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탠리 큐브릭


[1]
이름스탠리 큐브릭[2](Stanley Kubrick)
국적미국
출생1928년 7월 26일, 뉴욕 맨해튼
사망1999년 3월 7일, 영국 세인트올번스
신체169cm

1 소개

완벽주의, 냉소주의, 테크놀로지의 거장
시대를 앞서간 장르와 영상의 천재 감독

2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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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살 어린 동생 바바라(Barbara Kroner / 1934년-)와 함께한 사진

스탠리 큐브릭은 1928년 뉴욕자치구 맨해튼에서 의사 제이콥 레오나르드 큐브릭(Jacob Leonard Kubrick / 1927년-1985년)과 그의 아내 세이디 거트루드 큐브릭(Sadie Gertrude Kubrick / 1927년-1985년) 사이에서 태어났다. 유대인이었으나, 일찍이 그의 부모가 개종한 것의 영향으로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3], 종교와 연관된 스탠리의 발언들은 그를 무종교로 여기게 한다. 부모의 고향인 오스트리아(오스트-헝가리 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이 더 강했으며, 발레리나였던 두 번째 아내는 오스트리아인이었다.[4]

유대인 단체의 자금 기부 요청을 거부한 일이 있었으며[5], 할리우드를 움켜쥔 유대인들 횡포(상업적으로 많은 인재를 억누른다는 뜻)가 심하다는 발언으로 반유대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이에 유대인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는 그 비난에 반론하여 큐브릭을 옹호했다.[6]

뉴옥 브롱스에서 자랐으며, 어린 시절 사진작가와 재즈 드러머를 꿈꾸었다. 1940년에 공간의 변화로 스탠리의 낮은 학업 성적의 개선을 유도하고자 한 아버지는 그를 캘리포니아의 도시 패서디나에서 그의 삼촌과 거주하게 했다. 브롱스로 돌아온 이후 1941년부터 1945년까지 다닌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고등학교에서의 성적은 좋지 않았으며, 제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참전군인들의 대거 복귀가 더해져 대학교 입학을 포기했다.


1949년, 잡지 《LOOK》에서 일할 당시의 그의 사진

16세에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사망에 다룬 사진 세트를 제작했으며, 17세에 이를 실은 잡지 《LOOK》의 견습기자가 되었다. 견습기자 기간에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청강생으로 수업을 들은 적이 있고, 근대미술관의 필름도서관에서 영화에 애정을 가져 연출의 계기를 만들었다. 1951년, 자신이 취재한 복서 월터 카르티에를 다룬《시합의 날 Day of the Fight》을 시점으로《날으는 목사 The Flying Padre》(1951), 《항해자 The Seafarers》(1953)까지 사진기자 기간에 세 편의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1953년, 자신 역시 관여한 하워드 새클러(Howard O. Sackler / 1929년 - 1982년)[7]시나리오 '덫 The Trap'를 토대로 장편영화이자 반전영화 《공포와 욕망》을 연출, 제작, 촬영, 편집[8]했으나[9], 흥행에 실패했다.

'미노타우로스 프로덕션 Minotaur Productions'이라고 이름 지은 본인의 회사를 설립하여 지원을 획득한 후, 장편 영화를 계획해 1953년 7월, 시나리오 '스파이더 게임 Along Came a Spider'을 영화제작관리국(PCA)에 제출했으나, 건전하지 않다는 이유로 승인을 받지 못했다. 때문에 자극적 요소의 일부를 배제, 수정한 스토리라인을 구상했으며, 전작 《공포와 욕망》의 작업을 함께한 하워드 새클러가 큐브릭의 아이디어를 토대로 시나리오 '키스 미, 킬 미 Kiss Me, Kill Me'를 작성했다. 제작 단계에서 영화의 제목은 수정되어 '요정과 미치광이 The Nymph and the Maniac'를 거쳤으나, 1955년, 《킬러스 키스 Killer's Kiss》라는 이름으로 개봉되었으며, 작품에서 큐브릭은 이전과 유사한 연출, 제작, 촬영, 편집 등 다수의 역할을 맡았다.

이후 ‘해리스[10]·큐브릭 픽처스’를 설립하고, 1956년, 영화 《킬링》을 연출, 1957년, 배우 커크 더글라스를 기용한 《영광의 길》을 연출했는데, 영화 《스파르타쿠스》에 출연하게 된 더글라스의 압력으로, 예정되어 있던 감독을 제치고 큐브릭이 《스파르타쿠스》에 기용되었다. 큐브릭은 1960년에 완성된 이 영화를 부끄럽게 여겼으며, 제작 과정에서 최종 편집권과 각본을 수정할 권한을 갖지 못하는 등의 제약을 받았다고 했다. 큐브릭은 자유로운 환경을 추구하여 할리우드를 떠나 영국으로 이동했고, 이후 영화를 미국의 자본과 영국의 기술력이 혼합된 형태로 제작했으며, 반드시 프로듀서를 겸했다.

