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원

?width=120 (클럽별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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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윤겸
(강원 FC)
남기일
(광주 FC)
손현준
(대구 FC)
김태완
(상주 상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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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선홍
(FC 서울)
서정원
(수원 삼성 블루윙즈)
김도훈
(울산 현대)
이기형
(인천 유나이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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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상래
(전남 드래곤즈)
최강희
(전북 현대 모터스)
조성환
(제주 유나이티드)
최순호
(포항 스틸러스)
K리그 챌린지 감독 보기 ▶


그가 만약 유럽으로 일찍 나갔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으로 유명한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사진은 1998 월드컵 벨기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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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감독이다. 간지폭풍
수원 삼성 블루윙즈 감독
서정원 (徐正源 / Seo Jung-Won)
생년월일1970년 12월 17일
국적대한민국
출신지경기도 광주시
포지션좌우측 풀백 / 측면 공격수
신체조건173cm
등번호11, 14
별명세오[1], 날쌘돌이
프로입단1992년 LG 치타스
소속팀안양 LG 치타스 (1992~1997)
상무 축구단 (1994-~1995, 군복무)
스트라스부르 FC (1997~1998)
수원 삼성 블루윙즈 (1999~2004)
SV 잘츠부르크 (2005)
SV 리트 (2006~2007)
지도자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U-20 전력분석원 (2009~2010)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U-23 전력분석원 (2009~2010)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코치 (2010~2011)
수원 삼성 블루윙즈 코치 (2012)
수원 삼성 블루윙즈 감독 (2013~)
국가대표87경기 16골
2002년 FA컵 MVP
김은중
(대전 시티즌)
서정원
(수원 삼성 블루윙즈)
에드밀손
(전북 현대 모터스)
수원 삼성 블루윙즈 역대 주장
박건하
(2001)
서정원
(2002)
김진우
(2003)
수원 삼성 블루윙즈 역대 감독
윤성효
(2010~2012)
서정원
(2013~)
-
1999 K리그 베스트 XI
FW
안정환
FW
샤샤
MF
서정원
MF
고종수
MF
데니스
MF
고정운
DF
강철
DF
김주성
DF
마시엘
DF
신홍기
GK
이운재
2001 K리그 베스트 XI
FW
우성용
FW
산드로
MF
신태용
MF
서정원
MF
송종국
MF
남기일
DF
우르모브
DF
김현수
DF
김용희
DF
이영표
GK
신의손
2002 K리그 베스트 XI
FW
김대의
FW
유상철
MF
신태용
MF
이천수
MF
안드레
MF
서정원
DF
김현수
DF
김태영
DF
최진철
DF
홍명보
GK
이운재
K리그 30주년 레전드 베스트 XI
FW
황선홍
FW
최순호
MF
김주성
MF
신태용
MF
유상철
MF
서정원
DF
최강희
DF
김태영
DF
홍명보
DF
박경훈
GK
신의손
수원 삼성 블루윙즈 10주년 베스트 XI
FW
샤샤
FW
나드손
MF
데니스
MF
김두현
MF
고종수
MF
김진우
MF
서정원
DF
최성용
DF
박건하
DF
이병근
GK
이운재
수원 삼성 블루윙즈 20주년 레전드
18
박건하
13
산드로
14
서정원
22
고종수
29
곽희주
7
김진우
3
이병근
1
이운재
11
데니스
12
나드손

2001, 2002, 2003 수원 팬들이 뽑은 올해의 선수

날쌘돌이
수원 삼성의 레전드
수원과 안양의 지지대 더비를 만든 결정적 역할을 한 사람

1 선수 생활

1.1 프로 경력

1.1.1 LG 치타스 / 안양 LG 치타스 시절

1992년 LG 치타스 소속으로 프로팀에 데뷔하였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축구대표팀에서의 활약으로 FC 바르셀로나, 바이어 04 레버쿠젠 등의 팀으로부터 영입 제의를 받았으나, 당시 군대 문제 및 LG 치타스의 소극적인 이적 태도 때문에 해외리그 이적에 실패하였다. 이때 올림픽 대표팀 감독이던 데트마르 크라머도 재능을 알아보고 독일로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그놈의 군대 문제.[2] 그리고 그걸 해결하고 왔더니 안양 LG가 징징거리면서 선수를 놔주지 않았다.

참고로 크라머는 레버쿠젠에서 차범근을 지도했고 바이에른 뮌헨을 분데스리가 우승에 올려놨던 인물이다.

