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튼 존

1970년 발매된 엘튼 존의 정규 앨범에 대해서는 Elton John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역대 아카데미 시상식
주제가상 수상작
제66회
(1994년)
제67회
(1995년)
제68회
(1996년)
Streets of Philadelphia
브루스 스프링스틴
(필라델피아)
Can You Feel The Love Tonight
엘튼 존
(라이온 킹)
Colors of the Wind
앨런 멘켄
(포카혼타스)
역대 골든 글로브 시상식
주제가상 수상작
제51회
(1994년)
제52회
(1995년)
제53회
(1996년)
Streets of Philadelphia
브루스 스프링스틴
(필라델피아)
Can You Feel The Love Tonight
엘튼 존
(라이온 킹)
Colors of the Wind
앨런 멘켄
(포카혼타스)
역대 그래미 시상식
그래미 레전드상
1998년1999년2003년
루치아노 파바로티엘튼 존비지스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입성자
이름엘튼 존
ELTON JOHN
분야음악
입성날짜1975년 10월 21일
위치6915 Hollywood Blvd.


본명엘튼 허큘리스 존 경
(Sir Elton Hercules John)
개명 전 이름레지널드 케네스 드와이트
(Reginald Kenneth Dwight)
국적영국
출생일1947년 3월 25일, 런던 피너
거주영국 버크셔 주 윈저
미국 캘리포니아로스앤젤레스, 조지아애틀란타
프랑스 니스 리비에라
직업작곡가/가수, 사회운동가
신장173cm
학력왕립음악원 중퇴
부모아버지 스탠리 드와이트[1]
어머니 실라 아일린 해리스
의붓아버지 프레드 페어브라더[2]
배우자레나테 블라우엘(1984~1988)
데이비드 퍼니시(1993~, 2014년 결혼[3])
자녀장남 재커리 잭슨 리번 퍼니시존
차남 일라이저 조지프 대니얼 퍼니시존
종교무종교
활동1962년~
데뷔1969년 1집 Empty Sky
악기보컬, 건반 악기
장르, , 피아노 록, 팝 록, 로큰롤, 소프트 록, 글램 록
과거 소속블루솔로지 (1962~1968)
별명Rocket Man, Captain Fantastic
레이블Mercury, Island, Virgin EMI
링크[]> > []> >
서명


1 개요

팝의 거장 (Master of Pop)
Rocket Man, Captain Fantastic
영국뮤지션. 1947년 3월 25일 출생.[4] 출생지는 런던 북서부의 피너[5]이다. 어릴 적 이름은 레지널드 케네스 드와이트(Reginald Kenneth Dwight)였다. 1968년 5월 7일 자신의 동료들 엘튼 딘과 롱 볼드리의 이름을 따와 엘튼 존(Elton John)으로 지었고, 3년간 예명으로 사용하다가 1972년 1월 6일 엘튼 허큘리스 존(Elton Hercules John)으로 [법적개명했다.][6]

반세기 동안 수많은 앨범과 싱글을 발표하며 대중성과 음악성을 동시에 거머쥔 살아있는 전설이다. , , 발라드, 컨트리, 블루스, 가스펠, R&B, 재즈, 훵크, 프로그레시브 록, 글램 록, 레게, 댄스, 뉴웨이브, 디스코, 클래식, 영화 음악, 뮤지컬 음악 등의 장르를 가리지 않고 수준 높은 음악을 만들어내고, 끊임없는 창작력을 보여주는 진정한 천재 음악가. 그를 명칭하는 대표 닉네임은 Rocket Man, Captain Fantastic. 1967년부터 함께하고 있는 작사가 버니 토핀의 닉네임은 Brown Dirt Cowboy.

공인된 음반 판매량만 1억 6천만 장이 넘는다. 비공식 기록까지 합치면 2억 5천만~3억 장에 이르고,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음반 판매량을 거둔 뮤지션 5위로 집계되었다.[7] 또한 세계에서 가장 많은 싱글 판매량을 거둔 뮤지션 중 하나. 1970년대빌보드 앨범 차트 1위를 가장 많이 기록한 뮤지션이며[8] 빌보드 앨범 차트 역사상 최초로 1위 데뷔를 이룬 뮤지션이기도 하다. 1975년 6월에 발매된 9집 Captain Fantastic And The Brown Dirt Cowboy의 기록이고, 7주 동안 1위로 머물고 있었다. 두번째 기록도 같은 해 1975년 10월에 발매된 10집 Rock Of The Westies가 세웠다.[9]

2008년 빌보드는 싱글 차트 50주년을 기념하여 50년동안 가장 성공한 뮤지션들을 분석해 엘튼 존은 3위에 올랐고, 빌보드 앨범 차트 역사상 [가장 성공한 뮤지션 5위로 꼽혔다]. 동시에 빌보드 어덜트 컨템포러리(AC) 차트에서 1위 곡을 가장 많이 올린 뮤지션이고[10] 가장 많은 곡들을 진입시킨 뮤지션이기도 하다. 총 72곡.[11] 참고로 어덜트 컨템포러리 차트라고 해서 한국의 성인가요를 연상하면 안되는 것이, 1990년대에는 리듬 앤 블루스가 어덜트 컨템포러리 차트에서 특히 인기를 얻었고 2000년대에는 전자음악의 요소를 지닌 곡들이나 인디 록 음악도 수시로 진입하는 등 적어도 차트에서는 음악 장르 정의가 모호하다. 그냥 쉽게 록이든 팝이든 경력있는 30대 이상의 음악가들은 이 차트에도 오른다고 봐도 된다.

1집 Empty Sky가 1969년에 발매되었기 때문에 1969년 데뷔로 본다. 블루솔로지 시절이던 1965년 7월 23일에 발매된 싱글 Come Back Baby가 있고 1968년에 솔로 첫 싱글 I've Been Loving You를 냈기 때문에 활동 시기 주장은 제각각이다. 통상적으로 솔로 음악가의 데뷔 년도는 첫 싱글이 아니라 1집 정규 앨범 발매시점으로 친다. 엘튼 존 정도 되니 그나마 기록이 있지, 활동 시작 시기를 데뷔 년도로 치려면 음악가들마다 형평성있고 일관적인 기준을 적용하기 어렵다. 기록이 절대적으로 빈약할 수밖에 없다.

1996년 '음악과 자선활동에 헌신한 공적'을 인정받아 대영제국 훈장 3등급(CBE)을 받았다. CBE 훈장을 받은지 불과 약 2년 뒤인 1997년 말 발표된 신년서훈명단에 기사 작위 대상자로 이름이 올라 1998년 2월 24일에 기사 작위를 받았다.

1979년 5월에 서방국가 록 스타로서는 처음으로 이스라엘소련에서 투어를 진행했고, 소련에서 앨범을 발매한 첫 서방국가의 뮤지션이 되기도 했다. 1978년 12집 A Single Man의 제목을 <Elton John Sings' in Russian>으로 변경해서 발매했다.

1975년 10월 21일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이름을 올렸다. 1992년 버니 토핀과 함께 작곡가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고, 1994년에는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단독으로 입성했다. 자세한 상훈내용은 '수상 및 서훈내역' 부분 참고.

1997년 9월에 발매된 다이애나비 추모곡 Candle In The Wind 1997 싱글은 다수의 국가에서 1위로 기록되었고, 세계적으로 총 33,000,000장이나 팔려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두었다. 5,000만장이나 팔린 빙 크로스비의 "White Christmas" 다음으로 세계에서 두번째로 많이 팔린 싱글.[12] 1950년대 이후로 싱글 차트가 생기고 나서 미국과 영국 역사상 최초로 단기간에 가장 많이 팔린 싱글이고, 동시에 미국에서 유일하게 다이아몬드를 기록한 싱글이다.

싱어송라이터로 분류되기도 하지만, 싱어송라이터의 정의에 따르면 싱어송라이터는 아니다. 작곡 뿐 아니라 작사까지 꾸준히 겸해야 엄격한 의미의 싱어송라이터라고 할 수 있기 때문.[13] 엘튼 존은 작사가 아닌 작곡만 맡았고, 대부분의 가사는 버니 토핀, 개리 오스본, 팀 라이스 등 전문 작사가들이 맡아 썼다. 이 때문에 엘튼 존은 솔로 뮤지션으로 분류되고, 영어 위키피디아에서도 그를 '싱어송라이터'(singer-songwriter)가 아니라 '작곡가/가수'(composer and singer)라고 칭한다.

1992년 3월 엘튼 존 에이즈 재단(Elton John AIDS Foundation, EJAF)을 설립했으며, 이 재단 주최로 1993년부터 매년 오스카상 시상식때 함께 개최되는 후속파티(Elton John AIDS Foundation Academy Awards Viewing Party)의 호스트이기도 하다. 헐리우드 인맥의 핵심 인물 중 하나임을 알 수 있다. [영어 위키피디아의 소개글] [클릭하면 참석 인원들의 면면을 확인할 수 있다.]

어린 시절부터 왓포드 FC의 팬이다. 1976년에 팀을 직접 사서 1976~1987년과 1997~2002년 두 차례에 걸쳐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는 명예 회장으로 있다. [참고 링크]

'수상 및 서훈내역' 부분을 보면 알겠지만, 1970~80년대에는 항상 노미네이트에 그치는 등 상복이 정말 지지리도 없었다. 특히 그래미 어워드에선 노미네이트로 도배되었고, 상을 받는 일이 거의 없었다.[14][15] 그러다가 중년이 되던 시기인 1990년대부터 제대로 상들을 받기 시작했다. 1994~1995년 아카데미상, 그래미상, 골든글로브상에서 여러차례 수상한 The Lion King을 전후해 대부분의 수상이 1990년대 이후에 집중된다.

2000년대 후반 이후로 레이디 가가, 에드 시런, 폴 아웃 보이 등의 젊은 뮤지션들과 협업을 자주 선보이며, 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액식, 그래미 어워드 시상식 등 굵직한 행사에서도 자주 등장하며 제대로 대접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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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경력

엘튼 존의 음악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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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1970년대198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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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2000년대2010년대


3 음악

엘튼 존의 음악은 록을 기반했으며, 50년 동안 , , 발라드, 컨트리, 블루스, 가스펠, R&B, 재즈, 훵크, 프로그레시브 록, 글램 록, 레게, 댄스, 뉴웨이브, 디스코, 클래식, 영화 음악, 뮤지컬 음악 등 수많은 장르를 시도했다. 특히 피아노를 주무대로 삼아서 특유의 화려함과 다채로움을 보여주었다. 그동안 수많은 장르를 시도했음에 불구하고, 본인 만의 스타일에서 벗어나는 경우는 별로 없었고, 복합적인 형태를 띄고 있어서 명확한 정의를 내리기엔 조금 애매하지만, 대체로 팝 뮤지션으로 구분한다. 수많은 장르를 시도하면서 변함없는 일관성을 보여주는 음악과 피아노를 완전히 주무대로 삼은 특유의 구성으로 인해 역사상 최고의 팝 아티스트 중 한 명이자 피아노 록의 진정한 거장으로 평가받는다.[16]

작곡과 연주 뿐 만이 아니라 프로듀싱 작업도 자주 맡았다. 1978년 12집 A Single Man 이후로 1980년 14집 21 AT 33, 1981년 15집 The Fox, 1993년 24집 Duets, 1995년 25집 Made In England, 2004년 28집 <Peachtree Road>, 2011년 <Gnomeo & Juliet> 사운드트랙, 2016년 32집 Wonderful Crazy Night에서 프로듀싱을 맡았다. 28집 <Peachtree Road>의 경우는 엘튼 존이 유일하게 공동 프로듀서가 아니라 메인 프로듀서로 참여한 경우.

작사가 버니 토핀과 1967년부터 50년 동안 이어진 협업 또한 유명하다. 버니 토핀이 가사를 쓰고나서 엘튼 존이 멜로디를 작곡하는 구성으로 곡을 작곡했고, 이런 방식으로 꾸준히 이어왔다. 버니 토핀은 사회정치적인 메세지를 담기보단 대부분 사회를 떠난 신변잡기의 소재에 집착하면서 본인들에 대한 개인적인 얘기로 써왔고, 엘튼 존 역시 음악 자체에 더욱 집중하는 스타일이다. 그리고 엘튼은 버니의 가사에 크게 따지지 않았고, 버니 역시 엘튼의 작곡 실력에 대해 따지지 않아 서로의 스타일을 존중했고, 크게 다투던 경우나 불화도 없었다.[17] 반세기동안 발매한 수많은 앨범과 싱글은 항상 큰 성공을 거두었고, 특히 대부분의 앨범과 곡들은 매우 신속히 작업된 것도 특징이다.

예를 들면 1973년 1월에 발매된 6집 Don't Shoot Me I'm Only The Piano Player는 1972년 6월에 작업되었으며, 모든 수록곡들을 겨우 2일 안에 작곡했다. 그리고 가장 뛰어난 걸작 중 하나로 평가받는 1973년 7집 Goodbye Yellow Brick Road도 20곡을 넘기는 곡들과 모든 가사를 쓰는데 2주 반 밖에 걸리지 않았고, 곡의 전체적인 구성을 작곡하는데 15분 밖에 걸리지 않았았고, 합쳐서 모든 곡들을 작곡하는데 3일 밖에 걸리지 않을 정도로 매우 신속히 진행되었다. 곡들의 작업이 매우 신속했으므로 앨범 작업도 고작 몇주 만에 끝냈다. 이는 노년이 돼서도 여전한데 2013년 31집 The Diving Board의 14곡을 2일 만에 작곡했다.[18]

이런 식으로 버니 토핀과 작업할때 항상 단기간 내에 신속히 작업한다. 앨범을 작업하면서 작곡되는 곡들은 평균 20곡 정도나 하고, 다른 작사가 팀 라이스, 리 홀과 뮤지컬/영화 음악을 작업할 때에도 1개월 채도 걸리지 않았다.[19] 가지각색의 장르를 시도하면서 복합적인 형태를 띄고 있는 음악에 개인적인 상황들로 노래하고 있어서 개성의 표출이 극대화되거나, 실험적인 시도의 부재, 지나친 음악적 과소비와 상업성으로 일부에겐 비판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단기간 안에 상당한 양의 작품들을 만들어내 30년 넘게 꾸준히 싱글 차트 30위 안에 진입해 항상 성공을 거두고 대중성을 잃지 않는 것으로 대중성과 상업성, 이 두 요소를 적극적이고 효율적이게 활용하면서 꾸준히 정상의 자리를 지키고 활동한 것은 엘튼 존의 오랜 생명력의 바탕에 자리한 근원적인 힘으로 볼 수 있다.

비록 엘튼 존은 작사를 하지 않았지만, 편집자와 감독 역할을 맡아 되도록 가사에 손질을 가한 엘튼 존의 기여 또한 큰 도움이 되었다. 자세한 것은 버니 토핀 문서 참조.

엘튼 존은 다양한 작사가들과 함께 했다. 버니 토핀 대신에 영입된 개리 오스본과 1978~1982년, 1986년까지 함께 했고, 1979~1980년 21 AT 33/The Fox를 작업하면서 톰 로빈슨, 쥬디 쥬크와 잠시 작업했다. 1990년대부터는 영화 음악, 뮤지컬 음악의 작사가들과 협업을 맺었고, 팀 라이스와 작업한 1994년 The Lion King, 1999년 Elton John And Tim Rice's Aida, 2000년 The Road To El Dorado와 리 홀과 작업한 2004년 빌리 엘리어트가 있다.

작사된 가사를 보면서 멜로디와 전체적인 선율을 쓰는데 얼마 걸리지 않고, 왠만한 명곡들의 한 곡 당 쓰는데 10~20분 밖에 걸리지 않는다. 예를 들면 대표곡 중 하나인 Rocket Man5분 만에 작곡했고, Candle In The Wind는 작곡하고 나서 녹음까지 마무리하는데 30분 채도 걸리지 않았다. 1984년 히트곡 "Sad Songs"는 고작 4분 만에 작곡한 곡. 이로 인해 방송에 출연해 미리 작사된 가사를 보면서 곡을 순식간에 작곡하고 부르는 경우도 여러차례 보여주었다.

[1980년 8월 30일 평론가 폴 감바치니와의 인터뷰]에선 폴 감바치니가 엘튼 존에게 존 돈의 시 "No Man Is An Island"(그 누구도 섬은 아니다)를 주면서 작곡하라고 요청했고, 엘튼 존은 그 가사로 비장한 선율의 발라드로 불렀다. [1997년 9월 14일 An Audience 방송]에선 영국의 배우 리처드 E. 그랜트가 준 오븐 설명서를 보면서 뮤직 홀 풍의 흥겹고 유쾌한 곡으로 불렀다. [2005년 Inside The Actors Studio 토크쇼]에선 한 관객이 준 책을 보면서 잔잔하면서 비장한 선율의 발라드로 불렀다. 이외 방송에서 즉석으로 쓴 곡들은 몇 곡 더 있다.

3.1 1970년대

1969~1971년, 초기 시절에는 대부분 현악기 위주의 발라드로 구성되었다. 1967~1969년 극초기 시절엔 시대가 시대다보니 사이키델릭 록의 모습과 포크 록의 모습도 보이기도 했다. 물론 가스펠컨트리 뮤직 풍의 경쾌하고 흥겨운 여러 곡들도 포함되긴 했었다. 1970년 8월 미국 데뷔 이후로 무대에서 특유의 쇼맨쉽을 보여주면서 활동을 했지만, 화려하고 정신 산만한 복장이나 안경을 착용하기 전이었고, 히트곡 Your Song, Friends, Tiny Dancer 같은 얌전한 곡들이 비중을 크게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록커보단 발라드 가수의 이미지가 더 컸었다. 그리고 엘튼 존이 전성기를 가져 슈퍼스타의 시기를 제대로 보내기 전까진 영국적이면서 미국적인 음악의 요소를 골고루 차용하면서 특유의 깊은 분위기를 보이는 것이 진정한 매력으로 여겨 초기 음악을 더욱 좋아하는 팬들도 있다.

1972년 5집 Honky Château부터 사운드를 크게 가미해 음악적으로 변화하기 시작했고,[20] 1973년 6집 Don't Shoot Me I'm Only The Piano Player으로 완전히 대중적으로 변화했다. 이 앨범이 1972년에 작업된 걸 보면, 무려 1년 안에 커다란 변화를 맞이한 것. 그렇게 1973년 7집 Goodbye Yellow Brick Road, 1974년 Caribou, 1975년 Captain Fantastic And The Brown Dirt Cowboy, 1975년 Rock Of The Westies로 대중에게 익숙한 엘튼 존 특유의 스타일이 당시 시점으로 크게 고착되기 시작했고, 엘튼 존/버니 토핀의 음악적 역량도 한창 달리던 전성기와 함께 절정에 달았다. 1980~90년대까지의 음악에 대해서 평이 갈리는 면이 있지 않나 싶지만, 1970년대까지의 엘튼 존 음악은 최고치에 달았다는 평이 다수이다.

1976년 11집 Blue Moves로 실험적이면서 70년대 중반 시점으로 상당히 세련된 사운드를 가진 역작을 만들었지만, 전작들에 비해서 약간 느슨한 완성도로 큰 반응을 얻지 못했고, 상업적으로도 전작들과 달리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21] 몇 년 동안 지나치게 이어왔던 활동으로 인해 혹사되고 있었고, 그로 인한 번아웃 증후군을 앓고 있었다. 앨범의 성적에 악영향을 끼치게 했던 롤링 스톤에서의 커밍아웃, 1977년 웸블리 공연의 은퇴 선언으로 음악 활동을 중단해 5년 간의 침체기를 보내었다. 거기다 버니 토핀[22]을 포함한 여러 동료들도 엘튼 존 곁에서 떠나면서 상황이 악화되었다.