1962년,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소설을 영화화 한 《로리타》를 연출했다. 나보코프 본인이 직접 시나리오를 작성했으나, 수정과 함께 상당한 부분이 소설과 달라졌으며, 배우는 모두 영국인으로, 이로 인해 원작에서 드러난 미국의 사회를 겨냥한 비판에서 느낄 수 없었던, 노쇠해가는 영국 사회에 대한 조사(弔辭)를 일으킨다는 평가가 나타났다. 이 작품은 소아성애를 다루었으며, 교황청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1964년에 연출한, 블랙 코미디로서 《로리타》와 이어지며, 미래 시리즈 3부작의 시발점이자 큐브릭의 최전성기의 시작인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러브[11]냉전을 다루었으며, 주류에서 절대적인 위상의 걸작으로 추앙받는다.[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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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촬영 당시 그의 모습

1968년, 영화 역사상 가장 환상적인 화면의 걸작으로 꼽히는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4년 만에 완성했다. 컴퓨터 그래픽스를 활용할 수 없었던 시기에 아날로그 기술만으로 환상적인 시각효과를 연출했다. NASA에서 지원한 탐사자료가 기반이 되었기에 인류가 에 가기 전에 만들어졌음에도 우주 공간과 관련된 장면들은 대단한 사실성 역시 지닌다. 영화의 여러 요소가 이후에 등장한 수많은 매체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교황청 역시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하고 놀라운 상상력을 발휘한 것을 언급하며 호평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다룬 영화[13]를 만들고자 했으나, 소련의 영화감독 세르게이 본다르추크의 영화 《워털루 Waterloo》(1970)의 흥행 실패가 상당한 영향을 끼쳐 제작이 무산되었다.

1971년, 사회비판과 염세주의가 극에 달한 영화 《시계태엽 오렌지[14]를 연출하여 큰 논란을 일으켰다.[15] 높은 수위의 폭력성과 선정성으로 인해 한국에서는 정식 개봉을 하지 못했지만, DVD블루레이는 출시되었다. 그래도 볼 사람은 비디오테이프에 자막까지 넣어서 오래전에 다 봤다.

1975년, 사극배리 린든》을 연출했으나, 흥행에 성공하지[16] 못했다.[17] 상업성을 고려하게 된 큐브릭은, 1981년, 스티븐 킹의 소설을 원작으로 채택하여[18] 영화《샤이닝》을 연출해 흥행과 비평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1987년, 영화 《풀 메탈 재킷》을 연출했다. 이 영화는 마찬가지로 베트남 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 《플래툰》의 개봉 시기와 큰 간격을 갖지 않아 비교에 의한 악영향을 받았다.[19]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과 함께 영화 《A.I.》를 기획했다. 영화가 본인의 성향[20]과 맞지 않다고 여겨 스필버그에게 감독직을 양도하고자 했으나, 이에 대해 스필버그는 그와 다른 견해를 가졌고, 1995년에 큐브릭이 《A.I.》의 연출을 맡기로 결정되었다. 2001년, 영화는 1999년에 사망한 큐브릭을 대신한 스필버그의 연출로 개봉되었으며, 큐브릭의 특징과 의도 역시 짙게 배어 있다.

풀 메탈 재킷》 이후 상당한 시간이 지난 1999년, 당시 부부 관계였던 톰 크루즈니콜 키드먼이 주연으로 출연한 영화 《아이즈 와이드 셧》을 연출했다. 스탠리 큐브릭은 최종 편집 작업 후, 1999년 3월 7일, 영국 세인트올번스의 자택에서 심근경색으로 생을 마감했다.

3 성향

스탠리 큐브릭은 영화 역사상 가장 환상적이고 독창적인 영상을 만들어낸 감독으로 꼽힌다. 또한 끊임없이 새로운 기법들을 시도했는데, 《배리 린든》에서는 영화의 시대적 배경인 17세기의 상황을 고려해, 조명에 촛불만을 사용한 기법으로 화제가 되었고, 《샤이닝》에서는 스테디캠이란 기법을 도입하기도 했다.[21]

완벽주의로 인해 영화를 완성하는 데에 상당한 시간을 소요했다. 《A.I》를 기획할 때에는 촬영 기간 내에서 어린 배우의 신체적 변화가 나타날 것을 우려해[22] 로봇을 제작[23]하자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본인이 설정한 방향에 대한 고집 역시 상당해 자신의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과 마찰을 빚는 경우가 잦았다. 커크 더글러스가 이에 해당되어 《스파르타쿠스》를 작업한 이후 "Stanley Kubrick is a talented[24] shit."이라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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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이닝》 촬영 당시 잭 니콜슨을 카메라 앞에 세워두고 그를 흐릿하게, 자신과 딸을 선명하게 담아내는 장난도 했다.

《샤이닝》을 함께한 잭 니콜슨은 촬영 기간 동안 대체로 그와 좋은 관계를 가졌으나[25], 마찬가지로 불만을 갖고 "큐브릭은 재촬영을 해야 하는 이유도 설명하지 못하는 놈이다."라고 했으며, 큐브릭은 이에 대해 "많은 재촬영을 감행해야 니콜슨의 제대로 연기를 볼 수 있었다."는 말을 했다.[26] 아래는 《샤이닝》 스페셜 에디션 DVD에 나타난 이와 관련된 언급이다.

