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택식

역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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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대 김현옥15대 양택식16대 구자춘
역대 대한민국 경상북도 도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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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김인11대 양택식12대 김덕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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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에게 서울-수도권 조경공사 현황을 보고하는 양택식 서울특별시장(1973년경)

梁鐸[1]植 (1924 - 2012)
양'탁'식?

1 소개

대한민국의 관료, 기업가이다.

2 일생

고향은 경상남도 남해군으로, 1924년 태어났다. 1947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전문부[2] 화학공학과를 졸업하고 공무원을 거쳐 화학공장을 경영하던 중 5.16 군사정변을 계기로 기술관료로 활약하기 시작했다. 박정희 정권에서 철도청장, 경상북도지사 등을 역임하였다.

1970년 와우 아파트 붕괴사고짤린사퇴한 김현옥 서울특별시장의 후임으로 임명됐다. 서울특별시장 재임시절 양택식은 김현옥 시장 시절 대략의 틀만 잡아놓은 서울 지하철 건설과 강남 개발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강남 개발 중에 도산공원도 조성하였다. 다만 임기 중 광주대단지사건을 겪었다.

1974년 서울 지하철 1호선이 완공되었는데, 하필 개통식 날 육영수 저격 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기념식 행사를 주관한 서울특별시의 수장으로서 책임을 질 수밖에 없어 시장직을 사퇴했다. 이후 대한주택공사 사장으로 낙하산 인사취임하여 재임기간 동안 잠실 주공아파트의 건설을 주도했는데, 잠실주공 1~4단지를 건설할 때 180일 작전을 선포하고 실현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1980년대에는 동서석유화학 회장으로 자리를 옮겨 재임했다.

그가 재임했던 1970년에는 김현옥 전임 시장이 서울 바닥을 온통 헤집어놓느라(...) 서울시 재정이 바닥 상태였는데,[3] 빈털터리 상태의 서울을 물려받은 그는 조심조심 서울 재정을 복구하면서도 지하철 1호선[4] 강남개발 등의 굵은 사업들을 해냈으니 그 수완이 대단하다고 할 만하다.

2012년 88세로 사망하였다.

3 기타

서울 지하철 1호선 개통 당시 그가 남긴 기념비가 시청역 대합실에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하철 종로선 개통에 즈음하여

여기 땅 속을 뚫어 3년 4개월 서울 시민 교통에 신기원을
이룩할 지하철 종로선이 650만 시민의 뜨거운 염원과
대망리에 완공 되었다
이 거역이 우리의 기술진과 노력으로만 이루어 졌으니
민족의 저력을 과시할 장한 일이다 그동안 이 일에 힘을
기울인 모든 분의 노고에 감사 드린다
오늘 역사적인 개통을 맞아 활기찬 의욕으로 자랑스러운
수도 서울과 영광된 조국에 힘을 다할 것을 다 함께
다짐하는 바이다

1974. 8. 15.
서울특별시장 양택식

대머리였기 때문에 당시 광택제 브랜드 이름인 '호마이카'라는 별명이 있었으며, 지하철 건설을 빗대어 '두더지'라는 별명도 있었다. 본명은 '양식'이었는데 주변에서 하도 '택식'이라고 잘못 발음하다 보니 아예 이름을 바꾸어버린(...)일화가 있다고 한다. 서울시장 - 주택공사 사장 시절의 양택식에 대하여는 손정목[5]의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에 자세한 소개가 되어 있다.

전임 김현옥, 후임 구자춘과 함께 3대 시장으로 불리며, 이촌향도 현상이 절정에 달하던 시기에 시장직을 역임하였다. 군인 출신이며 불도저 스타일로 악명유명했던 다른 두 시장에 비해서 상당히 신중하게 일을 추진하는 성격이었다고 한다.[6]

1970년에는 대대적인 서울시 추가 확장안을 박정희한테 직접 제안하여, 당시 서울시 도시계획구역으로 잡혀 잠정적으로 서울시 추가편입이 계획된 지금의 과천시, 광명시, 고양시 지축·신도지구, 부천시 오정지구 뿐만 아니라 지금의 안양시, 고양시 덕양구, 성남시 일부, 하남시 일부 주민들을 서울 편입이라는 꿈으로 설레게 한 적이 있다. 그러나 나열한 지역들이 서울특별시로 편입되는 일은 없었다[7]
  1. '방울 탁'. 반절은 徒落切로 ㅗ+ㄹㅏㄱ. 즉 (→탁)이다. 본인은 '탁식'이 맞지만 주변에서 '택식'으로 잘못 부르는 경우가 많아 '택식'으로 바꿨다고 말했다(동아일보 '휴지통' 1970년 4월 18일자). 그러나 일부 문중에서는 처음부터 돌림자로 "택"으로 쓰기도 한다. 대법원 인명용 한자표에서는 '탁'으로만 신고 가능하다.
  2. 경성대학(이공학부 공학계열)과 전문학교(경성공업전문학교 및 경성광산전문학교)를 통합하여 국립서울대학교를 만드는 과정에서 학제 차이로 인해 공과대학/공과대학 전문부로 구분함. 1947년 ~1950년 졸업생까지만 적용
  3. 오죽 돈이 모자랐으면 당시 명동에 있던 명동공원 부지를 민간에 팔아 돈을 충당했을 정도였다. 소속 공무원들의 월급도 제대로 주기 힘들 정도였다고.
  4. 심지어 정부 지원도 거의 없었다. 서울메트로가 처음부터 빚더미 위에서 출발한 근본적인 이유. 그나마 당시 동부이촌동 모래밭을 아파트용지로 만들어 건설사에 매각한 대금을 투입하여 그나마 적자를 줄인 것.
  5. 1970년대 서울시 기획관리관과 도시계획국장을 역임했고, 양택식 시장의 측근으로 활약했다. 이후 서울시립대 교수 등을 역임하며 도시와 도시계획에 대한 많은 논문과 책을 남겼다.
  6. 박정희 정권 시절 서울시장은 군인-민간인이 번갈아가며 역임했다. 공교롭게도 3대 시장의 재임기간은 대략 4년씩으로 비슷하다.
  7. 1981년 광명시 승격으로 이들 지역의 서울 편입은 사실상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