隠れキリシタン. 숨은 크리스천.
1 개요
일본의 에도 시대 무렵, 극도의 탄압을 받은 가톨릭 신자들이 음지로 숨어들어, 신부가 1명도 없는 상태에서 독자적인 길을 250년 동안 걸은 것을 의미한다.
일본의 기독교 탄압은 에도 막부가 무너지고, 신정부가 들어선 메이지 6년에 가서야 풀렸다.
한국인 일문학자들은 잠복 키리시탄이라고 번역하여 사용한다.
2 발생 : 일본의 천주교 박해
일본의 가톨릭은 전국시대 무렵 일본과 무역을 하던 스페인, 포르투갈의 예수회 선교사들로부터 전래되었다. 센코쿠 시대의 다이묘들은 서양 세력과의 무역으로 이득을 챙기기 위해 가톨릭 전래를 허가하였고, 고니시 유키나가 등 몇몇 다이묘는 스스로 가톨릭 신자가 되기도 했다.
아무튼 에도 시대 초기까지는 카쿠레키리시탄도 비교적 평범한 가톨릭 신자였다.
그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정권이 세워지자, 히데요시는 각지의 다이묘들이 서양과의 무역으로 이득을 얻어 세력을 키워 자신에게 대항하게 될 것을 우려하여 그 첨병인 가톨릭 선교사들의 활동에 제약을 걸었다.
그리고 일부 광신도들이 불교는 이단이라는 이유로 절을 습격해서 불상을 파괴하는 등의 사회문제를 일으키기도 했다. 도요토미 가문이 몰락한 뒤 정권을 잡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 막부도 사정은 다르지 않아서, 제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 치세에 금교령을 내리고, 가톨릭 신부들을 추방하거나 처형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후 외국과 번이 독자적으로 무역하는 것을 막고 쇄국정책을 유지했다.
일본에서 가톨릭이 결정적인 타격을 받은 계기는, 가톨릭 신자들을 중심으로 막부의 지배에 저항하여 대봉기를 일으켰던 시마바라의 난이다. 시마바라의 난은 지배자인 에도 막부에게 "가톨릭 신자는 곧 정권을 엎으려는 반란 분자"라는 생각을 심어주었고, 후미에 같은 일을 벌여 가톨릭 신자를 걸러내서 죽이려 하는 등 철저한 박해를 가했다.
이렇게 박해를 받았음에도 일부 가톨릭 신자들은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 하지만 가톨릭 신자라는 것이 공공연하게 알려지면 생명이 위험했기 때문에 지하로 숨어들어야 했다. 그렇게 장장 250년 동안 숨어서 신앙생활을 했다.
에도 막부는 그 존재를 몰랐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고 다 파악하고 있었다. 다만 이들을 묵인했다. 법대로 하자면 다 처형해야 하지만, 한두 명이 아니라 수 천명 단위의 단체가 발각되면, 이들을 처형하면 제2의 시마바라의 난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염려에 가톨릭 신자가 아니라 그냥 사상범[1]이라는 빠져나갈 수 있는 이름으로 부르며, 알면서도 모른 체했다.
3 발견
메이지 시대 개항 이후 외국인에 한해 그리스도교 신앙 활동이 허가되었고, 나가사키에서 새로 세워진 오우라 천주당[2]의 주임신부 프티 장 신부(Bernard-Thadée Petitjean.1829~1884)는 일부러 성가를 부르며 다니는 등 선교를 시도했으나 한동안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러나 프랑스 절에 구경왔던 사람들 가운데 카쿠레키리시탄들이 섞여 있었고, 이들이 성당에서 성모상을 보게 되면서 그들이 모여살던 마을에 "프랑스 절에 성모님이 계시다!!!!"는 소문이 퍼졌다.