큐브릭의 ‘무한 반복 테이크(Take)’ 신공은 (《샤이닝》 촬영 당시) 69세였던 스캣맨 크로더스에게는 특히 가공할 만한 고문(?)이었다. 예컨대, 딕 핼러런과 대니가 부엌에서 《샤이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을 보자. 큐브릭은 영화에서 약 7분가량 계속되는 이 장면의 촬영을 무려 148 테이크에 걸쳐 반복했다. 물론, 언제나처럼 큐브릭은 ‘왜 같은 연기를 그렇게 많이 반복해야 하는지’, ‘뭐가 잘못됐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았다. 할로란 역을 맡은 크로더스는 (다행히) 별다른 불평 없이 큐브릭의 지시에 순순히 응했지만, 재촬영이 100회를 넘기자 서서히 인내심이 ‘고갈’되어 갔다. 큐브릭은 148 테이크 째를 마치고 — 스스로도 ‘너무 가혹하다’라고 느꼈는지 — 촬영을 중단하고 휴식을 취했는데, 휴식 도중 크로더스는 개릿 브라운에게 다가와 이런 말을 던졌다. “와! 큐브릭이 사람 잡네요!”[27]
평론가이자 전기 작가인 존 백스터(그는 《샤이닝》 SE DVD에서 개릿 브라운과 함께 음성해설을 맡았다)는 큐브릭이 배우들을 다루는 방식에 대해 이렇게 같이 설명했다. “최초에 배우가 최선을 다해 연기를 하면 큐브릭은 ‘좋았어요. 한 번 더 갑시다’라고 말하고는, 같은 연기를 몇 차례나 반복시킨다. 시간이 지나갈수록 배우들은 ‘오버’하는 연기를 하게 되고, 12~14 테이크 정도에 이르면 점점 지치기 시작하여 힘을 아끼려고 한다. 큐브릭은 그래도 연기를 계속 반복하라고 지시한다. 마침내 배우가 더 이상 다른 연기를 보여줄 수가 없을 지경이 돼도 큐브릭은 재촬영을 계속 반복한다. 그리고 수십 테이크 째에 이르면, ‘맛이 간’ 배우들은 평소 하지 않던 기괴한 행동을 하기 시작한다.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짓고 괴성도 질러가며 말이다. 《샤이닝》에 삽입된 잭 니콜슨의 광기어린 연기는 모두 ‘그 단계’의 테이크라고 보면 된다.”

셜리 듀발은 큐브릭에 대해 상당히 긍정적인 발언을 한 바 있으나, 《샤이닝》을 촬영할 당시의 관계는 나빴으며, 큐브릭에게 욕설이 섞인 비난을 듣기도 했다. 《아이즈 와이드 셧》 촬영 당시 톰 크루즈니콜 키드먼은 큐브릭으로 인해 상당한 정신적 고통을 겪었다고 하며, 부부였던 두 사람의 불화의 진행에 큰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까지 제기되었다. .

시계태엽 오렌지》의 주인공 알렉스 드라지(Alex Delarge)를 연기한 맬컴 맥다월의 경우, 그가 표출한 큐브릭에 대한 불만은 당시의 불화가 아닌, 일이 끝나자 친밀한 관계를 가졌다고 여겨진 큐브릭이 자신과 단절했다는 것이다. 맥다윌은 촬영 기간에 그와 함께한 탁구체스를 좋은 유대의 증거로 여겼으나, 그보다 큐브릭과 오랜 관계를 가진 이들은 큐브릭이 오래전부터 작업을 함께 하는 배우들을 대상으로 한 스포츠는 큐브릭이 승리에 큰 자신을 가졌던 것으로, 게임에 패배한 배우가 자신의 지시를 충실히 이행하는 데에 영향을 줄 것이라고 판단한 전략으로 여긴다. 대다수의 영화감독과 배우가 촬영이 끝난 이후에 더 이상 관계를 유지하지 않는 것은 영화계의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스탠리 큐브릭 장르의 재발명》에 수록된 인터뷰에 보면, 찌라시들이 소문낸 대표적인 소문이 연기자와의 불화라고 한다. 실제로는 연기를 지시하거나 강압하지 않고, 대부분 영감을 주는 선에 머무른다. 여러 번 테이크를 내면, 오히려 배우들이 안심하게 되는 효과도 있다. 한두 번만 하면, 이게 잘한 건지 못한 건지 모르는데, 여러 번 하면 이전까지 마음에 들지 않았거나 꺼림칙하던 부분들을 고치며 최선을 다하게 되기 때문에 배우들도 좋아한다. 실제로 잭 니콜슨은 감독이 수백 번 테이크를 갔다는 건 거짓말이라고 발언했다. 그리고 그는 항상 큐브릭의 차기작 《나폴레옹》에 큐브릭이 자기를 불러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게다가 비디오 같은 매체도 표지까지 자신이 보고 마음에 들 때까지 내지 못하게 했다. 그것은 해외 출시판도 예외는 아닌지라, 한국어일본어를 몰랐지만, 완벽주의답게 해당언어 유학생을 고용하여 철저하게 점검했다고 한다. 그밖에도 한국판 비디오와 일본판 비디오에 걸쳐, 저 멀리 터키판 비디오까지 정식으로 출시하기 전에 표지를 받아서 자기 마음에 들 때까지 다시 내라고 요구했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한국어판 비디오로 낸 우일비디오 측만 해도, 큐브릭 감독이 마음에 안 든다고 4번이나 퇴짜를 놓아, 우일비디오는 계속 표지를 새로 만들어서 큐브릭에게 확인을 받아야 했다. 터키 같은 경우는 12번씩이나 거부하여, 그 비디오 업체는 판권비보다 비디오 표지를 또 만들고 검토 받고 하는 돈이 더 많이 들겠다면서, 그 이후 다시는 큐브릭 영화를 계약하지 않았다는 후문까지 있다.

