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알지

김알지
金閼智(65~?)[1]

1 개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경주 김씨의 시조이자 신라 김씨 왕조의 시조. 단 일반인들이 착각하기 쉬운 점은 박씨 왕조의 시조 박혁거세나 석씨 왕조의 시조 석탈해와 달리 김알지 본인이 생전에 신라 왕위에 오른 것은 아니며 그의 후손들이 왕위에 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기록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삼국사기》의 탈해 이사금 편이다.

탈해 이사금의 양자로 들어가 대보의 관직을 하사받았다.

2 설명

九年 春三月 王夜聞 金城西始林樹間 有鷄鳴聲 遲明遣瓠公視之 有金色小櫝 掛樹枝 白雞鳴於其下 瓠公還告 王使人取櫝開之 有小男兒在其中 姿容奇偉 上喜謂左右曰 此豈非天遺我以令胤乎 乃收養之 及長聰明多智略 乃名閼智 以其出於金櫝 姓金氏 改始林名雞林 因以爲國號

9년 봄 3월에 왕이 밤에 금성 서쪽의 시림(始林)의 숲에서 닭 우는 소리를 들었다. 날이 새기를 기다려 호공을 보내 살펴보게 하였더니, 금빛이 나는 조그만 궤짝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흰 닭이 그 아래에서 울고 있었다. 호공이 돌아와서 아뢰자, 사람을 시켜 궤짝을 가져와 열어 보았더니 조그만 사내아기가 그 속에 있었는데, 자태와 용모가 기이하고 컸다. 왕이 기뻐하며 좌우의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이는 어찌 하늘이 나에게 귀한 아들을 준 것이 아니겠는가?"
하고는 거두어서 길렀다. 성장하자 총명하고 지략이 많았다. 이에 알지(閼智)라 이름하고 금궤짝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성을 김(金)이라 하였으며, 시림을 바꾸어 계림(鷄林)이라 이름하고 그것을 나라 이름으로 삼았다.- 《삼국사기》 탈해 이사금 9년출처 - 네이트 한국학

삼국유사》에서도 알지 신화가 등장하는데 《삼국사기》와는 약간의 차이점이 보이지만 전체적인 내용은 동일하다.

영평(永平) 3년 경신(庚申),【중원(中元) 6년이라고도 하나 잘못이다. 중원은 2년 뿐이다】 8월 4일에 호공(瓠公)이 밤에 월성(月城) 서리(西里)를 걸어가는데, 크고 밝은 빛이 시림(始林)【구림鳩林이라고도 한다.】 속에서 비치는 것이 보였다. 자줏빛 구름이 하늘로부터 땅에 뻗쳤는데 그 구름 속에 황금(黃金)의 궤가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그 빛은 궤 속에서 나오고 있었다. 또 흰 닭이 나무 밑에서 울고 있었다. 이 모양을 호공은 왕에게 아뢰었다. 왕이 그 숲에 가서 궤를 열어보니 동남(童男)이 있는데 누웠다가 곧 일어났다. 이것은 마치 혁거세(赫居世)의 고사(故事)와도 같았으므로 그 말에 따라 그 아이를 알지(閼知)라고 이름지었다. 알지란 곧 우리말로 소아(小兒)를 일컫는 것이다. 그 아이를 안고 대궐로 돌아오니 새와 짐승들이 서로 따르면서 기뻐하여 뛰놀고 춤을 췄다. 왕은 길일(吉日)을 가려 그를 태자로 책봉했다. 그는 뒤에 태자의 자리를 파사왕(破娑王)에게 물려 주고 왕위에 오르지 않았다. 금궤(金櫃)에서 나왔다 하여 성(姓)을 김씨(金氏)라 했다. 알지는 열한(熱漢)을 낳고 열한은 아도(阿都)를 낳고, 아도는 수류(首留)를 낳고, 수류는 욱부(郁部)를 낳고, 욱부는 구도(俱道; 혹은 구도仇刀)를 낳고, 구도는 미추(未(味)鄒)를 낳으니 미추(未鄒)가 왕위에 올랐다. 이리하여 신라의 김씨(金氏)는 알지에서 시작된 것이다.-《삼국유사

이 설화의 내용은 박씨와 석씨보다 김씨가 우월하다는 점을 그들의 토템인 닭과 연결시켜서 나타낸 것으로 해석된다.

味鄒尼師今立 一云味照 姓金 母朴氏 葛文王伊柒之女 妃昔氏光明夫人 助賁王之女 其先閼智 出於계林 脫解王得之 養於宮中 後拜爲大輔 閼智生勢漢 勢漢生阿道 阿道生首留 首留生郁甫 郁甫生仇道 仇道則味鄒之考也 沾解無子 國人立味鄒 此金氏有國之始也

미추 이사금(味鄒尼師今)이 왕위에 올랐다.(미추(味鄒)를 또는 미조(味照)라고도 하였다.) 성은 김씨이다. 어머니는 박씨로 갈문왕 이칠(伊柒)의 딸이고, 왕비는 석씨 광명부인(光明夫人)으로 조분왕의 딸이다. 그의 선조 알지(閼智)는 계림에서 났는데 탈해왕이 데려다가 궁중에서 키워 후에 대보(大輔)로 삼았다. 알지는 세한(勢漢)을 낳고 세한은 아도(阿道)를 낳았으며, 아도는 수류(首留)를 낳고 수류는 욱보(郁甫)를 낳았다. 그리고 욱보는 구도(仇道)를 낳았는데 구도는 곧 미추왕의 아버지이다. 첨해는 아들이 없었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미추를 왕으로 세웠다. 이것이 김씨가 나라를 갖게 된 시초이다. -《삼국사기미추 이사금 0년

알지는 훗날 아들을 하나 두었는데 김세한(金勢漢), 혹은 김열한(金熱漢)이며[2] 이후 그의 후손인 미추 이사금이 왕위에 오르면서[3] 신라의 김씨 왕조가 시작된다.

