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전도의 굴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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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청황제공덕비
被擄子女望見, 號哭皆曰: "吾君、吾君, 捨我而去乎?" 挾路啼號者, 以萬數。

사로잡힌 자녀들이 바라보고 울부짖으며 모두 말하기를,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를 버리고 가십니까." 하였는데, 길을 끼고 울며 부르짖는 자가 만명을 헤아렸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30일 경오 2번째기사

1 개요

성하지맹(城下之盟 : 적군이 성벽 아래까지 쇄도해 온 지경에 이르러 어쩔 수 없이 맺게 되는 굴욕적 맹약)

1637년 2월 24일(인조15년 1월 30일) 조선 인조병자호란으로 청군이 한양에 침입해 오자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청나라에게 대항하였으나, 청의 공격을 이기지 못하고 패배하여 끝내 청나라와 굴욕적인 강화를 맺은 사건. 실록의 기록(효종, 현종 등)을 보면, 정축년에 에서 내려왔다는 의미로 정축하성(丁丑下城)이라고 했다. 치욕의 역사인 만큼 상당히 완곡하게 표현한 편.

경술국치와 함께 한반도 역사상 가장 치욕적이었던 국치(國恥) 중의 하나였다. 인조의 지나친 편향외교 및 친명배청(親明排淸) 성향, 그리고 지나친 의명(依明, 명에 의지하는 것) 성향이 불러왔던 오판의 산물이기도 하다.

삼전도(三田渡)는 현재의 서울특별시 송파구 삼전동 부근에 있던 하중도의 나루였다. 지금 그곳은 개천을 메워 섬이 아니게 되었다. 이 사건을 적어둔 비석인 삼전도비가 원래 세워진 위치와는 다른 위치에 남아있었는데, 21세기에 이런 치욕적인 역사를 보자니 단단히 빡친 시민이 페인트 테러를 벌인 적이 있었고 원래 있었던 위치라는 롯데월드 근처로 돌아갔다고(인조 항목 참조).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그 형식은 아래와 같다. '상(上)'[1]은 인조를 의미한다.

용골대(타타라 잉굴다이) 등이 인도하여 들어가 단(壇) 아래에 북쪽을 향해 자리를 마련하고 상에게 자리로 나가기를 청하였는데, 청나라 사람을 시켜 여창(臚唱: 의식 순서를 소리내어 읽는 것)하게 하였다. 상이 삼궤구고두의 예를 행하였다.

용골대 등이 상을 인도하여 진의 동문을 통해 나왔다가 다시 동쪽에 앉게 하였다. 대군(大君) 이하가 강도(江都: 강화도)에서 잡혀왔는데, 단 아래 조금 서쪽에 늘어섰다. 용골대가 한의 말로 상에게 단에 오르도록 청하였다.
[2]은 남쪽을 향해 앉고 상은 동북 모퉁이에 서쪽을 향해 앉았으며, 청나라 왕자 3인이 차례로 나란히 앉고 왕세자가 또 그 아래에 앉았는데 모두 서쪽을 향하였다.
또 청나라 왕자 4인이 서북 모퉁이에서 동쪽을 향해 앉고 두 대군이 그 아래에 잇따라 앉았다. 우리 나라 시신(侍臣)에게는 단 아래 동쪽 모퉁이에 자리를 내주고, 강도에서 잡혀 온 제신(諸臣)은 단 아래 서쪽 모퉁이에 들어가 앉게 하였다.
차 한잔을 올렸다. 한이 용골대를 시켜 우리 나라의 여러 시신(侍臣)에게 고하기를, "이제는 두 나라가 한 집안이 되었다. 활 쏘는 솜씨를 보고 싶으니 각기 재주를 다하도록 하라." 하니, 종관(從官)들이 대답하기를, "이곳에 온 자들은 모두 문관이기 때문에 잘 쏘지 못합니다."하였다.
용골대가 억지로 쏘게 하자 드디어 위솔(衛率) 정이중(鄭以重)으로 하여금 나가서 쏘도록 하였는데, 활과 화살이 본국의 제도와 같지 않았으므로, 다섯 번 쏘았으나 모두 맞지 않았다.[3]
청나라 왕자 및 제장(諸將)이 떠들썩하게 어울려 쏘면서 놀았다. 조금 있다가 진찬(進饌)하고 행주(行酒)하게 하였다. 술잔을 세 차례 돌린 뒤 술잔과 그릇을 치우도록 명하였는데, 치울 무렵에 종호(從胡) 두 사람이 각기 개를 끌고 한의 앞에 이르자 한이 직접 고기를 베어 던져주었다. 상이 하직하고 나오니, 빈궁(嬪宮) 이하 사대부 가속으로 잡힌 자들이 모두 한곳에 모여 있었다.
용골대가 한의 말로 빈궁과 대군 부인에게 나와 절하도록 청하였으므로 보는 자들이 눈물을 흘렸는데, 사실은 나인(內人)이 대신하였다고 한다.
용골대 등이 한이 준 백마에 영롱한 안장을 갖추어 끌고 오자 상이 친히 고삐를 잡고 종신(從臣)이 받았다. 용골대 등이 또 초구를 가지고 와서 한의 말을 전하기를, "이 물건은 당초 주려는 생각으로 가져 왔는데, 이제 본국의 의복 제도를 보니 같지 않다. 따라서 감히 억지로 착용케 하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정의(情意)를 표할 뿐이다." 하니, 상이 받아서 입고 뜰에 들어가 사례하였다.[4]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30일 경오 2번째기사

