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타라 잉굴다이

타타라 잉굴다이
Tatara Inggūldai
他塔喇 英俄爾岱(龍骨大)

1596년~1648년 2월 24일

청나라 개국시기의 군인이자 외교관, 재무관, 행정관. 만주족으로 타타라(Tatara, 他塔喇) 씨족의 사람이며, 팔기(八旗) 중 정백기(正白旗) 출신이다. 조선에서는 용골대(龍骨大), 명나라에서는 영아이대(英俄爾岱), 영고이대(英固爾岱) 등으로 음차해 놓았지만 본래의 만주어 발음은 '잉굴다이'가 맞다.[1]

1 소개

명나라 만력 24년에 태어났으며, 이재와 외교에 밝아 청태조 아이신기오로 누르하치청태종 아이신기오로 홍타이지를 따라 명과의 전투, 몽골 원정, 조선 침공 등에서 많은 활약을 했다. 청나라 순치 5년 2월 24일에 병으로 죽었다.

실제로는 조선과의 외교 교섭을 자주 맡았던 것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정치, 외교, 행정, 재정 관리 수완도 뛰어났다. 시키는 일은 뭐든지 다했고, 뭐든간에 청태종의 기대를 200% 만족시켰다. 그는 뛰어난 외교적 재능을 발휘하여 청태종은 대신들 앞에서 "육부의 여러 신하들 중에서 잉굴다이는 있는 힘을 다하여 부서의 업무를 처리하고, 일처리가 분명하여 짐이 아주 좋아하고 인정한다. 나머지 각부의 대신들 중에서는 힘을 다하여 일처리를 하지 않는 자들이 많다."라고 하기도 했다.

청태종은 이런 타타라 잉굴다이를 크게 신임했는데 참수를 당할 일이 발생하면 1회에 한해서 면제를 받을 수 있는 권한까지 부여했다. 그러나 정작 잉굴다이는 살아생전에 참수면제권을 단 한번도 사용한 적도 사용할 일도 없었다.

2 일생

잉굴다이의 집안은 대대로 현재의 랴오닝성 푸순시 동남쪽에서 거주했으며 그의 조부가 누르하치에게 귀순한 이후 정백기에 예속되었다. 잉굴다이는 청년시절에 매우 용맹하여 니루이 어전(niru-i ejen, 牛祿 額眞)[2]으로 승진했으며, 누르하치의 치세 동안 중요한 전투에 계속 참전하였다.

2.1 장수로써의 면모

그는 1616년에 누르하치를 따라 현재의 랴오닝성 톄링시를 공격했고 명과 몽골의 장수들을 죽이는 공을 세운 적이 있으며 1621년에는 랴오양, 묵던(Mukden, 현재의 랴오닝성 선양시) 전투 때 전공을 세워 유격(遊擊)으로 승진한 후 다시 참장(參將)까지 했었다. 같은 해 12월 사고 때문에 비어(備禦)로 강등되었다.

하지만 잉굴다이는 이에도 불구하고 계속 노력하여 삼등유격(三等遊擊, 1623년),삼등참장(三等參將, 1625년)[3]까지 올랐으며 1629년에 청태종이 대군을 이끌고 명나라의 수도 베이징을 기습할 당시 잉굴다이도 함께 참전, 현재의 허베이성 탕산시의 한 성에 머물면서 절반은 부상병인 겨우 800명에 불과했던 수비군으로 명의 대대적인 공세를 막아냈고, 이어서 반격에도 성공하는 큰 공을 세웠다.

1634년, 차하르의 나머지 인원들을 찾아 청의 세력 하에 흡수하기 위해 감행한 청태종의 정벌에 동참했다. 그해 6월, 청군은 내몽골을 지나게 되었는데, 잉굴다이와 기오로 부르기(Gioro Burgi, 覺羅 布爾吉)는 병력 2천 명을 이끌고 정찰을 나갔다. 도중에 이들은 차하르의 한 무리와 만나게 되는데, 장정 200명을 죽이고 부녀, 아이 140명을 획득하고 낙타, 말, 소, 노새, 양 등 600여 마리를 얻어서 청태종으로부터 칭찬을 받는다. 이어 청군은 만리장성을 넘어 산시성(山西省) 동북부의 우타이산(山) 인근에 이르렀고, 50여 일 간 약탈을 자행하였다. 이런 도중 차하르의 나머지 무리들이 속속 투항했는데, 잉굴다이는 이들을 안치하는 업무를 맡았다.

