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선정벌

이 문서는 청-러시아 국경분쟁으로도 들어올 수 있다.

중국어 : 雅克萨战役
러시아어 : Русско-цинский пограничный конфликт[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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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효종연해주 흑룡강 방면으로 남하하는 러시아 제국 세력을 조선과 청나라가 군사력으로 공동 대응[2]한 사건.

잘못알고있는게 표트르 대제와는 관련이 없는 사건이다. 표트르 대제는 청과 러시아 사이의 국경분쟁이 다 끝나갈 때쯤에야 차르로 즉위했고, 조선군이 참전한 1650년대에는 태어나지도 않았다.

후술하겠지만 조선군의 실제 파병 규모와 그 전과에 비해서 '정벌'이라는 '과장된 용어'가 사용되었기에 거부감을 표하는 사람이 있는 편이다. 하지만 정벌의 사전적 정의는 '적 또는 죄 있는 무리를 무력으로써 침'이므로 실제 언중들이 생각하는 거창한 '정벌'의 이미지뿐 아니라 작은 정벌도 있을 수 있다며 나선정벌이라는 용어 사용에 문제가 없다는 주장도 있다.  정벌이라는 단어도 청의 입장에서 서술하는 거고, 무엇보다 러시아가 조선을 침략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조선 입장에서 러시아를 응징한다는 것에는 어폐가 있다는 점이다.[3]

2 발단

1651년(효종 2년) 킵차크 칸국으로부터 독립하여 독자적 세력을 구축하던 모스크바 대공국을 물려받은 루스 차르국은 대외활동이 활발해짐에 따라 자원에 대한 수요가 급격히 늘어난다. 특히 모피에 대한 수요가 굉장히 컸는데, 시베리아는 모피 자원이 매우 풍부한 곳이었다. 이러한 이해가 맞아떨어져 러시아 정부는 카자크들을 고용해 동쪽으로 파병, 이 카자크들은 과거 칸국들의 영토를 하나하나 씹어먹으며 진군한다. 그러다 끝내 청나라의 영토에 맞닿은 아무르 강 일대까지 진출, 여기에 을 쌓고 모피나 목재, 광물자원 등을 획득하기 위한 경제활동을 전개한다.

이때는 청나라도 아무르 강 일대를 점령한지 얼마 안 되던 시기였다. 이곳의 원주민들도 여러번 두들겨패서 겨우 복속시킨 상황이었고, 이곳에 대한 관심도 그만큼 큰 상황이었다. 그런데 러시아가 갑툭튀하더니 그 활동 범위를 점차 넓혀 우수리 강 하구를 지나 송화강 방면으로 내려왔다. 청나라는 이곳의 지배권을 내주고 싶지 않았고, 결국 군사를 동원하여 러시아를 격퇴하려고 하는데...

2.1 본격적인 개전

1649년, 예로페이 하바로프[4]의 지휘를 받는 러시아 군인들이 청나라의 보호를 받는 원주민들(다우르족, 에벤키족 등)의 영토로 쳐들어가서는 이들에게서 본격적으로 을 뜯기 시작한다. 원주민들이 공물 바치기를 거부하면 즉각 무력을 동원했다. 이런 폭압에 시달리다 못한 원주민들이 결국 근처에 주둔한 청나라 군부대로 뛰어가 도움을 요청하고, 결국 1651년 청나라는 이들에 대해 군사적 원조를 제공할 것을 결의한다.

3 양국의 목표

3.1 청나라

아무르 지역 일대에 대한 지배권 유지 및 러시아군의 남하 저지가 물론 1차적인 목표였다. 또한 이번 기회를 통해 미처 복속하지 못한 지역에 대한 영향력도 넓히고, 보호령으로 선포된 곳을 가능하면 청 정부의 직접 통치령으로 바꿀 계획도 가지고 있었다.

3.2 러시아

아무르 강 일대를 점령해 기존에 원주민들이 청나라에 바치고 있는 모피를 빼앗고, 특히 농사짓기에 좋은 아무르 강 남부를 점령해 본격적으로 식민화하는 것이 목표.

4 나선정벌, 1차와 2차.

패배를 거듭한 청나라는 무기 수준이 낙후하여 러시아를 저지하는게 불가능함을 깨닫고, 임진왜란 이후 조총 운용 능력을 양성해온 조선에 병자호란 때의 스나이핑 당했던 기억을 되살려 총수병(銃手兵)을 요청하였다.[5]

이에 조선에서는 1654년(효종5) 함경도 병마우후 변급에게 포수 100명과 초관(哨官)[6] 50여 명을 주어 지원군으로 파견하도록 하였다. 이들은 무단 강(牧丹江) 상류지역의 영고탑에 이르러 밍안다리(Mingandali, 明安達哩명안달리, 明安達禮명안달례)가 이끄는 청군 3천여 명과 합세하여 북상하다가 4월 28일 쑹화 강 중류 지점에서 러시아군을 만나 교전하였다. 이것이 제1차 나선정벌이다. 그 후 청나라는 단독으로 러시아군 거점을 공격하였으나 또 실패를 반복하자 다시 조선에 포수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1658년(효종9) 조선은 혜산 첨사 신유에게 포수 200명과 초관 60여명을 주어 다시 파견하였다. 신유는 영고탑에서 샤르후다(Šarhūda, 沙爾虎達사이호달)가 이끄는 청나라 군대와 합류하여 북상하였고, 6월 10일 아무르 강과 쑹화 강이 만나는 지점에서 '스테파노프'의 러시아 군사와 접전을 벌였다. 이것이 제2차 나선정벌이다.