1년 뒤 1978년 12집 A Single Man로 컴백했지만, 전작들에 비하면 이질적이고 느슨한 완성도로 혹평을 받았고, 상업적으로도 그리 신통치 않은 성적을 거두었다.[23] 1982년 16집 Jump Up!, 1983년 17집 Too Low For Zero로 재기하기 전까진 침체기를 보냈고, "Song For Guy", "Mama Can't Buy You Love", "Little Jeannie" 같은 히트곡들도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엘튼 존의 경력에서 가장 돋보이지 못했던 시기였다.[24]

12집부터 같이 작업하게 된 영국인 작사가 개리 오스본과 곡을 작업하던 방식은 버니 토핀과 반대였는데, 엘튼 존이 곡을 작곡하고나서 개리 오스본이 가사를 작사해 곡에 붙이는 식으로 작업되어 전반적인 스타일이 바꿔져 곡들의 분위기가 버니 토핀과 작업한 곡들과 이질감이 날 수 밖에 없었다. 개리 오스본의 작사력은 버니 토핀에 비하면 무난한 수준이었고, 사랑타령이 비중을 차지했다. 1979년 8월 14집 21 AT 33를 작업하기 전에 버니 토핀과 재결합을 했음에도 이전 같은 협업이 한동안 눈에 띄지 못했었다.[25]

3.2 1980년대

1982년 16집 Jump Up!의 좋은 반응으로 어느정도 재기를 했고, 1983년 17집 Too Low For Zero로 재기에 성공했다. 1970년대의 전성기는 아니어도 음악적이나 투어 활동으로 어느 정도 승승장구하던 시기였고, 1980년대의 뉴웨이브의 조류를 흡수하여 대중적인 음악을 해왔다. 하지만 엘튼 존의 1980년대는 암흑기 시절로 여기는 경향이 크다. 아래 후술한 내용에서 보이듯이 약물 중독과 스캔들, 이혼, 건강문제 등으로 최악의 시기를 보낸 것은 확실하다. 음악적으로도 침체기였다고 하지만,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사실.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까지 5년 간의 침체기를 보냈을때에도 꾸준히 히트곡을 발매했으며,[26] 1983년 17집 <Too Low For Zero>로 재기하고 나서 1985년 19집 Ice On Fire까지 꾸준한 성공을 이어지고 있었다.[27]

1981년, 1987년을 제외하면 10위 안에 드는 싱글을 매년 발매했고, 1970년대와 별 다를바 없는 성공을 거두었다.[28] 판매량만 보면 승승장구하던 시기였다고 볼 수 있지만, 음악적으론 평이 갈린다. 이 시기 엘튼 존은 약물에 심하게 의존해 매너리즘에 빠져 1970년대에 비하면 돋보이는 음악을 많이 만들지 못했다는 의견이 많다. 1987년을 제외한 모든 년도에 정규 앨범을 1장씩 발매했지만, 1970년대 전성기 시절에 비하면 부족한 완성도의 평작들이 대부분이고,[29] 걸작 반열에 놓을수 있는 앨범은 <Too Low For Zero>, 1989년 22집 Sleeping With The Past 겨우 2장으로 손에 꼽힐 수준이다.[30]

1980년대는 그저 계약 이행을 위해 과잉 생산되어 매년마다 비슷한 완성도의 범작들을 발매하던 시기로 여기고 있다. 개인적인 어려움과 더불어 음악적으로도 충분히 매너리즘을 느꼈을 법했다.[31] 물론 대중들에게 큰 주목을 받지 못한 숨겨진 명곡들은 항상 있기 마련이고, <Too Low For Zero>, <Sleeping With The Past>은 전성기 시절의 앨범과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을 정도의 걸작이라고 칭송한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1989년 <Sleeping With The Past>로 완전히 끝나게 되었고, 이후 공장에서 기계로 찍어 출판하듯이 매년마다 정규 앨범을 발매하지 않았다.

3.3 1990년대

1990년대 들어서 발매된 앨범들은 음악적으로 높은 완성도와 더불어 여전히 큰 성공을 거두었고, 1992년 23집 The One으로 재기에 성공함으로서 1980년대보다 더욱 잘나갔고, 제2의 전성기를 보내게 되었다. 1990년대 앨범들 중에서 The OneMade In England는 1970년대 앨범들을 연상케하는 완성도를 가진 수작이라는 평을 받았고, 이 시기부터 영화, 뮤지컬 음악 작곡에 크게 매진하여 다른 방향으로도 대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1997년 9월에 발매된 다이애나비 추모곡 Candle In The Wind 1997은 전세계적으로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두어 세계에서 2번째로 많이 팔린 싱글이 되었다.

1990년대 당시 40대 중반의 엘튼 존은 약물 중독을 이겨 완벽히 재기를 했고, 음악적으로 변화를 보였다. 1992년부터 어덜트 컨템포러리 성향의 음악을 하기 시작했고, 록 적인 분위기보다 깊으면서 적당한 리듬의 음악을 선보였다.[32] 1990년대의 엘튼 존은 어덜트 컨템포러리의 진수를 보여주었고, 이쪽으로 역량을 절정에 달았다는 평을 받는다. The Lion King의 대성공 이후 팀 라이스와 협업을 가져 1999년 Elton John And Tim Rice's Aida, 2000년 The Road To El Dorado을 작업했다.

하지만 1976년 Blue Moves, 1983년 Too Low For Zero 이후 손꼽히는 명반은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거기다 50대에 접했던 엘튼 존의 음악적 취향도 바꿔져 록 적인 음악이 아니라 꽉찬 편성을 보이는 어덜트 컨템포러리 성향의 음악을 선호했던 시기로 올드 팬들이 원하는 바와 거리를 두고 있었다. 1997년 26집 The Big Picture는 오버 프로덕션이라는 혹평을 얻은 것이 대표적인 예.

3.4 2000년대

1998년부터 뮤지컬, 영화 음악에 크게 몰두했던 탓인지, 버니 토핀과의 협업도 한동안 줄어졌다. The Big Picture 이후 정규 앨범은 한동안 나오지 않았고, 엘튼 존과 버니 토핀 본인들도 오랫동안 눈에 띌 만한 걸작을 작업하지 않았다고 판단해 제대로된 걸작을 작업하자는 결심을 내렸다. 그렇게 작업된 2001년 27집 Songs From The West Coast부터 1970년대 초기 음악의 뿌리로 돌아가 복고적인 분위기의 음악을 하기 시작했다. 21세기 들어서 50대 중반을 바라보는 나이였고, 바리톤 창법에 음악적 성향도 달라졌기 때문에 그 시절을 회상하는 것은 무리가 있지만, 이 앨범으로 과거로 회귀한 것이 다행으로 볼 수 있을 정도. <Songs From The West Coast>는 과거로 회귀함과 동시에 현대적인 요소를 흡수해 음악적으로 극찬을 받았고, 상업적으로 꽤 성공해 말년의 걸작으로 꼽히게 되었다.

1990년대에 이어서 2000년대에도 뮤지컬 음악 작곡에 매진하고 있었고, 오히려 정규 작업보다 비정규 작업에 더욱 몰두했을 정도였다. 2003년 가을에 28집 Peachtree Road를 작업했지만, 2004년 11월에 발매되기 전까진 1년간 보류해 두었고, 그 사이에 뱀파이어 뮤지컬 Lestat을 작업하거나,[33] 2004년 초에 빌리 엘리어트를 작업했다. <Peachtree Road>는 컨트리적인 요소를 크게 차용하여 푸근하면서 전원적인 느낌을 받을 수 있다. <Songs From The West Coast>보다 더욱 복고적인 음악성을 가진 셈.

2006년에 29집이자 Captain Fantastic And The Brown Dirt Cowboy의 후속작 The Captain & The Kid를 발매했고, 걸맞는 완성도의 수작으로 호평을 받았다. 하지만 레이블 사의 부족한 홍보로 인해 상업적으로 성공하지 못했고, 레이블 사와 불화로 인해 2010년 30집 The Union이 발매되기 전까진 약 3년 간 정규 앨범을 작업하지 않았다.[34]

3.5 2010년대

2000년대의 앨범들은 전성기 시절의 음악을 연상케 하는 복고적인 요소로 적절히 공돈된 음악으로 보여주었다. 그 이후로 발매된 앨범들도 전작들의 연장선상에 속하자, 현대적인 요소도 약간 가미된 구성을 보여주었다. 2010년에 작업된 30집 The Union은 미국의 싱어송라이터 리언 러셀과 작업했으며, 컨트리 록의 전형을 보여줌과 더불어 깊은 역량을 보이는 걸작으로 큰 호평을 받았고, 간만에 상업적으로도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이 앨범 시점으로 피아노의 비중이 더욱 커지기 시작했다.

2013년 31집 The Diving Board는 피아노의 비중이 높고, 약간의 실험적인 요소와 진지한 사운드로 1970년대 초기 작품들을 연상케 하지만, 기존의 엘튼 존과 다른 분위기를 가진 독특한 앨범. 2000년대부터 피아노의 비중은 다시금 커지고 있었고, 일정한 음악성을 나가고 있었지만, 밝은 색채와 경쾌한 리듬의 록 적인 앨범은 1980년대 이후로 없다고 봐도 무방했었다. 하지만 2016년에 발매된 32집 Wonderful Crazy Night은 정말 오랜만에 록 사운드를 담은 앨범이라서 1970년대의 음악을 그리던 팬들에게 큰 선물이 되었다.

3.5.1 영화/뮤지컬 음악

엘튼 존은 19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영화뮤지컬 음악을 시도해 이쪽 방향에서도 대성공을 거두었다. 1971년 Friends으로 첫 영화 사운드트랙 앨범을 작업한 걸로 시작했고, 이후 20년 동안 이쪽에 손을 대지 않다가 1994년에 팀 라이스와 협업으로 라이언 킹의 사운드트랙을 작업해 대성공을 거두었고, 엘튼 존에게 제2의 전성기를 열어준 확연한 계기가 되었다.[35] 라이언 킹 이후, 팀 라이스와 협업을 맺어 1999년 아이다, 2000년 엘도라도의 음악을 작업했다.[36] 엘튼 존 밴드의 키보드리스트 가이 바빌론과 같이 1999년작 영화 <The Muse>의 사운드트랙 The Muse를 작업했다.

1999년 영화 '위민 토킹 더티'의 기획을 맡은걸로 시작해 2000년대부턴 음악 뿐만이 아니라 기획을 맡기도 했다. 2006년작 코미디 영화 '보이 걸 씽', 2009년작 '브루노'의 기획을 맡았고, 2011년작 '노미오와 줄리엣'에선 음악과 더불어 배우자 데이비드 퍼니시와 공동기획을 맡았다. 2004년에 리 홀과 작업한 빌리 엘리어트도 역시 마찬가지로 성공을 거두어 2009년 토니상 시상식에서 최우수 뮤지컬 상(Tony Award for Best Musical)을 비롯한 10개 부문의 상을 받는 성과를 거두었다. 2003년 여름에 각본 진행을 하기 시작하면서 2005년 초에 버니 토핀과 뱀파이어 뮤지컬 Lestat을 작업했다. 2010년에 조지 오웰의 소설 동물농장을 뮤지컬로 제작할 예정이라고 했지만, 몇년째 별 소식이 없다.

라이언 킹, 아이다, 빌리 엘리어트의 대성공으로 크게 성공한 뮤지컬 작곡가으로 꼽혔고, 팝 음악 뿐만이 아닌 영화/뮤지컬 음악 쪽에서도 호의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팝/록 뮤지션들 중에서 드물게도 영화/뮤지컬 쪽에서 커다란 성공을 거둔 경우.[37] 그런데 정작 엘튼 존은 뮤지컬을 썩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다. 뮤지컬 자체보다 음악 작업 자체를 더욱 좋아하는 듯.

3.5.2 오해

엘튼 존의 정체성은 엄연히 록커이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중장년층에게 특히 유별난 인기를 끌며 대표곡으로 오인되는 "Sorry Seems To Be The Hardest Word"가 전형적인 발라드 넘버인데다[38] 젊은층에게 친숙한 라이언 킹의 주제가 Can You Feel The Love Tonight이 역시 발라드인 탓에 엘튼 존을 대부분 노년의 모습이었던 얌전하고 고루한 피아노 연주자 쯤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심지어 네이버 뮤직은 전형적인 어덜트 컨템포러리 가수에다 엘튼 존과 음악적인 교류도 거의 없는 배리 매닐로우(Barry Manilow)를 엘튼 존의 '관련 아티스트', 그것도 맨 첫번째로 소개하는 무지한 짓을 저지르고 있다. 멜론도 관련 아티스트 목록 중 두번째로 소개하고 있다. 우리나라가 엘튼 존의 음악이 얼마나 잘못 전달되어 왔고, 왜곡된 이미지가 고착된 나라인지를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다.

스트라토바리우스의 사례처럼 엘튼 존도 음악가의 커리어와는 관계 없이 발라드를 선호하는 한국 대중들의 성향으로 인한 오해를 사는 아티스트인 셈. 그리고 엘튼 존의 1990년대 중반 이후 노년기의 모습에 비해 전성기의 활동이 한국에 잘 알려지지 않은 것도 이런 오해가 생기는 이유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엘튼 존은 그 경력에 비하여 한국에서 상당한 저평가를 받았다고 평하는 이들이 많다.

4 기상천외한 복장과 화려한 안경

1973년 9월 7일 할리우드 보울


1974년 5월 5일 영국 왓포드


1974년 9~12월 사이 Caribou 투어


1974년 9~12월 사이 Caribou 투어


1977년 10월 더 머펫 쇼 백스테이지 흔한 하루의 시작


1980년 9월 13일 뉴욕 센트럴 파크


1982년 3~8월 사이 Jump Up! 투어[39]


1982년 11월 22일 버밍엄


1984년 2~12월 사이 Too Low For Zero/Breaking Hearts 투어


1984년 12월 3일 런던


1986년 3월 프랑스 파리


1986년 8월 미국


1986년 9월 11~14일 매디슨 스퀘어 가든


1986년 8~10월 사이 Ice On Fire 투어


1988년 5월 런던[40]


1989년 10월 매디슨 스퀘어 가든


1992년 5~11월 The One 투어


1994년 지아니 베르사체 패션 쇼


1997년 3월 25일 50세 생일


2007년 3월 25일 60세 생일

기상천외하고 화려한 복장들과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무대에서 보여주었던 화려한 쇼맨쉽 또한 유명하다. 엘튼 존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이미지 중 하나가 바로 화려하고 정신 산만한 옷을 입고 피아노를 연주하면서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고, 그를 커리캐쳐할때 절대 빼먹을 수 없다. 엘튼 존은 몰라도, 지극히 화려한 옷과 안경을 쓰고 피아노를 치는 모습 자체는 알고 있는 경우도 있다.

그가 크게 애용했던 복장은 모헤어 코트, 핌프(Pimp) 슈트. 그동안 입었던 복장들만 해도 수백개가 넘는다. 대충 꼽아봐도 고릴라, , 꿀벌, 광대, 자유의 여신상, 카우보이, 마법사, 탐험가, 해적, 투우사, 탐정, 경찰관, 기관사, 경호원, 도널드 덕, 미니 마우스, 구피, 제독, 바버숍 4중창, 심령술사, 영국군 근위대, 에펠탑, 티나 터너, 모짜르트 복장 등등.. 웹상에서 공개된 복장들은 빙산의 일조각 수준. 안경들도 디자인들이 아주 다양했는데, 별모양, 솜털, 피아노 건반, 태양, 자동차 와이퍼, 우주선, 음표, 손거울, 가위, 시계 등등.. [41] 1988년 5월 영국 런던의 '소더비 쇼륨' 경매에 내놓은 본인의 물건들이 약 2,000점이나 하는걸 보면 소유하고 있던 복장들도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경매 이후에도 꾸준히 물건들을 모았다. 2006년 인터뷰에서 본인의 옷장에서 꺼내 보여준 옷들만 해도 수백개가 넘는다.

이런 식으로 화려한 복장을 입었던 이유는 어린 시절, 아버지의 억압과 제약에 대한 반항의 산물이라고 밝혔고, 피아노를 연주하는 록커의 모습을 크게 각인시키기 위한 것이라고도 했다. 피아노는 매우 무거운 악기에다 기타나 다른 악기들에 비해서 한정되어 있는 부분들이 많기 때문에 화려한 복장을 입고 무대에서 뛰어 다녀 쇼맨쉽을 보여주면서 각인을 시킨다는 것이 중요했다고 했다. 1950년대 로큰롤 스타 제리 리 루이스, 리틀 리처드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고.

데뷔 초기에는 이런 복장을 입진 않았다. 단정한 선글라스에 무난한 코트를 입어 수줍은 청년의 모습이 컸지만, 이미 1970년부터 관객들에게 호응을 끌게 만들고 무대에서 방방 뛰어다니는 쇼맨쉽을 보여주었고, 1972~1973년부터 화려한 복장들과 선글라스를 착용하기 시작했다. 1974~1976년에는 엘튼 존의 이미지를 대표하는 화려한 복장들이 절정을 달렸지만, 1978년부터 약 2년 동안은 안경을 착용하지 않았고 칙칙하고 어두운 옷을 입고 활동했다. 1980년부터 1986년까지 1970년대와 별 다를 것 없는 복장들을 다시 착용하기 시작했고, 1985년부터 안경도 다시 착용하기 시작했다.


2009년 Red Piano 투어에서

1988년 경매 이후로 1970~80년대 같은 정신산만한 복장이 아닌 위사진처럼 적당히 화려하면서 단정한 코트를 입기 시작했고, 이젠 이런 화려한 복장들을 입기엔 나이가 많아서 이젠 입지 않고, 단정하고 어른스러운 옷을 입는다고 했다.[42] 그 후에도 가끔씩 전성기 시절보다 더하는 복장도 입기도 했는데, 특히 위에 50세 생일땐 배우자와 같이 루이 14세 복장을 입은 것이 대표 예.[43]

본인이 입었던 수많은 복장들 중에서 가장 맘에 들었던 건 1980년 9월 13일 센트럴 파크 공연때 입었던 도널드 덕 복장이라고 했다. 이 복장을 입기도 전에 웃음이 터져나와 입는데 5분이나 걸렸고, 무대에서도 뒤뚱거리면서 노래를 부르는 모습 자체가 웃음이 나올 수 밖에 없어서 반응이 꽤 좋았다.[44] 엘튼 존이 1988년 경매에 내놓지 않은 몇 안되는 복장이었고, 2003년 2월 6일 카네기 홀 공연에서 코트니 러브가 이 복장을 빌려 입기도 했다.

5 피아노 연주


[45]



[46]

특유의 기교와 스타일을 가진 피아노 연주가 크게 돋보인다. 코드 위주로 아르페지오와 블루스 릭을 사용하면서 절제되고 섬세한 연주 실력을 가지고 있고, 젊은 시절보다 더욱 탄탄한 실력을 가지고 있다. 엘튼 존은 10대부터 본인의 손이 작고 뭉특해서 제리 리 루이스처럼 연주할 수 없어서 본인 만의 스타일을 조금씩 가지기 시작했다. 1979년부터 창법과 더불어 피아노 연주도 변화하기 시작했고, 1980년대부터 특유의 기교와 즉흥적인 연주가 생겼다.[47] 그리고 피아노 한대만 구성된 피아노 솔로 공연들도 자주 열었고, 피아노 한대로만 분위기를 압도하는 역량 또한 상당해 무대 피아니스트의 자질이 뛰어나다. 위 영상들만 봐도 피아노를 갖고 논다. 사실 '겉만 헌란하고 속은 비어있는 연주자'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는데 피아노 연주자로서 상당한 저평가를 받았다고 할 수 있다.

2010년대 현재의 스타일이 제대로 잡혀지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부터이고, 특유의 기교와 피아노 솔로가 더욱 발전했다. 5분 정도 되는 러닝타임의 Bennie And The Jets와 3~4분 되는 Take Me To The Pilot을 7~14분으로 더욱 길게 늘려 온갖 피아노 솔로 연주를 라이브 공연에서 보여준 것이 대표적인 예. 그 외에 Burn Down The Mission, Levon, Madman Across The Water, Honky Cat, Rocket Man, Saturday Night's Alright For Fighting, "Philadelphia Freedom", "Crazy Water", "I Guess That's Why They Call It The Blues", "Sad Songs (Say So Much)", "Mona Lisas And Mad Hatters Part II", "I Don't Wanna Go On With You Like That" 등이 있다.

젊은 시절에는 스타인웨이를 사용했다. 1967~68년부터 당시 스타인웨이 사의 직원이자 엘튼 존의 사운드 엔지니어였던 클라이브 프랭크스가 엘튼 존에게 스타인웨이를 제공했고, 1993년까지 26년 동안 스타인웨이를 사용했다. 하지만 1987년부터 1993년까지 6년 동안 잠시 롤랜드 전자 피아노를 사용했다가 어쿠스틱 피아노와 다른 품질과 여러 기술적인 문제로 인해서[48] 1993년 9월 30일부터 1993년 12월까지 스타인웨이 그랜드를 다시 사용하기 시작했지만,[49] 1994년부터 야마하 디스클라비어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현재도 야마하를 사용하고 있다.

2013년 1월 25일 엘튼 존은 야마하 125주년 기념 공연인 'Yamaha's 125th Anniversary Dealer Concert Elton John + Yamaha'에 출연했고, 당시 공연에서 엘튼 존은 Rocket Man 등의 5곡을 연주하는 피아노의 건반과 페달의 움직임이 원격 디스클라비어 피아노를 통해 일본, 한국, 호주, 러시아, 캐나다, 독일, 미국, 영국, 프랑스, 싱가포르 등 세계 각지에 그대로 재현되기도 했다. 이 공연의 풀버전 영상은 엘튼 존의 공식 웹사이트에서 실시간으로 제공되었다.

6 보컬



1965년부터 2013년까지의 보컬 변천사[50][51]

젊었을땐 가늘고 카랑카랑하고 고음 처리가 깔끔했던 하이톤 보컬이었다. 음색도 독특한 편. 1965~1971년 초기 시절땐 미국적인 모습이 약간 띄고 있었고,[52] 고음도 사용하는 경우는 별로 없었지만, 1972년부터 창법을 살짝 바꾸기 시작해 고음의 사용이 잦았던 하이톤으로 본격적으로 부르기 시작했다.[53] 많은 이들에게 떠올리는 엘튼 존의 대표적인 보컬이 바리톤 창법의 90년대와 70년대 전성기 시절의 보컬인데, 이 시기의 보컬은 1976년이 절정이었고, 상당히 높게 불렀지만, 1977년 The Thom Bell Sessions을 작업하면서 프로듀서 톰 벨이 엘튼 존에게 노래를 너무 높게 부른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창법을 바꾸기 시작했다. 당시 톰 벨은 그에게 좀 낮게 부르라고 조언했고, 로드 스튜어트도 엘튼 존에게 너무 계집애처럼 부른다고 농담했다. 엘튼 존은 처음에 이를 무신경하게 넘어갔지만, 이후에 깨닫게 되어 보컬의 톤을 약간 내리면서 발성을 바꾸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발성을 바꾸게 된 건 1978년이다. 몇년 전에 비하면 살짝 낮은 톤이긴 하지만, 특유의 가성은 여전했었다. 1979년 5월부터 창법에 변화를 더 주면서 특유의 고음 처리는 여전하되, 이전보다 깊은 보컬로 부르기 시작하여 오히려 전성기 시절보다 더욱 좋은 역량을 보였다는 평이 있다.[54] 그렇게 변화를 준 창법으로 1984년까지 이어졌는데, 과도했던 약물 중독과 무리하게 이어진 투어 활동으로 인해서 창법에 무리가 가기 시작했다.