이를 보면 청나라 복장을 입고 절한 건 아니고, 뒤에 청의 복장을 받아 입은 듯하다.

누가 어떤 복장을 입건 신경 쓰지 않는 현대에서는 의미를 크게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이때 인조가 청나라 복장을 받아 입었다는 것 자체가 큰 의의가 있다. 그 까닭은 옛날 사대교린 관계에서 의복의 제도는 천자가 결정하여 제후와 신하, 백성들에게 내렸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신분의 고하귀천에 따라 의식주의 제도를 모두 법도로 정했으며, 이는 천자가 지배자로서 신민의 사생활조차도 간섭하고 통솔할 절대적인 권리가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상징이었다. 이 때문에 관복을 내려주는 것은 다른 나라를 자신의 영향권으로 집어넣었다는 증명이다.

즉, 명나라의 의복 제도를 따르던 조선의 왕이 청나라 황제가 내려준 의복을 입었다는 것은 조선이 명의 영향권을 벗어나 청의 영향권 안에 들어간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게 만드는 정치 퍼포먼스였다. 중국변발이나 구한말의 단발령의 반발이 강력했던 것도 당시에는 머리 모양도 이렇게 엄격한 의복 복제의 일부로 봤기 때문이다.

게다가 인조는 곤룡포가 아닌 평민의 복장인 남염의(藍染衣)를 입었다.[5] 죄인이라 용포를 입을 수 없다는 용골대의 의견과 용포는 명나라에서 하사한 의복이기 때문에 더더욱 입을 수 없었다. 항복 예가 끝나고 명나라에서 내려온 고명과 의복 장구류는 죄다 반납해야 했다. 하지만 조선 조정에선 피란 중에 잃어버렸다고 뻐팅겼다. 패기라면 패기, 만용이라면 만용(...).

원래 법도대로라면 이 시점부터 인조는 명나라 제도인 익선관, 곤룡포를 버리고 청나라의 사발형 관모와 청나라 관복인 망수의를 입어야 했지만, 우리가 알다시피 조선 왕들은 그 후로도 명나라식 익선관, 곤룡포를 유지했고 청나라 사신들도 별로 문제삼지는 않았다.

2 삼궤구고두례(三跪九叩頭禮)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라고도 칭해진다.

삼전도에서 청태종에게 절하면서 머리를 바닥에 마구 찧어 이마에서 피가 흘렀다거나 하는 이야기는 사실 삼궤구고두례라는 당시 조선에서 생소한 예[6]인 데다가 치욕으로 여겼기 때문에 나온 오해나 와전으로 보이는데, '3*9=27번 머리통 박치기(...)로 피가 철철 났더라'는 식의 후일담에 사료상의 근거는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극적인 걸 좋아하는지라... 그냥 절 몇 번하고 끝났다는 것보다는, 27번 머리통 박치기에 피 철철 흘리는 쪽이 훨씬 더 재밌긴 하다 청나라 때 예법으로 봐서는 1번 절하면 3번 머리를 조아리고 3회 반복으로 추정한다.[7] 적어도 '삼궤구고두례'라는 이름을 치른 것은 분명하지만 조선에서는 생소했기 때문에 조선에서 처음으로 예를 올릴 때 제대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실록에도 기록이 없어서 지금으로서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전후 사정으로 봐서 일반적인 삼궤구고두례라고 추정한다. 또한 이것은 패자가 승자한테 올리는 의식이 아니라 황제에게 올리는 '신하의 예'이다. 그 전까지 청을 황제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명나라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청을 섬기겠다는 신하의 예를 올린 것이지 불필요한 굴욕을 주는 목적은 아니다.

