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육신 | ||||||||||||||||||||||||||||||||||||||||||||||||||||||||||||||||||||||||||||||||||||||||||||||||||||||||||||||||||||||||||||||||||||||||||||||||||||||||||||||||||||||||||||||||||||||||||||||||||||||||||||||||||||||||||||||||||||||||||||||||||||||||||||||||||||||||||||||||||||||||||||||||||||||||||||||||||||||||||||||||||||||||||||||||||||||||||||||||||||||||||||||||||||||||||||||||||||||||||||||||||||||||||||||||||||||||||||||||||||||||||||||||||||||||||||||||||||||||||||||||||||||||||||||||||||||||||||||||||||||||||||||||||||||||||||||||||||||||||||||||||||||||||||||||||||||||||||||||||||||||||||||||||||||||||||||||||||||||||||||||||||||||||||||||||||||||||||||||||||||||||||||||||||||||||||||||||||||||||||||||||||||||||||||||||||||||||||||||||||||||||||||||||||||||||||||||||||||||||||||||||||||||||||||||||||||||||||||||||||||||||||||||||||||||||||||||||||||||||||||||||||||||||||||||||||||||||||||||||||||||||||||||||||||||||||||||||||||||||||||||||||||||||||||||||||||||||||||||||||||
성삼문 | 박팽년 | 하위지 | 이개 | 유성원 | 유응부 | (김문기) |
成三問, 1418~1456
1 소개
조선 전기 세종-단종 치하의 문신, 학자.
본관은 창녕,자는 근보(謹甫), 호는 매죽헌[1], 시호는 충문(忠文)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생을 마감한 사육신 가운데 대표격인 사람이다.
<臨死賦絶命詩>擊鼓催人命 북소리 둥둥 울려 목숨 재촉해
回頭日欲斜 고개 돌려 바라보니 해는 기울어
黃天無一店 황천 길엔 주막 한 곳 없다니
今夜宿誰家 이 밤을 뉘 집에서 묵어갈고
수양산 바라보며 이제(夷齊)를 한하노라주려죽을진들 채미(採薇)도 하는 것인가
비록애 푸새엣 것인듯 그 뉘땅에 났는가[2]
이 몸이 주거가셔 무어시 될고하니봉래(蓬萊)산 제일봉에 낙락장송(落落長松) 되야 이셔
백설이 만건곤(滿乾坤) 할 제 독야청청(獨也靑靑)하리라[3][4]
교과서에도 실릴 정도로 유명한 시조들이긴 한데 정말 성삼문이 지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애시당초 조선에서 개인의 시조나 가곡류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기 시작한 게 조선중화사상이 발생한 조선 후기부터이며 그 이전에 지어진 작품들은 개인 문집에 명확히 전해오는 것이 아닌 이상 저자가 불분명하다. 수양산과 봉래산이 들어가는 저 2수는 1728년 김천택이 편찬한 진본 청구영언에서부터 성삼문이 지은 것으로 등장한다. 역적의 글은 일부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소각하는 게 원칙이란 것을 고려하면 저 작품이 정말 성삼문이 지은 것일 가능성은 매우 낮다. 이 시조들은 실존인물 성삼문을 평가할 때가 아니라 조선후기 사육신이 어떤 위상을 갖고 있었는지를 이해하는 용도로 바라보는 게 타당하다.[5][6]
2 집현전의 젊은 학사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은 사육신의 반열에는 들지 않았지만, 역시 단종을 복위시키려는 계획에 동참했었다[7]. 부자가 한꺼번에 왕에게 반기를 든 셈이라 결국은 형제들도 다 죽고 집안이 쫄딱 망했다. 학자의 이미지가 강한 성삼문이지만 아버지 성승은 물론이고 할아버지 성달생까지 모두 무장이었는데 이 집안의 무인적 풍모는 성삼문의 강직한 면에 영향을 준 것 같다.
이름이 좀 특이한데, 낳을 때 공중에서 '낳았느냐?'라는 소리가 세 번 들렸다고 한다. 세번째 질문에서야 비로소 아이를 출산했기 때문에 이름이 삼문이 되었다는 기구한 설화가 전해진다. 참고로 장남이어서 동생들도 다 '삼'자 돌림이 되었고 그 결과 다들 이름이 특이하다. 좀 안습.
성삼문이 태어난 뒤 점을 보자 충신이라 나와서 그의 할아버지 성달생이 집안 말아먹을 녀석이라고 한탄했다고 한다. 그리고 정말 충신이라서 집안을 말아먹게 되었다.[8]
세종 재위시절 과거에 급제했다. 글씨를 잘 쓰며 문장에 뛰어났다고 전해진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할 적에 이에 공헌했으며,[9] 집현전 학사 등을 역임했다. 세종의 총애받는 신하였으며, 훗날 세종이 어린 세손의 앞날을 걱정하여 세손을 지켜달라고 고명을 남긴 문신들 가운데 하나이기도 했다.
