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상시의 난

1 개요

삼국지에 나오는 사건으로 외척인 하진과 각지 유림 인사들을 세력으로 한 청류파와 장양 등의 환관과 부패한 관리들을 세력으로 한 탁류파의 대립의 종지부를 찍은 사건으로 189년에 일어났다.

2 배경

후한 말, 영제(靈帝)가 정치에 관심을 가지지 않게 하기 위해 권력을 쥐고 있던 환관 세력의 십상시는 영제를 주색에 빠지게 만들었는데, 환관들과 간신들이 판을 치며 나라 꼴이 개판이 되니 결국 황건적의 난 등 여러 반란이 일어난다. 황건적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외척 하진이 대장군에 임명되어서, 탁류파와 청류파 간의 사이를 조율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하진은 가난한 백정 출신으로 어떤 연줄이었는지 십상시에게 줄을 대면서 누이동생 하태후를 황실에 궁녀로 넣으며 관직에도 임용될 수 있었다. 그러다 하태후가 영제의 총애를 받으면서 하진도 본격적으로 출세 가도를 달렸고, 역시 그 배경에는 십상시의 조력이 있었다. 하지만 권력이 강해지자 하진은 점차 십상시들에게 간섭받기를 싫어하게 되었고 거기다 영제가 죽어버리자 완전히 망했어요가 되어버린다.

3 전개

3.1 소제의 즉위

영제는 병세가 위독해지자 십상시 가운데 한 명인 건석을 불러 유조를 내리고 진류왕 유협을 보살펴 줄 것을 부탁했다.

건석은 수도의 군사권을 장악하고 있던 서원팔교위의 수장으로 하진을 고깝게 보고 있었기에 하진을 죽이고 진류왕 유협을 옹립할 계획을 세우지만, 중간에 하진이 눈치를 채는 바람에 실패했으며 하진이 환관 세력에 원한을 품어 대립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처음에 하진과 어울리던 청류파들은 십상시에게도 대체로 중립적인 부류였지만, 이 무렵부터 십상시와 하진의 불화를 감지한 원소같은 강경한 청류파들도 하진에게 접근해 십상시를 조지자고 부추긴다. 하진은 평소에 십상시가 워낙 인기가 없는 것을 잘 알고 있었는데다 원소와 만나기 시작하면서 원소를 따르던 우월한 인재풀들이 모두 하진에게로 향하자 더욱 바람이 들어갔던 모양.

불안해진 건석은 자신이 거느린 중앙군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하진을 죽일 계획을 세웠지만, 나머지 십상시들은 하진이 자신들을 보호해줄거라 착각하고 오히려 건석의 계획을 하진에게 일러바쳤다. 결국 건석은 주살되고 중앙군은 모조리 하진에게로 흡수되고 마니, 하진에게 실력으로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카드를 스스로 갖다 바친 셈이 되버렸다.

3.2 원소의 계책

이리하여 영제가 죽고, 황태자로 있던 소제가 즉위한 직후의 상황은 하진이 절대적으로 유리했다. 소제는 어린 나이라, 어머니인 하 태후와 삼촌인 하진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훗날에야 환관이 다시 크게 될지는 모르지만, 이 상황은 환관에 비해 외척이 압도적으로 유리한 상황이었다. 당시 동 태후가 수상쩍은 죽음을 맞아 하진에게 살해되었다는 설이 거의 기정사실처럼 여겨졌음에도 불구하고, 청류파들은 하진에게 지지를 보내고 있었다.[1]

십상시의 비리는 이미 수없이 쌓여 있었고, 영제시대에는 왕윤이 십상시가 황건적과 결탁했다는 문건을 입수한 적도 있었다. 이때는 영제가 십상시들을 총애한 탓에 용서해주고 오히려 왕윤이 위기에 빠졌지만, 영제는 죽고 세상은 뒤집혔다. 환관 입장에서는 도저히 손 쓸 도리가 없었던 상황. 이제 하진이 마음만 먹으면 십상시를 쓸어버리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십상시들은 어떻게든 이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하 태후를 비롯한 하진 일족에게 거액의 뇌물을 바치며 필사적으로 시간을 끌었다. 하 태후의 어머니인 무양군과 이복 남동생 하묘 등이 환관들을 감싸고 돌자 하 태후는 마침내 하진을 의심하게 되었다.