1985년 11월부터 진행된 Ice On Fire 투어에서 특유의 창법은 여전하긴 했지만, 고음으로 올라갈때 목소리가 탁해지는 경향이 적지 않았고, 고음을 사용하는 경우도 꽤 줄어졌다. 특히 1986년 초에는 컨디션에 따라 보컬의 상태가 바꿔져 일부 곡의 고음 부분을 부르지 않는 경우가 생겼다.[55] 그래도 1986년 8월까진 비교적 양호했지만, 그해 9월부터 보컬 상태가 급격히 나빠지기 시작하면서 결국 성대결절로 오게 되었다. 유튜브에 있는 1986년 9~10월 부틀렉을 들어보면 확연히 알 수 있는데, 보컬 상태가 갈수록 악화하여 숨도 많이 짧아졌고, 고음을 거의 사용하지 못했었다.

길게 잡아도 2년, 짧게 잡아도 5개월 전과 비교하면 변화가 심했다. 이러한 보컬이 절정을 달렸던 건 1986년 11~12월 호주에서 진행된 Tour De Force 투어다. Tour De Force는 멜버른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참여하여 음악적으론 뛰어나지만, 엘튼 존의 보컬은 역대 최악이라고 평가 받는다. 고음은 사용하지 못했었고, 숨도 크게 짧아져 곡 전반적으로 힘겹게 부를 정도였다. 당시 투어의 지휘자였던 제임스 뉴튼 하워드의 회고에 따르면, 브리즈번에서 첫 번째 공연을 진행하고 나서 3일 뒤 퍼스에서 공연을 진행하기 전에 엘튼 존의 목상태를 확인했는데, 무척이나 악화되어 말을 거의 하지 못할 정도였다고 했다.

12월 9일 공연에선 오케스트라를 소개하다 말고 무대에서 쓰러졌고, 병원으로 긴급 후송되어 치료를 했다. 당시 의사는 엘튼 존에게 인후암일지도 모른다고 했고, 엘튼 존의 성대 상태를 보고 그가 마약을 했다는걸 바로 알아챘다고 한다.[56] 의사는 공연을 당장 취소하라고 했지만, 엘튼 존은 공연 취소 따윈 없다면서 이를 강행했고, 12월 14일 시드니 공연까지 꾸준히 공연을 진행했다. 제임스 뉴튼 하워드는 엘튼 존에게 목상태가 조금이라도 호전되기 전까진 노래 부를 때를 제외하고 평소에 자주 말하지 말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그 보컬로 무려 1개월 동안 투어를 진행한 엘튼 존이 대단할 정도.




1987년 1월 5일 BBC에서 보도된 뉴스.

투어를 마치고 몇주 뒤, 1987년 1월 5일 호주 시드니의 성 빈센트 병원에서 성대 수술을 하게 되었고, 1987년 한해 동안 미국에서 예약된 Leather Jackets 투어 일정을 모두 취소했다. 그 후로 고음의 사용이 잦았던 하이톤에서 바리톤으로 창법을 바꾸었고, 1986년 이전처럼 고음의 사용을 자제하고 톤을 더 낮춰 중후하게 부르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젊은 시절의 하이톤 보컬로 부른 앨범은 1989년 22집 Sleeping With The Past이고, 이 앨범 이후로 곡을 작곡할때 본인 보컬에 딱 맞는 코드를 사용하면서 작곡한다고 한다.

1992년부터 본격적으로 바리톤으로 창법을 바꾸었고, 절제감 있으면서 파워풀하고 남성적인 보컬로 깊은 역량을 보이게 되었다. 젊은 시절의 보컬보다 오히려 현재의 보컬을 선호하는 경우도 종종 찾아 볼 수 있고, 흉성의 마스터 정도로 평가 받는다. 드물게도 창법이 크게 바꿔졌음에도 호불호가 크게 갈리지 않는 경우. 이후 일부 곡들을 제외하면 고음을 사용하는 경우는 드물어졌고, 2000년대 이후엔 고음은 사용하지 않는다고 해도 무방하다.[57] 1992년 이후 20년 동안 변함없이 유지하고 있고, 오히려 세월이 지날수록 보컬이 더욱 파워풀해진다는 평을 받는다. 현재 라이브에서 부르는 곡들은 대부분 원키로 부르고, 키를 내려서 부르는 곡도 몇 없다.[58]




E2부터 D6까지 곡들의 음역대 모음[59][60]

영상에서도 보이듯이 가장 높은 음역을 가진 곡은 백보컬에서 D6의 음을 낸 1973년작 Social Disease, C6의 음을 낸 Jamaica Jerk-Off이다. 소리지르는 보컬론 이 두 곡이 제일 높고, 일반 백보컬의 경우는 G5의 음을 낸 1980년작 "Two Rooms At The End Of The World".

7 이야깃거리

7.1 가족

엘튼 존과 어머니, 의붓아버지. 1971년


데이비드 퍼니시, 의붓아버지와 어머니, 엘튼 존. 2002년


엘튼 존과 친아버지, 이복 동생들 사이먼, 로버트, 제프. 1971년

아버지는 스탠리 드와이트(Stanley Dwight), 어머니는 실라 아일린 드와이트(Sheila Eileen Dwight). 둘은 동갑이고, 1941년에 처음 만나기 시작하면서 교제하다가 4년 뒤인 1945년에 20세에 결혼했고, 2년 뒤 1947년에 엘튼 존을 낳았다. 엘튼 존은 어린 시절부터 친아버지와 어색하고 소원했던 사이를 가졌던 것도 알려진 사실. 보수적인 성향의 엄격한 군인이던 친아버지는 엘튼 존이 소극적인 성격으로 자라는걸 못마땅하게 여겼고, 엘튼 존이 십대 시절까지 많은 걸 제약했기 때문에 엘튼 존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아버지에 비해 자유분방한 편이던 어머니와 마찰이 심해서 자주 싸웠었고, 엘튼 존이 15살이던 해에 이혼을 했다.

어머니는 건축업자인 프레드 페어브라더(Fred Farebrother)와 재혼했고, 엘튼 존도 오히려 의붓아버지와 더욱 친하게 지내왔다. 엘튼 존을 음악적으로 큰 공을 기울인 것도 의붓아버지와 어머니 덕분. 거기다 엘튼 존이 동성애자라는 점도 흔쾌히 수용했다고 한다. 어머니와 의붓아버지는 엘튼 존의 1975년 10월 25~26일 다저 스타디움 공연이나 1979년 5월 20~28일 구 소련 투어에서 함께 동행하기도 했다. 프레드 페어브라더는 2011년 6월 11일에 91세로 흉부 전염으로 사망했다.

친아버지 스탠리는 이혼 이후 5개월 뒤에 '에드나'라는 여성과 재혼했고, 4명의 아들 '사이먼', '로버트', '제프'를 얻었다.[61] 엘튼 존에겐 이복 동생들. 하지만 엘튼 존은 친아버지가 다른 여성과 잽싸게 다른 가정을 꾸리고, 본인보다 이복 동생들에게 더욱 큰 사랑을 주며 지내온 것에 대해 커다란 상처를 받았다고 한다. 부자 간의 사이는 그 후에도 썩 좋지 않았지만, 1970년대까지만 해도 서로 편지로 주고받거나 친아버지의 집에 방문하고 이복 동생들에게 생일 카드나 매년 크리스마스 카드를 보냈다고 한다. 그럼에도 엘튼 존은 친아버지에 대해 크게 원망한다는 말을 인터뷰에서 자주 했는데, 그만큼 십대 때 아버지의 엄한 교육으로 인한 불안한 정서를 가지고 자랐다는 점에서 아버지에 대한 반감을 크게 품었다고 볼 수 있다.

스탠리는 오랫동안 건강이 좋지 않았고, 1983년 1월에 심장우회 수술을 받았었다. 1992년 12월에 66세로 병으로 사망했고, 엘튼 존은 아버지의 병문안이나 장례식에 참여하지 않았다. 엘튼 존이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1982년 안필드 구장에서 열린 왓포드와 리버풀의 경기였고, 1970년대 이후에도 서로의 소원했던 관계는 풀어지지 못했다. 비록 엘튼 존은 친아버지에 대한 원망감을 크게 품었지만, 2001년 인터뷰에선 아버지의 입장도 충분히 이해하고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고마운 분이라고 설명하기도 했었고, 스탠리는 죽기 전에도 아들에 대해 자랑스러워했고, 그리워했다고 한다. 여러모로 애매모호한 부자관계의 전형적인 모습일 듯.

참고로 엘튼 존의 이복 동생 중 한 명인 '제프 드와이트'는 영국 노스웨일즈의 작은 동네 루딘에 살고 있고, 이에 대해서 2010년 데일리 메일 인터뷰에서 자세히 밝히기도 했다. 본인은 루딘에서 평생을 지내왔고, 18살때 강도 혐의로 체포되어 감옥에 4년 동안 구속되기도 했다. 이후 결혼을 해 자식이 여러 명 있지만, 1995년에 집을 팔았고, 창고같은 허름한 집을 지어 어렵게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고 밝혔다. 엘튼 존은 이복 동생들과도 사이가 소원했고, 엘튼 존과 마지막으로 연락이 닿은 것도 1991년이었다고 한다. 참고로 제프 드와이트는 젊었을 때의 엘튼 존처럼 이마가 훤하게 벗겨졌다.유전

엘튼 존은 어머니와 의붓아버지와 오랫동안 친하게 지내왔지만, 1980년대에는 아들의 약물 중독과 비정상적인 삶에 반감을 가져 스페인에서 몇년 간 지내 아들과 오랫동안 만나지 않았었고,[62] 2008년부터 2016년까지 어머니와 개인적인 불화로 인해서 잠시 사이가 단절하기도 했다. 그 후로 얘기를 하지 않은 채 7년간 지냈지만,[63][64] 2016년 2월에 화해해 사이를 회복했다. 참고로 엘튼 존의 어머니는 2016년 시점으로 91세로 장수 중.

스탠리 드와이트의 형제 에드윈 드와이트의 아들, 엘튼 존의 사촌 '로이 드와이트'는 축구선수로 활동했다. 초기에는 리버풀 FC에서 활동했지만, 1957년부터 한동안 노팅엄 포레스트에서 활동했다. 엘튼 존이 음악계로 발을 디딜때 도움을 주기도 했고, 엘튼 존은 로이 드와이트의 결혼식에 참석하기도 했다. 로이 드와이트는 2002년 4월 9일에 69살로 사망했다.


엘튼 존 가족. 왼쪽부터 데이비드 퍼니시, 일라이저 퍼니시존, 재커리 퍼니시존, 엘튼 존 2015년

2005년 영국에서 시민결합이 허용되자 1993년 10월부터 12년간 사귀어온 동성애인이자 캐나다의 영화 제작자인 '데이비드 퍼니시'와 시민결합 제도를 맺게 되었고, 2014년 3월에 잉글랜드웨일스에서 동성결혼이 허용되자 2014년 12월에 결혼식을 울렸다. 만약 동성결혼이 처음부터 합법이였다면 2014년 12월엔 결혼한지 최대 21년은 되는 부부인 셈. 데이비드 베컴, 빅토리아 베컴 부부, 오지 오스본 부부 등 50명의 하객들이 참여했다. 참고로 현재 영국법상 작위를 받은 자(남자든 여자든)의 남편은 그 작위를 공유하지 못하기 때문에 데이비드 퍼니시는 Sir 칭호를 쓰지 못한다. 반대로 작위를 받은 자의 아내는 그 작위를 공유할 수 있기 때문에 차별 얘기가 나오는 중.[65]

2009년 우크라이나의 고아원에서 HIV(에이즈)에 감염된 레프라는 아이를 만났고, 이 아이를 입양하려 하였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당국으로부터 나이가 많다는 이유와 현지에서는 인정되지 않는 동성부부라는 이유로 입양을 [거절당했다]. 새가정을 얻을 수도 있었을 아이만 불쌍하게 됐다.[66][67] 결국 대리모를 통해 2010년 12월 25일에 아들 "재커리 잭슨 리번 퍼니시존"을 얻었다. 이후 아이를 위해 형제가 필요하다는 판단에 한 명을 더 [입양하려 하나], 이번에도 잘 안되었는지 결국 같은 대리모를 통해 2013년 1월에 둘째 "일라이저 조지프 대니얼 퍼니시존"도 얻었다. 두 아들 모두 한 명의 대리모를 통해 출산되었으며, 해당 대리모에게는 충분한 이해를 구하고 경제적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고 밝혔다. 일라이저가 태어나고 나서 레이디 가가가 그들의 대모(godmother)가 되었다.

엘튼 존은 인스타그램에서 아들들의 사진들을 올리거나 공식 석상에서도 빠짐없이 데려가는 등 본인의 배우자, 아들과 단란하고 행복한 가정으로 지내는 걸로 보인다. 2016년 시점으로 재커리와 일라이저는 만 5살과 3살이다.

2016년 1월 14일 엘런 디제너러스 쇼에 출연해서 밝힌 바에 따르면, 애들이 제일 좋아하는 노래는 Uptown Funk드레이크의 "Hotline Bling"이고, 재커리는 특히 크라프트베르크를 좋아한다고. 본인의 곡들 중에서 Rocket Man과 "Don't Go Breaking My Heart", Bennie And The Jets를 듣는다고 한다. 엘튼 존은 억지로 음악 쪽으로 밀어 붙이고 싶진 않다고 밝혔는데, 사실 현재는 음악보단 레고에 더욱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엘튼 존과 버니 토핀은 2015년에 본인의 자녀들에 대한 내용을 담은 Children's Song을 썼고, 말년에 느끼는 아버지임과 배우자들을 위한 사랑을 담은 The Open Chord를 쓰기도 했다.

엘튼 존과 데이비드 퍼니시 부부는 아들들에게 [재산을 상속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아이들이 나와 비슷하게 성장하길 바라고, 아이들에게 노동의 가치를 알려주고 버릇없는 아이로 자라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같은 결정을 내렸다.

엘튼 존은 여러 유명인들의 자식들의 대부이기도 하다. 존 레논의 아들 션 레논, 데이비드 베컴, 빅토리아 베컴의 아들 브루클린 베컴[68]과 로미오 베컴, 엘리자베스 헐리의 아들 데미안 찰스, 워너 뮤직의 부사장이자 사이어 레코드 사의 사장인 시모어 스타인의 딸, 엘튼 존의 첫 매니저였던 레이 윌리암스의 딸 에모리나 윌리암스가 있다.

여담으로 데이비드 퍼니시는 2010년대 초까진 단발에 무난한 모습으로 지내왔지만, 2014년부터 투블럭 스타일에 턱수염을 기르기 시작해 나름 간지를 보이고 있다. 엘튼 존은 자신의 아이들이 크기 전까진 라이온 킹을 보여주지 않는다고 했다. 무파사가 죽는 장면이 비극적이라서 충격받게 하고 싶지 않다고.

7.2 약혼과 자살 시도

1968년에 린다 우드로라는 여성과 교제했다.[69] 엘튼 존과 린다 우드로는 1967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에 만났고, 엘튼 존이 밴드 블루솔로지에서 활동하던 시기[70]에 셰필드의 한 카바레 클럽에서 공연을 했을 때였다. 당시 클럽에서 한 DJ가 린다 우드로를 때리던 광경을 목격해 엘튼 존이 이를 막았고, 린다 우드로를 구한 계기였다. 곧바로 서로 눈이 맞았고, 엘튼 존은 다음 블루솔로지 공연에도 보러 오라고 했고, 함께 사이좋게 지내었다.

그해 12월부터 6개월 동안 교제했었고, 당시 엘튼 존이 DJM 레이블 사의 스튜디오에서 지내었을때 린다 우드로는 그의 비서로 몇개월 동안 일했었다. 린다 우드로는 당시 셰필드에, 엘튼 존은 런던에 지내고 있었고, 어느날 둘 다 집에서 나와 영국 이즐링턴 펄롱 로드에 위치한 아파트로 이사 갔다. 풍족한 재산으로 엘튼 존 자비로 쓰던 경우는 없었고, 전부 린다 우드로가 댔다고.

하지만 린다 우드로는 본인의 미래 계획에서 엘튼 존의 음악적인 부분까지 고려하지 않은데다 엘튼 존이 음악을 하는 것에 대해 개의치 않아 했다. 특히 린다 우드로는 엘튼 존의 음악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약간의 불안감을 가졌다고 한다. 무려 200파운드나 되는 약혼 반지를 린다 우드로의 돈으로 사면서 결혼 케이크도 주문했고, 1968년 6월로 예정된 결혼식 초대장을 보내는 등 린다 우드로는 결혼식에 대한 계획들로 내세웠지만, 엘튼 존은 이에 대해 별로 개의치 않아 했고, 그 시점부터 혼란만 가지기 시작했다. 엘튼 존의 음악 경력이 몇년 간 침체되어 이어지던 무명과 그저 그런 연주자로만 살 것 같은 불안감, 곧 펼쳐질 예정이던 가정생활에서 느낀 갑갑함과 음악이 아닌 안정적인 직장을 종사하도록 원하던 린다 우드로의 생각 등으로 편하지 못한 마음을 지내고 있었다.[71]

결국 복잡한 생각들로 이기지 못해 1968년 6월 초, 버니 토핀이 지내던 아파트의 부엌에서 오븐을 열고 가스를 틀어놓은 채로 자살을 시도했다. 가스 오븐에 머리를 집어 넣고, 불을 약하게 킨 채 누웠고, 오븐 안에 배게를 집어넣고 창문을 죄다 열어놓은 이상한 방식으로 자살을 시도했었다. 당시 버니 토핀은 침실에서 나와 가스 냄새가 나는걸 느끼고 부엌으로 향했는데, 21살의 다 큰 남성이 오븐에 머리를 처박고 누워있는 광경은 그저 황당했기 때문에 놀랐다기 보단 먼저 웃었다고 했다.

버니 토핀은 그를 일으켜 엘튼 존의 의붓아버지 프레드의 트럭에 버니 토핀과 엘튼 존의 어머니 쉴라와 같이 탑승하고 병원으로 갔다. 얼마 지나고 나서 엘튼 존은 영국 킹리 스트리트에 위치한 백 오네일스 술집에서 버니 토핀, 블루솔로지의 멤버이자 엘튼 존의 가장 친했던 동료 중 한명인 '롱 존 볼드리'와 술을 마시면서 롱 존 볼드리는 엘튼 존에게 직설적이면서 솔직한 충고를 말했고, 그날 밤 존 볼드리가 엘튼 존에게 했던 충고는 본인의 삶을 구했다고 할 정도였다고 밝혔다. 이후 엘튼 존은 결혼을 취소했고, 린다 우드로의 아파트에서 떠나 다시 런던으로 돌아왔다.[72]

자살 시도는 이후에 한번 있었다. 한창 최전성기를 보내던 시기인 1975년 10월 22일, 로스앤젤레스에 위치한 본인의 맨션에서 수면제 60알을 삼켜 수영장에 뛰어 들었다.[73] 이때 엘튼 존이 수영장에 뛰어 들기 직전에 2시간 뒤면 죽어 있을 거야!!라고 소리 치면서 어머니와 외할머니, 케일럽 퀘이 등의 동료들이 보는 앞에서 수영장에 뛰어들었고, 911을 불러 엘튼 존을 수영장에서 꺼내 인공호흡을 했다. 자살은 실패되었지만, 10월 23일까지 2일 동안 혼수상태에 빠졌다. 어찌보면 진지한 첫 자살 시도로 볼 수 있다. 당시 어머니와 외할머니가 혼수상태에 빠졌던 그를 보살펴 주었고, 미국 방문이 처음이던 외할머니는 손자의 이런 모습을 보고 영국으로 돌아가겠다고 했었다.

1975년 10월 당시 West Of The Rockies 투어를 진행하고 있었고, 10월 21일 오클랜드 공연,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입성하고 바로 다음 날에 일어난 일이다. 혼수상태에서 깨어나고 2일 뒤 25~26일 다저 스타디움에서 두 공연을 진행했고, 이 공연을 끝으로 1975년 투어를 마쳤다. 당시 엘튼 존은 1975년 6월 21일 웸블리 스타디움 공연 이후, 1975년 10월 26일까지 쉬는 기간 없이 아주 바쁜 스케줄을 가지고 공연들을 진행했고, 며칠 간의 간격을 두지 않았다. 10월 21일과 25일 사이에 4일 간의 간격이 있는 이유가 바로 자살 사건로 인한 것이다. 이 자살 사건은 당시 언론에서 보도되지 않았고, 엘튼 존이 2000년대에 밝힌 내용이다. 때문에 충격 받은 사람들이 꽤 있었다.[74][75]

7.3 커밍아웃, 결혼과 이혼



1984년 2월 14일, 호주에서 보도된 엘튼 존의 결혼식.