카쿠레 키리시탄들은 당시로부터 250여년 전 순교한 바스챤[3]이 예언한 '7대가 지나면 흑선을 타고 파파(교황)가 보낸 콘페소르(고해신부)가 온다. 매주라도 콘삐산(고해성사)를 할 수 있다. 어디서라도 큰소리로 기리시탄의 노래를 부르며 걷을 수 있는 시대가 온다. 길에서 젠쵸(외교인)를 만나면 그가 길을 양보한다'라는 예언의 전승을 갖고 있었고, 이에 예언이 실현된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돌기 시작했다.
1865년 3월 17일 금요일, 산파인 이사벨라 유리의 가족과 동네 사람 13~15명(물론 전원 카쿠레키리시탄)이 구경을 핑계삼아 오더니, 기도하고 있던 프티 장 신부에게 "성모님을 공경하십니까?", "결혼은 하셨습니까?", "전례력을 지키십니까?"[4]를 질문하였다. 이에 프티 장 신부는 "성모님을 공경하고, 사제는 결혼하지 않으며, 전례력을 지키고 있습니다."라고 답하였다.[5] 키리시탄들은 그제서야 "우리의 마음도 신부님과 같습니다"라고 속삭인 후 "サンタマリアの御像はどこ?(성모상은 어디에?)"라고 물었다. 이에 프티 장 신부가 안내해 주자, 그냥 구경 온 척하던 마을 사람 전원이 갑자기 몰려들어 기도를 했다고.
이에 프티 장 신부가 당시 요코하마 교구장 주교에게 보고하였다.
프랑스에서 온 이들이 가톨릭 사제란 것을 확신하면서 감추어 온 신앙을 드러내게 된다.
1865년 3월 17일의 이 사건은 교회사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든 일로, '신자 발견'이라고 한다. 일본 외부에서는 이런 신자가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몰랐기에, 이들을 발견한 서양 신부들은 이를 기적이라고까지 말했다.
이들이 처음 행적을 나타난 때가 아직 메이지 정부가 공식적으로 천주교 박해를 철폐하지 않았던 때라, 이들을 굴비 엮듯 엮어서 좁은 방 안에 가두고 죽지 않을 만큼만 물과 음식을 주었다. 공식적인 고문은 하지 않았으나, 미어터지는 방 안에서 더위와 질병에 시달리게 하거나 추운 곳에 유배보내 눈오는 바깥에 방치하는 식의 가혹한 탄압을 가하는 과정에서 여러 순교자가 나오게 되었으며, 이 일로 당시 일본과 통상 중이던 서구 열강들이 일본에 압력을 가하기도 했다.
이 때 일본은 외교 채널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교를 박해하지 않는다. 그자들은 그리스도인이라서 박해받는 게 아니다."라고 하였으나, "그들이 종교를 버린다면 풀어줄 것이다."라고 말해 실질적으로 천주교 박해였음을 우회적으로 시인했다.
서양과의 교류를 희망하고 있었던 메이지 정부에게 있어 종교의 자유를 허하라는 서구 열강의 압력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으며, 결국 메이지 헌법이 종교의 자유를 명시하면서 대부분의 카쿠레키리시탄은 가톨릭으로 원복하였다. 하지만 워낙 오랜 세월이 지난지라 '조상님의 종교는 그렇지 않다능!'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이들은 가톨릭으로의 복귀를 거부하고 카쿠레키리시탄으로 존재한다. 이런 자들을 하나레키리시탄(離れ切支丹 : 떨어져 나간 크리스천)이라고 부른다.
현재는 모든 카쿠레키리시탄(의 자손)은 가톨릭으로 복귀했고, 하나레키리시탄은 1980년대까지 존재하다가 신자가 모두 죽자 사라졌다고 알려져 있었지만 1991년에 인류학 학자 크리스탈 웰란이 연구한 끝에 나가사키 현 고토 섬에 아직 존재하는 것을 확인했다. 워낙 외진 섬이라 존재가 알려지지 않았고, 그 사람들 역시 자신들의 존재를 숨긴 채 신앙을 유지해오고 있었던 만큼, 다른 오지에서도 남아있을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가톨릭교회에 복귀할 뜻이 없으며 자신들의 신앙을 유지하려고 하나, 젊은층의 이탈로 미래는 밝지 않다.
