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랑제브


나무위키에 문서가 있는 무굴 제국의 역대 황제
1대 바부르
(1526 ~ 1530)
2대 후마윤
(1530 ~ 1539,
1555 ~ 1556)
3대 악바르 1세
(1556 ~ 1605)
4대 자한기르
(1605 ~ 1628)
5대 샤 자한
(1628 ~ 1658)
6대 아우랑제브
(1658 ~ 1707)


1 개요

1618 - 1707 (재위 1658 - 1707)

인도판 당태종수양제, 그 사이에 자리한 인물.

정식 제호는 알람기르 1세이나 이름인 아우랑제브로 더 널리 알려져 있는 무굴 제국의 6대 황제. 풀네임은 알 술탄 알 아잠 왈 카칸 알 카람 아불 무자파르 무휴딘 무하마드 아우랑제브 바하두르 알람기르 1세.[1] [2]

무굴 제국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하게 만든 왕이자 세계사에서도 언급되는 유명한 왕이다. 남인도에 대한 정복전쟁으로 무굴제국의 영토를 최대로 확장시킨 정복자라는 평과 지나친 이슬람 강요로 인해 무굴제국의 쇠퇴를 초래한 암군이라는 평이 공존한다. 긴 재위기간 내내 팽창정책을 구사했으나 내치에서 퇴보를 시작했다는 점에서는 그가 죽고난 직후 태어난 청나라의 건륭제나 동시대 프랑스의 루이 14세와 비슷하다고 볼 수도 있다. 어쨌거나 그의 재위 기간 무굴 제국의 국력은 외형적으로 정점에 달했으며, 그 당시 강희황제청 제국과 더불어 아시아의 양대 강국 중 하나였다고 할 수 있다.[3]

2 행적

황제로 등극하기 전부터 군사 분야에 뛰어난 자질을 보였다고 한다. 일찍이 1636년부터 황자 신분으로 데칸 지역의 부왕 등 중요한 자리에 등용되기 시작하였으며, 맏형인 다라 시코와 권력싸움을 벌였다. 데칸 지역의 통치자로서 그곳의 이슬람 왕조 두곳을 정벌하기도 하고, 1646~1647년에는 우즈베크와 페르시아 정복전에서 뛰어난 공훈을 세우기도 했다.

이후 아버지 샤 자한의 무리한 무덤 건설에 반대하여 쿠데타를 일으켜 아버지를 폐위해 버렸다.[4] 그리고 1658년 5월, 권력싸움 라이벌인 맏형 다라 시코를 격퇴하고 1658년, 40세 나이로 황제로 즉위하였다. 아우랑제브 역시 뭄타즈 마할의 셋째아들이었는데도 타지마할 문서에 나오듯이 아픈 아버지를 유폐하고 생필품도 부족하게 줘서 괴롭히며[5] 죽어가게 한 패륜아적인 행동을 보였다. 여담으로 그의 맏형 다라 시코는 아우랑제브와 달리 타 종교에 굉장히 관대한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 점 때문에 지배층인 무슬림들의 반감을 사서 그들이 아우랑제브를 지지하다보니 끝내 왕권을 거머쥐지는 못했지만 만약 그가 무굴 제국의 황제였다면 종교 탄압으로 나라가 벌집이 되는 일은 없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그 아버지 샤 자한이 제국을 워낙 말아먹었던터라 설령 아우랑제브보다 관용적인 다라 시코가 즉위한다해도 무굴 제국은 막장이 되는 것을 피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는 즉위 후 아버지 때 계획했던 아그라에서 델리로의 천도를 완수했으며, 그 후 바로 정복전쟁에 착수하여 무굴 제국의 영향력을 크게 높이고 무굴 제국의 영토를 역사상 최대로 넓혔다. 명목상으로는 스리랑카(토속왕조인 디나자라(Dinajara) 왕조의 지배하에 있었다)를 제외한 남인도까지 거의 다 밀어버린 것으로 판단할 정도. 가히 군사적 영역에서는 천재성을 보였다고 할 만하다. "무굴의 영역은 카불에서 코모린 (지금의 타밀나두 주 카니아쿠마리)까지"라는 이야기가 종종 불릴 정도였다. 이슬람 신학자들에게 살아있는 성자라는 호칭까지 얻었지만, 이건 그 당시 무슬림들에 한해서만 성군으로 보였을 뿐, 피정복민 비무슬림에게 그의 존재는 재앙 그자체였다. 1679년부터 이슬람을 제외한 다른 종교들을 강력하게 탄압하는 정책을 펼쳤기 때문. 인두세를 부활시킨 이유에 대해서는 샤 자한 참조.

