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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독교의 성례.
성찬예배는 예수 그리스도가 수난과 그 기념의 의미로 제정한 성체성사(혹은 성만찬)을 중심으로 한 예배형식으로, 기독교에서 가장 핵심적인 예배방식이다.
2 신학적 입장
2.1 가톨릭, 정교회
가톨릭과 정교회는 성찬예배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명령한 바 대로 행하는 기념(Annamnesis)임과 동시에 하느님에 대한 제사의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가르친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찢기신 몸과 피를 하느님께 바친다는 의미로 이 성찬예배에서 사용하는 빵과 포도주가 신비로이 주님의 몸과 피가 된다고 가르치는 것이다.[1] 그래서 성찬예배는 매우 정형화된 패턴에 따라 대부분의 교파들이 거의 비슷한 구조를 지니고 있으며 성체성사의 절정부에서 사용하는 경문은[2] 사실 번역만 조금 다를 뿐이지 사실 동일한 표현과 내용을 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3] 또한 주님의 몸과 피를 나눈다는 것은 교회와 신자 그리고 주님이 유기적으로 한 몸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성찬예배는 그야말로 기독교 예배의 '알파요 오메가'라고 할 수 있다.
자세한 것은 성체성사 항목 참조
2.2 동방 교회
정교회, 그리고 비칼케돈 교파인 오리엔트 정교회 등 '동방 교회'에서는 성찬예배(Θεία Λειτουργία, Divine Liturgy)라는 표현을 쓴다.
정교회는 바로 아래 항목에서 설명하겠지만 '리뚜르기아'('백성의 일'이라는 뜻)라고 하며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에서는 '수르프 바다락'('거룩한 희생'이라는 뜻), 시리아 정교회에서는 '카디쇼 꾸르바나'[4]('거룩한 봉헌'이라는 뜻)이라고 부른다.
2.3 개신교
가톨릭과 정교회가 7성사를 중시하는 반면, 개신교는 성경에 언급된 것만 성례가 될 수 있다는 논지에 따라 세례와 성만찬만을 인정하고 있다. 요한 복음서에 언급된 세족례도 행하기는 하나, 일반적으로 세족례는 공적인 예배에서 드려지는 경우는 별로 없으며,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겠다는 상징적인 차원의 행사로 진행되는 경우가 더 많은 편이다. 뱀발로 미국의 경우 개신교 교회에서도 결혼식을 올리는 경우가 많지만 이는 성사가 아니라 일종의 문화적 관습으로 행하는 것이다.
2.3.1 성공회
개신교 중에 성공회는 처음에 켄터버리 대주교 토마스 크래머가 1549년 《공동기도서》를 펴내며 루터파의 성찬 입장을 모호하게나마 지지했다가 1552년 견해를 수정하여 츠빙글리의 견해를 받아들였다. 이는 성공회가 독일보다는 스위스 남독일의 츠빙글리 계열의 신학자들이 영국으로 초청하여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 최종적으로 성공회는 《39개 신조》를 통해 공식적으로는 화체설을 부정하고 있으며, 성사적 임재설 입장을 취하고 있다.[5] 그러나 성공회는 신자 개개인이 화체설 입장을 취하는 것을 특별히 제재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관용은 영국교회의 역사에 기인한다. 종교개혁 이전부터 14세기 롤라드파와 존 위클리프가 주도하여 화체설을 부인하여 헨리 5세시기 극심한 탄압을 받았으며, 16세기 들어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10여년전부터 이러한 운동이 잉글랜드 교회에서 다시 살아났었다. 헨리 8세시절 로마교회와의 단절을 선언했음에도 가톨릭 교리에 기운 헨리 8세는 화체설을 부인한 옥스포드와 케임브리지 신학자들을 화형으로 태워죽였고, 메리 1세 시절에도 지속되었다. 메리 시절과 대륙에서 가톨릭 세력들이 개신교도들을 색출하여 탄압할때 빵앞에서 무릎을 꿇지 않는 이들을 잡아 넣었고, 이에 따라 화체설을 부인하는 복음주의자 (청교도)들의 극심한 반발을 불러서 "화체설은 빵을 섬기는 우상숭배"라 하여 정권교체 후 다시 가톨릭 신도들을 탄압하는 명분으로 이용했고 나중에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이러한 갈등에 대한 반성으로 교회내에서 받아들일수 있는 개인의 신앙에 관해서 존중하는 입장을 취했기 때문이다.
