솜 전투

Battle of Somme


제1차 세계대전 중 1916년 7월 1일부터 동년 11월 18일까지 벌인 영국의 대공세. 1918년 아라스 전투와 비교하기 위해서, 1차 솜 전투라고도 부른다.

1차 솜므 전투
날짜
1916년 7월 1일 ~ 11월 18일
장소
솜므 강(Somme River)
<:>영-프 연합군독일군
지휘관더글라스 헤이그
페르디낭 포슈
핸리 롤린슨
에밀 파욜
휴버트 고프
조세프 알프레드 미켈러
바이에른 대공 루프레히트[1]
맥스 폰 갈비츠
프리츠 폰 벨로우
병력(7월 1일)
영국군 13개 사단,
프랑스군 11개 사단
(11월 1일)
영국군 51개 사단,
프랑스군 48개 사단
(7월 1일)
10과 1/2개 사단
(11월 1일)
50개 사단
피해 규모사상자
영국군 419,000여 명
프랑스군 204,000여 명
사상자
465,000여 명 ~ 595,000여 명
결과
영-프 연합군의 공격 실패
기타
독일군의 베르됭에서의 공격 중지.

1 소개

1916년, 서부전선에서 펼쳐진 대규모 전투 중 하나. 철조망기관총이 군인들의 목숨을 추수한, 제1차 세계대전의 전투 가운데 가장 잔인한 학살극을 벌인 전투다. 작전 개시 당일에만 인명 손실이 영국군에서만 5만 8천명으로 대략 3~5개 사단이 하루 만에 녹아 없어졌다(...). 이 때문에 영국 미디어들은 매년 7월 1일만 되면 아직도 희생자들을 기리는 추모 기사를 내보낸다.

최초의 전차 투입, 이동 포격 탄막 전술의 전개 등으로도 알려져 있다.

2 전투 이전

1916년에 접어들 당시, 연합군측은 러시아군의 피해가 컸던 동부전선에서는 수세로 전환하고, 서부전선에서는 영국-프랑스-이탈리아 3국이 대규모 공세를 시도할 계획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는 독일군베르됭 전투를 걸어오면서 무산된다. 베르됭 전투로 인해 공세의 주력을 담당할 것으로 여겨졌던 프랑스군이 대거 빠져나갔고, 반면 영국은 병력 증강을 위한 대규모 모병 활동의 결과로 비로소 프랑스군에 필적하는 규모의 군대('키치너 군대')를 갖추게 되면서 솜 전투는 1차 세계대전 역사상 최초로 영국군이 주도하는 공세가 되었다. 실제로 이 전선에서 프랑스 총사령관인 조제프 조프르는 영국 원정군 총사령관인 더글러스 헤이그에게 모든 권한을 위임한다.

또한 최초 계획이었던 8월 1일에서 7월 1일로 공세 일자가 앞당겨졌는데, 이는 베르됭 전투의 전황이 급박하게 전개되면서 프랑스측이 공세시기를 앞당기기를 강력하게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러시아 쪽에 브루실로프 공세를 요구한 것과 마찬가지로, 프랑스는 어떻게 해서든 베르됭에 가해지는 독일군의 압력을 줄이고자 하였다.

초기 전투 목표는 베르됭 전투의 독일군과 비슷한 것이였다. 즉 독일군의 예비병력을 최대한 고갈시켜버리겠다는 것. 그러나 독일군의 주력이 베르됭으로 향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공격의 주도권을 쥔 영국군 총사령관 더글러스 헤이그는 '이참에 여길 뚫어서 독일군 서부전선을 확 붕괴시켜버리자'는 야심찬 목표를 품게 되었다.

3 전투 경과

8일 간의 준비포격에 이어 7월 1일 영국군의 돌격이 벌어졌다. 하지만 대량 포격에도 독일군의 종심방어망은 상당부분 남아있었다. 포병이 다 때려 부쉈으니 소총 들고 유유히 걸어가 깃발만 꽂으면 된다고 교육받았던 영국군의 보병들은 개전 첫날부터 독일군에게 대량으로 학살을 당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단 하루만에 5만 8천명의 인명이 사라졌는데, 심한 곳에서는 기관총반 1~2분대에게 대대 급 병력이 쓸려버린 곳도 있었다고 한다.

