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성 마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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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역대 국왕
17대 내물 마립간 김내물18대 실성 마립간 김실성19대 눌지 마립간 김눌지
시호실성 마립간 (實聖 麻立干)
김(金)
실성(實聖)
생몰년도음력? ~ 417년 5월
재위년도음력402년 ~ 417년 5월 (16년)

실성한 왕이 아니다

1 개요

신라의 제18대 왕. 칭호는 삼국유사에서는 마립간, 삼국사기에서는 신라 마지막 이사금이다.

김알지의 후손(예손). 아버지는 미추 이사금의 동생 이찬 대서지(大西知). 어머니는 아찬 석등보(昔登保)의 딸인 기리(企利)부인이다.

내물 마립간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삼국사기에서는 '실성 이사금'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내물왕 때부터 왕호가 마립간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실성 마립간'으로 수정해야 한다고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삼국유사에는 '실성 마립간'으로 표기되었다.

그런데 학자들은 그가 '이사금'이라는 호칭을 쓴 것이 내물계와의 의도적인 차별화일 가능성도 있다고 보고 있다. '이사금'이라는 왕호가 연륜 있는 연장자의 뉘앙스를 풍기기 때문. 실제로 실성이 왕이 될 당시에 내물의 아들들은 아직 어려서 국정을 감당할 수 없었기에 화백회의에서 그를 왕위에 올렸다. 따라서 의도적으로 왕의 연륜을 강조키 위해 마립간보다 이사금 왕호를 더 선호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가 왕위에 오른 과정은 석연치가 않다. 최후도 석연치 않다 내물왕이 죽고 그 아들들이 어려서 화백회의에서 그를 왕으로 추대했다고는 하지만, 내물 마립간 말년을 보면 백제, , 야의 삼국 연합군에게 신라가 침공당해 나라가 망하기 일보 직전으로 몰리자 고구려에게 SOS를 쳤고, 광개토대왕이 5만 대군을 보내 연합군을 격파하고 신라를 구원했지만 그 대가로 신라는 고구려의 사실상 속국으로 전락했다. 내물은 전쟁의 충격으로 몸져 누웠고 그로 인해 392년부터 고구려에 인질로 가 있던 실성이 귀국했다.

비록 어리다고는 해도 내물에게 버젓이 아들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실성이 귀국했다는 점은 실성의 등극 뒤에 고구려의 입김이 작용했을 개연성을 보여준다. 실성도 고구려에 인질로 가 있으면서 고구려의 유력자들과 접촉하면서 차기 왕권을 노렸을 것이고 고구려 또한 자신들의 말을 잘 들을 듯한 실성을 선택했을 가능성이 있다. 신라판 킹메이커 시즌1

거기다 실성의 어머니는 석씨다. 한마디로 내물의 즉위로 왕위를 잃은 석씨가 자신들의 영향력을 다시금 확보하기 위해서 석씨 왕실의 피가 섞인 실성을 지지했을 가능성이 높다. 무엇보다도 실성 이후 석씨는 신라 왕계에서 그야말로 사라져버린다. 석씨 이전에 왕위에 올랐던 박씨의 경우 지속적으로 왕실에 남아있으며, 거기다 차후에는 왕위에도 다시 오른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 때 당시 석씨가 실성을 밀었기 때문에 실성을 밀어내고 왕위를 차지한 눌지에 의해 석씨 왕실도 같이 신라 왕실에서 쫓겨났다고 추측 해볼 수 있다.

또한 그의 왕비가 미추 이사금의 딸이라는 것도 수상하기 짝이 없다. 미추 이사금의 시기는 실성의 활동시기에서 약 90여년 전의 일이다. 미추 이사금에게 딸이 있었다 해도 이 시점에선 이미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 실성이 자신의 왕비를 미추 이사금의 딸이라고 한 것은 일종의 프로파간다일 가능성이 있는데, 아마도 내물의 아들들이 있음에도 내물과 가까운 친척이 아닌 실성이 왕이 된 것에 대한 세간의 비판을 잠재우고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한 차원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2 재위

왕위에 오른 후 미사품을 서불한으로 삼고 국정을 맡겼으며 즉위년(402년)에 내물 이사금의 아들 미사흔와 화해하기 위해 볼모로 보내고, 412년엔 복호고구려에 볼모로 보내 외교관계를 개선하려 했다. 여기에는 실성의 개인적 원한도 있었고 내물의 아들들을 신라 밖으로 보내서 세력을 약화시키려는 목적도 있었던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미사흔과 미사품은 다른 인물이다.

백제와 왜의 침략(실성 4년(406))을 격퇴시켰다. 4월에 왜병이 침범하여 명활성(明活城)을 치다가 이기지 못하고 돌아갈 때, 왕이 친히 기병을 이끌고 독산 남쪽에서 왜병과 두 번 싸워 이기고, 왜병 3백여 명을 죽였다고 한다.