십상시와 결탁해 출세했던 하진은 환관의 저력을 충분히 알고 두려워하고 있었던데다, 건석 정도를 제외하면 십상시와도 대체로 사이가 좋은 편이었다. 십상시와 결정적으로 대립하게 된 것도 건석이 자신을 죽이려 했던 것이 계기였기 때문이지, 건석을 죽인 시점에서는 굳이 하 태후와 반목해가면서까지 십상시와 척을 질 생각이 없었지만, 원소를 위시한 강경파들이 이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

마침내 원소 등의 강경파에게 설득당한 하진은 환관들의 주살을 강행하리라 마음먹었으나, 보정대신이라는 하진의 정치적 입지상 하태후의 재가가 필수였고 이에 원소는 하진의 정치적 입지를 훼손시키지 않으면서도 하태후로 하여금 십상시의 숙청에 동의 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드는 계책을 내게 된다.[2]

그 계책이란

1.병사들로 하여금 흑산적으로 분장하게 하여 맹진에서 학살을 일으키고 정보를 통재하여 철저하게 흑산적의 소행으로 위장시킨다.

2.하진 휘하의 장수들로 하여금 병사들을 징발하게 함과 동시에 외부군벌들을 끌어들여 흑산적에 대한 공포분위기를 조성하고.

3.당시 영제와 십상시가 추진하던 흑산적 유화정책을 탄핵하여[3] 십상시를 숙청한다음.

4.외부군벌들과 함께 흑산적을 토벌하여 진상을 은폐한다.


말하자면 십상시 탄핵을 위해 자국민을 학살한 뒤 계엄령을 내려 정치적 이슈를 조성하고 십상시를 처치한 뒤, 낙양에 소집된 군대와 중앙군을 합쳐 흑산적을 토벌하면서 진상을 은폐하겠다는 블록버스터급 상또라이 짓이며, 현대로 표현하자면 서울에 인접한 김포시의 시민들을, 국군을 북한군으로 위장시켜 학살하고 이를 핑계로 대북유화정책을 주장하던 경쟁당을 탄압한다 는 희대의 미친짓이다.

노식진림 등을 필두로 해 군사 요직을 모두 장악하고 있는 사람이 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이런 위험한 짓을 하느냐는 반대가 제기되었지만 하진은 끝내 이를 듣지 않고 원소의 계책을 받아들인다. 하진은 동탁을 포함한 외부군벌들을 불러들임과 동시에 부하들로 하여금 군사를 징발하게 하였고 정원을 시켜 맹진을 불태우게 하였다. 맹진의 불길이 낙양에서까지 보이자 환관과 가까웠던 탁류파들도 모두 공포에 질려 환관을 주살하자고 말했으나 유독 하 태후만이 듣지 않았다. 하묘는 여전히 하진에게 환관들과 화해할 것을 권했지만 원소는 하진이 머뭇거리는 것을 감지하자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하진을 다그쳐 마음을 굳이게 한다. 이에 하진은 왕윤을 하남윤에 임명하고 원소에게는 사례교위와 가절을 주어 일을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는 권한을 주는데, 원소는 곧바로 더욱 확실하게 환관들을 옭아매고 동시에 황실의 경호병을 자신의 심복들로 교체하여 황궁을 낱낱이 감시한다.

원소의 이같은 행동에는 마침내 태후도 백기를 들어 십상시들을 모두 파면시켜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고, 평소 하진과 친했던 환관들만 궁에 남긴다. 십상시들은 목숨을 건지기 위해 일제히 하진에게 읍소하며 애원하니, 하진이 이들에게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명령한다. 이를 보고 원소는 반드시 후환이 될 것이니 곧바로 처결하라며, 세 차례나 이를 막아섰지만 모두 듣지 않았고 이에 원소는 하진의 명령을 사칭하여 십상시를 잡아들일 것을 명하나 때를 놓쳐 실패하고 만다.

3.3 하진의 최후

이러한 가운데 십상시도 반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십상시 장양의 양아들이 하 태후의 여동생과 결혼했는데 , 장양이 양며느리에게 "입조하여 한 번이라도 다시 태후와 폐하의 안색을 뵙고 구덩이에 들어간다면(죽는다는 말) 죽어도 한이 없겠습니다."하고 고개를 조아리며 눈물로 읍소하자 이 말은 곧 하 태후에게 전해졌고 감동한 하 태후가 십상시 전원을 복직시켰다.

