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세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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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 KGC인삼공사 No. 41
오세근(吳世根)
생년월일1987년 5월 20일
국적대한민국
출신지인천광역시
출신학교안남중학교
제물포고등학교
중앙대학교
신체200cm, 105kg
포지션센터
프로입단2011년 드래프트 1번 (안양 KGC인삼공사)
소속팀안양 KGC인삼공사 (2011~)
수상내역MBC배 전국대학농구대회 신인상(2007)
KBL 최우수 신인(2012)
KBL 플레이오프 MVP[1](2012)
KBL 베스트 5 1회(2012)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 은메달
2014 인천 아시안 게임 금메달
2011~2012 한국프로농구 최우수 신인
박찬희
(안양 KGC인삼공사)
오세근
(안양 KGC인삼공사)
최부경
(서울 SK 나이츠)
2011~2012 한국프로농구 플레이오프 MVP
하승진
(전주 KCC 이지스)
오세근
(안양 KGC인삼공사)
양동근
(울산 모비스 피버스)

모자가 MLB이다...

1 개요

사자왕
2011년 프로농구 판을 뒤흔들고 있는 괴물. 이미 아마 농구시절부터 대학 농구 무대를 초토화시켰던 그 기세 그대로 프로에 데뷔해서 그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는 선수다.

대학 초년 시절부터 국가대표에 발탁되어 김주성의 뒤를 잇는 국가대표의 기둥으로 역할을 할 것이 거의 확실시되는 선수. 언론에서 쓰는 별명은 라이언 킹.

2 기록

항목참조

3 선수 경력

3.1 아마 농구

여타 농구 선수와 달리 농구를 늦게 시작했다. 동인천중 2학년 때, 길거리 농구 대회에서 뛰는 모습을 보고, 농구부에서 스카웃 제의를 받아 그 때서야 비로소 농구를 시작했다. 결국 부족한 기본기 때문에 1년을 쉬면서 기본기를 먼저 익혔고, 이 때문에 중앙대의 무적전설을 쓴 다른 동기인 함누리, 김선형보다 한 살 더 많게 되었다. 안남중으로 전학을 가서 농구부에 들어가 활약하기 시작해 제물포고 때 이미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일찍부터 아마 농구 무대, 특히 대학 무대를 평정했는데 대학 입학 예정자 신분으로 참가한 2006 농구대잔치에서 프로 선수로 구성된 상무 상대로 21점에 25리바운드를 잡아내는 괴물같은 실력으로 이미 대학 무대의 레벨을 넘어선 선수임을 입증했다. 결과적으로 대학 무대에서 오세근을 잡을 선수는 아무도 없었고, 동기인 김선형, 함누리와 함께 중앙대가 대학 농구 역사상 최다 연승 기록은 52연승을 기록하는데 주역 중의 주역이었다.

심지어 졸업반인 2010년 대학리그에서는 상명대학교 상대로 14점 18리바운드 13어시스트 10블록의 기록을 세우며, 한국 농구 역사상 최초의 쿼드러플 더블의 대기록을 달성했다.[2] 오세근이 중앙대학교에서 재학하는 4년간 중앙대가 아마 무대에서 진 경기는 단 여섯 번에 불과하다. 이런 괴물을 모든 팀들이 침을 질질 흘렸고, 탈 아마 무대의 실력을 과시하는 그의 조기 프로 진출을 원하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대학 입학 조건이 4년간 모두 채우는 것이었기 때문에 결국 그는 아마 무대에서 4년을 뛰고서야 데뷔할 수 있었다.

3.2 인삼공사 리빌딩의 최종 목표

2011년 드래프트에서 로터리 픽을 가진 4팀 모두 1픽은 무조건 오세근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이 중 1픽의 영광을 얻은 것은 전년도 8위였던 안양 KGC인삼공사 농구단.[3] 1픽이 나오는 순간 이상범 감독은 손을 번쩍 들며 환호했다. 주희정김태술과 바꾸면서 시작한 인삼공사의 대규모 리빌딩이 끝났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실제로 이상범 감독은 1픽을 얻기 위해 픽 뽑기 운의 황제(...) 허재 감독을 찾아가 허재의 기운을 얻기 위해 손을 잡았다고(...)[4]

