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3 2011년 닌텐도 3DS의 발표 때의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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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우치 히로시 | 이와타 사토루 | 키미시마 타츠미 |
"On my business card, I am a corporate president. In my mind, I am a game developer. But in my heart, I am a gamer."
(私の名刺には社長と書いてありますが、頭の中はゲーム開発者です。心はゲーマーです。)명함 속에서 저는 회사 사장입니다. 제 머리 속은 게임 개발자입니다. 하지만 제 마음 속에서는 게이머입니다.[1]
— 2005 GDC에서 [2]
"One of the most overused words in the English language is "unique". That's what all of us want to be, in some level or another, but very few of us truly are. Mr. Satoru Iwata is one who clearly was unique, in the fullest meaning of the word."영어라는 언어 속에서 가장 남용되는 말 중 하나가 "독특하다"(unique)입니다. 우리 모두가 어느 정도 독특하고 싶어하지만, 진정으로 그런 사람은 극소수입니다. 이와타 사토루씨는 진정한 의미에서 독특한 사람이었습니다.
— 레지 피서메이, 2015 The Game Awards에서 #
岩田 聡 / Iwata Satoru
1959년 12월 6일 ~ 2015년 7월 11일
1 개요
2000년대 중반 NDS와 Wii로 세계 게임기시장을 제패한 닌텐도 신화의 주역
어린이뿐만 아니라 여성과 노인들까지도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게임을 지향하여 게임의 대중화에 힘쓴 인물.
닌텐도의 전(前) 사장. 야마우치 히로시를 이어 2000년에 사장이 되었다. 별명은 '야쿠자'인 야마우치 히로시에 이어서 '인텔리 야쿠자'(…)
1959년 12월 6일 홋카이도 삿포로시 출생. 그의 아버지는 한 때 시장직에까지 올랐던 인물이고, 본인 역시 명문 도쿄공업대학 정보공학과 출신의 엘리트다. 어린 시절 HP의 전자계산기에 흥미를 가져 신문배달 끝에 구입해서 프로그래밍을 마스터하고, 대학에 갔을 때는 이미 다 아는 것만 가르치고 있어 시시해질 정도의 실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래서 당시 컴퓨터 고수들이 모인다는 세이부 백화점 전자상가에서 죽치던 와중, HAL 연구소에 대한 소개를 받아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대학 졸업 후 그대로 할 연구소에 취직. 하지만 자그마한 벤처기업이었던 할 연구소가 부모님 성에는 안 찼는지 그의 아버지는 6개월 동안이나 아들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고 한다.
2 상세
생전에 게임은 어렵고 복잡해선 안 된다. 게임은 만인에게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사상을 갖고 있어서 그가 닌텐도의 사장이 된 이후 닌텐도는 저연령층과 고연령층은 물론, 여성에게도 어필할 수 있는 게임을 주로 제작하여 게임인구 확대에 열을 올리는 모습을 보였다. 닌텐도 : 우린 저연령만 노린다는 소리는 한 적이 없어. 다만 젊은 코어 게이머들은 닌텐도의 이런 모습을 딱히 반기지 않아서 그가 취임하고 난 이후의 닌텐도 게임기 유저층 조사를 보면 초등학생층은 매우 두텁지만 이후 점점 줄어들다가 고교생 이후로는 반토막이 나고, 30대 이후 다시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경향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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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으로 양손을 앞으로 뻗으며 "직접(直接)"이라고 말하는 것이 그의 상징. 닌텐도 다이렉트 등에서 자주 써먹는다. 참고로 이걸 사쿠라이 마사히로가 따라하려다 2번씩이나 포기했다(...). 영어 다이렉트 때는 "Directly"라고 한다.
2013년 8월 7일(#)과 10월 29일의 닌텐도 다이렉트에서 # 대합주 밴드 브라더스 P를 소개하기 위해 직접 보컬로이드가 되어 주셨다!
2014년 5월 2일에 공개된 일본 다이아몬드誌와의 인터뷰에서 닌텐도 다이렉트가 해외보다 먼저 일본에서 퍼진 큰 이유 중 하나로 니코니코 동화를 꼽으며, 처음에는 니코동에서 자기가 진지하게 말하는 걸로 꼬투리를 잡거나 조롱하는걸 꽤 복잡한 마음으로 봤지만, 이것도 포함해서 "전달하는 것이 엔터테인먼트로 변화한단 것은 이런 것인가?"라고 느끼게 되고, "이런 일을 하면 즐겁게 해 줄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하며 장난기를 가지고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고.[3](원문/번역) 그 결과, 위에 나온 자신의 레고 3D 모형이나 역전재판 시리즈의 이의있음을 패러디한 일러스트를 채택하는 등으로 바리에이션이 점점 발전하고 있다.