  • 150여년 뒤인 건륭제 시절 1792년 매카트니는 건륭제 앞에서 삼궤구고두례를 거절했는데 서양에선 두 무릎을 꿇는 건 신 앞에서 기도나 속죄할 때만 하는 것으로 서양에서는 자기 나라 임금 앞에서조차 한 무릎만 꿇는다고 항변했지만 청에선 받아들이지 않았다. 청나라에도 알려진 러시아차르는 카자크 기병들이 사열할 때 차르 앞에서라도 말에서 내리지 않는다고 우겼지만 역시 소용 없었다. 서양에선 또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여러 번 조아리는 것은 미개한 동양의 풍속으로 여겼다. 혹자가 영국인이 자기 나라 왕을 황제로 여겨서 거부한 건 절대 아니다. 서양에선 마땅히 황제가 "신의 대리자(천자)"이며 자기 나라 왕보다 높은 대상이라는 인식 자체도 없다. 중세 이후 황제는 원칙적으로 세습이 아니라 다른 제후들이 선출하는 것이 전통이었다. 또한 중세시절 예법도 황제나 왕을 봐도 고개를 1번 크게 숙이거나 한 무릎을 꿇는 것이 전부였다. 귀족이나 기사들은 말 위에서 칼을 빼들어 경례하거나[8] 말 채찍을 가슴 방향에 두 손으로 들어서 경의를 표하는 정도.


이 예법이 문제임은 첫째로 조선과 청은 서로 형제의 예, 즉, 청사고에 나오는 내용을 그대로 믿는다면 황제가 "조선은 형제의 나라"라고 부르며 동등한 맹약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반면 조선은 인조가 "명은 아버지와 같은 나라이므로 배를 내어줄 수 없다"라는 말로 "형제의 나라로서의 상의"에 답함으로서 공식적으로 청 황제보다 명 황제가 위에 있다고 찍어 말한 탓이다. 이는 청의 황제를 천자로 인정하지 않음을 공식적으로 언급한 것이므로 청 황제가 받은 항복 의식의 일부가 삼궤구고두례를 한 것은 받는 것 자체에 "청 황제가 천자이며 조선이 청에 조공을 바치는 군신 관계"임을 공식화한 것이다. 청 황제가 공식적으로 명나라가 조선의 왕을 봉할 때 내리는 국책과 같은 것들을 바치고 청의 연호를 사용하라 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중국 사극에서 봐도 시간분량상 많이 나오진 않지만 삼궤구고두례는 말 그대로 3번 절하고 9번 조아리는 뜻이다. 이것이 엄청난 치욕은 아니니, 황제 앞에선 황제의 형이나 숙부 세습친왕이라도 삼궤구고두례(三跪九叩頭禮)를 펴야 했다. 황태자[9] 앞에서도 손윗 항렬, 백부, 숙부나 형제들이나 종친, 친왕이라 할지라도 이궤육고두례(二跪六叩頭禮)의 예를 올려야 했다.

조선왕이라고 해서 명나라 사신이 와서 칙서를 반포하거나 연초에 망궐례를 할 때 북경 쪽으로 절하고 고개를 조아리는 예는 당연히 했기 때문에 예를 올린 대상이 오랑캐라서 치욕이지 삼궤구고를 해서 치욕으로 여긴 것이 아니다.

