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수업(소설)

1 개요

1871년 프랑스작가알퐁스 도데가 쓴 단편소설.

1871년 당시 보불전쟁에서 하라는 전쟁은 안 하고 당구만 친 장군 때문에[1] 프랑스가 패배하여, 알자스-로렌 지방을 프로이센에게 넘겨주는 시기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로, 매일 학교를 땡땡이치던 프란츠가 어느 조용한 날 학교를 갔더니만, 이미 베를린에서 독일어 이외의 언어를 가르칠 수 없다는 명령이 하달된 뒤였다.

프란츠는 마을 사람들과 다른 학생들과 함께 마지막 프랑스어 수업을 받게 된다. 수업이 끝남과 함께 아멜 선생님이 "VIVE LA FRANCE!!"(프랑스 만세!!) 라는 구절을 칠판에 쓰면서 말을 잇지 못하고 마무리되는 내용의 소설로, 민족의식과 모국어의 소중함을 가르쳐 주는 소설이다.

명대사로는 "프랑스어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뛰어난 언어임을 잊어서는 아니됩니다. 국민이 설혹 노예의 처지에 빠지더라도 국어만은 잘 지키고 있다면, 스스로의 손에 감옥의 열쇠를 쥐고 있음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와 마지막에 아멜 선생님이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나직이 내뱉는 말인, "가거라, 가!! 수업은 이미 끝났다!!"

이 소설은 한국의 일제강점기 당시 한국어를 가르칠 수 없었던 슬픈 역사를 상기시켜 한국에서도 유명한 소설이다.

2 비판

이 소설의 중요한 문제점은 실제 알자스-로렌 지역 주민들의 언어 및 민족 의식과 다르게 일방적으로 파리 중심의 프랑스 민족주의적 입장에서 왜곡되어 쓰여졌다는 점이다. 알자스-로렌 지방, 그 중에서도 특히 알자스 지방은 이미 아주 오랜 옛날부터 독일계 민족이 살던 땅으로, 프랑스는 17세기말에 이 땅을 점령한 후 지속적으로 주민들의 독일어 사용을 억제시키고 강제로 프랑스어로 교정 중에 있었던 것이다.[2] 알자스가 강제로 프랑스에 병합된지 100여년이 지난 작중 시점에서도 대다수의 주민들이 쓰던 말은 독일어였다.

주인공의 이름부터 프랑수아(François)가 아니고 프란츠(Franz)이다.

일제강점기와 굳이 연결시킨다면, 당시 프랑스의 정책은 민족 말살 통치를 연상시킬 수도 있는 것이다. 또한 실제로 알자스-로렌에서 초등교육이 시작된 것은 보불전쟁이 발발한 바로 그 해였다고 한다. 즉 초등교육 자체도 이런 반독일어(지방어) 국민국가 교육정책들 속에서 시작된 것.

따라서 만약 국내 실정에 맞게 번안한다면, 오히려 이런 내용에 가깝다는 것이다.

가타카나 쓰기가 끝나자 메이지 유신을 배웠다. 다음에는 꼬마 패들이 모두 '카, 키, 쿠, 케, 코'를 합창했다. 저기 교실 뒷전에서는 오자부로라는 이름으로 창씨개명한 영감님이 안경을 끼고 두 손으로 황국신민서사를 든 채 꼬마 패들과 함께 한 자, 한 자 읽고 있었다. 그도 몹시 열중해 있는 모습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감동으로 떨고 있었다.

히로히토 덴노의 무조건 항복 선언 풍문을 접한 일본인 아베 센세는 한동안 말문을 열지 못하다가 조선인 학생들을 향해 말문을 열었다.

"일본어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뛰어난 언어임을 잊어서는 아니됩니다. 충량한 황국 신민이라면 설혹 귀축영미의 노예가 될 처지에 빠지더라도, 황국어만 잘 지키면 스스로의 손에 감옥의 열쇠를 쥐고 있음과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문득 신사의 종이 정오를 알렸다. 이윽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침통한 음성. 바로 이 시각에 창 밖에서 "대한 독립 만세!" 소리가 울려왔다.

