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요제프 멩겔레 (Josef Mengele) |
생물년 | 1911년 3월 16일 ~ 1979년 2월 7일 |
출생지 | 독일 제국 바이에른 왕국 귄츠부르크 |
사망지 | 브라질 상파울루 베르지오가 |
정당 | 민족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
배우자 | 이레네 쇤바인 마르타 멩겔레 |
인간을 위해 학문을 촉진시켜야 한다고 믿었던 사람이 인간을 파멸로 이끈 학문의 편에 섰다는 점이 나를 답답하게 만들고 있다.
- 하인리히 폰 페르슈어[1]
1 개요
인류역사상 최악의 의사
제2차 세계대전 중 자행한 각종 인체 실험으로 어마어마한 악명을 떨친 나치 독일의 내과 의사 겸 SS 장교. '죽음의 천사'라는 별명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 인물로서, 전쟁 당시 아우슈비츠 및 여타 강제수용소에 근무하는 동안 자신의 권한을 이용하여 멩겔레가 저지른 온갖 비인간적 악행은 일일히 열거하자면 끝이 없을 지경이다. 영원히 지탄받아도 부족하다.
2 출생과 성장
멩겔레는 바이에른의 귄츠부르크(Günzburg)에서 카를 멩겔레(Karl Mengele, 1881년 ~ 1959년)와 발부르가 후파우어(Walburga Hupfauer,1880 ~ 1946년)[2]의 3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멩겔레의 아버지는 실업가였으며 남동생은 각각 카를(Karl, 1912년 ~ 1949년)과 알로이스(Alois, 1914년 ~ 1974년)[3]가 있었다. 보면 알겠지만 멩겔레 가 사람들 중에서 가장 오래 산 것이 요제프 멩겔레이다.
1930년 귄츠부르크 김나지움(고등학교)을 졸업한 멩겔레는 뮌헨 대학(University of Munich)에서 의학과 인류학(!)을 공부하였으며, 테오도르 몰리슨(Theodor Mollison) 교수의 지도로 1935년 4대 인종 그룹 간의 아랫턱 앞부분의 차이에 따른 인종형태학상의 연구(Racial-Morphological Examinations of the Anterior Portion of the Lower Jaw in Four Racial Groups)[4]를 작성, 인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프랑크푸르트 대학의 유전 생물학 및 인종 위생학 연구소에서 오트마르 폰 페르슈어(Otmar von Verschuer)와 함께 연구를 진행한 멩겔레는 1938년 '갈라진 입술과 구개에 관한 가족사 연구'라는 논문으로 의학 학위를 받았다. 나치 우생학에 대한 멩겔레의 믿음은 이 시기의 논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5]
멩겔레가 눈뜬 단체는 하필이면 나치였는데, 1938년에는 친위대에 가입하였다. NSDAP(국가 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6])의 번호 5574974을 받았고 슈츠슈타펠의 번호 3177885을 받았다. 1939년 멩겔레는 이레네 쇤바인(Irene Schönbein)과 결혼하여 롤프(Rolf)라는 아들을 낳았으며, 1940년 예비군 의무대로 배속되어 무장친위대 (Waffen-SS)와 함께 작전에 동원되었다. 소속부대는 비킹사단이었는데 동료들 말로는 "성실하고 괜찮은 친구였다."라는 평을 받았다.
1942년 독소전쟁에서 부상을 당한 멩겔레는 전투 부적합 판정을 받았으며 친위대 대위로 진급하였다. 불타는 탱크에서 동료를 구했다고 한다. 멩겔레는 1941년부터 1942년까지의 동부 전선에서의 수훈으로 1급 및 2급 철십자 훈장(Iron Cross)과 동부전선 훈장을 수여받는다. 그러나 그의 악행이 드러난 이후 그의 동료들은 비킹 사단에서의 그의 공훈을 모두 삭제한다.
3 죽음의 천사
왼쪽에서부터 리처드 베어, 요제프 멩겔레, 루돌프 회스
SS 장교 시절의 멩겔레
1943년 5월 24일 멩겔레는 아우슈비츠와 비르케나우 강제수용소의 '집시 캠프' 의무관으로 임명되었다. 1944년 8월 수용자들이 모두 가스실로 간 이후 캠프가 해체되면서 비르케나우 강제수용소의 주임 의무관이 되었다. 이 당시 아우슈비츠의 주임 의무관은 멩겔레의 상관 에두아르트 비르츠(Eduard Wirths)였다. 수용소에서 머문 21개월 동안 수용소 수감자들은 멩겔레를 "히틀러의 의사"로도 불렀지만, 훗날 그의 별명이 될 죽음의 천사(Angel of Death)로 불렀다. 이는 친절한 의사처럼 보이지만 하는 짓은 악마만도 못한 그의 행동에 기인한 것이다.
요제프 멩겔레는 마른 체형으로 머리카락은 늘 포마드를 발라서 반들거렸으며, 나치 제복은 완벽하게 다림질하여 입었다. 또한 수염은 보이지 않도록 말끔하게 면도했으며 나치 친위대 모자를 약간 기울어져 쓰고 늘 미소를 머금고 가볍게 인사를 하는 친절한 군인 아저씨의 모습이었다고 수용자들은 생각했고, 그래서 멩겔레가 특히 친절하게 대해주었던 쌍둥이들은 자신들에게 잘해주는 멩겔레를 "친절한 요제프 아저씨"라고 좋아했다고 한다.
