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노 요코

주의. 문서 훼손이 수시로 발생하는 문서입니다.

이 문서는 과거에 문서 훼손을 빈번하게 당했거나 현재도 당하고 있는 상태이며, 앞으로도 빈번한 훼손이 예상되는 문서입니다. 문서 훼손으로 오해받지 않도록 주의해서 편집해주시기 바랍니다. 이 문서를 열람하시는 이용자께서는 문서 훼손을 발견할 시 신고해주시기 바라며, 우측 상단의 기록을 클릭하고 되돌리기 / 편집 취소를 클릭하셔서 가장 최근의 정상적인 버전으로 복구해주시기 바랍니다.
1212432510_yoko20ono.jpg

뒤의 사진은 젊은 시절의 오노 요코와 존 레논의 모습, 그리고 그 앞에 앉은 나이 든 오노 요코.

1 개요

1933년 2월 18일 출생. 일본의 설치 미술가이자 행위예술가. 하지만, 비틀즈 팬들에게는 "동양에서 온 희대의 마녀"라고 낙인찍히는 인물이다.

풀네임은 요코 오노 레논(Yoko Ono Lennon). 일본인으로서의 이름 한자 표기는 "小野洋子". 다만 미국에서 거주하고 있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オノ・ヨーコ로 표기하는 게 일반적이다. 洋子라는 한자 이름은 존 레논이 비틀즈 시절 만든 곡 "Julia" 의 'Ocean Child' 라는 가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유명한 플럭서스 계열에 속한 아방가르드 행위예술가로 플럭서스의 창시자인 조지 마치우나스로부터 열렬한 찬사를 받았다. 같은 계열의 존 케이지하고 백남준과도 친분이 있었다고 한다.

오노 에이스케와 야스다 이소코의 장녀로 태어났다. 증조 할아버지는 훗날 메이지 유신으로 발전한 반 도쿠가와 막부 운동에 참여한 자작이었다고 한다. 부친은 황실 혈통의 전도유망한 은행가, 모친은 야스다 재벌을 일으킨 명문 권세가의 딸로 오노 요코는 황족과 귀족들의 학교인 가쿠슈인(學習院)을 졸업했다. 여성으로는 최초의 철학과 입학이었지만 적응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 전에는 지유가쿠엔, 게이메이가쿠엔이 있다. 둘 다 가쿠슈인만큼이나 귀족 학교. 게이메이가쿠엔의 동기로는 히로히토 덴노의 아들들과 미시마 유키오가 있다.

어린 시절부터 고교 시절까지 일본에 잠시 살며 2차 대전을 경험하기도 했으나(1941~51) 원래는 샌프란시스코 태생이다. 또한 대학 때 뉴욕으로 이주하여 그 뒤의 대부분의 삶을 미국에서 보내며 예술 활동을 했으므로 미국의 예술가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 하지만 동양인이라는 점 때문에 나름 생각이 많았던 듯 자신을 '오렌지도 귤도 아닌 자몽' 이라고 표현했다.

비틀즈의 멤버 존 레논의 두번째 아내이기도 하다. 결혼할 때 즈음 비틀즈의 불화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비틀즈 해체의 원인을 논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이다. 본인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도 있겠지만 요코가 존이 비틀즈보다는 개인 위주의 활동을 하게 만든 것은 사실이다.[1]

2 작품 활동

남편과는 완전히 다른 예술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주로 설치미술이 가장 유명하지만 그 외에 실험적인 단편 영화를 제작하기도 했고 일반인이 범접하기 힘든 관념적인 음악을 만들기도 했다. 그녀의 행위예술과 설치예술은 여러 가지 작품이 있는데 주로 반전과 평화에 대한 메시지를 그 주제로 하며 아방가르드한 소재로 표현을 하였다.

오노요코 - Cut piece

주요 작품이자 가장 유명한 작품은 행위예술인 'Cut Piece(조각내기)'. 1964년 도쿄의 소게츠 아트 센터에서 첫 공연된 이 작품은 그녀의 대표적인 행위 예술 중 하나로 기록될 만큼 유명하다. 그 내용은 요코가 무대의 중앙에 무릎을 꿇고 앉아있고 그 공연을 구경하는 참가자들이 한 명씩 와서 가위로 알몸이 될 때까지 옷 조각을 하나하나 잘라 내는 것이다. 요코는 이 작품을 통해 사회적 연대와 사랑을 주요 주제로 하여 성(性)과 성차별, 그리고 인간의 고뇌와 고독으로 인한 거대한 우주적인 고통을 다루고 있다.