엘튼 존은 <Louder Than Concorde> 투어를 마치고, 11집 Blue Moves가 발매되기 전인 1976년 10월 7일 롤링 스톤에서 개인적인 얘기를 털어놓는 인터뷰에서 양성애자로 커밍아웃했다.[76] 갑작스러운 커밍아웃으로 인해 화제를 일으켰고, 한동안 앨범과 싱글의 판매량이 크게 줄어든 원인이 되었다.[77] 이 부분에 대해선 엘튼 존/1970년대 문서 참조.

커밍아웃 이후에도 성정체성 논란은 없어지지 못했고, 엘튼 존 본인도 공공연하게 밝히기보단 흐지부지하게 넘어가는 느낌이었다. 그랬던 그가 갑자기 자신의 광팬이자 독일인 사운드 엔지니어 '레나테 블라우엘(Renate Blauel)'과 1984년 2월 14일 발렌타인 데이에 결혼했다. 엘튼 존은 1982년 9월 17집 Too Low For Zero몬트세랫AIR 스튜디오에서 작업하던 시기에 레나테와 만나 자연스레 친한 사이가 되었다. 1983년 12월~1984년 4월에 작업된 18집 Breaking Hearts가 발매되기 4개월 전에 결혼을 했던 셈.[78] 하지만 4년 간의 결혼 생활을 끝으로 1988년 11월 17일에 이혼했다.[79]

레나테는 위자료로 500만 파운드를 받았고, 둘의 사적인 사생활까지 철저히 지키면서 둘의 관계는 조용히 이어졌다. 레나테는 이혼하고 나서품위 있게 처신했고, 자신의 이야기를 신문에 팔거나 인터뷰에 나가 험담하는 행동은 하지도 않았다. 1980년대 후반부터 레나테는 영국 셔리 주에 위치한 작은 시골집에서 지내게 되었고, 이후 엘튼 존과의 관계는 다신 이어지지 않았다.[80] 엘튼 존은 본인의 시기를 돌아보면서 레나테와 결혼했던 시기를 매우 후회한다고 했다. 엘튼 존은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마음이 있었고, 함께 보내던 좋은 시간도 많았다고 했지만, 친하게 지냈던 동료이자 본인을 진심으로 사랑했던 전 아내였던 사람에게 큰 상처를 주었다는 점으로 커다란 실책이라고 밝혔다. 본인을 진심으로 사랑했던 사람에게 저질렀던 위장결혼이라는 과오는 충분히 비판의 여지가 있다. 결국 둘 다 큰 상처를 받으면서 씁쓸하게 끝난 셈.

이혼 이후, 엘튼 존은 1988년 11월 한 잡지에서 자신이 동성애자라고 제대로 밝혔고, 1976년 이후로 13년 만에 다시 커밍아웃을 함으로써 십수년 간의 성정체성 논란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1992년 3월 에이즈 재단 설립 이후로 사회 운동가로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고, 성소수자 인권 운동에도 열심히 참여하고 있다.

7.4 머리

1976년 자라나라 머리머리2014년

화려한 이미지에 가려 있어서 크게 각인이 되진 않았지만, 현재와 달리 젊었을땐 심한 탈모였고 상당한 노안이었다. 전성기 시절의 사진들만 찾아봐도 머리가 거의 대머리 수리로 봐도 무방했다. 1972년까지는 정상이었지만, 1974년 초부터 탈모가 진행해 머리가 휑하게 변하기 시작했다.[81] 1973년에 머리를 분홍색과 초록색으로 염색한게 화근이었는데, 당시 런던에서 했을땐 문제 없었지만, 뉴욕에 가서 다시 하고 나서 샤워를 했는데 분홍빛 물과 머리카락들이 곳곳에 나뒹굴고 있었다고 한다. 어찌보면 화학물질의 부작용을 제대로 당한 셈.

그로 인해서 1년 사이에 머리가 확 빠졌었고, 1977년부터 1979년까지 가발에 베레모를 쓴 걸로 시작해 1980년부터 1991년까지 모자를 착용하고 활동 했다. 1980년대 사진들 중에서 모자를 안 쓴 사진을 보면 거의 대머리 수준이었고, 1985~1986년에는 분홍색 포니 테일로 가꾸기도 했었다. 1987~1990년의 모습을 보면 40대가 아니라 50대 이상의 노인으로 보일 정도의 노안이었다.[82]

그러다가 1990~1991년의 재활 치료를 끝내고 나서 1992년 초에 머리 임플란트를 하게 되어 20대보다 더욱 안정적이고 풍성한 머리를 가지게 되었다. 그 후로 머리 관리를 잘해서 그런지 오히려 젊었을때보다 젊게 보인다는 말도 있고, 심지어 동안 소리도 들린다! 사실 엘튼 존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1990년대 머리 임플란트 이후의 노년 시기의 모습을 떠오르는 경우가 흔해서 머리숱이 별로 없던 젊은 시절의 엘튼 존을 보고 놀라는 경우도 종종 있다. 현재 엘튼 존의 머리가 가발이라고 오해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머리 색은 연갈색이다. 2000년대부턴 주황빛으로 변하기 시작하더니 금발과 연갈색 사이를 유지하고 있다.

7.5 건강

젊은 시절에는 마약알코올에 헤어나오지 못할 정도의 심각한 중독자였다. 10집 Rock Of The Westies를 작업하던 시기인 1975년부터 1990년까지 거의 15년 동안 마약을 달고 살았다. 어린 시절의 수줍음과 불우했던 기억들로 인해서 마약은 자기 자신과 얘기하게 만들었고, 위로가 되는 걸로 생각했다고. 다양한 종류의 마약을 수년 간 복용했고, 그 중 코카인은 간식 수준이었다. 이로 인해서 각종 부작용과 질병을 가지게 되었는데 특히 1986년의 성대 결절이 대표적이다. 1980년대 말에는 우울증간질, 심각한 성격 장애를 겪기도 했었다. 거기다 1970년대 초반부터 이어졌던 알코올 중독도 상당히 심했기 때문에 1980년대 전부를 마약과 알코올로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고, 폭식증도 앓았기 때문에 체형을 바꾸게 만든 원인이 되기도 했다. 1980년대 후반에는 마약 복용은 중독을 넘어 아예 습관으로 자리잡았고, 1989년에는 집에 몇주째 처박혀 스카치를 들이마시면서 4분에 한 번씩 코카인을 시도했다고 밝혔다. 1990년에는 체중이 100kg이나 나갔었다.[83]

하지만 1990년 라이언 화이트의 사망으로 인해서 본인의 삶을 돌아보게 된 계기가 되었고, 1990년 7월부터 1991년까지 시카고의 한 갱생시설에 입원하여, 마약, 알코올, 폭식증 등의 복합적인 중독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되었다.[84]

1991년 이후, 완전히 새 사람이 되어 건강하게 지낸다. 그 후로 건강에 약간의 문제가 생기기도 했지만 다행히 별탈 없이 지내오고 있다.맥주와 와인 맛은 살짝 그립다고 1999년 7월 9일에 런던의 웰링턴 병원에서 심장 문제로 수술했고, 심장 페이스메이커를 달았다. 당시 의사들이 확인해본 결과, 엘튼 존의 심장 박동이 비정상적으로 흘러가고 있었다고.

마약을 끊고나서도 약물복용 후유증 같은 질병이 생기지 않은걸 보면 그가 재활 치료 이후 얼마나 건강관리에 꾸준히 신경썼는지 알수 있는 부분이다. 그래도 습관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 현재도 1주일에 2번 정도 코카인을 하는 꿈을 꾼다고 한다.

2013년 7월에 급성 맹장염으로 목숨이 위험했었다. 7월 5일, 엘튼 존은 독일 할레에서 열린 공연에서 복통을 호소하며 공연 도중에 급히 앰뷸런스에 실려 나갔고, 공연을 중단했다. 병원에서 엑스레이 촬영 후, 치명적인 맹장 종기를 발견했고, 7월에 유럽에서 열릴 모든 공연들을 취소했다. 7월 31일 모나코에 위치하고 있는 병원에서 성공적으로 맹장염 수술을 받았다. 그의 대변인의 말에 따르면, 수술 전 그의 맹장은 폭탄과도 같았다고 할 정도로 위험했다고 한다. 엘튼 존은 단지 식중독 정도일 줄 알았다고 했고, 죽다 살아났다고 밝혔다. 팬들은 응원의 메시지를 보냈고, 엘튼 존은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수술 후 정말 많은 응원을 받았다며 팬들 덕분에 빨리 회복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글을 남기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2015년 12월 23일 디즈니랜드에서 가족들과 휴가를 즐겼는데, 당시 엘튼 존은 [휠체어에 앉아 경호원이 그를 끌어주는 모습]이 공개되었다. 2016년 2월 엘런 디제네러스 쇼에 나와서 밝히길, 당시 발목을 살짝 접질러 휠체어에 앉았었고, 다행히 다음날부턴 괜찮아졌다고 밝혔다. 이 때문에 팬들은 그의 건강이 나빠진게 아닌가 싶어 살짝 노심초사했다고. 휠체어보다 디즈니랜드에서 티컵 놀이기구에 탄게 제일 엿같았다고 했다.

7.6 관련 인물

7.6.1 버니 토핀

1971년


2013년

영원한 파트너

작사가 버니 토핀과의 장기간의 협업으로 유명하다. 엘튼 존의 대부분 곡들은 버니 토핀이 작사를 맡았으며, 이젠 떨어질 수도 없을 정도로 깊은 협업을 보여준다. 협업을 맺기 시작한 1967년부터 약 50년 동안 이어지고 있어 가장 오랫동안 버티는 콤비들 중 하나이며, 록 음악 계에서 레논-매카트니, 재거-리처드처럼 손꼽히는 콤비들 중 하나이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고.

7.6.2 개리 오스본

1977년부터 1982년, 1986년까지 엘튼 존과 함께한 작사가이다. 개리 오스본은 영국의 밴드 리더, 작곡가, 편곡자였던 토니 오스본의 아들이고, 어린 시절에 런던의 예술교육학교에 다녔다. 그가 15살때 프랑스 히트곡에 영어 가사를 붙이면서 작사 재능을 발견했고, 이후 학교를 그만두고 1960년대 말부터 음악 업계에 들어가 작사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작사가와 동시에 백보컬리스트로도 활동했고, 1970년대 초까지 여러 히트곡에서 백보컬을 맡은 바 있다. 엘튼 존은 개리 오스본을 1967년 말~1968년 초 쯤 블루솔로지에서 활동하던 시기에 서로 만났고, 이후 친한 친구로 지내기 시작했다.[85] 개리 오스본이 1973년에 여가수 키키 디의 3집 "Loving And Free"에서 작사가로 참여해 수록곡 "Amoureuse"의 가사를 썼고, 이 곡은 키키 디의 첫 히트곡이 되었다.

개리 오스본. 2014년에 촬영된 사진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개리 오스본은 히트곡들의 작사를 맡긴 했지만, 엘튼 존과 작업이 이루어지기 전까진 무명이었다. 1960년대 말부터 친한 사이를 유지하고 있던 엘튼 존과 작업하기 시작한 것은 1977년 The Thom Bell Sessions부터였다. 엘튼 존이 1976년 11집 Blue Moves를 작업하면서 작곡되었지만, 가사 없이 곡만 완성된 "Shine On Through"을 개리 오스본에게 작사를 맡으라고 요청했다.[86] 엘튼 존은 버니 토핀과 1977년 말에 갈라섰고, 10년 동안 협업을 맺었으니 자연스레 헤어질 때가 되었다고 판단한 것이다.[87] 버니 토핀이 떠나고 나서 엘튼 존은 개리 오스본을 영입해 작사파트너로 두었고, 1978년 12집 A Single Man으로 두 사람의 첫 공동작이 되었다.

엘튼 존은 개리 오스본과 작업했던 방식이 버니 토핀과 반대였는데, 버니 토핀이 가사를 먼저 쓰고 나서 엘튼 존이 가사를 보면서 전체적인 곡을 작곡하는 방식으로 약 20분 만에 신속히 작업했지만, 개리 오스본과 작업했을땐 엘튼 존이 먼저 곡을 작곡하고 나서 개리 오스본이 곡에다 가사를 붙이는 방식이었다. 때문에 엘튼 존은 한동안 곡을 쓰던 스타일이 살짝 바꿔지게 되었고, 개리 오스본과 작업한 곡들은 버니 토핀과 작업한 곡들에 비해서 이질감이 꽤 느껴질 정도이다. 그리고 개리 오스본은 시적이고 통렬한 가사가 주를 이루는 버니 토핀에 비하면 기대치에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본인도 버니 토핀같은 대단한 작사 실력은 없다고 스스로 인정하기도 했다. 개리 오스본은 주로 단순하면서 남녀 간의 사랑에 대한 내용을 즐겨썼으며,[88] 이는 일부 엘튼 존 팬들에게 공격대상이 되기도 했다.

A Single Man이 발매되었을때 평론가와 대중에게 커다란 혹평을 받았고, 개리 오스본에게도 온 비난이 적지 않았지만, 개리 오스본은 그럴수도 있다면서 대인배스럽게 넘어갔다. 이후 개리 오스본은 1980년 14집 21 AT 33, 1981년 15집 The Fox, 1982년 16집 Jump Up!에 참여해서 몇년 간 엘튼 존의 작사가로 활동했다. 버니 토핀이 1979년에 돌아왔을 때에도 같이 작업했었고, 버니 토핀과도 친한 사이를 유지했다. 1970년대 초에 백보컬리스트로 활동한 것과 같이 본인이 쓴 대부분의 곡들에서 백보컬을 맡기도 했다. 개리 오스본이 작사한 곡들 중에서 크게 히트친 곡은 빌보드 3위로 오른 1980년 "Little Jeannie", 세계적으로 크게 히트친 1982년 "Blue Eyes"가 있다. 본인도 이 두 곡은 자랑스럽다고.

1982년 Jump Up! 이후, 1983년부터 엘튼 존은 개리 오스본과 작업하지 않는다고 했다. 개리 오스본은 몇년 간 이어졌던 협업이 한 순간에 끝났다는 걸 알고 실망감을 느꼈고, 1970년대에 절친했던 두 사람은 이후 이전같은 사이로 지내지 않았다.[89] 하지만 3년 뒤인 1986년 1월에 20집 Leather Jackets을 작업하던 시기에 엘튼 존의 작사가로 다시 맡기도 했다.[90] 1986년 이후, 엘튼 존은 개리 오스본과 작업하지 않았다. 2007년 BBC 라디오4에서 방영되었던 The Thom Bell Sessions 인터뷰에서 같이 인터뷰에 응하는 등 사적으론 가끔씩 만나는 사이로 보인다.

1980년 12월 26~31일 쯤, 엘튼 존은 1만 파운드(1700만원 정도)나 하는 티파니 램프를 구매했지만, 당시 몇살 밖에 안되던 개리 오스본의 아들 루크 오스본이 방에서 뛰어 놀다 전선에 걸려 이 램프를 박살내버렸다. 개리 오스본과 그의 아내는 충격에 빠졌지만, 정작 이 램프를 구입한 엘튼 존은 매우 침착한 태도(!)로 괜찮다고 했다.[91]

1960년대 말부터 오랫동안 지낸 사이지만, 정작 엘튼 존과 같이 찍은 사진이 단 한장도 없는 걸로 보인다.

7.6.3 팀 라이스

1995년 3월 27일 제67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받은 오스카상

엘튼 존은 팀 라이스와 한동안 협업을 가졌었다. 버니 토핀, 개리 오스본 다음으로 꼽히던 작사 파트너였다. 버니 토핀과 마찬가지로 팀 라이스가 먼저 가사를 작사하고나서 엘튼 존이 곡을 작곡하는 방식. 팀 라이스와 작업한 작품으로 가장 유명한 것은 당연히 1994년 The Lion King이며, 1999년 Aida 역시 유명하다.

이 둘이 작사작곡 협업을 가진 건 라이온 킹이 작업되기 10년 전인 1982년 16집 Jump Up!의 4번 트랙 "Legal Boys"가 처음이다. 곡과 앨범을 작업하던 시기인 1981년 6~7월 사이, 이혼에 관한 침울한 내용에 법률 용어를 집어넣은 "Legal Boys"는 원래 팀 라이스는 앤드류 로이드 웨버와 작업해 둘려고 쓴 가사지만, 앤드류 로이드 웨버가 작사가 '돈 블랙'과 작업하기도 하면서 남겨둔 가사다. 팀 라이스는 엘튼 존이 가사를 좋아할 것 같아서 혹시나 하고 보냈는데, 그가 좋다고 해서 곡으로 작곡했다.[92]

1991년 디즈니는 팀 라이스에게 사자에 대한 영화[93]에서 가사 작업을 맡으라고 요청했고, 당시 팀 라이스는 작곡가 알란 메켄과 알라딘의 사운드트랙 작업을 마쳤던 상태였다. 디즈니는 음악을 맡길 사람으로 누가 좋은지 팀 라이스에게 물어봤고, 팀 라이스는 엘튼 존이 이 작업에 적합한 뮤지션이라고 생각해 그를 추천했고, 엘튼 존에게 연락했다.[94] 엘튼 존은 사실 이전부터 디즈니 애니메이션들의 아름다운 사랑 노래들에 매료되어 자신도 꼭 그런 노래를 작곡해보고 싶었다면서 작업에 참여한다고 했다. 그렇게 본격적으로 1992년부터 작업에 들어가 1993년까지 라이온 킹의 음악을 작곡했다.

영화가 개봉되기 3주 전인 1994년 5월에 사운드트랙 앨범이 먼저 발매되었고, 영화와 마찬가지로 사운드트랙 앨범도 세계적으로 대성공으로 거두었고, 음악도 극찬을 받으면서 호평이 줄줄이 이어졌다. 특히 미국에선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두어 1974년에 발매되어 17,000,000장이나 팔린 Elton John's Greatest Hits에 이어 두번째로 가장 많이 팔린 엘튼 존 앨범이 되었고, 1975년 10집 Rock Of The Westies 이후로 19년 만에 빌보드 앨범 차트 1위로 기록한 앨범이 되었다. 앨범과 영화의 대성공으로 인해 엘튼 존의 경력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들 중 하나가 되었고, 제2의 전성기를 확실히 열어준 계기가 되었다.

영화의 주제가인 Can You Feel The Love Tonight으로 인해 1995년 3월 27일에 열린 [제67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주제가 상으로 오스카상을 받게 되었다. 엘튼 존은 당시 아카데미 시상식이 열리기 1주 전에 사망한 외할머니에게 이 상을 바쳤고, 팀 라이스는 영국의 크리켓 선수/축구 선수인 데니스 콤프턴에게 바쳤다. 1996년에는 라이온 킹 브로드웨이 뮤지컬에서 수록할려고 The Morning Report, "The Madness Of King Scar", "Chow Down" 총 3곡을 추가로 작곡하기도 했다.

라이온 킹 사운드트랙 이후, 엘튼 존은 팀 라이스와 두 번이나 협업을 가졌다. 1996년 4월에 주세페 베르디의 오페라 아이다를 모티브한 디즈니 뮤지컬 Aida를 작업했고, 2000년 브로드웨이 뮤지컬판 앨범이 발매되기 1년 전에 유명 뮤지션들과 협업을 가져 뮤지컬의 노래를 재해석한 콘셉트 앨범 Elton John And Tim Rice's Aida로 먼저 발매했다.[95] 2000년 드림웍스에서 개봉된 애니메이션 엘도라도사운드트랙을 작업했다.[96] Aida는 세계적으로 흥행에 성공했지만, 엘도라도는 영화가 대참패를 하면서 사운드트랙 앨범도 마찬가지로 상업적으로 실패해 엘도라도 이후로 협업을 가진 경우는 없고, 엘도라도가 이 둘의 마지막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도 현재도 가끔씩 이메일로 주고받고 연락하는 사이.

팀 라이스는 엘튼 존의 신속한 작곡 능력에 감탄했다고 한다. 그가 Circle of Life를 불과 30분 안에 작곡하고 나서 녹음한 데모를 팀에게 들려주었는데 그것에 대해서도 감탄했다. 또한 팀 라이스가 가장 좋아하는 엘튼 존 노래로 1989년작 "Sacrifice"로 꼽았다.

7.6.4 비틀즈

엘튼 존은 비틀즈의 멤버들과 친한 사이를 유지했다. 사실 비틀즈 해체 이후로 각 멤버들과 협업을 이룬 뮤지션들 중 한 명에 엘튼 존은 꼭 들어가고, 모든 멤버들과 무대에서 함께한 몇 안되는 뮤지션이기도 하다.