멩겔레는 교대로 가스실로 보낼 유태인들과 강제노역에 동원할 유태인들을 선별하는 작업을 담당하였다. 말이 좋아 선별이지, 사실상 자기가 꼴리는 대로 유태인들을 색출해냈다. 이 선별과정에서 멩겔레는 노동능력이 없어서 가스실로 가게 될 아이들을[7] 선별해서 좋은 음식과 시설에서 생활하게 만들었다. 만약 쌍둥이가 발견된다면 멩겔레는 매우 기뻐하며 쌍둥이들을 한쪽 수용소로 모으게 했다. 그는 스승이었던 페르슈허 박사의 영향을 받아 쌍둥이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수감자들이 도착하면 즐겁게 웃으면서 “Zwillinge heraus!” “쌍둥이들 나와라!”라고 소리쳤다.
멩겔레는 강제 수용소로 실려 온 수감자들을 쭉 세워놓고 마치 오케스트라 지휘자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른쪽을 가리키면 가스실행, 생체 실험대상, 강제 부역자라는 신호로 손가락 하나만 움직여 그들의 운명을 결정했다. 이 때 유태인 미클로시 니즐리는 멩겔레 밑에서 조수로 있었는데 사실상 노예나 다름없는 처지였지만 그의 말에 따르면, 멩겔레가 죄수들 중 실험 대상을 선별하는 일을 마치 오케스트라가 지휘하듯이 손으로 쉽게 가리켜서 했으며, 멩겔레가 너무나 활기찬 표정으로 그 일을 진행하여 미친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아우슈비츠에 수용되었던 생존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멩겔레가 하얀 가운을 입고 있으면 아주 친절하게 대할 것을, 만약 초록색 수술복을 입고 나타나면 곧 누군가가 가죽끈에 묶여서 수술대로 가게 될 것을, 회색 제복을 입고 오면 별의별 끔찍한 생체실험을 당한 끝에 죽어서야 실험실을 나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때문에 당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요제프 멩겔레는 3가지 제복을 가진 사람이라고 불렸다.
당시 멩겔레의 실험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3.1 만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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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동자 색깔이 화학물질을 통해 변형될 수 있는가를 알아보기 위하여, 쌍둥이의 눈에 화학물질을 주입하거나, 파란 눈동자를 만들기 위해 파란 물감을 눈으로 주사하였다.[8] 마취 없는 발치나 늑골 적출, 기타 잔인한 외과 실험들이 포함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숨을 거둔 피실험자들의 눈은 멩겔레의 수집품이 되었다.
그리고 멩겔레의 악명을 드높인 연구인 쌍둥이 실험도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쌍둥이들을 한 쌍씩 모든 부분의 크기를 재고 기록한 후 한 아이에게 온갖 종류의 독약, 세균, 화학물질 가운데에서 자신의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서 쌍둥이에게 주입한 후 결과가 나타나면 멀쩡한 다른 쌍둥이 아이와 비교, 분석하였다. 그 후 아이들을 죽여서 해부한 뒤 장기 등을 골라서 그의 스승인 페르슈허 박사가 근무하고 있던 연구소로 보냈다.
게다가 멩겔레는 어느 날은 안경 쓴 사람만 골라 가스실에 넣었다가, 또 어느 날은 키가 큰 사람만 잡아 죽였다가, 또 어느 날은 뚱뚱한 사람만 골라 죽이는 짓을 해댔고 심지어 어떤 날에 임신 8개월의 임산부가 아우슈비츠에 들어오자 멩겔레는 이상하게도 임산부를 살려주었는데 그녀는 아이를 출산한 후에 멩겔레가 자신을 살려준 이유를 알았다. 멩겔레는 "갓난아이가 아무 것도 먹지 않은 채로 며칠이나 살까?"를 실험하기 위해 그녀를 살려줬던 것이였고, 결국 아이는 굶어 죽고 말았다.
또 한번은 아우슈비츠에 끌려온 사람들 중에서 어떤 아이와 엄마가 떨어지지 않으려고 하자 그 자리에서 즉시 총을 꺼내서 아이를 먼저 죽이고 그 다음 엄마를 사살하는 만행을 저질렀고, 아우슈비츠에 끌려온 어떤 가족을 보자 멩겔레는 그 어머니에게 '내가 책임지고 아이들을 맡을 테니까 염려하지 말라'라고 친절하게 이야기하며 아이들을 데려갔고 그 아이들은 처참하게 생체실험에 이용된 후에 살해당했다.
그러나 멩겔레가 이토록 악명이 자자한 이유는, 이딴 식으로 사람들을 죽이는 것도 모자라서 어린 아이들까지도 생체실험을 위한 도구로 썼기 때문이다. 실려오는 수감자의 수가 어마어마했기 때문에 멩겔레는 20여개월 동안 무려 1,600여쌍의 쌍둥이에게 별의별 실험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멩겔레는 쌍둥이를 제외하고 어린 아이에게는 별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실려온 수감자 중 어린 아이들을 골라내 벽에 150cm 키의 줄을 긋고는, 150cm에 이르지 못하는 청소년이든 갓난아기든지 신경쓰지 않고 모조리 가스실로 보냈다. 아우슈비츠 수용자들은 이 선택된 쌍둥이들을 "멩겔레의 아이들"이라 부르며 매우 부러워 했는데, 실상은 건강한 실험용 쥐를 확보하기 위한 것으로 어느 정도 건강을 회복한 뒤 멩겔레가 꼴리면 바로 이 아이들을 가지고 인체 실험을 실시했다.