존과 그녀를 처음 이어줬다고 알려진 작품도 유명하다. 존 레논이 처음으로 요코의 전시회에 왔는데 천장에 하늘이 그려져 있고 사다리가 놓여있었다. 사다리를 올라가 천장을 자세히 본 존 레논은 거기서 "yes" 라고 쓰여진 작은 글자를 발견했다고 한다. 그 긍정적인 메시지에 처음으로 반했다고. [2] 이때도 그렇고 후일 낸 <Grapefruits> 작품집을 봐도 그렇고 타이포그래피나 언어를 설치미술의 일부로 사용하는 특색이 있다.

페이스북을 보면 요즘은 환경운동에 관심이 있는 듯하다.

3 존 레논과 만남 그 후

그녀의 말에 의하면 위에 이야기한 전시회가 끝난 뒤 존은 요코에게 찾아가 뜬금없이 망치를 빌려달라며 작업에 들어갔고, 요코는 거절했다고 한다. 뭥미 이때까지 요코는 존은 물론 비틀즈도 몰랐고 음악도 들은 적이 없었다고 한다. 주변 사람들이 '쟤 존 레논이라는 애인데' 하고 알려주고 나서 나중에 존이 다시 찾아오자 요코는 5실링에 망치를 빌려주겠노라고 했다. 이에 존은 "당신이 내게 상상의 못을 박을 망치가 되어준다면 상상의 5실링을 드릴게요" 라고 답했다고 한다.

...라는 것은 페이크고

요코는 존과의 첫만남을 이렇게 언플 회상했지만 이 부인했다. 존과 대면하기 전에 그녀는 이미 폴을 알고 있었고 폴에게 강력하게 대시한 바 있었던 것. 역시 요코는 미화와 왜곡의 달인! 폴에게 대시할 정도인데 존이나 비틀즈를 몰랐을 리 없다. 이외에도 롤링 스톤즈믹 재거를 비롯해 여러 락스타, 유명인들에게 들이댄 전적이 있다. (롤링스톤즈를 비롯해 비틀즈와 친하게 지냈던 락스타들에게 요코는 마녀라고 불린다)무슨 락계의 펄녀도 아니고..

어쨌든 그렇게 그들의 불륜이 시작됐고 2년 뒤에 존은 아내와 이혼하고 요코와 재혼한다. 그들은 반전운동과 실험음악 작업 등을 함께 하며 뉴욕에서 10년 정도 결혼 생활을 했다.

1980년 존이 암살당한 뒤 요코는 재혼하지 않고 아들 션을 키우는 데만 전념했다. 오늘날까지도 존과 살았던 뉴욕 아파트에 그대로 살고 있으며 창에서 내려다보이는 센트럴 파크에 존을 기리는 'Strawberry Fields' 를 만들어 매일 꽃을 바치고 있다는 로맨틱한 일화가 알려져 있지만

... 이것도 훼이크.

오노 요코는 존 레논이 죽기 직전 이미 존 레논과 별거 중인 상태였고 젊은 작곡가와 동거 중이었다.(사실상 이혼) 존 레논이 죽은지 4개월만에 그 작곡가와 다시 동거를 시작, 무려 20년간 동거를 했다. 둘이 운명적인 사랑이라는 것도 모순된 말인 것이 비틀즈 시절에도 유명한 바람둥이였던 존 레논은 오노 요코와 결혼 후에도 게속해서 다른 여성들과 바람을 피자 이에 화가 난 오노 요코가 존 레논의 집을 나가면서 '다른 여성과 바람을 필 거라면 차라리 내가 아는 사람과 펴라' 하고 자신의 비서 중 한명인 중국 출신의 메이 팡을 존 레논의 집에 보내서 둘이 동거하기까지 했다.

사실 요코가 욕먹는 더 큰 이유는 존 사후 그녀의 행실 때문인데 존은 생전에 자신이 죽고나서 화장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완전히 사라져버리는 것 같다면서.) 하지만 요코는 존이 죽고나자 바로 화장시켜 버렸고 존의 유골또한 가져가버려서 유골이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은 요코 외에는 아무도 없다.(...) 게다가 존의 장례식에 전처인 신시아는 물론 존의 사촌 누나들까지 못오게 했으며,[3] 존의 속옷부터 변기까지 싸그리 팔아먹고 유산을 독점해 신시아와 줄리안에겐 한 푼도 주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줄리안은 요코와 소송을 벌여야 했다. 줄리안은 기나긴 소송 끝에 유산의 일부를 찾았지만 그것으로 요코가 팔아먹은 아버지 유품을 찾는 데 고스란히 써야 했고(폴도 줄리안과 함께 요코에 의해 흩어진 존의 유품들을 사들였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불만을 토로한 바가 있다. 그냥 답이 없다.

showbiz_paul_mccartney_career_11.jpg

음?
폴 매카트니와 존 레논의 소울메이트 자리를 다투며 나름 애증의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작곡가 표기 문제로 법적 소송도 몇 번 치뤘지만 비틀즈 관련 행사 때는 매번 같이 만나 함께 인증샷을 찍어주신다.