성찬례는 가톨릭의 전례를 따라 면병과 포도주를 사용하며, 매 감사성찬례마다 거행한다.
2.4 종교개혁 시기의 성만찬 논란
종교개혁 당시 종교개혁자 그룹은 크게 둘로 나뉜다. 독일 지역의 마르틴 루터 그룹과 스위스 지역의 개혁파 그룹이다. 성찬에 대한 루터의 견해는 '공재설(Consubstantiation)'로, 빵과 포도주 주변에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임한다는 견해다. 이는 가톨릭의 화체설이론인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과 질료 개념을 신학과 관련없는 이론으로 부인하며 달리 빵과 포도주가 실재적으로 변화하는 것이 아닌,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빵과 포도주와 함께 머물러 있다는 견해이다. 마르틴 루터의 성만찬에 대한 개념을 공재설이라고 하는데[6] 가톨릭의 화체설과는 차이가 있다. 화체설이 성체성사를 행할때 빵과 포도주가 '형상은 그대로 지만 속성이 변해서 그것이 그리스도의 피와 살이 된다'는 개념인 반면 공재설은 아리스토텔레스 이론은 13세기에 신학에 삽입된 이론으로 신학과 노상관으로 보기에 형상과 질료 개념은 폐기하고 성서 해석으로 '빵과 포도주 자체의 예수 그리스도가 깃든다는(임재) 개념이다. 마르틴 루터와 가톨릭의 차이는, 가톨릭은 성체성사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 즉 파스카 신비를 '재현'하는 것이라고 본 반면, 마르틴 루터는 '이미 희생은 드려졌으니 그것이 매번 재현된다는 건 무리다' 하여 희생제사라는 개념에 반대했다는 것이다.[7]
중세 가톨릭에서는 빵과 포도주를 함께 주던 것이 포도주를 주지 않고 빵만을 주는 것으로 바뀌었는데, 이는 가톨릭 성체성사의 근본개념인 성변화, 즉 화체설[8]에 입각한 결과였다. 화체설에 입각하면 빵과 포도주는 그 자체로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되기 때문에 신자들이 포도주를 받아들 때 부들부들 떨다가 흘리는 일이 생겼고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피를 범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신자들에게는 빵만 주고 포도주는 주지 않았다. 포도주를 흘린 사제는 심하면 손가락을 잘라서 벌하기도 했다. 한 입에 다 들어갈 크기의 면병을 주기 때문에 빵가루 흘릴 일은 없다. 얀 후스와 후대 마르틴 루터는 성경에 나온만큼 둘 다 줘야 한다는 입장을 폈지만, 새로운 개혁을 급하게 밀어붙이지는 않았다. 여전히 신자들 중에는 가톨릭 교회에서의 습관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16년 동안 가톨릭 식대로 빵만을 주다가 16년이 지나서야 빵과 포도주를 함께 주었다 신도수 대다수를 차지 하는 농민들은 문맹에 교회에서 말하는 형상이니 질료니 임재니 하는것을 알아듣지 못했고 기존의 성찬식때 빵을 축성할때 라틴어를 주술적 의미로 알거나 입에서 빵을 꺼내어 집안에 귀신 쫓는 용도로 썼기 때문에 과격한 변화는 혼란을 주기 때문이었다.