7.6.4.1 존 레논

존 레논과의 우정이 깊었기에 엘튼 존은 2010년대에도 공연에서 존 레논을 가끔 언급하곤 한다. 엘튼 존 레논

엘튼 존과 존 레논. 1974년

1970년 8월, 엘튼 존이 미국 데뷔를 하게 된 시기에 존 레논은 엘튼 존의 대표곡 Your Song을 듣고 비틀즈 시절 이후의 새로운 형태의 음악이자 개선된 영국 가수의 보컬이라고 칭찬한 걸로 시작했다.[97] 엘튼 존은 1964~1965년 런던에서 열럈던 비틀즈 공연에 간 적 있었고, 나중에 말하길 신을 본 것 같은 느낌이라고 밝혔다. 존 레논 특유의 스타일, 위트와 음악성이 크게 압도되는 걸로 느껴 그를 만나기 두려웠지만, 정작 1974년에 만나게 되었을 땐 옛 친구를 만나는 느낌이었다고.[98]

둘의 우정이 가장 돋보였던 해가 바로 1974년이고, 서로의 앨범에 참여해서 녹음을 도와주었다. 존 레논은 엘튼 존의 "The Bitch Is Back"에서 탬버린을 연주했고, 엘튼 존은 존 레논의 "Whatever Gets You Through The Night"에서 오르간과 백보컬, "Surprise, Surprise (Sweet Bird of Paradox)"에서 키보드를 연주했고, 백보컬을 맡았다. 그리고 존 레논의 One Day At a TimeLucy In The Sky With Diamonds를 녹음해서[99] 1974년에 싱글 A/B면에 수록해서 발매되었고, 1975년 1월 첫 주에 빌보드 차트 1위로 기록되어 크게 히트치기도 했다.[100]

1974년 11월 28일 레전드로 꼽히는 뉴욕 공연 [유일하게 남아 있는 영상].[101] 존 레논의 "Whatever Gets You Through The Night"이 빌보드 1위로 기록하면 존 레논이 1974년 11월 28일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릴 예정이던 엘튼 존 공연에 참여할 것이라고 내기했고, 이 곡이 정말로 1위로 기록되어 내기에 이기면서 존 레논이 엘튼 존 공연에 참여하게 되었다. 엘튼 존은 존 레논에게 Imagine은 어떠냐고 제안했지만, 존 레논은 "한물간 가수처럼 대표곡이나 부르기 싫다"고 하여 신나는 곡들을 불렀고, [Whatever Gets You Through The Night], [Lucy In The Sky With Diamonds], [I Saw Her Standing There] 총 3곡을 엘튼과 같이 불렀다.

이 공연은 존 레논이 참여했다는 것으로만 해도 레전드가 되었고, 엘튼 존도 평생 잊지 못할 순간이라고 회상했다.[102] 당시 공연은 1976년에 라이브 앨범 Here And There에 수록되어 발매되었고, 존 레논 실황은 리마스터링 앨범의 보너스 트랙으로 수록되었다. 또한 1981년 1월에 3곡으로 수록된 EP로 발매되기도 했다.[103]

1975년부터 존 레논이 음악 활동을 중단하고 가정에 몰두하기 시작했을때 자연스레 엘튼 존과 만남도 줄어졌다. 그럼에도 엘튼 존은 여전히 그를 생각했고, 1980년 21 AT 33 투어에서 Imagine을 레파토리로 수록해 자주 부르기도 했다. 1980년 12월 8일 존 레논이 세상을 떠나게 되었을때, 당시 엘튼 존은 21 AT 33 투어의 마지막 일정인 호주로 떠난 상태였고, 멜버른으로 가던 비행기에서 본인의 매니저 존 리드에게 존 레논의 사망 소식을 들었고, 공항에 황급히 내려 오노 요코에게 연락했다.[* [[12월 8일 호주 멜버른 공항에서 인터뷰, 이 영상 시점으로 존 레논의 사망 소식을 들은지 10분도 되지 않은 상태였다.] 당시 호주에선 12월 22일 퍼스까지 공연이 진행될 상태였기 때문에 당장 뉴욕으로 갈 수 없었다. 21 AT 33 투어의 레파토리였던 Imagine을 존 레논을 추모하는 의미로 불렀고,[104] 12월 초-중 쯤, 멜버른의 한 교회에서 추도식을 열었다고 한다. 존 레논의 죽음으로 큰 충격을 받은 엘튼 존은 한동안 슬픔에 빠져 지내게 되었고, 본인의 사무실에서 문을 잠그고 오열했다.[105] 당시 레논의 죽음 소식으로 도배된 신문도 보지 않았다고.




Empty Garden (Hey Hey Johnny) 뮤직비디오

그로부터 몇개월이 지난 1981년 6월, 16집 Jump Up!을 작업하러 프랑스 파리로 갔을때 "The Man Who Never Died"와 "Empty Garden (Hey Hey Johnny)" 존 레논을 추모하는 두 곡을 작곡했다. 버니 토핀은 "Empty Garden"의 가사를 1980년 12월 9일 비극적인 소식을 들은 바로 다음 날에 썼고, 엘튼 존이 약 1년 뒤에 작곡한 것이다. 1982년 3월에 싱글로 발매되어 히트친 "Empty Garden"과 달리 "The Man Who Never Died"는 1985년 19집 Ice On Fire를 작업하면서 녹음되었고, "Nikita" 싱글 B면과 1995년 리마스터링 앨범의 보너스 트랙으로 수록되었다.

1982년 8월 4~7일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린 공연에선 오노 요코와 션 레논[106]을 무대로 불렀고, 엘튼 존은 션 레논을 부둥켜 안았다. 사진 1988년 10월 9일 메사추세스 공연에선 "Lucy In The Sky With Diamonds"를 존 레논의 48번째 생일 기념으로 불렀다.[107] 2000년 10월 20~21일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Come Together을 불렀고,[108] 라스베가스 시저스 팰리스의 콜로세움에서 2011년부터 진행되기 시작한 Million Dollor Piano 투어에서 "Empty Garden"을 레파토리로 수록해서 자주 부르는 등 이후에도 존 레논에 대한 헌정을 여러 번 남겼다.

존 레논과 친분은 2015년 2월 22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다루었다]. 국내에선 잘못된 얘기가 돌아다니기도 하는데, 존 레논이 엘튼 존에게 무릎을 꿇고 엘튼 존이 일어나십시오라고 한 말은 허구이며 2000년대 중반, 국내에서 지어낸 걸로 추정되는 얘기로 오랫동안 떠돌았다. 해외의 공식 자료들엔 그런 일화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7.6.4.2 폴 매카트니
1975년 길거리에서[109]2012년 6월 여왕 60주년 주빌리 공연

멤버들 중에서 폴 매카트니와 별다른 협업이 없다. 사실 엘튼 존과 관련된 뮤지션들 중에서 협업이 적게 띄는 편이다. 이는 1970년대 전성기 시절 당시 라이벌이라고 할 수 있던 뮤지션 중 한 명이 폴 매카트니였기 때문에[110] 다른 멤버들과 달리 나름대로 비지니스 관계로 유지했던거 같다. 멤버들의 솔로 들에 참여한 것과 달리, 폴 매카트니 솔로 앨범엔 한번도 참여하지 않았고, 오직 무대에서만 협업을 보여줬다.[111]

엘튼 존이 처음으로 만난 멤버이기도 하다. 1968년 10월 23일 애비로드 스튜디오에서 세션으로 일하던 날에 폴 매카트니가 스튜디오에 방문했고, 그는 평범한 친구들이 뭘 하고 있나 궁금해서 스튜디오에 방문했다고 한다. 엘튼 존은 크게 놀라 그 자리에서 얼어붙어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고, 폴 매카트니는 피아노에 앉아서 '최근에 밴드가 녹음을 마친 곡'이라고 Hey Jude를 불렀다.

1976년 6월 23일, 엘튼 존은 폴 매카트니와 링고 스타, 해리 닐슨 등의 여러 동료들과 같이 하루를 보내었고, 그 날 밤에 셰어와 같이 윙스의 로스앤젤레스 공연에서 관객으로 참여해 공연을 봤다고 한다.[112] 그리고 2001년 10월 20일 뉴욕 위문 공연의 백스테이지 영상에서 [서로 키스를 하기도 했다!]

7.6.4.3 조지 해리슨
1987년 6월 5일 영국 런던, 링고 스타와 엘튼 존, 조지 해리슨

엘튼 존은 조지 해리슨을 비틀즈의 철학자라고 평했고, 존 레논 다음으로 가장 친한 사이를 유지했던 멤버였다. 1970년 엘튼 존의 2집 Elton John이 미국 빌보드에 올라가던 시기에 조지 해리슨이 엘튼 존에게 미국 진출을 축하하다는 전보를 보냈고, 엘튼 존은 이 전보로 매우 깊은 고마움을 느꼈고, 이 전보를 아직도 소중히 가지고 있다고 한다.[113] 엘튼 존은 조지 해리슨의 All Things Must Pass를 비틀즈 멤버들의 솔로 앨범들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평했고, 당시 택시에서 "My Sweet Lord"를 듣고 전율을 느꼈다고 했다.[114]

그 후로 조지 해리슨과 대화를 나누던 사이로 발전했고, 1987년 조지 해리슨의 Cloud 9에 참여하여 피아노 연주를 맡았던 시기를 행복한 기억으로 후에 회상했다. 아침 8시까지 녹음하던 세션때 해리슨에게 Here Comes The Sun을 연주할 수 있냐고 요청하자 해리슨은 흔쾌히 연주해서 불렀다고. <Cloud 9> 작업 이후, 그해 6월 6일에 열린 록 갈라 공연에서 링고 스타와 같이 무대에 섰다. [#] 참고로 엘튼 존은 조지 해리슨의 1987년작 "When We Was Fab" 뮤직비디오에 잠시 출연하기도 했다. [[<iframe width="42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dsyfvYyxjp8"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3분 32초 부근]].

1997년 린다 매카트니 추모 공연 이후로 한동안 만나지 않았고, 2001년 중순, 조지 해리슨의 스위스 저택에 방문해 그를 본 것이 마지막이었다. 2002년 조지 해리슨을 추모하는 뮤지션들의 인터뷰에서 엘튼 존은 [조지 해리슨에 대한 기억을 회상했고], 2002년 카네기 홀에서 열린 단체 자선 공연에서 Give Me Love, Something을 불렀다.[115]

7.6.4.4 링고 스타
1975년

링고 스타와 약간의 협업을 가졌었다. 1972년 마크 볼란의 [Children Of The Revolution]에서 링고 스타, 엘튼 존이 피쳐링한건 잘 알려진 사실. 1974년 링고 스타의 4집 Goodnight Vienna에서 엘튼 존/버니 토핀 작사작곡의 "Snookeroo"를 링고에게 주기도 했다. 이 곡은 "No No Song"과 더블 A면 싱글로 발매되어 빌보드 3위로 기록되어 링고 스타의 최대 히트곡 중 하나가 되었다. 위 영상에서도 보이듯이 1987년 6월 6일 록 갈라 공연 이후로 링고 스타와 작업한 경우는 없지만, 1992년 The One 투어의 뒷무대에서 서로 반갑게 맞이하는 등 사적으론 어느정도 친분이 있는 걸로 보인다.

7.6.4.5 조지 마틴

조지 마틴과 약간의 협업도 있었다. 1970년 2집 Elton John의 세션을 모으고 있던 1969년 11월, 조지 마틴이 프로듀싱을 맡을 것으로 제안했지만, 거장과 작업한다는 부담감으로 인해서 어쩔수 없이 거절했다.[116] 한참 뒤인 1994년 3월 30일, 25집 Made In England을 작업하던 북런던 햄프셔의 AIR 스튜디오, 당시 엘튼 존과 프로듀서 그레그 페니는 엘튼 존이 30분 안에 작곡한 "Latitude"의 현악을 마치 Help!의 "You've Got To Hide Your Love Away"처럼 할 것이라고 결정해서 AIR 스튜디오를 소유했던 조지 마틴에게 요청했고, 조지 마틴은 흔쾌히 승낙해서 이 곡의 호른과 현악을 편곡했다.

1997년 Candle In The Wind 1997의 프로듀싱을 맡았다. 1997년 9월 27일 An Audience With.. 인터뷰 프로그램의 엘튼 존 에피소드에서 조지 마틴이 "본인이 시도한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로 바보같은 곡을 만든적 있냐는" 질문을 꺼내자 엘튼 존은 "Solar Prestige A Gammon"을 언급하면서 이 곡에 대한 내용을 설명했다.

2016년 3월 9일 플로리다 공연에서 조지 마틴을 추모하는 의미로 [Don't Let The Sun Go Down On Me]를 불렀다.

7.6.5 프레디 머큐리

엘튼 존과 프레디 머큐리. 1977년

엘튼 존은 프레디 머큐리의 임종 직전 병문안이 허락된 몇 안되는 인물이다. 음악적으로 둘은 곡에 사회정치적 메시지를 담기보다는 음악 자체에 집중했던 스타일에서 공감대가 있었을 것이고, 개인적으로는 성지향성이라는 문제를 공유할 수도 있는 사이였을 것이다.

물론 서로의 음악으로 영향을 끼친 바는 있겠지만, 프레디 머큐리와 엘튼 존은 1970년대부터 음악적인 교류는 그리 잦진 않았고, 서로의 공연들에서 잠시 참여한 정도 뿐이다.[117] 프레디 머큐리는 공연에서 본인이 가장 좋아하던 엘튼 존의 Saturday Night's Alright For Fighting을 1977년부터 1986년까지 9년간 자주 불렀다.

오히려 엘튼 존은 의 다른 멤버들과 교류가 더 많았다. 1985년에 발매된 엘튼 존의 19집 Ice On Fire, 1986년 20집 Leather Jackets에서 로저 테일러존 디콘이 참여해 수록곡 "Too Young"과 "Angeline"에서 베이스와 드럼을 연주했고, 1992년 6월 28일 웸블리 아레나 공연에선 브라이언 메이가 참여해 The Bitch Is Back에서 기타를 연주했다.

1991년 12월, 프레디 머큐리의 장례식에서 퀸 멤버들과 같이 참석했고, 1992년 4월 20일 프레디 머큐리의 그 유명한 추모 공연이 열렸을때 엘튼 존은 [Bohemian Rhapsody][118]와 [The Show Must Go On]을 불렀다. 당시 엘튼 존은 재활 치료를 극복하는 과정에 있었기 때문에 목상태가 심히 좋지 않았다. 그럼에도 퀸의 나머지 멤버들이 엘튼 존에게 이 두 곡을 맡긴 것은 프레디 머큐리 뿐 아니라 퀸 멤버 전체와 엘튼 존의 인간적, 음악적 관계가 있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이 공연에서 부른 "The Show Must Go On"은 훌륭한 라이브로 꼽히고, 엘튼 존은 이 곡을 1992~1993년 The One 투어에서 자주 부르기도 했다.

[1980년 8월 런던의 파티]에서 같이 얘기한 영상이 공개되었는데, 프레디 머큐리와 함께한 유일한 영상으로 보인다. 해당 장면은 2016년 초에 방영된 BBC 다큐멘터리에 수록되었다.[119]

7.6.6 다이애나 스펜서

엘튼 존은 다이애나비와 상당한 절친이었다. 다이애나가 생전 가장 좋아했던 밴드와 뮤지션은 듀란 듀란과 엘튼 존이었으며, 특히 엘튼 존과 각별한 우정을 가지고 있었다. 엘튼 존과 다이애나 둘 다 결혼에 실패한 적 있었고, 폭식증도 앓았고, 에이즈 제단 활동에 대한 관심 등 공통점이 많았고, 파란만장했던 삶으로 서로 느끼는 공감대가 클 수 밖에 없었다.

다이애나비와 엘튼 존. 1985년 7월 13일

서로 사적으로 친해지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부터였고, 1981년 7월 다이애나와 찰스 왕세자의 결혼식이 행해졌던 시기부터 친분이 생긴 것으로 보였다.[120] 그리고 엘튼 존은 당시 다이애나에게 푹 빠져 왕가 결혼식이 한창 화제였을때 찰스가 다이애나에게 부를 법한 가벼운 사랑 노래 "Princess"를 작곡하기도 했다. 이 곡은 왕가 결혼식 1년 뒤인 1982년 7월에 영국에서만 싱글로 발매되었지만, 차트 진입에 실패했다.

이후 1985년 7월 13일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열린 AID 공연 당시 다이애나가 방문해 엘튼 존을 포함해 공연에 참여한 뮤지션들과 짧은 담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1986년 6월 20일, 1987년 6월 6일 런던의 록 갈라 공연에서도 만났었다. 1980년대 이후로 약 10년 동안 절친으로 지냈었고, 그중 자선 활동으로 통해 더욱 가까워진 것도 있다. 엘튼 존은 다른 절친 동료들과도 끊임없이 싸우며 화해하는 과정을 반복했고, 다이애나와도 마찬가지였다. 1996년 자선구호와 관련된 일이었는데, 엘튼 존이 조직한 일에서 다이애나가 나가자 엘튼은 좋지 않은 마음을 알렸고, 그녀는 엘튼에게 간결한 편지를 보낸 일이었다.

그렇게 약 1년 동안 대화하지 않았다가 1997년 7월에 화해했다. 당시 엘튼 존과 5년 간 절친이었던 이탈리아의 유명 디자이너 '지아니 베르사체'의 죽음이 이 둘의 관계 회복의 계기가 되었다.[121] 지아니 베르사체는 7월 15일 자신의 저택에서 동성애자 연쇄 살인범 '앤드류 커내넌'의 총격으로 세상을 떠났으며, 엘튼 존은 절친의 사망으로 큰 슬픔에 빠졌다. 그의 사망 일주일 뒤에 열린 장례식에서 엘튼은 배우자 데이비드 퍼니시와 다이애나에게 위로를 받는 모습을 보였다.

1993년

지아니 베르사체의 죽음으로 큰 슬픔에 빠졌지만, 다이애나와 화해하는 계기가 되었고, 다이애나는 한동안 엘튼에게 많은 위로를 해주며 그를 도와주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1개월 뒤인 8월 31일, 다이애나는 프랑스 파리에서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면서 엘튼 존은 고작 2개월 안에 절친 2명을 잃게 되면서 한동안 커다란 슬픔에 잠겼었다.

1997년 9월 2일, 영국의 기업인이자 버진 그룹의 회장인 "리처드 브랜슨"에게 전화가 왔었는데, 다이애나의 누이인 "레이디 사라"가 엘튼 존에게 다이애나의 장례식에서 노래를 불러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리하여 그녀가 가장 좋아하던 곡이 이 곡이라는 점과 다이애나가 생전 이 곡에 대한 애착을 잊어먹을 순 없다는 점을 감안해서 다이애나의 유족과 왕실에서 허락을 받고, 기존의 곡을 개사하기로 했고, 버니 토핀은 마릴린 먼로를 추모한 원곡의 가사를 다이애나를 추모하는 Candle In The Wind 1997로 새로 썼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고.

1997년 9월 6일 다이애나의 장례식에서 엘튼 존은 데이비드 퍼니시, 조지 마이클과 같이 참석했고, 곡을 부르기 전에 엘튼 존 속으로 절대로 망치지 말자 틀리게 부르지 말고 그저 너의 감정을 대놓고 보여주지 말고 최선을 다하자고는 생각 뿐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만큼 깊은 슬픔과 동시에 엄청난 긴장감을 가질 수 밖에 없던 것은 왕실 장례식에서 부르는 것과 전세계 생중계로 방영했다는 점.[122] 그렇게 라이브로 불렀을때 사실상 처음으로 개사된 버전의 곡을 세계 최초로 공개하던 것이었고, 장례식을 생중계로 지켜보던 전세계 사람들에게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다이애나비가 생전 가장 좋아하던 엘튼 존의 곡 중 하나가 Your Song이었고, 엘튼 존은 2절의 'Yours are the sweetest eyes I've ever seen'(당신의 눈은 내가 지금껏 본 가장 아름다운 눈이란 거에요)라는 구절을 부를때 마다 다이애나가 생각난다고 했다. 참고로 "Your Song"은 장례식 추모곡으로 먼저 고려된 곡이기도 했다. 하지만 1절의 첫 구절 'it's a little bit funny'가 당시 상황과 맞지 않아 "Candle In The Wind"로 바꾼 것.

장례식에서 부른 Candle In The Wind 1997은 그로부터 몇주 뒤에 싱글로 발매되었고,[123] 이 싱글은 세계적으로 어마어마한 대성공을 거두어, 전세계적으로 무려 33,000,000장이나 팔렸고, 세계에서 두번째로 많이 팔린 싱글이 되었다. 원래 이 곡은 마릴린 먼로를 추모하는 곡이기 때문에 영국의 몇 언론사에선 가사만 바꿔서 백인 미녀의 죽음에 노래를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는 비판이 있었고, 롤링 스톤스의 멤버 키스 리처드도 이를 지적하긴 했지만, 엘튼 존은 다이애나와 몇년 전부터 각별했던 사이였음을 인터뷰 등에서 밝히면서 별다른 반론을 내리지 않게 되었다.[124]

이후 엘튼 존은 인터뷰에서 다이애나와의 각별했던 사이에 대해서 회고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고, 2007년 7월 1일[125]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열린 다이애나를 헌정하는 공연 Concert For Diana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리고 1997년 9월 6일 장례식에서 부른 "Candle In The Wind 1997"의 라이브 버전은 사실상 처음이자 마지막 라이브 버전으로 볼 수 있다. 절친을 잃은 감정과 다이애나의 아들들 윌리엄 왕세손해리 왕자을 위해서 이 곡은 다시 부르지 않을거라고 맹세했다고.

엘튼 존은 다이애나의 가장 매력적인 신체 자산이 이라고 밝혔다. 슬퍼하면서 웃고 있는 눈이 참 아름답다고.

만약 엘튼 존이 커밍아웃하지 않았더라면 영국 타블로이드 언론들이 보나마나 다이애나와 사귄다고 난리법석을 떨었을 것이라는 소리가 많았다.