[[파일:/20120808_55/1344406145781Fxs9E_JPEG/%C2%F7%BA%D5.jpg]]

1997년에는 벤피카에서 영입 제의가 있었고 실제로 벤피카 소속으로 훈련을 같이 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벤피카는 서정원이 월드컵 아시아예선에 출장하지 않기를 희망하였으나 당시 국가대표 감독이던 차범근 감독은 국가대표로 호출하고 싶어서 벤피카 이적은 서정원이 속고 있는 것이라고 언론사에 주장하였다. 그래서 당시 한국 방송국과 신문사는 차범근의 말을 믿고 서정원이 벤피카에 입단을 구걸하러 간 것으로 알고 있었다... 흠좀무

그로 인해서 최종적으로대한축구협회에서는 국가대표 콜업을 거부한 이 건으로 인해 서정원에게 미운 감정을 가져서 국제이적동의서를 발급해 주지 않아서 이적이 무산되었다.

그러나 사실은 벤피카의 레전드 에우제비우홍명보를 만나면 서정원의 안부를 매일 묻는 것으로 봐도 알 수 있듯이 벤피카의 9번 배번을 받고 정식으로 이적이 될 뻔한게 맞던 것이었다. 전지 훈련도 같이 한 것도 그런 맥락. 그래서 서정원의 골수팬들은 저 사건으로 차범근을 별로 좋게 생각하지 않는다.

1.1.2 르 샹피오나 진출

대신 시간이 지나고 이적료 110만 달러에 프랑스 르 샹피오나스트라스부르로 이적하여[3] 당시 이 금액이 파격적인 금액이라서 안양 LG도 승락 더군다나 당시에는 르 샹피오나 리그가 유에파 랭킹 2위였다. 12경기에서 4골을 넣는 인상적인 활약을 보이며 당시 강등권이돼서 서정원을 급하게 영입한 스트라스부르의 강등권 탈출에 일조했다. 그런데 서정원이 스트라스부르로 영입됐던 때 리그 경기가 12경기 남았을 때였는데, 그 적절한 시기에 12경기를 모두 출전했고 팀의 상승세를 주도해 일약 스타로 떠오르며 다음 시즌 배번 11을 받았다. 여담으로 서정원은 프랑스 리그 데뷔전이었던 올림피크 리옹 전에서 데뷔골을 넣었고, 지롱댕 보르도 전에서는 당시 보르도의 신예 윙어 키키 무삼파와 서로 1골씩 주고 받으며 4-4 경기를 연출하기도 했다.[4]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8/1981654_13450.html
당시 스트라스부르의 감독이 뒤게페로(Jacky Duguépéroux)를 거쳐서 르네 지라르[5]였다. 그러나 지라르가 다음 해에 프랑스 국가대표팀 수석코치로 가면서 감독이 바뀐 후 아시아 선수라는 이유[6]로 기용하지 않았다.

당시에는 서정원을 기용하지 않자 구단 수뇌부도 서정원에게 스위스 리그에 강팀으로 임대가는게 어떠냐고 제안했지만 당시에 본인 폼이 좋았던건 알았던 서정원은 거부. 실제로 그럴만도한게 당시에 잘 나가는 스트라스부르의 핵심 선수들이 서정원,올리비에 다쿠르,이스마엘 정도였다.[7] 서정원이 한국으로 왔을 때도 스트라스부르 서포터들이 편지를 보내며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참고로 이후로 팀은 부진에 빠져 결국 2부 리그로 강등되었다. DTD그 시즌을 벤치에서 보냈으며, 계약기간이 끝난 후에도 발렌시아 C.F., 바이에른 뮌헨의 오퍼가 있었지만 에이전트의 업무미숙(...) 때문에 K리그로 복귀하게 된다. 이때 수원 삼성이 해외에서 다시 불러주면 돌아가는 조건으로 서정원의 마음을 열게 된다. 더군다나 안양 LG 시절에는 서정원의 해외진출을 그렇게 막았으니..
하지만 십자인대 부상으로 그 꿈은...