일단 그래도 1680년까지의 치세 초반기에는 그렇게 평가가 나쁘지는 않았고[6], 제국의 신민들로부터 유능하다는 평가를 받는 면도 있었다. 무자비하고 잔혹한 성격때문에 그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주로 페르시아나 북부(중앙아시아) 투르크족들을 방어하는데 치중했기 때문이다. 또한 정복전을 수행할 때도 상대방을 일단 군사적으로 패배시킨 뒤에 그들과 화해하고 권한을 부여해주는 형식의 유화책을 많이 써서 통치를 꽤 효과적으로 할 수 있었다.

그러나 1679년, 비무슬림에게 인두세[7]를 강요하는 정책을 시행하면서, 그의 통치는 악명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굉장히 독실하고 광적인 이슬람 신앙을 가졌던 그가 제국 신민의 다수를 차지하는 비무슬림에게 차별 정책인 인두세를 부활시키자, 특히 그중 대다수를 차지하던 힌두교도들의 제국에 대한 충성도가 당연히 빠른 속도로 식기 시작했다. 이는 제국의 신민을 종교에 상관없이 동등하게 대우하겠다는 제국이 기존 신조를 파기하고 무슬림들만이 우월한 신민으로 대접받으며 비무슬림들은 앞으로 개종시켜야 할 종속자 위치로 보겠다는 선언이였기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인두세 부활 정책을 실시하자마자 셋째아들 악바르마저 비이슬람 인두세 강요에 반발해 반란을 일으켰다. 이를 '라지푸트 반란'이라고 한다. 이것은 화려한 정복 성과와는 별개로 사회, 문화, 경제 등 모든 분야에서 제국은 퇴보를 걷기 시작했다는 첫 신호탄이나 다름없었다. 이어 아우랑제브의 강압에 반발한 힌두교도들이 결성한 마라타 동맹의 반란으로 제국은 분열을 맞았으며, 시크교 역시 '테그 바하두르'같은 그들의 구루(지도자)가 이슬람을 받아들이기를 거절했다는 이유로 아우랑제브에게 처형당한 이래 무굴 제국에 반란을 일으켰다. 펀자브의 사트남 파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자트 족 역시 봉기를 일으켰다바람잘 날이 없는 제국 아우랑제브가 분노해 제국의 경제력을 지속적으로 손상시키면서 남부 고원의 마라타 동맹을 제압하자, 이번엔 시크교도들이 많은 북부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더구나 아우랑제브는 선대 황제들과 달리 후사 문제를 제대로 수습해놓지 못한 채 데칸고원에서 전사해버렸기 때문에 그의 사후 국정 역시 극심한 혼란 국면에 빠져들었다.[8] 결국 잘했던 20년보다 말아먹은 30년이 더 부각되는 안습한 인물.영웅이 죽지않으면 악당이 된다고 했던가

아우랑제브가 후사를 정해놓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사망한 이후 그의 세 명의 아들들이 서로 황위를 차지하려 다투다가 그 중에 제일 나이가 어린 아들이 형들을 몰아내고 바하두르 샤 1세(Bahadur shah I)로 즉위한다. 바하두르 샤 1세 이후 무굴 제국은 지속적으로 쇠태하기 시작했다. 바하두르 샤는 아버지가 벌려놓은 여러가지 문제점들을 노련하게 수습해나갔으나 왕위에 오를 때 이미 나이가 68세였고, 재위한 지 5년만에 병사하고 만다. (아우랑제브의 수명이 짧고 이 사람이 더 일찍 왕이 되었다면 무굴 제국의 운명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2.1 실상

