눌지 마립간

이 문서는 눌지왕, 김눌지, 눌지마립간 등으로도 모두 들어올 수 있다.
75px
신라의 역대 국왕
18대 실성 마립간 김실성19대 눌지 마립간 김눌지20대 자비 마립간 김자비
시호눌지 마립간 (訥祇 麻立干)
김(金)
눌지(訥祇)
생몰년도음력361?? ~ 458년 8월
재위년도음력417년 ~ 458년 8월 (41년)

1 개요

신라의 제 19대 왕. 칭호는 마립간.
이름은 김눌지다.

기록에 의하면 17대 내물 마립간장남이다. 내물 마립간백제, , 가야의 삼국 연합군의 침공과 고구려의 속국화에 충격을 받아 병져 누운 끝에 사망하자 아직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화백회의에서 실성을 왕으로 추대했다. 그러나 실성이 고구려에 인질로 가 있었다는 점으로 미루어보면 아마도 고구려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김씨에 의해 왕위에서 물려난 석씨 왕실의 영향력도 배제할 수 없다고 본다.

2 재위

실성 마립간은 눌지를 직접 공격하기보다는 먼저 눌지의 동생들부터 제거하는 방식을 택해, 눌지의 동생들을 볼모로 외국에 보낸다. 눌지의 첫째 동생 복호고구려로, 둘째 동생 미사흔로 볼모로 보냈다. 종국에는 눌지마저도 고구려에 볼모로 보내졌다. 기록에 의하면 실성은 고구려인을 사주해서 눌지를 암살하려 했으나 고구려인이 눌지를 보고 군자의 기상이 있음을 알고서 감동하여 그를 죽이지 않고 되려 고구려 군대가 실성을 죽여버렸다는 것(...). 아버지, 작은아버지 죽이고 다시 왕권 되찾았어요

아마도 실성이 등극하는 과정을 지켜본 눌지는 고구려를 자신의 편으로 돌려야 왕위 등극이 순탄할 것임을 알고, 고구려와 모종의 외교협상이나 혹은 고구려 유력자들을 끌어들여서 실성을 제거하고 왕이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여기서 특기할 만한 사항이 있는데, 그의 부인이 실성 마립간의 딸이라는 것. 신라판 킹메이커 시즌2

왕이 된 이후 충신 박제상을 굴려서(...) 고구려에 인질로 가 있던 복호를 빼내왔으며, 다시 왜에 인질로 가있던 미사흔을 탈출시키는 데 성공한다.

내정으로 노인을 공경하는 예를 세웠다고 하는데 아마도 조선세종 때처럼 양로연 같은 것을 열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저수지를 만들어 농업용수를 확보하고 백성들에게 가 끄는 수레를 대대적으로 보급했는데 이는 농업 생산력의 향상과 물자수송의 용이함을 위해서였던 걸로 보인다.

고구려의 승려 묵호자가 와서 자기 딸을 치료해주자 을 지어주기도 하였다. 삼국사기에는 이렇게 되어 있는데 삼국유사에는 미추 이사금때의 아도가 그랬다고 되어 있다. 아직 이차돈의 순교까지 백여 년이나 남았으니 공식적으로 불교를 인정한 건 아니었겠지만, 적어도 왕실은 불교에 관심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1]

외교에서는 되도록 주체적인 입장에서 고구려의 영향에서 벗어나려고 애쓴 흔적이 보인다. 통수 즉위 2년(418년) 고구려에 인질로 가 있던 복호를 탈출시킨 것을 볼 때 고구려에게 약점을 잡히지 않으려는 차원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즉위 8년(424년)에 사신을 보내 정상 외교관계를 유지하였으나 전성기를 맞은 고구려의 장수왕이 남진정책을 계속 추진하자 고구려와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반면 고구려의 압박을 견디지 못한 백제가 그간의 원한을 잊고 동맹하자고 제안하자 이를 받아들여 최초로 나제동맹이 성립했다. 이에 따라 즉위 39년(455년)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해오자 백제에 군사를 파병하여 고구려군을 물리쳤다. 450년엔 신라의 하슬라(강릉시) 성주 삼직(三直)이 고구려 변경 성주를 살해하여 고구려군이 쳐들어오자 사신을 파견하여 외교적으로 무마시킨다.