1.1.3 K리그 복귀, 그리고 K리그판 유다 신드롬

비록 해외 진출 때 잡음이 있긴 했지만, 많은 축구팬들은 서정원이 친정팀인 안양 LG로 돌아올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서정원은 데뷔 때부터 해외진출에 관해 안양 LG 프론트와 충돌이 잦아서 좋지 않은 감정이 많았고, 수원에서 다시 해외 진출을 적극적으로 밀어준다는 조건으로 당시 최전성기를 달리던 수원 삼성 블루윙즈로 소속을 바꾸게 된다. 이때부터 안양 LG와 수원 삼성간의 감정섞인 K리그 최고의 더비가 시작된 계기가 됐다. 그런데 수원에게 약속 받았던 해외진출은 K리그 복귀 후 십자인대 부상으로(...)
여기서 좀 웃긴점은 사실 서정원이 활약하던 시절은 럭키 금성과 안양 LG로 바뀌고도 동대문 운동장을 쓰던 시절이라 실제로 서정원이 안양에 잔디를 밟은 기간은 얼마 되지도 않는데 어쨋거나 저쨋거나 안양 LG팬은 서정원을 미워하게 된 웃긴 사례가 된다. 연고개념은 없다는 소리므로 결국 럭키 금성 시절부터 팬들이 싫어했다는게 정확한 꼴.

KBS 스포츠 다큐 '승부' - 슈퍼매치의 한가운데에 서다 근데 이거 ㅅㅇ더비보다는 지지대 더비에 더 맞는 얘기인데?? 당시 서정원은 안양 LG로 복귀하는 조건으로 안양 LG에서 서정원에게 준 50만 달러(당시 약 7억원) 반환청구소송에 피소됐다. 결국 서정원이 패소하면서 그 금액을 안양 LG에게 돌려줬다. 그 정도로 서정원과 안양 LG와의 관계는 험악했다. 또한 서정원은 프랑스에서 뛰면서 보스만 룰 사례나 에이전트(당시는 '매니저'로 표현) 제도를 접하면서 그동안 기존에 K리그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관행을 시도하기도 했다.

1999년에 수원 삼성으로 복귀한 이후 전 소속팀 안양을 상대로 오버헤드킥으로 골을 넣는 등 맹활약하여 K리그 2연패, AFC 챔피언스 리그 2연패[8], FA컵 등 많은 우승컵을 수원 삼성에 선사했다. 아시안 수퍼컵의 마지막 대회에서는 알 샤바브에서 우승컵을 뺏길 뻔 했으나 그 어려운 중동에서 서정원이 2골을 몰아붙이면 수원에게 우승컵을 가져다 주는 등 소위 폭발할 때 미친 활약을 했다. 특히 2003년 안양과의 라이벌전에서 넣은 골은 김○○기자의 K리그 베스트 골 5에도 선정될 정도로 멋진 골이였는데 이 골로 인해 안양은 0:2 패배하여 결국 수원과 서정원에 대한 라이벌 의식이 더 강해지는 계기가 됐다.

1.1.4 오스트리아 분데스리가 진출

파일:Attachment/Seo Ried.jpg

2005년에 은퇴하라는 주변의 권유를 뿌리치고[9] 오스트리아 SV 잘츠부르크로 축구 연수를 겸해서 자유계약으로 이적하였는데 이게 의외로 대박이었다.

잘츠부르크에서 12경기 2골이라는 괜찮은 성적을 올렸고, 다음 해에는 SV 리트로 이적하여 리그에서 7골을 기록하면서 막 2부에서 올라온 팀을 인터토토컵 종합우승을 거두게 하면서 UEFA 컵에까지 출전할 수 있게 만들었다. 덕분에 오스트리아 유명 일간지 <쿠리어>나 <슈포르트보헤>지에서 2년 연속 최우수 외국인선수로 선정[10]됐다. 그 활약으로 독일 분데스리가 1·2부리그 팀에서 괸심을 보이기도 했으나 나이와 지도자 공부 문제로 은퇴하였다. 은퇴 직전 대전 시티즌의 감독으로 있던 은사 김호 감독이 선수로 뛰어줄 것을 요청했으나 거절. 만약 그랬다면 수원팬들의 전투력이 상승했을지도?!

서정원의 말년 활약 때문에 오스트리아 리그가 K리그보다도 훨씬 수준이 낮은 것 아니냐고 비하하는 의견도 있는데 그렇지는 않다. 서정원의 K리그 마지막 시즌은 원래 포지션이 아닌 윙백으로 차범근이 출전시켜서 골 기록이 없었던 것이고 오스트리아에서도 SV 리트로 이적한 뒤에야 원래 포지션인 윙어로 뛸 수 있었다. 또한 서정원 외에 강철, 최성용, 노병준 등 K리그 정상급 선수들이 오스트리아에 진출한 적이 있지만, 이들 중 서정원처럼 센세이션을 일으킨 선수는 없다.