1641년 8월, 잉굴다이는 저명한 쑹산 전투에 참가했다. 이 해 7월, 명나라의 계료총독 홍승주(洪承疇)는 13만의 군대를 이끌고 있다가 진저우에서 포위되었다. 도르곤이 명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불리하여 퇴각했고, 청군의 병마가 많이 다쳤다. 8월 초, 잉굴다이는 명을 받아 도르곤을 도우러 갔다. 이때 청태종도 친히 전선에 나와서 지휘를 했는데, 그는 홍승주와 신속하게 결전을 벌이고자 했다. 그러나 잉굴다이는 이 방안이 좋지 않다고 생각했고, 도르곤, 호오거 등과 함께 청태종에게 건의하였다. 결국 청태종은 이들의 의견을 받아들였고, 포위전에 돌입하기로 하였다. 오랬동안 포위되어 양식이 떨어진 명군은 결국 패배하였고, 홍승주는 포로가 되었다. 이때의 싸움에서도 잉굴다이는 군의 선봉에 서서 큰 활약을 하였다.

마침내 청군이 산해관에 들어갔을 때, 잉굴다이는 병력을 이끌고 명군의 20만 보병, 기병을 무찔렀다.

잉굴다이는 자신의 충성과 공로로 청태종에게 중용되었고, 특수한 대우를 받았다. 1643년 7월, 청태종은 잉굴다이의 수하들 중 100명까지 인삼을 채굴할 수 있도록 하는 허가를 내렸다. 허가받은 인원 수가 공신들 중에서 두 번째였다. 이 해에 호부승정은 호부상서로 고쳐졌는데, 잉굴다이가 호부상서를 맡았다.

2.2 조선 침공

청태종의 즉위 이후에도 그는 뛰어난 재능 덕택에 정치, 군사의 여러 방면에서 임무를 맡았다. 1627년에는 조선과의 형제의 맹을 맺는데 파견되었다.[4] 같은 해 5월, 잉굴다이는 부장(副長) 유흥조(劉興祚)[5]와 함께 조선에 사신으로 가서 원창군(原昌君)을 귀국시켰고, 청태종에 대한 인조의 맹세를 이행하라는 국서를 전달했다.

또 같은 해 12월, 청태종은 명의 경제봉쇄에서 벗어나고 물자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잉굴다이를 다시 조선에 파견하여 무역 문제를 협의하게 하였다. 힘든 협상 끝에 청과 조선은 국경 시장인 변경호시(互市)를 여는 것에 합의한다. 합의서에는 조선에서는 쌀 3천 석을 준비하여 2천 석은 청에 직접 보내고 1천 석은 변경호시에서 매매하며, 다른 물자는 각국의 백성들이 변경호시에서 교환하도록 허용하여 서로 가진 것을 가지고 없는 것과 바꾼다라고 되어 있다.

그 후 5년 간, 즉, 1628년에서 1632년까지 잉굴다이는 감시관(監市官)으로 묵던과 조선을 오가면서 청에 시급히 필요한 물자의 공급을 해결하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1631년, 청과 조선의 형제 관계가 긴장되기 시작했다. 인조가 보낸 사신 박난영(朴蘭英)이 청으로 봄철 공물을 보내왔는데, 청태종은 공물이 부족하다고 여겼고, 인조가 고의로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이 공물을 받지 않았으나 예전과 마찬가지로 인삼 등의 답례물은 준비해서 잉굴다이로 하여금 박난영이 머무는 관사로 보내도록 했다. 박난영은 청이 자신들의 공물을 받지 않는데 자신이 답례품을 받을 수는 없다면서 이를 받지 않으려 했으나 잉굴다이는 공물을 받지 않는 것은 조선 측이 맹세를 어기고 공물을 갈 수록 감소시켰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박난영은 이에 반박했다. 후금의 답례품도 계속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이때 잉굴다이는 이를 담담하게 인정했으며, 박난영의 말이 이치에 맞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곧 말을 돌려 조선이 여러번 명을 도와서 청을 괴롭혔지만 청은 여전히 대의를 생각해서 조선을 대해 주었다고 하나하나 나열해 박난영을 공격하였다.

같은 해 3월, 잉굴다이는 다시 조선에 사신으로 가서 쌍방의 관계 및 봄철 무역에 관해서 계속 논의했다. 이 기간 동안 만주에서 도망친 385명이 배를 타고 조선의 경내로 들어왔는데, 잉굴다이는 이를 알고난 후, 즉시 사람을 보내 구금하여 묵던으로 송환시켰다.