아우랑제브 1세는 독실한 무슬림이였다고 하며 뛰어난 학식을 자랑했다고 한다. 그러나 후반기 치세로 가면서 국가경영과 자신의 종교관을 분리시키지 못한 것이 그의 최대 실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애초에 인도는 힌두교, 이슬람, 시크교뿐만 아니라 지역별로 별의 별 군소 종교에, 기독교[9], 심지어 극소수 유대인들까지 온갖 종교들과 문화들이 난립해있는 지역이었고, 이런 지역을 정복하여 효과적으로 통치하려면 본인이 좋든 싫든간에 다문화 다종교 정책은 필수였다. 이에 따라 가능한 한도내에서 제국의 다양한 종교와 문화들을 차별하지 않는 정책들을 펼치고 이를 제도화하여 분열의 기미를 없애기 위해 노력한 선왕들의 노력을 재위 후반기의 지나친 무슬림 우대정책으로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모든 문화와 다양한 민족을 포괄하며 통치해야 할 황제가 이슬람을 전 인도에 강요하였으며, 이것에 반대하는 자들을 탄압하거나 학살했고, 별다른 준비도 안하고 요직의 인물을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쫓아내는등 재위 기간 중후반부엔 폭군의 면모를 잘 보여줬다. 위에 설명했듯이 무굴 제국의 시작과 동시에 폐지했던 지즈야(비무슬림에게 종교세를 물리는 제도로, 무슬림 우대정책이자 개종을 유도하는 비무슬림 차별 정책)를 부활시킨 것은 당연. 거기다 무타시브라고 불리는 이슬람 검열관들에 의해 지나치게 엄격한 이슬람 율법을 강요하였으며, 황실 조정 내에서 힌두식 인사법도 금시시켰다. 인도 각지에서는 힌두교 사원을 비롯한 비이슬람 종교시설들이 황제의 명에 의해 파괴되었다. 이는 비이슬람 교도들을 분노하게 만들어 반란이 일어나는 원인제공을 했다.

또한 이슬람 신자들과 학자들은 그를 이슬람 성군이라며 칭송했지만 이미 무굴제국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분열되기 시작했으며, 그의 49년 통치가 끝날 무렵엔 제국은 끝없는 내전과 분열로 빈사상태 직전에 있었다. 그리고 아우랑제브의 후계자들이 이를 수습하지 못하면서 결국...제국은 망했어요의 길을 걷는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끝도없는 전쟁과[10] 반란 진압, 무슬림 관리들의 세금 착취 문제 등으로 국력을 소진하면서, 애초에 본인이 아버지를 폐위한 명분이었던 무덤 짓는다고 나라를 거덜낸다!라는 비난을 본인이 몇 배는 더 심하게 답습하는 추태를 보였다. 그래도 역시 당시 세계에서 경제력이 제일 막강했던 나라 중 하나답게, 아우랑제브 당시 연세입은 약 3억 900만 루피에 달했고 그가 죽을 당시 아그라의 중앙 은행에는 2억 4000만 루피가 남아 있었다고 한다. 참고로 타지마할을 지을 때 들어간 총 비용이 3200만 루피였다.