아무튼,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기행과 비밀, 완벽주의 때문에 악명(?)이 과장된 측면은 꽤 있다. 위에서도 잠깐 나온 이야기지만, 스티븐 스필버그와 같은 업계의 유명한 감독들과의 친분도 꾸준히 유지했고, 아서 C. 클라크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때 함께 작업한 이후[28] 큐브릭이 죽기 전까지 쭉 친분을 유지했다고 한다. 큐브릭이 그렇게 이상한 사람이었다면, 늘 함께 일하는 촬영 감독과 조력자들[29]이 있었을 리 없고, 《시계태엽 오렌지》 이래로 늘 워너브라더스가 그의 영화를 제작하고 배급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허나 아무리 괴팍한 사람이라도 가까운 사람 한 둘즈음은 있으니 마냥 그렇진 않을지도

그는 또한 공들여 만든 세트나 소품 등을 일단 촬영이 끝나면 전부 부숴 버리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나중에 싸구려 영화에 재활용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고 하는데, 덕분에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촬영에 사용된 디스커버리호를 비롯한 각종 우주선들은 원형이 남아있지 않아, 오늘날에도 그 흔한 프라모델 하나 만들 수가 없는 상황이다(…). 으앙, ㅠㅠ 스페이스 오디세이 덕후는 웁니다.

4 미국내 흥행실적

스탠리 큐브릭이 감독을 맡았던 영화들이 워낙 예술영화라는 인식이 있어, 큐브릭의 영화는 흥행을 못 했다는 오해가 많은데 실제는 그렇지 않다.

제작비: 약 180만 달러
흥행: 944만 272 달러

제작비: 약 1,050만 달러
흥행: 5,671만 5,371 달러

제작비: 약 220만 달러
흥행: 2,658만 9,355 달러

제작비: 약 1,100만 달러
흥행: 2천만 달러

제작비: 약 2,200만 달러
흥행: 4,401만 7374 달러

제작비: 약 3,000만 달러
흥행: 4,635만 7676 달러

제작비: 6,500만 달러
흥행: 5,563만 7680 달러(유일하게 흥행 실패작, 그래도 월드 와이드 흥행 성적 1억 6,000만 달러로 본전은 뽑았다.)

이걸 봐도 알겠지만, 1970년대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와 함께, 자신이 만들고 싶은 영화 만들면서 돈 번 감독으로 꼽을 수 있다. 저 가운데 흥행 성적(제작비 대비)이 가장 낮은 《배리 린든》도 적어도 본전은 뽑았다. 풀 메탈 재킷도 흥행은 부진했으나 호평과 같이 비디오 판매같은 2차 시장 선전으로 역시 수익을 거둬들일 수 있었다. 오히려 큐브릭이 만드는 영화마다 흥행을 한 것 때문에,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찍은 직후까지의 큐브릭은 공공연하게 흥행 운이 더럽게 없었던 《오슨 웰스》에 비교되면서, 예술가인 척 하는 상업 감독이라는 평론가들의 혹평과 공격에 시달렸고, 큐브릭도 평론가들의 공격에 날카롭게 반응하곤 했다. 예술가들은 가난하고 돈 못 벌어야 한다는 얘기냐 뭐냐?

5 기타

말년에는 거의 은둔자가 되어, 영국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을 정도로 괴팍한 성향이 되어버렸다. DP의 칼럼니스트 김정대는, 그의 말년이 미국의 사업가 하워드 휴스가 연상될 정도라고 할 정도였다. 이러한 일례로, 마지막 작품이 된 《아이즈 와이드 셧》의 배경이 되는 미국 뉴욕의 번화가는, 뉴욕에서 찍어 온 사진을 참고하여 영화 세트장을 재구성한 것으로, 실제로는 영국의 영화 세트장에서 찍었다. 즉, 큐브릭은 《아이즈 와이드 셧》 촬영을 위해 절대로 미국에 가지 않았다. 사실 이러한 성향은 이미 《시계태엽 오렌지》를 찍을 때부터 드러났다.