이에 열이 뻗친 하진은 태후에게 십상시를 모조리 죽이고, 삼서의 낭 중에서 사람을 뽑아 환관들의 거처를 지키고 감시할 것을 제안하려 하나 도리어 십상시는 태후의 조서라고 속여 하진을 궁궐로 불러들여서 죽여버린다. (189년 8월 25일) 다짜고짜 하진을 암살한다는 극단적인 방법를 사용한 것은, 환관의 권력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풍전등화의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런 극단적인 방법을 쓰지 않으면 하진을 쓰러뜨릴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주로 황제를 이용해서 외척들을 역적으로 몰아 죽이는 방법을 썼다.

하진을 죽인 직후 장양은 조서를 꾸며 전 태위 번릉을 사례교위로 삼고 소부 허상을 하남윤으로 삼았는데 상서가 이 조서를 읽고는 의심하면서 "청컨대 대장군이 오시면 함께 의논 하겠습니다." 라고 말하자 하진의 머리를 상서에게 내던지며 "하진은 모반하여 이미 주벌하였다." 라고 외치는 공포스러운 장면을 연출한다(...) 그러나 하진은 죽였지만 하진 휘하의 세력 특히 실질적인 하진의 배후 조종자라고 봐도 무방한 원소 등 청류파는 여전히 남아있었다. 십상시는 그래도 아직은 황제와 태후를 자신들이 확보하고 있고 중앙에서의 영향력이 강하니, 이전처럼 황제의 명령으로 원소 등을 역적으로 선포하고 새로 관리들을 임명해 수도를 장악한다면 승리할 수 있었다고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3.4 삼일천하

하지만 하진이 살해당하자 오광 등 하진의 부하들은 하진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분노하여 원술과 같이 군사들을 이끌고 궁궐 문을 부수고 궁궐로 난입을 시도하였다. 이에 환관들까지 직접 무기를 잡고 나서 당장은 궁을 지켜냈지만 원술은 해가 지자 남궁의 문에 불을 지르고 추가로 동궁과 서궁까지 불태우며 장양이 나오도록 협박했다.[4] 이틀 뒤인 경오일(8월 27일) 궁을 더 지키기 어렵다고 판단한 장양은 하태후에게 하진의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고하며 하태후와 소제, 진류왕, 궁궐의 관속들을 이끌고 온전한 북궁으로 피신하였는데, 2차 당고의 금 당시 보병영의 군사 5천을 장악하고 선공에 나선 두무를 역관광시킨 전훈을 따라 번릉과 허상이 사례교위 원소와 하남윤 왕윤에게서 지휘권을 빼앗고 수도를 장악할때까지 시간을 끌기 위한 조치로 보이지만...

원소는 하진의 피살 소식을 파악하자마자 사병 100명을 이끌고 가서 번릉과 허상을 죽여버렸다.

이에 더해 여러 곳에서 칼을 뽑아 군사와 관료들을 질책했다는 서술이 있는데 이는 후한서 원소전의 서술로 하진전에서는 원소가 원외와 함께 조서를 고쳐서 번릉과 허상을 죽였다고 서술되어 있고, 영제기에서는 원소가 억지로 군사를 수습하여 번릉과 허상을 죽였다고 서술되어 있다. 비록 번릉과 허상이 장양에게 임명된 인사였지만 형식상 이들은 황명을 통해 임명되고 원소는 역적으로 선포된 상태였으므로 이런 갑작스러운 원소의 행동에 군사들이 혼란에 빠졌으나 원소가 조정의 원로대신이었던 숙부 원외와 짜고 위조한 조서를 명분으로 군사를 수습하고 중요인사들을 포섭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장양이 북궁으로 피신하는 시점에서 이미 장양파 인사들은 죄다 원소에게 박살이 나고 노식,왕윤,하묘,왕광 등 하진파 인사들이 모조리 원소에게 합류하는 상황이었다. 이들이 제각기 궁에 진입해 아수라장이 되면서 오광이 하묘를 죽이는 병크짓이 일어나기도 하지만 이미 이 시점에서 장양의 패배는 확실한 상황이었고, 다음날인 신미일(8월 28일), 북궁으로 진입한 원소는 [5] 북궁의 문을 닫고 환관이란 환관은 모조리 끌어내 죽여버린다.