기어이 닌텐도의 E3 2014 홈페이지에서는 대문부터 등장해 직접을 시전한다(...).
E3 2015에서는 인형 버전이 시전하였다(...).
E3 2013년 때 바나나를 들고 있는 모습도 유명한 짤이다. 2015년 때 또 인형으로 재현하였다
영미권에서는 게임의 출시일이 미루어지거나 지연될 때 하는 말 "Please understand...(이해해주세요...)"도 유명하다.
3 HAL 연구소
대학 시절 아르바이트로 HAL 연구소에서 프로그래밍을 하다가 졸업 후 정식 입사. 당시부터 뛰어난 프로그래밍 실력으로 사내는 물론 닌텐도에서도 유명했다는 모양이다. 당시 패미컴의 CPU 6502를 제대로 다룰 줄 아는 프로그래머가 적었는데, 이와타가 평소 만져왔던 기기가 6502 였던 것은 큰 행운으로 작용해서 패미컴용으로 이식한 벌룬 파이트가 아케이드용 보다도 더 매끄럽게 움직였기에 오히려 닌텐도에서 배우러 왔을 정도. 당시의 노하우를 슈퍼 마리오의 수중 스테이지에 적용했다고 한다.
"프로그래머는 'No'라고 말하면 안된다"는 지론을 갖고있어서 기획서에 적혀있는대로 구현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어도 '이것은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말을 하기 보다는 최대한 원 기획서에 제시된 것과 가까운 모양으로 프로그래밍하는 방법을 연구하였다고 한다. 실제로 그동안 다른 회사라면 구현하기 힘들다며 반려되던 여러가지 기획들을 성공적으로 구현시켰다는 듯. 이처럼 완전히 프로그래밍 덕후(…)라 경영직에 올라서 일선에서 멀어졌을 때도 취미삼아 프로그래밍을 하려고 휴일에 혼자 출근했을 정도라고 한다.
1992년에는 HAL 연구소가 파산해버리고, 닌텐도의 경영지원을 받게 된다. 이때 닌텐도의 야마우치 사장이 HAL 연구소를 받아주는 조건으로 내놓은 게 '이와타 사토루를 사장 자리에 앉힐 것'이었다고. 결국 그렇게해서 당시 개발 이사였던 이와타는 HAL 연구소의 대표이사로 취임. 하지만 사장임에도 프로그래밍에 빈번히 참여하며(!) 여러가지 게임 개발에 관여했다.
여담으로 MOTHER 2의 메인 프로그래머였는데 내부 (프로그램) 문제로 개발중지가 된 상태에서 그는 프로그래머 겸 프로듀서가 되어 "지금 이 상태로 계속하면 2년은 걸리지만, 처음부터 다시 내 말대로 하면 반년이면 완성한다"고 발언하였고, 실제로 개발기간을 단축하기 위한 각종 개발툴을 먼저 만들어 도입했다고 한다. 또한 포켓 스타디움의 이식시에는 전투 프로그램의 해석을 일주일만에 혼자 끝났다다거나...아무튼 당시의 일화를 보면 외계인 수준의 코딩실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그 와중에 MOTHER 2에 색다른 장치를 하게 되는데 그 자세한 내용은 여기를 참조. 그 색다른 장치는 절대 기그가 아니다
반면 MOTHER 3의 프로젝트 중지를 결정한 것 또한 이와타이기도 하다. 그런데 프로젝트 재개의 계기를 만든 사람도 이와타(...). 그리고 2006년에 MOTHER 3를 발매할 수 있게 해준다.
4 닌텐도
2000년에 야마우치 사장의 스카우트로 닌텐도에 기획실장으로 입사. 그리고 2002년에 물러나는 야마우치 사장의 부탁으로 사장이 되었다. 사실상 HAL 연구소의 사장으로 앉힐 무렵부터 후계자감으로 찍어놨던 모양. 왕자교육(…)
사장이긴 하지만 야마우치가 퇴임하며 회사를 이사회가 경영하는 방식으로 바꾸고 간 덕분에 회사를 좌지우지하던 야마우치만큼의 영향력은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적극적으로 대외활동을 하며 미야모토 시게루와 함께 닌텐도의 광고탑으로 활동중.
사장 취임후 NDS & Wii의 폭발적 성공 때는 비교적 조용한 경영을 하였으나, 시장 상황이 바뀐 3DS & Wii U 때는 전면적으로 나서 마케팅에 열을 올리는 중. 사장으로서 직접 닌텐도 다이렉트에 출연하여 뽐내는 예능감은 유카와 전무에 못지않게 강력하다(…).