반면 개혁파 그룹은 입장이 좀 달랐다. 우선 개혁파 그룹의 1세대 격은 울리히 츠빙글리이다. 츠빙글리는 성찬을 단지 '기념'으로만 보았다. 예수님이 '이것은 내 몸이다(Hoc est Corpus Meum)'하셨을 때의 라틴어의 Be 동사인 '이다(est)'는 문자 그대로 사실을 말하는것이 아니라 상징적으로 가리키는 말일 뿐, 루터처럼 그리스도의 몸이 임하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츠빙글리는 성만찬을 제정할 때의 예수 그리스도의 선언인 '이것은 나의 살이다' 하는 것을 '이것은 나의 살을 의미한다'고 해석했다. 츠빙글리는 성만찬의 의미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회상하는 것이라고 했다.츠빙글리는 루터의 해석법이 중세 가톨릭의 4중적해석법에 머물렀다며 크게 비판하고, 여기서 츠빙글리는 자신의 이론을 설명하기 위해 비유를 들었는데 남편과 아내가 결혼을 할때 결혼 반지를 나누는것 처럼 반지 자체가 결혼은 아니지만 아내가 남편과 잠시 떨어졌을때 반지를 보며 결혼의 의미와 남편을 기억한다. 빵과 포도주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그분과의 관계를 기억라는 상징일뿐이라는 해석으로 설명했다.
결국 두 종교개혁가, 루터는 성만찬을 행할 때 예수 그리스도가 직접 몸으로 임재한다고 한 것과는 달리, 츠빙글리는 직접 몸이 임재하는 것은 아니다 하여 마르틴 루터와 갈등을 일으켰다. 1529년, 마르부르크에서 마르틴 루터와 츠빙글리가 회동해서 동맹을 모색했지만 끝내 이루어지지 못한 이유는, 두 사람의 성만찬에 대한 배경개념이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성서학 박사출신 마르틴 루터가 볼때 츠빙글리의 이런 해석법은 정상이 아니었다. 마르틴 루터는 츠빙글리가 성서해석을 제멋대로 한다며 분노했는데, 이미 이전의 츠빙글리의 행적때문에 그를 부정적으로 보게 된데다가 [9] 이런 행적이 종교인이 말씀에 멀어져서 망가진것으로 보았기에 츠빙글리의 해석론 자체를 아예 틀려 먹은걸로 보았다.
마르틴 루터는 사제가 되기전 철학도였으며 인문주의의 크게 받기도 했으나 명백히 틀리지 않은 이상 가톨릭의 기존 성서 해석법을 인정했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영향을 받아 13세기에야 교리로 정착한 가톨릭의 화체설은 근거가 없다하여 부정했지만 성서학 박사로써 이것은 내몸이다의 해석은 비유나 신비적 계시가 아니라 그대로 직접적인 사실로 받아야들여야 한다 주장했는데 츠빙글리는 역시 사제 출신이긴 하나 루터보다 인문주의에 더 기운 사람이었다. 네덜란드의 인문주의자이자 신학자였던 베설 한스포르트(Wessel Gansfort)와 코르넬리스 훈(Cornelis Hoen)의 영향을 받아서 '내 몸이다'의 루터의 해석을 중세 가톨릭의 4가지 해석방법론에 머물러 있다며 크게 비판했고, 합리적 태도에서 성찬은 주님을 기념하는것일 뿐이라는 입장이었다. 1531년 루터의 해석법을 비판하는 서적에선 기독교인이 식인종이냐라며 비꼬았고, 츠빙글리 지지자들은 "빵도 십자가에 메달려야 되냐?" 라며 북독일의 루터파 진영과 틀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마르틴 루터는 마르부르크 회의에서 츠빙글리와의 회담이 결렬되자 " 츠빙글리와 포도주를 마시느니, 교황주의자와 피를 마시겠다."라며 역시 불편함을 넘어선 적대감까지 드러냈고 츠빙글리 또한 루터의 주장은 가톨릭 주장처럼 식인종이나 할 소리라고 빈정댔다.
츠빙글리의 동료였던 남독일의 마르틴 부처와 루터의 동료이자 한세대 연하 신학자인 필리프 멜란히톤은 둘사이에서 영적 임재설을 제시하며 두 진영의 타협을 권했으나 당시에는 무산되었다.
개혁파 그룹의 2세대 격인 칼빈은 츠빙글리와 함께 개혁파 그룹으로 묶이지만 성찬에 대한 입장은 전혀 달랐다. 성찬에 대한 칼빈의 입장은 '성령 임재설' 혹은 '능력주의(virtualism)'이다. 칼빈은 그리스도 인성의 편재설을 근거로 루터의 공재설을 비판하였으며, 성찬에 임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이라고 보았다.