1.2 국가대표 경력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축구 국가대표로 선발되었으며, 그 때 잠시 함께한 데트마어 크라머 감독의 영향을 받았다. 국가대표 A대표팀으로 1994년, 1998년 월드컵에 출전했다.



특히 1994년 미국 월드컵 조별라운드 1차전인 스페인전에서 1-2로 뒤지고 있던 후반 45분에 홍명보-황선홍의 1:1 패스 후 상대의 오프사이드 트랩을 뚫은 뒤 홍명보의 패스를 받아 동점골을 넣기도 했다. 대한민국 축구 역사상 가장 극적인 골 1위로 꼽히는 명 장면이기도 하다.

1997년 프랑스 월드컵 최종예선 도쿄국립경기장에서 열린 한일전에서 경기의 흐름을 바꾸는 헤딩 동점골을 넣으며 도쿄 대첩의 시작을 알렸다.

그런데 정작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때는 팀의 추락과 함께 서정원 역시 눈에 띄는 플레이를 보여주지 못했다. 당시 서정원 본인의 사정도 있었는데, 프랑스로 출국하기 전 수두에 걸린 아들을 안아주다가 그만 아들의 수두가 옮아버려 비행기도 선수단과 따로 타는 등 전혀 제 컨디션이 아니었던 것.

국가대표 통산 기록은 87경기에 출장하여 16골을 기록하였다.

여담이지만 당시 이 골로 인해 이근호보다 먼저 "월드컵에서 골을 기록한 선수 중 가장 연봉이 적은 선수"라는 씁쓸한 칭호가 붙었다. 1990년 병장 월급이 9,400원이니 진짜 작은 셈. 이근호는 서정원에 비하면 고액 연봉이다. 아니, 그 전에 물가상승률을 고려해야(...) 그 당시 서정원은 방위병으로 복무하던 도중 대표팀에 소집되었다.[11]

2 플레이스타일

100m를 11초에 끊는 빠른 스피드를 활용 좌우측 측면을 휘젓는 플레이를 선호하며 체력이 좋아서 가끔은 윙백이 아닌가 의심이 될 정도로 90분 내내 미친듯이 움직였다. 한국의 윙 스페설리스트 계보를 이을 만한 선수.[12] 특히 1994년 월드컵 당시 스페인 전과 독일 전에서 보여준 플레이가 백미.

또한 가끔 오버헤드킥으로 골을 넣기도 하는 등 발을 활용한 능력은 나이를 먹어도 최고 수준이었다. 나이가 들면서 스피드가 죽자 맨유의 라이언 긱스처럼 중앙과 측면으로 움직이며 상대 수비수를 속임수로 벗겨먹는 플레이를 선호하였으며 K리그 말년에는 차범근 감독 부임 이후에 윙백으로 사용했다는 설도 있다.하지만 오스트리아 분데스리가 진출 이후에는 SV 잘츠부르쿠에서 중앙 미드필더로 활약하다가 자신의 원래 포지션인 윙으로 뛰는 것으로 SV 리트로 이적하고 2년 더 활약하다 은퇴했다.그 후 아마추어로 오스트리아 린츠에 있는 3부리그 팀에서 잠시 뛴거 같긴 하다.

3 지도자 생활

2009년에 홍명보 감독의 요청으로 U-20 대표팀 전력분석원 겸 코치로 활동하여 U-20 선수들의 8강 진출 기적에 큰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이후 2010년 조광래 감독의 부름을 받아 국가대표팀 코치로 합류했다. 이 과정에서 홍명보 감독에게는 어떠한 언질도 없었던 것으로 알려져 홍감독과 조감독 사이의 이상기류에 관한 의문이 터져나오기도 헀다.

