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아이돌들의 아이돌. 일본 엔터테인먼트의 여제(女帝)
이름 | 山口百恵[1] |
출생일 | 1959년 1월 17일 |
출신지 | 카나가와 현 요코스카 시 |
혈액형 | A형 |
활동 기간 | 1973년 - 1980년 |
1 소개
갓 스물에 모든 것을 이룬 뒤 은둔을 선택한 전설적인 가수, 배우.
73년에 데뷔. 당시 14세 중학생이었는데, 같은 또래로 데뷔한 사쿠라다 준코, 모리 마사코와 함께 꽃의 중3 트리오로 불렸다. 정식 데뷔 전인 1972년에 <스타탄생>에서 우승자 사쿠라다 준코 다음으로 준우승을 해 얼굴을 알린 뒤, 그 이후로는 우승자 준코를 쌈싸먹고도 남을 커리어를 냈다. 그래서 트리오 중에서도 최고격의 대접을 받는다. 70년대를 풍미한 대표적인 아이돌로 다수의 명곡을 불렀다. '아이돌'이라는 단어가 일본에 생겨나게 한 존재. 일명 '전설의 아이돌', '불세출의 가희'. 은퇴한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일본 가요계의 3대 가희로 회자되고 있다[2].
80년대 일본 아이돌 중에서 나카모리 아키나[3]와 마츠다 세이코가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하다면, 70년대 일본 아이돌 중에서 전세계적인 지명도는 야마구치 모모에가 가장 으뜸.
원래는 발랄한 이미지의 아이돌 가수였지만, 1979년도에 일본 국철 테마송으로 나온 "좋은 날의 여행(いい日旅立ち)"이 전일본적인 히트를 치면서 국민 아이돌이 되었다. 사실 마냥 발랄한 이미지의 아이돌 가수라고 보기도 어려웠던 게, 1974년 그녀의 첫 히트곡인 '어느 여름 날의 경험(ひと夏の経験)'은 15살 소녀가 부르기에는 가사 내용이 검열삭제스런 곡이었다. 일명 '소녀성'을 표현한 노래.[4] 그래서 당시 일본의 학부모 단체에서는 이 노래가 방송에 나오지 못하도록 단체활동까지 서슴지 않을 정도로 거세게 비난했다. 사실 본인도 이런 노래에 대해 심한 거부감을 느꼈으며, 그래서인지 노래를 부를 때마다 종종 뻘쭘해했다. 어쨌든 모모에는 처음부터 과감한 노래를 불렀기에 여느 아이돌과는 다르게 처음부터 성숙한 이미지로 가수 생활을 하게 됐다.
그 이전에도 "가을의 코스모스(秋櫻)"라는 사다 마사시가 제공한 곡으로 아이돌 이미지에서 벗어나고자 했지만 いい日旅立ち가 나오기 전까지 아이돌의 이미지에서 완전히 탈피하지는 못했었다. 이 가사의 내용은 원래 사다 마사시의 동생 사다 레이코의 이야기로, 동생인 사다 레이코가 결혼적령기가 될 무렵 그걸 걱정하는 자신의 어머니의 이야기를 다룬 내용이다. 모모에는 가족 이야기라면 지긋지긋해서 관심을 두지 않으려 했기에 이 곡을 이해하기 힘들어했지만, 훗날 결혼을 앞두고 "이 곡을 이제서야 이해했다"고 사다 마사시에게 이야기하며 그 노래를 은퇴 콘서트에서 불렀다.
10대임에도 40대의 중후한 보컬링이 특징. 이러한 특이점은 曼珠沙華(만쥬샤카)라는 곡에서 절정에 달하여 엔카에서도 그 기질을 많이 보여주었다. 曼珠沙華의 경우 아키 요코 작사, 우자키 류도 작곡[5]인데, 이 작사/작곡가와 연계하여 그야말로 한 시대를 풍미하는 곡들이 수없이 탄생된다. 또 일본의 전설적인 싱어송라이터 타니무라 신지가 작곡한 "좋은 날의 여행"과 "이치에" 등은 평범한 틴에이저 아이돌은 절대 소화할 수 없는, 어른스러움이 물씬 풍기는 노래들인데, 이 곡들을 연달아 히트시키면서 아이돌을 넘어서 명실상부한 일본의 가희(歌姬)로 우뚝 서게 된다.