1632년 11월, 조선은 회령(會寧)의 시장을 단속하기로 결정한다. 이 때문에 잉굴다이는 다시 조선에 가서 교섭을 벌이게 되는데, 그는 이 해에만 5번이나 조선에 가게 된 것이다. 이번의 담판은 쉽지 않아서 청태종은 특별히 그에게 전권을 부여했다. 그는 인조에게 보낸 서신에 이렇게 적었다. "잉굴다이를 파견했으며, 여러가지 논의거리는 그가 직접 전하게 하였다."

1633년 4월, 그는 또 조선으로 가서 담판을 벌인다. 국경 인근에 주둔한 청군의 식량 공급을 조선이 책임져 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6월, 그는 다시 조선으로 돌아가서 교섭을 벌였으며, 동시에 그는 팔기의 무역상 80인을 데리고 인삼 900근을 가지고 조선으로 가서 무역을 하였다. 잉굴다이는 협상에 능했기 때문에 비교적 조선에서 환대를 받았다. 그리고 협상은 원만하게 끝나서 인조는 조(粟)를 보내주겠다고 약속하였으며, 이로써 변경 병사들의 식량 문제가 해결되었다. 8월, 잉굴다이는 묵던으로 돌아갔다가 9월에 다시 무역상들을 데리고 조선으로 가서 가을 무역을 벌였다.

1634년 3월, 잉굴다이는 마푸타(Mafuta, 마부대, 馬福大, 馬福塔) 등을 데리고 조선으로 가서 변경호시를 연다. 계속되는 무역으로 청은 조선에서 대량의 물자를 얻어 청 통치자들의 수요를 충족시켰을 뿐만 아니라 이 화물을 다시 몽골에 팔고 말을 얻어왔다. 청의 강력한 기병은 이렇게 무장된 것이다. 즉, 잉굴다이는 청의 군대건설에 큰 공헌을 하였다. 이 덕택에 같은 해 5월, 잉굴다이는 일등(一等) 잘란이 장긴(jalan-i janggin, 甲喇 章京)[6]으로 승진하였다.

1636년 2월, 청태종은 황제를 칭할 준비를 하였다. 지금까지 청은 아직 후금이란 국호를 쓰고 있었고, 명처럼 정식으로 황제를 칭한 상태는 아니었다. 이때부터 정식으로 청이라는 국호와 황제의 칭호를 쓰기 시작했다. 청태종의 지시 하에 8명의 호쇼이 버일러(hošo-i Beile, 和碩 貝勒), 17명의 구사이 어전(gūsa-i ejen, 固山 牛祿)[7], 49명의 버일러는 조선의 인조에게 자신들과 함께 청태종에게 황제 칭호를 바치자는 내용의 서신을 썼다. 잉굴다이는 이 서신을 가지고 대량의 인원을 이끌고 조선으로 갔다. 그러나 이때 조선의 형세는 이미 바뀌어 있었다. 주전파가 득세하여, "오랑캐 사신을 죽이고, 오랑캐의 글을 불태워서 대의를 드높이자."는 목소리가 높았던 것이다. 잉굴다이 등은 한성에 도착하자마자 감시를 받기 시작했으며, 항상 활과 화살을 든 병사들이 이들이 머문 관사를 밤낮으로 감시하였다. 잉굴다이는 인조를 만나뵙기를 청했지만 인조는 이를 거절하였다. 그래서 서신을 제출하고자 했지만 인조는 이도 받지 않았다. 이 때문에 난감해진 잉굴다이는 전체 인원을 이끌고 백성들의 말을 빼앗아 도망치기로 했다. 그는 그렇게 조선 조정에 인사도 안 하고 떠났는데, 인조는 골치아픈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즉시 사람을 보내 조선 조정의 회신을 잉굴다이에게 건냈다. 동시에 인조는 명령을 내려 변방의 수비를 강화하였다. 잉굴다이가 돌아가던 도중에 가도(椵島)에 주둔하던 명나라의 병사들이 길을 막았지만 그는 이를 뚫고 청으로 돌아갔다.

