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물 마립간


신라의 역대 국왕
16대 흘해 이사금 석흘해17대 내물 마립간 김내물18대 실성 마립간 김실성
시호내물 마립간(奈勿 麻立干) / 나밀 마립간(那密 麻立干)
김(金)
내물(奈勿) / 나밀(那密)
생몰년도음력? ~ 402년 2월
재위기간음력356년 ~ 402년 2월 (47년)


내물왕릉. 첨성대 남서쪽에 위치한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라 내물왕릉으로 추정되는 고분이다. 돌무지덧널무덤 양식으로 추정되며, 하단부의 돌무지가 일부 노출되어 있다. 실제 크기는 더 컸을 듯. 신라 역사의 분기점에 해당하는 왕이기도 하다. 내물왕의 등장으로 신라는 김씨 왕위세습(성골)과 마립간(매금, 대군장이란 뜻)이란 칭호를 사용했다.

1 개요

신라의 17대 임금이자 이후 550년이 넘게 이어지는 경주 김씨 왕조의 시작점.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왕의 칭호로 마립간을 처음 사용한 왕이다.[1]


2 호칭

흔히 내물 이사금 혹은 나물 이사금, 나물 마립간 등 이름과 왕호에 여러가지 논란이 있는 왕이기도 하다.

저 이름인 奈物에 대해 살펴보자면, 삼국사기에 따르면 奈物(혹은 那密)이라고도 한다라고 되어 있다.(삼국사기 신라본기 3권). 奈에는 당대 발음으로 [naj]라는 음가가 있다. 반절로는 奴帶切. 이는 현대 한자음의 의 음가에 해당한다. 의 음가는 운서인《廣韻(광운)》에 따르면 능금을 나타내는 것으로 능금 내라는 한자가 이 한자의 원래 뜻이다. ('柰有靑白赤三種 乃帶切 - 廣韻去聲卷第四'. 구체적으로는 蟹攝泰韻一等에 속한다). 여기만 까지만 보면 내물로 읽는 것이 맞는거 같아 보인다. 하지만……奈는 당대부터 이미 那와 통했다. 바로 가차. 자세한 건 육서의 가차 부분 참고. 이때는 奴箇切의 [na]로 읽었다. 즉 ㄴ+ㅏ로 나로 읽었다는 의미(한국 한자음의 반절 참고). (那也柰那通 奴箇切 - 廣韻去聲卷第四 .구체적으로는 果攝箇韻一等에 속한다). 삼국사기 3권의 奈物이 那密과 통한다는 것을 보면 애초에 여기서는 奴箇切의 [na]로 읽는 것이 맞다는 것을 당연히 알 수 있다. 勿의 경우는 원음이 믈에 가까운 음가로, 臻攝物韻三等 에 속한 한자다. 여기서 攝이란 성조에 상관없는 기본 모음+종성을 묶은 것이다. 韻이란 성조가 포함된 모음+종성이고 等이란 개합음(w,j)을 가리키는 것으로. 臻攝物韻三等은 전설고모음으로 '을'에 모음이 가깝다는 의미. 勿 원음은 [mĭuət]에 가까웠을 것으로 보고 있으며, 密은 臻攝質韻三等에 속한 한자로 밀에 가까운 음가로 [mĭĕt]에 가까웠을 음으로, 이 둘이 통용되었다면 사실상 에 가까운 음이었을 것이다. 입성 t의 l화의 경우 이미 신라시대부터 그 흔적이 있으므로, 당대부터 l로 읽었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당대의 음가에 따르면 나밀이 가장 가까운 음이며, 현재 흔히 쓰는 한자표기인 奈勿도 또한 나물로 읽는 것이 옳다.