김알지의 실존 여부와 더불어, 실존했다면 그의 정체는 무엇인가 라는 의견들도 분분하다. 대표적인 주장이 마한의 왕족 출신이라는 것. 탈해 이사금이 양자로 받아들일만큼 귀한 신분이어야 된다는 점과 중국 기록을 근거로 들어 마한의 부흥 운동을 하던 왕족 출신일 것이라는 주장이다. 참고

3 기타

알지라는 이름에 대한 해석도 분분한데 《삼국유사》에서는 '아지' 즉 "아이"라는 뜻이라고 해석을 했다. 실제 김유신의 누이동생들도 아명으로 '아지'와 '아해'라는 이름이 있긴 했지만, 이는 후대에 부친 해석이라 당대에도 그리 사용됐는지는 의문.

최근에는 "알(Ar)"부족, 즉 "금(金) 부족의 족장"이라는 견해가 주를 이룬다. 신라의 시조인 박혁거세의 설화에서도 박혁거세가 알에서 나와 맨처음 한 말이 "알지거서간"이라는 기록으로 보아 "알지"라는 단어는 특정인의 이름이 아니라 신라 초기 왕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먼 훗날 기록인 문무대왕릉비와 흥덕왕릉비 등에 등장하는 신라의 태조 성한왕(星漢王)을 김알지로 보는 견해도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기록과 달리 당시 기록이라 더 중요한 기록인 여기에서 김알지는 등장하지 않으며 성한이란 인물이 시조[4]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 하지만 '성한'과 음이 더 유사한 그의 아들 세한(혹은 열한)으로 보는 견해, 혹은 김씨왕조의 시작인 미추왕으로 보는 견해 등이 있다.[5]

문무대왕릉비에 등장하는 김일제[6] 또한 김알지와 연관짓기도 하는데 이는 대당고김씨부인명에도 신라의 김씨 시조가 투후 김일제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7] 흉노족 신라왕족설을 차용한다면 알지는 금(金)을 뜻하는 몽골어 "알탄"과 같은 어원을 가지는 것으로 볼 수 있게 된다.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은 백제 본기에 "이거 왠지 구라같은데 전해오는 전설이니 일단 쓴다"[8]라고 적어놨다. 너무나 기이해서 지식인이었던 김부식으로썬 기록을 해야되나 말아야되나 고민을 했던 듯. 삼국사기》 초기기록은 죄다 전설 투성인데?

4 관련항목

  1. 삼국유사》의 기록에는 탈해이사금 4년인 60년에 태어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2. 경주 김씨 족보와 《삼국사기》의 기록에는 세한으로 기록되어 있다.
  3. 미추 이사금은 김알지의 7세손이다
  4. 신라의 시조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김씨의 시조로 해석된다
  5. 비석에 기록된 대수를 타고 올라가면 경주김씨 족보에 기록된 세한이 성한왕의 대수에 해당된다. 당시 이름이 한문의 음차였던 것을 감안하면 성한왕(聖漢王)=세한(勢漢)일 가능성이 높으며, 김알지는 왕권을 위해 신화적으로 1대를 격상시킨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재미난 것은 문무왕릉비와 흥덕왕비, 그리고 김인문 묘비에 기록된 성한왕의 설화가 삼국사기의 김알지 설화와 놀랍도록 유사하다는 것.
  6. 흉노족의 왕자였다가 한무제에게 잡혔다가 인생역전한 사람이다
  7. 김씨성을 한 무제에게서 하사받았는데, 황금신상에 제사를 하여서 김(금, 金)씨 성을 하사하였다는 것. 이후 이들의 후손이 쿠데타를 일으켰던 왕망의 편에 섰다가 산동으로 도망한 뒤 기록이 사라지는데 이 시기쯤 이들 후손 중 일부가 당시의 해상교역로를 타고 경주까지 흘러들어왔다는 설이 있다.
  8. 실제로는 "논하여 말한다. 신라 고사(古事)에는 "하늘이 금궤를 내려 보냈기에 성(姓)을 김씨(金氏)로 삼았다"고 하는데, 그 말이 괴이하여 믿을 수 없으나, 내가 역사를 편찬하는데, 이 말이 전해 내려온 지 오래되니, 이를 없앨 수가 없었다. 그러나 또한 듣건대 "신라 사람들은 스스로 소호금천씨(小昊金天氏)의 후손이라 하여 김씨로 성을 삼았고 이는 신라 국자박사(國子博士) 설인선(薛因宣)이 지은 김유신의 비문과 박거물(朴居勿)이 지었고 요극일(姚克一)이 쓴 삼랑사비문(三郞寺碑文)에 보인다." 라고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