또한 쌍둥이들이 정말로 뱃속까지 동일한지 확인하기 위하여, 쌍둥이 아이들 중 몇 쌍을 선택하여 자신의 실험실로 부른 후 침대에 눕히고 잠을 재운 후 클로로포름을 심장에 바로 주사하여 즉사시킨 뒤 해부하였다. 심지어 아이들은 이때까지도 자신에게 잘해주었던 멩겔레의 친절한 모습 때문에, "멩겔레 아저씨"라고 말하며 웃으면서 죽었다. 멩겔레는 쌍둥이에 집착하여 쌍둥이의 장기나 혈액을 교환하기도 했고, 남녀 이란성 쌍둥이를 근친교배(...)하였다. 특히 멩겔레는 샴쌍둥이에 대한 집착을 보여서 평범한 쌍둥이들의 몸의 일부를 자르고 꿰매어, 인공 샴쌍둥이 비스무레한 것을 만들고(!!) 얼마나 살아남는지 관찰하기도 했다. 그러나 연결시켰던 정맥이 염증을 일으키면서 아이들의 연결 부위가 썩어들어갔다.
멩겔레는 아이들의 믿음을 쉽게 얻기 위해서 실험은 철저히 실험실에서만 하고 밖에서는 아이들에게 상냥하게 웃어주며 사탕이나 과자를 주기도 했기 때문에, 아이들은 순진하게 멩겔레를 믿고 요제프 아저씨라고 따르기까지 했다. 멩겔레는 그런 아이들을 잘 대해주고서는 하루 뒤 혹은 12시간 안에 바로 그 아이들을 가스실로 보내거나 실험실로 불러서 해부해버렸다.
또한 731부대에서 실행했던 바닷물 주사 실험도 했다. 어떻게 하면 바닷물을 사람이 먹을 수 있도록 만들까를 연구하기 위해, 멩겔레는 바닷물에 여러가지 방법으로 바닷물을 화학처리하여 수감자들에게 음식은 며칠 동안 주지 않고 화학처리 된 바닷물만을 먹게 했다. 당연하지만 인간이 바닷물만 마실 경우 인체에 엄청난 고통을 경험하게 된다. 이 사실을 알면서도 실험한 결과 이용된 모든 사람이 장애를 갖게 되었다. 전쟁 중 상처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며 정맥, 동맥을 묶어버리는 실험도 했고 결국 그들은 그 부위가 썩어들어가면서 사망했다, 게다가 일부러 상처에 갈린 유리를 문지르고, 나무 톱밥을 집어넣는 등의 방법으로 염증을 일으켰으며, 독극물이 인체에 끼치는 영향을 보기 위하여 군인들이 일부러 총알에 독을 묻혀서 수감자들에게 부상을 입히는가 하면, 수감자들이 모르는 사이 수감자들의 음식에 독을 타기도 했다.
쌍둥이 외에도 멩겔레는 특별 임무를 맡기려 한다며 여성 수감자 중 건강하고 젊은 여자들을 모집했고, 지원했던 여성들을 상대로 그의 동료이자 같은 인간 말종인 호르스트 슈만을 비롯한 놈들과 함께 불임 수술 이른바 X-선 실험을 실시했으며, 여성들에게 전기 충격 요법 등을 실험했다. 인간이 얼만큼 버틸 수 있는지 실험하기 위해 고저압실험을 하고자 수용자들을 고압실과 저압실에 넣고 얼마나 견디는지 그 결과를 측정했다. 이 실험으로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사망하거나 평생 부작용을 가지고 살게 되었다.
그 외에도 사람이 차가운 물 속에서 얼마동안 버틸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얼음이 동동 떠 있는 차가운 얼음물 속에다가 사람을 최대 3시간 동안 넣어둔 후 그 온도가 몸에 미치는 영향, 그리고서는 다시 따뜻하게 만들어서 신체가 제대로 작동하는가를 연구하였는데 당연하게도 동상과 면역력 저하로 인하여 엄청난 사람들이 사망하였다. 그러다가 모기가 말라리아를 전파한다는 것을 보고 궁금증이 생기자 말라리아 균을 가지고 있는 모기를 이용하여 수감자를 전염시킨 뒤 다른 수감자는 주사로 세균을 집어넣어 병의 진행 정도를 연구하였고, 이를 치료하겠다는 명목하에 온갖 종류의 약물과 화학물질을 투여하였다. 이 말라리아 연구에는 약 1,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이용되었으며 실험자들의 절반 정도가 사망하였다.
또한 아우슈비츠에 왜소증 환자들이 실려오자 매우 기뻐하면서 그들을 대상으로 실험하기도 했다. 멩겔레는 유전병의 원인을 찾기 위하여 왜소증 환자들의 골수를 뽑고, 치아를 발치했다, 귀에다 뜨거운 물, 차가운 물을 집어넣는가 하면, 눈에다가 화학물질을 넣어 장님으로 만들었고, 한 실험자는 정상인 부모님 밑에서 왜소증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손가락과 귀에서 피가 뽑히고서 실험에 이용되었다. 나중에는 왜소증 환자들이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 멩겔레는 2명의 왜소증 환자를 죽인 후 물에 삶아서 뼈만 발라내어 전시하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피실험자 대부분 실험 또는 사후 감염 등으로 인하여 죽음을 맞았다. 이러한 실험으로 사망한 사람은 무려 40만명에 이른다. 1,600여 명의 쌍둥이 실험 중에서 살아남은 쌍둥이는 200쌍 정도였고 그나마도 온갖 후유증으로 인해서 1980년대에 이르러서는 오직 100쌍만이 살아남았다. 게다가 멩겔레는 직접 아이들의 머리에 총을 쏴서 살해하기도 했으며, 하루 밤 사이에 14쌍의 쌍둥이를 살해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독일판 마루타 실험인 셈이다. 그리고 별 쓸 데도 없는 생또라이 같은 실험이었다는 점도 유사하다.