햇병아리 아이돌을 넘어서 확고부동한 스타의 자리를 차지하면서 선곡의 자유가 그녀에게 주어졌는데, 그녀가 선택하여 취입한 노래들은 지금도 일본 가요계를 빛내주는 명곡들이다. 특히 타니무라 신지, 우자키 류도/아키 요코 콤비의 작품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전성기를 활짝 열어젖힌다. 고작 10대의 안목과 비전이라 보기 어려울 정도로 전위적이고 독창적이었으며 노련했던 것.
曼珠沙華.
섬찟할 정도의 카리스마와 아우라. 틴에이저라고 도저히 보기 힘든 중저음의 보컬과 처연한 눈빛이 인상적이다.
시대를 뛰어넘은 명곡 PLAYBACK part2.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냉담하고 무정한 음색, 표정, 제스처. 그녀의 퍼포먼스는 쿨&시크 그 자체였다.
이 곡으로 일본레코드 대상을 수상하면서 명실상부 일본가요계 정상의 위치를 굳건히 한다. 70년대 중후반, 단 7년여의 활동기 동안 그녀가 만들어낸 매출은 당시 금액으로 700억엔. 이 금액은 물가를 고려해 현시점의 조정환율로 산출해도 천문학적 수준.
은퇴 30주년 기념[6] "야마구치 모모에 특집" 명곡 퍼레이드.
동영상 내내 탄식을 내뱉고 "凄い"(엄청나네) "かっこいい"(멋지다)를 연발하며 그녀의 아우라에 홀리기 시작하는 패널들의 표정도 포인트. 특히 광팬인 마츠모토 히토시는 진행자임에도 불구하고 넋을 뺀 표정으로 그녀의 퍼포먼스에서 눈을 돌리지 못한다.
(실제 패널들의 대화에서도 그녀의 아우라는 그녀가 침묵하고 있어도 상대가 반해버릴 정도였다고 술회하는 장면이 나온다)
일본 국철(현재의 JR)의 캠페인이자 동명의 캠페인 송이었던 '좋은 날의 여행'(DISCOVER JAPAN 참고).
1978년 후지 TV에 나와 부른 '좋은 날의 여행' 영상
마지막 노래 "이별의 저편(さよならの向こう)".
팬들에게 헌정하는 노래로, 1980년 은퇴 콘서트에서 울먹이며 노래를 부르다 마이크를 무대에 내려놓고 퇴장하는 장면이 매우 유명하다.[7]
이 밖에도 약 7년 반의 활동에서 수많은 명곡을 남겼다. "좋은 날의 여행", "이별의 저편", "가을의 코스모스"는 아직도 일본 여가수, 심지어 남자 가수들도 콘서트 라이브에서 즐겨 부르는 노래이다. 曼珠沙華는 엔카 가수들에게 흔히 불리운다.
2 결혼과 은퇴
1980년 21살 당시 미우라 토모카즈[8]와 같이 영화에 출연해 그대로 연인관계에 들어가 미우라와 결혼 후 은퇴하였다. 다만 아내와 달리 미우라는 아직도 연기를 하고 있다.
웨딩 사진. 둘 다 미모가 정점에 달했다.
절정의 인기가도를 달리고 있던 때에 은퇴했기 때문에 은퇴 이유에 대해 여러 추측이 있다. 언론에 대한 혐오 때문이라는 의견도 있고, 후술한 가정환경 때문이라는 의견도 있어서, 미우라와의 결혼은 그저 형식적인 동기부여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결국 공식적인 은퇴 이유는 야마구치 모모에 본인이 인정했듯 결혼이 가장 큰 이유이며, 또한 평범한 주부로 돌아가서 가정을 돌보기 위한 것이다.
3 은퇴 이후
은퇴 후 6년이 지나도 극성스런 매스미디어는 그녀의 행적을 집요하게 추적했었다.
은퇴 이후 행적을 사진으로 보면
첫 아이가 탄생한 후. 더 예뻐진 거 같다?
2003년 오랜만에 포착된 사진.
2004년 파파라치 사진.
2009년 남편과 함께. 행복해보인다.
2015년 최근. 나이가 드니 희한하게 다시 정변 중...
4 기타
요코스카에서 유년기를 보냈기 때문에 '요코스카 스토리'라는 곡을 낸 적이 있다. 요코스카츄오역에서는 발차 멜로디로 이 곡을 채택하여 2016년 현재까지 사용하고 있다. 작사가로서의 필명도 '요코스카 케이'이다.