한편 종교개혁자는 아니지만 개신교의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그룹은 감리교이다. 존 웨슬리를 비롯한 초기 메도디스트(Methodist)들이 '메도디스트(규칙쟁이)'라는 별칭을 얻은 이유는 이들이 규칙적으로 모여 성찬을 했기 때문이었다. 존 웨슬리는 성찬에 심취했다고 할 정도로 성찬을 대단히 사랑한 인물이었다. 성찬에 대한 존 웨슬리의 견해는 기독교 모든 교파의 견해를 종합한 것과 가깝지만 기본 골격은 칼빈의 성령 임재설에 닿아 있다. 그럼에도 존 웨슬리는 성찬에 담긴 기념의 의미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은총과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성찬을 통해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이야기하였다. 당시 존 웨슬리가 몸 담고 있던 성공회는 성찬을 자주 드리지 않았다. 웨슬리 사후 19세기 성공회에서는 옥스포드 운동(The Oxford Movement)이 벌어졌는데, 이는 성공회의 전례를 전통으로 바꾸는 운동이었다. 곧 성찬을 자주 시행하고, 전통적인 전례 양식대로 예배를 드리는 운동이었는데 많은 수의 교회사가들은 존 웨슬리가 옥스포드 운동의 선구자이자, 옥스포드 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음을 지적한다.
이렇게 성찬에 대한 존 웨슬리와 종교개혁자들의 공헌이 큼에도, 개신교가 성찬을 비하하는 것처럼 기록하는 것은 진실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오해와 무지를 불러일으키는 데 한국 개신교의 역할이 상당했음은 부인하지 않는다. 한국 개신교가 성찬을 자주 시행하지 않고, 그에 따라 성찬을 잘 모르는 이유는 한국에 처음 들어온 선교사들이 복음주의 성향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대체적인 개신교의 교회 구조는 보편 교회(감독제)가 아닌 회중 교회의 형식을 띠기 때문에 선교 초기에는 안수 받은 목회자의 수가 모자라 성찬을 자주 시행할 여건이 되지 못하였다. 그래서 미국도 선교 초기 시절에는 설교 중심의 기도회 스타일의 예배를 대부분 드렸다. 이제 미국 개신교도 성찬의 중요성을 알고 많이 변화해 가고 있지만, 한국 개신교는 보수적인 교단이 압도적으로 많아서 아직 초기의 모습이 유지되고 있는 현실이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아직 한국 개신교 선교의 역사가 200년도 채 안 됐다는 사실이다! 아무튼 한국도 선교 초기엔 안수 받은 목회자가 모자랐으며, 들어와 있는 목회자들의 성향 자체가 성찬보다 설교를 중요시 생각했기 때문에 성찬이 제대로 뿌리내리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성찬에 대한 개신교의 신학은 결코 빈약하지 않다. 성찬에 대한 문제는 한국 개신교 내에서도 이미 문제의식을 가지고 성찬을 회복하는 움직임이 진행되어 가고 있다. 특히 에큐메니컬 계열 교단인 감리교와 예장통합, 기장 측에서 성찬에 대한 관심을 많이 갖고 있다.[10] 다만 성만찬을 부활절 기간에만 하는 관례가 단지 보수적인 신학관 때문만이라고 볼 수 없으며, 오히려 고신 교단에서조차 한국교회에 성만찬이 너무 부족하다는 비판이 나오는 상황이다.[11] 또한 빵과 포도를 구하기 어려운 지역에서는 루터교나 성공회라도 성만찬을 잘 하지 않는다.[12]
추가로 성찬에 대한 개신교의 입장에 대해 적자면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 약칭: W.C.C.)' 산하 기구인 '예배와 직제 위원회'가 정한 '리마 문서'를 들 수 있다. WCC 예배와 직제 위원회에서는 1982년 개신교 각 교파를 아우를 수 있는 성찬 예배 형식을 지정했다. 이것이 페루의 수도인 리마에서 이루어졌다고 하여 이를 '리마 문서'라고 부른다. 리마 문서에는 가톨릭, 그리고 정교회와 호환될 수 있도록 고대 교회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기도문과 전례적 요소가 수록되어 있다.
3 성만찬 참석 기준
성만찬의 대상을 어떻게 잡느냐는 크게 2가지로 나뉘어진다.
