 집전하는 배 주교를 보고 많은 신자들이 믿지 못했다고 한다. 또한 이 소식은 마산 시내에 퍼져서 '배기현 사제 서품'은 마산고등학교 3대 미스터리 중 하나로 꼽힐 정도로 충격적인 소식이었다고 한다.[5]
사제서품과 동시에 남해성당 주임신부로 사제 생활을 시작한 그는 1989년부터 1996년까지 7년간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 대학과 독일 뮌헨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였다. 귀국 후에 부산가톨릭대학교 교수를 지냈고 미국에서의 2번의 교포사목과 사천성당 주임신부와 덕산성당 주임신부를 지내다가 2015년 1월부터 천주교 마산교구 총대리 겸 사무처장으로 봉직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의 배 주교는 교구의 살림을 알뜰히 챙기면서도 사회정의를 실천하려는 모습을 보였는데, 세월호 2주기 미사에서 "세월호 참사는 천민자본주의에 찔린 물고기"라고 강론을 하고 통일 세미나를 주재하는 등의 여러가지 사회 참여적인 모습을 보였다.
또한 "65세에 은퇴하여[6] 거리의 악사로 살고 싶었다."라고 이야기했을 만큼 음악에도 조예가 깊다. 여러가지의 성가와 미사곡을 작곡하기도 하였다.
1.4 주교 서품 이후
2016년 4월 19일 프란치스코 교황은 건강상의 이유로 사임을 표명한 마산교구장 안명옥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주교의 사임청원을 받아들이고 배기현 신부를 마산교구장 주교로 서임하였다. 그해 6월 8일 주교 승품과 동시에 천주교 마산교구장으로 착좌하여 공식업무를 시작하였다.
그 동안의 사제생활 동안 특유의 유머를 보여주던 배 주교는 착좌미사중 축하식 중 여러 축사에 이은 배주교의 답사에서 첫 마디를 매우 심각하게"일이 이렇게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라고 말해 좌중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사제 서품을 받던 날 죄 많은 집안에 신부를 주셨다고 제 어미가 통절히 울었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훌륭해서 (주교로) 뽑힌 게 아니라 불쌍해서 불러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겸손해서 혹은 겸손을 가장해서 드리는 말씀이 아니고 사실이 그러합니다", "배 주교는 지금도 사제, 주교가 된 것에 대해 '기가 차다'고 말한다." 등의 발언... 커쇼 + 트라웃 급 셀프디스
특히 미사 후에는 쾌활한 성격을 보여주듯 신자들을 직접 만나 기쁨을 나누기도 하였다.
평소에 주교를 알았던걸로 추측된 청년들이 가서 "주교님 오늘 멋있으셨어요~~~~" 하니까 주교는 "야C 멋있는기 뭐꼬? 더워 죽는줄 알았다" 라고 하였다. 한 어린이에게는 "너 엄마 말씀 잘 들어야 해. 안 그러면 장가도 못 가고 나처럼 되는 거야"라고 셀프디스 말을 하여 신자들을 웃음 바다로 만들기도 하였다. # 증거 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