오프시즌 동안 국가대표 차출로 인해 제대로 팀 훈련을 소화하지 못해 손발이 맞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데뷔부터 완전히 KBL 무대의 괴수로 군림하고 있다. 사실상 인삼공사는 외국인 선수를 두 명 쓰는 것과 다를 것 없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 외국인 선수와 붙어도 밀리지 않는 몸싸움과 골밑 지배력을 보여주며, 인삼공사를 단숨에 우승 후보로 탈바꿈시켰다. 심지어 기존용병인 로드니 화이트가 부상으로 이탈한 이후 대체용병 위긴스가 엄청난 잉여력(...)을 뽐내고 있음에도 팀의 변함없는 연승행진을 이끌고 있다. 유례없이 뛰어난 신인들이 많이 나온 2011-12시즌이지만, 그 중에서 신인왕은 오세근이 유력하다는 것이 중론. 신인왕은 물론이요 MVP로까지 거론되고 있는 상황이니... 김선형, 최진수 지못미 2011/12 시즌의 스탯은 평균 14.98 득점, 1.5 어시스트, 8.1 리바운드, 1.5스틸, 1.3 블락슛으로 대형 신인의 면모를 확실하게 보여주었다.

PO에서 KT 상대로 평균 13.8점 9.0 리바운드로 활약하면서 팀을 KBL 챔피언결정전으로 이끌었다. 이대로도 대단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KBL 챔피언결정전에서 그야말로 자신이 왜 한국 농구의 차세대 기대주인지를 제대로 보여줬다. 매치업 상대인 김주성을 압도하면서 골밑을 장악, KBL 챔피언결정전 6경기에서 평균 17.5점 5.3 리바운드로 활약하면서 팀을 창단 첫 우승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오세근은 KBL 역사상 첫번째로 신인으로 챔피언결정전 MVP가 되었다. 이로서 오세근의 시대가 열렸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2012년 4월 10일에 열린 KBL 시상식에서 총 유표 투표 80표 중 72표를 얻어 신인상을 수상했다.차점자는 7표를 얻은 김선형. 나머지 1표는 최진수로 추정되나 확실하지 않다. 11-12 시즌 Best 5의 센터 부문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2011-12 시즌에 달고 있는 발목 부상이 비시즌 동안 올림픽 예선 참가로 인해 제대로 휴식을 취하지 못하면서 결국 발목 수술을 받게 되었다. 결국 2012-13 시즌을 통째로 다 날려먹었다.(...) 소속팀인 KGC인삼공사는 결국 어찌어찌 해서 4위를 했지만, 오세근의 공백을 아쉬워할 수밖에 없었다.

13-14 시즌에 접어들어도 2라운드 쯤에야 복귀 가능하다는 분석이 나왔지만, 회복이 빨랐는지 개막전부터 조금씩 출장하기 시작했다. 다만 완전히 나은 건 아니기 때문에 경기감각 조율 차원에서 교체출전을 하는 정도. 그리고 아직까지는 100%가 아니라 위력도 전보다 훨씬 떨어진다.

13-14 시즌이 끝나고 상무에 입대했으나 국가대표로 인천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따내면서 광속 전역에 성공했다!!! 1쿼터 이병 오세근, 2쿼터 일병 오세근, 3쿼터 상병 오세근, 4쿼터 병장 오세근, 종료 전역!! 어찌나 기뻤던지 경기 끝나고 라커룸에서 했던 말은 "오늘 내가 다 쏠게!!" 그리고 10월 24일 공식적으로 전역한 이후 30일 고양 오리온스와의 홈 경기에 복귀전을 가졌고, 팀은 오리온스의 연승을 막아앴다. 그 후로 인삼공사의 성적이 크게 좋아진건 없지만 오세근은 꾸준하게 활약하면서 리그 최고의 토종빅맨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줬다. 그러나 그러던 중 복숭아뼈 골절이라는 부상을 당했다. 올스타전 이후 복귀를 해서 나쁘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나 인삼공사는 팀 외적으로나 내적으로 조금 어려운 상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공/수에서 좋아져 왜 오세근이 대단한 선수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15-16 시즌 시즌을 앞두고 불법 도박 사건이 터지면서 여러 경기 결장을 하다 복귀를 했다. 그러나 예전 만큼의 모습을 보여주진 못하고 있다. 가끔 폭발하여 상당히 좋은 모습을 보여주긴 하지만 다르게 말하면 기복이 심해졌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농구선수는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이 전성기다 라고 이야기 하지만 그건 사람마다 다르고 실제 NBA 선수들 같은 경우는 제대로 개인 퍼포먼스 포텐이 터지기 시작하는건 3년차 쯤, 즉 한국 대학교 3~4학년 나이때 찾아온다. 오세근의 경우는 1년 유급을 한 경험도 있고 4학년을 마치고 나온 케이스이기 때문에 비교적 늦게 프로에 진출했다. 더불어 30대 초반까지 전성기를 누리기 위해선 부상이 없다는 전제가 매우 크다. 그러나 오세근은 계속해서 발목 부상을 당했기 때문에 비교적 젊은 나이부터 전성기에서 내려오고 있다. 근데 12점대 득점에 7개대 리바운드