하진의 암살이 8월 25일의 일이었고, 상황정리한 원소가 북궁문을 닫고 환관을 모조리 죽인 것이 8월 28일의 일이니, 문자 그대로 삼일천하로 끝난 것이고, 십상시는 하진을 폭탄의 뇌관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만, 실상 오히려 하진이 폭탄의 뇌관이자 안전핀이었던 셈이다. 차라리 하진이 살아있었다면 처세술로 중재를 했을 수도 있고, 그저 몇 명 정도 목이 달아나고 끝날 일이었지만 하진이 죽었으니 부하들은 당연히 분노했고 엄청난 사태로 발전하게 되었다.

당시 환관이 아무리 썩었다지만 품행이 올바르고 권세를 부리지 않던 환관도 없는 것은 아니었는데, 원소는 환관이란 환관은 노소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대로 모조리 끌어내서 죽였다고 한다. 이 때 죽은 환관이 무려 2천 명에 이르렀는데, 너무 젊은 나이에 관직에 올라서 수염이 없는 외모때문에 환관으로 오인받아 죽은 사람도 있었다고 하며 바지를 벗고 검열삭제를 군사들에게 보여주고 환관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서 겨우 살아난 젊은 관리도 있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기민하고 일말의 주저없는 판단력과 무자비함으로 원소가 권력투쟁의 최종적인 승리자가 된 것 처럼 보였으나....

3.5 주워먹은 동탁

장양 등은 황제를 협박하여 궁궐을 탈출했지만 원소의 추격이 급박해지자 강에 뛰어들어 자살했고 이 혼란을 틈타 동탁이 황제의 신변을 확보해 수도에 난입하게 된다. 결국, 이 사건으로 인해 한나라는 거의 반쯤 멸망의 길을 걷게 된다.

낙양에 막 도착한 동탁의 군사는 3천명 정도로 그리 큰 규모가 아니었으나, 허장성세를 부려 군대가 서쪽에서 계속 도착하는 것처럼 꾸몄다. 동탁은 새벽에 몰래 병력 수백명을 성 밖으로 내보낸 뒤, 그날 오후에 그 병력들이 북을 울리며 큰 소리를 내며 낙양에 입성하는 모습을 보여준 뒤 또 그 다음날 새벽에 몰래 성 밖으로 나가서 이런 행동을 반복했다. 이러니 사람들은 병력이 성밖으로 나가는 장면을 보지 못했으므로 병력이 꾸역꾸역 증원된 것으로 믿게 되었다. 황제를 동탁이 끼고 있는데다, 군세도 강대해 보이자 하진과 하묘 형제가 이끌던 병사들은 대부분 원소가 아닌 동탁에게 흡수되었고, 자연스레 동탁이 절대권력을 잡게 되었다.

이 때, 기도위 포신은 원소에게 동탁을 습격할 것을 권했지만, 막상 사람을 그리도 잘 잡아대던 원소는 주저하며 이를 거절한다.

동탁의 기만책에 원소가 낚였다고도 볼 수 있지만, 사실 당시 동탁의 기만전술에는 딱히 원소 뿐만이 아니라 낙양에 있던 정치가들 전원이 낚여있던 상황이었고, 심지어는 원소에게 동탁 습격을 제안한 포신조차도 이 기만책을 간파한 것이 아니라, 비록 동탁의 군이 강대하지만 멀리서 온 군대라 지쳐있으므로 기습하면 승산이 있을 것이라는 근거를 들며 동탁을 칠 것을 유세했을 뿐이었다.

원소의 입장에서 막 낙양에 도착한 동탁의 정확한 군사력을 가늠하기 어려웠으니 주저하는 것이 딱히 무리수는 아니었고, 겨우 사태가 수습되어 가는 국면에 또 다시 난리를 일으켜서 혼란을 가중시키는 일이라는 명분도 있었으며 무엇보다 동탁은 중앙정치에 어떤 기반도 없던 인물이었던 만큼 협조적으로 나올 수 밖에 없을 것[6]이라는 예측이 상식선에서는 앞뒤가 맞는 분석이기에 당시 시점에서는 나름대로 합리적인 판단이었을 것이라 볼 수도 있었겠지만 동탁은 집금오 정원의 측근 여포를 매수해 정원을 살해, 그 군대마저 모두 손아귀에 넣고 조정을 통제할 수 있는 패권을 쥐며 폭주하게 되었다.

