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무라 켄

더 드리프터즈의 멤버
이카리야 쵸스케타카기 부나카모토 코지카토 챠시무라 켄아라이 츄[1]스와조노 치카하루[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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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옷 근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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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페이크 전설의 캐릭터 바보 영주 (바카토노 バカ殿) 분장 시.

이름 : 시무라 켄(志村 けん)[3]
생년월일: 1950년 2월 20일
출생지 : 도쿄 키타타마군 히가시무라야마 정[4]
신장 : 166.7cm[5]
데뷔년도 : 1972년
소속사 : 이사와 사무소[6]
현재 진행중인 프로그램 : 천재! 시무라 동물원[7], 시무라 켄의 바보 영주[8], 시무라 극장,
동기 : 기타노 다케시,쇼후쿠테이 츠루베 등
혼인 여부 : 미혼
링크 : 블로그

1 소개

일본의 국민 개그맨이자 일본 콩트 코미디의 본좌.[9][10]
빅3 이전 일본 예능계의 황제[11]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게닌(개그맨)이라면 타모리, 아카시야 산마, 기타노 타케시[12]의 '빅 3'[13] 정도. 별명도 일본의 희극왕이다. 본명은 시무라 야스노리(志村 康徳).

70년대 TV를 점령했던 게닌 1세대로, 2012년 기준 현재 62세인데도 왕성하게 활동을 하고 있는 살아있는 전설. 일에 몰두하느라 결혼도 안했으며, 그 명성과 어마어마한 재산 때문에 수많은 여자들이 접근하였으나 이 사람을 함락시키는데는 전부 실패했다. 대마법사[14]

대선배인 우에키 히토시노력하는 범재의 인상이 강하다면 이쪽은 게으른 천재. 웃기는 건 일본 제일이라 자부하던 카토 챠를 살리에리로 만든 일본 코미디계의 모차르트다.

PTA가 좋아하는 프로그램, 싫어하는 프로그램을 동시에 프로듀스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천재 시무라 동물원'은 '어린이에게 보여주고 싶은 프로그램'에 거의 매번 들어간다. 싫어하는 프로그램은 '바보 영주'로 아이러니하게도 섹드립 때문이 이니라 수박 빨리 먹기, 파이 던지기 등 먹을 것을 낭비한다는 컨셉 때문에(...) '어린이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프로그램' 10위권 안에 항상 들어간다.

현재는 주로 잘나가는 사회자로 활동하고 있지만 사실 콩트 코미디에 대한 애착이 남다르다. 만자이나 토크쇼 위주로 트렌드가 바뀐 일본 방송가에서도 아직도 콩트 코미디를 계속해서 만들며 최전선에서 뛰고 있으며, 쿠라베루 쿠라베라[15]에서 김병만을 초청, 극찬하며 일본에는 이제 이런 슬랩스틱이 없어져서 아쉽다는 발언도 한 바 있다.

2 생애

가부장적인 엄격한 가정에서 자랐다. 어린 시절, 엄한 아버지 때문에 집안은 항상 무거운 분위기여서, 당시에는 드물었던 텔레비전의 개그 프로그램 혹은 라쿠고를 보면서 우울한 기분을 잊을 수 있었다고 한다. 코미디 방송을 볼 때에는 근엄했던 아버지도 (근엄함을 유지하기 위해서) 웃음을 참아 가며 TV를 보고 있었다고. 그때의 경험을 계기로 중학교때 부터 게닌을 지망하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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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근엄의 시절. 잘 생겼잖아!?

이후 1968년 고교 졸업 직전에 유명한 밴드이자 콩트 그룹인 더 도리푸타즈(ザ・ドリフターズ - The Drifters 줄여서 '도리후')의 심부름꾼[16]으로 개그맨 활동을 시작해 1972년에 이야마 준과 함께 개그 콤비 맥 봉봉을 결성해 연예계에 데뷔한다. 이후 1974년 도리후의 정식 멤버가 된다.

정식으로 도라후의 멤버가 된 시무라 켄은 일본의 전설적인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인 <8시다! 전원집합(8時だョ!全員集合)>[17]에 레귤러로 출연을 시작한다. 처음에 시무라 켄은 도라후의 다른 멤버들과는 이질적인 컨셉트로 그다지 큰 인기를 얻지 못하였지만 1976년 <히가시무라야마 온도>가 대히트한 것을 계기로 차츰 역량을 발휘하기 시작하여 70년대 후반에는 도라후 내에서도 가장 큰 인기를 얻는 멤버가 된다.

시무라 켄은 도리후 내에서 유일한 전후세대(베이비부머)였고 이카리야 쵸스케와의 나이차는 무려 19살, 가장 나이차가 적게 나는 카토 챠와의 나이차는 7살이었을 정도로 다른 멤버들과 나이차가 많이 났다. 그래서 다른 멤버는 전원집합 종영(1985, 쇼와 60) 이후 슬슬 전성기가 끝나기 시작해 그 후로 연기에 전념하게 된다. 리더 이카리야 쵸스케가 배우로 유명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 외에 카토 챠는 사극연기, 나카모토는 정치 드라마 등등. 하지만 시무라는 종영 당시 아직 30대 중반으로 쌩쌩했고 그 쌩쌩함을 바탕으로 하여 지금도 코메디계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런데 그는 도리후에서 보케를 담당할 때 주로 노인 분장을 하였다(...)

