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선관

翼善冠

1 소개

조선(정확히는 고려 말)과 명나라에서 사용하던 왕관 및 관모. 중국에선 청나라에게 남명이 멸망하면서 폐지되었다. 조선의 경우 대한제국이 들어서면서 폐지되었다고 생각되었지만 이후에도 황룡포를 입은 고종이 익선관을 계속 쓴 어진이나 사진 등이 존재한 것으로 볼 때 완전히 폐지된 건 아니고 양장이나 군복과 함께 번갈아가며 쓴 것 같다.

임금의 옷인 곤룡포와는 세트 아이템.

250px
만력제 무덤에서 출토된 황금실[1]로 짠 익선관.이건 한국 소재의 고종 익선관. 현재 세종대 소유베트남 응우옌 왕조의 익선관.

2 유래

위진남북조 때부터 복두의 일종으로 사용되었을 수 있다. 당태종이 삭망(朔望)·시조(視朝)의 일상적인 관으로 제정하였으며, 통일신라발해에서도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으나 확인하긴 어렵다. 절상두건이라 불렸으나 거의 사용되지 않은 것 같다.

본래는 송나라의 복두인 절상건(折上巾)[2]으로, 공민왕 문서에 있는 공민왕의 어진을 보면 절상건을 쓰고 있다. 우왕때 명나라의 관제를 받아들이면서 들여온 것으로 추정된다.[3]

20110830184623-2060739456.jpg
남당 황제 이존욱 초상, 여기 나온 모자가 절상건이다.

명나라는 초기부터 절상건을 썼다가, 1405년(永樂 3)에 오사모로 잠시 고쳤다. 그러다가 얼마못가 익선관에 황반령[4]을 입고 옥대를 띠고 피화(皮鞾)를 신었다. 명나라의 황태자복은 오사절각향상건(烏紗折角向上巾)이었는데, 친왕(親王)·군왕(群王)·세자도 같았다.

조선 세종대왕 시절에 명에서 익선관(翼善冠)이라 재명명하여 이 이름이 굳어지게 되었다. 이 오사절각향상건의 모양이 매미의 날개 모양과 닮았다 하여 '매미 선(蟬)'을 써서 익선관이라고 했다는 설도 있다. 참고로 사모의 날개는 검소함의 상징인 매미가 모티브가 맞다.

3 모양

2단으로 턱이 지고 앞보다 뒤쪽이 높으며 뒤에는 매미날개 모양의 소각(小角) 2개가 윗쪽을 향해 달려있다. 소각은 한 겹으로 된 경우도 있고, 크기가 다른 소각 두 겹이 1개로 묶인 경우도 있다. 앞면의 청사변(靑絲辮)이 뒷면의 두 절각(折角) 사이를 얽게 되어 있다. 겉감은 자색의 사(紗) 또는 나(羅)로 만든다.

익선관은 날개가 위로 치솟은 형태를 취하여 날개가 옆으로 벌어진 형태를 띄고 있는 신하들의 사모와 구별한다. 또한 내시의 사모에는 날개가 없다.

왕관이라고는 해도 신라금관과 예식용 면류관처럼 휘황찬란하고 권위 넘치는 간지 아이템은 아니지만, 유교적인 이념에는 여러모로 부합하는 모양을 취하고 있다. 명이 망한 뒤로는 소중화적 의식을 나타내기도 했으며, 명의 간섭이 사라지자 한동안 높이가 올라가는 경향을 띄기도 했으나[5] 19세기 흥선대원군의 예복 간소화 정책으로 고종대에는 매우 낮아졌다. 흔히 검은색 버전이 가장 유명하지만 실은 붉은색, 자주색, 보라색 등 꽤 다채로운 컬러를 하고 있었다. 물론 왕이 늘 이것만 쓴건 아니니 주의할 것. 곤룡포와 익선관은 평상시에 착용했고, 망궐례, 종묘제례 등에는 면류관곤복(면복), 신하들의 하례를 받을 때는 강사포에 원유관(고종이 황제가 된후에는 통천관으로 변경)을 쓰기도 했다.

문명 5세종대왕은 익선관이 너무 높게 솟아있어 고증오류라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당시의 익선관은 높이가 훨씬 낮았다.

조선 왕들이 썼던 익선관의 본 고장인 명나라의 익선관은 명 초중반에는 검은색으로 된 아무런 장식없는 단순한 모양이였으며, 명 중후반 이후(어진으로 본다면 융경제 이후로 추측) 기존 익선관에 황금 장식이 추가된 오사(烏紗)익선관이 사용 되었다. 위에 언급된 황금실로 만든 금사(金紗)익선관은 살아있는 황제는 절대 착용 안했으며, 죽은 다음 무덤에 들어갈때 착용된 것이다.
천순제 이후 명나라 황제 곤룡포도 보기에 어지러울 정도로 화려해졌고, 익선관도 황금장식이 생겼으며, 명 초반 황제 어진과 중후반 황제의 어진을 비교한다면 전자는 심플하며, 후자는 화려하지만 어지러울 정도.