3 계유정난
세조가 계유정난 이후 발표한 정난공신 명단에는 수충정난공신에 포함되는데 이후에 연루되는 인물중 같이 포함된 인물은 수충협책정난공신 박팽년, 충청도 도절제사에 임명된 성삼문의 부친 성승, 수사헌 장령이 된 유성원, 중훈대부를 더하게 된 이개 등이 있다.
그리고 세조가 단종으로부터 선양을 받은 공적으로 내린 좌익공식 3등으로 그의 이름이 포함되어 있다. 여기에 성삼문과 같이 이름을 올린 인물로는 이휘가 있다. 이후 사육신 사건으로 성삼문과 이휘의 이름이 제외되고 이를 고변한 김질이 3등, 3등이었던 정창손은 2등으로 오른다.
최소한 계유정난에 대해서는 집현전 학자들 역시 암묵적으로 동조했다는 평도 있다. 실제로 박팽년의 지위는 신숙주와 맞먹고 폭넓은 인사 조치가 이루어졌다는 것. 그러나 정난에 적극 참여했으면 기록에 안 남을 수 없다. 실제로 좌익공신에 있어서는 신숙주는 1등, 성삼문은 3등, 박팽년 등은 제외된다.
대간으로 이름을 떨쳤던 성삼문 등이 세조의 찬탈 의도에 찬성할 리는 없었다. 실제로 성삼문은 정난 직후 안평대군은 죽이라면서도 자신이나 정난에 참여하지 않은 여러 대신들이 공신에 오르는 건 옳지 않다는 말을 했다. 결국 성삼문 등 집현전 출신 관료들을 회유하기 위한 세조의 의도라 볼 수 있다.
4 단종 복위 운동
세조가 어린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자 예방승지였던 성삼문은 같은 뜻을 가진 이들을 모았다. 사육신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 김문기, 사육신에 속해있지는 않으나 아버지인 성승 그리고 결국 이들을 배신하게 되는 김질 등이었다. 이들은 세조를 폐위시키고 상왕이 된 단종을 복권시킬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거사의 내용은 명나라 사신의 환송연에서 별운검으로 서게 되는 유응부와 성승이 세조와 그 일파 등을 죽이고 명나라에게 단종 복위의 정당성을 주장한다는 것이었다. 상국 사신 앞에서 피바람
그러나 환송연 당일 이상한 낌새를 눈치를 챈 것인지 세조가 별운검을 축연 자리에서 빼버렸다. 성삼문은 반대했으나 결국 운검은 없는 것으로 통과. 거사를 치르기로 한 이들은 망설이다가 후일을 기약[10]하며 일을 미루고 말았다.
야사에 의하면 이 때 동료 유응부가 그래도 한명회부터 베어버리고 들어가서 거사를 강행할 것을 주장했으나 성삼문이 반대해서 이루지 못했다. 그래서 국문받을 때 유응부는 성삼문을 향해 "너는 글을 읽었지만 꾀가 없으니 짐승과 다를 바 없다!" 또는 "더벅머리 겁쟁이 선비놈들과 거사를 치른것이 일생일대의 실수다!"라고 일갈했다고 한다.[11]
이때 사람들이 미적미적거리는 꼴을 보며 일이 제대로 성사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 김질이 장인인 정창손에게 가서 이 일을 죄다 털어놓았고 결국 이들의 모의는 이대로 발각이 되었다.
사실 어찌보면 당연한 수순이기도 했다. 단종이 선위할 때 성삼문이 옥새를 끌어안고 울음을 터트렸는데 사실 이 때 성삼문은 세조에게 찍혔다. 또한 세조는 즉위 후 성삼문을 한직에 가까운 공방승지로 경질했다. 결국 어떤식으로든 성삼문과 동료들은 세조와 한명회에게 요주의 인물들로 주시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성삼문의 아버지가 별운검을 선다?[12] 세조 측이 사육신의 계획을 몰랐다고 하더라도 결코 내키지 않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5 충신으로 남다
주동자들은 유성원을 제외하고[13] 모두 끌려가 극형을 받았다. 실록에는 국문 기록과 성삼문 등의 진술 위주의 기록만 존재하지만, 야사에서[14] 성삼문은 세조를 끝까지 왕으로 인정하지 않아 전하가 아닌 나리(나으리)라고 불렀고, 유난히 가혹한 형벌을 받았다는 야사가 전한다. 또한 세조가 "네가 지금 나를 '나으리'라 하는데, 그러면 내가 준 봉록은 왜 먹었느냐?"라고 묻자 "나으리가 준 녹은 하나도 먹지 않고 우리 집 창고 안에 고이 쌓아 두었소이다"라고 대답했는데 조사해 보니 과연 그랬다고 한다.
