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스 커밍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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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미국의 디펜스뉴스와의 인터뷰 중.

Bruce Cumings 1943년 9월 5일 출생

미국의 한국학자이며 시카고 대학의 석좌교수이다. 아시아학의 거두로 꼽힌다. 그의 학설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한국전쟁 연구에 관한한 그보다 더 권위있는 미국학자는 드물다. 당연히 한국어에도 능통하다.

1961년평화봉사단으로 한국에 온것이 인연이 되어,한국 연구에 파고들었다. 아내가 한국인이다.[1] 시카고 대학 석좌교수이다. 시카고 컵스의 열렬한 팬이기도 하다.

한국전쟁 기원에 대한 담론을 진지한 학문의 영역으로 승화시켰다고 평가받고 있다. 그의 주장을 상당부분 부정한 박명림 교수 및 기타 이후 세대의 학자들조차도 브루스 커밍스가 만들어 놓은 담론의 틀에서 그다지 벗어나지는 못했다. 사실 한국전쟁은 미국에서는 오랫동안 언급자체가 안되던 잊혀진 전쟁이다. 일단 미국이 처음으로 무승부를 기록했던 전쟁이었고 전쟁 기간도 비교적 짧았기 때문에 참전용사의 궤적에도 월남전처럼 큰 파장을 주지 못했다.

한때는 6.25 전쟁이 자연적으로 발생한 내전으로 주장했다. 그가 한국전쟁의 기원 초판[2]에서 주장한 내전설의 내용을 요약하면 한반도는 이미 1945년 해방 당시부터 사실상 내전상태였다는 것이다.

기존에는 한국전쟁을 1950년 6월 25일~ 1953년 7월 28일으로 한정해서 과연 6월25일 누가 먼저 총을 쐈나(?)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브루스 커밍스 교수는 해방 직후부터 좌익vs우익, 농민vs지주, 노동자vs자본가, 소련vs미국, 북vs남 등으로 대표되는 각종 모순들이 겹치면서 한반도 전역에서 광범위한 무력충돌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한반도 북부에서 일어난 각종 반공/반소 의거(신의주 학생 의거가 대표적)와 남부에 벌어진 대구 10.1사건, 여수시 14연대 반란사건, 제주 4.3 사건, 지리산 빨치산 투쟁은 물론이고, 토지개혁을 둘러싼 농민과 지주의 충돌 등으로 해방 이후 조선은 전국적 혼란 상태였다. 거기에 1948년 남북 양쪽 정권 수립 이후에는 1950년 6월 25일 직전까지 38선 전역에서 산발적인 국지전이 계속되고 있었다. 즉 브루스 커밍스는 이 모든 것을 감안해봤을때 한반도 전역이 사실상 내전 상태였고 6월 25일 누가 먼저 선제공격 했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본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한국전쟁의 기원' 초판일제강점기 말기부터 1949년까지의 한반도 내부의 혼란상을 강조하고 있다. 6월 25일의 상황은 북의 조선인민군이 보다 큰 규모의 국지전을 시도하다가 전면전, 총력전으로 확대됐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그러면서 당시에 나온 여러 정황 자료상 남침설이 근거가 적다고 본 것이다. 이에 따라 내전확전설 혹은 남침유도설 등의 가능성을 제기한 것이다.

그러나 구소련 및 공산권이 붕괴하면서 그간 숨겨져 있던 기밀문서가 대거 공개되고, 서방측 연구자들이 구소련쪽 인사들의 증언을 들을 수 있게 되자 한국전쟁 연구도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그리고 이런 상태가 전면전으로 발발하게 된 것은 김일성 및 북한지도부의 결심이 큰 작용을 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후 새로운 자료와 증언에 기반해서 한국전쟁의 기원 개정판에선 스스로 자신의 견해를 수정한다. 자신의 생각보다 소련의 지원이나 남침이 훨씬 계획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명확하다고 소견을 밝히면서 기존의 수정주의 관점을 폐기한 것이다.

80년대에 한국 현대사학에 새바람을 불어넣고, 그 논의를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린 것"(그의 의견을 상당부분 비판한 박명림 교수의 견해)에서는 괜찮은 학자다. "6.25는 김일성 독단으로 일으켰다"는 기존의 관념에 반론을 제기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논란이 된 것도 사실이지만.

한국전쟁의 기원으로 동아시아 현대사 해석에서 수정주의 사조를 만들어냈으나, 이후 여러 새로운 이론이 등장하면서 퇴색하였다.[3] 특히 연세대학교 박명림 교수가 1995년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을 출판하면서 한국전이 스탈린-모택동-김일성 3자 합의에 의한 명백하고 계획적인 남침이란 것을 풍부한 사료를 통해서 증명하고, 브루스 커밍스 이래 유행하던 수정주의 사조를 무너뜨렸다.

원래부터 이 양반의 방법론은 철저한 사료를 바탕으로 한 미국식 실증주의이다. 미국인으로서 수천건의 한국어 사료를 섭렵하여 연구한 것은 대단하다. 당시 한국학자 중에서도 그만큼 자료를 수집해서 하는 사람도 드물었다. 엄청난 사료를 섭렵해서 연구를 했기 때문에 어쨌든 많이 인용되는 학자이기도 하다.

논란이 되는 것중에 하나가 김구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것으로, 임정요인들이 해방 이후 귀국하자 김구는 일단의 첩의 무리들과 유급 총잡이들을 데리고 귀국했다.고 깠다. 그리고 송진우 암살배후를 대놓고 김구라고 주장했다. 김구랑 마지막으로 대화한게 송진우라면서...

훗날 김자동은 김구가 송진우 암살 배후인건 우파의 음해라고 했다. 근데 김구는 그 당시에 이승만을 뛰어넘는 강경 보수 스탠스였고[4], 브루스 커밍스는 좌파에게 흔히 인용되는 학자다. 그는 1960년대에 자신이 송진우 사위랑 같이 살았는데, 송진우 유족들도 대놓고 김구가 배후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저 김자동은 한국전쟁의 기원을 번역한 분이시다. 흠좀무

5월 6일 세계의 역사학자 187명이 일본 아베정부의 과거사 왜곡에 항의하는 집단성명을 발표할때 브루스 커밍스도 해당 성명에 동참했다.

10월24일 한국 연구자와 교수들 154명과 함께 한국 교과서 국정화 반대에 동참했다.
  1. 무려 15살 차이다.(...)
  2. 이후 개정판에선 견해가 어느 정도 달라진다.
  3. 1980년대 출간된 해방 전후사의 인식 초판에도 남침유도설 같은 수정주의 관점의 견해들이 대거 수록되었으나, 동시에 당시 대학원생이던 박명림의 "한국전쟁사 쟁점"도 같이 수록되었다.
  4. 이승만은 귀국 후에 자신을 환영하는 박헌영, 여운형 등에게 자신은 공산주의 이념을 존경하며 공산당도 새 조국 건설에 참여하자는 립서비스를 했지만 김구는 그런 것도 없었다. 정치 기술의 차이일지도 모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