공격준비 포격이 효과를 거두지 못한 까닭에는 여러 주장이 있는데, 영국군 포탄의 품질 불량으로 불발탄이 많이 나왔다는 주장도 있고 무른 솜 지방의 토질을 들기도 한다. 아직도 경작지 개간 중에 불발탄이 심심찮게 나온다고. 여기에 워낙에 많은 수의 야포를 일단 동원하다 보니 발생한 사거리 격차 문제도 심각했다. 프랑스군이 동원한 포는 사실상 목표거리를 달성했지만, 소구경까지 끌고 온 영국군의 포격은 허울만 좋았지 사실상 전장에 닿지도 못하고 중간에 떨어졌다. 게다가 영국군이 쓴 포탄의 대부분은 참호나 철조망 등의 시설물의 파괴를 기대할 수 없는 인마살상용 유산탄(shrapnel)이었지 참호 등의 구조물들을 부술 수 있는 고폭탄(High Explosive-HE)이 아니었다. 그래서 제대로 포격한 곳은 진격했지만, 그렇지 않은 곳은 위에 언급한 예처럼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이 미친 짓을 하고도 공격은 5개월 이상 지속됐다. 전투를 시작한 이유였던 다른 곳 (베르됭같이)의 사정이 나아지지 않았기 때문에 계속 공격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이 뒤부터는 마찬가지로 참호전의 연속. 전형적인 참호전 공격이 지속됐고 인명피해는 첫날만큼은 아니라도 꾸준히 발생했다.

다만 공격이 반복되면서 영국군의 공격 능력은 조금씩 성장해갔다. 대표적인 게 최초의 전차Mark I이 공세 후반기인 9월 15일 전선 돌파를 위해 나온 것이다. 다만 전투에서만 쓸 만했지, 작전술 적이나 전략적인 돌파를 성공하지는 못했다. 아직 전차를 쓰기엔 기술적으로도, 작전 적으로도 조건이 성숙하지 못한 때였다. 사용 그 즉시는 독일군에게 큰 정신적 타격을 입혔지만 전차 자체의 성능 문제로 다수가 고장 났고, 독일군도 곧 익숙해져서 대처 방법을 찾아냈다. (기술적 한계로 장갑이 얇아서 총알이나 막아내지 포에는 간단히 뚫렸다.) 실질적으로 전차가 의미를 가지게 된 건 이후에 제병협동 전술이 확립된 이후였다.

4 결과

최종적으로 연합군은 12km 앞으로 전진 했는데 이 때 발생한 인명 손실은 영국군(영연방군 포함) 42만 명, 프랑스군 20만 명. 이를 막기 위해 싸웠던 독일군의 인명 손실은 50만~65만 명가량. 양측 피해를 합치면 1km 당 대략 10만, 전체 약 120만 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한 셈이다. 땅값이 제일 비싼 땅 이쯤 되면 공격으로 얻은 땅이 전사자 매장하기도 부족하다라는 참호전의 평가가 실감이 나는 수치다. 덕분에 1차 대전의 지옥 같은 참호전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전투가 되었다.

다만 이 전투는 장기적으로 연합군에게 이득을 준 전투가 됐다. 솜에서의 공격 자체는 실패했지만 독일의 병력을 솜에 집중하게 해 다른 곳(베르됭 등)의 압력을 줄인다는 것에는 성공했고 서부전선의 주도권을 획득했다. 그리고 영국은 솜 전투를 기점으로 실수를 분석하며 참호전 공격 능력을 꾸준히 상승시켰다. 비록 피로 얻은 경험이었지만 그 경험을 꾸준히 발전시켜나가 전쟁 말기에 연합군의 주축이 될 수 있었다. 반면에 독일은 이 전투에서 입은 병력 손실을 메꾸지 못했다. 그렇잖아도 베르됭에서의 도살 작전으로 큰 병력 손실을 입은 상황에서 솜 전투까지 더해지면서 확연히 약화되기 시작한 것. 루프레히트 바이에른 왕세자는 이 상황을 이렇게 요약했다. "전쟁이 시작할 때 있었던 정예 병력들의 다수는 베르됭에서 쓰러졌고, 살아남은 나머지는 전부 솜에서 쓰러졌다."

...다만 그 이득이 그 인명피해를 감수할만했는가는 별개의 문제. 임팔작전으로 일본군은 보급의 개념을 알게 되었다 급의 소리 정작 일본군은 임팔작전으로도 보급의 개념을 못배웠다. 그러니까 일본군 (...)