아버지가 한국인이라는 근거없는 소문이 있는데 확인된 것은 없다. 모모에의 얼굴이 한국인처럼 생겨서 나돈 오해인 듯.
아빠는 자신이 총각이라고 속여서 모모에의 엄마와 결혼했지만, 사실은 가정이 있는 남자였기 때문에 모모에는 사생아로 태어나 호적에도 오르지 못했다. 어릴 때는 아빠와 친했지만 고등학교에 진학해 초인기 아이돌이 되자 아빠가 엄마로부터 양육권을 뺏으려 해 양육권 소송으로 재판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러한 가정환경이 지긋지긋해서 일찍 은퇴한 듯. 또한 당시 가정사에 대해 (한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보장해주는 일본이라고 해도, 연예계에 데뷔해 큰 인기를 끌고 매스컴을 타면 이러한 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은퇴한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참고로 야마구치 모모에가 아버지는 몰라도 어머니에 대한 사랑은 각별하다고 한다. 마지막 콘서트에서 코스모스를 부르기 전에 팬들에게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여러분들의 어머니를 소중히 여겨주세요, 저도 우리 어머니를 소중히 여길게요."
1970년대를 배경으로 한 만화 마루코는 아홉살에서 마루코가 자주 언급하는 '모모에 언니'가 바로 야마구치 모모에다[9]. 그녀가 1970년대 일본 연예계의 아이콘이라는 것을 방증한다.
장남 미우라 유우타로가 밴드[10]로, 차남 미우라 타카히로가 배우로 연예계에 데뷔하였기에, 방송에서 자연스럽게 부모의 화제가 나오는 경우가 있지만 어머니의 은퇴를 생각해서인지 언급을 조심해서 하는 중.
다운타운의 마츠모토 히토시가 팬이다. 장남인 미우라 유우타로가 속한 밴드가 다운타운이 진행하는 음악방송 'HEYHEYHEY 뮤직챔프'에 출연했을때 마츠모토 히토시가 '자네보다 내가 더 너희 어머니를 좋아한다'라고 했을 정도.[11]
- ↑ 현재는 결혼하였기 때문에 호적상 이름은 미우라 모모에로 되어있다.
- ↑ 다른 두 명은 미소라 히바리와 나카모리 아키나
- ↑ 그녀는 오디션에서 모모에의 싱글 <夢先案内人>을 불러 합격, 데뷔했다.
- ↑ 심야식당 코믹스에서 '리바운드의 여왕' 마유미가 불렀던 노래가 바로 이 노래다.
- ↑ 두 사람은 메이지대학 동문이자 부부이다. 또 두 사람 모두 가수, 배우 등의 일을 하는 엔터테이너이기도 하다.
- ↑ 은퇴한지 수십년이 지난 연예인을 기념하는 프로그램은 일본에서도 극히 드물다. 미소라 히바리나 이시하라 유지로와 같은 전설적 엔터테이너의 특집 프로그램은 종종 있지만, 살아있으면서 은퇴한지 30년이 지난 흘러간 가수를 특집 프로그램으로 재조명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야마구치 모모에의 일본내 위상을 역설하는 장면.
- ↑ 이 노래는 장국영이 "바람아 계속 불어다오(風繼續吹/풍계속취)"로 리메이크해서 그의 대표곡이 되었다. 이 노래는 영화 종횡사해 삽입곡으로 나온 바 있다. 또한 장국영은 1989년 자신의 고별 콘서트에서 야마구치 모모에가 그랬던 것처럼 이 노래를 부르면서 울먹거렸다.
- ↑ 1952년생인 배우로 일본 드라마 유성의 인연의 카시와바라 형사, 장미 없는 꽃집의 의사원장, 도쿄독스의 수사반장 역을 맡은 바 있다. 서부경찰의 오키다 고로 형사로도 유명하고.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 아웃레이지에서 보스를 배신하고 조직을 장악했다가 다시 후배들에게 뺏기는 야쿠자 역을 하기도 했다.
- ↑ 작가인 사쿠라 모모코가 모모에의 팬이라고 한다.
- ↑ Peaky SALT. 현재는 밴드 활동은 멈춘 상태
- ↑ 그 날 Peaky SALT의 짧은 출연 시간 대부분이 야마구치 모모에와 미우라 토모카즈에 관한 얘기만 하다 끝났다.
역시 모모에는 일본 연예계의 레전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