유튜브에서 국내 기타리스트 정성하군의 동영상에 댓글을 달아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비틀즈의 해체의 이유는 자신이 아니라 폴에게 있다고 밝혔다.[4] 아니 이 년이...?

그러나 폴 매카트니는 그녀에게 역시 비틀즈의 해체 책임이 없다고 2012년 인터뷰를 통해 말했다. 오노 요코가 그들 사이에 끼어들기도 전에 이미 비틀즈는 분열 단계에 있었으며 존 레논도 이미 슬슬 밴드를 나가려고 준비하고 있었다고. 또한 시간이 흐르면서 폴도 오노 요코의 영향을 받은 존의 전위 음악을 높게 평가하게 된 듯하다. 기사 내용.

첨언하자면, 폴 매카트니는 그녀의 허락 없이는 비틀즈 당시 만들었던 노래도 부를 수 없다. 비틀즈의 노래는 대개 레논-매카트니로 되어있고, 존 레논이 죽은 이상 저작권의 반은 유족인 요코에 있기 때문. 레논-매카트니라고 해서 모두 공동 작곡이 아니다. 오히려 활동 극 초기에만 둘이 공동으로 작곡했고 (공식적으로 <Baby's in Black>이 마지막으로 존과 폴이 50:50으로 합작한 곡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후에는 녹음 중간 중간에 편곡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안하는 것을 제외하면 기본적인 곡은 존 따로 혹은 폴 따로 곡을 만든 것이 대다수인데도[5][6] 표기가 레넌-매카트니이기 때문에 폴 매카트니는 비틀즈 시절 자신이 만든 노래조차 요코의 허락이 없으면 부르지 못한다.(...)[7]

4 왜 비판받는가?

비틀즈(존 레논이 아닌 그룹 비틀즈의) 빠에게는 마크 채프먼(존 레논의 암살범)과 함께 척살 1위 대상으로 손꼽힌다. 모 외국 사이트에서는 마크 채프먼이 레논이 아니라 요코를 암살했다면 비틀즈 팬들에게 영웅으로 불렸을 것이라는 언급도 볼 수 있다. 비틀즈 갤러리에서 사람들의 반응만 봐도 어느정도인지 알 수 있다.

존의 전부인인 신시아 파웰의 자서전에는 신시아와 요코의 첫 만남이 기록되어 있는데, 바로 신시아와 존의 집 침실이었다! 존과의 불화에 지쳐 여행을 다녀온 신시아를 맞아준 사람은 신시아의 가운을 입고 침실에서 나오는 요코였다고... 안주인 마냥 차도 대접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땐 요코도 결혼을 유지하고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쌍방 불륜이다.) 물론 불륜은 혼자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점에 대해선 존 레논도 마땅히, 혹은 그 이상 자신들의 과오에 대해 비판받을 여지가 있다.

또 존과 신시아 사이에 난 아들인 줄리안에게도 좋은 새엄마가 되어주지 못했다. 전남편 사이에서 낳은 딸[8]과는 아예 연을 끊었는데 자신이 낳지도 않은 애를 잘 챙길리가 존이 요코와 결혼한 후 존은 줄리안에게 좋은 아버지 역할을 못했는데 이에 상처받은 줄리안이 아버지에게 편지를 썼으나 이 편지들을 요코가 빼돌렸고, 존 사후 이걸 경매로 팔아버렸다! 그리고 존 레논 사후에 그의 유산을 독점함과 동시에 줄리안과 존 레논의 물건을 경매로 팔아치우기 시작했다. 그 중에는 존의 속옷부터 시작해서 사용했던 변기(!), 그리고 채프먼에게 저격당할 당시 존이 쓰고 있던 피 묻은 안경도 있었다.심지어 분명히 줄리안의 물건이었을 물건들까지 팔아먹었다[9] 줄리안은 안습하게 그나마 받은 쥐꼬리만한 유산[10]으로 아버지와 추억이 기린 물품을 다시 구매하는 데 소비했다. 최대의 피해자는 줄리안.[11] 존 레논 추모행사에도 자신의 아들인 션만 참석시키고 줄리안은 부르지도 않을 때가 많다.