하진이 원소의 진언을 채택해 놓고도 끝에 가서 주저했기 때문에 결국 개판이 되는데, 이럴 바에 차라리 본래 하진의 의도대로 건석을 죽여버린 시점에서 적당히 환관세력과 처세술로 타협을 했다면 한나라의 수명은 조금 연장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원소같이 극단적이고 과격한 인물이 당시 여론을 주도했어도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을 정도로 십상시들이 평소에 개판을 쳐놓은 것이 너무 많았다. '천하가 모두 환관을 병폐로 여겼다'고 할 정도로 환관들의 오랜 권력남용에 대한 반감이 뿌리깊었기 때문에 굳이 원소가 아니었더라도 원소를 대체할 다른 인물이 나타났을 가능성이 높다. 어찌 보면 여기까지는 당연한 테크인데 이 혼란을 틈탄 동탁의 집권은 정말...

하지만 환관들이 거의 몰살한 결과 나라 중추가 무너져 큰 혼란이 생기게 되고 동탁은 이 틈을 노려서 황제 협(헌제)을 발견하고 그를 모셔와 궁정의 세력을 모두 장악하게 된다. 결국, 시간이 지나 동탁은 헌제를 협박해서 상국이라는 어마무시한 관직[7]을 부여받고 더욱 막강해진 절대권력을 누리게 된다.

환관들이 후한 유씨황조를 위해서 유일하게 이룬 업적이라는 게 지방 토호들을 중앙으로 접근하지 못하도록 철통같이 막고 있었던 것인데 그 환관들이 다 죽자, 토호들이 중앙으로 들어오려 했고 그 중 가장 발이 빨랐던 동탁이 결국 중앙에 들어오는데 성공했다.

4 기타 창작물에서

배한성, 배칠수의 고전열전 삼국지에서는 3부에서 총 7회로 다루는데, 재구성되어 스토리가 거의 막장 드라마가 되어버렸다. 배다른 형제(소제, 헌제), 악녀의 깽판(하황후), 고부간의 갈등(동태후), 주인공의 우유부단(하진)이라는 막장 드라마에 나오는 요소가 다 집결되어 있다.
  1. 정황상 동태후가 하진에게 살해되었을 개연성은 있지만 그게 사실이더라도 확실한 증거가 없는 이상 모르는 척 지지했을 것이다. 영제의 매관매직을 적극적으로 부추기며(...)중간에서 한몫 크게 챙긴 것이 동태후와 동씨 일족이라 당시 청류파들에게는 동태후가 기거하는 장락궁 자체가 부패의 대명사로 여겨졌기 때문. 하진 역시 동태후를 탄핵하는 상주문을 쓸때 가장 먼저 이런 부패 혐의를 지적하고 나섰다.
  2. 참고로 이록은 한사료만 봐서는 거의 알 수 없고 후한서 공손찬전에 달린 이현의 주석이나 구추춘추에서 장연 관련기록 등을 참고해야한다. 삼국지 도원결의에서 여기에 대해 자세히 고찰한 글이 있다.
  3. 공손찬전에 따르면 조충 등을 탄핵했다고 되어있다.
  4. 후한서 하진전
  5. 산양공제기에 따르면 이때 원소는 왕광과 함께 북궁 정문으로 진입하면서 중상시 고망 외 2명을 주먹으로 쳐 죽였다고 한다.
  6. 사실 동탁은 권력을 잡고 나름의 민심 수습책으로 청류파에게 어느정도 협조적인 태도를 유지하긴 했다. 문제는 소제 폐위라는 전례없는 폭거를 저질러 이미 정치적으로 어그로를 잔뜩 끌어놓은 상황에서 민심 수습책이랍시고 청류파 거물들에게 지방 태수직을 남발하다가 반동탁 연합군이라는 초유의 자폭사태로 이어졌다는 것.
  7. 황제 다음으로 넘버2 정도의 직위. 신하로서 올라갈 수 있는 가장 높은 계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