5 과정

러시아는 1581년 코사크 예르마크 탐험대가 우랄 산맥을 넘어 시베리아에 진입한 이후 계속 동쪽으로 원정대를 보냈다. 1598년 러시아는 중앙아시아에 식민도시 톰스크를 세웠으며, 17세기에는 바이칼호 부근까지 진출하게 된다. 이후 1647년, 기어이 러시아는 북태평양 연안에 도달했으며, 이를 오호츠크 해라 이름붙인다. 이후 러시아는 예니세이 강에 세운 식민도시와 레나 강 중류의 야쿠츠크를 바탕으로 1638년 남진을 시작, 헤이룽 강(아무르강) 유역에 도달하기에 이른다. 당시 헤이룽 강에 도달한 탐험대는 포야르코프 원정대로, 이후 하바로프[7] 원정대가 1649년, 1651년 두 차례에 걸쳐 강 근처 원주민 부락들을 공격하고 부락의 물품들을 노획하는데, 이때 주로 노획한 물품은 가죽이었다.

문제는 하바로프 원정대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청의 영토까지 들어가서 청나라 영토 내의 원주민 부락에서도 행패를 부렸다는 것. 이에 원주민들은 청에 도움을 요청했으며, 청은 이를 받아들여 1652년 영고탑 주둔 사령관 하이써의 지휘 하에 군사 1500명을 헤이룽 강에 파견한다. 당시 헤이룽 강에서 열심히 행패를 부리던 하바로프 원정대는 206명의 군인밖에 없었기에 겉으로 보기에는 하이써가 손쉽게 이들을 무찌를 것처럼 보였지만.... 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가고 대패한다. 그야말로 일방적으로 하이써의 청군은 패배하고 만다. 청군은 매우 강력한 군대였지만, 당시에는 중국을 완전히 휘어잡은 상태가 아니었는데다 만주 지역이라는, 그야말로 후방 중의 후방에 주둔한 군대의 힘은 안 봐도 뻔하다. 당시 하이써의 군대 중 총을 다루는 군사는 30명. 그나마 대포를 동원했지만 대포가 6문뿐이었다. 물론 아까 말했듯이 후방 중의 후방, 만주에 주둔한 군대의 화기 상태가 어떨지는 또 안 봐도 뻔하다(...) 하바로프 원정대의 전사자는 10명. 하지만 청군은 무려 676명에 달하는 전사자를 내고야 만다. 물론 앞서 몇 번이나 강조했듯이 무기나 기강 차이가 심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 머릿수의 차이를 이렇게 활용하지 못한 것은 명백하게 하이써의 병신같은 전략에 힘입은 바가 크다. 순치제는 이에 하이써에게 책임을 물어 하이써를 처형한다.

이후 하이써의 후임으로 나선 정벌군 지휘관으로 임명된 자가 앞에 언급되어 있는 샤르후다였다. 샤르후다는 병자호란 당시 조선에 들어온 장수 중 하나였는데, 그는 2년에 걸쳐 반격을 준비했다. 하지만 근본적인 원인인 화력의 차이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는데, 당시 화기를 잘 다루는 한족 출신의 정예 녹영병들은 남명 정권과의 전투에 모조리 투입해야 했기에 만주의 소규모 적군 좀 해결하겠다고 빼서 보내 줄 정도로 상황이 여유롭지가 않았다. 샤르후다만큼이나 이들 때문에 골치를 썩던 청나라는 결국 조선군 포수들을 투입하기로 결정한다.

1654년 2월, 조선에 청의 사신 한거원이 도착한다. 한거원의 서신에는 조창선수 100여 명을 보내시오. 나선을 정벌하려 함이오.라는 말이 적혀져 있었다. 이에 효종이 "나선이란 무엇인가?"라고 물었으며, 한거원은 "영고탑 인근 별종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재미있는 점은 당시 청은 러시아의 존재를 알고 있었으나 이 러시아 원정대가 러시아인임은 알지 못했다는 점이다. 중국에 들어온 서양 선교사들을 통해 모스코비아(말할 것도 없이 모스크바를 말한다)라는 나라가 있다는 정보는 들어와 있었는데, 선교사들은 중국에 있으면서 유럽의 소식을 들으려면 꽤나 시간이 걸리거나 불가능한 상황이다 보니 모스코비아라는 먼 나라에서 청까지 원정대가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따라서 청은 이들을 그냥 나선이라고 불렀다.

효종은 이에 변급을 지휘관으로 삼고 포수 100여 명, 초관, 통역들을 포함하면 총 152명의 부대를 결성, 파병시킨다. 조선군은 1654년(효종 5년) 3월 23일 두만강을 건너 청의 영토로 진입했다. 이후 8일간 걸어서 행군한 끝에 영고탑 인근에 주둔하던 샤르후다 지휘하의 청군과 합류한다. 이들은 쑹화강과 무단 강이 만나는 합류점인 삼성까지 가기 위해 무단 강의 흐름을 따라 배를 타고 가기 시작한다.