1636년 12월, 청태종은 2차로 조선을 침공하였다. 병자호란이 터진 것이다. 그는 군사적 공세와 더불어 적극적으로 정치공세도 펼쳤다. 마침내 청과 조선의 협상이 벌어지게 되었는데, 잉굴다이는 이때 회담에 참석하였다. 28일 간의 힘든 협상 기간 동안 잉굴다이는 양군 사이를 왕복하며 협상을 성사시키는데 힘썼다. 청은 군사적 우위라는 배경과 잉굴다이의 뛰어난 중재에 힘입어 협상을 타결하는데 성공하였다. 조선은 명과의 관계를 끊기로 하였고, 청과 조선은 화해를 하기로 결정했다. 인조는 잉굴다이에게 감사하며 백은 2천 냥을 선물로 주었지만 그는 이를 모두 위에 바쳤다.

3 정치가로써의 면모

1631년 해 7월, 청태종은 관제를 정하고 육부를 두었는데, 잉굴다이는 호부승정(戶部承政)으로 임명되었다. 청의 재정과 물자 문제를 책임지는 중임을 맡게 된 것이다.

1632년 4월, 청태종은 만주인 몽골인으로 구성된 대군을 이끌고 내몽골의 강력한 부족 중 하나인 차하르(Chakhar, 察哈爾)를 정벌하였다. 6월 무렵 원정군의 식량이 떨어졌는데, 잉굴다이가 이에 대한 책임을 맡아, 묵던에서 원정군의 캠프까지 식량을 운송하였다. 이후에도 잉굴다이는 여러 번 조선에 가서 식량 공급과 무역을 요구하였다.

1632년 9월, 청태종은 팔기제도를 정비하기로 결정한다. 잡힌 포로나 획득한 물건을 팔기에 균분하게 분배하는 구제도를 바꾸고자 한 것이다. 잉굴다이는 청태종의 어명을 받아 아이신기오로 다이샨(Aisin-gioro Daišan, 愛新覺羅 代善) 등 여러 버일러(beile, 貝勒)[8]들을 모아서 회의를 개최하였다. 잉굴다이의 중재 하에 이 중대한 회의는 마침내 의견일치를 달성하였다. 결의의 내용은 30니루를 1기로 하며, 30니루를 넘는 인원들은 팔기에서 빼버린다, 새로 얻은 포로나 가축은 8등분 하지 않고 일률적으로 부족한 기에 보낸다 등이다. 이는 청태종이 3대 버일러들과 함께 국정을 다스리는 제도를 시행한 이후, 다시 한번 중앙집권을 강화하는 조치였다. 이는 청 정권이 봉건화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 여기서 잉굴다이는 청태종에게 더욱 신임을 얻었고 삼등(三等) 머이런이 장긴(meiren-i janggin, 梅勒 章京)에 오른다.

1637년 2월, 양식부족 사태와 백성들이 농업에서 이탈하는 일이 발생했다. 청태종은 호부에 통해 어명을 내려 곡식을 보관하는 관리들이 즉시 양식을 매각하도록 했고, 매점매석을 통해 이득을 취하는 걸 금지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농사를 권장하고, 봄에 씨를 뿌릴 수 있게 미리 준비하도록 하였다. 잉굴다이는 이때 곡물가격을 조절하고 춘경을 할 수 있도록 백성들을 조직하였다. 그는 전쟁이 없는 틈을 이용하여 경작지를 늘렸다. 1638년 4월, 그는 부하 관리들을 이끌고 요동 등지에서 수백 리를 개간하였다. 1638년, 그는 다시 사람을 이끌고 요서의 땅을 측량하였다. 그는 요동의 농업경제를 일으키고 청나라 백성들이 먹고 입는 문제를 해결하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청군이 베이징에 들어간 후, 잉굴다이는 할 일이 많아졌다. 당시 전쟁이 격렬했기 때문에 군수물자 보급이 급박했다. 잉굴다이는 호부를 맡았기 때문에 물자에 대한 책임도 맡고 있었다. 여기에는 여러가지 곤란한 일들도 많았지만, 그는 도르곤을 도와 전국에서 일어나는 반청 반란을 막는데 힘썼고, 경제의 회복과 발전, 그리고 사회질서를 안정시키고 청의 중국 통치를 공고히 하는 것에도 힘썼다.