애초에 인조는 성 안에서 청나라 사신의 감시 하에 제단을 쌓고 황제가 있는 북쪽으로 하면 안되냐고 퉁치려다가 거절을 겪고 한 것이라 아예 할 마음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또한 외교문서에 칭신(稱臣)하는 건 남한산성에 쫓겨들어가고 나서 알아서 조선에서 해줬기 때문에 항복은 애초에 했었고 청에서는 황제가 직접 온 것을 들어서 항복을 하려면 제대로 예를 올리라고 지시했다. 조선에서는 대충 퉁치려고 하다가 힘도 밀리고 이미 항복했다며 봐달라고 몇십 일 졸라놓고 예는 피하겠다면 논리적으로도 데꿀멍이라 끝내 직접 나와서 삼궤구고두례를 올렸다. 어쨌든 문서나 제단을 쌓고 하는 걸로 퉁치려다가 직접 나가서 금수 취급하던 오랑캐한테 직접 신하 인증을 했으니 대망신이라 굴욕으로 여긴 것.

이것을 영상화했던 MBC 사극 드라마 조선왕조실록에선 유인촌이 맡은 인조가 절하는데 3번씩 3번 총 9번 절하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그리고 그 다음회를 마지막으로 조선왕조 500년은 일차적으로 막을 내렸다. 그 다음해 인현왕후를 시작으로 후반기가 나왔다.


그 후 실로 오랫만에(...) 2013년작 JTBC 사극 궁중잔혹사-꽃들의 전쟁에서 재현했다. 여기서는 이덕화가 인조를 맡았는데 꽤나 험하게 굴린다. 남한산성을 나올 때부터 용골대가 가마에서 안 내리면 쏴죽인다고 하질 않나, 곤룡포 입고 눈밭 걸어서 삼전도까지 걸어가질 않나, 높은 단 위에 오른 청태종 앞에 나아가면서 한 단씩 올라가면서 삼궤구고두례를 하는 등 꽤나 험난하다. 물론 이는 극적인 과장이라고 염두에 두며 봐야겠지만. 일각에서는 인조를 험하게 굴려서 고거 쌤통이다 했다 카더라

여담이지만 옛날 삼전도비엔 인조가 무릎 꿇고 절하는 동판 부조가 있었는데 그것은 1983년 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묘사의 모습이 사실과 맞지 않고 문화재적 가치가 없다고 하여 이미 철거했다. 2ch 같은 곳이 혐한의 재료로 노골적으로 써먹는 중. 또 문화재의 역사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 부조가 당대에 나왔다고 착각하는 경우도 있어 문제가 많다. 헷갈리지 말자.

3 인조의 의명(依明) 및 친명배청(親明排淸) 정책

인조는 16대 왕으로 즉위하자마자 전왕 광해군의 명청(明淸) 평행의 중립외교를 파기하고 확고한 의명 및 친명배청 정책을 고수하며 편향적 외교를 추구해왔다. 또 명나라를 은국(恩國, 은혜로운 나라)이자 상국(上國)으로 받들며 조명(朝明) 우호관계를 강화하는 반면 청(淸)에는 명(明)을 위협하고 멸망시킬 도덕도 예의도 없는 패륜의 나라이자 오랑캐들의 나라라고 비방하며 청을 배척하는 외교책을 폈다. 또한 명(明)이 청(淸)으로부터 위기에 처하면 형제국으로서 도울 것이라고 표방하고 명과의 맹방(盟邦) 관계를 과시하는 등 청을 자극하는 수준으로 갔다.

또 전왕 광해군의 중립외교는 폭군의 잔재가 담겨있는 정책이라며 과감히 파기하고 상국과 오랑캐 따위와 평행을 간다는 것이 치욕적이라 생각하며 상국을 무시하는 처사라고 하여서 광해군의 중립외교를 비판도 하였다.

4 삼전도의 굴욕 시즌 2

거의 알려져 있지 않지만 현종조에 비슷한 일이 있었다. 당시 청은 조선인의 월경 문제를 매우 민감하게 반응했는데 이는 만주가 청의 발상지라는 성지로 추앙받았던 것과 병자호란으로 복속된 소위 '신하국'이 지켜야 할 최소한의 선으로 간주해서였다.

그러다가 엄금하고 있는 화약의 원료인 유황을 몰래 밀수한 일이 발각되고 병자호란 때 청나라로 잡혀갔던 안추원이란 남자가 탈출하여 조선으로 넘어오는 사태가 있었다. 조선 조정은 원칙대로라면 이를 청으로 돌려보내야 했지만[10] 조선은 차마 그럴 수 없다고 안추원을 고향으로 보내주었다. 그런데 병자호란이 끝난 지가 어언 27년이 지난 뒤라 부모고 가까운 친지들이고 다 죽은 뒤였고 이웃들은 오히려 그를 적대시했다. 실망한 그는 도로 청으로 돌아갔는데 청군에게 잡혔다. 그런데 그가 조선 조정에서 자신을 돌려보내지 않았다라 불면서 죽으려면 혼자 죽지[11] 청나라가 이것을 공식 문제로 삼았다.

