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몽 관계

1 종속국이냐 독립국이냐, 영토 표시 문제

사실 원나라로부터 간섭을 심하게 받았기에 고려도 원나라의 영토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떡밥은 예전부터 있었다. 그러나 사실 이에 대해서는 많은 이견이 있고 뭐가 어떻다 확답하기 어려운 점이 많다. 당장 여러 자료들만 봐도 고려가 원나라의 속령으로 보는 시각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시각도 있기 때문에 어느 한 쪽의 의견만 맞다고 할 수는 없다.

1.1 고려를 독립적으로 보는 시각

한국 사학계의 주장은 이렇다. 고려는 대단히 심한 내정간섭을 받았지만 그래도 원나라와 다른 별개의 정치체제를 인정받았고, 원나라의 조세 수취지역은 아니었다. 나라 대 나라로 조공을 바치는 것과 직접 세금으로 걷는 건 분명히 다르다. 또한 원은 고려의 일부 영토로써 제주도철령 이북 등지에 총관부(동녕부,쌍성총관부,탐라총관부)를 설치하는데, 만약 고려가 원나라의 직접적인 식민지라면 고려 영토에 굳이 별개의 행정체계를 도입할 이유가 있을까하는 이유로 한국 사학계에서는 이러한 점을 들어 고려의 독립성을 강조하는 입장이다. 입성책동 역시 주요한 근거 중 하나.

그도 그럴게 동북공정 등 여러 국제정세와 관계된 문제들이 존재하는 데다가 이로 인해 여러 이견들이 난립하는 사례도 많다. 그리고 세계사적 관점에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실제로 이걸 무기 삼아 한국사를 비방하는 사람도 많고. 결정적으로 원나라고려 수탈이 심했기는 했다. 다만 원의 고려와의 관계에 대해 중화제국의 제후국 관계를 모방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또한 현재 엄연히 중국과 별개의 몽골인의 민족국가가 남아있기에 원나라 자체도 '어느 민족의 의한 다른 민족 혹은 문명의 지배' 라는 공식이 성립하여 '몽골의 중국강점기'가 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 경우는 중국 문명의 특수성이나 중국 학계의 주장 등등이 영향을 발휘해서 몽골 역사만이 아닌 중국 역사이자 중국 왕조중의 하나로도 편입되어있다.

1.2 종속국으로 보는 시각

세계사적인 입장에선 볼 땐 원 치하 고려는 원의 속령으로 친다. 형식적인 국가 틀은 유지했지만 왕조 건국과정의 문제 때문에 로마에 예속된 거나 마찬가지였던 헤로데 왕가 치하 유대 왕국[1] 및 조공을 바치고 신칭을 한 동로마 제국, 헝가리, 폴란드 등의 사례나 국체를 유지한 노브고로드 공화국 등 러시아 제공국들도 있고 이들도 모두 몽골제국의 속령으로 포함시키기 때문에 정도의 차이이지 원에 예속되어 있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따라서 이러한 특수성을 감안하더라도 왕위 계승에 원나라가 직접 관여한 일이 상당히 많은 점, 고려 왕들이 적극적으로 원의 문제에 개입하면서 스스로를 고려왕이자 원의 신하라고 말한 사례가 많다는 점[2], 여몽 연합군에 군대를 차출당한 점에 고려의 일부 영토로써 제주도철령 이북 등지에 총관부(동녕부,쌍성총관부,탐라총관부), 정동행성 등 원의 행정기구 설치 등을 고려할 때 외국에서 몽골의 속방이나 영토로 표기하는 것은 틀린 것이 아니다. 물론 나라 자체가 아예 없어져 버린 금나라, 서요, 송나라나 대학살을 당한 서하 보다 휠씬 낫다고 할수 있고. 당장 오스만 투르크 제국에 경기병을 공급해 주었으며 오스만 투르크의 술탄 혈통단절시 계승 서열 1위라는 소문이 돌 정도로 고려와 비교를 불허하는 우대를 받았던 크림 칸국 역시 오스만 제국의 영역으로 표시된다.[3]
이 당시 원의 내정 간섭은 다음과 같다.