함께 동문수학했던 신숙주가 세조와 함께 서 있자 세종의 고명을 받들지 않은 변절자라며 폭언을 퍼붓기도 했다고 한다.[15] 이때 딱히 신숙주에게만 포인트를 준 것은 아닐텐데도 이야기가 너무 두고두고 남는 바람에 신숙주는 이날 이때까지 변절자의 대명사가 되어버렸다. 다만 신숙주 항목에도 나와 있지만 이게 신숙주와 엮이는 것은 실제 사육신의 정변시도가 있고도 몇 백년 뒤인 조선 후기의 일이다.
함께 모의했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고문 후 참수형 당한 후 사지가 찢기는 거열형에 처해졌다. 사건이 컸던만큼 집안이 아예 풍비박산나서 아버지, 동생들, 아들들이 멸족당했음은 물론 먼 친척들도 일에 연루되어 귀양을 갔으며, 여자라서 살아남은 부인 및 딸들도 노비가 되었다고 한다.[16] 집안에서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둘째 아들만이 몰래 도망쳐 성을 바꾸고 살아서 지금까지 집안이 이어지는 것이라고 한다.
더 큰 문제는 이들이 복위시키려던 단종마저도 이 일에 연루된 것이다. 더구나 이 일에 단종이 연루되었다는 말 자체가 성삼문의 입에서 나왔다고 조선왕조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실제로 단종을 생각했다면 이건 목숨걸고 비밀로 붙였어야 했을 일이었다는 점에서 완벽한 병크. 다만 이는 고문에 의한 충격이나 세조의 유도 등으로 잠시 냉정을 잃은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여튼 결과는 망했어요. 이때까지 형식상이나마 상왕 대접을 받고 있던 단종은 아예 폐위되었고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귀양을 가게 된다. 의도는 좋았지만 결과가 안좋았던 전형적인 예라고 할 수 있겠다.
훗날 숙종 시절에 단종이 신원되며 마찬가지로 복권되었고, 영조 시절에 이조판서로 추증되었다. 아버지 성승 등 함께 희생당한 다른 이들과 함께 김시습이 몰래 시체를 수거해 노량진에 묻혔는데 그 사육신묘 주변에는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그리고 꽃피는 봄에 마음이 싱숭생숭하여 사육신 공원에 들르게 된 고시생 및 재수생들은 어김없이 낙방한다는 저주가 존재한다.
기존의 강직한 충신 이미지를 떠올리는 사람들로서는 의외겠지만 실제 역사 속 성삼문도 평소에는 밝고 유머러스한 성격이었으며, 평소에는 실없는 농담을 잘하는 마냥 밝은 사람인 것 같지만, 절개를 지켜야 하는 때가 오면 누구보다 굳은 의지와 절개를 보여주는 외유내강형 인물이었다고 한다.
이쪽의 경우 사실 미래가 잘 보장된 타입인데 3등이나 공신에 책봉되었으므로 가만히만 있어도 자손대대로 잘 먹고 잘 사는게 가능했다.
여담으로 고사관수도로 유명한 세종의 처조카 강희안도 단종복위운동에 연루되어 잡혀왔으나, 평소 친분이 있었던 강희안을[17] 살리기 위해 성삼문이 그의 연루를 부인하여 살았다고 한다. 이후 강희안은 평소 천시하던 그림을 그리며 살았다고.
6 사극에서
단종과 세조 시기를 그리는 사극들에서 자주 등장한다. 왕과 비에서는 박진성 씨가 강직한 성삼문의 모습을 열연했다. 이 사극에서 성삼문은 왕의 비서직인 승지로서 수양대군의 회유를 받으면서도 의지할 데 없는 단종을 지키기 위해 애쓴다. 여기서 놓치기 쉬운 부분이 있는데, 거사가 발각되기 전에 세조와 대화할 때도 말투는 공손하지만 한번도 전하라고 부르지 않았다. 단종 복위 시도가 발각된 뒤에는 모진 고문을 받으면서도 세조에게 절대 굽히지 않는다. 거열이라는 끔찍한 처형을 당하기 직전에도 절명시를 읊으면서 의연한 모습을 보였다.
대왕 세종에서는 젊은 배우 박철호 씨가 배역을 맡아 집현전 학사 시절의 풋풋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신숙주가 세조의 편에 서기 전까지는 절친이었던 신숙주와 콤비를 이루며 명랑하고 발랄한 모습을 보인다.
