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오호십육국시대 동진 vs. 전진의 전쟁. 서기 383년 11월의 일이다. 이 사람과는 관계 없다 Bisu대전이 아님 기적 같은 승리라는 점에서는 닮긴 했다
압도적인 병력 우위를 가지고도 통솔 미스와 작전 설명 누락이 부른 참담한 패배, 통일을 눈앞에 두고 이 싸움 한번에 말아먹고 무너진 전진, 기적 같은 승리를 얻어내고도 더욱 철저하게 개망나니 짓을 해서 같이 망해버린 동진 등. 생각보다 많은 교훈을 주는 몹시 유익한 전쟁이다. 제3자에게는.
승자없는 싸움의 예시 중 하나다.
전쟁 장소인 비수는 검(劍) 이름이 아니라 강(江) 이름이며 삼국시대 오나라와 위나라가 그토록 싸웠던 합비성과 원술이 한때 참칭했던 수춘땅과 멀지 않은 곳이다.
2 발단
전진의 황제였던 부견(337~385)은 당시 천하통일에 가장 근접했던 사람으로, 자신은 저족임에도 불구하고 민족차별을 두지 않았음은 물론 명재상 왕맹을 기용해 성공적으로 부국강병을 이룩, 화북과 서역을 모조리 평정하여 실질적으로 북조를 몽땅 정리했다. 게다가 동진이 점령했던 회수, 양자강 일대, 사천 지방[1]도 이미 점령한 상황이어서 이제 남아있는 거라곤 강남의 동진 하나뿐이었다.
부견은 중원 재통일을 위해 남아도는 국력을 총동원해서 대군을 일으키려 했지만 말 그대로 부하도, 아들도, 동생도, 아내도, 엄마도, 주요 신하들도, 심지어 부견이 존경하던 스님도 다 반대했다. 바로 그 왕맹도 죽으면서 "우리 나라에 있는 한족은 아직 동진을 그리워하고 있고 그 동진은 현재 위아래가 일치단결 되어있으니 괜히 집적대지 말고 선비족 출신으로 계속 폐하께 살랑대는 모용수랑 요장부터 신경 쓰시고 기회 되면 제거해버리십시오"라는 유언을 남겼다.
존재 기간 내내 황제가 귀족들 눈치나 보며 한 순간도 막장이 아닌 적이 없었던 동진의 상황을 생각하면 좀 이상하기는 하지만, 일단 전진에 남아있는 한족들이 오랑캐의 지배를 받는 걸 더 싫어했다는 의미로 생각하자. 그리고 급격한 통일 작업 덕분에 전진 내부에 있는 이민족들이 완전히 동화된 상태도 아니어서 수틀리면 언제든 다시 분열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래도 부견은 왕맹이 죽고 나서 한동안은 왕맹의 유언을 잘 지켰다.
3 전개
부견이 왕맹 사후 7년 갑자기 전쟁을 하려 들자 비서감 주융이 찬성했다. 이 친구가 뭐에 씌였는지 상서좌복야 권익, 태자좌위솔 석월, 양평공 부융, 태자 부굉, 승려 도안, 장부인, 중산공 부선 등 주위에서 죄다 들고 일어나 반대했는데도 "할래할래~ 전쟁할래애~!!" 하면서 주변에 떼를 쓰더니 위에 언급한 관군장군 겸 하남윤 모용수가 "그럼 하죠."라고 맞장구 좀 쳐주자마자 선봉만 25만에 자신이 이끄는 군대까지 모두 87만, 여기에 기타 병력까지 합쳐 100만이 넘는 대군을 구성해 동진에 대거 침략을 감행했다.[2] 역사상 현대 이전에 군대를 일으켜 문자 그대로 백만대군을 찍은 사례는 제2차 여수전쟁 때의 수양제와 이 부견이 전부다. 그야말로 대륙의 기상. 물론 그 이전과 이후에도 백만 대군이라는 묘사 자체는 많이 등장하지만 일반적으로는 과장이 많이 섞여 들어갔거나 단순히 많은 수의 군대를 지칭하는 표현으로 백만 대군이라는 용어가 쓰였다고 보는 편이다. 그러나 비수대전에 동원된 전진의 군사는 과장이 아닌 병력 편제 자체가 100만이라는 숫자를 찍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인류사에서 부견과 수양제를 제외하면 그로부터 천년이 넘어 1차 세계대전 때가 되어서야 백만대군을 볼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실로 놀라운 수치.