- 공개 성만찬(Open Communion) - 예배에 참석하는 모든 사람에게 성만찬을 시행하는 방식. 이 방식도 교회나 교단에 따라서 제각각인데 방문객과 5세 이상 어린이도(!) 성찬을 받을 수 있는 수준에서부터 최소한의 조건(세례[13], 교단소속 여부)만 만족하면 되는 수준까지 다양한 편이다.
- 폐쇄 성만찬(Closed Communion) - 세례를 받고 입교의식까지 거친 정식 교인에게만 성만찬을 시행하는 방식으로 개신교에서는 일부 보수적인 교단들이 이렇게 행한다.
폐쇄 성만찬의 경우 장로교 기준으로 유아세례를 받은 아이가 성장해서 적정 연령대가 되었을 때 성인 신자로 간주하는 입교를 행하고 이 이후로만 성만찬에 참여할 수 있게 하는데, 이것은 장 칼뱅이 도입한 의식이다. 그는 <기독교 강요>에서 견진성사를 비판하면서, 견진성사의 기름과 축복 대신 요리문답, 즉 자기 자신의 의지로 하는 신앙고백을 대안으로 제시하였다.[14][15] 장로교뿐 아니라 감리교나 침례교[16] 역시 성만찬에 연령제한을 둔다. 심지어 루터교조차 미성년자한테는 성만찬을 행하지 않고 사탕을 주거나 안수기도를 해준다.
4 교파별 예식의 형태
4.1 일반적인 개신교에서의 성찬
개신교에서는 일반적으로 성찬 예배, 혹은 성찬 자체만을 가리켜 '성찬식' '성만찬' 등으로 부른다. 개신교가 성만찬을 소홀히 여긴다는 지적이 있지만, 나라별 혹은 개교회별로 다르다. 장 칼뱅은, 성만찬은 신앙에 매우 유익이 되니 자주 하는 게 좋다고 했다.(출처) 다만 개신교는 설교가 예배에서 중요한 지분을 차지하기 때문에 가톨릭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성만찬이 경시되어 보일 뿐이다. 일단 한국의 개신교에서 두드러진 설교 본위 예배 양식은 원래 스코틀랜드나 네덜란드[17]처럼 개혁주의가 메인인 나라들이 기원인데다, 미국에서 변경예배라는 이름으로 더욱 간략화된 것을 들여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연유로 성공회와 루터교를 제외한 대다수의 개신교 교파라면 장로교, 감리교[18], 침례교, 순복음교회 할 것 없이 예배는 순서가 거기서 거기다.
핀란드 루터교의 성만찬 | 네덜란드 개신교의 성만찬 |
한국 개신교 교회에서는 대부분 이런 식으로 준다. |
빵은 식빵(네덜란드에서 성만찬용 식빵을 자르는 모습)[19]이나 카스테라, 혹은 베이킹 소다로 구운 케이크를 사용하기도 한다. 신학대학에서는 가톨릭에서 쓰는 무교병을 구입해서 쓰는 경우도 있으며, 일부 교회에서도 무교병을 사서 쓰기는 하지만, 수입 무교병은 비싸서 일반 교회에서 쓰기는 부담스러운 것이 사실. 무교병 대신 아이비 크래커를 쓰는 교회도 있다. 한편 개신교에서 쓰는 개역개정 성경에서 빵을 떡이라고 번역한 것 때문에 일부 교회에서는 떡을 사용한다고 하며, 실제로 여의도 순복음교회의 경우 쌀로 빚은 백설기 떡을 사용한다. 포도주는 성만찬용 포도즙이나 포도주에 포도주스를 섞어(!) 쓰는 등으로 사용하며, 규모가 작은 교회(특히 침례교)의 경우는 구하기 쉽다는 이유로 그냥 슈퍼에서 파는 일반적인 포도주스를 쓰기도 한다. 금주 교리를 가진 일부 보수 교단에서도 포도주 대신에 포도주스를 쓰는 경우가 있다. 또 한국의 몆몆 루터교회에서는 성찬식용 포도주를 직접 담그는(!)경우도 있다.