그 외에도 수용소 탈출을 시도한 소년 300명을 잡아다가 눈 하나 깜짝하지도 않고 휘발유를 끼얹어서 산 채로 태워 죽였다는 잔학무도한 일화도 있다고 하며, 약 750여명의 여성들이 수용되어 있던 수용소에서 벼룩이 발생하자 멩겔레는 약 750명의 여성 수용자들을 모조리 가스실로 보내 처리했다. 하는 일이 다 이 모양이니 왜 아우슈비츠에서 몇십만명이 죽어나가도 다들 침묵하였고, 폭동이 일어나지 않았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도 소개된 일화지만, 멩겔레한테 춤을 보여주면서 생명을 연명해야 했던 일화도 있다. 기사에 의하면 수용소에 홀로 남은 17세 소녀 에거의 부모를 죽게 한 멩겔레는 에거가 갇힌 곳으로 찾아와 자신을 즐겁게 해 달라고 요구했고, 이에 다른 수감자들은 죽을 것이 겁나서 발레리나였던 에거에게 춤을 추라고 권유했다. 에거는 어쩔 수 없이 요한 슈트라우스의 <푸른 다뉴브강의 왈츠> 음악에 맞춰 춤을 춰야 했는데, 에거는 당시를 회상하며 너무 무서웠다고 말했다. 그러자 멩겔레는 에거에게 보상으로 빵 한 덩이를 더 줬고, 이 빵을 에거는 다른 소녀들과 나눠 먹었다. 이후에도 수시로 멩겔레한테 불려가서 춤을 춰야 했고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소련군의 진격으로 폐쇄되자 다른 수용소로 이동되었고 감금되어, 한참 동안 먹지도 못하다가 소련군에게 간신히 해방되었다고 한다.
한편, 멩겔레는 아우슈비츠에서 악명높았던 여간수인 이르마 그레제와의 염문도 있었다.
같은 시대 동양에서는 이시이 시로가 있었다는 것을 미루어 볼 때, 2차대전이라는 상황이 그들의 극악한 본성을 일깨워 마음껏 폭주하도록 했다고 볼 수 있다. 어지러운 시대 상황 속에서 자라난 저주 받은 괴물들.
여담으로 만화 쥐: 한 생존자의 이야기의 주인공인 블라덱 슈피겔만은 이 사람 앞에 2번이나 끌려갔었다고 한다. 뭐 아우슈비츠의 대부분의 죄수들이 다 그랬으니 이상하게 여길 것도 없지만.
노란 손수건에 나오는 에피소드 중 하나도 아우슈비츠에 끌려갔던 여성의 실화인데, 이 일화의 주인공 역시 멩겔레 앞에서 검사를 받았다고 한다.
4 전후
전후 1956년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신분확인서의 멩겔레 증명 사진
전후에 카를 브란트나 카를 게브하르트 등은 신나게 두들겨 맞고 교수형으로 처형되었지만 안타깝게도 멩겔레는 달랐다. 그는 비슷한 케이스에 속하는 일본군 731 부대의 이시이 시로와 달리 전범으로 낙인찍혀 공공의 표적이 되었으나, 결국 남미로 도주하여 수십 년간 가짜 이름으로 숨어 살았다, 바바리아에서 4년간 농부 행세를 하며 숨어지낸 뒤, 무려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도망을 쳐서 남아메리카에서 편안하게 잘먹고 잘 살았다. 놀랍게도 재혼까지 했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멩겔레는 아우슈비츠를 SS가 버릴 때 함께 떠나서 이쪽 저쪽 캠프를 돌아다니다 미군에 잡혀 포로가 된적이 있었다. 그 때 자기 이름 대고 들어간데다가 강력 전범 체포 리스트에도 이름도 올라와있었던 상황이라서 미군에서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서 붙잡아야 했지만, 멩겔레는 가명을 대고 그 곳에서 풀려난다.
이후 남미 국가인 아르헨티나로 도망을 갔고 거기서 도망쳐온 많은 나치당원들과 만나기도 했는데, 대표적으로 도망다니고 있을 때 아돌프 아이히만을 실제로 만난적도 있다. 그러나 멩겔레는 아돌프 아이히만을 썩 좋아하지 않았다고 하며, 서로 서먹서먹한 사이였고 아이히만을 "목적이 없는 사람 같았다"고 평가했다. 증언에 의하면 도망다니는 와중에 유럽에서 자신을 비난하고 자신의 악행을 드러내는 잡지가 나오자 그 잡지를 팽개치며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화를 내기도 했고, 대담하게도 자신의 아내와 아들을 만나기 위해 유럽으로 여행을 가기도 했으며 자신의 아들인 이른바 롤프 멩겔레를 남미로 불러서 같이 사진을 찍기까지 했다. 또한 자신의 옛날에 결혼했던 아내의 장인과 자신의 아버지에게는 자신의 생존사실을 철저히 숨기게 했으며, 그들로부터 돈을 받으며 생활했다고 한다.