엘튼 존과 다이애나비와의 사이, Candle In The Wind의 비화에 대해선 2014년 2월 23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나왔다.

7.6.7 빌리 조엘

1994년 미국 Face To Face 투어 포스터


엘튼 존과 빌리 조엘. 2001년 Face To Face 투어
Rocket Man과 Piano Man
빌리 조엘은 엘튼 존과 같이 피아노를 연주하면서 노래를 부르는 뮤지션이라고 꼽히기 때문에 서로 엮이는 경우가 크다. 어린 시절의 음악 관심이나, 부모님의 이혼, 긴 무명, 피아노를 바탕하여 음악을 하는 등으로 공통점이 크다고 볼 수 있지만, 199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서로 음악적인 면으로 만남이 거의 없었다. 라이벌/실존 문서에도 설명되어 있지만, 한국에선 엘튼 존의 라이벌이 빌리 조엘이라고 언급되는 경향이 크다. 엘튼 존의 라이벌으로 볼 수 있는 뮤지션은 로드 스튜어트가 더욱 가깝고, 경력 상으로 솔로로 활동한 폴 매카트니스티비 원더, 밴드로 보자면 레드 제플린 정도가 1970년대 당시 엘튼 존과 용쟁호투를 벌인 대상이다. 거기다 빌리 조엘은 1967년 데뷔 이후 1976년까지 약 10년 간의 무명을 가지고 있어 전성기를 보내던 시점이 서로 달랐다.

빌리 조엘은 1977년 5집 <The Stranger>로 인기를 끌기 시작해 몇년 간 전성기를 보내었지만, 엘튼 존은 커밍아웃과 은퇴 선언으로 음악 활동을 줄이고 나서 왓포드 FC에 크게 몰두하던 시기였고, 이후 몇년 간 침체기를 보내었다. 엘튼 존은 1983년 17집 Too Low For Zero로 재기에 성공하여 이후에 히트 싱글과 앨범들을 꾸준히 발매해서 빌리 조엘과 사실상 활동 기간이 같아졌지만,[126] 그럼에도 1980년대에도 접접이 거의 없었다. 피아노를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는 록커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라이벌 운운은 비약이라고 할 수 있다.

빌리 조엘은 엘튼 존을 1970년 8월, LA의 Troubadour 극장에서 미국 데뷔를 성공적으로 이끌던 시기부터 알게 되었고, 1950년대 이후로 간만에 나온 파격적인 피아노 연주자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본인이 가장 먼저 들은 엘튼 존 노래가 Border Song이라고. 엘튼 존도 1970년대 초부터 빌리 조엘에 대해 어느정도 들어봤고, 1973년 "Piano Man"으로 통해서 알게 되었다고 밝혔다. 빌리 조엘은 1976년 쥬크 잡지의 인터뷰에 따르면, 엘튼 존은 본인 음악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빌리 조엘은 엘튼 존이 피아노를 주무대로 삼은 음악을 다시금 인기를 끌게 만든건 확실하다고 했고, 본인도 엘튼 존을 좋아하긴 하지만, 서로 비교를 하는 것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둘이서 처음으로 만난 건 1976~1978년 사이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World National 호텔이다.[127] 처음 만나고나서 서로의 음악에 대해서 얘기했다고 한다. 그 후로 1980년대 중반~1990년대 초반 사이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 날, 뉴욕의 5번 거리에서 엘튼 존이 차에서 내리면서 길 건너가는 빌리 조엘과 오랜만에 만나 서로 안부 인사를 하고 가벼운 얘기를 했다고 한다. 하지만 크리스마스 시즌이라 바빴고, 주변에 사람들이 몰려오는 바람에 이 둘의 만남은 짧게 이어졌다. 그동안 접접이 거의 없었고, 단순한 만남으로만 이어졌지만[128], 1994년 7월부터 엘튼 존과 둘이서 진행하는 합동 투어 Face To Face를 진행했었다. 이 투어는 빌리 조엘의 아이디어였고, 엘튼 존도 좋다고 생각해 곧 진행하게 되었다. 첫번째 공연은 1994년 7월 8일 필라델피아 PA의 베테랑 스타디움에서 진행되었고, 이후로 1994~1995년, 1997~1998년, 2001~2003년, 2009~2010년까지 16년 간 진행되었고, 북미와 유럽, 오세아니아, 일본으로 세계적으로 진행되었다.

모든 공연들은 항상 스타디움에서만 열렸고, 모든 공연이 초대형 공연으로 진행되었다. 엘튼 존 밴드와 빌리 조엘 밴드가 참여해서 총 두개의 밴드가 항상 함께 했고, 모든 공연의 무대에는 피아노 건반들로 장식되었다. 공연의 첫번째 곡들은 듀엣으로 본인들의 3곡을 불렀고,[129] 이어서 엘튼 존의 15곡, 빌리 조엘의 15곡 정도의 본인 곡들로 각각 불렀고, 마지막에 서로 듀엣으로 약 7곡 정도 불렀던 형식이다. 합쳐서 총 40곡에 가까운 셋리스트에다 3시간이 넘는 긴 공연이다. 이런 식으로 16년간 똑같은 구성으로 진행되었다.

2013년 10월 15일 제12회 엘튼 존 에이즈 제단에서[130]

그리고 비틀즈Birthday, Here Comes The Sun, Back In The U.S.S.R., A Hard Day's Night이나 리틀 리처드의 "Lucille", 제리 리 루이스의 "Great Balls Of Fire" 같은 고전 로큰롤 넘버들도 자주 불렀고, 서로의 곡들을 부르기도 했다. 엘튼 존은 빌리 조엘의 "New York State Of Mind", "Uptown Girl"을 불렀고, 빌리 조엘은 엘튼 존의 Candle In The Wind, Goodbye Yellow Brick Road를 불렀다. 엘튼 존/빌리 조엘 듀엣으로 부른 본인들의 곡들은 "Your Song", "Piano Man", "Honesty", "Don't Let The Sun Go Down On Me", "I Guess That's Why They Call It The Blues", "My Life", "Just The Way You Are", "You May Be Right", "Uptown Girl", "Goodbye Yellow Brick Road", "Bennie And The Jets", "The Bitch Is Back", "Candle In The Wind"가 있다. 각자 스타일로 각자의 곡을 부른 것도 꽤 인상적이다.

1998년 투어를 진행하던 중, 당시 빌리 조엘이 병에 걸려 6월 6일 웸블리 스타디움 공연부터 빠지게 되었고, 엘튼 존이 혼자서 공연을 진행했다.[131] 6월 6일 웸블리 스타디움부터 6월 30일까지 스위스 취리히까지 엘튼 존 혼자서 이 투어를 진행했고, 빌리 조엘은 2001년 투어부터 다시 정상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다.

Face To Face 투어 말고, 다른 공연에서도 함께한 적도 있는데, 빌리 조엘은 엘튼 존의 2000년 10월 20~21일 One Night Only 공연에 참여해서 Goodbye Yellow Brick Road를 불렀고, 2001년 10월 20일 뉴욕 위문 공연에서 빌리 조엘과 같이 Your Song을 불렀다. 2003년 2월 6일 카네기 홀 자선 공연에선 다른 뮤지션들과 함께 무대에 서서 노래를 불렀고, 마이클 J. 폭스가 기타를 연주하면서 Johnny B. Goode을 부르는 사이에 엘튼 존과 빌리 조엘은 키보드를 연주했다. 2004년 케네디 센터 공로상에 헌액된 엘튼 존을 축하하는 공연에선 Bennie And The JetsThe Bitch Is Back을 메들리로 불렀다.

2010년 이후로 사이가 약간 갈라졌었다. 빌리 조엘의 알코올 중독으로 인해서 2009~2010년 투어의 몇 공연이 취소되거나 연기된 적이 있었고,[132] 빌리 조엘에게 향한 엘튼 존의 지나친 충고와 잔소리들로 인한 가벼운 감정적인 싸움으로 번지게 되어 2013년에 화해할 때까지 2년 간 대화를 하지 않았고, 다신 합동 투어를 진행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이후 빌리 조엘은 본인의 공연에서 2014년부터 "Your Song"을 부르기 시작하면서 1절의 'I don't have much money' 구절 다음으로 Bullshit이라고 하면서 곡을 끝낸다. 그러고 우린 그저 친구에요!! 라면서 웃고 넘어간다. 이런 식으로 2년 간 계속해서 부른다. 가벼운 장난도 정규 레파토리로 집어 넣은 듯.

2012년에 서로 화해를 한 모양이고, 2013년 엘튼 존 에이즈 재단에 빌리 조엘이 참석해 같이 사진을 촬영하기도 했다. 그리고 빌리 조엘은 2015년 7월 1일 본인의 65번째 매디슨 스퀘어 가든 공연을 기념하여 [Goodbye Yellow Brick Road]를 원키로 부르기도 했다.[133]

무대에서의 만남은 잦았지만, 정작 녹음 스튜디오에서 정식으로 녹음된 곡은 하나도 없는 걸로 보인다. 거기다 빌리 조엘은 1993년 12집 <River Of Dreams>로 음반 작업에서 은퇴를 했기 때문에 앞으로도 엘튼 존과 스튜디오에서 작업할 가능성은 없다. 사실 1994~95년에 고전 블루스 넘버 "Red, White And Blues"을 듀엣으로 부르기도 했지만, 해당 곡은 공개되지도 않은 미발매곡. 빌리 조엘은 엘튼 존의 2006년작 "Wouldn't Have You Any Other Way (NYC)"에 피쳐링해서 보컬을 맡을 예정이었다가 무산되었다는 말도 있다.

7.6.8 로드 스튜어트

로드 스튜어트는 사실상 엘튼 존과 가장 가까운 뮤지션이라고 할 수 있다. 1970년대 전성기 시절때 라이벌로 꼽히던 뮤지션이었고, 라이벌 기믹으로 오랜 세월동안 서로 티격태격하면서 친하게 지내온 사이다.

1974년

팝음악의 저변이 얕은 한국에서는 엘튼 존의 라이벌을 빌리 조엘로 이야기해 왔지만, 199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엘튼 존은 빌리 조엘과 접점이 거의 없었던 편이고, 빌리 조엘보다 로드 스튜어트 쪽과 더 친하다. 방송에서도 둘이 티격태격 하는 게 영국의 송대관 VS 태진아 느낌이다. 로드 스튜어트와 1960년대 말부터 알던 사이였다. 엘튼 존이 "블루솔로지"의 멤버로 활동했을때 친했던 영국의 블루스 뮤지션이자 믹 재거, 에릭 클랩튼 등의 여러 스타들을 발굴할 정도의 영향력을 끼치던 "롱 존 볼드리"가 어느날 기차에서 로드 스튜어트를 만나게 되어 그를 키우기 시작했고, 블루솔로지가 공연한 곳에서 로드 스튜어트가 롱 존 볼드리와 같이 공연을 했다. 이 시점에서 블루솔로지의 멤버로 있었던 엘튼 존과 자연스레 친해지게 되었다.

거기다 로드 스튜어트는 가수로 진입하기 이전에 축구선수로 잠시 활동한 적 있었기 때문에 축구로도 자선 사업 등의 이런저런 협업을 보여주기도 했다.[134] 로드 스튜어트는 본인의 1집 Gasoline Alley에서 엘튼 존의 Country Comfort를 커버했고,[135] 엘튼 존은 1972년에 6집 Don't Shoot Me I'm Only The Piano Player를 작업하면서 수록되지 않은 Let Me Be Your Car를 1974년에 로드 스튜어트에게 주었고, 로드 스튜어트는 이 곡을 녹음해 6집 Smiler에 수록했다.

1974년 5월 5일 엘튼 존이 왓포드에서 자선 공연을 열었을때 로드 스튜어트가 공연에 참석해 Country Comfort를 불렀고, 1982년 5월 프랑스 파리에서 진행한 Jump Up! 투어에서 로드 스튜어트가 잠시 동행했고, 1986년 6월 20일 런던에서 열린 록 갈라 공연에서 로드 스튜어트가 "Sailing"을 부를때 엘튼 존이 피아노를 연주, [2013년 브릿 어워드]에서 "Sad Songs"을 같이 부르는 등 라이브에서도 함께한 모습을 보였다.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평범한 친구 관계로 보였지만, 서로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경쟁심 또한 높아져 라이벌이라고 의식하게 되었고, 결정적인 계기가 바로 1975년 록 오페라 영화 Tommy의 "Pinball Wizard" 역할로 인한 것이다. 토미의 감독 '켄 러셀'은 애초에 엘튼 존을 주인공의 삼촌인 어니 역할을 맡으면 어떠냐고 제안했고, 핀볼 챔피언 역할은 원래 로드 스튜어트한테 줄 예정이었다. 하지만 엘튼 존은 오히려 핀볼 챔피언 역을 크게 원했기 때문에 로드 스튜어트가 핀볼 역을 맡지 않게 하려고 꼼수를 가장한조언을 했다. 결국 로드 스튜어트는 그 역을 맡지 않는다고 제안을 거절하게 되면서 엘튼 존이 핀볼 챔피언 역할을 맡게 되었다. 이로 인해서 로드 스튜어트는 영화에서 멋지게 나온 엘튼 존을 보고 본인이 속았다는걸 알고나서 개자식이라며 분노했다. 안습[136][137]

2005년

이 일 이후로 로드 스튜어트는 엘튼 존에게 배신감을 느껴 실망감을 가지긴 했지만, 이를 바탕으로 오히려 라이벌 기믹으로 서로 티격태격하는 경향이 크기 시작했다. 주로 토크쇼나 인터뷰에서 장난스럽게 서로를 디스하는 식의 내용으로 재미를 끌거나 노래를 거절한 일도 있었다.[138] 1984년 2월, 엘튼 존이 사운드 엔지니어 레나테 블라우엘과 결혼했을 때 로드 스튜어트는 축하 전보를 보냈는데 그 내용은 "너는 여전히 서 있는지[139] 모르겠지만 우리 모두 다 바닥이야!"이다.

로드 스튜어트는 1983년 10월에 일주일 간 남아프리카 요하네스버그의 선 시티에서 진행된 엘튼 존의 순회 공연에서 동행했고, 1991년 Two Rooms에서 Your Song을 커버하기도 했다. 로드 스튜어트 버전은 1992년에 싱글로 발매되었고, 싱글 차트 50위 안에 진입했다.[140] 2005년 10월에 발매된 로드 스튜어트의 스탠더드 앨범 <Thanks for the Memory: The Great American Songbook, Volume IV>의 5번 트랙이자 1920년대 재즈 넘버인 [Makin' Whoopee]를 엘튼 존과 같이 불렀다.

1991년 4월 1일 웸블리 아레나에서 열린 로드 스튜어트 공연에서 엘튼 존이 여장해서 출연했고, 로드 스튜어트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141] 당시 공연에선 로드 스튜어트와 "You're In My Heart"를 듀엣으로 불렀다. 부틀렉이나 영상은 존재하지 않은 걸로 보이고, 사진만 남아있다. [링크]

7.6.9 에미넴

2001년 2월 10일 제43회 그래미에서

특이하게도 에미넴과도 친분이 있다. [전설적인 그래미에서의 Stan 협연]은 아직도 회자되는 두 가수의 명장면이다. 이는 시사하는 바가 큰데, 당시 에미넴의 랩에는 호모포비아적 요소가 가득했기 때문.[142] 그러나 엘튼 존은 그의 그런 가사는 그의 또 다른 자아의 표출일 뿐이라며 함께 공연을 하였다. 결과물은 대성공. 서로를 제대로 알아 본 둘은 친한 친구가 되었다. 2005년 에미넴은 엘튼 존의 시민결합 기념 선물로 특별한 것을 주었는데, 바로 벨벳 쿠션에 싸인 다이아몬드 검열삭제. 당신의 성생활에 박차를 엘튼 존은 배우자 데이비드와 함께 깔깔 웃었다고 한다.

그 후 2009년 에미넴이 마약 중독 치료를 마치고 밝힌 바로는 엘튼 존이 하루가 멀다하고 전화를 하여 본인의 상태에 대해 물어봤다고 한다. 2010년 <Recovery> 앨범으로 에미넴이 화려하게 컴백하자, 엘튼 존은 롤링 스톤지와의 인터뷰에서 에미넴을 사랑한다며, 자주 보진 못하지만 대화는 자주 나누고, 잡지에서 본 술을 끊은 뒤 에미넴의 모습이 17살 소년같아 졌다며 뿌듯해하기도, 칭찬하기도 했다. 보기와 다르게 각별한 사이. 서로의 애칭은 Cunt.

7.6.10 레이디 가가

2011년 2월 13일 제53회 그래미에서

후배 가수들 중에서 가장 친한 사이를 유지하고 있는 가수 중 한명이 바로 레이디 가가이다. 불우했던 어린 시절, 파격적인 의상과 무대 등으로 공통점을 가지고 있어 서로 통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무려 39살의 나이 차임에도 세대를 초월한 사이. 2010년에 만나기 시작해 친분을 가지기 시작했고, 엘튼 존은 2010년에 일어난 최고의 일들 중 하나가 레이디 가가를 만난 것이라고 했다.

위 사진에서 보이듯이 54회 그래미 어워드에서 [Poker Face/Speechless/Your Song] 메들리를 불러 파격적인 무대를 보였고, 2011년 Gnomeo & Juliet 사운드트랙에 참여해 듀엣으로 "Hello Hello"를 불렀고, 2013년 더 머펫 쇼에 출연해 [Artpop, Bennie And The Jets]를 불렀고, 2016년 2월 로스앤젤레스 공연에서 [Don't Let The Sun Go Down On Me]를 듀엣으로 부르는 등 협업을 자주 보였다.

상당히 돈독한 사이라서 무슨 일이 있어도 항상 레이디 가가 편을 들기도 한다. 예를 들면 마돈나가 레이디 가가의 "Born This Way"가 본인의 노래 "Express Youself"를 표절했다고 주장했을 때 엘튼 존은 마돈나를 비판하면서 레이디 가가 편을 들었다.[143] 레이디 가가는 엘튼 존의 아들 재커리와 일라이저의 대모(godmother)가 되었고, 엘튼 존의 배우자 데이비드 퍼니시하고도 좋은 사이를 유지하고 있다.

7.7 기타

  • 과거의 아놀드 슈워제네거처럼 앞니가 크게 벌어져 있다.[144] 엘튼 존을 캐리커쳐로 그릴때 벌어진 앞니를 유난히 돋보이게 그리는 경우가 대부분. 벌어진 앞니는 교정도 하지 않았고, 현재도 똑같이 유지하고 있다.


  • 젊은층에겐 라이언 킹, 빌리 엘리어트의 음악을 작곡한 사람이나 젊은 뮤지션들과 콜라보를 자주 맺은 뮤지션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크고, 노년층에겐 록커, (한국 한정으로)발라드 가수로 인식되어 있다. 그래서 중~노년의 엘튼 존을 보다가 1970~80년대 젊은 시절의 엘튼 존을 보고 충공깽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 서양인치곤 그리 크지 않은 신장, 동글동글한 얼굴 형태로 빼어난 미남은 아니지만, 준수한 편이고, 귀엽다는 소리도 꽤 듣는다. 국내에선 닮은꼴 연예인으로 김용만을 언급하기도 한다. 사실 김용만은 이목구비나 얼굴 형태, 헤어스타일이 엘튼 존과 꽤 닮았다.


  • 1975년 9월, 영국 윈저와 잉글필드 그린 사이에 있는 우드사이드 저택을 구입했다. 18세기에 지어진 이 저택은 엘튼 존이 구매하고 나서 정성스럽게 재단장했고, 온갖 사치스럽고 화려한 물건들로 꾸며진 초호화 대저택이다. 1975년 구매 이후 40년동안 이 저택에서 거주하고 있다.[145] 애틀란타로스앤젤레스에서도 고급 아파트를 구입했고, 프랑스 니스에선 저택을 구입해 소유 중이다. 2009년에 캐나다 온타리오 주 칼레돈에서 저택을 구입했다는 루머가 떠돌았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라고 해명했다.


  • 10대 시절부터 구입한 음반들을 가수별, 년도별 등으로 아주 꼼꼼히 정리했고, 각 음반들의 수록곡과 세션연주자들, 출판회사, 표지 색깔 등을 일일이 알고있을 정도로 매우 해박했다고 한다. 주변인들에게 음악을 제대로 안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고.




  • 라이브 영상을 잘 보면 노래를 부를때 왼쪽 눈썹이 자주 올라간다. 1970년대부터 무려 40년 넘게 쭉 이어온 것. 본인도 1990년대 중반 인터뷰에서 본인의 움직이는 왼쪽 눈썹이 마치 지렁이같다고 했다.


  • 이 사진처럼 무대에서 피아노를 과격하게 연주하다가 의자를 걷어차고 폴짝 뛰는 경우가 매우 잦았다.[147] 하지만 중년부턴 나이와 체력으로 인해 당연히 젊었을때 만큼 혈기왕성한 모습을 보이진 않지만, 2010년대에도 가끔씩 피아노에서 뛰기도 한다.[148]


I Believe I Can Fly


  • 1965~1968년 블루솔로지 활동을 제외하면 본인 솔로로 라이브를 처음으로 진행한 건 1968년 10월이다. 물론 당시엔 무명에다 전국적으로 투어를 진행할 형편이 되지 못했었기 때문에 1969년까지 스튜디오에서 몇 곡정도 부르는 정도였고, 1970년 5월부터 본격적으로 투어 활동을 돌기 시작했다. 1968년부터 스튜디오 공연부터 현재까지 진행된 공연들을 전부 합치면 무려 4,000번정도 된다. 그것도 솔로 뮤지션으로서 아주 많은 수준. 2011년 10월 8일 라스베가스에서 진행된 공연이 본인의 3,000번 공연으로 기록되기도 했다.[149]


  • 엘튼 존은 라이브 역량이 아주 뛰어난 축에 속한다. 오랜 시간동안 꾸준히 변화한 피아노 연주, 보컬, 밴드의 역량 등으로 일부는 오히려 스튜디오 버전의 원곡보다 라이브 버전이 더 좋다고 평가한다.