개인적인 무력으로도 아우랑제브는 태자 시절 아버지와 함께 있던 군영에서 대형 전투 코끼리 하나가 날뛰며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자 홀홀단신으로 도망치려는 말을 올라타 장창으로 코끼리를 죽여[11] 아버지로부터 용사라는 의미인 바하두르란 칭호를 받은 적 있고, 전반적으로 정복 군주로서의 군사적인 능력 자체는 높은 편이다. 특히 몽골-튀르크계 칸국으로 시작했던 무굴 제국의 화약 무기 도입, 군 조직 체계화, 병과의 유기적인 연계 같은 군적 인프라의 진화 자체는 이 시기에 가장 절정에 달했다. 아우랑제브 본인 또한 군사적인 측면에서는 상당히 개방적인 면모를 부여주었는데, 프랑스와 영국의 기술자들을 대거 초빙하여 지속적인 화약 무기 개량에 신경을 썻으며, 훗날 대영제국에게 영감을 준 인도산 로켓 병기 또한 아우랑제브 시절 본격적으로 써먹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다보니 아우랑제브가 싸웠던 적국들도 그와 전면전에서 붙기만 하면 개발살나 전면전을 기피해야 했다.

결론적으로, 무굴 제국의 국력과 군사력이 끝물에 달아 오른 것도 아우랑제브 시절이었지만, 내정의 실책으로 인해 무굴 제국의 전성기가 때 이르게 꺾여 버리는 결정적인 계기를 만든 것도 아우랑제브의 치세 중 벌어진 일이었다. 실제로 아우랑제브 치하 무굴 제국의 대외 정책은 장기적인 비전을 가지고 실행에 옮겼다고 보기엔 힘든면이 존재한다. 남쪽에서 힌두교 계통 마라타 연맹과 치열하게 전쟁 중인데 그 와중에 북부 펀자브 지방에서 준동하는 시크교 반란군과 또 싸우고 앉았고, 그러면서 또 원래는 동맹으로 시작했다 현대 아프가니스탄 지방 두고 숙적으로 돌아 선 사파비 왕조 페르시아를 또 공격하지 않나... 17세기 후반이라면 실질적으로 인도 최남단의 깨잘깨잘한 힌두교계 군소 군벌 세력들 빼고는 무굴 제국의 인도 아대륙 패권에 도전장을 내밀 만한 존재가 하나도 없던 시점이었고, 큰 이변만 없으면 이 패권은 어느 정도 지속 될 것이 자명했던 시점이었는데, 이 양반이 제국 내 전 지방에 골고루 적들을 알아서 만들어 주시고, 또 이들로서 하여금 뭉치게 하심에 따라 아예 제국의 지정학적 장애물을 자기가 직접 키운 셈이다. 그런 그도 말년에 공포정치를 펼치고 수없이 전쟁을 벌이던걸 후회하였고 자기 후계자인 아들 바하두르 샤 1세에게는 이점을 본받지 말라고 당부했는데 이것과 낭트칙령 폐지 같은 건 루이 14세와 닮았다. 문제라면 그가 죽었을때 무굴제국은 이미 수없는 반란으로 기울어져갔다는거지만...[12]

이럼에도 무려 89세라는 당시 동서양 군주에서도 통틀어 엄청나게 오래 살았다. 신하들과 백성들에게선 보통 고역이 아니었다. 평생을 전쟁에 휘말렸고 죽을때도 전쟁터에서 쿨룩거리며 전쟁 소식을 듣는 채로 죽었는데 죽기전에 내 무덤은 대충 초라하게 만들라고 유언을 남겨서인지 진짜로 그의 무덤은 황제치곤 초라하다.

3 기타

실상 항목에서 나와있듯이 개인적으로는 매우 뛰어난 학식을 자랑했다고 한다.

할아버지 셀림은 '자한기르', 아버지 후람은 '샤자한'이라는 페르시아식 왕호로 불리는데, 아우랑제브는 '알람기르 1세'라는 왕호가 있음에도 본명으로만 불리고 있다...이름이 입에 착착 감기고 간지나서 그럴수도

1961년 아서 C. 클라크가 그레이트베이시스리프에서 스쿠버 다이빙을 하다가 침몰선을 보고, 거기에서 은주화를 발견하는데, 이 배가 샤 자한의 전설의 보물선이라는 소문이 퍼진다. 이 배는 타지마할을 장식하기 위해 수많은 보석을 옮기게 했는데, 침몰해렸다고 사람들이 추측했다. 그의 친구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해군이 샤 자한의 보물선을 찾았지만 보석에 손을 대지 않았다며 이 배가 샤 자한의 보물선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 후 3년동안 발굴한 후 1964년에 자신이 발견한 배가 무굴 제국의 배가 확실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배 안에는 100개의 주화만 있었지 보석이나 금괴는 없었고, 자신이 발견한 배가 샤 자한이 아니고 그의 아들인 아우랑제브 1세의 배였다고 주장했다. 이 부분은 2015년 9월 20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다루었다.