특히 기사에 의하면 모사드가 아돌프 아이히만을 먼저 잡을까 아니면 멩겔레를 먼저 잡을까를 고민하다가 아돌프 아이히만을 먼저 잡았고 이를 안 멩겔레는 더욱 더 꽁꽁 숨었다고 한다.[9]
또한 아들과 아내를 비롯한 사람들한테 편지를 보내기도 했는데 1976년 2월 한 친구에 보낸 편지에서 "내일 오전 일찍 (정원사인) 루이스가 올 것이며, 우리는 곧바로 정원 손질에 나설 것"이라고 쓰는 등 일상 생활만 늘어놓았을 뿐 과거 행위에 대한 반성은 없었다, 또한 "1주일에 1-2번 나는 편지를 부치고 전기요금을 내고, 독일 빵집에서 빵을 사먹기 위해 마을로 나간다. 이것이 내가 즐기는 작은 기쁨들"이라는 편지도 있으며 또 다른 편지에는 "이따금 그녀는 내가 아침을 준비한 뒤에야 나타나거나 아예 오지 않기도 한다"고 쓰는 등 게으름을 피우는 브라질 출신 가정부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기도 했다고, 게다가 아직도 정신을 못차리고 멩겔레는 마지막 순간까지 독일민족의 우월성을 믿고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차별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를 찬양하기도 했다고 브라질의 한 신문이 앞서 보도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80년대 슬슬 신원이 밝혀져서 이스라엘과 서방의 추적이 시작되었는데 정확히는 그의 생존 사실을 알고 있던 아내와 그의 가족들이 이 사실을 증언하면서 알려졌다. 그리고 증언을 바탕으로 멩겔레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었는데 이미 멩겔레는 브라질 상파울루 바닷가에서 수영하다가 심장마비로 사망한 상태였다.
- 심장마비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심각하게 아프게 죽는 병이고, 수영하다가 저 꼴을 당했으니 엄청나게 공포스럽고 괴로운 죽음이었겠지만, 멩겔레가 저지른 악행들에 비하면 걸맞지 않는 안락사같은 죽음이나 다름 없다. 다만 말년에는 자신이 붙잡혀서 아돌프 아이히만처럼 교수형에 처해질 것이 굉장히 무서워해서 집 주변에서 조금이라도 소리가 나면 깜짝 놀래 밖을 내다보았으며, 불면증에 시달리거나 여러가지 정신병적인 행태를 보였다고 한다.
사망하기 2년 전 사진.
그 당시에는 누구인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1985년에 발견된 브라질의 어느 무덤의 주인이 멩겔레라는 게 알려졌고 한국의 소년잡지에까지 기사가 실릴 정도로 소문이 무성했다.1985년 유골 발견 당시 사진 과학의 발달로 무덤 속에 남겨진 이빨을 통한 DNA 검사로 비로소 신원이 완전히 확인된 것은 1993년이었다.
사실 멩겔레가 한 짓에 비하면 너무나도 과분한 죽음이다. 그리고 음모론의 소재로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게다가 죽기 전까지 그는 이 모든 범죄 혐의에 강력히 부인하며 자신은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고 증언하거나, 자신의 잔혹한 행각을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 실로 빼도박도 못하는 인간말종. 그러나 멩겔레한테서 가장 놀라운 것은 요제프 멩겔레를 비롯하여 생체실험에 참가했던 나치의 모든 의사들이 심리 검사를 했을 때 정상으로 나왔다는 점이다. 카를 게브하르트, 카를 브란트와 같은 인간 말종들까지도 그렇다. 도저히 믿기지가 않지만 그들은 나치 내에서는 정말로 엘리트이며 유능한 인재들이었고 자상한 남편이었으며 자기 아이들에게는 더 없이 다정한 아버지들이었다.
이후 그의 시신은 화장되어, 공중으로 날려버렸다고 전해진다. 대기오염 그렇다고 땅에 묻으면 땅이 썩는다. 최소한 지구말고 우주로 보내면 안되나? 우주오염 그냥 활화산 꼭대기 구덩이에 부어버리지. 죽어서도 고통받으라고.
5 그에 대한 증언
나는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는 누군가를 괴롭혀 본 적이 없었다.아우슈비츠에 어머니를 딸려 보냈어야 했다.[10]
나는 단지 명령을 수행했을 뿐이다. 안 그랬으면 나도 아우슈비츠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었을지 모른다.
개인적으로 나는 아무도 죽이지 않았고, 상해를 가하거나 신체상으로 해를 입힌 적도 없었다.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는 인간쓰레기라서인가?나치 소속으로서 벌인 행각을 악행으로 판단 못하지. ㅎㄷㄷ
나는 수용소에서 많은 환자들을 도왔지만 나의 이런 선행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다.(...)너에게 '선행'을 베풀어드리리다.
전선의 군의관도 선별을 해야만 한다. 그것은 불가피한 수술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이를 통해서 부상자들의 생과 사를 결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우슈비츠에서는 노동력이 있는 사람을 골라내기 위해서 선별 작업을 했다.수술 안 하면 안돼?
어느 나라이든 전시에는 그 나라에 위험이 되는 인사들, 태업 혐의를 받는 외국인들, 스파이 활동을 하는 것으로 보이는 쓸모없는 인간들, 창녀, 집시와 직업적 범죄자들을 수용할 수 있는 시설을 운영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그럼 네놈이 들어갔으면 됐겠네
나는 내 근무 기간 동안 나의 동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여러 번 전인 및 파견 명령을 받았다. 그리고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마지막 전임 명령을 받았다. 그때 나는 어디로 가게 되는지, 어떤 부대로 배치되는지 알지 못했다.