비록 폼은 다소 떨어졌다고 하더라도 이번 시즌 꾸준히 12득점 7.5리바운드 정도의 기록을 유지하고 있으며 팀 공격루트가 이정현, 박찬희 등 백코트로 옮겨간 점을 고려하면 여전히 수위급 센터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3.3 국가대표

고교 졸업자 신분으로 프로 선수 주축의 상무를 20-20으로 털어버리는 모습으로 충격적인 데뷔를 했기 때문에 대학 1학년 때부터 국가대표로 발탁되었다. 2008 베이징 올림픽 농구 세계 예선전부터 대표선수로 발탁되어서 각종 대회에 국가대표로 뛰고 있다.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에서는 농구 은메달을 차지하기도.

전반적으로 몸싸움이 KBL보다는 관대한 국제무대에서 터프한 골밑 장악력을 보여주고 있지만, 아직 슛이나 세기 면에서는 좀 더 관록이 붙어야 한다는 평. 하지만, 그간 국가대표의 대들보 역할을 한 김주성의 후계자로 오세근이 가장 유력하고, 가장 재질이 있다는 점에는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하승진, 이승현 등과 함께 한국 국가대표 팀의 골밑을 힘으로 지킬 수 있는 몇 안되는 선수다.

2014 인천 아시안 게임에서 드디어 금메달을 따면서 광속 전역이 가능해졌다! 바로 나가는 것은 아니고 절차에 따라야 하기 때문에 약 한 달 정도 걸리며 이에 따라 복귀 시점은 빨라야 1라운드 후반이나 2라운드가 될 것으로 보인다. 오세근은 규정에 따라 2014-15시즌에는 샐러리캡에 포함되지 않는다.

3.4 충격과 공포의 불법도박 혐의

토세근
2015년 9월 8일 현직 프로농구 선수 11명이 불법도박 혐의로 불구속 입건됐는데, 몇 시간 후 KBL에서 해당 11명에게 기한부 출전보류 처분을 내리면서 그 명단을 발표했는데, 그 명단에 오세근의 이름이 포함된 것으로 확인돼 팬들에게 충격과 절망을 안겨줬다. 2015년 10월 25일 현재 프로가 아닌 대학 시절의 도박, 소액 배팅 등을 이유로 기소 유예 처분 되었으며 그간의 KBL의 징계 수위를 봤을 때 김선형 등과 함께 조만간 복귀가 가능 할 듯 하다.

결국 20경기 출장정지에 연봉의 5%인 900만원 벌금이 결정 되었다. 저 20경기는 개막전 경기 이후에 계산되는 것으로 11월 중순에 복귀가 가능하게 되었다. 여담으로 오세근은 발목이 좋지 않고 체력적으로 힘든 상황이였는데 이번 20경기 출장 정지는 오히려 오세근에게 발목 부상 회복 및 체력회복을 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라는 평도 나오고 있다. 11월 10일 KCC와의 경기 시작 전 팬들에게 본인의 잘못을 이야기 하고 사죄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11월 14일 삼성과의 원정경기에 복귀되었다. 그리고 존재감 어디 안 간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팀 승리를 견인. 그리고 오세근 본인도 현재 선수단에 대해 굉장히 기대가 크다는 인터뷰를 했다. 본인도 출장 정지 기간 동안 느낀 것이 많은 듯.

아무리 복귀했다지만 징계 받은 올해 김선형과 같이 올스타전 베스트5로 선정되었다......크블 수준하고는

대학시절의 잘못으로 평생의 오명을 쓰게되었다. 하지만 철저히 반성하는 자세와 앞으로의 수많은 경기들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언젠가는 주홍글씨도 희미해질 것이다. 열심히 해주시길.