아우랑제브의 첫째 황후의 무덤은 아우랑가바드에 있는 비비 까 마끄바라 (Bibi Ka Maqbara) 이다.

4 관련문서

  1. 지금 기준으로 봐도 매우 장수한 왕(약 90세)이기도 하다.
  2. 할아버지 셀림은 '자한기르', 아버지 후람은 '샤 자한'이라는 페르시아식 왕호로 불리는데, 아우랑제브는 '알람기르 1세'라는 왕호가 있음에도 본명으로만 불리고 있다...이름이 입에 착착 감기고 간지나서 그럴수도 우리나라판 론리플래닛에는 어렁제브로 표기되어 있으나 세계사 교과서 등의 일반적인 표기는 아우랑제브다. 인도어의 한국어 표기 기준을 자세히 아는 분의 추가 바람. 후대에 알람기르 2세 황제는 있지만 아우랑제브 2세는 없다. 고로 아우랑제브 1세가 아니다
  3. 영어 위키 백과에 따르면 아우랑제브 당시 무굴 제국의 영토는 320만 제곱 킬로미터에 달하였고, 북한까지 합한 우리나라 영토가 22만 제곱킬로미터이다 인구는 1억 - 1억 5천만에 이르러 그 당시 세계에서 2번째로 많은 인구를 가졌다고 한다. 영문 위키 백과의 해당 항목은 최근 320만에서 400만으로 수정되었다. 또한 1690년 연간 세수는 당시 세계 최고였다고 하니 대외적인 무굴 제국은 그야말로 청나라와 함께 아시아를 넘어서 세계 최강국 중 하나로 봐도 무방하다.
  4. 이때의 샤 자한은 알코올 중독으로 인한 병으로 않아눕고 있던 상태였다.
  5. 괴롭힌 것은 아니고 누나인 자하니라 보고 알아서 하라며 아예 무관심했다.
  6. 왜냐면 아버지 샤 자한이 하도 제국을 말아먹었으니까.
  7. 이슬람 교리에는 '지즈야'라고 해서, 이슬람 정권 통치 하에 있는 비무슬림은 추가세금을 내야 하는 조항이 있다. 이는 아우랑제브 이전에는 폐지되어 비무슬림은 무슬림에게 세금을 내지 않아도 신앙의 자유를 보장받을 수 있어 무굴 제국의 문화공존에 큰 도움이 되고 있었다.
  8. 아이러니하게도 데칸은 아우랑제브가 최초로 부왕을 지냈던 봉지였다.
  9. 중세 초기에 이미 인도로 이주하여 독자적인 종파를 새운 네스토리우스계열 사도 토마스 교회 뿐만 아니라, 이 시점에는 이미 고아 지역을 비롯한 유럽 식민 제국들의 정복을 통해 가톨릭 포교 또한 어느 정도 이루어졌다
  10. 인도 남부 왕국인 마이소르 왕국과 마라바 동맹국들은 영국에게 병합될때까지 무굴 제국과 끝까지 싸웠다. 특히 전력에서 무굴과 상대가 안된다는 것을 알기에 게릴라전으로 맞선터라 섬멸전으로 나가지 않는 아우랑제브로서도 제압하기가 어려웠다.
  11. 코끼리는 총으로도 쉽게 안죽는 맹수다.
  12. 특히 아우랑제브 사후 무굴 제국은 제위 분쟁과 황제들의 무능으로 국력이 갈수록 기울어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