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디 워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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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y Warhol, 1928년 8월 6일 ~ 1987년 2월 21일

1996년작 '나는 앤디 워홀을 쏘았다.'에서는 사고 후유증으로 1978년에 사망한 거로 되어있지만 틀린 말이다.

An artist is somebody who produces things that people don't need to have.

예술가는 사람들이 가질 필요가 없는 물건을 만들어내는 사람이다.

1 개요

팝 아트의 거장

미국의 화가, 판화가, 예술가로 팝아트의 기수. 그외에도 락 앨범의 제작 및 영화제작도 다뤘다. 본명은 앤드루 워홀라 주니어(Andrew Warhola Jr.) 슬로바키아인이었던 아버지의 이름이 안드레이 바르홀라(Andrej Varhola)였으나, 미국으로 이민 오면서 영어식인 Andrew Warhola로 바꾸었다. 예술가는 배고픈 직업이라는 사회의 인식과 달리 현대미술에서 예술적으로, 대중적으로 성공한 예술가.

2 생애

펜실베이니아피츠버그에서 슬로바키아(당시는 체코슬로바키아) 이민계의 아들로 태어났다. 카네기 멜론 대학에 진학해 광고 예술을 배워 1949년에 졸업. 그리고 1952년에는 신문광고 미술부문의 아트 디렉터스 클럽상을 수상했다. 이후 상업 디자이너로 일하다가 전업 예술가로 전직했다. 유명한 자신만의 작업실인 '팩토리'를 만들어 지인들을 불러모아 사교장처럼 만들고 각종 기행을 벌이기도 했다.

1960년, 그는 미술의 세계로 발을 옮겨서 배트맨, 딕 트레이시, 슈퍼맨 등의 만화들을 모티브로 작품을 제작했지만, 로이 릭턴스타인의 팝 일러스트레이션을 접한 뒤에 여기서 손을 뗀다. 1961년, 33세의 그는 캠벨 수프의 캔이나 달러 지폐를 모티브로 해 팝 아트를 탄생시켰다. 언제나 대중적인 화제를 선택했는데 마릴린 먼로가 갑자기 죽자, 그걸 소재로 사용해서 작품을 대량생산한 것으로도 유명. 화에 태운 잉크를 종이에 전사하는 브로테드 라인이라는 대량 인쇄 방식을 발명한 것도 워홀이다.

그런데 각종 일과 사정에 쫓겨 사생활, 대인관계에서는 힘들어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벌인 일만 보면 겉보기에는 상당히 난잡한 바람둥이 같이 보이지만, 사실은 여러모로 내성적인 성격이었던 것 같다. 어렸을 때부터 내성적인 성격이었다고. 지하실에서 어머니께서 사준 필름 사진기와 인화기로 사진을 찍어서 인화하는 것이 취미였다고..

2.1 저격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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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6월 3일, 40세에 접어든 그는 전남성 말살단(S.C.U.M. /Society for Cutting Up Men)의 발레리 솔라나스(1936~1988)라는 여성에게 권총으로 피격받는다. 이 솔라나스란 인물은 황당한 인물로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했지만 남의 집 옥상이나 호텔에서 살고 있었으며 망상에 사로잡혀 지로디아스와 워홀이 자신을 몰아내려 결탁한다고 생각하곤 그를 저격했다.

워홀을 쏜 뒤로 정신이상자로서 3년동안 교도소에서 지낸 그녀는 1971년 석방 이후에도 워홀을 죽인다고 말하여 정신병원에 갇혔다. 이렇게 여러 번 입원과 퇴원을 되풀이하던 끝에 사회로부터 미친 여자로 무시당했다. 페미니스트 예술가 울트라 바이올렛은 늘그막 그녀를 만났는데 집도 없이 자서전과 여러 책을 낸 수익금으로 여전히 여러 호텔을 오고가며 어렵게 살고 있었다고 한다. 1987년 워홀이 죽고나서 그녀와 만난 바이올렛 회고에 의하면 솔라니스는 여전히 워홀을 죽여야 한다는 말을 하는 통에 바이올렛이 워홀은 이미 병으로 죽었다는 말을 하자 못 믿어했다. 바이올렛도 솔라니스에 대하여 망상증이 심하여 남의 말을 듣지 않는다며 그녀를 평가했다. 결국 1988년 한 호텔에서 돌보는이 없이 갑자기 폐렴으로 죽는다. 죽기 얼마 전까지도 그녀는 여전히 워홀을 어찌 죽일까 소리만 했다.

이후 발레리 솔라나스를 남성 우월주의의 희생자이자, 이에 저항한 영웅으로 그리는 작품들이 다수 발간되었다. 물론 이중 일부는 솔라나스 본인이 쓴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발레리 솔라나스를 미화한 영화 '나는 앤디 워홀을 쏘았다' 실상은 전형적인 정신병 환자의 망상으로 일어난 불행한 사건이다. 본래 강력한 권력자들이 자신을 음해한다는 망상은 내 귀에 도청장치처럼 망상증의 가장 대표적인 증상 중 하나이다. 그러나 솔라나스는 아무리 좋게 평가해도 정신이 나가서 미친 짓을 한 불쌍한 환자이지, 영웅으로 그리는 것은 살인미수를 저지른 범죄자를 옹호하는 헛소리에 불과하다.

