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미에

1 일본의 인명

주로 여자 이름. 한자 표기는 文恵, 史惠, 史絵, 章枝 등등등.

2 踏み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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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 막부카쿠레키리시탄을 색출하기 위해 썼던 방법, 또는 거기에 사용했던 목판이나 금속판. 사실상 ○○○ 개새끼 해봐의 원조격이라고 할 수 있다.

1629년, 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 시대에 도입되었고 이후 조선에서도 19세기 초 본격적인 천주교 박해를 시작하면서 배워서 썼다. 오늘날 북한에서도 사용되고 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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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법은 예수성모 마리아의 모습을 새긴 목판이나 금속판을 길거리에 놓고, 사람들을 불러서 밟고 지나가게 하는 것. 성상은 보통 금속으로 만들었고 후에 가서 물량이 부족해지자 천이나 종이에 동그라미를 그리고 가운데 IHS[1]를 그려(쉽게 말해 성체의 모습) 만들기도 하였다.

가톨릭 신자들이 차마 밟지 못하거나 밟기 직전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거나 조용히 통회의 기도를 올리는 순간, "너 이 새끼 나의 함정 카드에 걸렸구나."하고 잡아가는 것이다. 심지어 아기들이나 병이 들어 움직일 수 없는 노인들은 후미에를 발에 갖다대는 식으로 행했다. 당사자의 자백에 달린 문제이니 만큼 별 효과가 없어 보이는 방법이지만, 의외로 시행되었을 당시에 신자들에게는 엄청난 효과를 발휘해서, 이로 인해 잡히고 고문을 당하고 순교한 신자 수가 어마어마하다. 물론 막부도 다 죽이는 건 꺼림칙했는지 배교하면 살려 주겠다고 했지만 대부분이 배교를 거부하고 죽음을 선택했다.[2]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 다 방법이 생긴다. 신자들이 좀 줄었을 때 막부는 길거리가 아닌 각 마을별로 후미에를 실행했는데, 보통 정초에 했다. 후미에 날짜가 마을에 공지되면 신자들은 후미에 전날에 발을 최대한 깨끗이 씻고, 또 최대한 성상의 얼굴을 피해 밟으며 집에 와서는 즉시 발을 씻어 그 물을 통회의 뜻으로 다 마시고 기도를 바쳤다고 한다. 당시 극심한 박해와 탄압으로 사제가 하나도 없는 상황에서 고해성사를 볼 수 없었던 만큼 신자들 나름의 방법이었으리라. 이후 1854년에 쿠로후네 사건(흑선 사건)으로 일본이 개방하게 되면서 없어졌으나 암묵적인 압박은 이어지다가 1939년에 교황 비오 12세가 '유교 문화권의 조상 제사는 민속적 관습일 뿐 가톨릭의 교리와는 하등의 관계가 없다.'라는 칙서를 발표하면서 가톨릭에 대한 압박은 조금 줄어들었다. 참고로 가톨릭을 탄압했던 이유는 다름 아닌 국가신토였다.

이것이 의미가 확장되어 현재는 권력 기관에 의한 개인의 사상 조사 또는 그 수단이나 어떤 결정사항에 몰래 반대한 사람을 색출해 내기 위한 방법 등을 후미에라고 부르기도 한다.

걸리버 여행기 3권에서 걸리버가 일본에 도착했을 때 살아남기 위해 네덜란드인 행세를 한 걸리버도 이걸 할 것을 강요받았는데 얼렁뚱땅 대화로 퉁쳤다.

당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직원들은 에도 막부기독교 선교 의혹에서 벗어나기 위해 후미에에 협조했다. 애초에 네덜란드인들은 칼뱅개신교 신자들이었고, 이미 16세기에 본국에 있던 성상들을 파괴한 전적이 있었기 때문에 성상을 밟는 것에 대해 큰 거부감이 없었다고 한다.[3] 더군다나 일본에 자주 왕래하는 동인도회사 직원부터 종교와는 별 무관한 사람들이었고, 의외로 에도 막부도 무리하게 불교나 신토를 네덜란드인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2010년경 한국 네티즌들도 비슷한 색출 방법을 쓰기 시작했다. 그런데 새누리당 한기호 의원이 종북주의 논란에 대해 "십자가를 밟게 해서 천주교 신자를 가려낸 것처럼 해야 한다"는 발언을 해서 논란이 일고 있다. 왜 하필 그걸 종북주의에 대한 평가와는 별개로 하필이면 천주교 박해에 악용된 수단을 그것도 천주교 언론과의 인터뷰[4]에서 발언했기 때문이다.