이는 성체성사를 중시하는 교단(로마가톨릭, 정교회, 성공회 등)의 신자들이 보면 저러고도 성찬례인가 싶을 일이겠지만, 애당초 희생제사를 재현한다는 의미가 없고 기념이란 의미가 더 강하기 때문에 가톨릭처럼 엄격하게 규정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개신교 중에서도 루터교회와 성공회의 경우에는 철저한 전례에 맞춰서 성만찬(성체성사)를 하므로 가톨릭의 방식대로 면병을 사용한다. 단, 이것도 나라마다 다르긴 하다. 덴마크의 경우 실내예배는 면병을 쓰지만 야외예배시에는 간혹 페이스트리나 팬케이크같은 것을 쓰기도 한다.참고 그리스도의 교회의 경우 개교회 중심이라는 교단 특성상 각 교회 여건에 따라 무교병과 포도주를 구입하거나 직접 만들어 사용하기도 한다.
성만찬을 하는 방식도 각 국가나 교파에 따라 그 양상이 천차만별이다. 일반적으로 장로교를 비롯한 대부분의 개신교의 경우 대부분 서서 한다는 것이 큰 특징으로 이는 종교개혁 시절부터 가톨릭의 계급제도[20]와 평신도의 장궤행위를 부정하고 모두가 평등하게 서서 빵과 포도주를 나눈다라는 의미에서 그렇게 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편 루터교의 경우 종교개혁 당시부터 타 개신교와 여러가지 견해가 달랐던 관계로 가톨릭의 장궤 영성체마냥 무릎을 꿇고 성만찬을 받는 교회들이 많았으나[21] 현대에는 일부 정통주의적인 교회를 제외하면 루터교에서도 서서 성만찬을 받는 방식이 늘어나고 있다. 한편 성공회의 고교회파(앵글로-가톨릭)의 경우 성체성사의 형식은 가톨릭의 그것과 거의 동일하고, 영성체 예절도 가톨릭 그것과 비슷하게 비교적 까다로운 편이라고 보면 된다.
포도주(스)를 나누는 방식의 경우 현대에는 위생문제 등으로 인해 신자별로 각각 작은 잔에 나눠서 주지만 일부 유럽 국가의 교회에서는 커다란 금속제 잔을 돌려서 준다(...) 물론 한 사람이 마시고 나면 목사가 천으로 쓱 닦아주고 다음 사람한테 넘기는 방식이다.
전반적인 형식은 개교회마다 천차만별이지만, 일부 예전을 중시하는 교회(특히 루터교나 감리교 교단 중)는 가톨릭의 성체성사의 전례와 비슷한 예식서를 만들어 따르기도 한다. 내용은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하시길" "목사님과도 함께 하시길 빕니다." "우리 주 하나님께 감사드립시다" "바르고 마땅한 일입니다" 하는 식.
4.2 루터교회의 성찬예배
루터교회는 종교개혁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지만 마르틴 루터가 처음 종교개혁을 일으켰을 때의 의도나 원래 루터가 가지고 있던 가톨릭적인 배경 때문에 매주 성만찬을 하고 정형화된 전례문에 따른 예배형식을 유지하게 되었다. 더군다나 북유럽 지역의 루터교회처럼 국가중심의 교회로 개편하고자 하는 정치적 목적에서 루터교로 바꾼 교회의 경우에는 예배 모습만 봐서는 가톨릭인지 개신교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똑같다. 한국의 루터교회의 경우, 개신교는 개신교인지, 사용하는 용어나 예배 의식의 여러가지 면이 한국의 전형적인 개신교 예배 모습을 많이 닮아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루터교회의 배경을 생각했을 때 이들의 성찬예배는 한국 개신교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장로교인들이 참여한다면 상당히 어색할 정도로 형식화된 예배이긴 하다.
4.3 성공회의 감사성찬례
성공회에서는 감사성찬례라고 불리는데, 오늘날 성공회의 예식 형태는 가톨릭 전례를 본따고 있다. 제아무리 성공회 안에 전례 중심의 고교회파와 복음주의적 경향의 저교회파가 존재하긴 하지만 기본적인 성공회의 모토는 '보편교회'이며 다만 전례와 성직중심의 고교회파에서 개신교적인 저교회까지 모두를 포용한다는 것을 내세우고 있다.