미묘하게 타이밍이 어긋나서 기획이나 제작이 좌초된 영화가 몇 있었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이후에 나폴레옹을 영화화할 예정이었지만, 비슷한 영화인 《워털루》가 대차게 말아먹은 탓에, 투자자들이 투자를 포기해서 《나폴레옹》 제작은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 또 1990년대에는 대량 학살을 소재로 한 《아리안 페이퍼즈》라는 영화를 기획하고 있었지만, 비슷한 소재의 영화인 《쉰들러 리스트》가 나와 버리는 바람에 결국 제작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여기에는 큐브릭의 아픈 기억이 크게 작용했는데, 《풀 메탈 재킷》을 만들었을 적에 비슷한 소재의 영화인 《플래툰》이 나와 버려서 두 영화가 서로 비교당하고, 흥행(그래도 어느 정도 성공했지만)과 아카데미 수상을 다 날려 버린 경험이 있기 때문(저 년도의 아카데미는 《풀 메탈 재킷》이 수상했어야 한다는 의견도 상당하다.)

원래는 비행기를 직접 조종하고 조종사 면허증까지 있었지만, 비행기를 조종하던 중에 사고를 낸 적이 있었고, 잘 알던 카메라맨이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면서 그 카메라맨의 타 버린 카메라를 보게 된 이후로는 비행 공포증이 생겨서, 비행기 타는 것을 극도로 꺼려했다. 이 때문에 큐브릭은 영국에서 영화를 찍게 됐다. 《배리 린든》이 영국 바로 옆의 아일랜드에서 로케이션을 한 외에는 대부분 영국에서 촬영했는데, 심지어 《풀 메탈 재킷》은 런던 부근의 폐공장에다가 수입한 야자수를 심어서 베트남같이 보이게 했을 정도(….)지옥의 묵시록》 같이 촬영하다 사람 여럿 잡을 일은 없었으려나…? 게다가 영상의 특수효과에 대해 제임스 캐머런 감독이 자문을 구하자, 런던으로 불러서 런던 교외의 집에서 캐머런과 만난 일도 있었다. 예외적으로 《샤이닝》을 찍기 위해서 미국에서 영화를 촬영할 것을 고려하기도 했지만, 결국은 영국에 정말 미국 호텔 같은 호텔을 짓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사실 그의 대표작은 죄다 영국에서 찍었지만, 반(反) 할리우드파 감독들의 소굴인 뉴욕파 감독으로 거론되기도 한다. 실제 뉴욕파의 거장인 이탈리아계의 마틴 스코세이지우디 앨런 등 뉴욕파와 교류가 깊었다. 또한 영국 출신인 리들리 스콧이나 테리 길리엄과도 상당히 친했다고.

앞서 말한 대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과도 친밀한 사이였고, 두 사람이 함께 《A.I》의 기획과 각본에 대해 의논했지만, 큐브릭은 비행 공포증이 있었고, 스필버그는 할리우드에서 바빴던 탓에, 결국 두 사람은 국제전화로 영화에 대해 의견을 나눌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스필버그는 어마어마한 국제전화료를 물어야만 했다고 한다.(…)

60년대 말에 《반지의 제왕》의 영화화 제안을 받았었다. 그것도 비틀즈 멤버들 주연으로.[30] 그러나 큐브릭은 책을 읽고나서 작품성은 인정했지만 당시의 기술로선 영화화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포기했다. 여담으로 《샤이닝》을 찍을 때 즈음의 모습이 후에 반지의 제왕을 영화화한 피터 잭슨의 전성기때와 매우 흡사하다. 잭슨이 반지의 제왕 찍을 때의 모습과 샤이닝을 찍을 때의 큐브릭을 비교해보면 움찔 놀랄 정도.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단편집 《파라다이스》에 실려 있는 작품들 중 '영화의 거장'이라는 작품에서, 이 사람을 풍자하기 위해 만들어진 듯한 패러디 인물인 '데이비드 큐브릭'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자신에 대한 모든 것을 비밀로 하는 신비주의 컨셉. 일단 작품상에서는 스탠리 큐브릭의 자손으로 나온다.

스탠리 큐브릭에 관한 양질의 정보를 다루고 있는 것들 중 《스탠리 큐브릭 - 영화 속의 인생》(Stanley Kubrick: A Life In Pictures) 이라는 다큐멘터리가 있다. 큐브릭 감독의 영화를 제작해오던 얀 할란이 2001년에 감독한 다큐멘터리인데, 2시간 20분짜리 다큐로 큐브릭 팬이라면 정말 재미지게 볼 수 있다. 내레이터는 톰 크루즈가 맡았다. 다큐를 보면 모두 큐브릭을 존경하고, 그의 죽음을 아쉬워하고 그런다. 다시는 그의 작품을 볼 수 없고, 다시는 그와 함께 작업할 수 없다는 것도 안타깝게 여기고, 그와 함께 했던 시간이 즐거웠다고도 하고. 물론 힘들긴 정말 오질 나게 힘들었다고도 하지만.(…)

《샤이닝》부터는 4:3 화면비를 고집했는데, 이미 1.85:1, 2.35:1이 극장가를 주름 잡은 지 한참 지난 이 시기에 4:3으로의 회귀는 확실히 특이하다. 《샤이닝》 이전에 4:3으로 촬영한 마지막 작품은 흑백영화 《영광의 길》이었고, 이후로 쭉 시네마스코프 화면비를 써왔다. 이후 출시된 DVD들은 위아래를 잘라내 억지 1.85:1로 출시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호기심이 무척이나 많아, 평상시나 영화 촬영 때 주변 지인들에게 별의별 질문들을 답변자가 답을 할 때까지 물어봤다고 한다.