  • 심양왕 제도(瀋陽王制度) : 남만주(서간도)일대의 고려인의 통치를 구실로 고려왕족을 심양왕으로 임명하여 고려에 대한 분열정책의 일환으로서 왕위쟁탈전까지 벌어지게 만들었다. 첫번째 심양왕이 된 충선왕은 고려에 귀국하지 않고 중원에서 원격 통치를 시작했고 측근세력들이 고려를 다스리다 보니 부패한 측근들에 의해 고려 조정이 어수선해졌다. 그리고 충숙왕 대신 왕고에게 심양왕을 준 후 정작 자신은 좌천된다. 원나라 영종이 충선왕을 티벳으로 유배보낸 것. 이후 고려 왕조는 막장 드라마를 찍기 시작한다.
  • 독로화(禿魯花) 제도 : 몽골어론 툴루게로 인질을 의미한다. 고려 후기 왕족 및 귀족의 자제들이 인질의 형식으로 원나라에 보내진 것. 1241년(고종 28) 처음으로 왕족 영녕공 준(永寧公綧)과 귀족 자제 10인이 끌려갔고 1271년(원종 12)에는 세자 심(諶 : 뒤의 충렬왕)과 송빈(宋玢), 설공검(薛公儉), 김서(金㥠) 등 귀족 자제 20인이 끌려갔다. 1275년(충렬왕 1)에는 대방공 징(帶方公澂) 등이 끌려갔다. 1279년엔 김방경(金方慶), 원부(元傅), 박항(朴恒), 허공(許珙), 홍자번(洪子藩), 한강(韓康), 설공검, 이존비(李尊庇), 김주정(金周鼎) 등 고위관직자의 자제들이 끌려갔다. 이후 1282년과 1284년, 1301년, 1313년에도 인질들이 끌려갔다.
  • 내정간섭 기구들의 설치
    • 정동행성
    • 순마소(巡馬所) : 원나라가 종래 고려의 포도기관(捕盜機關)이었던 야별초(夜別抄)를 혁파하고 만든 기관. 원나라의 다루가치(達魯花赤)가 제공관(提控官)이 되어 관리했다. 개경의 치안을 담당한다면서 반원인사를 주로 체포해갔다. 일종의 감찰기구.
    • 만호부(萬戶府) : 일본 정벌의 실패 직후인 1281년, 원나라가 고려에 설치했다. 관직 책임자는 원나라의 관직으로서 임명되었고 공민왕 이전까진 주로 원나라에서 임명했다. 만호(萬戶), 천호(千戶), 백호(百戶) 등 북방의 유목민족, 특히 원나라에서 주로 쓰던 십진법에 의해 군사를 편성하고 관리했다. 고려의 국방과 치안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 다루가치 : 1231년 서경을 비롯한 서북면 지역에 72명의 다루가치를 설치. 1년후 도단(都旦)을 개경에 파견하여 내정간섭. 1259년 원종이 귀국하면서 쿠빌라이의 다루가치들이 함께 와 전국에 배치. 1273년 삼별초의 항쟁이 좌절된 뒤 제주에 설치한 탐라총관부(耽羅摠管府)에 다루가치가 최종 배치. 역할은 주로 감찰관 역할, 내정간섭, 엄청난 수준의 공물 징수 감독 등이었다. 중서성을 비롯한 고급 관청을 제외하고 그 예하의 중앙관청과 모든 지방행정관청에 존재했다.
    • 결혼도감(結婚都監) : 과부처녀추고별감이라고도 불렀다. 1274년 3월에 최초로 젊은 여성 140인을 끌고 갔다. 이후 1355년(공민왕 4)까지 무려 80년에 걸쳐 민간의 독녀(獨女), 역적의 처, 파계승의 딸까지 모조리 긁어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수많은 공녀(貢女)들이 끌려갔다.
    • 응방(鷹坊) : 원나라가 조공품(朝貢品)으로 요구하는 해동청(海東靑)을 잡고 길러서 보내기 위해 설치하였다. 매사냥을 즐긴 몽고인들에게 매는 중요한 재산이었다. 궁궐 안을 비롯하여 전국 각지에 설치되었는데 매의 수요는 늘어만 갔고, 응방에 속한 관원들은 왕의 권력을 배경으로 횡포가 극심하였다. 고려 내의 몽골인과 같이 면역·면세의 특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경제적 기반으로 많은 사전(賜田)을 받았고 노비와 소작인을 거느렸다. 수많은 고려인들이 피폐해져 굶어죽었다.
  • 호칭 격하 : 짐->고, 폐하->전하, 태자->세자, ~조종->충~왕, 선지->왕지, 상서->판서, 시랑->총랑, 사->유, 주->정
  • 권문세족의 성장