도리후 시절에는 주로 카토 챠와의 콤비 플레이로 유명하였으며 1985년 전원집합이 종영한 이후에는 <카토쨩 켄쨩의 기분 좋은 TV (1986 ~ 1992)>, <시무라켄의 괜찮다 (1987 ~ 1993)>, <바보 영주 (1986 ~ )> 등의 선정성이 강한 성인 코미디로[18] 당시 라이벌 프로그램인 <우리들은 익살족>을 제치고 예능 프로그램 시청률 1위를 달성하면서 제 2의 전성기를 맞는다. 하지만 90년대 들어서 다운타운, 웃짱난짱으로 대표되는 오와라이 3세대가 떠오르면서 시무라 켄은 점점 방송에서 설 자리를 잃어갔고 1996년에는 사망설까지 나올 정도로 슬럼프를 겪는다. 이후 어릴 때 시무라 켄을 보며 자란 후배 연예인들의 언급으로 다시 주목을 받고 각종 예능 버라이어티에 게스트로 출연을 시작, 2004년부터 방영을 시작한 <천재! 시무라 동물원>의 성공으로 마침내 제 3의 전성기를 맞으며 다시 활발히 활동중이다.

3 이모저모

  • 유행어를 많이 만들어냈는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바보 영주에서의 "아잉~"이 있다. 크래용 신짱만화책을 보면 신짱이 이 유행어를 종종 사용한다. 츳코미 하면 떠오르는 말투인 "오마에, 소레와 나이다로(너, 그건 아니지)!"도 시무라 켄의 유행어에서 비롯된 것.
  • 일본에서는 가위바위보를 하기 전에 '처음에는 바위!(사이쇼와 구!)'라고 외치고는 하는데, 이것도 시무라 켄이 고안해 낸 것이다. 8시다 전원집합 녹화를 마치면 도리후 멤버들은 항상 스탭들과 모여서 뒷풀이로 술자리를 가졌고 술자리가 파하기 전에는 술값 내기를 했다고 한다. 이 때 시무라 켄의 제안으로 술이 취한 상태에서 게임에 집중하고 심리전에 말리지 않기 위해서 첫번째 내는걸 주먹으로 정하고 가위바위보를 하기 시작했는데 이 규칙을 기반으로 시무라 켄과 나카모토 코지가 전원집합의 코너 중 하나로 가위 바위 보 코너를 만들었고 해당 코너가 유행, 일본 전역으로 퍼져서 이제는 일본인 전부가 사용하는 말이 되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나라에서도 사용하고 있다. 전혀 아니다. 교포가 아닌 이상 저런 말을 내뱉은 직후 예상되는 주변 분위기는...속지 말자.
  • 고향노래를 하나 불러서 레코드로 냈는데 그게 그 유명한 히가시무라야마 온도. 이 곡은 대히트를 쳐서 히가시무라야마 시를 전국적인 네임드 시로 만들었다. 지금도 히가시무라야마역 앞에는 시무라 켄의 나무가 남아있다. 그리고 후쿠시마의 아들 카토 챠가 독창해서 같은 레코드로 나온 처음의 납니다는 묻혔다(…)
  • 히가시무라야마 온도에서 시무라는 백조의 호수 패러디라며 가랑이에서 백조 머리가 툭 튀어나오는 우스꽝스러운 발레 복장을 하고 나왔는데, 이게 또 하나의 좋은 소재가 되었다. 창작물에서 가랑이 사이에 백조 머리가 달려있는 옷이 나오면 이것의 영향때문이다. 하지만 발레리나 중에서는 시무라가 발레를 모욕했다며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다소 선정적일수 있어 링크로 대체한 사진
  • 1981년, 나카모토 코지와 경마를 하다가 사이 좋게 걸러 약식기소 처분을 받고 1개월 간 자숙했다. 자세한 건 나카모토 코지 항목 참고
  • 이주일, 심형래 등 한국의 네임드 코미디언의 코미디 스타일에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이기도 하다.[19]
  • 카토 챠와 했던 <카토짱 켄짱>은 주로 카토 챠가 보케를 시무라 켄이 츳코미를 담당한 콩트 프로그램으로.


해당 프로그램의 인기로 동명의 횡스크롤 액션 게임이 PC엔진에서 발매되기도 하였다. 다만 일본 오와라이 사정을 모르는 한국의 아케이드 키드들은 PC엔진통에 시간제 가동되는 이 게임이 그냥 이주일 2라고 통했다. 이주일 1은 이거.