나의 유일한 아들아, 나에 관해서 쓴 내용을 네가 어느 정도 믿고 있다는 이야기는 하지 말아다오! 내 어머니에게 맹세컨대 나는 결코 누군가에게 해를 끼친 적이 없다.개소리 집어쳐!구라까지 마요, 아빠.아니 그런분이 왜 도피생활을?ㅡ 요제프 멩겔레가 1977년 그의 아들 롤프에게 보낸 글에서
- 긍정적인(?) 증언
어떻게 멩겔레가 단독으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죽일 수 있었을까? 실제로 그는 아우슈비츠에서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구해냈다... 그가 했다고 비난하는 행위를 멩겔레는 하지 않았다. 그는 살아남을 사람과 죽을 사람을 선별하기 위해 그곳에 있었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그가 그 일을 하지 않았을까?ㅡ 에발트 크루크[11]
멩겔레에 대해 내가 처음 받은 인상은 예의 바르고 외모가 훌륭한 사람이라는 것이었는데, 그는 내게 존칭을 쓰며 앉기를 권했다.ㅡ 베라 알렉산더, 아우슈비츠 수용자 간호사
내가 아우슈비츠에서 알게 되었던 모든 친위대원들 중에서 그는 다른 사람들보다 훤씬 인간적인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전혀 독립적인 사람이라고 볼 수 없었다. 그들은 다만 명령을 받는 사람들일 뿐이었는데, 그들은 아우슈비츠에서 민족과 조국을 위해 자신의 의무를 수행할 수밖에 없다며 이를 위안으로 삼고 있었다.ㅡ 한스 뮌히, 아우슈비츠의 의사. 1947년에 무죄 판결로 석방되었다.
그는 종종 매우 어려운 조건에서도 그에게 부여된 모든 임무를 신중하고, 끈기있게, 열과 성을 다하여 그의 상관이 확실히 만족할 수 있도록 수행해 냈으며, 모든 상황에 대처할 능력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 밖에도 그는 인류학자로서 짧은 근무 외 시간을 활용하여 자신을 계발하는 데 열성이었으며, 업무를 보면서도 자신이 업무상 다룰 수 있는 학문적인 자료들을 이용해서 인류학 분야에 가치 있는 기여를 했다.ㅡ 에두아르츠 비르츠, 아우슈비츠 주둔지 의사[12]
그가 이런 일들을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이를 확신한다. 그가 뭔가를 했다면, 명령에 따랐을 뿐인 것이다. 나는 멩겔레를 인간적인 사람으로만 생각했고, 인간으로서 그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었다, 그는 겸손하고 매우 교양 있는 사람이었다.ㅡ 베르너 슈비우스, 파라과이에서의 멩겔레의 지인
그는 진짜 친구였다. 내가 슬플 때면 그는 내게 "왜 그렇게 슬퍼 보이냐? 도대체 무슨 일이야? 말 좀 해봐!"라고 물었다. 그는 나뿐만 아니라 내게 일어나는 일에도 관심을 보여준 사람이었다.
그의 야심이 그를 망쳐 놓았다. 나는 요제프 멩겔레를 매우 정직하고, 예의 바르고, 양심적이고, 매우 매력적이고, 세련되고, 재미있는 사람으로만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그와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다.ㅡ 멩겔레의 첫 번째 부인 이레네
나는 그를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오늘날에도 그렇게 생각한다.ㅡ 요제프 쾰러, 아우슈비츠 수용소 구역 최고 연장자
우리 수용소에는 발육부진 쌍둥이를 포함해 100명에서 120명 정도의 쌍둥이가 있었다. 멩겔레는 우리에 대해서 중립적인 태도를 취했다. 그는 신체적으로 우리를 학대하지 않았다. 그는 우리를 검사했고, 우리는 여러 가지 움직임을 취해야 했다. 그의 조수들이 다른 검사들을 했었고 멩겔레는 우리에게 주사를 놓지 않았다.ㅡ 아우슈비츠의 쌍둥이 중 한 사람
- 그가 저지른 악행에 대한 증언
내 아버지 요제프 멩겔레는 내게 있어 언제나 동부전선에서 전사한 전쟁 영웅이였다. 그는 교양 있는 사람으로 그리스어와 라틴어에 정통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아우슈비츠의 의사로 드러났다. 이런 사실이 내게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요제프 멩겔레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그렇게 좋은 건 아니었다.ㅡ 롤프 멩겔레, 요제프 멩겔레의 아들
그는 훌륭한 전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무궁한 가능성들이 놓여 있었다. 특히 그가 이런 가능성들을 놓쳐버린 것이 내게는 무척 가슴 아프다. 그는 자신의 삶을 내팽개쳐 버렸다.ㅡ 롤프 멩겔레
이 이송작업이 시작되었을 때, 나는 비르케나우의 화물 전용 플랫폼에 멩겔레가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었고, 그가 "쌍둥이들 나오라"고 소리치는 것을 들었다. 그가 화물 전용 플랫폼에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쌍둥이를 찾고 있을 때면, 그는 마치 제정신이 아닌 사람처럼 보였다.ㅡ 마티나 푸취나, 아우슈비츠 수용자 여의사
화물 전용 플랫폼에서 그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고, 어떤 아리아를 조용히 휘파람으로 불고 있었다. 그는 마치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듯이 오른쪽과 왼쪽 또 오른쪽과 왼쪽을 번갈아 가리키며 선별 작업을 하고 있었다.ㅡ 베라 알렉산더, 아우슈비츠 수용자 간호사
이 분 바로 위에서...