영토 간섭은 다음과 같다.

  • 동녕부(東寧府) : 1269년 서북면병마사 최탄(崔坦) 등이 난을 일으켜 서경을 비롯한 북계(北界)의 54성과 자비령 이북 서해도(西海道)의 6성을 들어 원나라에 투항하였다. 1269년에서 1290년까지 21년간 존속했다.
  •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 : 1258년에 조휘(趙暉)와 탁청(卓靑)이 고려의 지방관을 죽이고 몽고에 항복. 1356년 쌍성총관부의 신흥 천호였던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이 공민왕에게 내응하면서 탈환. 1258년에서 1356년까지 98년간 존속했다.
  • 탐라총관부(耽羅摠管府) : 1273년 삼별초를 진압한 후 설치. 1300년 탐라만호부로 변경. 공민왕 때에 폐지되지만 장기간에 걸친 탐라총관부의 설치로 인해 반고려운동이 벌어져 1374년 목호의 난이 발생한다.

2 여담

사실 공녀를 포함해 막대한 재물을 원나라에 일방적으로 바치고 있었고 후대로 갈수록 내정간섭을 심하게 받았다. 이런 원나라의 횡포를 잘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충렬왕과 공주가 황제에게 바치려고 양가 집 딸을 뽑을 때 홍규의 딸도 뽑혔는데, 권세 있고 벼슬 높은 자에게 뇌물을 주어도 모면할 길이 없었다. 이에 한사기(韓謝奇) 더러 딸의 머리를 깎아 비구니로 만들면 어떻겠냐고 의논하자, 화가 홍규에게 미칠 것이라고 만류했다.

홍규가 듣지 않고 딸의 머리를 깎아버리자 그 말을 들은 공주가 대노해 홍규를 가두고 가혹한 형벌을 가했으며 가산까지 몰수했다. 또 그의 딸을 가두고 국문하자 딸은 자기 스스로 머리를 깎았을 뿐 부친은 정말 모른다고 진술했다.

공주가 땅바닥에 끌어내려 쇠 채찍으로 마구 때리게 해 만신창이가 되었으나 끝내 굴복하지 않았다. 재상들이 홍규는 나라에 큰 공을 세웠으니 작은 죄를 무거운 형벌로 다스려서는 안 된다고 건의했고 중찬(中贊) 김방경(金方慶)도 병든 몸을 이끌고 나와 간청했으나 들어주지 않고 바닷섬으로 유배보냈다. 얼마 뒤 홍자번(洪子藩)이 극력 청해 가산은 돌려주게 하였으나 노여움이 아직 풀리지 않아 그의 딸을 몽골 제국 사신 아쿠타이(阿古大)에게 넘겨버렸다.