  • 2012년 04월 03일 바카도노 25주년 기념 스페셜 에피소드. 마지막 부분의 요시 이쿠조가 패러디하는 주점 상인들도 모두 바카도노가 했던 기믹이다. 역시 25주년 SP... 근데 이쿠조 옹 쪽이 더 사실감이 좋은데?
  1. 정식 멤버였으나 1974(昭和49)년에 탈퇴.
  2. 준 멤버였으며 1985년에 결별.
  3. 본명은 시무라 야스노리(志村 康徳)
  4. 현재의 히가시무라야마 시(東村山市)
  5. 이카리야 쵸스케보다는 작다. 나머지 멤버들보단 크다. 타카기는 먹은 게 살로 갔고 나카모토와 카토는 야케아토 세대인지라 전쟁으로 불탄 폐헤 위에서 사느라 못 먹어서 그런듯
  6. 와타나베 프로덕션 계열.
  7. 우리나라의 TV동물농장과 유사한 컨셉의 프로그램으로, 2004년부터 방송되고 있다.
  8. 전원집합 말기에 처음 등장하였으며 캐릭터가 인기를 끌자 1986년부터는 독립 코너로서 매년 3회 특집방송으로 전국에 방송되고 있다. 시무라의 시모네타(섹드립) 구사능력을 볼 수 있다.
  9. 한국의 코미디언과 비교한다면 70~80년대 한국 코미디를 이끈 이주일, 심형래와 비견된다. 다만 이미 고인이 된지 오래인 이주일이나 현재 각종 비리로 인해 몰락한 심형래와 달리 현재도 왕성히 활동한다는 점 ㄷㄷ
  10. 80년대 초반 만자이붐 이후로 일본 예능계의 주류가 만담과 순발력있는 애드립 위주로 뒤바뀌어 콩트 위주의 정통 게닌들 대다수가 주류에서 밀려나게 된 상황에서 시무라 켄은 마지막까지 남은 콩트 코미디 시대의 아이콘이었고 지금까지도 현역에서 가장 활발히 활동하는 콩트 게닌이다.
  11. 빅3 중 비트 타케시와는 데뷔시기가 같지만 만자이붐 전까지 긴 무명시절이 있었던 타케시와는 다르게 데뷔한지 1년도 안되어 전국민적인 인기를 끌었으며 타모리와 산마는 시무라의 전성기 시절에 갓 데뷔한 신인이었다. 사실상 데뷔 시기나 빅3 이전 시대를 풍미한 점으로 볼때 게닌 서열로 보면 빅3 위에 존재하는 인물이다.
  12. 통칭 비트 다케시.
  13. 후지 TV에서 만들어낸 단어.
  14. 이것때문에 AV배우 출신 연예인인 미히로의 연예 활동에 대해 시무라 켄이 후견인 노릇을 해줄때 '여자에 무심한 그가 이렇게 챙기다니!'라며 열애, 결혼설 등이 돌았다. 시무라 켄측에 의하면 재능이 있어(미히로에 대해 연기력을 갖춘 AV배우중 하나라는 평은 있지만...) 키워주고 싶은 것이라고는 하는데... 실제로 이 분의 오랜 일생의 행적과 미히로의 상당히 뛰어난 연기력을 보면 사실일수도 있긴 하다. 그런데 미히로를 높이 치는 건 사실이겠지만 키워주고 싶다기 보다는 미히로의 연기력과 그 자질을 높이 사서 그만큼 투자를 하면 나중에 뿌린 만큼 거둔다는 계산 하에 행동했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15. 한국과 일본을 비교하며 조사하는 프로그램... 카라도 나왔다고.
  16. 처음에는 이카리야 쵸스케의 심부름꾼이었다가 1년만에 그만두고 아르바이트를 하며 먹고 살다가 다시 카토 차의 밑에 들어가서 심부름꾼으로 생활하였다고 한다. 그러고보니 스와조노 치카하루도 처음엔 카토 챠의 운전수였다. 정준하?
  17. 1969년~1985년 TBS에서 방송했던 국민적으로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버라이어티.(그 인기는 전성기의 무한도전급이라고 생각하면 될듯.) 일본 내에서는 여전히 전설로서 자주 회상되고는 한다. 심지어 동시대에 KBS2에서 '토요일 전원출발'이라는 인기 쇼가 있을 정도였는데 이름은 당연히(?) 저기에서 유래되었을 것으로 추측. 뭐 이건 가요톱10과 더 베스트 10의 관계처럼 80년대 방송가가 다 그모양이긴 했지만...
  18. 사실 80년대만 해도 일본 방송가의 규제가 엄격하지 않았기 때문에 시무라 켄 등의 보케 캐릭터들이 콩트에서 여자 게스트 가슴을 막 주물러대는 장면 정도는 흔하게 방송을 탔었다.
  19. 이경규는 초창기에 시무라 켄을 롤모델로 삼고 비슷한 컨셉을 잡았으나, 일본 유학 후, 기타노 다케시 스타일로 개그 스타일을 변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