음모론자들이 흔히 주장하는 내용이, '아폴로 달 착륙 화면은 사실 큐브릭이 CIA와 계약하여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촬영 중간중간에 섞어서 몰래 찍은 가짜 화면이다.'라는 것. 큐브릭이 만년에 영국을 떠나려 하지 않았던 것도, 암살되는 것을 두려워해서라고 한다. 이를 반박하는 측에서는, "스탠리 큐브릭이 착륙 화면을 찍은 것은 맞다. 다만 그의 완벽주의 성향 때문에 달에 직접 가서 촬영한 것이다"며 돌려 까기도 한다.

스탠리 큐브릭이 자신이 달 착륙 영상을 조작하였다고 발언을 한 인터뷰 영상이라는게 유튜브에 올라온 바 있는데, 여러 정황상 조작된 영상일 가능성이 높다.#

2015년 11월 29일부터 2016년 3월 13일까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현대카드 컬처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스탠리 큐브릭전이 열렸다. 해당 전시회는 유럽에서 시작해 전세계를 돌고 있는데 아시아에서는 처음이었다. 전시회 연계로 한국영상자료원에선 스탠리 큐브릭의 모든 영화를 상영하는 특별전이 열렸는데 주말에는 매진될만큼 호황이었다. 공짜라서 구하기 힘든 초기 작들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고 스탠리 큐브릭의 자손이 GV를 하기도 했다. 배리 린든 같은 경우에는 4K의 초고화질로 상영되었다. 영상원의 특별전이 종료되고는 서울과 부산의 CGV 아트하우스에서 일부 대표작들로 구성된 특별전이 열렸다.

6 스탠리 큐브릭의 작품들

따로 원작이 있는 것은 ★표시를 첨부하되, 원작의 제목이 다르면 제목을 따로 표기한다. – 혹여나 원작이 있는데 별기가 없으면 추가바람

딱 봐도 느껴지겠지만, 완벽주의 성향 때문에 작품과 작품 사이의 간격이 굉장히 긴 편이고, 그나마도 자꾸만 그 간격이 길어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6.1 나폴레옹 관련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후속작으로 예정됐던 나폴레옹은 모든 캐스팅, 대본 작업, 촬영지 선정이 마무리 되있었다.
나폴레옹 역엔 오스카 웨너, 조세핀으로 오드리 햅번이 예정되었으나 비슷한 시기 나폴레옹을 소재로한 소련 영화 '워털루'의 실패로 제작사에서 난색을 보여 프로젝트는 중단된다.

당시 스탠리 큐브릭이 나폴레옹을 준비하기 위해 읽었던 관련 서적만 만권이 넘어갔고 당시 조사한 자료들은 훗날 비슷한 시대의 영화 배리 린든을 만드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비록 1999년 사망할 때 까지 나폴레옹 작업은 다시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이미 대본, 의상 디자인 스케치, 촬영지 선정이 모두 되있었기에 현대에 이 프로젝트를 다시 재현하자는 움직임이 일어난다.

2013년 초, 생전 절친한 친구였던 스티븐 스필버그가 나폴레옹을 TV 시리즈로 제작하겠다는 발표를 하고 연말에는 스필버그 본인은 제작자로 빠지고 연출은 바즈 루어만[31]이 담당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방송국은 HBO

그러나 비슷한 시기에 워너브라더스에서 루퍼트 샌더스[32] 감독으로 나폴레옹을 소재로 한 영화를 만들겠다는 발표가 있자 프로젝트는 다시 중단되었다. 대본이 나온지 거의 50년이 되도록 세상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는 셈

2009년엔 나폴레옹에 대한 대본, 참고자료, 선정됐던 촬영지 및 의상 사진, 촬영 예정이었던 배우들의 스케쥴 표 등을 정리한 책 약 1000페이지 분량의 책이 발간되었다. 제목은 'Stanley Kubrick's Napoleon: The Greatest Movie Never Made (만들어지지 않은 최고의 영화)'
국내 정발은 되지 않았고 보려면 미국이나 유럽에서 구매해야 된다.