1637년 3월, 잉굴다이는 의정대신(議政大臣)으로 승진하였다. 1639년 8월에는 정백기의 구사이 어전이 되었다. 그리고 여전히 외교, 군사, 정무의 중요 분야에서 임무를 수행하였다. 1640년 10월, 그는 예부, 형부대신 등을 데리고 조선으로 갔다. 그리고 인조와 대신들이 명과 몰래 왕래한 문제를 따졌다. 1641년 3월, 그는 아이신기오로 도르곤(Aisin-gioro Dorgon, 愛新覺羅 多爾袞), 아이신기오로 호오거(Aisin-gioro Hooge, 愛新覺羅 豪格) 등이 진저우(錦州) 포위전에서 병사들을 귀가시키고 병력을 멀리 주둔시킨 사건을 심리하였다. 6월에는 아이신기오로 지르갈랑(Aisin-gioro Jirgalang, 愛新覺羅 濟爾哈朗)의 진저우 포위전에서의 공과에 대하여 조사하였다. 1642년 10월, 그는 조선의 최명길, 임경업이 명과 내통한 사건을 심리하였다. 이상의 활동 등을 통해 그는 조선의 친명파에 타격을 가하고, 명을 고립시키고자 했다. 그리고 내부의 여러 왕, 버일러, 대신들이 법규를 어겼을 때 그 집행을 맡았다. 이를 통해 황권을 공고히 하는 역할을 한 것이다.

1644년 7월, 잉굴다이는 도르곤의 명을 받아 농업, 잠업 발전과 호구(戶口) 관리를 통해 사회생산을 회복시키는 정책을 펼쳤다. 8월, 잉굴다이는 홀아비, 과부, 혹은 살기 힘든 자들을 봉양하는 정책을 펼쳤다. 전쟁 이후, 땅이 황폐해지고 사람들은 도망을 가서 백성들이 곤궁해진 것을 본 잉굴다이는 인력을 동원하여 호구를 다시 정비하고 토지를 나눠주었다. 그리고 삼향(三餉)을 폐지했다.[9]

1645년 2월, 잉굴다이는 만주 귀족들이 백성들의 재산을 강매하는 행동을 시정하기 위해 백성들이 위법 사실을 고발하는 것을 허용하였다. 4월, 그는 만주 귀족들이 일반 백성들을 노비로 삼는 것을 금지하는 포고를 내리고 억지로 노비가 된 자는 석방하도록 하였다. 물론 이 조치들이 모두 제대로 시행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한족의 반발을 무마시키는데 도움이 되었고, 청의 통치를 강화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3년 후인 1648년 2월 24일, 잉굴다이는 병으로 죽었다.

4 한국에서의 이미지

한국에서는 병자호란 때 조선군을 격파한 것 때문에 군인으로서의 이미지가 강하고 조선땅을 짓밟은 청의 선봉장으로 취급되어 고전소설 박씨전에 작가의 창작 인물인 동생 용홀대가 어이없이 죽임을 당하고 임경업을 피하는 겁쟁이로 나오는 등 대우가 매우 좋지 않은편이다. 다만 가등청정 찢어죽이자는 식의 수준은 아니다.

그러나 실상은 매우 다르다. 백성들을 위해 민생방안을 펼치고 한족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노력하는 등 민생에도 관심이 많았던 그는 조선이라고 해서 차별하지 않았다.

사실 한국에서 잉굴다이에 대한 평가는 잉굴다이가 호란당시의 청나라 고위관료들 중 가장 이름이 알려졌기에 앞잡아 매도당했다고 봐야 한다. 실제로 잉굴다이는 당시의 청 관료나 무장들 중에서도 상당히 신사적으로 조선을 대했다. 사실 잉굴다이가 여느 청의 장수나 관료들 같았으면 조선이란 나라가 인조때 사라졌다 해도 이상할게 없다. 조선이 신하나라가 된 뒤에도 소현세자강빈 등을 함부로 대하지 않았으며[10][11] 몇번이고 조선에서 들락날락 거리면서 말썽 한번 일으킨적 없었다.[12][13] 또한 김상헌최명길을 심문할때도 대답이 이치에 맞다 싶으면 오히려 수긍하고 넘어가줬다. 실제로 두 사람 모두 적국에 끌려간것이나 다름없음에도 불구하고 심한 고초를 겪거나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았다.