왕호에 대해서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라 이 시기에 마립간의 칭호가 시작되었다는 견해가 주류를 이루고 있으나, 삼국사기에는 이 시기까지 이사금의 칭호를 쓰고 마립간의 칭호는 19대 임금인 눌지 마립간 시대에 비로소 시작되므로 이설이 있다. 나물이 눌지 왕계의 시작이므로 후대에 마립간으로 변화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3 생애

3.1 계보

아내를 맞이할 때 같은 성씨를 취하지 않는 것은 분별을 두터이 하기 때문이다. ... 신라의 경우에는 같은 성씨를 아내로 맞이할 뿐만 아니라 형제의 자식과 고종·이종 자매까지도 모두 맞이하여 아내로 삼았다. 비록 외국은 각기 그 습속이 다르다고 하나 중국의 예속(禮俗)으로 따진다면 도리에 크게 어긋났다고 하겠다. 흉노(匈奴)에서 그 어머니와 아들이 상간(相姦)하는 경우는 이보다 더욱 심하다.-《삼국사기》신라본기 권 3 내물 이사금

김알지의 8세손. 아버지는 말구(末仇), 어머니는 휴례부인(休禮夫人). 보반부인(保反夫人)과 결혼했는데, 보반부인은 신라 13대 임금인 미추(味鄒)의 딸이다. 그런데 미추 이사금은 284년에 죽었고 내물 마립간은 356년에 왕으로 등극했다. 보반부인이 284년에 태어났다손 치더라도 내물 마립간이 즉위했을 때는 이미 73세가 될 것이다. 내물 마립간이 40대에 등극했다치더라도 최소 30살 연상이라고 보는데, 이 기록이 100% 사실로 보는 것이 무리가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보반부인이 미추왕의 손녀 혹은 증손녀이거나, 내물 마립간이 자신의 정통성을 확립하기 위해 미추 이사금을 억지로 끌어들였다는 의견이 있다. 그리고 이전에 근친혼에 대한 이야기가 있는데 이전부터 신라 왕실은 근친혼이 많았다. 그러므로 근친혼을 통해 김씨 왕실의 결속을 이끌어냈다고 보기는 어렵다.


3.2 재위

내물2년(357년) 봄, 각 지방에 사자를 파견하여 과부홀아비 등에 곡식 3곡 (1곡 = 10두) 을 하사하고, 행실이 착한 관리에게 1급씩 관직을 올려주었다. 민심 수습으로 볼 수 있다.

당시 신라 주위의 정세는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무엇보다 바다 건너 국이 가장 큰 문제였는데, 앞서 흘해 이사금 때 틀어진 왜국과의 관계는 여전히 회복되지 않아 내물9년(364년) 왜군의 국지적인 내침이 있었다. 의외로 왜군이 쳐들어오면 격퇴했다. 농성하다 적이 물러갔다 식의 기록이 아닌 제법 상세하게 나온다. 삼국사기 기록을 살펴보면 내물9년 왜의 대군을 상대하기 위해 수천개의 허수아비를 만들어 군복을 입히고 무기를 들려준 다음, 토함산 밑에 세워놓고 날쌘 병사 1천 명을 잠복시켰다. 왜군들이 자신들의 수를 믿고 허수아비를 향해 돌격해오는 동안, 복병을 동원하여 대파한다. 비록 지형을 이용한 기습 공격으로 왜군은 격퇴되었으나, 신라군이 왜군과 정면으로 대결하지 못하고 농성 또는 전술로서 격퇴하는 모습은 노략질 정도의 수준으로 그치던 침략이 하나의 정권으로 모이기 시작하면서 점점 대형화되고 있음을 뜻한다.

다만, 위의 기록에서 일본서기에 따르면 왜군이 신라군의 왼쪽이 텅 빈 것을 눈치채고 집중공격하여 신라군을 대파했다고 나온다. 결과는 서로 다르지만, 364년에 왜의 공격이 있었던 것은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일본서기에 따르면 삼국사기엔 없는 기록이 추가로 있는데, 내물14년(369년) 왜군이 대대적으로 신라, 가야 정벌을 단행한 것으로 나와있다. 이 때 백제와 왜의 연합군은 신라를 정벌하고, 가야 7개 소국을 평정했다고 되어있다.