2011년 조광래 감독이 성적 부진으로 국가대표 감독직에서 해임됨과 동시에 국가대표팀에서 물러난 후, 수원 삼성 블루윙즈차기 감독수석코치로 부임하였다. 이로써 고종수, 김진우 등 수원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 선수들과 함께 다시 코치진을 이루게 됐다. 2011 시즌 수원의 경기력에 불만을 품은 일부 팬들은 벌써부터 서정원 코치를 차기 감독으로 밀고 있는 모양.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축구 국가대표로 뛰던 시절에 잠시 함께하였던 독일 출신의 데트마르 크라머 감독이 그의 롤 모델이라고 하며, 이는 올림픽 멤버였던 신태용도 마찬가지다. 수원의 감독으로 승격된 후 직접 독일로 건너가 크라머를 찾을 정도였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독일의 영향을 좀 받은 편이라 울리 슈틸리케 국가대표팀 감독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다. 서정원 본인은 현재의 자신을 있게 해 준 장본인으로 크라머를 꼽고 있다. 하필이면 FC 서울과의 슈퍼 매치를 앞두고 크라머 감독의 부고를 듣는 바람에 착잡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3.1 2013 시즌

그리고 윤성효 감독이 2012년을 끝으로 팀을 떠남에 따라 수원의 제4대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리그 초반에 신선한 선수 기용으로 수원 팬들의 많은 지지를 얻고 있다. 특히 번외지명으로 들어온 김대경이나 그동안 출전 기회를 얻지 못했던 조지훈을 중용하고 있으며, 곽희주에디 보스나의 노쇠화로 인한 수비 불안으로 수비진의 세대교체 필요성을 느꼈는지 민상기연제민에게 기회를 주고 있다. 그러나 AFC 챔피언스 리그에서의 부진으로 인하여 비판하는 목소리도 많아지고 있다. 특히 지도자로서의 경험이 아직 부족하다는 것이 약점으로 꼽히고 있다. 그러나 본인은 개의치 않고 있는 듯 하다. 코칭 스타일은 선수들에게 신뢰를 주고 오랜 시간 중용하는 편으로, 정대세FC 서울 전의 퇴장 이후에도 그를 격려하는 장면에서도 드러난다. 또한 코칭 스태프와의 의견 교환을 중시하는 편으로, 이병근, 최성용 코치와의 토의 장면이 눈에 많이 띈다.

결국 2013 시즌 수원은 리그 5위로 시즌을 마감했고 이로 인해 많은 비난을 샀다. 그러나 서정원 감독의 탓만은 아니다. 사실 전전임 차범근 감독 시절부터 리빌딩 필요성을 제기하는 팬들이 많았으나, 그때마다 분노의 현질과 반짝 성과를 올리면서 흐지부지 묻혔다. 덕분에 묵혀둔 유망주들이 주전을 뛰어넘는 발전을 보이지 못하고 정체했는데, 2013 시즌 내내 주전들이 줄부상에 시달린데다 구단의 지원이 전례없이 줄어들면서 외부에서 전력보강도 힘들었고, 결국 상위권으로 치고나갈 동력이 없다시피했다. 결국 홈 최종 경기에서 눈물을 흘리며 인터뷰를 했다. 초보 감독으로써 혹독한 수업을 치뤘다고 봐야 할 듯 하다. 감독 뿐만 아니라 코칭 스태프들 또한 초보티를 벗어나지 못한 40대가 주축이었다는 점에서 앞으로 서정원 감독이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는 내년 시즌을 지켜봐야 할 듯.

3.2 2014 시즌

시즌 초반부터 3백을 활용하겠다는 의사를 적극 나타냈다. 또한 모기업의 지원이 예전과 같지 않고, 주전 선수들이 이탈하는 등 본인의 의사와는 달리 전력이 약화되는 상황에서 이제는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해서 도전자로써 K리그에 도전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한 개의 우승컵 정도는 들어보고 싶다는 포부를 K리그 미디어 데이에서 밝혔다.

FA컵은 상주 상무에게 발목을 잡혀 어처구니 없이 32강에서 광탈. 리그에서는 미숙한 교체 전략으로 숱한 승점을 날려먹으며 많은 지탄을 샀으나 월드컵 휴식기 이후 자신이 원하던 팀의 색깔을 대충 구현해내며 안정적으로 상위권 성적을 유지하고 있다. 실제로도 더럽게 안 뛰고 롱볼 로또만 노리던 예전과 비교하면 공격을 전개해나가는 과정이 충실해졌으며, 질 땐 지더라도 2012 시즌 포항전 0:5 대패나 2013 시즌 가시와전 2:6 대패 같은 안드로메다 관광 스코어가 나오지 않고 있다. 연무나 연패의 비중도 확연히 줄어들어 수비가 안정됐음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사실 수비진의 주된 발암요소들이 자리를 비운 덕이 크다.