─ 고려사 홍규 열전

설명하자면 힘있는 사회지도층, 그것도 공신 작위를 받을 정도로 영향력이 있었던 자의 딸을 마음대로 공녀로 차출하고 아버지도 도저히 자기 능력으로 안되자 딸을 비구니로 만들어서 어떻게든 빼내려고 했으나 결국 쇠채찍으로 고문을 당한 후 유배보내졌으며 그 딸은 결국 공녀로 차출당했다는 개안습한 이야기이다(...). 고려에 제일 우호적이었다는 쿠빌라이 칸 시절 벌어진 일이니 후대에는 설명이 필요없을 것이다.

더욱이 원 황실 계승 분쟁과 연관되거나 부원세력을 제거하려다 유배를 간 고려왕들이 적지 않았다. 더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원간섭기 이 시기 고려왕들은 말이 좋아 고려왕이지 실제론 혈통이나 문화적 측면으로 봤을 때 몽고 왕족이나 마찬가지였다. 실제로 고려왕들이 원 황실 쟁탈전에 직접 개입한 사례도 다수 발견된다.

게다가 몽골은 고려 왕실을 황금씨족의 일부로 인정해주었고, 공식적으로 계승권도 주어졌다. 그리고 이에 대한 역효과로 고려의 몽골화가 매우 심해졌을 뿐 아니라, 고려 왕실의 권한 자체가 흔들리게 되기도 하였다. 원종의 경우에는 신하들의 쿠데타로 쫓겨나자 쿠빌라이 칸이 "누구 마음대로?"하고 발끈하는 바람에 경악한 신하들이 복위시키는 등 원나라의 말 한마디에 고려 정치가 좌지우지되며 왕이 하루아침에 바뀌는 등 예속성이 매우 심해졌다. 대표적으로 충자 돌림 왕 중 2대째인 충선왕은 어려서부터 원황실에서 자란 덕분에 사실상 몽고인이나 마찬가지였고, 따라서 고려왕이라는 지위보다는 칭기즈칸의 자손이라는 지위에 더 만족하여 명목상 고려왕이었는데도 고려에 가서 통치를 하지 않고[4] 대도(지금의 베이징)에 눌러앉아 전지통치라고 자신은 중국에 앉은 채 고려에 쪽지만 보내 통치하기도 했다. 오죽하면 나중에는 오히려 원 조정에서 고려왕들에게 "니들은 니네 나라 가서 통치 좀 하지 그러냐?"라고 눈치를 주기도 했다(...).

공식적으로 고려인들은 원 나라가 정한 민족등급 4단계에서 몽골인-색목인에 이은 3번째 민족 대우를 받았다. 가장 아래가 남송인, 즉 남방 한인이었고 금나라 치하에 있었던 북방 한인과 한인 외의 민족들, 즉 여진이나 거란족이 3단계인 고려인과 같은 계급에 있었다. 실질적인 지위는 몽골인-색목인이 지배계급이고 남송인이 피지배계급이니까 고려인은 최하층은 아닌 피지배계급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공녀로 바쳐진 고려 여인들과 환관들로부터 고려의 문화가 퍼져 몽골의 고위 귀족과 황족들 사이에서 고려식 음식, 풍습, 옷 등이 유행하였는데 이것을 고려양이라고 한다
  1. 초대 창시자 헤로데 1세에돔 출신 유대인이었는데 하필이면 에돔 지방은 하스모니안 왕조가 정복하면서 강제로 유대교로 개종을 시켰기 때문에 순수한 유대인이 아니었다. 때문에 폼페이우스의 도움이 없었다면 유대 왕에 오를 수 없는 자였다.
  2. 특히 충선왕 대에는 형식적이긴 하지만 만주 지역까지 받아내기도 했다. 물론 그게 고려 영토라는 소리는 아니라 몽골이 최종 주권을 갖고 있어 물러나자마자 둘로 나눠야 했다.
  3. 동아시아의 특수성을 모른다는 비판도 있으나, 고려와 원의 관계는 역대 중국왕조 및 한반도 간의 관계와는 매우 다른 케이스이다. 충자 돌림 왕들의 제위기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시기 왕들의 제위는 매우 불안정했다.
  4. 충선왕이 고려에 있었던 시기는 1년도 채 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