일본인 선생님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선생님이 그렇게까지 초라해 보였던 적은 일찍이 없었다. "미나상, 미나상. 와따시와…! "하고 뭐라고 말하려 했으나, 선생님은 끝내 말 끝을 맺지 못했다. 그리고 칠판을 향하여 돌아서시더니 분필 한 조각을 집어 온 힘을 다하여 되도록 크게 쓰는 것이었다.

"天皇陛下万歲! (덴노 헤이카 반자이!/천황 폐하 만세!)"

그러고는 벽에 머리를 기대고 한참 있다가 말없이 학생들에게 손짓으로 알렸다."가거라, 가! 수업은 이미 끝났다!"

(...)

마지막 수업의 진실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나오기도 했다. 알퐁스 도데 마지막 수업의 진실-도데의 추악한 내셔널리즘과 그 한국적 변용
북한 버전도 있다. 제목은 '마지막 혁명력사 수업'.

실제로 보불전쟁 시기까지도 알자스 지역에서 독일어의 영향은 매우 강했다고 한다. 오늘날까지도 이 지역에서는 소수지만 독일어의 방언인 알자스어가 통용되고 있다.

사실 알자스-로렌 지역의 이러한 현실이 작중에서도 은연 중에 반영되어 있다. 주인공인 프란츠(Franz)가 프랑스어에 젬병인 이유도 사실 이게 익숙한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애초에 프란츠라는 이름 자체가 독일식 이름이다. 이태리 출신 성인인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라틴어식 표기인 프란키스쿠스(Franciscus)에서 기원한 이름이긴 하지만, 프랑스식으로 지었다면 프랑수아(François)가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친불파라면 몰라도 일반 주민들이 저런 감동 스토리를 연출했을지는 의문이다.

알퐁스 도데가 지독한 국수주의자였다는 것과 이 소설이 나올 당시 프랑스 문인들의 태도가 보불전쟁의 패배로 인한 반독일정서가 강했고, 그로 인한 자문화 우월주의에 바탕해 쓰여졌음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사실 프랑스 혁명 당시까지만 해도 프랑스어를 쓰는 인구는 전체 프랑스 국민 중 1/4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것은 프랑스 북부 지역 뿐이었고, 남부 프랑스에서도 고유한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본격적으로 지역 언어의 상위로서 프랑스어를 표준화하고 국어로서 교육한 것은 19세기에 들어와서다. 프랑스가 지금의 국경을 확정한 것이 상당히 오래전이고 변화가 없었을 것이라 아는 사람들이 많지만, 프랑스는 그때까지 수백 년간 점진적으로 동, 서, 남, 북의 국경지방과 섬 지역을 외교와 전쟁으로 병합해 확장하며 성장했다. 유럽 주요국이 근대 이후 국경을 결정하며 강탈하거나 교환한 영토는 알자스-로렌만이 아니며, 그런 지역에서는 소속국가의 대표 언어가 지역민의 단독 공용어가 아닌 곳이 아직도 여럿 있다. 조선중국의 국경을 생각하면 안 된다.

다만 알자스-로렌은 2차대전 후 프랑스가 유화적으로 바뀐 뒤에 프랑스 편입에 동의한 것. 알자스-로렌 항목 참고. 사실, 왕가의 혈통을 따져 지배자를 다른 나라에서 모셔오고 깃발을 정하던 시대가 19세기 중반까지였는데 백성이 쓰는 언어 따위 누가 상관할까. 하지만 이 소설의 배경과는 상관없이, 묘사하는 내용은 우리의 감성에 호소하는 바가 있다. 비유하면 개신교에서 비유하는 이스라엘 민족과 한민족처럼. 즉, 박해와 희망.

3 반론

알자스-로렌의 미묘한 역사적 상황에 비추어보면 알퐁스 도데에 대한 비난이나 위의 패러디 역시 지나친 면이 있다.

1871년 보불전쟁에서 승리하고 통일 독일제국이 수립될 당시 소독일주의자였던 비스마르크는 알자스-로렌의 합병에 다소 소극적이었는데, 비스마르크는 당시 프랑스 국민으로 남기 원했던 주민들은 프랑스로 떠나도 좋다는 칙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당시 주민의 10%가 고향인 알자스-로렌을 떠났다고 한다. 그만큼 독일인으로서의 정체성이 희박했다고 볼 수도 있는 것.