인터뷰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안 그래도 팀에 대한 지원이 팍팍 줄어들기 시작한 시점에 감독을 맡아 여러 가지로 마음고생이 심했다고. 옛날이라면 좀 한다 싶은 선수를 몸값을 거하게 불러 데려오기 일쑤였으나 지금은 유스 출신 비중을 늘림과 함께 서정원 감독이 직접 대학 축구나 2부 리그, 실업 리그, J리그 등을 살펴보며 인재를 고르고 있다 한다.

3.3 2015 시즌

여전히 구단 투자는 요원한 가운데 2015년 8월 현재 줄줄이 이어진 주전급 선수들의 줄부상으로 가용선수 19명이라는 악조건에서도 고군분투하며 1위 전북을 상대로 승점 7점차로 추격하고 있다. 감독 3년차에 접어들어 경험도 쌓이고 전술도 안정되었으며 유스 선수들을 성장시키는 능력만큼은 대단하다는 평가다. 권창훈, 민상기, 연제민, 구자룡 조지훈은 제외 등 젊은 수원 선수들이 급격히 성장한게 바로 그 예. 특히 권창훈은 서정원 감독이 지도하면서 출장수를 늘리기 시작해 지금은 대표급으로 성장했다. 압도적인 지원에도 좋은 성적을 내지 못했던 전임 감독들에 비하면, 반토막 이상으로 잘려나간 예산에도 불구하고 리그 2위를 수성하고 있는 데에는 서정원 감독의 지도력이 그만큼 훌륭하다는 반증. 항간에는 구단 지원을 제대로 받지도 못하면서 고군분투하는 서감독을 보며 찡하다는 반응이 많다.

하필이면 홈에서 열리는 슈퍼매치를 앞두고 스승 크라머 감독의 부고가 날아왔다. 세상을 떠난 스승에게 승리를 바치기 위해 검정색 정장을 입고 슈퍼매치에 임했지만, FC 서울에게 3:0으로 패하고 말았다. 이게 다 정성룡 때문이다.

그동안 삼성의 스포츠단이 제일기획으로 넘어가면서 투자가 줄어든 걸로 과도한 쉴드를 받았지만, 2015년 K리그 연봉 공개 현황에서 전북에 이어 2위를 차지하면서 구단은 나름 해줄만큼 해줬다는 것이 드러났다. 관련 기사

3.4 2016 시즌

희대의 개막장 시즌

정성룡이 빠지고 그 자리를 노동건, 양형모로 돌려막고 있지만 둘다 상태가 안좋다.

또한 1골 먼저 넣은 뒤 어설픈 잠구기로 이겨놓다가 정신빠진 모습을 보이며 80분 이후 실점이 공식으로 자리잡고 무승부 혹은 지는 경우가 많아졌다.

34라운드까지 무려 무승부를 17차례 기록하면서 성적 또한 급전직하, 하위 스플릿으로 밀려난 것도 부족해서 10위를 기록했다. 11위 인천과 승점 5점차, 12위 수원FC와 승점 7점차이기 때문에 최악의 경우 승강 플레이오프나 곧장 강등까지도 가능한 판국이다.

초여름부터 팬들 사이에서 선수단 장악력이 떨어졌다는 루머가 나돌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팀이 심각할 정도로 곪았다는 폭로 기사가 터져나왔다. 관련 기사

33라운드 수원 더비에서 수원FC에게 4:5로 역전패하며 10위를 기록, 하위 스플릿으로 떨어졌다. 전반 종료까지 3:2로 앞서고 있었으나 후반 잇달아 3골을 내주며 역전을 당하며 똑같은 패턴으로 패했다.
이날 경기가 끝나고 성난 수원팬들이 모여 단장 퇴진을 외쳤지만, 대다수 축구팬들은 팀 사정 이전에 서정원의 무능함을 지적하고 있다. 몇년째 일상다반사로 임금 체불 사태를 겪는 인천도 끈질기게 살아남으며 모랄빵을 추스리는 것도 감독의 역량임을 간접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심지어 인천은 같은 날 울산을 3:2로 대파하면서 더욱 비교가 되었다.