이렇게 결성된 조청연합군은 총 1000여 명의 규모였다. 이들은 한 가지 크기가 아닌 여러 가지 크기의 배를 타고 쑹화 강 하구까지 내려갔는데, 배는 120척이나 되었다. 이들과 마주친 러시아 원정대는 이전 하이써를 대패시킨 하바로프가 아닌 그의 후임 스테파노프였다. 하바로프는 공로를 인정받고 모스크바로 돌아간 뒤였다. 당시 스테파토프가 거느린 군사는 400여 명의 규모였다. 스테파노프의 함대는 헤이룽 강에서 쑹화 강으로 가고 있었는데, 마침 쑹화 강 하구로 진입한 조청연합군과 마주친다. 이 때가 4월 28일이었다.

원래 샤르후다의 전략은 이들이 타고 온 함선을 이용, 수전을 벌이고 선두에 조선군이 서는 것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함선의 크기 및 위력 차이가 심했다. 청은 당시 온 전력을 남방에 집중하고 있었으니만큼 크고 위력적인 함선들 역시 그 쪽에 투입되어 있었는지라 대부분이 매우 작은 배였다. 게다가 러시아군의 함선은 두껍고 튼튼한 대형 범선이었고, 청군이 동원한 배는 자작나무 껍질이 주 재료인 매우 약한 배였다. 샤르후다는 적의 전선이 꽤나 강력함을 인지하고 전략을 변경한다.

샤르후다는 전투 전에 군사들을 시켜 강변에 참호를 파게 하고 나무 방패를 세운다. 그리고 조선군을 모두 강변에 투입한다. 이후 전투가 시작되었다. 청군의 함선이 비록 작고 약하지만 이들을 아예 안 쓴 건 아니었으며, 오히려 적극적으로 사용했다. 전투는 청군이 러시아군의 주의를 끌면서 배를 주로 공격하는 동안 조선군이 강변에서 러시아군을 내려다보며 사격하여 러시아군의 피해를 누적시키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전세는 러시아군에게 불리해졌다. 러시아군은 전투 중 강변에서 사격하는 조선군이 자신들에게 매우 큰 피해를 입혔음을 알아채고 상륙대를 내보내 강변에 군인들을 내려 조선군에게 돌격한다. 하지만 조선군은 침착하게 이들에게 계속해서 사격을 가했고 결국 러시아군은 상륙했지만 아무런 피해도 주지 못하고 많은 사상자를 낸 채 퇴각한다.

며칠 동안 같은 양상의 전투가 반복되었고, 스테파노프의 원정대는 완전히 기진맥진해 버렸다. 사상자가 엄청나게 많아 전투 가능 인원이 너무나도 부족했던데다 물자는 바닥나기 일보 직전이었다. 따라서 당연히 스테파노프 원정대는 헤이룽 강 상류로 퇴각하기 시작하는데, 청군이 이를 추격한다. 청군의 함선은 4일 동안 쉬지 않고 러시아군을 추격했지만 마침 동풍이 불어 스테파노프 원정대는 돛을 올리고 빠르게 퇴각하여 헤이룽 강 상류에 러시아 원정대가 세운 쿠마르스크 요새에 들어가 버린다. 요새를 공격할 수준의 무기나 병력을 동원한 건 아니었던지라 조청연합군은 퇴각하여 6월 13일 영고탑으로 돌아간다. 조선군은 이후 조선을 떠난 지 84일만에 돌아오는데, 사상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이후 청은 희한하게도 겨울 내내 쿠마르스크 요새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지 않았다. 이에 스테파노프는 러시아 본국으로부터 지원 병력과 물자를 보급받고 부상자들을 치료하는 등 힘을 키워 나갔고 결국 이듬해 봄 완전히 세력을 회복, 활동을 개시한다. 이때 러시아 원정대를 저지하기 위해 파견된 청군의 사령관은 밍안달리였는데, 밍안달리가 이끄는 군사들은 북경 수도 방위를 맡은 군사 1500명이었다. 그런데 청이 남방에 군사력을 집중하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이 때문에 수도 방위도 꽤나 개판이었던 모양이다(....) 밍안달리는 쿠마르스크 요새에 3개월 간 공격을 퍼부었으나 러시아군항복을 받아내는 데에 실패했으며, 설상가상으로 식량 보급까지 끊기는 바람에 북경으로 철수했다. 이에 청은 1658년 대규모 공격을 준비한다. 지난번의 공격이 그랬듯이 청은 또다시 조선군의 파병을 요청했으며, 이에 파견된 조선군의 지휘관 자리에 함북병마우후 신류 장군이 임명된다. 신류 장군이 이끈 포수들은 지난번 1차 나선정벌 때의 2배인 200명이었다.

허나 지난번 정벌과는 달리 이번 정벌은 시작부터 뭔가 순탄치가 않았는데, 일단 청나라 통역관이 제 시간에 도착하지 않았다. 이 통역관은 조선군을 안내하는 역할을 맡았는데, 그가 늦게 오는 바람에 조선군은 급하게 행군하는지라 도중에 말이 쓰러져 죽고 물건이 진흙에 빠지는 등 별별 고생을 다 하게 된다. 조선군은 5월 6일 영고탑에 도달한다.
지휘관은 예전의 샤르후다였다. 영고탑에 도착한 신류 장군은 샤르후다를 그곳에서 만날 줄 알았으나 샤르후다는 이미 출동한 상태라 조선군은 환영식은 받았으나 적에 대한 자세한 사정은 듣지 못한다. 신류 장군은 헤이룽 강과 쑹화 강 근처의 오랑캐(왈가, 혁철...)들의 정세를 궁금해하며 잠에 들었고, 5월 10일 비 오는 날씨를 뚫고 30리를 행군하여 샤르후다의 부대가 주둔한 곳에 도착한다.