5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 조선왕조오백년에서는 청나라의 맹장으로 등장하는데 부하인 마푸타를 데리고 다닌다. 남한산성에서 인조를 포위하고 결국 인조를 포박해서 홍타이지에게 압송해 갔다. 그리고 그 이후는 모두가 다 알다시피 삼전도의 굴욕으로 이어진다.
  • 추노에서는 조선을 방문해 정치적으로 희생된 소현세자를 동정하고, 세자의 마지막 남은 아들인 세손 이석견을 구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송태하의 무기 업그레이드를 해주는 친절한 NPC(...).
  •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좋게 나오는 편이지만 안습한 부분들이 종종 나온다. 압송된 김상헌을 취조하는 도중에 당당하게 반론하는 김상헌에게 데꿀멍하거나, 외교 문제로 소현세자에게 항의를 하려다 번번히 당당하게 대처하는 세자의 모습에 질려서 먼저 사과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 SNL 게임즈 - 카스2 병자호란에서는 임요환의 캐릭터로 등장하며, 이미 죽은 청나라 병사를 좀비로 되살려 민교의 캐릭터를 공격하고, 홍진호에게 팀킬당한 민교의 캐릭터를 되살려 캐릭터 뿐 아니라 민교마저도 자기편으로 만들었다.
  • 웹툰 강시대소동에서는 병자호란에서 조선을 침공한 뒤 조선에서 전사한 뒤, 나중에 다시 조선을 공격할 비장의 카드로 강시가 되어 있다. '용부대'[14]라는 이름으로 되어 있으며 좀비들의 우두머리이다.
  1. 龍骨大라는 이름 자체가 조선식으로 음차한 이름이기 때문에 중국 웹에서 龍骨大로 검색하면 이 인물과 관련한 정보가 거의 나오지 않는다. 간체 표기인 英俄尔岱로 검색해야 이 인물에 대한 정보가 나온다.
  2. 니루(niru, 牛祿)는 화살이란 뜻으로 원래 건주여진족이 수렵을 갈 때 한 사람당 화살 하나씩을 내던 것에서 유래하였다. 본래 1니루는 10명이었으나 이것이 팔기제로 확대되는 과정에서 1니루는 300명으로 늘어났다. 니루이 어전은 니루의 주인 혹은 우두머리란 뜻이다.
  3. 이때 한번 죽을 죄를 면제받는 특례까지도 얻었다.
  4. 이 해에 정묘호란이 일어났었다.
  5. 만주인이 아닌 중국인이었지만 청에서 벼슬을 하였다.
  6. 잘란(jalan, 甲喇)은 니루를 합친 상급 조직이다. 잘란이 장긴은 잘란의 우두머리를 의미한다.
  7. 구사(gūsa, 固山)가 기(旗)라는 뜻이므로 팔기대신(八旗大臣)이라는 의미를 가졌다. 즉, 각 팔기의 대신들.
  8. 청 귀족의 작위 중 하나. 만주와 몽골 귀족들에게 내려졌으며, 부장(部長)이라는 뜻이다.
  9. 삼향이란 요향(遼餉), 초향(剿餉), 연향(練餉)의 통칭이다. 명 말기에 청의 침입을 방어하고 농민의 반란을 탄압하기 위해 증가된 군비를 메우기 위해 거둔 세금을 말한다.
  10. 사실 용골대의 위상으로는 소현세자가 하는 대답을 말대꾸로 여겨 권위로 찍어누를수도 있는데 그러지 않았다.
  11. 다만 딱 한번 횡의 문제가 불거지자 세자에게 따졌는데 이때 세자가 "내가 포로여도 그렇지 그래도 일국의 세자인데 일개 장군이 이럴수 있는거요?"라고 해 결국 잉굴다이가 사과를 했다고 한다.
  12. 참고로 명나라 때부터 중국에서 사신이 오면 사적으로 조선에서 온갖 금은보화와 특산물은 물론 땅까지 뜯어내는건 양반이고, 청 사신으로 왔던 정명수는 궁에 기생을 들이고 병조좌랑이 사신을 접대하는 기생에게 뭐라하자 그 병조좌랑을 "좌랑밖에 안 되는 니까짓게 뭔데 내 여자 건드냐"며 두들겨 패는 등 아주 갖은 민폐와 말썽은 다 부리고 갔다.
  13. 그나마 문종~선조 시기는 덜해서 명 조정에서 "사신들의 사적인 요구를 들어주지 마라"라는 명을 내려 좀 덜했다고 한다. 문제는 광해군때 임해군과 관련된 일에서 트집잡자 뇌물로 해결해서 그만...
  14. 용골대(잉굴다이)와 다른 청 장수 마부대(마푸타)의 이름을 합쳐서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