다른 무엇보다 직접적으로 비틀즈에 가장 해가 된 것은 그들의 음악 활동에 돼먹지 않게 간섭을 했다는 점이다. 그들만의 성역인 녹음 스튜디오에 (단순히 들어오는 차원을 넘어서) 매트리스를 끌고 들어와 누워있거나 멤버들 앰프를 깔고 앉아있는 등 심지어는 비틀즈의 음악 자체에 대해서도 자기 의견을 내세우면서 간섭을 해댔다.존 레논이 오냐오냐 해주니 지가 비틀즈라도 되었는 줄 안 모양이다. 이는 비틀즈의 불화와 존과 폴, 조지의 사이가 악화되는데 큰 일조를 했다.[12]

조지의 개인 사물함을 뒤져 찾아낸 다이제를 먹은 적도 있다. 돼지년 조지는 빡칠대로 빡쳐서 요코에게 쌍욕을 퍼부었고 이게 존과 조지의 싸움으로 커졌다고 한다. 지금도 외국의 뉴스사이트에 요코 관련 기사가 올라오면 '됐고 조지 다이제나 돌려줘라'하는 리플이 종종 달린다.

요코가 가장 비난을 받는 지점은 존 본인의 음악적, 사회적 성향을 바꾸었다는 점에 있다.[13][14] 존 사후 저작권 문제의 갈등에서 알려진 대로 비틀즈의 작곡은 존과 폴의 합작이며 두 사람은 서로 우위를 주장하지 않았으나 요코는 이 부분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으며 결과적으로 존과 폴의 공동작업이 사라지면서 비틀즈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특히 존과 폴은 많이 친밀했는데 요코 특유의 예술가적인 정신세계에 존이 크게 경도되면서 두 사람의 공감대를 많이 해쳤고 결과적으로 존에게 두번째 결혼은 첫번째와 달리 '폴과의 이혼' 을 선언한 셈이 되었다.

위에 언급했듯이 오노 요코의 기이한 만행들로 폴 매카트니와 조지 해리슨은 그녀를 대놓고 싫어했으며, 이 점이 존 레논의 분노를 가져왔다. 그는 자신의 연인이 무시당한다고 생각했고 그것이 안 그래도 흠집이 나던 그들의 관계에 더 큰 균열을 가져왔다. 멤버 중 맏형이었던 링고 스타만이 오노 요코에 대해 험담하지 않고 그들의 관계를 존중해주었다고 한다.(그렇지만 링고 또한 티내지는 않았으나 요코의 기이한 행동들을 싫어했다.[15])

물론 비틀즈 해체가 오노 요코 하나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노 요코가 비틀즈의 해체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분명히 비틀즈의 해체에는 그녀 이외의 외부적인 요인들과 멤버들 사이의 내부적인 갈등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 [16] 다만 최근에는 요코가 비틀즈 해체 주범으로 욕먹는 일은 적고 비틀즈 해체전과 후, 존 레논 사후에 저지른 만행들로 매우 욕먹는다.

존 레논과 오노 요코의 사랑이 흔히 세기의 로맨스로 받아들여지고는 하는데, 사실 이들은 불륜으로 시작해 불륜으로 가득했다. 결혼해 사는 도중에도 크고 작은 불륜 사건들이 벌어졌고, 메이 팡은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다만 이런 불륜 관계는 부부 생활에 권태를 느끼던 부부가 합의해서 이뤄진거라고...