이들은 왈가족 사공이 모는 왈가족 배를 타고 쑹화 강 어귀까지 올라가는데, 쑹화 강 어귀에는 5월 15일에 도착했다. 5월 14일 왈가족 사람 4명이 청군과 조선군에게 러시아군이 헤이룽 강 어귀에 도착했음을 알렸기에 신류는 걱정을 하게 되는데, 왜냐하면 이때 러시아군과의 전투에 투입될 전선이 아직 다 건조되지 않았던데다 북경, 선양, 영고탑에서 장수들이 파견되고 선양에서 지원군이 오며, 북경에서는 잠수병이 온다고 소식이 왔었는데 이들도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5월 20일까지 조선군은 그곳에서 머물며 사격 훈련을 진행한다. 이때 혁철족 사람들이 말하기를 "지난번 전투에서 적군이 조선군에게 많은 사상자를 보았습니다. 그 일 이후로 도적들은 말끝마다 머리가 큰 사람이 두렵다고 했습니다."라고 전한다. 즉 대두인은 혁철족이 조선군을 부르는 표현이었는데 이들과 러시아가 교류하면서 러시아 역시 조선군을 대두인이라 칭하게 된 것이었다. 당시 러시아는 혁철족을 나나이라고 불렀다.

이후 늦게 도착한 청군이 도착하고, 전선 역시 도착했다. 신류의 기록에 따르면 이 전선은 총 48척이 왔으며, 생긴 건 판옥선이랑 비슷한데 더 튼튼했으며 지붕이 없고 단청이 매우 화려했다고 한다. 이들 중 대형 함선은 36척이었고 소형 함선은 12척이었다. 전선 한 척마다 조선 포수를 5명씩 탑승시키고 청나라 갑군을 한 척마다 25명씩 탑승시키는 식으로 군대를 정리한 뒤 6월 5일 함대는 진격을 시작한다. 참고로 갑군은 갑옷을 걸쳐 입고 창칼과 활로 무장했으며, 등패를 보유했다고 한다. 이들은 며칠 동안 나아가 열벌마을에 도달했고, 6월 10일 아침 일찍 마을을 떠났다. 이들은 헤이룽 강 어귀를 지나 20리쯤 가서는 러시아 함대와 마주쳤다.

러시아 함대의 규모는 총 전선 11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당시 러시아 범선들은 강 한가운데에 닻을 내리고 있었는데, 조청연합군의 함대가 다가오자 닻을 올리고 돛대를 세워 10리쯤 물러난 뒤 강가에 자리를 잡았다. 러시아군은 그곳에 머물며 지붕 위로 올라가 조청연합군의 동태를 살피기 시작했고, 연합군의 함대는 적의 배와 한 마장(400m)쯤의 거리만큼 가까워지자 포격을 시작하였고 이에 러시아군도 응사했다. 이때 청군이 아직 전투에 투입하지 않았던 전선까지 모조리 한번에 밀어넣어 러시아군에게 활, 대포, 총 등으로 공격을 가하자 범선 위에서 총을 쏘던 러시아군은 버티지 못하고 배 안이나 강가의 풀숲으로 도망쳤다. 이에 청 전선들이 러시아 범선들을 포위하고 쇠갈고리를 던져 배들을 끌어당겼고, 포수들이 적선에 올라타 배를 태우고자 했다. 이때 샤르후다는 러시아 배에 실린 많은 물건을 탐내 화공을 하지 못하게 명령했다. 조선군이 적선으로 뛰어들었을 때, 그 조선군들이 탑승했던 배의 포수와 사수들 모두가 러시아 배로 옮겨 탔다. 이때 강가의 풀숲으로 도망쳤던 러시아군이 빈 청 전선에 올라타 강가를 따라 상류로 끌고 갔다. 이에 뒤에 있던 배들이 일시에 그 배를 추격했는데 선두의 배에는 신류 장군이 타고 있었다. 배 여러 척이 러시아군이 탈취한 청나라 배를 포위하자 러시아군은 다시 내려 숲 속으로 도망치려 했다. 이때 청나라 갑군들이 뛰어들어 러시아군 40여 명을 죽였다

그동안 청 전선 위에 있던 포수와 사수들은 풀숲으로 도망친 러시아군에게 사격을 가했는데, 이들이 쏜 총에 청군과 조선군에 사상자가 생겼으며, 또한 화공을 위해 올라탔다가 샤르후다에게 저지당한 포수들 역시 아군 전선으로 돌아간 뒤 배 안으로 도망쳤던 러시아군이 튀어나와 연달아 사격을 가해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들 중 사망자는 7명으로 이름과 출신은 길주의 윤계인과 김대충, 부령의 김사림, 회령의 정계룡, 종성의 배명장과 유복, 온성의 이응생이다. 이들은 러시아군의 총격에 그 자리에서 전사했다. 이후 청의 갑군과 청 사공들에게도 계속 사상자가 나왔는데, 이에 상황이 다급해지자 기어이 화공을 가해 러시아 함선 7척을 불태웠다. 이후 청군은 청 전선 3척은 닻을 내리고 적선을 감시하도록 하고 나머지는 맞은편 기슭에 모이게 하고 밤을 샜다. 단 화공을 가한 것은 어디까지나 긴급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가한 것으로 샤르후다의 뜻이 아니었기에 기어이 샤르후다는 적선 4척만은 태우지 않고 남겨 둔다.