7 기행

큐브릭에게는 집착하는 대상이 유난히 많았다. 그중 하나가 활판술이다. 그는 서체에 관한 책을 엄청나게 많이 보유하고 있었다. 모든 영화 포스터에 푸투라체를 사용할 것을 고집했고, 스태프들과 밤새도록 다양한 서체의 장점에 대해 논쟁을 벌이곤 했다. 큐브릭이 좋아하고 집착하는 또 하나는 문구였다. 종이, 패드 ,상자 등 문구에 관한 모든 것에 집착했다. 그는 직원들에게 반드시 6인치:4인치 비율의 종이에만 메모를 하도록 명령했다. "스탠리는 6인치:4인치 크기가 메모하기엔 최적격이라고 생각했던 거죠." 직원의 말이다. 한번은 그가 좋아하는 특정상표의 잉크가 절판이 된다고 하자, 시중에 남아있는 잉크 백여 통을 모두 사들였다. 그는 또한 상자에 열광했다. 상자뚜껑이 열기 불편한 것에 짜증난 큐브릭은, 상자 회사에 연락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상자 4백 개를 주문, 제작한 적도 있었다. 큐브릭은 《딱따구리》 만화를 매우 좋아해서, 그의 모든 영화에 만화를 삽입하고 싶어 했지만, 딱따구리 만화가 월터 란츠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큐브릭은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겁이 많았는데, 특히 세균을 무서워해서 감기든 사람은 그의 촬영장에 접근 금지였다. 운전기사에게는 시속50킬로미터 이상으로 달리지 못하게 했다. 큐브릭은 아팠을 때 치료받을 의사를 선택하는 데에도 무척이나 까다로웠다. 모르는 의사에게 진찰을 받으려고 하지 않아서, 영국에 있을 때 브롱크스의 주치의 치과의사를 영국까지 부른 적도 있었다. 하지만 치과의사가 영국 의료면허증이 없었기 때문에, 미국 영토로 간주되어 미국 의료면허 효력이 발동되는 미국 대사관에서 치료를 받았다고 한다.

그는 동물 애호가였다. 《풀 메탈 재킷》 촬영 때 촬영장에서 사고로 토끼 가족이 죽은 사고가 일어났었는데, 이것에 몹시 화가 난 큐브릭은 그날 일정을 모두 취소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는 《2001:스페이스 오딧세이》 제작 동안 NASA의 화성탐사에 점점 피해망상증을 보였다. 바이킹의 탐사 결과 화성에 생명체가 있는 것으로 밝혀져 그의 영화보다 앞서 주목받게 될 것을 두려워해서 런던 로이드 보험사에게 예상되는 손실에 대비한 보험을 들게 해줄 것을 요청했다. 사상 유례가 없는 당황스러운 요구에 대한 보험사의 대답은 NO였다.

큐브릭은 자신의 시나리오를 모두 테이프 리코더에 저장했다고 한다.

큐브릭은 인터뷰 한 번 하지 않고 10년을 조용히 보낸 적도 있다. 간혹 기자나 영화 학도들이 큐브릭에게 질문 한 번 해보려고 그의 집 현관에 모습을 나타내곤 했다. "지금 집에 없어요" 라고 큐브릭이 스스로 말하며, 방문객의 면전에서 문을 닫아 버렸다. 하지만 그가 어떻게 생겼는지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그런 행동이 통했다. 다만 이것 때문에 1990년대 초에 알란 콘웨이(Alan Conway,1934~1998)라는 웬 사기꾼이 스탠리 큐브릭 감독을 사칭하고 다닌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 결국 큐브릭 비서인 앤서니 프레윈이 조사에 나서서 잡혔다.