조선은 청 사신에게 막대한 뇌물을 주면서 어떻게든 무마해보려고 했다. 과거에 의주 사람들이 청 국경을 월경하여 산삼을 캐고 목재를 팔았을 때도 청이 난리를 치자 청 사신에게 막대한 뇌물을 주어 의주 사람들과 도강증을 내준 책임자 의주 목사의 목숨을 구한 전례를 따른 것이다. 그러나 청 사신은 뇌물을 뇌물대로 받아놓고도 책임이 있는 대신들을 죄다 죽일 것을 요구했다. 이에 현종이 "최종 책임은 나에게 있으니 내가 황제폐하께 사죄하지 않을 수 없다"라면서 청나라 황제가 있는 북쪽으로 무릎을 꿇고 절했다. 그 다음에 현종은 이 어찌 대신을 죽일 일이겠냐며 이의를 제기했고 이를 청 사신이 수락하여 은으로 벌금을 내 무마했다.

효종 초에 김상헌의 사주를 받은 대신들이 친청파 대신들을 마구 죽인다는 소문에 청이 발끈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도 실상은 섭정왕 도르곤이 조선 처자를 아내로 맞고 싶어서였고 총책임자 영의정 이경석과 예조판서 조경을 몇 달 연금시켜 끝맺었다.
  1. 실록에서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상'이 당대 임금이라고 보면 된다. 금상(今上)과 같은 의미.
  2. 유래는 몽골의 . 청 태조 누르하치가 몽골을 복속시킨 뒤 그들의 지배자라는 의미로 칸을 칭하였다. 여기서는 청나라 황제인 청 태종을 가리킨다.
  3. 유교의 6예중 하나로 활쏘기가 있었던 걸로 보면 정말로 문관이어서 활을 못쏘지는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조선시대 사람들은 남녀노소 모두 활을 즐겨 쏘고 잘 쏘았다는 기록도 있다. 다만 항목에서도 알수 있듯이 만주활과 국궁은 꽤나 차이가 있다. 어쩌면 이를 알고 청나라 쪽에서 망신을 주려고 일부러 시켰을지도...
  4. "이제 보니 같지 않다" 라는 표현을 썼지만 용골대는 정묘호란 때부터 뺀질나게 조선 관리들을 상대해온 일종의 조선통이었다. 아니 꼭 용골대가 아니어도, 청나라 쪽에서 조선의 의복이 청나라와 다르다는 것을 몰랐을리 없다. 실록이 완곡하게 표현했거나, 청태종이 인조를 조롱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 사실 후자가 확실하다.
  5. 아래 영상에 나온 꽃들의 전쟁은 이 고증을 보기 좋게 어겼다. 이걸 제대로 고증한 사극은 추노.
  6. 명나라식 예법은 오배삼고지례(五拜三叩之禮)이다.
  7. 영화 마지막 황제에서 푸의(선통제)의 등극 장면에서도 나온다.
  8. 국군의 날에 사관생도들이 예도로 하는 경례를 연상하면 좋다.
  9. 청나라 시절엔 강희제 시절 37년동안 재위하다 폐위된 2황자 윤잉이 유일하다.
  10. 실제로도 청의 항의가 극렬하여 몇 명 잡아다 보낸 전적이 있었다. 조선인 포로의 유일한 합법적 속환 방식은 돈으로 사오는 것인데 개념 없는 양반 사대부들의 돈지랄로 조선인의 몸값이 엄청 올라서 많은 백성들은 친지가 노예로 팔리는 것을 구경만 해야 했고, 여기에 간신히 돌아온 여자들의 환향녀 문제까지 터지면서 역사에 한 추악한 단면을 남겼다. 야사 중에는 평생을 별려가며 청을 오가면서 처음엔 어머니를, 그 다음엔 아내를 사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
  11. 사실 전에도 1번 잡힌 적이 있었는데 그땐 자자형을 받았다. 2번이나 잡혔으니 엄한 벌은 뻔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