당시 러시아 원정대는 말 그대로 참패를 당했다. 원정대는 어찌어찌 구한 배 한 척에 생존한 사람들이 탄 채 도망칠 수밖에 없었는데, 당시 생존한 군인 중 하나인 페트릴로프스키가 남긴 기록을 통해 피해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페트릴로프스키 보고서에 따르면 스테파노프와 카자흐 270명이 전사했으며 짜르에게 바칠 국고 소유의 담비 가죽 3800장, 대포 6문, 화약, 납, 군기, 식량을 실은 배가 파괴되었으며 겨우 성상을 실은 배 1척에 95명의 생존자를 태우고 탈출했다고 한다. 페트릴로프스키가 연합군에 대해서 묘사한 것은 화승총과 대포로 무장한 중국 범선 47척이라고 되어있다.

이 전투에서는 1차 정벌과는 달리 피해자가 꾀 나온 편인데, 조선군의 전사자는 7명이고 크게 부상당한 사람은 25명이었다. 게다가 온성 출신의 이충인은 부상이 덧나 사망하기에 이른다. 샤르후다는 시체를 화장하는 데에 쓰라며 러시아 함선 1척을 내주지만 신류는 거절하고 강가에 매장한다.

전투 당시 조선군은 러시아 함선에서 부싯돌이나 러시아 총 등을 노획했는데, 샤르후다는 러시아군이 보유하고 있던 담비 가죽을 모조리 챙긴 것도 모자라 조선군이 챙긴 총과 부싯돌도 빼앗는다. 조선군은 이후 러시아 함선의 구조를 살펴본다. 신류의 표현에 따르면 러시아 범선은 몸체가 크고 갑판 위는 모두 널빤지를 둘렀으며, 배 위에는 방을 세워 두었는데, 넓은 널빤지로 서까래를 만들어 작은 나무 엮은 것을 얹었고, 그 위에 벚나무 껍질을 씌운 뒤 그 위에 또 흙을 깔고 또 두꺼운 널빤지를 덮었기에 "살림집도 이만큼 튼튼하지는 못할 것이다."라고 한다. 이어 배 위의 집이 이 정도로 튼튼한데 배 또한 바닥이 통나무에 홍이포로 공격해도 잘 부서지지 않는데다 갑판 주위를 두꺼운 나무로 두르고 있어 만약 적이 배 속에 숨거나 육지에 내리거나 하지 않고 끝까지 배 위에서 싸웠다면 승부를 가리기가 만만찮을 것이라고 평가한다.

이후 풀숲으로 도망쳤던 러시아군 10여 명이 빠져나와 조선군과 청군에게 살려 달라고 빌었다. 샤르후다는 이들을 배에 나누어 수용하고는 갑군과 포수들을 시켜 수풀을 뒤져 생존자를 찾아 보라고 명했으나 이들 외에는 모두 총알과 화살에 맞아 말 그대로 벌집이 되어 있었다. 이때 조청연합군을 안내했던 왈가족과 혁철족은 러시아군의 시체에 칼질을 하며 보복했다.

청군은 전투에서 총 80여 명이 전사했고 사공 역시 30여 명이 사망한데다 부상자는 200여 명에 달하는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한편 조선군은 상태가 꽤나 안 좋아지고 있었는데, 샤르후다가 사전 통보 없이 조선군의 주둔 기간을 연장해 버리는 바람에 조선에서 가져온 식량이 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신류는 이에 샤르후다에게 요청하여 쌀을 빌리는데, 샤르후다는 조선군이 원래 조선에서 들고 왔던 쌀의 절반 수준만을 빌려 준다. 게다가 쌀을 옮길 때도 크게 신경쓰지 않았는지 배에 물이 샌 나머지 쌀의 30% 가량이 썩었다. 쌀뿐만 아니라 장작도 별로 안 빌려줘서 조선군은 떨어질 때마다 청군에게 사정해야 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신류는 끊임없이 청나라 수석 통역관을 통해 러시아 총을 전리품으로 들고 가게 해 달라고 샤르후다에게 요청했는데, 샤르후다는 계속된 간청을 이기지 못해 러시아 총 한 자루(....)를 내준다. 참고로 청군은 수백 정의 총기를 노획했다. 신류는 당시 러시아 총기가 수석식이었기에 화승 없이 쇠붙이와 부싯돌로 일으킨 불꽃으로 사격하는 모습이 매우 신기하다고 적었다. 조선군은 8월 27일 조선으로 돌아갔다. 이로서 2차 나선정벌까지 완료되었다.

6 성과

1차의 경우 7일만에 적군을 패퇴시키고 조선군은 6월에 본국으로 개선하였다. 청은 조선 포수의 스나이퍼 위력에 새삼 놀랐다는 듯.