와의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는데, 미사흔을 탈출시키고 박제상이 왜에서 죽게 되자 양국의 관계는 파국으로 치달았던 걸로 보인다. 왜는 431년에 서라벌 인근 명활산성을 침공했고, 440년에는 신라의 남쪽, 동쪽 국경에 쳐들어왔으며 444년에는 서라벌까지 쳐들어와 10일간 포위했다가 식량이 떨어지자 퇴각하는데, 신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눌지 마립간은 군사를 이끌고 왜군의 뒤를 쫓았다가 대패한다. 절반의 군사를 잃고 산으로 도망갔으나 왜군들에게 포위당하는데, 다행히도 짙은 안개가 끼어 포위망을 탈출하고 왜군들은 물러간다. 위의 기록들만 봐도 양측의 험악했던 관계를 알 수 있다.

오랜 재위기간이 말해주듯이 내외적으로 상당한 성과를 거둔 왕이며 지증왕대의 신라 발전의 터전을 어찌 보면 눌지 마립간이 닦았다고도 볼 수 있다.

또한, 광개토대왕의 신라 구원 이후 한동안 고구려의 정치적 간섭을 받는 처지였으나, 눌지 마립간 때 고구려의 영향력 하에서 벗어난 걸로 보인다. 광개토대왕 때부터 서라벌에 고구려 군사들이 주둔하고 있었으나,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어느 땐가 모두 살해되는데, 그게 이 눌지 마립간 때로 추정된다. 이에 장수왕은 신라에 공격했지만, 백제, 가야, , 신라의 연합군에게 패배하여 물거품이 되었다.

불과 수십년 전엔 고구려, 신라 연합군과 백제, 가야, 왜의 연합군이 전투를 벌였다는 것을 상기해 본다면, 외교에 영원한 적도, 영원한 동맹도 없다는게 실감이 날 것이다.

3 삼국사기 기록

一年夏五月 눌지마립간이 왕위에 오르다
二年春一月 시조묘에 배알하다
二年 미사흔이 왜국에서 도망해 돌아오다
三年夏四月 우곡에서 물이 솟구쳐오르다
四年 봄과 여름에 가물다
四年秋七月 흉년이 들자 죄수들을 사면하다
七年夏四月 남당에서 노인들을 대접하다
八年春二月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예방하다
十三年 시제를 새로 쌓다
十五年夏四月 왜병이 침입하다
十五年秋七月 서리와 우박이 내려 곡식을 죽이다
十六年 곡식이 귀하여 소나무 껍질을 먹다
十七年夏五月 미사흔이 죽어 서불한으로 추증하다
十七年秋七月 백제가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하다
十八年春二月 백제 왕이 좋은 말을 보내다
十八年秋九月 백제 왕이 또 흰 매를 보내다
十八年冬十月 황금과 야광구슬을 백제에 보내 보답하다
十九年春一月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히다
十九年春二月 역대의 왕릉을 수리하다
十九年夏四月 시조묘에 제사지내다
二十年夏四月 우박이 내리다
二十二年夏四月 홍수와 큰 바람이 불고 우박이 내리다
二十四年 왜인이 남쪽 변경을 침입하다
二十四年夏六月 왜인이 동쪽 변경에 침입하다
二十五年春二月 꼬리가 긴 흰 꿩을 바치자 왕이 곡식을 내려주다
二十八年夏四月 왜병을 쫓다가 위기에 빠지다
三十四年秋七月 삼직이 고구려의 변방 장수를 죽이다
三十六年秋七月 상서로운 벼이삭을 바치다
三十七年 봄과 여름에 가물다
三十七年秋七月 이리떼가 시림에 들어가다
三十八年秋七月 서리와 우박이 내려 곡식을 해치다
三十八年秋八月 고구려가 북쪽 변경을 침입하다
三十九年冬十月 고구려가 백제를 침략하니 왕이 군사를 보내 구해주다
四十一年春二月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히다
四十一年夏四月 서리가 내려 보리가 상하다
四十二年春二月 지진이 일어나다

四十二年秋八月 왕이 죽다
  1. 신라는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토속 신앙이 너무 강하다 보니 불교를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이차돈의 순교라는 충격요법(?)을 통해 공인에 성공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