4 변질
당초 전교를 했던 외국인 성직자들은 박해를 받아 전멸해 버렸고, 일본 가톨릭교회는 스스로 성직자를 양성해낼 정도로 성숙한 단계는 아니었다. 시마바라의 난의 지도자인 아마쿠사 시로 도키사다도 세례를 받기는 했지만 평신도였다.[6]
게다가 포르투갈과의 무역이 완전히 단절되고, 개신교 국가인 네덜란드는 선교를 하지 않는 것을 조건으로 제한된 무역만을 유지했기 때문에, 카쿠레키리시탄들은 자신들을 지도해줄 성직자를 모셔오기는커녕 가톨릭의 본산인 교황청과도 전혀 연락을 할 수 없었다.
결국 숨어서 살아남은 신자들은 전례를 집전하고 교리를 가르치고 이끌어줄 성직자가 없는 상태에서, 자기들끼리 기억하는 몇 안 되는 구전 전승만으로 종교를 유지해야 했다. 사소한 유물조차도 그리스도인이라는 증거가 될 수 있었기 때문에 성경조차도 유지하지 못했다. 그들 자신은 그리스도인으로 남고자 했지만 아무래도 구전만으로는 한계가 있었고, 250년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 상당히 다른 모습의 종교가 되어버렸다.
큰 특징으로는 쵸우가타(翁方)라는 원로격 우두머리의 아래로 비밀 조직을 유지하며 주문 등을 전파하는 밀교적인 특성을 지녔으며, 탄압을 피하기 위해 각종 상징물에 몰래 종교적인 뜻을 담았다. 특히 불교로 많이 위장하였으며, 불상에 불경으로 위장하여 그리스도교적인 문구를 집어넣거나 마경과 같은 것을 만들기도 했다.
예를 들면 이렇게. 놀랍게도 이것은 성모 마리아상이다! 자세히 보면 가슴쪽에 십자가 비슷한 것이 있다. 성모상을 불상으로 위장한 것으로, 흔히 마리아 관음이라고 한다.
이들이 외우던 기도문을 오라쇼(라틴어: oratio)라고 하는데, 당시까지 전래되었던 라틴어 기도문을 음차하여 염불처럼 음률을 붙인 형태를 띠고 있다. 당연히 뜻은 제대로 모르고 그냥 소리나는 대로 외웠는데, 예를 들어 성체를 의미하는 "Eucharistia"(에우카리스티아)는 구전되면서 "요우카시치"로 바뀌고, 다시 "요우가노시치"로 바뀌었다가, 또 "요우가시치야"로 바뀌더니 이두식 한자를 써서 "八日の七夜"(요우카노시치야, 요우카=八日, 시치야=七夜)가 되어 본래의 의미가 전혀 없어져 버렸다.
성호경을 예로 들면
In nomine Patris, et Filii, et Spiritus Sancti. Amen. 인 노미네 파트리스, 엣 필리이, 엣 스피리투스 상티, 아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을
いん のうみね ぱあちりす ゑつ ひいりい ゑつ すぴりつす さんち あめん 인 노미네 파치리스 에쓰 히리 에쓰 스피리쓰스 산치 아멘. |
으로 외우는 식이다.[7] 왠지 라틴어가 로망스어로 변해가는 모습을 보는 듯하다
이들 오라쇼는 지방마다 조금씩 다르며, 현재는 일본의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카쿠레키리시탄의 성가.
문화 연구의 관점에서 보자면 상당히 흥미롭다. '원형 문화'와 '오랜 세월 동안 구전만으로 이어지면서 뒤바뀐 변형 문화'을 눈 앞에서 확실하게 비교 대조해 볼 수 있는 보기 드문 경우이다. 저그 군단과 원시 저그를 보는 것 같다
성경의 내용은 두루뭉술하게 옛날 이야기처럼 구전되었다. 전승도 달라졌는데, 서양의 선악 대결 중심 세계관과 달리 동양의 융합과 용서를 중심으로 하는 세계관에 영향을 받아 아담과 하와가 낙원을 내쫓긴 사건이 사라졌고, 이에 따라 그리스도교의 중심 교리인 원죄도 사라져 하느님에게 용서를 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고.(참조)
가장 굳건해보이는 종교 문화조차도 철저한 탄압 아래에서는 원형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뒤틀릴 수 있다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심을 유지하려는 경탄스러운 인간 의지를 볼 수 있다.