2차의 경우 10여 척의 배를 앞세우고 공격해 오는 러시아군에 총과 불화살로 맞서 싸워 대승을 거두었다. 청군은 조선군을 선봉으로 세우려 했는데 조선군은 작은 자피선만 가지고 있어서 러시아의 큰 군함에 대응할 수 없어 취소되었다. 방심하고 배에서 대기를 하던 러시아군을 향해 기습적으로 불을 저질러 큰 혼란을 주는 방법으로 스테파노프를 포함하여 270여 명이 전사하였고 잔당은 모두 패퇴하였다. 조선군은 7명의 전사자를 냈는데 전사자가 나온 경로가 황당하다. 조선군의 조총 사격에 러시아인들은 모두 뱃속에 숨어 있었고 조선군과 청군은 러시아배에 불을 질렀으나 러시아배에 실린 재물을 탐한 청나라 장수가 배의 불을 진화하고 전리품을 얻을 것을 명령하면서 조선병사들은 황급히 불을 끄고 다시 배로 돌아가는 뻘짓을 해야 했다. 그때 숨어있던 러시아인들이 사격을 가하면서 조선군 7명을 포함한 다수의 전사자가 났고 뒷치기에 분노한 조선군은 반격을 가해 러시아인들을 모두 섬멸했다. 청군은 조선군 시신을 화장할 것을 명령했으나 조선군은 조국의 산하에 묻어주진 못할 망정 이국에서 태울 순 없다고 하며 근처에서 매장을 했다. 지들 전리품 챙기기에 동맹군(?)이 죽어났는데, 총 하나 달라고 해도 안주려던 대륙의 쪼잔함 [8]

이후 러시아군은 북방으로 밀려나 더 이상 조선군이 파병되지는 않았으며, 한동안 북쪽에서 대치하다 네르친스크 조약으로 청나라와의 국경을 확정한다. 훗날 러시아 제국은 200여년 후 19세기 청나라가 아편전쟁에서 패하고 동네북이 됐을 때에서야 남진에 성공하고 조선과 재회한다. 그 때의 두 국가의 위치는 넘사벽.

7 만약 조선이 러시아와 비밀리에 접촉해서 동맹을 맺었다면?

적의 적은 나의 친구
베트남전 파병, 이라크 파병 등을 부정적으로 보는 일부 계층과 조선 사대부들을 싫어하는 몇몇 역덕후들은 나선정벌을 상당히 부정적으로 본다. 청나라를 정벌한다더니 사대부들은 입으로만 큰소리치고 오히려 자신들을 침략한 청나라를 도와주는 머저리 같은 짓을 했다는 것이다. 특히 과거 노무현 정부 때 이라크 파병을 비판하는 이들 중 일부는 베트남 파병과 더불어 나선정벌도 우리 민족 입장에서는 매우 치욕적인 일이라고 주장한 적도 있었다. 조선이 자신들을 짓밟은 청나라를 위해 아무 원한도 없는 러시아군과 싸워서 얻은 게 뭐냐는 것이다.[9]

여기에 일부 역덕후들은 한무제가 장건을 흉노와 원한관계인 대월지로 보내서 동맹을 맺으려 한 일을 예로 들며 차라리 그 때 조선군은 비밀리에 러시아군과 접촉해서 동맹을 맺고 청나라를 협공했어야 한다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그러면 진짜로 효종과 사대부들이 원하는 진짜 북벌을 수월하게 이룰 수 있다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이들도 많다. 이들은 왜 효종은 나선정벌군에게 러시아와 접촉하여 비밀동맹을 맺으라는 지령을 내리지 않았느냐며 효종의 어리석음(?)을 까기도 한다.

심지어 아무르강을 경계로 북쪽은 러시아가 남쪽의 옛 고구려, 발해 땅은 조선이 다시 되찾는다는 시나리오까지 쓰는 이들도 있는데 청나라가 과연 러시아와 조선 두 나라가 공조하는 걸 가만히 보고만 있을지 의문이다. 비밀동맹도 계속 공고화하기 위해서는 서로 주기적으로 사신들이 오가야 되는데 과연 러시아와 조선의 사신들이 몰래 청나라 영토를 통과해서 서로 오가는 게 가능한지 생각해 봐야 할 문제다.[10] 조선과 러시아가 서로에게 호감을 갖고 청나라에 대한 공조를 위해 손을 잡으려 해도 당시 지리적, 물리적으로 쉽지 않은 일이다.

물론 러시아가 캄차카 반도에서 배를 타고 사할린을 지나 조선까지 가는 항로를 개척해서 조선과 접촉하여 동맹울 맺고 청나라를 견제한다는 시나리오를 쓰는 못말리는역덕후들도 있지만 러시아가 캄차카 반도를 개척하는 건 18세기 이후고 사할린 이남까지 해로를 개척하는 건 19세기 초에나 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당시에는 어림없는 일이다.

이런 황당한 소리가 나오는 건 한마디로 서양사에 무지한 탓이다. 17세기 러시아는 말그대로 동쪽에 원정대를 보낸 수준이지 엄밀히 말해 중앙아시아 동쪽을 러시아의 영토라 볼 수도 없던 시절이다. 극동은 커녕 유럽 앞마당에서조차 스웨덴폴란드를 상대로도 고전을 면치 못하고 오스만 제국에게 크림반도에서도 고전하던게 17세기 중반의 러시아다. 이 때 보낸 2,000여명은 말그대로 원정대의 전병력이었고 후속 병력은 꿈도 못꾸던 시절이다. 엄밀히 말해 나선정벌은 세계사에서 국경분쟁으로 여겨지지 전쟁으로 보지도 않는다. 그런데 고작 동맹군 2,000명 바라보고 러시아와 동맹맺고 청나라를 공격한다고? 삼전도의 굴욕 시즌2라고 밖에 할 말이 없다. 애초에 효종의 북벌론조차 정말로 청나라를 공격할 의도가 아니라 내부단속이었다고 보는게 요즘 역사학의 추세다.