  • 공연에선 가끔씩 곡의 인트로만 연주하고 부르다 마는 식으로 관객들에게 장난치기도 했다. 2004년 라스베가스에서 진행한 "Red Piano" 투어에선 Goodbye Yellow Brick Road의 인트로를 원키(!)로 연주하다가 보컬이 나올때 쯤 바로 연주를 멈추었다.


  • 아이패드인스타그램을 사용하면서 꽤 자주 활동하고, 본인의 가족이나 사회적인 메세지, 추모 메세지, 앨범 홍보 등을 올린다.



  • 본인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친 뮤지션 중 한 명으로 브라이언 윌슨을 꼽았다.


  • 노년이 돼서도 젊은 뮤지션들과의 협업이 잦고, 2000~2010년대 젊은 뮤지션들의 음악도 자주 챙겨듣거나 칭찬도 아끼지 않는 편이다. 특히 투첼로스에 대해 "지미 헨드릭스 이후 최고의 라이브"로 크게 극찬을 아끼지 않은 바 있다. 엘튼 존은 투첼로스의 2010년 2집 In2ition의 1번 트랙 [Oh Well]에 피쳐링해 보컬을 맡았고, 투첼로스는 엘튼 존의 2013년 31집 The Diving Board에 참여해 첼로를 연주했다.[150]


  • 두 번이나 표절 시비에 휘말리기도 했었다. 1992년에 "Sacrifice"가 자기들의 곡을 표절한 것이라고 [팬들로부터 고소당했고], 2012년에는 "Nikita"가 남아프리카의 한 남성이 쓴 곡이었다고 [고소당했지만], 물론 모두 증거가 불충분하여 기각되었다.[151]



  • 재활 치료 이후에 본인이 멈출수 없는 중독은 음악쇼핑이라고 했다. 1970년대 초부터 백화점에 가서 항상 수십개의 물건들을 사는 것이 일상이었고, 여기에 쏟아부은 돈이 어마어마했다. 2010년대부턴 사치 관련으로 거론되는 경우가 드물어진 걸 보면 많이 자제하는 듯.


  • 대부분의 성공을 거둔 국가는 본고장인 미국과 영국이고, 영미에서의 성공이 크게 각인되어 있지만, 캐나다에서도 영미 못지 않게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어떻게 보면 미국과 같이 가장 커다란 성공을 거둔 국가로 볼 수 있다. 2013년 기준으로 캐나다에선 무려 580만장 정도의 앨범 판매고를 거두었고, 1970년 Your Song으로 시작해 발매된 싱글 대부분이 싱글 차트[152] 10위 안에 진입했다. 여기서 1위로 기록된 곡이 무려 19곡.


  • 전세계 음반 판매량 중에서 3%가 엘튼 존의 몫이라고 한다.


  • 닉네임은 여러 개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건 Rocket Man이다. 그 다음으로 꼽히는 대표 닉네임은 Captain Fantastic이고, 이 두개가 가장 많이 쓰인다. 다른 닉네임은 Lord Choc Ice[153]와 Ann Orson(앤 올슨)[154], "Raggae" Dwight[155] 등이 있다. 팬들에게 가끔씩 불리는 별명 EJ도 있다.


  • 신시사이저하프시코드같은 건반 악기들은 스튜디오에서 앨범을 작업할때 사용된 경우를 제외하면. 무대에선 피아노 말고 다른 악기를 연주한 경우는 거의 없다. 하지만 뮤지션으로서 악기의 기본 요소를 안다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에 기타도 당연히 연주할 수 있다. 단지 기타를 연주하는 모습을 거의 보여주지 않아서 그렇지, 무대에서 기타를 연주하면서 노래를 부른 적 있다! 1986년 8~10월 미국에서 진행된 Ice On Fire 투어에서 Love Song을 어쿠스틱 기타로 연주하면서 불렀다. 비록 영상은 없지만, 사진이 여러장 남아 있다. [1986년 10월 10일 헐리우드 보울 Love Song 라이브], [사진]


  • 애견 애호가이다. 1970년대부터 길러온 개들이 21마리나 된다. 길러온 개들 중에서 보더테리어, 아이리시 울프하운드, 래브라도 리트리버, 저먼 셰퍼드, 코카 스파니엘, 아프간 하운드 등이 있고, 본인은 특히 스파니엘을 선호한다고 한다. 2005년에 코카 스파니엘을 두마리를 분양받았고, 각각 이름을 [아서]와 [마를린]으로 지었다. 아서는 털색이 검은색과 흰색 투톤이고, 마를린은 고동색이다. 엘튼 존은 이 두 녀석을 데리고 외출하는 경우가 잦았고, 공식 석상이나 무대에서도 데려가는 경우도 많았다. 아서는 엘튼 존이 무대에서 공연을 하고 있을때 백스테이지에서 가만히 쭉 앉아있으며 엘튼 존을 기다렸다고 한다.

재밌게도 아서는 엘튼 존 세션에 참여한 적도 있었는데, 엘튼 존이 2006년 봄, 29집 The Captain & The Kid를 작업하고 있을때 엘튼 존이 아서를 데리고 온 날에 2번 트랙 "Just Like Noah's Ark"을 녹음하던 중, 갑자기 아서가 아웃트로 부분에서 컹컹 짖고나서 다른 곳으로 도망갔다. 이는 밴드의 퍼쿠션 존 메이혼이 연주하고 있던 악기 카우벨 소리에 무서워한 것. 재밌는 것은 아서가 드럼 비트와 딱 맞게 짖었기 때문에 엘튼 존은 재밌다고 생각해 이 녀석이 짖은 소리를 곡에 갖다 넣었다고 한다.[156] 코카 스파니엘의 수명을 생각하면 현재 이 녀석들은 10살을 넘긴 노견이거나 병으로 죽었을 가능성이 크다.



  • 1970년 3월 킹 크림슨 멤버들은 당시 무명이던 엘튼 존을 보컬로 영입하려고 했지만, 엘튼 존은 이를 거절했다.


  • 1975년 셰어 쇼에서 50년 뒤인 2025년의 모습을 담은 [유쾌한 콩트]를 촬영했고, 셰어, 베티 미들러와 함께 출연했다. 화려한 휠체어에 앉아서 리모컨 어디 있냐고 소리치는 78세로 연기하는 엘튼 존이 압권.[#] 현재의 모습과 비교하면 꽤 재밌는데, 영상에서 노년 엘튼 존은 젊을 때나 마찬가지로 이마가 휑하고 백발이고, 휠체어에 앉아서 하이톤으로 고래고래 소리지르지만, 현재의 엘튼 존은 머리숱이 풍성하고, 목소리와 체격도 두꺼워졌다.


  • 1975년 10월 25~26일 다저 스타디움에서 공연을 진행했을때 비틀즈 이후로 10년 만에 공연을 진행한 뮤지션이 되기도 했다.


  • 1976년 3월 7일 런던에 위치한 마담투소 박물관(Madame Tussaud)에 엘튼 존 밀랍 인형이 전시되었는데, 비틀즈 이후로 첫번째로 밀랍 인형으로 만들어진 뮤지션이었다.


  • 1985년 1월에 작곡된 발라드 "Shoot Down The Moon"은 뷰투어킬의 Ost로 사용할려고 했지만, 거절되면서 그해 11월에 발매된 19집 Ice On Fire에 수록되었다.[158] 뷰투어킬의 Ost는 듀란 듀란이 불러 빌보드 1위로 기록해 큰 히트를 쳤다.


  • 1982년 7월 9일 Jump Up! 투어 중, 미네소타 주 세인트폴의 시빅 센터에서 진행된 공연이 세계에서 가장 많은 관객이 참석한 피아노 공연이라고 한다. 관객 수가 총 760,000명이었다고.


  • 1986년 9월 15일 하워드 스턴 쇼에 출연해서 하워드 스턴이 쓴 가사로 즉석으로 작곡해서 불렀고, 하워드 스턴이 왜 티비에 나오지 않냐는 식의 장난스러운 가사를 가진 곡이다. 제목은 [Why Isn't Howard Stern On TV?]. 4분 33초부터 곡이 절정으로 흐르는데, 워낙 긁어서 부르다보니 보컬이 완전히 걸레짝이 되었다. 당시 성대결절을 겪고 있던 보컬 상태를 확연히 알 수 있는 부분.


  • 1990년 로완 앳킨슨의 인터뷰에 참여하기도 했다. 로완 앳킨슨은 단지 이름에 대한 질문[159]이나 음악적 요소와 관련 없는 이상한 질문만 해 엘튼 존의 심기를 건드려 깐족거렸고, 막판에 결국 열받아서 로완 앳킨슨에게 총을 쏴버렸다. 그러고 나서 좆대가리라고 하면서 자리를 떠났다. 참고로 로완 앳킨슨은 라이온 킹자주 역을 맡았고, I Just Can't Wait To Be King에서 본인 파트를 부르기도 했다.



  • 1995년 1월부터 1995년 12월까지 데이비드 퍼니시가 엘튼 존의 일상을 담은 다큐멘터리 'Tantrums & Tiara'를 제작했다. 19977년 방영. 25집 Made In England 뮤직비디오의 제작 배경이나 다른 뮤지션과의 협업, 무대 리허설, 에이즈 제단, 오스카상 수여 등의 다양한 장면들로 수록해 팬들에게 상당한 반응을 끌었다. 하지만 엘튼 존을 지극히 사치스럽고 별 것도 아닌 것에 돈을 흥청망청 쓰는 사람이라고 각인시키는데 한 몫했다는 부정적인 평도 존재한다.


  • 1997년 9월 19일 뉴올리언스 주에서 열린 VH1 Storytellers에 의하면, 본인의 가장 창피했던 기억이 1979년 11월 호주에서 레이 쿠퍼와 투어를 진행하러 갔을때 기억이라고 하던데, 당시 라디오에서 인터뷰를 진행하고 나서 엘튼 존이 데킬라를 마셔 심하게 취했기 때문에 인터뷰를 진행했던 스튜디오에서 거의 30분 동안 Rocket Man을 계속 연주하고 있었다고 한다. 스튜디오의 사람들이 점심을 먹으러 나갔다 다시 스튜디오에 들어왔는데, 엘튼 존은 똑같이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고.


  • 1998년 The Big Picture 투어 중, 짐 캐리가 무대에 출연해 엘튼 존과 Rocket Man을 유쾌하게 부른 적 있다. [사진] 그러고 짐 캐리는 피아노 건반을 머리로 여러차례 두들겼다고.


  • 2000년 12월 22일 영국 BBC의 프로그램 'TFI Friday'에 출연해 '록 스타가 되는 법'을 친절하게 설명했다. 온갖 물건을 망치로 부셔버리고 던져버려 방을 개판으로 만들어버린다.


  • 2005년에 한국의 사진가 배병우의 소나무 사진을 3,000여만원에 구입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 2009년 릴리 앨런의 싱글 "Who'd Have Known"의 [뮤직비디오]에서 릴리 앨런이 엘튼 존에게 완전히 매료해 결국 리무진 운전사로 변장해 그를 납치해 집에 감금시키는 사생팬의 모습을 보여준다. 영상에서 엘튼 존에게 온갖 애정을 쏟아붓지만, 엘튼 존은 시종일관 화난 얼굴로 불편해한다.[161] 이후 엘튼 존은 릴리 앨런이 잠든 사이에 도망친다. 재밌는 점은 이 곡이 발매되기 1년 전인 2008년 9월, 릴리 앨런이 취중 GQ 어워드의 '올해의 남자' 부문 시상 무대에 올라 공동 시상자였던 [엘튼 존에게 막말을 하여] 비난을 받았던 일이 있었다. 그러므로 이 뮤직비디오는 당시 사건에 대한 메세지를 담았다는 말이 있다.


  • 2011년 4월 12일 덴버 주에서 진행된 공연에서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살해당한 와이오밍 대학교의 학생 매슈 셰퍼드를 추모하는 의미로 4분 정도의 연설을 했고, 그를 위한 노래 American Triangle을 불렀다. 이 공연 이후로 엘튼 존은 '매슈 셰퍼드 재단'에서 500,000 달러(한화로 5억 8천만원 정도)를 기부했다.


  • 2012년에 펩시 광고를 찍었다. 여기서 [상당히 사악한 팝의 황제]로 출연했고, 본인에게 훌륭한 퍼포먼스를 보여준 자에게 펩시를 주는 걸로 보인다. 본인에게 만족시키지 못한 이들은 전부 구멍으로 떨어져 지하감옥 행. 그러던 중 멜라니 아마로[162]가 나타나 시원한 가창력을 보이며 지하 감옥에 떨어진 이들과 엘튼 존을 포함한 모든 관중들이 들썩이며 환호를 한다. 엘튼 존은 멜라니 아마로에게 펩시를 주지만, 멜라니 아마로는 펩시는 '모두를 위한 것'이라고 하여 엘튼 존을 지하감옥에 떨어뜨렸다.


  • 독설도 꽤 자주 날리고, 욕설도 서슴지 않고 사용한다. 대부분은 공연에서 음향 문제로 인해서 화내거나[163] 본인이 그렇게 혐오하는 파파라치에게 폭언을 쏟아붓는 경우. 기분에 따라 상당히 변덕적으로 변하던 경우도 잦았는데, 2006년 5월 28일 아일랜드 더블린 공연에선 "Goodbye Yellow Brick Road와 이 곡이 수록된 앨범이 정말 싫고, 다신 부르고 싶지 않다"고 하거나 곧 이어서 "무대를 은퇴하고 유럽 공연을 다시는 하지 않겠다"고 했다. 2001년 11월 영국 맨체스터 공연에선 "음악업계를 매우 혐오스럽다"고 하더니 이어서 "이제 그만둘때도 되었으니 Songs From The West Coast가 본인의 마지막 음반"이라고 하기도 했다. 하지만 2010년대 들어서 이런 발언은 하지도 않았다. 그가 심한 변덕쟁이였다고 생각한다면 다행인 점.


  • 2000년대 초반, 공연에서 립싱크하는 가수들은 총살시켜야 한다고 하면서 립싱크 가수로 마돈나를 지적하기도 했었다. 이 때문에 다음 날 마돈나는 엘튼 존에게 노망난 개구리 영감이라고 받아쳤고, 한동안 불화가 있었다.[164] 2004년 어워드에 공개적으로 마돈나를 비난하는 등, 몇년 동안 개인적인 싸움으로 불화를 가졌지만,[165] 2013년에 화해를 하게 되어 불화는 종식되었다고 선언했고, 셀카를 찍는 등 훈훈하게 끝냈다. 2016년 2월 24일 자넷 잭슨의 공연을 립싱크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 공연에서 흥을 맞춰 노는 관객들을 제지하는 경호원들에게 소리친 경우가 잦다. 2005년 6월 18일 왓포드 공연에선 [사진을 찍는 관객들을 제지하지 말라고] 경호원들에게 말했고, 이런 식으로 경호원의 과잉경호에 크게 반대해 관객들의 호응을 받는 경우가 흔해졌다. 하지만 가끔씩은 본인도 조금 지나쳤다고 생각했는지, 2015년 6월 7일 영국 글로스터 공연에선 경호원 중 한명을 무대로 불러와서 사과하기도 했지만, 2016년 6월 11일 레스터셔 공연에선 [변함없게 되었다.]


  • 2012년 8월 13일 프랑스 남부의 생트로페에서 마이클 케인의 요트에서 무슨 생각으로 했는지 모르겠지만, 바지를 내려(!!) 본인의 뒤를 보여주었다.원치 않은 팬서비스 배우자 데이비드와 더불어서 주변 사람들이 깔깔 웃었고, 거기다 파파라치에게 촬영 당하는 굴욕도 받았다. [166]


  • 영국 시각으로 2016년 2월 4일 오전, 런던 세인트 판크라스 역에서 깜짝 공연을 가졌다. 미리 가져다 놓은 검은색 업라이트 야마하 피아노를 잠시 연주했고, 노래는 부르지 않았다. 옛날 히트곡들과 새로 발매된 곡들[167]을 짤막하게 연주했고, 연주하고 나서 흰색 마커로 사인을 하고 나서 기증했다고 한다. 당일에 발매된 신작이자 32집 Wonderful Crazy Night 홍보 관련으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이후 옥스포드 주의 한 음반 판매장에서 Wonderful Crazy Night 사인회를 열었고, 1943년 2월 런던에서 열었던 Don't Shoot Me I'm Only The Piano Player 사인회 이후 무려 43년 만에 영국에서 연 사인회이다.



  • 힐러리 클린턴을 지지한다. 2016년 3월 2일 뉴욕 공연에선 Tiny Dancer를 불러 그녀를 헌정했다. 곡을 부르고나서 관중에게 대놓고 힐러리에게 투표하라는 말도 했다.



  • 2016년 3월 29일 [성추행 혐의로 피소되었다.] 엘튼 존의 전 경호원이자 로스앤젤레스의 경찰관 '제프리 베닝어'[168]는 2002년 고용된 후 2014년까지 12년 간 엘튼 존의 경호원으로 일했었고, 엘튼 존이 그동안 성추행을 일삼았다고 주장했다. 엘튼 존 측은 근거 없는 헛소리라고 일축해 명예훼손 죄로 해당 경호원을 고소했다. 하지만 별다른 소식도 없는데다 그 이상으로 화제가 되지 않는 걸 보면 언급할 가치도 없는 허위주장이라 해도 무방하다.


  • 엘튼 존은 70세 생일 공연에 대한 커다란 프로젝트 70-70-70을 선언했다. 2017년 1월 14일부터 시작해서 생일 날인 3월 25일까지 70일 동안 하루종일 공연을 열면서 본인의 1970년대 곡들을 부른다고 한다. 한번도 부르지 않은 희귀곡도 선보일 수 있어서 팬들에겐 그야말로 엄청난 소식이다. 하지만 이 소식이 나온 날이 그 날이라 대부분 속았다.


  • 60초 인터뷰.


  • 킹스맨 2에 [출연한다고 한다.] 결국 단역으로 출연한다고 발표되었다.[169] 본인은 1975년작 토미 이후 상당히 오랜만에 출연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사실 2002년작 컨트리 베어스에서 단역으로 출연하고 나서 15년 만에 영화에 출연하는 것이다.



  • 인스타그램에서 벽에 그려진 Build Bridges Not Walls의 글씨를 올리면서 브렉시트에 반대하는 입장을 밝혔다.


  • 2016년 7월 29일 사르데냐의 포르토 체르보 해변에서 가족과 함께 [휴가]를 즐기는 모습이 공개되었다. 이 날 엘튼 존은 [연두색 정장]을 착용했다.

7.7.1 매체에서

1977년 10월 25~27일에 방영된 더 머펫 쇼 시즌2 14화에 게스트로 등장했고, 히트곡들을 불렀다. 참고로 일렉트릭 메이헴의 리더 닥터 티스는 엘튼 존과 미국의 피아노 연주자 리버라치의 영향을 상당히 받았고, 닥터 티스의 이름을 'Leon "Doctor" Eltonjohn Dontshoot (The Piano Player)​로 정할 예정이었다. 여기서 Don't Shoot은 엘튼 존의 6집 1973년 Don't Shoot Me I'm Only The Piano Player에서 따온 걸로 보인다.

[Corcodile Rock], 아주 화려한 모헤어 복장에 늪지에서 일렉트릭 메이헴과 같이 불렀다. 곡의 랄라라 코러스 부분은 늪지대에 있는 악어들과 같이 합창했는데, 마지막에 엘튼 존이 늪에 빠져서 악어밥이 되었다. 마지막 두 머펫 영감 왈 See you later alligator!! 머펫 캐릭터들과 같이 [Bennie And The Jets]를 짧게 불렀고, 일렉트릭 메이헴과 [Goodbye Yellow Brick Road], 미스 피기와 [Don't Go Breaking My Heart]를 불러 총 3곡을 불렀다.

[해당 에피소드의 엔딩 부분]. 머펫들은 다 화려하게 입었는데, 엘튼 존만 얌전하게 차려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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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스파크에도 몇번 출연 한적도 있다. 1997년 9월 10일에 방영된 시즌1 5화 An Elephant Makes Love to a Pig에서 제롬 맥엘로이와 'Love Gravy'를 부른걸로 처음 출연했다. 1절에 몇 부분만 잠시 부르고 바로 퇴장. 이 에피소드에선 엘튼 존 본인이 아니라 트레이 파커가 불렀다.모창 실력이 상당하다.