국회 대정부질문이나 청문회에서 현재(2015년 기준) 야당의 단골 질문을 후미에로 볼 수 있다. " 5.16 군사정변이 혁명이냐? 쿠데타(정변)냐?" 와 같은 질문을 청문 대상자나 정부 요인에게 던지는 것인데, 특히 박근혜 정부 들어서 빛을 발하고 있다. 5.16 군사정변 문서에 들어가보면 알 수 있지만, 이 문제는 학계에서든 여론이든 이미 결론이 난 문제이다. 그런데 왜 말을 못해 하지만 이 질문을 받는 당사자는 대개 얼버무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자세한 사례는 5.16 군사정변 문서 참조.

2.1 미디어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에 주인공 로드리고 신부가 신도들을 구하기 위해 후미에를 하고 배교를 해야 하는지 아니면 종교적 신념을 지키기 위해 후미에를 하지 않아야 하는지 갈등하는 부분이 있는데 이 부분이 소설의 핵심 부분이다.

일본의 성인(聖人) 만화 세인트 영멘예수는 울면서 성화나 십자가를 밟으라고 하면 냉큼 밟으라고 한다. 아예 자기를 밟아도 화내지 않을 거라고도 한다.[5] 사실 천계에 있을 때 아마쿠사 시로 도키사다가 ' 판사님 저는 밟지 않았습니다'라며 후미에를 선물했는데 예수가 자신의 그림인줄 모르고 현관 매트로 써서 시로가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하도 많은 사람의 발이 닿아서 그런지 형체가 뭉개져 예수 보다는 무각거북고둥 같았던 데다가 이름부터가 '밟는 그림'이라서 착각했다고...(...)

사무라이 참프루에서도 후미에 장면이 등장한다. 사실 이 작품에서 천주교 박해라는 주제는 상당히 큰 스포일러와 연결되어 있다.
  1. 그리스어로 '그리스도'를 뜻하는 ΙΗΣΟΥΣ의 첫 세 글자를 라틴문자로 표기한 약자. 당연히 '그리스도'를 뜻하지만, 그리스어를 뜸하게 쓰기 시작한 중세부터는 라틴어 문장 Iesus Hominum Salvator (인류의 구원자 예수)의 이니셜이라는 말이 붙어버려서 IHS가 정작 그리스어로 '예수'의 머릿글자라는 걸 아는 사람이 적다.
  2. 사실 이건 조선도 마찬가지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경우도 배교하면 요직에 등용하겠다는 등의 온갖 우대를 약속받았지만, 끝끝내 거부하여 결국 순교했다. 심지어 프랑스 신부들에게는 배교도 필요 없고 조용히 지내거나 떠나면 살려 주겠다고 했는데도 모두 거부하고 순교했다.
  3. 당시 네덜란드를 지배하던 스페인에 반발해서 벌인 성상파괴운동으로, 칼뱅주의의 "성상도 결국은 우상숭배"라는 견해를 착실하게 따른 결과다. 또한 가톨릭의 수호자임을 자처하던 스페인을 엿 먹이기 위한 목적도 있었고.... 스페인은 수백명을 사형시키며 가혹하게 탄압했고, 네덜란드인들의 스페인과 성상에 대한 반발심이 더 커졌다. 그래서 지금도 네덜란드에는 남아있는 성상이 변변찮다.
  4. 한기호 의원과 인터뷰한 평화방송은 천주교 소속 언론사이다. 한기호 의원 본인도 천주교 신자라는 것은 개그.
  5. 사실 종교적인 관점에서 이러한 행동은 큰 죄가 되지 않는다. 이 때 순교를 하는 것은 본인의 선택으로 종교적으로는 장한 일이지만, 강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배교한 것도 회개한다면 용서받을 수 없는 죄는 아니다. 대표적으로 유대인의 경우도 기독교로 개종한 척 하며 살던 때에 기독교인들이 돼지 피 요리를 먹인 적이 있었지만 대부분 먹고 난 후 반성하는 기도를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