8 취미

큐브릭은 어릴 때부터 체스에 열광했고, 실제로 잘 두었다. 세 번째 영화 《두려움과 욕망》의 제작비는 거의 전적으로 큐브릭이 뉴욕의 워싱턴 스퀘어 공원에서 체스 경기를 통해 얻은 상금으로 충당했다. 큐브릭은 체스뿐 아니라 탁구도 좋아했다. 그래서 자신의 많은 영화에 탁구 장면을 삽입했다. 큐브릭은 영국의 자신의 집 지하에 세계 최고수준의 탁구대를 설치했다. 방문객들은 종종 그와 탁구 경기를 해야 했는데, 큐브릭은 배우들과 하는 것을 좋아했다. 탁구에서 배우들에게 이기면, 촬영장에서 그들을 더 쉽게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큐브릭은 앨런 아킨과 제임스 칸 주연의 코미디 《프레비와 빈》을 좋아했다. 큐브릭은 이 작품을 터무니없게도 1974년 최고작[33]으로 손꼽았다. 그가 좋아하던 TV프로그램은 《로잔느 아줌마》, 《심슨 가족》, 《사인필드》였다. 심슨 가족에서 그의 영화들이 많이 오마쥬 되었는데, 그에 대해 제작진들에게 감사를 표한바 있다. 그가 좋아하는 영화들 중 하나는 스티브 마틴이 흑인 소작인에게 입양된 멍청한 백인 역을 연기한 코미디 《The Jerk》였다. 큐브릭은 마틴의 연기가 너무 웃겨서, 그를 《아이즈 와이드 셧》의 주인공으로 캐스팅하고 내용을 섹시 코미디로 바꾸려고 했다. (큐브릭이 마틴을 만나 정말 진지하게 논의했지만, 그런 영화는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1. 1970년, 《시계태엽 오렌지》 촬영 당시 사진 작가 드미트리(Dmitri Kasterine / 1932년-)가 찍은 그의 모습
  2. 큐브릭(Q-brick)으로 발음하는 영국과는 달리 미국(특히 뉴욕)에서는 쿠브릭으로 발음하는 경우가 잦다. 유명 영화 리뷰어 Nostalgia Critic은 자신이 제작한 영상에 이러한 특징을 장난스럽게 나타냈다.
  3. 아내를 포함한 가족들과 크리스마스를 보낸 적이 있다.
  4. 1958년에 결혼한 세 번째 아내 크리스티안(Christiane Kubrick / 1932년-)은 브라운슈바이크 출생의 독일인으로, 그의 영화 《영광의 길》에 출연한 바 있다.
  5. 이스라엘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단체였고, 단체의 자본이 이스라엘에 들어가 전쟁원조금으로 쓰일 다분한 여지를 인지한 큐브릭은 이미 자신이 미국 정부에 낸 세금으로 이스라엘의 전쟁을 원조하고 있다는 발언으로 기부를 거부했다.
  6. 비난을 유발한 큐브릭의 지적은 옳았다. 영화계 인사들 중에서 이와 같은 성격의 발언을 한 인물은 그가 유일한 것이 아니었다. 알프레드 히치콕이 동일한 불만을 표출한 바 있으며, 할리우드의 상업성에 대한 측면을 혐오하여 대부분의 영화 작업을 저예산으로 진행한 유대인 영화감독 사무엘 풀러의 "할리우드로 가려면 돈이란 소리에 적응해야만 한다. 유감스럽게도 유대인들의 잔소리와 같이."라는 발언의 파장은 상대적으로 작았다.
  7. 브로드웨이 연극 《위대한 백인의 희망 The Great White Hope》로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8. 스태프들을 이동시키는 운전 기사도 겸했다.
  9. 뉴욕 워싱턴 스퀘어 공원의 체스 시합에 출전하여 획득한 상금과 더불어 아버지와 삼촌의 원조가 있었다.
  10. 제임스 B. 해리스(James B. Harris / 1928년-)
  11. 로리타》에 출연한 배우 피터 셀러스(Richard Henry Sellers / 1925년-1980년)가《닥터 스트레인지러브》에서 3개의 배역을 맡았다.
  12. 영화 평론가 정성일은 《닥터 스트레인지러브》를 가장 뛰어난 큐브릭의 영화로 여긴다고 했다.
  13. 《Napoleon》
  14. 안소니 버제스(John Anthony Burgess Wilson / 1917년-1993년)가 쓴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두었으나, 각색을 거쳐 그와 상당한 거리 역시 둔다.
  15. 영국 청소년들의 모방범죄가 다수 발생했다.
  16. 기본적으로 상영시간이 길어 흥행에 불리했다. 4시간 30분. 게다가 역동적 스토리보다 미학을 더 중시한 미쟝센이 빛나던 영화라 완전히 몰입하지 못하면 오히려 심히 지루할 수 있다.
  17. 영화 감독 마틴 스코세이지는 가장 좋아하는 큐브릭의 영화로 이 작품을 선택했다. 둘다 긴 영화를 좋아하나보네
  18. 《시계태엽 오렌지》와 마찬가지로 각색을 거쳐 원작의 많은 요소가 달라졌다.
  19. 이후에 큐브릭은 나치 독일유대인을 소재로 한 영화를 만드는 도중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쉰들러 리스트》가 개봉하여 제작이 중단되는 일을 겪었다.
  20. 주로 염세적인 작품들을 제작한 본인에게 낙관적인 요소를 다루는 것이 어려웠다고 한다.
  21. 큐브릭이 스테디캠의 원조격으로 알려져 있는데, 사실 이 촬영기법은 그 전부터 존재하던 것이었고, 큐브릭이 워낙 효과적으로 이용해서 유명해진 것이다. 이는 원래 개릿 브라운이 고안한 장비로 촬영한 《록키》가 《샤이닝》보다 훨씬 이전에 스테디캠 방식을 활용했다.
  22. 대조적으로, 영화 《보이후드》는 배우의 성장을 담는 것을 의도, 실현했다.
  23. 혹은 컴퓨터 그래픽스로 구현
  24. 재능이 있는
  25. 큐브릭의 사후에 진행한 인터뷰에서 그와 다시 작업할 기회를 잃어 무척이나 안타깝다고 했다.
  26. 니콜슨의 《샤이닝》에서의 연기는 엄청난 호평을 받았으며, 그 캐릭터 잭 토랜스(Jack Torrance)는 이후 그가 연기한 영화 《배트맨》의 조커보다 더한 완성도를 지니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27. 7세의 나이에 대니 토런스 역을 맡은 대니 로이드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수없는 재촬영에 투정없이 연기에 임하여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28. 물론 클라크도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소설을 출간할 때, 큐브릭의 완벽주의 때문에 책을 출간하지를 못해서 환장할 뻔했다는 일화가 있긴 하다(…).
  29. 배리 린든》에서 불링던 경 역을 맡았던 레온 비탈리는, 그가 죽을 때까지 그의 조수로 일한 바 있다.
  30. 의외로 큐브릭은 그 제안을 받기 전까진 반지의 제왕이란 책 자체를 잘 몰랐다고 한다.
  31. 로미오와 줄리엣, 물랑 루즈, 위대한 개츠비 감독
  32. 스노우 화이트 앤 헌츠맨 감독
  33. 참고로 이 해가 대부 2, 차이나타운 등이 나온 해인 걸 생각하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