4.1 교리
소토메, 고토, 나가사키의 천지시지사(天地始之事)[8]에는 기본적인 성서의 내용도 있지만, 아담의 자녀인 치코로우(ちころう)와 탄호우(たんほう)는 남매인데 결혼하여 자녀를 보았다고 하는 등, 일본 전통의 이자나기, 이자나미 설화가 혼합된 모습도 보인다.
5 창작물
이런 숨어있는 신자들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국내 출간물로는 <멸망한 짐승들의 바다>에 기재된 단편들 중 2번째 편인 <경귀전(鯨鬼傳)>이 있다. 카쿠레키리시탄화 되기 직전, 그야말로 박해의 마지막을 달릴 시기 신자들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작품으로 저 유명한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도 많이 알려져 있다.
어떤 마술의 금서목록에도 역시 아마쿠사식 십자처교라는 이름으로 변형되어 등장.
바람의 검심 TV판에서도 등장했다.
Fate 시리즈의 토오사카 가문의 선조인 토오사카 나가토도 카쿠레키리시탄이었다.
검이 그대의 쿠로바 사네아키도 어머니가 카쿠레키리시탄으로 처형당했으며, 본인도 카쿠레키리시탄이다.
일본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에서는 주인공 쥬베이[9]가 과거 막부의 무사였던 시절, 카쿠레키리시탄 마을 하나를 전멸시켜 버린 전적이 있다.
모로호시 다이지로의 요괴헌터 시리즈의 단편 '생명의 나무' '검은 '탐구자 죽은자 되살아나다'에는 카쿠레 키리시탄의 후손들이 모여사는 마을이 등장한다.
6 관련 항목
- 갈라파고스화
- 아마쿠사 시로 도키사다
- 어떤 마술의 금서목록 - 아마쿠사식 십자처교
- 후미에
- 침묵
- oratio
- 상주전신관학원 팔명진 - 신노 아키카게[10]
- 옹기장이 - 조선의 천주교도들의 비슷한 사례.
- ↑ 종교적인 것이 아니라 이데올로기. 생각이 다른 자
- ↑ 당시에는 '후란스데라(仏蘭西寺)', 즉 프랑스 절이라고 불렸다(…).
- ↑ 세바스티아노라는 세례명을 받은 사람으로, 평신도 지도자였다고 전한다.
- ↑ 이는 처음 가톨릭이 일본에 전해질 때, 유럽에서 한창 가톨릭과 개신교가 치고박고 할 시기였기 때문. 그래서 이 3가지는 가톨릭과 개신교를 구별하는 단서로 가쿠레기리시탄 사이에 구전되어왔다. 그렇기에 메이지 시대에 가톨릭과 함께 들어온 개신교 교회에는 카쿠레 키리시탄들이 가지 않았다.
- ↑ 정확하게 이사벨라 유리는 "지금 저희는 슬픈 시간(사순 시기)을 지키고 있습니다. 당신도 지킵니까?"라고 질문했다.
- ↑ 일본인 사제와 수도자들이 있기는 하였으나, 사제와 수도자를 직접 양성하는 데는 무리가 있었다.
- ↑ 이 외에도 많은 버전이 있다 이 논문의 16쪽 참고.
- ↑ 기리시탄의 교리와 그 존재 의의, 신앙을 지켜야 할 이유를 적은 나가사키계 기리시탄의 전승서적.
- ↑ 와타나베 켄이 연기했다.
- ↑ 키리시탄에서 말하는 주스헬(루시퍼)을 모티브로 한 캐릭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