5 트리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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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권에서 일명 Going over the top 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사진으로 기관총탄과 포탄이 난무하는 무인지대로 돌진을 시작하려는 영국군을 찍은 사진으로 솜전투 관련해서 가장 유명한 사진중 하나일 것이다.[2]
  • 당시 영국군은 Pals(팔스,지역연대)라고 해서 한 부대에 같은 지역/구역의 사람들을 몰아서 배치하는 방식을 사용했다.(예를 들면 맨체스터 출신들만 모아놓은 부대는 '맨체스터 팔스' 이런 식) 서로들 잘 아는 사이이니 전투력을 늘리는 데 도움이 될 거라는 판단에서 한 것인데, 이게 솜 전투에서 최악의 결과를 내버렸다. 한 지역의 젋은 이들이 떼거지로 몰살당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 [3][4] 영연방 캐나다군 소속의 뉴펀들랜드 연대는 공격개시 20분만에 총원 780명 중 712명의 사상자를 내기도 했다. 영국 정부는 상황을 파악하고 이후에는 가능하면 한 부대에 다른 지역 사람들이 고루 배치되도록 방침을 바꾸었다.
  • 당시 아프리카 가봉에서 아프리카인들에게 무상 의료를 하던 알베르트 슈바이처는 이 전투 소식을 듣고 침울했다. 그 무렵 아프리카 사람들은 전쟁을 벌일 때 아이들이나 여자(그러니까 비전투원)는 죽이지 않고 저항하지 않은 자는 건드리지 않으며 승자는 패자에게 보상금으로 가축을 준다[5]는 이야기를 하면서 "백인은 전쟁을 하면 몇 명이나 죽습니까?"라고 묻기에 이 솜 전투를 생각했지만, "당신들이 생각하기에 가장 많은 수가 죽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이어지는 아프리카인들의 반문이 걸작.
"그럼 백 명도 넘게 죽입니까? 백인은 너무나도 잔인하군요."

"백인은 부자로군요. 그 많은 사망자에게 보상을 줘야 할 테니까요."

이런 답변이 돌아와 슈바이처는 더더욱 할 말을 잃었다고 한다. 사실 이런 이야기는 바리에이션이 많아서 식인 풍습이 남아 있는 오지의 원주민과 선교사의 다음과 같은 얘기도 있다.
원주민 : "그렇게 많이 죽습니까?"

선교사 : "그렇습니다."
원주민 : "그러면 백인도 죽인 적의 시신을 먹나요?"
선교사 : (질겁을 하며)"아닙니다."
원주민 : "백인들은 참 이상하군요. 먹지도 않는다면서 사람을 왜 그렇게 많이 죽입니까?"

이런 종류의 이야기는 TV 드라마인 인디아나 존스에서도 나왔는데, 거기에선 좀 다르게 원주민들이 말하는 한 번의 전투에서 가장 많은 전사자 수가 10명으로 나온다. 일명 '문명인'이 오히려 '미개인'보다 잔혹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때 자주 인용되는 이야기.
  • 또한 여담으로 반지의 제왕의 작가로 유명한 존 로널드 루엘 톨킨도 영국군 장교로 이곳에 왔다가 간신히 살아 돌아왔다. 그의 작품인 반지의 제왕에 여러 영향을 끼친 일 가운데 하나. 행운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참호 독감 (Trench Fever)에 걸려서 후방으로 후송되었다. 하지만 후송 직후 톨킨의 동창이자 친구들, 대대 원들 그리고 자신의 부대를 지휘한 임시 부대장까지 전사했다. 이 때문에 한동안 죄책감에 시달렸다고 한다.
  • 1차 대전 뒤 예술가지식인들이 괜히 데꿀멍한 게 아니다. 1차 대전 뒤에 나타난 다다이즘 미술 사조와 허무주의적인 문학은, 전쟁을 거쳐 드러난 물질문명의 추악한 모습(기관총, 독가스)을 반영했다고 보면 충분하다.
  • 영국군에서 전투의 준비 및 초반을 기록영화로 촬영했고, 이것을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도 했다. 홍보영상이라 당연히 전쟁의 참상이 아닌 깔끔하고 해맑게 웃는 병사들만 나오는데, 이들 중 상당수가 얼마 후 전쟁터에서 죽거나 불구가 되었으니 안타까울 따름.#
  • 2014년 8월 14일 영국 BBC3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 기념 다큐드라마 '아워 월드 워Our World War' 2화로 솜 전투를 그린 "Pals"를 방영하였다.(상술했던 팔스와 관련한 드라마이다)#
  1. 비텔스바흐 가 당주로 반나치 활동 도중 수감되었다가 연합군의 진군 이후 풀려난다.
  2. 출처는 영문위키
  3. 이런 팔스에 소속되어 참전한 어떤 젊은이는 전쟁이 끝나고 동네에 돌아와 보니 동네에 자기 또래의 남자가 모두 죽어 자기만 남는 암울한 상황을 겪기도 했다.
  4. 몇년 간 죽도록 싸워서 겨우 살아남아서 고향에 돌아갔다. 어린시절 부터 알던 수백명이나 되던 동네 친구들, 형, 동생, 심한 경우 삼촌, 아저씨들까지 말그대로 전멸하고 자신만 살아 남은거다, 반겨주는건 가족 뿐이고 주변사람들은 자식이나 형제, 남편 잃은 분노에 자신을 겁쟁이라서 살아남았다고 매도한다, 이들의 더 심한 비극은 그렇게 가까운 사람들 몇백단위로 계속 죽어나가는 걸 바로 옆에서 계속 지켜봤다는 것이다.. 멀쩡히 살아 견뎌낸 사람이 비정상인 지경이다
  5. 승자가 안 빼앗고 패자에게 보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