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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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삼성 블루윙즈 U-12 감독
이관우 (李官雨 / Lee Kwan-Woo)
생년월일1978년 2월 25일
국적대한민국
출신지서울특별시
포지션공격형 미드필더, 측면 공격수
신체조건175cm / 69kg
등번호13번
프로입단2000년 대전 시티즌
소속팀대전 시티즌(2000~2006)
수원 삼성 블루윙즈(2006~2010)
홈 유나이티드(싱가포르 S리그) (2013~2014)
스태프수원 삼성 블루윙즈 U-12 코치 (2015)
수원 삼성 블루윙즈 U-12 감독 (2016~)
국가대표13경기 / 1골
수원 삼성 블루윙즈 역대 주장
김남일
(2006)
이관우
(2007)
송종국
(2008)
2003 K리그 베스트 일레븐
FW
김도훈
FW
마그노
MF
신태용
MF
이성남
MF
이관우
MF
김남일
DF
최진철
DF
김태영
DF
김현수
DF
산토스
GK
서동명
2006 K리그 베스트 일레븐
FW
우성용
FW
김은중
MF
김두현
MF
백지훈
MF
이관우
MF
뽀뽀
DF
장학영
DF
마토
DF
최진철
DF
김영철
GK
박호진
2007 K리그 베스트 일레븐
FW
이근호
FW
까보레
MF
따바레즈
MF
이관우
MF
김기동
MF
김두현
DF
아디
DF
마토
DF
황재원
DF
장학영
GK
김병지

1 클럽

대한민국의 전 축구 선수. 현재는 수원 삼성 블루윙즈의 U-12 유스 팀 감독.

한양공고에 다녔을 때 청소년 국가대표팀 시절부터 패스가 좋은 선수로 유명해서 1996년 AFC U-19 축구 선수권 대회(대한민국에서 열린 대회로 우승), 1997년 말레이시아 FIFA U-20 월드컵 대회에도 참가했다. 다만 이 대회에서 브라질에게 3-10, 프랑스에게 2-4로 참패하며 1무 2패-남아프리카 공화국에게 비겼다-로 탈락,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이 좋지 못한 모습을 보여서 일반 축구팬들에게는 특별히 좋은 인상을 남기지는 못했다.[1] 뭐 당시 청소년 대표팀으로 뛰던 연령대 선수들이 훗날 월드 슈퍼 스타의 반열에 오르는 티에리 앙리, 다비드 트레제게가 있었기에 그렇다쳐도 브라질에게 너무 참패했고 가장 만만한 남아공전 무승부가 두고두고 아쉬웠다. 남아공이라도 이겼더라면 와일드 카드를 노릴 법했기에. 이때, 브라질은 한국 말고도 프랑스를 3-0,남아공을 2-0으로 이기면서 조예선 3전전승 15득점 3실점을 기록했는데 그나마 한국은 3골이라도 넣었다. 이 대회에서 브라질을 상대로 3골을 넣은 팀은 대한민국이 유일하다.그러나 실점을 더 크게 져서 놀림감이 되는가 했지만 8강전에서 브라질벨기에를 10-0으로 이기면서 한국보다 더한 참패를 당했다. 이 15골은 현재까지도 피파 주최 대회 사상 조예선 최다 골 기록이다.[2]

1999년에 J리그 이적을 도모하지만 당시 K리그에 남아 있던 드래프트 문제로 진출하지 않았고, 한양대학교를 졸업한 후 2000년에 대전 시티즌의 지명을 받아 입단했다.

당시 대전 시티즌에는 1997년에 창단 멤버로 입단하여 팀의 외로운 에이스 역할을 소화하던 '샤프' 김은중이 있었는데 그 전까지 미드필더진의 도움을 많이 받지 못하면서 혼자 골문 앞에서 악전고투하던 김은중에게 꿀같은 패스를 쏙쏙 잘 넣어주던 이관우는 최고의 조력자였다. 이 둘의 활약으로 대전 시티즌은 2001년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FA컵 우승을 하기도 하는 등 행복한 시절을 보냈다.[3]

게다가 이 당시 남자다운 외모의 김은중, 여성들의 마음을 흔드는 동안미남 이관우의 외모 조합도 팬들의 마음을 매우 흔들었고, 두 사람의 이름을 한자씩 따와 은우라고 불렸다. 2001년의 FA컵 우승, 2002년 월드컵 이후로 대전 축구팬들이 늘어났을 때 이관우를 쫓아다니는 여성팬들도 상당히 많았다.