때문에 성공회 전례는 기본적으로 루터교보다 훨씬 가톨릭에 가까우며 더욱이 성공회 한국관구의 경우에는 영국 성공회의 고교회파 선교사들에게 전래를 받아 어떨땐 한국 가톨릭 이상으로 장엄하게 전례를 드리기도 한다.
자세한 내용은 감사성찬례 문서와 성체성사의 해당 항목을 참고.
5 한국의 개신교에서의 성찬
한국의 개신교가 성만찬을 거의 행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는 개혁교회의 시초 츠빙글리가 성만찬은 너무 중요하기에 자주해선 안된다. 며 분기에 한번만 할것을 주장했고 그런 전통이 교단에 이어진것이지 한국개신교의 특유 문화나 소홀히 해서가 아니다. 한국의 개신교에서는 초창기 한국에서 포도주를 구하기도 어렵고 현대에는 대형교회에선 준비와 한시간 남짓 되는 예배시간에서 성만찬시 시간이 상당히 소요되기에 현실적으로 자주 하기 어려운 측면도 있었다. 최근 성만찬을 중시해야 한다는 흐름이 나타나고 있고, 목사 개개인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성만찬의 횟수를 늘려가고 있다. 일단 아주 적게 하는 경우 1년에 한 번 정도 하는 경우도 있고 (특히 인원이 많은 대형 교회), 주로 1달에 1번, 매달 첫 번째 일요일에 한다. 1년에 한번 하는 경우에는 대체적으로 부활절을 전후로 한 시점에 행한다. 또한, 교단에 따라서는 매주 성만찬을 실시하는 교단도 있다.[22]
이는 개신교 예배가 지나치게 설교위주로 흘러가거나, 이게 지루하다고 매번 부흥회 같은 기도회 형식의 찬양예배를 열거나 콘서트 같은 형식을 방불케하는 소위 열린 예배의 폐해에 대한 반동으로도 나타나는 경향이 일부 있다. 가톨릭의 경우 미사에서 강론과 함께 성체성사가 이루어지면서 나름대로 전례가 시각적 효과도 있고 성스러움을 느끼게 하는 반면에, 개신교에서는 설교만 이루어지거나 방방 뜨는 소위 열린 예배가 되려 너무 지루하거나 시끄러워 성스러운 느낌이 안 든다는 반발과 지적이 많아서, 성만찬을 통해 이를 해결해 보려고 하는 시도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 다만 가톨릭처럼 매주 성만찬을 드린다는 것에 대해서는 아직 개신교 대부분에서 거부감이 많은 것으로 보인다.
6 같이 보기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성찬예배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div></div>- ↑ 화체설이라고 하는데, 가톨릭에선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체계적으로 교리를 만들어 설명했다. 반면 전승과 성사의 신비성을 강조한 정교회는 단지 '성령에 의해 거룩하게 된다'고하여 교리적인 부가 설명을 하지 않는다.
- ↑ 특히 성찬예식에 진입하고 나서부터의 경문들이 그러한데 대표적으로 '성찬기도', '성령청원기도' '성체제정문'(이건 빼도박도 못하고 성경에 나와있는대로이다.)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 ↑ 이는 기도문이 가지는 역사성에서도 기인하는데 지금과 같은 형태의 성찬예배는 전승에 따르면 최고 1세기까지도 거슬러 올라간다. 확실하게 등장하는 것은 4세기 경이다.
- ↑ 여기서 '카디쇼'라는 단어의 발음은 'ㅋ하'발음에 가까운 구개수음발음으로 아프리카아시아어족에서 흔히 볼 수 있으나 한국어에는 없는 발음이다.
- ↑ 신학적으로는 성공회 형성 과정에서 장로교(칼뱅주의)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는 부분 중 하나이다.
- ↑ 다만 루터 자신은 이 단어를 쓰지 않았고 나중에 루터파 신학자들이 붙인 명칭이다.
- ↑ 물론 가톨릭이나 개신교나 예수의 십자가 희생은 단 한번으로 완전히 이루어졌다고 해석한다.