KBS가 북한과 공동제작한 사극 사육신에서는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북한 배우 박성욱 씨가 역을 맡아 선 굵은 연기를 보여주었지만 시청률이 애국가 시청률과 맞먹을 정도로 낮았으니 안습.
공주의 남자에서는 대왕 세종에서 성삼문 역을 맡았던 배우 박철호 씨와 동명이인인 중년 배우 박철호 씨가 성삼문 역을 맡았다. 정종과 김승유가 참여하는 사육신 사건과 관련되어 등장했는데, 많지 않은 출연 분량에서도 성삼문의 의기와 절개를 잘 표현해냈다.
- ↑ 뒷날 일제강점기 때의 독립운동가 윤봉길 의사는 스승인 매곡 성주록이 호를 지어 주었는데 성주록의 호 '매곡'에서 '매'를 땄고, 성삼문의 호인 '매죽헌'에서 '헌'을 따서 '매헌'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 ↑ 수양산: 백이, 숙제가 절개를 지켜 은거하다 굶어 죽은 곳. 수양대군을 의미하는 중의적표현. 이제: 백이와 숙제. 채미: 고비를 뜯음. 푸새: 산과 들에 저절로 나서 자라는 풀 (녹봉을 의미). 백이와 숙제는 구차하게 연명하며 살았으나 나는 녹봉도 받지 않고 절의를 지켰다라는 의미.
- ↑ 봉래산: 중국의 전설상의 산. 낙락장송: 가지가 길게 축축 늘어진 키 큰 소나무. 백설: 수양대군과 간신 비유. 세조와 배신자들의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이 절의를 지키겠다는 결의가 담김.
- ↑ 야사에 따르면 세조는 태종의 「하여가」로 성삼문의 마지막 마음을 돌려보려고 했다. 위 시조는 세조의 「하여가」에 화답한 성삼문의 「충의가」이다.
- ↑ 더 재미있는 것은 청구영언에서 작자 미상으로 수록된 시조들이 병와가곡집, 가곡원류 등 후대의 저작으로 가면서 유응부, 이개, 박팽년 등 다른 사육신의 작품으로 둔갑한다는 것이다. 사료에 따라 동일한 시조의 저자가 다르게 기록된 경우도 존재한다. 그리고 시조의 저자를 정하는 과정에 남효온의 육신전이 만들어낸 인물상이 강하게 작용하는 걸 볼 수 있다.
- ↑ 신성환, 「사육신 담론의 전변과 조선후기 시가의 수용 양상」 (민족문학사연구, 2011)
- ↑ 양운검의 한 분으로 모신다.
- ↑ 실제로 성씨 가문의 일원이 담당하여 간행한 조선초기 서적들의 경우, 세조대 이후에는 성씨 가문 사람이 간행했다는 내용이 언급된 부분 자체를 목판에서 완전히 파내 없애버리거나 다시 간행할 때 해당 부분을 빼고 출판한 사실을 실물을 통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 ↑ 다만 예전에는 한글창제를 집현전 학자들이 큰 역할을 한 걸로 잘못알려져 있었다. 한글창제는 철저하게 세종, 문종, 수양대군 등 세종의 집안사업에 가까웠으며 집현전을 비롯한 신하들의 역할은 제한적이거나 미미했다. 한글창제에서 집현전 학자들이 공헌한 것은 자료수집 등의 노가다나 단순작업류였다. 이와 관련하여 성삼문이 중국을 수차례 오갔다고 하는 썰이 있는데 자료수집 등을 위해서 오갔을 가능성은 있다. 다만 한글창제는 집현전의 주 업무도 아니었고 큰 역할을 하지도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 ↑ 세조가 농사일을 보러 갈 때를 노리려고 했다는 말이 국문장에서 나온다.
- ↑ 유응부는 성삼문의 부친인 성승의 친구라서 성삼문의 아버지뻘 되는 동료였다.
- ↑ 성승이 운검을 서게 된 것은 세조 측에서 결정한 사안이 아니었다.
- ↑ 유성원은 끌려가기 전에 가족과 함께 자살했다.
- ↑ 사실 야사라고 하기도 뭐 한게, 이런 기록들은 남효온의 전기소설 육신전에 처음 등장하는 기록들이다.
- ↑ 조선왕조실록에서 단종 복위 운동을 모의하며 신숙주는 나와 좋은 사이지만 죽어 마땅하다라고 했다고 김질의 고변에 나온다. 근데 이 말은 신숙주에게 직접 한 말이 아니라 일종의 '뒷담화' 식으로 동료들에게 한 말이다. 결국 신숙주에게 폭언을 퍼 부은 것은 야사.
- ↑ 사실 이정도만 돼도 매우 운이 좋은거다. 연산군 때는 여자고 먼 친척이고 멸족했으니 말이다.
- ↑ 강희안을 놀리는 시를 지었을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