그러나 대전 시티즌의 재정 문제는 갈수록 심각해져갔고, 결국 대전은 팀 운영비 충당을 위해서 이관우와 김은중을 팔 수밖에 없었다. 결국 2004년에 김은중이 먼저 FC 서울로 떠나고, 김은중이 떠난 후 이관우는 2년간 대전을 홀로 지키다가 2006년 여름에 수원 삼성 블루윙즈로 이적하게 된다. 원래 이관우는 2007년에 FA가 될 예정이었기에 이 때까지 대전에 남은 후 J리그 진출을 고려하고 있었으나, 이적료 수입이 급했던 대전 시티즌이 선수에게 동의를 구하기에 앞서 먼저 수원과 협상해 버려서 잠시 대전과 마찰을 빚기도 했다.

수원으로 이적한 후에도 팬들의 반응은 열광적이었다. 적응기가 없었으며, K리그에서 가장 뛰어난 플레이메이커이고, 팀에 대한 충성도가 높은 선수였기에 라이벌 팀인 대전 출신이라는 것은 팬들에게 문제가 되지 않았으며, 팬들과 팀 동료들에게 좋은 모습으로 비췄다. 수원에서는 2006년, 2007년 연속으로 좋은 활약을 보여서 K리그 올스타에 선정되었고,(2007시즌에는 주장을 역임했다.) 팀이 우승한 2008년에도 22경기 출장 2골 3도움으로 좋은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대전 시절부터 잔부상이 잦은 유리몸으로 악명을 떨쳐서, 매 시즌마다 풀 시즌을 소화하지 못하고 몇몇 경기를 부상으로 쉬는 경우가 잦았다. 수원 이적 후에는 큰 부상 없이 잘 뛰나 싶었지만 2009시즌 왼쪽 무릎 연골 부상으로 3경기 출장에 그치며 한 시즌을 통째로 날려먹게 되고, 2010년에 또 다시 무릎 연골을 다치면서 기나긴 재활을 하게 된다. 시즌 후반기에 간신히 복귀하긴 했지만 이미 수원의 중원에는 김두현이상호 같은 쟁쟁한 선수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2년간 쉬면서 폼이 뚝 떨어진데다가 나이가 30대 중반을 향해가다 보니 주전 경쟁에서 완전히 탈락하고 재계약도 불발되었다.

2010 시즌 후 자유계약인 상태에서 수원은 재계약을 포기하였고, 한때 친정 팀 대전 시티즌이 재영입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이야기가 돌았으나 이관우 측은 돈 문제보다 '자기 폼을 찾지 못한 상태에서 대전에 입단하여 민폐를 끼치기 싫다'라는 이유로 거절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수원 시절 워낙 고액 연봉자였던 터라 연봉을 맞춰주기 어려운 반면 폼을 되찾을 확률이 높지 않다는 문제로 타 K리그 팀들도 영입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다.[4]

본인도 현실을 직시하고 제2의 인생을 준비하는지 2011년 경기도 화성시 동탄신도시 쪽에 음식점을 개업해 사장님이 되었다. 공식적으로 은퇴를 선언하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은퇴. 이 음식점이 낙지집이라 수원의 용병인 게인리히와 비슷한 별명인 낙지왕이라는 별명을 얻었다.[5] 본인이 수완이 있는건지 이름이랑 돈만 투자하고 다른 사람이 운영하는건지는 모르겠지만 낙지집은 장사가 꽤 잘돼서 오산시에 분점도 냈다.

그렇게 낙지를 굽고 볶으며 해물과 함께하는 제2의 인생을 사는가 했는데 2013년 싱가포르의 S리그에 속해 있는 홈 유나이티드 FC[6]에 선수로 복귀했다. 전성기에 비해 몸이 좀 불어났지만 아직 죽지않은 발재간을 선보이며 두자리수 득점을 기록, 팀의 공격을 이끌고 있다. 낙지집은 그대로 영업 중인데 다른 사람이 맡아서 운영하고 있는 모양. 홈 유나이티드 FC싱가포르 컵 우승 경기에도 출장해서 경기 MVP로 선정되어 상금 1,000싱가포르 달러를 받았다. 이임생 전 감독의 말에 의하면 싱가포르 리그에서 내로라하는 선수 대접을 받고 있는 모양.

2 지도자 생활

2014년을 마지막으로 은퇴를 선언하고 2015년부터 수원 삼성 블루윙즈 U-12 유스 팀의 코치직을 맡으며 지도자 생활을 시작한다.

3 해설위원

MBC에서 유로2016 해설로 참여했는데 해설위원으로는 첫 데뷔인 만큼 부정확한 발음, 피상적인 표현 했거등요? 및 부족한 어휘력으로 시청자들로부터 질타를 받았다. 그러나 조별리그를 통해 어느정도 방송에 적응한 후, 토너먼트에 접어들면서 발음이나 말을 버벅대는 부분은 꽤 개선된 모습을 보였다.

4 플레이스타일

별명은 '시리우스'로, 그라운드에서 눈부신 플레이를 펼친다는 것과 이관우의 수려한 외모가 잘 어울려서 언론과 팬들이 다같이 불러준 별명이다.