3.1 익선관 모양이 나타나 있는 어진, 사진

파일:Attachment/iksun3.jpg
조선 태조 이성계 어진. 익선관의 높이가 낮다.

파일:Attachment/iksun4.jpg
조선 영조 어진. 익선관의 높이가 매우 높아졌다. 보기에 멋있기 때문에 사극에서는 시대에 관계없이 이런 높은 익선관이 등장하는 경향이 있다.

파일:Attachment/iksun5.jpg
조선 고종의 사진. 익선관 높이가 다시 낮아졌다. 흥선대원군 시절 사치 금지 및 의복 간소화 정책에 따라 관복의 문양, 장식이 크게 간소화됐다. 흥선대원군의 아들 고종의 의복도 예외가 아니어서 익선관의 높이가 낮아지고, 곤룡포의 흉배도 축소되었다.

3.2 세종의 익선관 해프닝

세종의 것으로 추정되었던 익선관마감재로 사용된 훈민정음 활자본이 보인다.

2013년 2월, 세종이 직접 사용한 걸로 추정[6] 되는 익선관이 발견되었다! 게다가 안에는 마감재로 종이가 들어있는데 이 종이가 훈민정음 활자본이다. 진품으로 결론이 날 경우에는 엄청난 국보급 유물이 될것으로 보다. 기사#

그러나 세종대왕의 익선관이 아니라 궁중 여성용 모자라는 반론이 제기되었다.기사. 일단 모자에 그려진 용의 발톱이 4개인데 1444년부터 5조룡을 썼던 세종이 훈민정음 종이로 보아 1446년 이후에 제작된 이 4조룡 관모를 썼다는 것은 연대가 맞지 않는다는 것. 형상 측면에서도 익선관에 필수요소인 매미 날개가 없는데다, 익선관은 단색으로 만드는 것이 명나라나 조선이나 원칙인데 화려한 무늬가 놓여 있다는 것이 이 모자는 익선관이 아니라 여성용 모자라는 주장의 근거. 게다가 모자에 새겨진 자는 불교의 상징인데 당대 조선 임금의 종교유교였으며 불교는 되려 탄압을 받고 있던 시기였다. 특히 세종대왕은 숭유억불 정책을 했던 장본인인 이성계에게는 손자이며 이 정도로 촌수 차이가 안 난다. 자기 할아버지가 탄압했던 대상의 상징물을 자신의 왕관에 새겨넣었다는 게 말이 안 된다.

결국 모자의 천 조각 및 훈민정음 종이에서 샘플을 추출하여 방사성 탄소 연대측정검사를 한 결과, 모자와 훈민정음 모두 1660년 이후 제작된 것으로 결론이 났다! 기사 게다가 모자의 형식 자체도 위에 나온 반론처럼 익선관과는 분명히 차이가 있어, 처음 세종대왕 익선관 설을 주장했던 교수도 세종대왕 것이 아님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결국 한편의 해프닝으로 끝난 셈. 물론 해당 유물은 나름대로 희귀한 것으로, 여전히 복식연구에 중요한 유물이긴 하다.

4 기타

옥션 같은 쇼핑몰에서도 판다(…). 결혼식 폐백 의상이나 연극 소품용으로 팔지만 뭐 중국산이자 저가형은 대부분 금실로 화려하게 장식된 명나라 익선관 스타일이고, 금실 장식 없이 단색으로 된 조선 익선관 스타일은 오히려 고급형으로, 쉽게 찾기 어려운 것이 현실.

  1. 명나라 황제는 죽으면 황금실로 만든 익선관을 쓰고 무덤에 묻힌다. 살아있는 상태에서는 검은색 익선관을 쓴다. 사극에서 살아있는 황제가 황금색 익선관 쓰는것은 고증오류.
  2. 송나라 때 임금 등이 썼던 복두는 오사모(烏紗帽)다. 절상건은 오사모보다 양대가 위로 치켜져있다는 차이가 있다. 고려 역시 이 오사절상건을 사용했다.
  3. 그 이전에 고려는 송의 관복을 사용했고, 이후 원의 관복을 사용했다가 공민왕 때 다시 폐지했다는건 유명한 이야기다.
  4. 黃盤領. 착수포의 일종으로, 곤룡포의 시초격 되는 물건. 전후에 각각 금룡을 하나씩 달았다.
  5. 애초에 청나라 황제는 익선관을 쓰지 않고 청나라만의 독자적인 왕관을 썼기 때문에 굳이 조선 국왕이 쓰는 익선관의 높이에 대해 간섭할 이유가 없었다. 청나라의 왕관은 익선관과 달리 복두 계열의 왕관이 아니었기 때문에 모양부터가 완전히 달랐다...
  6. 이유가 뭐냐하면 익선관에 새겨진 용의 발톱이 4개이기 때문. 세종때 명에서 5조용복(발톱이 5개인 용이 새겨진 옷)을 하사하여 이후 그 옷을 썼다는 기록이 있기에 용의 발톱이 4개라는것은 세종 이전의 물건이라는 것이된다. 그리고 안의 마감재는 세종이전에는 있을 수 없는물건이기에 결국 세종이 쓰던 익선관이라는 결론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