8 기타

  • 2차 원정을 간 신유는 출정 때부터 귀국 까지 쓴 일기 북정록을 남겼다.
  • 조선군은 자신들이 누구와 싸우는지 알지 못했다. 신유의 북정록 첫머리는 "북쪽 바닷가에 한 떼의 도적무리가 있는데, 그 소굴은 어느 곳에 있는지 알 수 없으나 오로지 배로 집을 삼고 흑룡강 상하를 오르내렸다."라고 하였며, 러시아 코사크를 오로소(吳老素), 노추(虜酋) 등 '러시아'와 비슷한 발음으로 적고 있지만, "적들은 바다 쪽에서 강을 거슬러 온 것이 아니라 흑룡강 상류에서 배를 타고 내려왔다. 그 나라가 흑룡강 상류에 있는지 또는 육로로 나와 흑룡강에서 배를 타고 내려왔는지 잘 알 수 없는 일이지만, 흑룡강의 상류는 몽골 지방에서 흘러나온다고 하니 그 나라는 강 상류에 있는 것 같지도 않다."라고 하여 이들이 어디서 왔는지 끝내 알아내지 못한다.
  • 2차 정벌 당시 조-청 연합군이 교전했던 상대가 스트렐치인지 코사크[11]인지 논란이 있다. 영문 위키에선 사르후다가 스테파노프와 220명의 코사크를 죽였다는 내용이 있다.
  • 효종의 북벌 정책 가운데 그나마 가시적인 성과이기도 하다.[12] 하지만 당대에는 누구와 싸워 이겼는지도 불확실하고, 소규모 전투였으며, 청나라의 요구로 어쩔 수 없이 전쟁을 치렀다는 점 때문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 여담이지만 이때 러시아군은 조선군을 대두인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아마도 전립을 쓴 것을 보고 그랬을 것이다.그 뒤로 신미양요 때까지 '무서운 대두'로 알려져 있었다. 안습 대갈장군
  • 한국어 위키백과에는 청-러시아 국경 분쟁의 일부로서 등재되어 있는데, 편집 히스토리를 살펴보면 작성자가 '나선정벌'이라는 거창한 용어를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문서 내용은 러시아와 청 사이의 전투에만 집중되어 있으며, 조선 측 행동에 대해서는 "신류가 인솔한 것으로 알려진 1658년 원정에 대해서는, 파병에 응했다는 것 외에는 《조선왕조실록》 상에 남아있는 기록이 없다"라는 식으로 짤막하게 작성되어 있고, 그 외의 기록은 남기지 않았다. 사실 나선정벌에 대한 조선 측의 상세한 기록은 위에 언급한 신유의 북정록이 사실상 전부이다. 다만 북정록의 저술상황이 굉장히 자세하고 객관적인 면을 볼때,한국의 사학자들도 그 가치를 매우 크게 인정하며 러시아와 중국의 학자들도 중요한 자료로 취급한다. 게다가 짤막하게 서술된 부분의 출처도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부분을 인용한것인만큼 기술자체를 일부러 축소한것이라고 확인할 순 없다. 애초에 위키인데 기술이 없으면 추가하면 되지
  • 러시아군의 포수들은 대개 진형을 길게 펼쳐서 화망을 펼치는 방법을 사용했는데, 조선군은 직접 조준사격을 하였다고 한다. 오빤 경보병 스타일 조선군의 조총 운영에서 흠좀무한게 납탄환이 아닌 주조한 무쇠 탄환을 쓰기도 했다고 한다. 납이야 무르기 때문에 장전할 때 꼬질대로 밀어넣는데 문제가 없지만, 무쇠 탄환은 조금만 규격이 안 맞아도 장전하기 빡세다. 나폴레옹 시절 저격병들이 하듯이 망치로 탄환을 때려 박아 넣어야 하는데... 그만큼 총알이 총신에 꽉 물리기에 명중율이나 위력이 높아지는 장점이 있다. 물론 너무 꽉 물리면...;;; 실제로 나선정벌을 기록한 북정록에는 "경원포수 박사길의 조총이 파열하여 왼팔에 중상을 입었으나 폐인은 면하고 곁의 사람도 모두 무사하니 다행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러시아군은 조선군의 스나이핑을 인상적으로 보았지만, 한편으로 신유 장군도 러시아군의 함선이 판옥선만큼이나 견고하고 총포를 다루는 기술이 절묘하다는 표현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일제 발포하는 서양식 전열보병 전술에 강한 인상을 받은 모양이다. 그리고 러시아군이 선실로 숨거나 강가에 배를 대어 성벽처럼 이용해서 끝까지 맞서 싸웠다면 승패를 가리기 어려웠을 것이라 보았다.
  • 전투가 끝나고 신유 장군은 수풀 숨어 있다가 투항한 러시아군 10여 명을 잡았다. 실제 통역을 통해 러시아 포로와 이야기 해보기도 했다고. 한편으로 조선군은 이 러시아 포로들에게 쌀밥과 간장을 주었는데, 난생 처음으로 한식을 접한 러시아 포로들은 적응을 하지 못하고 인상을 찡그리며 뱉어냈다.포로들 주제에 입맛이 까다롭다 이걸 보고 신유는 누가 천하의 입맛이 다 같다고 했던가...라며 토로했다.
  • 이때 러시아군은 플린트 락 머스킷을 사용했고 조선군은 화승총조총을 사용했는데 조선군 군관이었던 신유가 각고의 노력 끝에 수석총을 한자루 구한 바가 있다고 한다. 하지만 화약을 자체생산하기 힘들었던 조선군의 특성상 널리 퍼지지 못한 것으로 추정된다. 게다가 복제한 수석총의 성능도 시원찮았고 가격은 조총의 세배에 달해서 차라리 조총 3자루를 만드는 게 이득이었다고. 단 이것은 출처가 불분명한 정보이다. 거기다 유럽과 달리 조선은 전쟁이 빈번한 국가가 아니었으니 수석총에 투자할 가치도 크게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조선도 바보는 아닌지라 화승총의 개량을 꾸준히 했으며 적어도 산업혁명이전까지는 총기성능의 차이는 생각만큼 굉장히 크지 않았다.
  • 신미양요가 터지기 직전에 미군들 사이에서 '조선의 병사들은 헤라클레스처럼 힘이 쎄고, 백발백중의 명중력을 자랑한다'는 이상한 풍문이 돌았는데, 어쩌면 이 시기 러시아군을 상대로 활약한 일이 후대에 부풀려서 전해졌을 지 모를 일이다. 물론 이후로 200여년이 지나고 러시아에서 미국으로 소문이 퍼졌다는 자체가 신빙성이 없기는 하지만 [13]