한편으로 이런 기록도 있다.

7년(서기 408년) 2월에 왕은 왜인들이 대마도에 군사를 집결시키고 병장기와 군수품을 저축하여 신라를 침범하려고 준비한다는 말을 들었다. 이에 왕은 우리가 먼저 정예병을 뽑아 왜인들을 쳐부수자고 하였다. 그러나 예불감 벼슬에 있는 일본통 미사품은,

> "신이 들으니 병사는 흉기요, 싸움은 위험한 일이라 하였습니다. 하물며 넓은 바다를 건너 남을 치다가 이기지 못하면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신의 생각으로는 험한 곳에 요새를 설치하고, 적이 쳐들어오면 막아서 침범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좋을 듯 싶사옵니다. 만약 우리 쪽이 이로우면 나아가서 적을 사로잡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남을 유인하는 것은 좋지만, 남에게 유인당하는 것은 가장 나쁘다는 교훈으로 가장 좋은 계책인가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왕은 이 말을 듣고 옳다 하였다.

14년(서기 415년) 7월, 왕이 친히 혈성원에서 군사들을 열병하고 또 금성 남문에 나아가서 군사들이 활 쏘는 모습을 보았다. 이 해 8월에 풍도에서 왜병과 싸워 이겼다.

그러나 내물의 장남인 눌지가 점점 정치적으로 부상하자, 눌지를 고구려에 볼모로 보낸 뒤에 고구려 군대를 사주해서 눌지를 살해하려 시도했다가 오히려 눌지가 덕이 있어서 고구려인들이 감동한 나머지 눌지를 위해서 서라벌로 쳐들어가 실성을 죽이고 눌지를 왕으로 세웠다...라고 하는데 아마도 눌지는 동생들이 잇달아 볼모로 보내지자 실성과 대립각을 세웠을 것이고 실성은 자신의 왕위를 위협할 수 있는 눌지를 제거하려다가 눌지가 고구려를 자기 편으로 돌려서 살해당한 것으로 보인다. 혹은 그냥 승하하고 눌지가 계승했다는 식의 기록도 있긴 하지만.

한길사판 이강래 역주 삼국유사 실성왕조에서는 청동호우명그릇을 근거로 들어 이 시기 신라의 정치 격변에 고구려가 깊숙이 관여했음을 강조하고 있다. 실성 vs 눌지의 대립 구도 또한 집안 싸움에 고구려가 끼어들어 정치 공작을 펼쳤다는 이야기...

3 평가

잇다른 백제와 왜의 공세를 막아낸것으로 보면 능력은 있었던 왕으로 보인다. 실제로 "실성왕은 키가 7척5촌이나 되고, 사람됨이 똑똑하고 빼어나서 미래를 볼 줄 알았다."라고 삼국사기에 기록되어있다. 實聖이라는 것도 성왕이라는 의미이므로 만약 폐위되었다면 쉽게 붙을 수 있는 이름은 아니다. (다만 휘가 실성이라면 의자왕의 경우처럼 이름만 그렇고 실제로는 폐위되었을 수 있다.) 내물계와의 지나친 갈등이 결국 화가 된 듯 하다.

4 삼국사기 기록

一年春二月 실성이사금이 즉위하다
一年春三月 나물왕의 아들 미사흔을 왜에 볼모로 보내다
二年春一月 미사품을 서불한으로 삼다
二年秋七月 백제가 변경에 침입하다
三年春二月 시조묘를 배알하다
四年夏四月 왜병이 퇴각하는 것을 매복하여 물리치다
五年秋七月 누리가 곡식을 해치다
五年冬十月 서울(당연히 지금의 경주. 한강에 있는 서울이 아닌 수도를 뜻하는 우리말 '서울'이다)에 지진이 일어나다
五年冬十一月 얼음이 얼지 않다
六年春三月 왜인이 동쪽 변경을 침입하다
年夏六月 왜인이 남쪽 변경을 침입하다
七年春二月 대마도에 군영을 정벌하려다 그만두다
十一年 복호를 고구려에 볼모로 보내다
十二年秋八月 낭산에서 구름이 일어나다
十四年秋七月 혈성의 들판에서 사열하다
十四年秋八月 왜인과 풍도에서 싸워 이기다
十五年春三月 동해 바닷가에서 뿔이 있는 큰 고기를 잡다
十五年夏五月 토함산이 무너지고 샘물이 3장이나 솟아오르다
十六年夏五月 왕이 죽다

미사흔을 볼모로 보냈음에도 왜가 쳐들어 왔다는 기록이 4개나 보인다.

5 창작물

마립간 시대의 신라 왕 중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사극에 등장했다. 광개토태왕(드라마)근초고왕(드라마)인데, 광개토태왕에서는 조재완이, 근초고왕에서는 김하균이 연기했다. 그러나 두 드라마 제목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신라는 병풍이었기 때문에 큰 비중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