2.2 죽음

1987년 2월 21일, 뉴욕의 코넬 의료센터에서 담낭 수술을 받은 다음날 상태 악화로 60세라는 나이에 심장마비로 눈을 감았다. 죽고나서 워홀의 침실이 공개된 적이 있는데, 워홀의 기행과 명성에 걸맞지 않게 독실한 신자 할머니네 방같이 검소했다고.

본래 그는 예술은 대중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생각으로 작품을 대량 생산해서 싸게싸게 팔았다. 허나 정작 그가 죽고나서 그의 작품이 세계에서 제일 비싼 예술품이 되었다는 점이 아이러니.

3 평가

하나만 찍어도 예술로 인정받는 상당히 매니악한 현대미술을 비꼬기 위해 일부 사람들이 '앤디 워홀이 하면 천재라는거냐'라며 비꼬곤 하는데, 선구자라는 점에서 천재 맞다. 특히 워홀의 작품은 이렇게 해석해도 맞는 것 같고, 저렇게 해석해도 맞는 것 같은 면이 있어서 굉장히 다양한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 현대미술에서는 이렇게 작품 하나가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이를 해석해낼 수 있는 걸 더 가치있는 것으로 치기 때문에 워홀이 인기가 있는 것이다.

3.1 의외의 진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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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인들은 팝아트를 그냥 당대 사회에서 유행하는 것들을 추려다 작품으로 만들면 되는 것 정도로 취급하지만, 의외로 워홀의 팝아트는 더 심층적인 의미가 있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실제로 워홀이 한 작품 중에는 <13명의 수배자들(thirteen most wanted men)>같이 당대의 흉악범죄자들을 벽화로 만들거나, 언론에 보도된 인종범죄 사진을 <마릴린 먼로>에서 그랬던 것처럼 여러번 병치해서 프린트 하기도 했다. 이런걸 보면 단순히 가벼운 흥미거리로 당대 사회 유행을 취급한건 아닌 모양이다. 일부 평론가들은 비슷한 프린트들을 반복하는 워홀의 수법이 기술발전으로 이미지가 대량 복제되면서 정작 개별 사건이나 인물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게 된 현대사회를 풍자한 것이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특히 나치 독일 때문에 진지할 수밖에 없는 독일에서는 의외로 이렇게 워홀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런데 확실하진 않다. 워홀 자체가 자기 작품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말하지 않았기 때문. 기자가 '이 작품은 어떤 의미인가요?' 하고 물으면, 되레 역으로 기자에게 '당신은 이 작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라고 묻고, 기자가 자신은 이렇게 생각한다고 말하면, 그것도 일리가 있군요 하고 끝내는 식이라고.능구렁이인가? 말투 자체도 뭔가 나른해서 정작 워홀이 정확히 뭘 의도하고 저런 짓을 한건지는 아무도 모른다. 근데 또 그 모호한 그리고 기묘한 스탠스가 사람들의 논쟁과 관심을 끌어들여 예술적으로 성공한 것이기도 하다. 은근히 워홀은 그런 면에서 이미지 관리를 잘한 편이다.

3.2 영화

그가 제작에 참여한 영화도 있는데, 하나같이 실험적이어서 대중적이지 않다. 먹는 장면, 자는 장면[1], (검열삭제),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2]의 모습 등 지극히 일상적이고 평범한 장면을 '수십시간동안' 찍고 그대로 틀기도 했다고
사실 먹방의 원조시다
후대의 평론가들은 이를 두고 편집에 의해 흥미로운 부분만 발췌되는 영화나 방송의 실태에 반대한 것이라는 의견이 있다.
참고로 이 영상은 매콜리 컬킨이 패러디했다.#
이정재의 버거킹 cf가 생각난다.

        • 이라는 제목(또다른 제목은 별 네개(Four Stars), 24시간 영화)의 영화를 1967년에 만들었는데 총 러닝타임은 18시간 20분.

1974년에 앤디 워홀의 프랑켄슈타인(원제는 Flesh For Frankenstein)을 제작했는데 3D로 제작됐다. 토니노 게라[3] 등이 각본을 썼고, 카를로 폰티 등이 제작을 맡기도 했다.

BAD라는 제목의 범죄물 영화를 1977년에 제작 총지휘를 맡기도 했는데, 한 여자가 전화를 받는데 귀찮게했다고 아기를 고층빌딩에서 던지는(그것도 잠깐이지만 피와 시체를 보여준다!) 충격적인 장면이 나오는 괴작 아닌 괴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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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Blood For Dracula>가 '앤디 워홀의 드라큘라'로 개봉되었다. 디자인쪽이나 미술쪽으로 참가했다고... 내용은 처녀의 피만 먹고사는 드라큘라가 어느 한량과 정력대결(...)을 벌인다는 내용. 황당하게도 비토리오 데 시카가 배우로 나온다.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시계태엽 오렌지스탠리 큐브릭보다 먼저 영화화했다. 제목은 비닐.