그는 내가 지금껏 만났던 사람들 중에 가장 철면피한 사람이었다.ㅡ 엘라 링엔스, 아우슈비츠 수용자 여의사
그는 친절한 수용소 의사였다. 그 당시에 나는 그의 본래 정체를 알지 못했다.ㅡ 베라 알렉산더, 아우슈비츠 수용자 간호사
일주일에 2번 내지 3번, 그들은 우리를 병원 건물로 데리고 갔다. 그곳에서 우리는 6시간에서 8시간까지 발가벗고 서 있어야만 했고, 지속적으로 측정이 이루어졌다.ㅡ 에바와 미리암 모제스, 아우슈비츠의 쌍둥이
나는 1쌍의 쌍둥이를 기억하는데, 그들은 한 방울의 피도 더 이상 뽑아낼 수 없을 때까지 피를 뽑아내야 했다. 그들은 빈 비닐봉지나 맥주병처럼 땅바닥에 쓰러졌다.ㅡ 이츠하크와 체라흐 타우브, 아우슈비츠의 쌍둥이
첫 번째 조사는 눈, 키, 코와 같은 신체 외부를 비교하는 것으로 이루어졌다. 이 검사는 여러 시간이 걸리기도 했고 여러 날이 걸리기도 했다. 나중에 우리는 수혈을 받으러 갔는데, 이를 통해서 한 쌍둥이의 피가 다른 쌍둥이의 피로 대체되었다.ㅡ 일로나 락스, 아우슈비츠의 쌍둥이
멩겔레 박사가 왔다. 그는 흰색 가운을 입었지만, 나는 그 안의 친위대 제복과 장화를 보았다. 그는 내게 사탕을 선물하고 나서 주사를 놓았다. 주사는 엄청나게 아팠다. 멩겔레는 독일어로 "걱정하지 말라"고 내게 말했다ㅡ 모셰 오퍼, 아우슈비츠의 쌍둥이
우리가 멩겔레의 실험대에 매여 있을 때, 다음에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우리는 등 뒤에서 차가운 솔길과 청진기가 닿는 것을 느꼈고, 그러고 나서 지독히 아픈 주사를 맞았다. 우리는 엄청난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ㅡ 칼만 브라운, 아우슈비츠의 쌍둥이
그 당시에 우리는 사형 선고를 언도 받은 사람들이었지만, 곧장 사형이 집행되지는 않았다. 우리를 곧바로 죽이는 대신에, 오늘날 실험실에서 고양이와 쥐를 가지고 하듯이, 우리를 실험 대상으로 삼았다.ㅡ 메나셰 로린치, 아우슈비츠 쌍둥이
우리 쌍둥이 형제는 어머니와 같이 독가스실로 가고 있던 중이었다. 그 때 갑자기 어머니가 "얘들아, 어서 독일인들에게로 돌아가거라. 그들이 쌍둥이를 찾고 있는 그곳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셨다. 어머니와 막내 동생이 시체 소각장으로 계속 걸어가고 있는 동안에 우리는 몸을 돌려 화물 전용 기차 플랫폼으로 뛰어갔다. 그곳에 멩겔레 박사가 서 있었다.ㅡ 에바 쿠파스, 아우슈비츠 수용소 쌍둥이
나는 단지 내 몸 안에 무엇을 집어넣었는지 알고 싶었다. 내게 독극물이 주입되었다. 오늘날까지도 그게 어떤 독극물인지 모른다. 실험의 후유증으로 내 몸의 3분의 2에 장애가 생겼다. 내 몸은 떨고 있다.나는 간질로 인해 발작을 일으키고 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삶인가!ㅡ 모셰 오퍼, 아우슈비츠 쌍둥이
수용자복을 입은 유대인들에게 "쌍둥이들은 나오라"고 소리치며 난쟁이와 기형인 사람들을 찾았다. 그들은 우리에게도 왔다. 내 형과 나는 쌍둥이가 아니였지만 우리는 매우 닮았다. 그들은 우리를 열에서 빼내 끌고 가면서 우리에게 "너희들은 적어도 목숨은 부지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ㅡ 에프라인 라이헨베르크,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희생자
나는 내가 고깃덩어리에 불과하다고 느꼈다.ㅡ 미리안 모제스, 아우슈비츠의 쌍둥이
만약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그를 묘지에 묻고, 다시 그를 찾아 기리곤 한다. 하지만 미리암과 내게는 그리고 아우슈비츠의 모든 쌍둥이들에게는 그런 묘지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어머니, 아버지, 형제들을 보았던 마지막 순간에 대한 기억만이 있을 뿐이다.ㅡ 에바 모제스, 아우슈비츠 쌍둥이
멩겔레는 개인적으로 우리를 때리지는 않았고, 단지 우리에게 실험을 했을 뿐이다. 하지만 나는 그가 몸짓 하나로 부모, 형제, 우리 가족 모두를 그리고 친척 모두를 죽였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그의 손은 수많은 피로 얼룩져 있다.ㅡ 아우슈비츠의 쌍둥이 중 한 사람
멩겔레가 며칠 뒤에 해부대 위에 올려놓을 것을 알면서도 아주 즐거워하며 수용소의 어린아이들을, 특히 어린 소녀들을 차에 태우고 드라이브하는 것을 보았다면 그것은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였다.ㅡ 한스 뮌히, 아우슈비츠의 의사
6 기타
- 바이오쇼크의 등장인물인 테넨바움의 음성기록을 들어보면 수용소에서 벌어진 생체실험이 언급되는데, 눈깔 운운했다는 말을 보아 테넨바움의 기록은 멩겔레에게서 모티브를 따오지 않았을까 싶다.