9 관련 항목

  1. 중국어와 러시아어 모두 '청-러시아 국경분쟁'을 표제어로 쓰고 있다. 한국어 위키백과에서도 나선정벌이 실제론 정벌 같이 거창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표제어를 이와 같이 고쳤다.
  2. 말이 좋아 공동 대응이지 실제로는 청의 강요로 어쩔 수 없이 조선군을 고기방패로 보낸 것이다. 물론 북벌을 위해 조선군의 실력을 시험한다는 명분을 억지로 붙이기는 했지만 북벌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청나라만 영토 획득이라는 이득을 보고 조선은 사상자만 나왔을 뿐 얻은 게 없었다.
  3. 후술하겠지만 당시 조선과 러시아는 '정벌'이라는 단어를 쓸 정도로 적대적인 관계가 아닌 청이라는 공동의 적(!)을 둔 동맹관계로 발전할 수도 있었다.
  4. 하바로프스크를 개척한 그 인물이다
  5. 아이러니하게, 조선이 보내준 군사들이 바로 북벌을 하기 위해 만든 포수부대이다. 그런데 당시 러시아와 중국의 관계가 껄끄러웠다는 것을 감안하면.
  6. 종9품 무관직으로 1초(哨 : 병사100명 편제)를 지휘한다.
  7. 훗날 이 강변에 세워지는 도시 하바롭스크가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
  8. 취소선 드립이긴 하나, 실제로 청나라는 조선의 무기가 발전하는데 아주 노이로제적인 반응을 보이며 견제해왔으며, 특히 조선으로 화약 재료등 군수품 수출을 엄청나게 통제했다. 그렇타면 모피라도 좀 챙겨주든가 이는 TV드라마 상도에서도 잘 묘사되어있으며, 이 문제때문에 주인공 임상옥의 아버지가 유황 밀수의 누명을 쓰고 죽게된다. 이러한 억제책과 각종 간섭질때문에 조선이 말기에 외세에 저항할 힘을 제대로 기르지 못한 감도 있다. 물론 실학 무시하고 교조주의적인 성리학의 논리에만 집착하던 오만함이 가장 컸지만..
  9. 실제로 조선은 나선정벌을 통해서 얻은 이익이 아무 것도 없었다. 굳이 얻은 게 있다면 혹시라도 있을 러시아의 조선 침략 가능성을 완전히 봉쇄한 것 정도(애초에 러시아의 남하정책이 부동항, 즉 겨울에도 바닷물이 얼지 않는 항구를 손에 넣는 게 목적이었으니).
  10. 장건도 대월지로 가기 위해 흉노 영토를 몰래 통과하려 했지만 갈 때와 귀국할 때 두 번 모두 들켜서 유배를 가기까지 했다. 결국 탈출해서 귀국에 성공했지만 결과적으로 한나라와 대월지의 동맹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11. 사실 코사크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카자크는 해전에도 강했다. 잠깐이나마 흑해의 제해권을 잡은 적도 있을 정도...
  12. 하지만 가시적인 성과라고 부르기도 뭐한 게 자신들을 침략한 원수를 위해 총알받이가 되는 거고 결론적으로 북벌 자체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나선정벌이 조선에게 어떤 의의가 있는 일인지에 대해 논란의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원수의 나라인 청나라에게만 좋은 일을 시켜주고 조선은 얻은 게 없었다.
  13. 단, 여러 나라의 사절들이나 호사가들, 선교사등의 입을 통해서 돌고 돌다가 전해졌을 가능성도 있다. 통신망이 발달한 근대 이전엔, 이런식으로 여러 입들 사이에 돌고 돌아서 과장이나 와전되어 특정 국가들에 관한 편견이 고정관념으로 자리잡는 경우도 흔하다. 특히나 헤라클레스처럼 과장된 표현을 생각하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