삼국사기에 내물 38년(393년) 5월에 왜가 다시 대대적으로 침입하여 금성을 5일이나 포위하지만 내물왕은 왜의 예봉을 피한 뒤 적의 퇴로를 차단하고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여 퇴각하는 왜적들을 공격, 괴멸적인 타격을 줬다고 적혀있다. 그런데 1년 전인 내물 37년(392년) 내물왕이 느닷없이 고구려는 강성하니 실성을 고구려에 인질로 보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전한다. 광개토왕릉비문과 종합해보면, 신묘년(391년) 이듬해 신라는 고구려에 실성을 인질로 보내 구원을 요청한 것이고, 이듬해 왜군의 침입을 받았으나 이를 격퇴한 것이 된다. 광개토왕릉비엔 영락6년(396년) 고구려군이 위례성의 백제군을, 영락10년(400년) 보기 5만으로 신라 금성의 왜군을 박살냈다고 쓰여 있는데, 삼국사기 내물41, 45년(396, 400년)은 별 기록이 없다.[2]

왜 이외에 백제근초고왕이 백제 중심의 국제질서를 한반도 남부에 정립하려 하고 왜국과 가야가 여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자, 신라 또한 별 수 없이 백제의 우위를 인정하고 여기에 참여하였다. 366년 백제의 사신이 신라를 방문하고, 368년 신라가 백제로부터 좋은 말 두 필을 받은 사실은 이러한 일본서기의 기록을 방증한다.

그러나 이내 신라는 백제 우위의 국제질서에 도전을 시작하여, 즉위 18년(373년) 신라로 귀순한 백제 독산성 성주와 백성 3백여명을 백제로 송환하지 않았다. 이 때 근초고왕이 독산성 성주와 백성들을 돌려주라고 국서를 보내자 내물왕은 "원래 백성은 일정한 마음이 없으니 생각나면 오고 싫어지면 가버리는 것이 인지상정임. 너희 백성이 편치 않음은 걱정하지 않고 오히려 나한테 뭐라 하는게 말이 됨? 한마디로 너나 잘하세요"이라고 답서를 보내 근초고왕을 침묵시켜 버렸다. 이런 소리가 나올 법도 했던 게 이 논쟁이 있던 1년 전에 백제에서 지진이 일어났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2년 뒤인 375년에는 흉년까지 들어 수곡성을 빼앗아 간 고구려에 반격도 하지 못했다. 키보드워리어 내물 뒷날의 일이지만 문무왕당나라 장군 설인귀와 키배를 뜬 적이 있다. 신라 왕실에도 키보드 워리어의 혈통이 흘렀을지도. 381년에는 화북의 전진(前秦)에 독자적으로 사신을 보내 백제의 공격을 초래하였다. 그래서 일본서기 신공황후 관련 기록의 주인공을 백제로 바꾸어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백제의 공격에 맞서 신라는 미인계로 백제 장군 사지비궤를 매수하여 백제군은 오히려 가야를 공격하였다. (일본서기의 가야왕 이본한기를 삼국유사의 금관가야 5대 임금 이시품왕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이에 백제는 다시 목라근자를 보내어 가야국을 복원시켰으나, 이로서 한반도 남부에 정립되었던 백제의 권위와 위상은 막심한 타격을 입게 되었고 반면 신라는 국제적으로 고립되는 처지가 되었다.

따라서 신라는 강성한 고구려와 동맹을 맺어 이러한 상황에서 벗어나려 하였고, 392년 고구려의 사신이 내방하자 내물의 조카이자 이찬 대서지의 아들 실성이 볼모가 되어 고구려로 떠났다. 그러나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400년 신공황후 삼한정벌 설화의 모티프가 된 391년 신묘년이 아니다. 다굴 당하는 신라 에는 백제가 선동하고 왜국이 주도한 대대적인 내침이 벌어졌다. 이렇게 신라가 원군을 요청하자 이듬해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5만 군대가 실성과 함께 신라를 구원하였다.

이 사건으로 신라는 한층 더 고구려의 영향권 아래 들어가게 되었으며, 사실상 속국이 되었다. 하긴 안 그랬으면 망했을 거다. 내물에게는 눌지, 미사흔, 복호 등 적남이 많이 있었음에도 내물 사후 신라의 왕위는 고구려의 후원을 받는 실성에게로 넘어갔다. 일설에는 내물이 고구려에 의해 암살되었다는 견해도 있지만 40여년이나 재위한 걸 생각하면 (삼국유사에서는 57년을 재위하였다) 수명이 다한 것이 더 타당해 보인다.