4 여담

"미래에는 누구나 15분간 유명해질 수 있다.[4]"라는 말로 유명하지만 이 말은 워홀 본인이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찍은 사진사가 한 말이었다고 워홀이 직접 언급하였다. 오디션 프로그램이 성행하고, 인터넷의 발달로 누구나 쉽게 UCC를 이용해 자신을 불특정 다수에게 보여줄 수 있는 오늘날에 진정으로 어울리는 명언이 아닐 수 없다. 다만 본래 의미는 방송에 범죄자들의 일거수일투족이 보도되는 것을 보고 한 말이다. 즉 누구나 범죄를 저지르면 방송에서 15분간 유명해지는 당시 미국 사회의 새태를 비꼰 말인 셈. 뭐 현대사회란게 사가와 잇세이처럼 자기가 저지른 범죄에 대한 책을 내는 시대이니 이는 미국에만 해당되는 사례는 아닐 것이다. 테드 번디강도얼짱 같은 사례도 마찬가지.

출생지인 피츠버그에는 앤디 워홀 미술관과 앤디 워홀 다리가 있다. 워홀이 제작에 참여한 영화를 정기적으로 상영해준다. 근데 한 작품 복사해서 여러개로 파는 예술을 했던지라 MoMA테이트 모던에 오히려 유명한 작품이 많다. 격한 빠심이 돋지 않는다면 굳이 가볼 필요는 없다.

그리고 위 사진 속 워홀의 저 머리, 가발이다(...). 현재는 앤디 워홀 미술관의 소장품. 워홀은 대머리였다. 20대에 머리가 벗겨지기 시작했고, 20대 후반부터 은발머리가 마음에 들었는지 은발 가발을 썼다. 그래서 젊었을 적 사진을 보면 얼굴은 젊은데 머리는 하얗다.

여러 여자와 염문을 뿌리고 다녔지만 게이였고 평생 동정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끔찍한 효자라서 아버지가 돌아기시자 바로 어머니를 자신의 집으로 불러서 모시고 살았다. 그리고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어머니가 아버지 사후에 혼자 교회다니시기 불편할까봐 교회를 같이 다녔다. 오죽했으면 그 당시 사람들이 일요일 새벽까지 문란한 파티에 있던 워홀이 몇 시간 뒤에는 어머니하고 교회에 있다고 까댔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한 워홀의 침실 이야기도 그렇고 실제로는 상당히 독실하고 검소한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괴짜 코스프레?

우주형사 샤리반의 장난감 표지를 디자인한 적이 있다.

한국에서는 "유명해져라. 그러면 당신이 을 싸도 사람들은 박수를 보낼 것이다(Be famous, and they will give you tremendous applause even when you are actually pooping)"란 말이 앤디 워홀이 했다고 떠도는데, 한국에서 만들어진 말이다.근데 이것도 헷갈려서 똥을 싸라. 그러면 유명해져서 사람들이 박수를 보낼 것이다라고 아는 사람들도 있다. 근데 틀린 말은 아닌게 길거리 같은데서 똥을 싸면 유명해지긴 한다. 물론 인터넷에서. 위에 서술했듯 워홀은 모호하게 말하는 편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단정적이고 직설적인 어록을 남기지는 않았다. 하지만 1978년에 그는 실제로 오줌을 싸서 작품을 만든 적이 있다.(...) 여담의 여담으로 자신의 대변을 깡통에 밀봉하여 친필 서명과 시리얼 넘버까지 매겨 출품한 예술가가 실존했었다.

사실 MIB 직원이고 일에 지쳐서 그만둔거다

데이비드 크로넌버그의 컬트 SF 공포영화 비디오드롬을 80년대의 시계태엽 오렌지라고 평하기도 했다.

데이비드 보위가 영화에서 앤디 워홀로 나온 적이 있는데, 얼굴은 그리 닮지 않았지만 평소 파격과 기행을 일삼던 보위인지라 분위기는 많이 닮았다.
  1. 원래 브리지트 바르도가 출연하기를 원했는데, 대신 그의 애인 존 조르노를 찍었다., 그것도 나체로. 1964년 1월 17일에 첫 상영을 했는데 9명이 관람하고 2명은 1시간 정도가 됐을 때 나갔다. 이 영화를 상영 당시에는 무성영화라서 계속 록 음악을 틀었다고 한다. 이 영화에 평론가들은 관심을 나타냈고, 처음에는 500명에 달하던 관객 수가 상영 도중 한 사람이 일어나서 무대로 올라가 큰 소리로 "일어나라!"고 소리치며 사람들을 선동하자 약 200명 가랑의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극장측에 돈을 물러달라고 소동을 피우기도 했다. 그러나 인내를 가지고 영화를 끝까지 관람한 엉덩이가 무거운 사람들도 약 50명 정도 있었다.
  2. 총 8시간 5분 짜리다. 대략 새벽 3시에 찍었다고 한다.
  3.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페데리코 펠리니, 안드레이 타르콥스키 감독의 작품 등등 다수의 각본을 썼다. 2012년 3월 21일에 항년 92세로 타계했다.
  4. In the future everyone will be world-famous for 15 minut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