더이상 빠질 거품도 없다고 봤을 때 결국 명선수는 명감독이 될 수 없다 항목에 또 한명이 추가될 듯 싶다.
  1. 프랑스 르샹피오나 시절 성인 SEO를 프랑스식으로 읽은 별명
  2. 1994 FIFA 월드컵 미국 당시 국군체육부대 이등병이었다.
  3. 원래는 릴 OSC 스카우터가 애정을 표현했지만 릴은 당시 2부 리그에 있어서 선수가 거부. 그러자 아깝다며 자기 친구가 일하는 스트라스부르에 연락을 해서 "저 선수 아까우니 니가 관찰해봐라"해서 이적이 성사되었다.
  4. 참고로 무삼파는 말년에 노쇠해서 K리그 왔다가 망했다. 그 후 이근호를 영입하려던 빌렘이 무삼파를 영입했다가 역시 망했다. 결국 빌렘에서 선수생활을 마감하고 은퇴했다.
  5. 몽펠리에를 2011-12시즌 리그앙 우승으로 이끌기도 했다.그 뒤 2015년까지 릴 OSC 감독이었다.
  6. 감독이 외국선수는 아프리카 선수만 고집하면서 서포터들에게도 욕을 먹었다.이때 바뀐 감독이 바로 피에르 만코프스키 (Pierre Mankowski) 카메룬 국대 감독이었던 양반인데 결국 최후의 결과는 좋지 못했다. 그런데 10년이 지나고 만코프스키가 한국에 왔을때는 아시아 선수들이 좋다며 뻔뻔하게 립 서비스를 했다.이 새끼가
  7. 올리비에 다쿠르는 AS 로마로 이스마엘은 바이에른 뮌헨으로 이적하니 납득이 간다.
  8. AFC 챔스의 전신 중 하나(FA컵과 리그컵 우승팀이 나가던 아시안 컵 위너스 컵이 합쳐졌기 때문)인 아시안 클럽 챔피언십 우승(2000~2001)으로 이 대회 마지막 우승도 수원이 거뒀다.참고로 이전 글에선 아시안컵 위너스 컵 우승이라고 잘못 적혔는데 이 컵에서 한국 클럽팀은 준우승만 3번 했을뿐,우승한 적은 없었다.
  9. 1998 월드컵 직후부터 노장 소리를 들어왔고 2002년에는 플레잉코치를 권하는 등 국내에서 가장 오랫동안 '노장'소리를 들어온 선수로 불러도 할 말이 없을 것 같다.
  10. 놀랍게도 이 시절 몸 상태가 20대 중후반 정도였다고. 마침 대표팀의 주전 윙어였던 설기현역주행 사건으로 한창 욕을 먹던 시기였던지라 일부 축구 사이트에선 독일 월드컵 최종 엔트리에 설기현 대신 서정원을 넣었어야 하는 게 아니냐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 까였던 설기현은 프랑스 전에서 동점골 어시스트를 했으니 뭐... 아니다. 정확히 독일 월드컵 프랑스 전 박지성 골은 설기현이 올려준 크로스를 헤더로 연결해준 조재진의 어시스트 다.
  11. 공식적으로는 상무 소속이었다. 방위병이었는데 어째서 상무 소속이었냐하면 다른 선수들은 전부 입대시 상무 지원이었지만 서정원만은 방위병-상무 파견 형식이었기 때문. 그래서 방위병의 주말경기 출전이 가능했던 94년,95년에 각각 4경기씩 안양 소속으로 리그 경기를 뛸 수 있었다.
  12. 전통적으로 우리나라 국가대표팀은 윙어들이 강한 편이었는데 그 이유로는 빠른 스피드와 체력(을 빙자한 정신력)이었다. 차범근-원래 윙포워드로 시작했다-, 고정운, 하석주 등등... 하지만 히딩크가 온 이후로 우리나라 선수 체력 좋다는 이야기는 쑥 들어감. 애당초 한국은 전통적으로 키와 파워를 지닌 대형포워드를 선호했고(황선홍, 최용수, 김도훈 등등) 양사이드 무한크로스-헤딩골이 주요 공식이었다. 그런 영향으로 한국국대는 박지성, 이영표, 송종국, 설기현, 이천수 등 뛰어난 윙어가 꾸준히 나왔으나 요샌 전방의 대형스트라이커 실종과 맞물려 윙어도 이청용, 이근호 등으로 근근히 이어가는 수준이다. 사실 체력이 좋았다기보다는 정신력으로 많이 뛰던 시절이었다. 즉 강한 정신력으로 많이 뛴다 - 얘네들 체력이 좋네? - 실상은 체력 저하 때문에 경기 내에서 기복 발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