이는 독일에 병합되어 독일에 다시 동화될 시간이 어느정도 있었던 1차 세계대전 발발 당시에 일부 알자스-로렌 주민들이 독일을 위해 싸우기를 거부한 것에서도 드러난다. 많은 알자스-로렌인이 징집을 피하기 위해 잠적하거나 스위스로 도피했다. 당시 독일에서는 보불전쟁에서 짧은 기간동안 싸운 후 승리한 기억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친 이후와는 달리 전쟁에 대한 이미지가 나쁘지 않았고, 많은 사람들이 오히려 참전하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며 자원해서 입대했다. 그러나 알사스-로렌에서는 독일군으로의 징집을 거부했으며 아예 프랑스로 넘어가서 프랑스군에 입대한 경우도 있었다.

주민들이 독일군에서 싸우기를 거부했다는 것은 당시 독일 관료들의 증언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독일군에서는 알자스-로렌의 징집 대상자들이 달아나지 못하게 통지서를 불과 몇 시간 전에 보내고 무장병력을 동원하는 방법을 써야 했고, 알자스-로렌 출신 병사들은 프랑스와의 전투보다는 동부전선에 투입했다. 1917년 7월을 기준으로 알자스 출신 병사들의 탈영 비율은 그 외의 지역 출신에 비해 80배가량 높았다.#

하지만 정작 프랑스 본국에선 보불전쟁 이후 알자스-로렌 지방 출신들에 대한 대우가 미묘했다. 드레퓌스 사건의 주인공 알프레트 드레퓌스 대위는 알자스 출신으로, 병합 이후 그의 형제들은 프랑스 국적을 택할 정도로 프랑스에 대한 소속감이 깊었지만 당시 프랑스군 내에서 알자스-로렌 출신은 백안시당했다(어찌 생각하면 어느 정도 당연한 면도 없지는 않다). 드레퓌스 대위가 범인으로 지목된 데에는 그가 유대인이라는 점 외에 알자스 출신에 그의 아버지는 독일 국적으로 알자스에 남아 있었다는 점도 꼽혔다고 한다. 또한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계 시민들의 상점들이 약탈이나 방화 등의 린치를 당하는 사건들이 있었는데 여기엔 알자스-로렌 출신 사람들이 운영하는 상점도 포함되었다.

국제관계란 단순하지 않고 훨씬 복잡 미묘하다는 것을 상기하게 하는 부분.

좀 더 첨언하자면, 알퐁스 도데의 입장, 그리고 이 작품을 일제강점기의 한민족에 대입하여 해석하는 입장은 분명 편향된 것이지만, 그 역으로 덮어놓고 오히려 프랑스가 압제자였다는 해석 역시 편향되기는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굳이 이 작품의 내용을 한국인의 감성에 맞게 번안한다면 일제의 강점이 종식되었지만, 한국은 해방되지 못하고 중국(또는 미국이라도 좋다... 하여간 다른 외세)에 의한 식민통치를 받게 되었다는 가상역사에 맞춰 번안하는 정도가 적당할 것이다. 애초에 국가 개념이 비교적 명확하게 나뉘던 동아시아의 관점에 알자스-로렌 지방의 역사를 대입하는 것 자체가 오류의 근원이다.

4 첨언

어쨌든 일제강점기를 연상시키는 내용 때문에 한국에서 큰 호응이 있었고 이것이 실제와는 다르다는 논란 또한 분명히 있었다. 판단은 각자의 몫이다.

한양대학교 사학과 임지현 교수에 의하면 국외에서는 한국에서 왜 이 작품이 명작으로 칭송받는지 의문이라는 반응이라고 한다.

어이없게도 알퐁스 도데의 장남 레옹 도데는 2차대전 나치의 앞잡이로 활동했다.(...)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마지막 수업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div></div>
  1. 동 작가의 소설 당구 게임에 나온 인물. 역시 보불전쟁이 배경이다.
  2. 이 지방 태생의 유명한 인사인 슈바이처독일인이라는 이유로 프랑스에서 포로생활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