이렇게 된 이유는 부견이 자기 생전에 중국 통일을 한 번 해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의외로 통일 작업은 순탄하게 이루어졌고, 남은 국가는 동진뿐인지라 조금만 더 하면 목표 달성이기는 했다. 물론 자기 발 밑이 아직 불안정하다는 문제는 이런 상황에서는 무시되기 일쑤. 아마 자기가 덕을 베풀어서 사람들이 감복했으므로 끝이라 보고, 난세에는 조금만 틈을 보이면 나락으로 떨어진다는 것을 무시한 모양. 실제로 부견이 전사한 후에도 일족이 계속 부견의 의지를 받들어 저항했으며, 나중에 배반하는 모용수나 요장 같은 이들도 양심에 찔렸는지 패전 후에도 즉시 부견의 뒤통수를 치지는 않았다.
한편 북쪽에서 부견이 질량낙하급 인해전술을 시전하니 동진에서도 막긴 해야겠는데, 동진은 이미 문벌귀족의 띵가띵가로 말미암아 국력이 막장으로 치달아있었고, 그나마 동원 가능한 병력을 닥닥 긁어모아보니 8만 명(…) 가량뿐이었다.
절대 우세인 가운데 전진은 대국의 아량을 보인답시고 한족 출신에 양양 태수였던 주서를 보내 항복을 권고했는데, 문제는 이 사람이 엑스맨. 항복은 했을지언정 마음은 동진에 가있었던 그는 바로 전략을 몽땅 누설해버렸고, 동진군은 그걸 기반으로 필승의 전략을 짜기 시작했다. 실로 왕맹이 우려한 그대로였다. 사실 주서의 배신이 매우 위험하긴 했어도 그것을 부견이 눈치채지 못 한다는 보장도 없고, 달랑 전략 누설 좀 했다고 그 이유 하나만으로 부견이 끌고 온 그 거대한 규모의 군대가 허무하게 무너지기도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4 절정
비수를 사이에 두고 양군이 최종결전을 준비하고 있을 때, 동진은 군대를 조오~금 뒤로 물려주면 항복하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부견은 믿지는 않았지만 살짝 후퇴했다가 등짝을 보러 쫓아올 때 왕! 뒤돌아서 비수 한가운데 수장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이 인간이 미쳤는지 후속부대에게 작전 설명을 안 했다(...)
머릿수만으로도 압도적으로 유리한 100만 대군인데 다짜고짜 후퇴하라는 명령이 떨어지자 병사들이 술렁대기 시작한 것은 당연한 일. 여기에 전진의 엑스맨 주서가 "진나라 군대에게 패했다!"는 말을 부하들에게 외치고 다니게 하면서 본격적으로 크리티컬이 터졌다. 터졌다 터졌어 부견이 터졌다 전진의 대군은 질서정연 그런 거 없이 마구잡이로 자체붕괴(…). 여기에 수는 적었지만 기동성과 공격력이 뛰어난 기마대로 군대를 편성한 동진군이 비수를 건너 찔러들어오면서 완전히 관광당했다.
이러한 어이없는 패배는 무전기도 없이 원거리 통신 체계가 갖춰지기 이전, 대규모의 병력을 통솔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잘 나타내주는 것이기도 하다. 통신 체계가 잘 잡힌 현대에서도 급박한 전투 중에 명령 하달이 누락되거나 사령관의 판단 미스로 지휘 체계가 무너져 부대 통솔에 문제가 발생하기도 하는데 하물며, 이 당시에는 말할 것도 없었다.
당장 이 비수대전만 하더라도 동진의 8만 군사가 전진의 100만 군사를 일일히 다 상대해 패퇴시킨 것이 아니고 선봉 기마 돌격으로 동진의 진형이 붕괴되고 패배라는 말에 온 군대의 사기가 무너져 자기들끼리 밟아죽인 것이 더 많았다. 괜히 역사 속의 수많은 명장들과 병법가들이 병력을 통솔하고 지휘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해온 것이 아니다. 또한 부견과 수양제를 제외하면 중국사 뿐만 아니라 인류 역사의 수많은 군주들이 근대 이전에 100만이라는 숫자를 찍지 않았던 것도 인구가 적어서가 아니라 그 많은 병력을 철도와 원거리 통신 체계 없이는 보급과 통솔이 불가능함을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결론은 오히려 너무 많은 군대를 동원했다가 독이 된 케이스.
고우영 선생은 십팔사략을 그리면서 뱀이 갑자기 발악하는 개구리에 깜짝 놀라 머리를 튼 꼴이 되었다고 표현했다. 몹시 절묘한 비유. 하지만 이거 하나 때문에 나라 자체가 막장 테크를 탄 걸 감안하면 이건 머리를 튼 정도가 아니라 아예 머리를 틀려고 했는데 목이 부러져 죽은 꼴이다.