덤으로 즉위 42년(397년)에 하슬라(河瑟羅, 지금의 강원도 강릉시)의 가뭄 구제 기사를 통해 내물왕 때 신라의 북쪽 국경이 최소 강릉 이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4 삼국사기 기록

一年夏四月 나물이사금이 즉위하다
二年 환·과·고·독을 위로하고, 효제에 특별한 사람을 포상하다
三年春二月 시조묘에 제사지내다
七年夏四月 나무가 가지를 서로 잇다
九年夏四月 왜병이 쳐들어오자 이를 물리치다
十一年春三月 백제 사람이 와서 예방하다
十一年夏四月 물난리가 나서 산이 무너지다
十三年 백제 왕이 좋은 말을 바치다
(...)[3]
十七年 가물고 흉년이 들자 사자를 보내 진휼하다
十八年 백제의 독산성주가 신라로 투항하다
十九年夏五月 서울에 물고기가 비에 섞여 떨어지다
二十一年秋七月 뿔이 하나 달린 사슴을 바치다다
二十四年夏四月 작은 참새가 큰 새를 낳다
二十六年 위두를 전진에 사신으로 파견하다
三十三年夏四月 서울에 지진이 일어나다
三十三年夏六月 또 지진이 일어나다
三十三年 겨울에 얼음이 얼지 않다
三十四年春一月 서울에 전염병이 크게 돌다
三十四年春二月 흙비가 내리다
三十四年秋七月 누리의 피해로 곡식이 여물지 않다
三十七年春一月 이찬 대서지의 아들 실성을 고구려에 보내 볼모로 삼다
三十八年夏五月 왜인이 와서 금성을 포위하자 독산에서 대승을 거두다[4]
四十年秋八月 말갈이 침입하자 이를 물리치다
(...)[5]
四十二年秋七月 하슬라에 흉년이 들어 죄수를 사면하고 세금을 감면해 주다
四十四年秋七月 누리가 날아와 들판을 덮다
四十五年秋八月 살별이 동쪽에 나타나다
四十五年冬十月 내구마가 슬프게 울다[6]
四十六年 봄과 여름에 가물다
四十六年秋七月 고구려에 볼모로 갔던 실성이 돌아오다
四十七年春二月 왕이 죽다
대체적으로 자연재해에 대한 기사가 많다.


내물 이사금(삼국유사에서는 마립간으로 표기) 부터 삼국사기 3권이 시작된다.
  1. 다만 삼국사기에서는 아직 이사금 칭호로 나온다.
  2. 일본인들은 광개토대왕비문의 신묘년(391년) 기사중 "왜가 백제, **, 신라를 격파하고 신민(臣民)으로 삼았다." 라는 부분에 열광을 하지만 삼국사기(내물38년, 393년)와 광개토왕릉비(영락10년, 400년) 모두 결국에는 왜군을 격퇴한 것으로 서술되고 있다는 점이 더 중요한 부분이다.
  3. 일본서기에 의하면 왜가 신라와 가야를 침공한 해(369년)이다. 별다른 언급이 없다.
  4. 광개토대왕비에 언급된 신묘년(391년)의 다음해(392년)와 그 이듬해(393년)에 해당된다.
  5. 광개토대왕비 영락6년(396년) 고구려와 백제간 전쟁시 별다른 언급이 없다.
  6. 광개토대왕비 영락10년(400년) 광개토대왕이 보기5만으로 신라를 구원한 해이다. 역시 고구려가 신라를 구원했다는 직접적인 언급은 없다. 그런데 왕이 타고다니는 궁중의 말인 내구마가 기쁘게 슬프게 울었다는 기록은, 신라 왕실의 후예인 김부식이 신라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 고구려의 신라 구원으로 인하여 사실상 고구려의 속국화가 된 신라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보는 해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