뛰어난 개인기와 번뜩이는 패스, 정확도 높은 크로스와 준수한 프리킥까지 공격형 미드필더에게 요구되는 기술적인 면을 대부분 가지고 있다는 점이 강점이었으나 '유리몸', '저질체력'으로 대변되는 떨어지는 피지컬이 단점. 대전 시절부터 '활동량이 적다', '압박에 약하고 90분 풀타임을 뛸 체력이 없는 선수'라는 지적을 받곤했다. 체력 문제는 본인이 노력을 하고 요령을 깨치면서 90분 정도는 문제없이 소화할 수 있게 되었고 수원 삼성으로 이적한 후에는 활동량도 점차 늘리기 시작했으나 조원희김남일 등에 비해서 활동량이 적은편인 것은 사실이었다. 애초에 많이 뛰는 타입이 아니었다. 주 포지션은 공격형 미드필더였고, 수원에서는 3톱의 측면 공격수나 중앙 미드필더로 뛰기도 했다.

전성기 때에는 대한민국리켈메라고 불리던 윤정환의 뒤를 이을 K리그 대표 플레이메이커로 주목받기도 했다.

다만, 윤정환과 이관우 사이에 고종수를 끼워넣는 사람도 있는데 고종수의 전성기가 워낙 짧아서 그렇지, 이관우와 한 두살 차이다. 그리고 윤정환, 이관우와 고종수는 플레이 스타일이 확연히 달랐다. 고전적인 플레이 메이커라기보단 쉐도우 스트라이커에 가까웠고 몸싸움을 싫어하지도 않았다.

주발은 오른발이지만 양발이 거의 비슷할 정도로 였으며, 코너킥 키커로 나설 때 왼발로 처리하기도 했다.

5 여담

2002년 월드컵 이후에 국가대표 소집 문제로 논란이 벌어질 때 'K리그 선수에 비해 해외 리그 선수가 국가대표팀 선발에 유리하다'는 떡밥이 나돈 적이 있었다. 이때 그 피해사례(?)로 자주 거론되었던 인물이 이관우. K리그에서 공격형 미드필더 및 측면 공격자원으로 좋은 모습을 보였지만 대표팀에선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실제로 이건 차별때문이 아니라 대표팀에 뽑힐 법한 즈음에 부상 때문에 몸이 정상이 아닌 경우가 잦았고, 대전 시티즌 때처럼 자신이 공격의 중심이 되는 스타일이 아닐 때에는 인상적인 경기력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체력이 약하고 압박에 취약하다는 비판이 없는 말도 아니었다. 2006년 월드컵을 앞두고 잠시 대표팀에 몸담으며 팬들의 기대를 모았으나, 가나와 평가전에서 마이클 에시엔에게 글자 그대로 박살이 나면서 지네딘 지단급의 피지컬 괴물이 아닌 이상 플레이 메이커 전술은 무리임을 증명했다.[7] 결국 2008년 이후론 국가대표로 뽑히지 않았다.
  1. 그래도 이관우는 브라질을 상대로 멋진 골을 넣어서 어느정도 인상을 남기긴 했다. 또 당시 대한민국 청대는 공격일변도의 팀이라 수비에서 탈탈 털리긴 했지만 공격적으로는 어느정도 위력적인 모습을 보여주었고, 팀의 에이스였던 이관우는 화려한 공격력으로 주목을 끌긴했다.괜히 매번 국대 떡밥이 있던 것이 아니다
  2. 당시 선수진은 [1]에서 확인 가능하다.
  3. 2002년에는 대내외적 악재에 시달렸지만 2003년 최윤겸 감독의 지도로 팀을 추슬러 반등에 성공, 팀 연승 기록을 갈아치우며 홈승률 77.3%, 평관 1만 9천, 주중 최다관중 4만 3천 7백명을 기록한다. 이해는 그야말로 대전의 전성기. 구단도 시민들도 행복했던 시간이었다. 2004년부터 2008년 사이에 영광의 주역들이 모두 떠나 버리고 최윤겸 감독도 떠나면서 구단도 기울기 시작한다.
  4. 수원에서 나오던 이야기로는 2년간 훈련을 하지 못해서 신인선수보다 못한 경기력을 보였다고 할 정도였다.
  5. 이 시기 한 여성팬이 음식점에 찾아왔다 은퇴한 그의 모습을 보고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다고 한다.
  6. 이임생이 2014년까지 감독으로 이끌었다.
  7. 2005년 동아시안컵에도 출전했는데 그 때 본프레레 감독이 이끄는 한국은 무승 최하위라는 참담한 성적을 거뒀다. 물론, 그 성적이 전부 이관우 탓은 아니지만 이관우도 출전한 경기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진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