5 결말
전진은 천하통일을 목전에 두고 이 한 방으로 캐망했고, 전쟁하자고 홀로 부추겼던 모용수는 집에 가서 자기 나라인 후연(後燕)을 세웠다. 부견은 자신이 멋지게 낚였다는 걸 깨달았지만 이미 때는 늦었으니… 거기에 왕맹이 조심하라 그리도 충고하던 신하 요장은 독립해서 후진(後秦)을 세웠고, 역시 신하이던 모용홍도 덩달아 독립하여 서연을 세우고 힘빠진 전진으로 틈만 나면 쳐들어왔다.
일시적으로 전진에게 복속되었다가 군사를 준비하던 걸복부에서는 전진의 패배 소식을 듣고 여러 부족을 협박해서 병합해 10여 만 명에 이르는 무리를 이루어 농서 일대를 장악하고 서진을 건국했다.
385년, 서연이 장안을 함락하자 부견은 서쪽으로 달아났으나 후진의 요장에게 포로로 사로잡혔다. 과거에 신하이던 요장이 마음 편하게 그냥 전진 황제나 내놓으면 편히 살게 해준다는 요구를 했지만 마지막 자존심으로 부견은 거절했고, 요장은 코웃음을 치며 이젠 그때와 다른데 고집 부린다고 아까워할 줄 아느냐며 졸병 하나를 불러와 부견의 목을 베게 했다. 그리고 장렬천왕(壯烈天王)이라 시호를 내렸는데, 뭔가 찬양과 비하를 섞은 듯하다.
부견의 핏줄은 대부분 도륙났지만 그나마 부견의 서자인 부비가 뒤를 이어 전진은 겨우 버텼다. 그러나 그도 1년만에 후진에게 패배하고 죽었으며 일족인 부등, 부등의 아들 부숭이 뒤를 이어 즉위했지만 394년 부숭이 서진에게 잡혀 죽으면서 전진은 아예 망했다.
당시 동진의 재상이었던 사안은 승전보가 올 무렵 손님과 바둑을 두고 있었는데, 승전 보고서가 도착하자 한 번 눈으로 훑어보고 조용히 한쪽으로 치우고는 다시 바둑을 두었다고 한다. 손님이 보고서에 뭐라고 써있었냐 묻자 너무도 담담하게 "우리 애송이들이 적을 물리쳤다는구려."라고만 말했다. 당시 동진군의 총사령관인 '사현'은 사안의 조카였고 그 밖에도 사안의 동생, 아들 등이 참전해서 이들을 애송이라 부른 것이다. 그래도 기쁨을 완전히 감추지는 못 해서 바둑돌 쥔 손이 덜덜 떨렸는데, 이를 본 손님이 "나쁜 수로군요."라고 지적하자 사안은 "이 정도에 동요하다니 이 노인이 주책이군요."라며 허허 웃었다고. 손님이 돌아가고 나서야 문턱에 나막신을 부딪혀 굽이 박살나는 것도 모를 만큼 기뻐했다고 한다. 야! 신난다~
동진은 군사를 보내 전진을 공격해 384년에 응양장군 유뢰지가 환성, 상용태수 곽보가 위흥, 상용, 신성 등 세 군을 함락, 양전기가 성고를 점령하고 양주자사 반맹을 격파했다. 경릉태수 조통이 양양을 공격해 형주자사 도귀를 달아나게 하고 전진의 낙주자사 장오호는 풍양을 점령하고 동진에 투항했으며, 사현, 환석현과 함께 원정을 해서 동진의 서주자사 조천을 팽성에서 쫓아내 점령했다.
9월에는 사현이 팽성의 내사 유뢰지를 시켜 전진의 연주자사 장숭을 공격해 견성을 점령하고 하남의 성보들을 모두 귀순시켰으며, 음릉태수 고소가 전진의 청주자사 부랑을 공격해 항복시켰고 동진은 전진을 공격해 연주, 청주, 사주, 예주 등을 평정했다.
그리고 동진은 멋지게 이긴 뒤 더욱 마음 놓고 나라를 말아먹기 시작했다.(…) 효무제가 후궁한테 '넌 이제 나이가 들었으니 내일부턴 탱탱한 애들 끼고 잘란다'라고 농담했다가 열받은 그 후궁이 자던 황제를 베개로 눌러 질식사시켰을 정도였다.[3] 뒷날 동진은 비수대전에서 승리의 주역이던 북부군의 쿠데타로 나라의 기반이 무너졌고, 북부군 사령관 유뢰지(劉牢之)의 부하였던 유유(劉裕)에게 멸망당했다.- ↑ 성한을 동진이 멸망시킨 지 수십 년만에 북조에 빼앗겼다.
- ↑ 더 놀라운 것은 동시에 서역으로도 10만 원정군을 보냈다!
- ↑ 고우영의 십팔사략 평론에서 효무제가 전진을 추격했다면 한족을 중심으로 한 통일국가을 건국할 수 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