- 더스틴 호프먼 주연 영화 《마라톤 맨》(1976)에 나오는 악역 크리스티안 스젤 박사도 멩겔레 비슷한 인물이다. 명색이 의사라는 놈이 수용소에서 고문 담당을 맡았다고 나오는데 나치 전범으로 쫓기는 주제에 온갖 잔혹한 짓을 다 한다. 명배우 로런스 올리비에 경이 피눈물 없는 이 악역을 잘 연기했다.
- 메탈 밴드 슬레이어의 유명한 곡인 Angel of Death의 가사는 멩겔레에게서 모티브를 따왔다고 한다. 꽤나 악랄한 가사이니 심약한 분들은 청심환 한 알 삼키고 보시길...
- 소설 브라질에서 온 소년들에서는 멩겔레가 악역으로 나온다. 자그마치 94명의 히틀러를 복제해서 히틀러와 똑같은 환경에서 자라게 하여 나치의 부활을 꿈꾸는 매드 사이언티스트다. 영화로도 제작되었는데 재미있게도 2년전 멩겔레를 오마쥬한 나치 전범을 연기한 로렌스 올리비에 경이 나치 헌터를 맡았다는 점이다. 이때 요제프 멩겔레를 연기한 배우는 그레고리 펙.
- 2008년 7월 27일,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의 코너 익스트림 서프라이즈에서 326화로 <<죽음의 천사>>라는 제목으로 그의 이야기를 방송했다.유튜브
- 울펜슈타인: 더 뉴 오더에서는 그를 여체화 시킨듯한 케릭터 프라우 엥겔이 존재한다. 영어로는 미즈 엔젤 (Ms Angel). 게다가 그녀의 수용소 스테이지에서는 중간에 멩겔레만한 악취미를 가진 The Knife라는 의사놈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여러모로 노렸다.
-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멕시코에서 나오는 악역 중 하나가 멩겔레 박사인데 멀쩡한 사람(조니 뎁)의 눈을 마취도 없이 뽑아버리지 않나, 아주 악질로 나오고 결국 찌질하게 죽는다.
- 영화 <죽음의 천사> 역시 1960년대 아르헨티나에서 도피하던 시절의 멩겔레를 다루고 있다.
- 영화 <Unborn(국내명 제목: 언데드, 2009)>에서 여주인공은 아우슈비츠에서 수용소 생활을 한 쌍동이 남매 중 여자쪽 후손인 유대인 가계인데, 할머니의 회상 속에서......아우슈비츠에 있을 때 유난히 쌍둥이를 좋아하여 좋은 대접을 하고 눈의 색소 실험을 한 잘생긴 의사가 나온다. 영화에서는 딱히 멩겔레라고 지칭하지는 않았지만, 아우슈비츠에서 쌍둥이를 좋아한 의사이고 생체실험을 했다는 점에서 멩겔레 확정.
- ↑ 인종 유전학자 오트마 폰 페르슈어의 아들
- ↑ 년도를 보면 알겠지만 아들의 악행을 듣고 충격을 받아서 사망한 것이다.
- ↑ 이 사람은 "형님의 악행에 동생인 제가 사죄하겠습니다."라며 참회까지 했다.
- ↑ 전 위키러는 Jew와 Jaw를 혼동(?)하여 아랫턱을 유대인으로 번역한 모양이다.
- ↑ 물론 뮌헨 대학과 프랑크푸르트 대학은 전후 1964년, 멩겔레의 학위를 취소하였다.
- ↑ 나치당의 공식 명칭
- ↑ 당시 아우슈비츠에 들어온 아이들과 노인들은 모두 살해대상이었다.
- ↑ 유태인을 아리아 인종으로 바꾸는 실험의 일환이었다. 물론 우리가 보는 눈 색은 홍채 자체의 색이므로 유리체에 물감을 주입한다거나 하는 병신 짓거리를 한다고 눈이 파래지지도 않고 피험자는 당연히 실명이다.
- ↑ 단 저게 모사드가 멩겔레를 잡지 못하자 만들어낸 유언비어라는 주장도 있다. 게다가 둘을 동시에 어서 잡아야지 정보를 알고나서도 놔둔다? 억지성도 많다.
- ↑ 위에 보면 알겠지만 정작 어머니는 아들의 악행에 충격받고 죽었다.
- ↑ 독일계 파라과이인 국가 사회주의자
- ↑ 참고로 이놈은 멩겔레의 동료였던 호르스트 슈만과 멩겔레와 함께 생체실험을 감행한 미친 놈이다
가재는 게 편이다 - ↑ 만약 실제로 그랬다면 역사적으로 심판을 해야할지도
- ↑ 1978년 그레고리 펙 주연으로 동명의 영화가 개봉했다. 그레고리 펙이 원체 미남배우이다 보니 멩겔레도 흰 양장을 입은 훤칠한 미중년으로 등장한다. 이 영화를 찍을 때 펙은 62세였다. 한풀 꺾일 법도 한 62세의 고령에도 그의 멋은 여전함을 볼 수 있다.
- ↑ 당연하지만 외모를 비교하자면 펙한테 그야말로 고인드립이다. 심지어 어떤 팬은 "내가 사랑하는 영화배우한테 저런 찐따같이 생긴 놈의 역할을 맡기다니 당신 제정신이냐?" 라고 항의편지까지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