4.1 사장이 묻는다
이와타 사장이 직접 닌텐도나 관련 기업의 크리에이터를 상대로 게임 개발의 비화라든지 경험을 인터뷰하는 항목. 한국 닌텐도의 홈페이지에도 일부 번역되어, 올라오고 있다. 가깝게는 직계 하부 팀에게 가서 묻기도 하고, 멀게는 게임센터 CX 팀에게 가서 물어본 적도 있었다. 과장사장 특집으로 게임 개발의 뒷이야기를 듣고 벌룬 파이트에 도전하기도 하는 등 양쪽의 컨셉을 적절하게 믹스한 느낌.
5 별세
<사장이 묻는다> 한 편 한 편이 그가 별세한 후에도 친애하는 우리의 동료, 친구이자 멘토인 이와타 사토루를 생각나게 한다.
- 닌텐도 <사장이 묻는다> 페이지
ScrewAttack의 추모영상 | IGN의 추모영상 |
그러나 이러한 예능감을 뽐내며 친근한 사장으로서 유저에게 접근하던 모습은 2015년 7월 11일을 기점으로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었다.
2014년 6월 건강진단에서 담관암이 발견되어 수술을 받았다. 수술 후 요양을 거쳐 동년 10월 경영방침 설명회를 통해 복귀했는데, 이후 닌텐도 다이렉트에 불참하거나 살이 빠진 모습으로 등장하는 등 병세가 나빠졌다. 2015년 E3 때는 조금 좋아진 모습을 보여 팬들을 안심시켰으나, 결국 같은 해 7월 11일 세상을 떠났다. [4] 후계자로는 미야모토 시게루, 다케다 겐요가 거론되었으나, 최종적으로는 키미시마 타츠미로 결정되었다
갑작스럽게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전세계의 많은 게이머들의 추모가 이어지고 있으며 트위터에서는 #ThankYouIwata란 해쉬태그가 월드 와이드 트랜드에 올라가기도 했다.(#) 경쟁사를 비롯하여 많은 게임 회사에서도 애도를 표하였고(#), 마르쿠스 페르손 등 게임계의 유명한 인물들도 애도를 표하였다. 동년 진행된 Games Done Quick에서 크로노 트리거관련 Donation Bid중 크로노의 이름을 무엇으로 할 것인가를 정하는 투표에서 압도적인 차이로 Iwata가 1위를 차지했다.
Wii U용 게임 스플래툰 내의 스플래툰 광장에서는 이와타 사장을 추모하는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다.(#) 더 게임 툰에서도 그를 추모하는 만화를 올렸다.
한국에서도 부고와 관련된 여러 기사가 나왔으며 그중에서도 한국일보에서 대략적인 발자취를 보도한 기사를 내기도 했다. "게임의 본질에 충실하라" 닌텐도 신화 이룩한 영원한 게이머
여담으로 2015년은 닌텐도의 대표적인 게임 중 하나인 마리오 시리즈가 30주년을 맞은 해이다.
갑작스런 별세로 코드네임 NX에서 'NX'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없게 되었다. 본 밖에 모르기에 그의 뒤를 이은 키미시마 타츠미 씨도 모른다고. 그가 남긴 기록이 발견되지 않는 한, NX란 이름을 함부로 정하기 난해해서 다른 이름으로 정해질 가능성도 있다. 최종적으로는 닌텐도 스위치로 명칭이 확정되었다.
6 관련 문서
- ↑ 일본어 원문을 직역하면 '제 명함에는 사장이라고 적혀 있습니다만, 머릿속은 게임 개발자입니다. 마음은 게이머입니다.' 가 된다.
- ↑ 영상
- ↑ それからニンテンドーダイレクトというものが、海外より先に日本で世の中に広がった大きな理由のひとつに「ニコニコ動画」の存在があると思っているんです。「ニコニコ動画」では、自分が大真面目にしゃべっているところを、いじられたりからかわれたりするわけで、最初は私も正直なところかなり複雑な気持ちで見ていたんですけど、でもこれも含めて「伝えることがエンターテインメントに変わるとはこういうことか」と感じるようになり、そのうちに「こんなことをすれば面白がってもらえるのではないか」と茶目っ気をもって考えられるようになってきたんです。
- ↑ 사실 E3 2015 때도 인형극으로 진행해서 본인이 직접 등장하진 않았는데, 아무래도 사람들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얼굴을 숨긴 듯하다.
- ↑ 벌룬 파이트와 마찬가지로 메인 프로그래머로 참여했다. 게임 전반에 걸친 치밀한 불법복제 엿먹이기 시스템을 직접 고안한 것으로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