- ↑ 가톨릭 교회의 공식적 명칭은 성변화이다. 화체설은 그리스도교(가톨릭, 정교회, 개신교 모두 포함) 신학자들이 성변화론을 상징설, 공재설과 대등한 위치의 가설로 보면서 붙인 이름.
- ↑ 츠빙글리는 스위스에서 무력투쟁을 벌이며 반종교개혁과 갈등중이었는데, 루터가 보기에 종교인이 군대이끌고 다니는것은 1520년 토머스 뮌처가 과격 재세례파를 선동하여 농민반란을 일으킨것, 더 이전 교황 율리오 2세가 세금 안내는 신도들을 토벌하러 스스로 갑옷입고 말을타며 교황령소속 도시와 베네치아를 정벌한것과 비슷하게 보았고, 이를 경멸하고 있었다.
- ↑ 대한성공회는 성찬에 대한 관심을 많이 보이는 차원을 넘어서서 고교회파가 주류이다보니 이미 가톨릭 수준으로 성찬례를 매 주 실시해오고 있다.
- ↑ 실제로 미국이나 네덜란드의 개혁교회에서는 신학적 성향과 상관없이 매 분기마다 적극적으로 성찬식을 한다.
- ↑ 루터교도 성만찬 없이 예전을 드리는 방식이 존재한다. 당장 한국 루터교회의 예배의식문에도 존재하는 방식이다.
- ↑ 현재 성공회는 이쪽이다. 출신 교단 상관없이 삼위일체 하느님의 이름으로 적법하게 세례를 받았으면 성공회 영성체에 참여 가능하다.
- ↑ 사실 가톨릭교회 역시 성체신심에 대한 분별을 가질 나이 즈음에 비로소 첫 영성체를 하게 한다(교회법으로 규정되어 있는 사항). 성당이나 지역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대개 8살~10살 사이에 교리를 배운 후 첫 영성체를 하게 되는데, 너무 어릴 때 받는 유아세례를 대신해 어린이 신자들의 사실상의 입교식 비슷한 역할을 하므로, 각 교회 공동체에서도 상당히 크게 기념하는 행사이다. 정교회에서도 이전 교파에서 받은 세례가 인정되어도 견진성사 이전까지는 영성체를 할 수 없게 한다.
- ↑ 사실 이런 제한이 여러 그리스도교에 있는 이유가, 성만찬의 조건이 까다롭기 때문이다. 예수의 몸을 다루는 조건은 신앙고백과 무흠과 예수의 몸을 분별할 것인데, 신앙고백조차 공교회, 장로회라면 공동의회의 인증을 받지 못하고 뒤의 두 조건을 지킬 수는 없기 때문이다.
- ↑ 이쪽은 유아세례를 인정치 않으므로 아예 세례 자체가 입교예식을 겸한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일부 침례교회는 '헌아식(獻兒式)'이라 하여 새로 태어난 아이를 위해 특별 축복기도를 해주는 행사를 갖곤 한다.
- ↑ 다만 제대로 된 장로/개혁교회는 중간에 시편을 읇는 절차가 있기 때문에 한국 장로교 예배와는 스타일이 좀 다르다. 사족으로 유럽식 시편찬송가는 2009년에 와서야 대한민국에 정식으로 소개되었다(...)
- ↑ 감리교도 원래는 예전이 존재했지만, 현대 한국 감리교회는 대학교 채플이나 웬만큼 특별한 일이 아닌 이상 장로교와 비슷한 예배를 드린다.
- ↑ 물론 식빵은 누룩이 들어있으나 유럽 개신교에서 귀퉁이를 제거한 흰 부분만 쓰는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 ↑ 전례개혁 이전 가톨릭에서는 성직자의 계급에 따라서 설 수 있는 계단의 위치까지 다 정해져 있었다. 자세한 건 트리엔트 미사 항목 참조
- ↑ 이러한 경향은 특히 국교회 성향이 가장 강했던 스웨덴쪽이 심했었다.
- ↑ 본래 칼뱅의 저서인 기독교강요에서는 은혜의 방편(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수단) 중 하나를 성례, 즉 세례와 성찬으로 규정하고 있다. 한국교회가 성례를 제대로 지키지 않고 있기에 그 반동으로 성례가 다시 강조되고 있는 흐름으로 보는 것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