4 스타일

늦게 농구를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기본기가 좋은 편이다. 2M의 키에 100Kg가 넘는 몸무게에도 스피드도 괜찮고, 탄력이 좋다. 점프력이 좋은 편이기 때문에 대학 무대에서는 심심치 않게 덩크를 터뜨리기도. 늦은 나이에 시작했음에도 스텝이 좋은 편이라는 점이 높게 평가받고 있다.

오세근의 최고 강점은 바로 힘으로, 외국인 선수들도 오세근의 파워플레이에 버거워한다. KBL에서 첫 손가락에 꼽히는 웨이트 트레이닝 광으로 체격은 대학시절부터 프로선수들을 능가했었다. 2010년 국가대표로 뽑혀 미국 전지훈련을 갔을 때 연습경기에서 오세근과 매치업한 미국선수들이 오세근의 힘에 놀라서 "혹시 오세근이 주사를 맞느냐?"며 대표팀 선수들에게 물어봤을 정도. 2015년에 도박 혐의로 아시아선수권에 나오지 못하자 외국인 기자들이 이구동성으로 Big Oh는 어디갔냐고 물어볼 정도.

다만 국제 무대에서는 외국 센터들의 키를 의식해서 자주 외곽에 나와 던진 것이 잘 안 들어가는 경우도 많았다. 이는 대학 무대에서 적수가 없다보니 매번 골밑에서만 놀면서 생긴 일인데, 실제로 슛이 그렇게 약한 선수는 아니라고. 당장 2011-12 시즌 KBL에서도 자유투가 70%가 넘는 준수한 수준이다. 이는 프로에서 관록이 붙으면서 점차 해결될 문제로 보인다.

키가 센터치고 그리 큰 편은 아니지만, 뛰어난 BQ를 바탕으로 이를 극복하는 타입. 운동능력이 뛰어나서 약간 작은 키는 그렇게 큰 흠이 되지 않는다. 더군다나 기술도 있으며 동작 하나하나가 깔끔하고 군더더기가 별로 없는 편이다. 한마디로 조금 아쉬운 신장을 제외하면 빅맨으로서 갖출 건 모두 갖춘 선수이다.

그러나 족저근막염에 걸리면서 부상이 잦다는게 단점이 되었다. 한시즌을 통체로 나오지 못했고 그 후에도 계속해서 부상을 달고 살았다. 실제 그 여파로 전보다 외곽에서 플레이 하는 빈도가 늘었고 한국 지도자들은 오세근의 변화에 대해 썩 맘에 들어하지 않는다고 한다.[5][6] 오세근이 남성팬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이유가 신인때 파워풀한 플레이를 보고 남성팬들이 마초스러움에 반해 동인남(...)이 되어버린 걸지도

본인 스스로 노기꾼의 팬이라고 하며 등번호도 노비츠키의 41번을 달고 있다. 부상 이후 외곽 플레이 빈도와 함께 노비츠키 같은 턴어라운드 페이드어웨이도 자주 사용하고 있다.
  1. 2011-12 시즌부터 기존의 챔피언결정전 MVP가 플레이오프 MVP로 바뀌었다. 관련기사
  2. 이 기록은 NBA에서도 단 네 번밖에 나오지 않은 초유의 대기록이다.
  3. 이 때 2순위 SK는 김선형을 3순위 오리온스는 최진수를 뽑았다. 뽑기 운이 지지리도 없기로 유명한 전자랜드는 함누리를 뽑았는데...
  4. 허재는 원주 TG삼보 시절에 김주성 1픽으로 말년에 우승 한 번 더 하고 은퇴했고, KCC 감독이 돼서는 1픽으로 하승진전태풍을 뽑았다. 심지어 전태풍은 뽑기 순번 상 제일 마지막이었는데, 앞의 9팀이 모두 1픽을 못 뽑는 기적이 일어나서 뽑게 되었다(...) 그것도 모자라 2012년에는 아예 1.5%를 뚫고 1순위로 심스를 뽑았다.
  5. 한국은 아직도 스트레치 포워드 보다 빅맨이라면 골밑에서 놀아야 한다는 인식이 상당히 강하다.
  6. 특히 데뷔 초 오세근의 파워풀한 골밑 공략에 반한 농구 팬들이 꽤 많았었기 때문에 현재 부상으로 인한 플레이스타일 변화에 아쉬움을 느끼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