노래도 아주 실험적으로 해서 꺄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청자들을 고문하기도 한다. 이 때문에 와치모조 선정 최악의 가수 1위에 올랐다.
  1. 존이 요코를 처음 만난 것이 화이트 앨범 작업 도중이었는데, 앨범을 들어보면 알겠지만 한 밴드의 앨범이라고 부르기 민망할 정도로 따로 논다. 폴은 'Blackbird' 녹음에 치중했고, 존은 'Revolution 9'과 같이 실험적인 곡들을 작업하는데 바뻤다. 에릭 클랩튼을 끌고 와서야 존과 폴이 성의를 보여 겨우 녹음을 진행할 수 있었던 조지의 경우 무척 지못미. 사실 요코가 아니라고 해도 존은 비틀즈 활동에 상당한 회의를 갖고 있었으며, 조지 역시 항목을 참고해보면 알겠지만 몹시 불만스러워 했다. 요코가 존의 자아 극대화를 부추긴 것은 사실이지만, 그녀가 없었다고 해도 비틀즈의 음악적 이견차의 멤버들 간의 불화는 어쩔 수 없이 생겨났을 것이다.
  2. 이건 요코가 지어낸 이야기다. 자세한 건 아래 항목 참조
  3. 장례식에 가겠다는 신시아에게 "우리가 동창도 아니고 그렇게 친한 사이는 아니지않아요?"라며 오지말라고했다. 자기 장례식도 아니면서
  4. 비틀즈 해체의 가장 큰 책임이 폴에게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폴은 사실 해체전까지 영화작업을 리드하는등 팀의 화해를위해 지쳐버린케이스다. 폴 역시 감정적인 태도를 보여주었지만, 비틀즈 해체의 직접적인 원인으로는 두 가지가 있는데 첫번째는 해체의 원인이 어디까지나 존에게 있다는 얘기로 존은 요코의 몰상식한 행동을 두고보았을 뿐더러,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다른 멤버들을 비난하기까지 했었다.두번째는 어차피 언젠가는 해처될 그룹이었다는 얘기다.
  5. 비틀즈가 7년이라는 짧은 활동기간 동안 수 많은 명곡들을 발표할 수 있었던 이유로 상대방보다 더 좋은 곡을 만들려는 존과 폴의 경쟁심과 조지 마틴의 훌륭한 프로듀싱 덕분이라는 연구결과도 있다.
  6.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페퍼상사에 수록된 존의 명곡 'A Day In The Life'다. 존이 전체적인 곡을 작곡한 뒤 '아 이거 좀 밋밋한데' 싶어 망설이고 있던 곡에 폴이 즉흥적으로 작곡한 짧은 곡을 덧붙인 것.
  7. 여담으로 반대의 경우가 그룹 . 후기의 앨범에서 멤버들끼리 저작권으로 싸우는 걸 막고자 명의를 통합해버렸다.
  8. 두번째 남편 안소니(토니) 콕스와의 사이에서 낳은 쿄코 콕스가 있다.
  9. 존 레논이 줄리안에게 물려준 기타와 줄리안의 어린 시절에 존이 줄리안과 같이 놀아줄 때 그림을 그렸던 스케치북 등
  10. 10%도 못 받았다. 상속법상으로는 25%는 받아야 했는데 그것의 반도 못 받은 셈. 그 돈도 존 레논이 죽고 10년이 훨씬 넘은 1996년에 가서야 받았다. 물론 법정이자는 계산이 안되었다.
  11. 참고로 줄리안은 자신의 이복 동생이자 존과 요코 사이의 아들인 션과는 잘 지낸다고. 그런데 최근 션이 줄리안이 자신의 엄마인 요코를 비난했다는 이유로 공식적인 인터뷰는 물론 줄리안에게 난리를 쳐댔고 결국 줄리안이 사과하게 만들었다. 역시 그 엄마에 그 아들
  12. 일단 스튜디오에 세션맨을 제외한 외부인을 데려오지 않는다는 것은 비틀즈의 불문율이었다. 그러나 존이 스튜디오에 요코를 데려오자, 폴은 자신의 아내 린다와 함께 스튜디오에 오는 것으로 맞대응했다. 그래서 존이 요코를 스튜디오에 데려온 시점은 비틀즈의 와해가 시작되는 시점으로 평가된다.
  13. 그러나 이는 비틀즈라는 밴드를 지향하는 팬들의 생각이다. 존 레논의 음악 세계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나 일부 평론가들은 오히려 오노 요코와 만나기 시작한 이후 솔로로 발표한 앨범에서 존의 음악 세계가 진보하였다고 말하기도 한다.문제는 요코가 자기랑 만나기 이전의 비틀즈 음악을 아이돌 음악인 것 마냥 까내리고있다는 거지
  14. 화이트 앨범 이후 존의 음악적 성향은 확실히 진보했고, 사회적 성향 역시 사회참여적으로 바뀌었다. 멤버 모두가 귀여웠던 활동 초반부를 그리워하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실험적 성향의 도입에 무척 거북하게 느껴지겠지만, 그렇게 치자면 폴 역시 상당한 음악적 변화를 보였다. 존 레논 항목 후반부 참고.
  15. 링고의 아내였던 모린이 인터뷰에서 링고가 기이한 행동을 하는 요코를 매우 싫어했다고 밝힌적이 있다.매우 화가났을 때는 요코의 관해 욕도 했다고
  16. 조지 해리슨이 항상 자신이 존과 폴의 반주자밖에 안 된다고 투덜거려온 것이 좋은 예이다. 하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따로 있는 데, 바로 브라이언 엡스타인 사후의 매니지먼트 문제로 폴과 나머지 멤버들이 대립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