1998년 10월 7일에 방영된 시즌2 14화 Chef Aid에 두번째로 출연했고, 이 에피소드에선 엘튼 존 본인이 성우를 맡았고, 노래도 썼다![170] 해당 에피소드에서 엘튼 존은 쉐프를 은인이라고 여겼다. 1960년대 후반, 술집에서 시덥지 않는 노래나 부르는 무명 가수에서 쉐프가 엘튼 존을 도와주어 본인을 바꿔주는데 커다란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171] 참고로 여기서 엘튼 존이 부른 곡은 "Cheddar Cheese Girl"이라고 밋밋한 가사의 유쾌한 곡이다. 엘튼 존이 실제로 1960년대에 버니 토핀을 만나기 전까진 진부하고 밋밋한 가사를 썼기 때문에 유머 포인트로 볼 수 있다.쉐프가 엘튼 존에게 원숭이도 당신보다 가사를 잘 쓰겠다고 디스한 건 덤.

엘튼 존은 다른 뮤지션들과 같이 곤란에 빠진 쉐프를 도와주기 위해 자선 공연을 열어서 곡들을 연주했다. 엘튼 존은 스탠 마쉬의 부탁으로 웬디 테스터버거에 대한 내용의 "Wake Up Wendy"를 작곡했고, 공연에서 부를려고 하던 찰나에 소속사 사장이 공연의 다리를 잘라서 공연을 망쳐버려 못 불렀다. 참고로 "Wake Up Wendy"는 1998년 12월 8일에 발매된 <Chef Aid: The South Park Album> 사운드트랙에 수록되었다.

사우스파크 특정상 출연한 유명인들이 거의 대부분 심하게 까이지만, 엘튼 존은 드물게도 까이거나 약간의 험한 꼴도 받지 않은 유명인이기도 하다. 그 이유는 트레이 파커는 엘튼 존의 커다란 팬에다 존경한다고. 어린 시절부터 엘튼 존과 빌리 조엘의 곡들을 피아노로 자주 연주하면서 자랐다고 밝혔다.

이후로 두 번 정도 출연했다. 시즌10 1화 The Return of Chef에서 쉐프의 장례식에 참석해 카메오로 출연했고, 시즌15 11화 Broadway Bro Down에서 'Broadway Bros'의 멤버로 앤드류 로이드 웨버, 스티븐 손드하임, 스티븐 슈왈츠와 같이 뮤지컬 제작자로 출연했다. 해당 에피소드에선 현 시점의 모습을 묘사해 상당히 비슷하게 출연했지만, 이 에피소드의 주제는 뮤지컬의 잠재의식에 관해서 풍자하는 내용을 담았기 때문에 약간 까이는 면이 있지 않나 싶다.

시즌15 3화 Royal Pudding에서 캐나다 공주가 납치되자 캐나다 전역에서 슬픔에 잠기게 되었고, 러시가 추모 공연을 열어서 추모곡 "Flower Breaking Wind"를 불렀는데, 엘튼 존의 다이애나비 추모곡 Candle In The Wind 1997을 패러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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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슨가족에서도 카메오로 출연했고, 여기서도 본인이 성우로 참여했다. 하지만 대접이 조금 안습. 1999년 2월 14일에 방영된 시즌10 14화 'I'm with Cupid'에서 비행기 샹들리에가 문제가 생겨 스프링필드 공항에 잠시 내린걸로 등장했고, 아푸만줄라를 위해서 엘튼 존을 섭외한거라고 오해한 호머 심슨이 엘튼 존을 제지하고, 기내용 강아지 케이지에 가둬버린다.[172] 여기서 엘튼 존은 도움을 청했지만, 아무도 꺼내주지 않아 직접 케이지를 뜯고 나왔다.

그 다음에 활주로에서 아푸와 얘기하다가 비행기 프로펠러에 갈릴 뻔한 위기를 모면했고, 여기서 아푸가 Take Me To The Pilot, "Someone Saved My Life Tonight", The Bitch Is Back로 언어유희를 해 엘튼 존을 화나게 만들기도 했다. 그 후로 엘튼 존은 퀵키마트 옥상에서 아푸와 만줄라를 위해 Your Song을 피아노로 연주하면서 불렀고, 가사에 You를 Apu로 개사해서 바꾸기도 했다.[173]

그 후로 시즌18 16화, 호머 심슨이 파파라치가 되는 에피소드 'Homerazzi'에서 호머에 의해 폴 매카트니와 게리 콜먼, 야오밍과 같이 촬영되기도 했다. 엘튼 존은 세탁소에서 본인의 점퍼 슈트를 가지고 나가는 모습으로 카메오로 나왔다. 시즌22 14화 'Angry Dad: The Movie'에 레이디 가가와 카메오로 출연하기도 했다. 그리고 엘튼 존 본인이 출연한건 아니지만, 시즌2 12화 호머 심슨과 마지 심슨의 고교 시절에 대한 에피소드 'They Way We Was'에서 졸업 파티의 밴드의 이름이 Goodbye Yellow Brick Road이다. 당연히 부른 곡 중 하나가 Goodbye Yellow Brick Road.[174] 이 밴드는 시즌13 10화 'Half-Decent Proposal'에 다시 출연했고, 아티 지프가 연 제2 고교 졸업 파티에 참여했다.[175]

시즌13 5화에선 과거 회상 중, 레니에게 나중에 커서 Lenny And The Jets로 같이 활동하는게 아니냐고 물었다.

시즌19 8화, 사이드쇼 밥의 장례식에서 크러스티가 부른 추모곡은 Candle In The Wind 1997을 패러디한 것이다. 재밌게도 해당 에피소드의 제목이 Funeral For A Friend이다.

퓨처라마 시즌4 7화에서 파라오의 장례식에서 곡을 불렀고, Daniel, Bennie And The Jets, Crocodile Rock을 패러디했다. 하지만 엘튼 존을 파라오의 재물로 삼을려고 하인들은 "Crocodile Rock"을 부르는 중인 엘튼 존과 그의 피아노를 파라오의 무덤으로 떨어뜨렸고, 피아노에 깔려 즉사했다(...).

패밀리 가이 시즌3 5화에서 스튜이 그리핀Rocket Man을 낭송했는데, 이는 캐나다의 배우 "윌리엄 샤트너"가 1978년 공상과학영화 어워드에서 윌리엄 샤트너가 낭송한 버전을 패러디한 것이다. 시즌5 14화에서 피터 그리핀이 휠체어 신세를 지게 된 장면에서 "I Guess That's Why They Call It The Blues"가 잠시 나오기도 했다.

탑기어 시즌10 4화 보츠와나 특집에서 리처드 해먼드의 오펠 카데트(일명 올리버)를 수리하는 중에 제레미 클락슨제임스 메이는 해먼드가 싫어하는 곡들을 옆에서 틀어 해먼드를 놀렸고, 그 중에 나온 곡이 "Sorry Seems To Be The Hardest Word".[176] 여기서 클락슨과 메이가 같이 따라 부르는 장면이 압권. 이후 이 곡으로 다른 멤버 놀려먹기를 두번 정도 더 사용했는데, 시즌21 7화 버마 특집 2부에서 제임스 메이의 트럭이 고장나자 클락슨이 이 곡을 틀면서 가버렸고, 시즌22 파타고니아 특집에서도 해먼드의 머스탱이 눈에 처박히자 클락슨은 이 곡을 틀고 가버렸다.

7.8 사건사고

7.8.1 대만 공항 사건



2004년 9월 23일 대만의 공항에서 기자들에게 욕설을 퍼부은 일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대만 공연을 진행하기 위해 공항에 도착했지만, 공연 업체의 허술한 보안으로 인해서 기자들이 엘튼 존에게 달려들어 플래시를 터트리고 소리 치는 무질서한 상황으로 변했고, 경찰이 몰려드는 기자들로부터 자신을 적절히 보호할 준비를 하지 않았다고 판단한 엘튼 존은 직접 나서서 기자들에게 "무례하고 역겨운 돼지들(Rude, Vile Pigs!)"이라고 맞대응 했다. 기자 중 한 명이 나서서 "그럼 타이완을 떠나버리는 건 어때?" 그러자 엘튼 존은 "대만이 당신들처럼 돼지 같은 인간들로 가득하다면 당장이라도 떠나고 싶을 것이다"고 응수한 뒤 공연장으로 갔다. 이 장면은 TV 전파를 타고 대만 전역에 방송됐을 뿐 아니라 CNN을 통해 전세계로 전해졌다.

한국에선 이를 언급하며 "인종차별주의자", "대만을 비하했다" 등 왜곡된 주장이 돌아다녔고, 국내에선 이것 때문에 아직도 엘튼 존을 부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일이 적지 않다. 그러나 영상에서도 보이듯이 엘튼 존은 취재 라인을 무너뜨리고 달려들던 기자들에게 화를 냈을 뿐, 인종차별적으로 대응하거나 대만 자체를 비하한 것이 아니다. 인종차별하려면 돼지가 아니라 바나나 어쩌고 했겠지 무엇보다, 허술한 보안으로 인한 기자들과의 마찰은 대만 뿐 아니라 1992년 6월 16일 포르투갈, 1993년 6월 17일 이스라엘에서도 있었다.[177] 엘튼 존은 공항에서 다시 비행기를 타고 떠나지 않았으며, 대만 공연은 차질 없이 진행되었다.

당일 공연에서 엘튼 존은 "이 곳에서 공연하게 돼 매우 기쁘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공항에서 약간의 사고가 있었다"는 말로 관객들의 웃음을 유도하면서 자연스럽게 공항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사과했다. 이어서 "공항에서 한 언사가 대만 국민 전체에 대한 것은 아니며 대만 국민은 어떻게든 자기를 도와주려 했다"며 공항에서 행한 자신의 공격적인 언사에 대해서 해명했다. 공항에서 만난 사진기자와 카메라기자들은 내가 만나 본 사람 가운데 가장 무례한 사람들"이라며 "그들이 여러분의 나라를 욕 먹이고 있다"고 비난했다. 공항같은 장소에서 언론이 유명인사에 그렇게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해서는 안된다면서도 자신의 말로 상처받은 사람이 있다면 사과한다며 거듭 사과의 뜻을 전했다.

주최 측의 허술한 보안으로 기자들을 막지 못했던 건 엘튼 존같은 대스타에게 옳지 못한 행동이고, 안전불감증으로 인해 2차 피해까지 생길수 있는 가능성이 컸기 때문에 주최 측의 잘못이 컸다는 의견이 크다.[178]

애초에 그런 뉘앙스로 말한 것도 아니었고 공연에서 제대로된 해명을 하면서 대만을 생각하는 모습을 보였음에도, 이런 가벼운 해프닝을 언급하며 엘튼 존을 인종차별주의자라 비난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 할 수 있다.

7.8.2 돌체 앤 가바나 불매운동

돌체 앤 가바나의 설립자 '도메니코 돌체'와 '스테파노 가바나'가 한 인터뷰에서 동성애자결혼을 해서는 안되며 시험관 아기는 인조인간이라고 언급했다.[179] 이에 분노한 엘튼 존은 자기 애가 인조인간이냐며 본인의 인스타그램으로 통해 돌체 앤 가바나 불매운동을 주도했다. 여기서 바로 사과했으면 돌체와 가바나의 평소의 불쾌한 언행 수준에서 안벗어나는 해프닝으로 끝났을 지도 몰랐지만..

스테파노 가바나가 인스타그램에서 엘튼 존을 비난하고 호모포비아적 발언을 하는 사람들을 돋구우며 엘튼 존에게 악플을 달 것을 요구하는 식으로 글을 여럿 남겼다. 당연히 일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고, 전세계 성소수자들과 불임부부들 그리고 그들을 지지하는 뮤지션, 미디어들로부터 대대적인 보이콧이 시작되었다. 마돈나도 보이콧에 참가했다![180] 결국 돌체와 가바나는 대대적인 공식 사과를 해야했고, 엘튼 존도 2015년 8월이 되서야 보이콧을 그만둔다고 밝혔다. 이로 인해 돌체 앤 가바나는 이미지에 커다란 타격을 입었다.

7.8.3 장난 전화 사건

2015년 9월 엘튼 존은 동성애자를 사실상 억압하는 법률이 있는 러시아에 우려를 나타내 성소수자의 권리에 관해 블라드미르 푸틴에게 직접 말하고 싶다고 밝혔다. 9월 14일 푸틴에게 연락이 와서 같이 11분 동안 성소수자 인권에 대해서 대화를 나눴지만, [사실 러시아의 코미디언 2명이 장난전화를 걸었던 것이다.] 러시아 국영 TV 채널 쇼프로 진행자인 블라디미르 크라스노프와 알렉세이 스톨랴로프가 런던의 한 스튜디오에서 엘튼 존에게 국제전화를 걸었고, 각각 푸틴과 대변인으로 가장하고 전화를 걸었다.[181] 엘튼 존은 장난전화인지 전혀 의심을 받지 못했고, 동성애자를 싫어하는 것으로 알려진 푸틴이 자신에게 전화하는데 감동해서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감사 메세지를 올리고 직접 만나서 이야기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했다.

푸틴 측은 엘튼 존에게 전화통화는 사실이 아니라고 해명했고, 결국 장난전화를 걸었던 두 명의 코미디언은 자백했다. 그렇게 푸틴은 실제로 엘튼 존에게 전화를 걸어 이번 소동과 관련해 기분 나빠 하지 말라고 위로하면서 "그들의 행동을 정당화할 순 없지만 악의없는 젊은이들"이라고 해명했다. 푸틴은 엘튼 존과 만남이 성사될수 있다고 약속했고, 엘튼 존도 9월 17일 인스타그램에서 "러시아를 사랑하며 푸틴 대통령과 성적소수자 문제를 논의하고 싶다는 제안은 여전히 유효하다"며 밝혔다.

2016년 3월 28일, 드미트리 페스코프 대통령 공보실장은 엘튼 존이 2016년 5월에 푸틴과 면회할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고, 엘튼 존은 2016년 5월 28일에 모스크바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공연이 진행될 예정이었기 때문에 푸틴과 만날 가능성이 컸지만, 스케줄이 맞지 않아 만남은 성사되지 못했다. 하지만 나중에는 꼭 만날 것이라는 의견을 밝혔다.

7.8.4 공연 테러 불발

2016년 9월 11일 영국 런던의 하이드 파크에서 열린 페스티벌 공연에서 폭탄 테러를 저지르려고 하던 10대가 체포되었다. ​공연 3일 뒤인 9월 14일에 언론에서 이 사실을 보도했다. 피의자의 이름은 Haroon Ali-Syed로 웨스트 런던에서 거주하는 19살 영국인이다. 경찰조사 결과에 의하면, 그는 런던 지하철 폭탄 테러때 사용된 것과 비슷한 폭탄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182]

처음에는 버킹엄 궁전옥스포드 등의 여러 장소에서 테러를 고려하다가 911 테러 15주기를 맞아서 그 날 하이드 하크에서 열릴 예정이던 페스티벌 공연에서 테러를 계획했다고 한다. 수천명이나 모인 관중들 사이에서 폭탄을 터트릴 예정이었고, 한마디로 자살폭탄으로 계획했다고. 하지만 다행히도 공연이 열리기 3일 전인 9월 8일 런던에서 체포되었고, 이후 그가 가지고 있던 폭탄도 경찰에 의해 해제되었다.

9월 11일 당시 공연을 진행했던 뮤지션들 중에서 엘튼 존이 손꼽히는 거물이라서 이를 노린 테러였다고 추측이 있지만, 정작 체포 이후의 보고서에선 그가 테러를 저질렀던 이유는 자금 문제로 인해서 세운 계획이라고만 나와있다. 정확한 결과는 9월 19일에 열릴 예정인 재판에서 이루어질 것으로 보인다. 현재 그는 경찰에게 감시받는 중.

8 내한 공연



2004년 9월 17일 서울 공연 풀버전 영상

2004년 9월 17일에 서울올림픽주경기장에서 첫번째 내한 공연을 진행했다. 당일 날씨가 대체로 흐렸던데다 공연 초반에 부슬비가 잠시 내리는 바람에 관객들이 다소 동요하기 시작하자[183] 엘튼 존은 곧바로 센스있게 즉석에서 피아노 반주를 곁들여 Singing in the Rain을 부르며 관객들을 빵 터뜨린 덕분에 분위기가 진정될 수 있었고 이후 다행스럽게도 비는 그쳤다. 당시 스탠딩석은 없었고 모든 관객은 좌석에 앉아서 공연을 감상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공연 중반부 부터 분위기가 달아오르더니 무대에서 가까웠던 VIP 및 A구역 관객들이 무대 앞 공간에 우르르 몰려들면서 졸지에 스탠딩 공연이 되어 버렸다(...)VIP 관객들 지못미[184]

당시 엘튼 존은 Crocodile Rock을 부를때 스탠딩관객이 무대로 던져준 한국 전통 부채를 들고 관중들의 떼창을 유도 하는 등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참고로 이 공연은 SBS에서 기획을 했고 엘튼 존 측과 협의하에 카메라를 동원해 실황을 촬영하여, 그 다음주인 추석연휴 중에 녹화,편집된 당시 공연 실황 영상을 특집으로 방영하기도 했다. SBS에서 편집된 영상만 남아 있기 때문에 무편집된 영상은 없다.[185]




2012년 11월 27일, I Guess That's Why They Call It The Blues

2012년 서울과 부산에서 두번째 내한 공연이 잡혔다. 그랬다가 부산공연은 취소되고, 11월 27일 서울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만 내한 공연을 했다.

2015년 11월 27일[186] <All the Hits> 투어의 일환으로 엘튼 존의 3번째 내한 공연이 열렸다. 특이하게도 이번 공연은 500명만 볼 수 있는 소극장 공연이었는데, 이런 형태의 공연은 <All the Hits> 투어가 진행되는 세계 40여개 도시 중에서도 유일했다.[187] 공연은 현대카드 언더스테이지(UNDERSTAGE)에서 진행되었고, 전석 스탠딩이었다. 다만 무대 바로 앞인 0번대 자리에선 펜스를 쳤기 때문에 무대와는 조금 떨어져 있었다.

다른 나라에서 진행된 공연들과 달리 이 때는 공연 시간이 상대적으로 짧았고, 이에 따라 몇몇 곡을 빼고[188] 18곡만 불렀다. 500석 한정 규모 공연인 만큼 자주 들을 수 없었던 레퍼토리를 기대하는 팬이 많았는데, 아쉬웠던 부분. 당시 투어 때 오프닝으로 불렀던 Funeral For A Friend/Love Lies Bleeding을 제외하고 대신에 The Bitch Is Back을 오프닝으로 불렀고,[189] 공연의 마지막 곡이자 앙코르로 Crocodile Rock을 불렀다.




2015년 11월 27일, Crocodile Rock

앙코르로 부르고 나서 공연이 끝났지만, 당시 공연장에 있던 사람들은 Crocodile Rock을 공연의 마지막 곡이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해서 엘튼 존이 차를 타고 떠났는데도 앙코르 요청을 5분동안 했었다. 밴드의 멤버들은 좀 더 머물고 떠났지만 관객들은 계속 앙코르를 외쳤고, 결국 스텝 중 한 명이 엘튼 존은 이미 차타고 떠났다고 공지한 다음에야 다들 공연장에서 나왔다.[190] 참고로 2012년 공연과 2015년 공연은 2004년 공연과 달리 방송국에서 촬영하지 않았고, 관객들이 촬영한 직캠 영상들만 돌아다닌다.

9 엘튼 존 밴드

[191]

밴드 1기 (1970~1971). 엘튼 존은 1970년 5월에 순회 공연을 도는 밴드를 결성했고, 베이시스트 '디 머레이'와 드러머 '나이젤 올슨'을 영입했다. 나이젤 올슨은 1969년 1집 Empty Sky에 참여했지만, 디 머레이는 1970년 3집 Tumbleweed Connection부터 참여했고, 엘튼 존, 디 머레이, 나이젤 올슨 이렇게 3명으로 팀을 이루어 처음으로 녹음된 곡이 Amoreena이다. 이후 디 머레이와 나이젤 올슨은 엘튼 존 밴드의 1기 멤버가 되었고, 여기서 나이젤 올슨은 현재까지 함께하고 있다. 당시 앨범들에선 기타 세션도 있었지만, 정작 투어에선 피아노에 베이스, 드럼만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피아노 록 밴드 구성 그 자체이다.


[192]

밴드 2기 (1972~1973). 1971년 4집 Madman Across The Water부터 참여한 기타리스트 '데이비 존스턴'을 1972년부터 투어의 맴버이자 리드, 리듬 기타리스트로 영입되었고, 현재까지 가장 오랫동안 자리를 지킨 멤버가 되었다. 1972년 북미 투어에선 I Think I'm Going To Kill Myself에서 재즈 밴드 '본조 도그 두다 밴드'의 전 드러머 래리 "레그스" 스미스가 탭댄스를 맡기도 했었다.[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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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드 3기 (1973~1974). '레이 쿠퍼'는 Madman Across The Water부터 참여하기 시작하여 퍼쿠션을 맡았고, 1973년 11월에 밴드의 퍼쿠션으로 합류했다. 1973년 11월부터 1974년 12월 24일 영국 해머스미스 오데온까지 1년 1개월 동안 함께한 밴드 3기는 사실상 가장 대표적인 엘튼 존 밴드 라인업으로 꼽힌다. 좀 더 강력하고 묵직한 사운드를 원했던 엘튼 존은 1975년 초에 디 머레이와 나이젤 올슨을 밴드에서 해고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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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드 4기 (1975~1976). 디 머레이와 나이젤 올슨을 해고하고 나서 베이시스트 '케니 파사렐리', 기타리스트 '케일럽 퀘이', '제프 스컹크 바스터'와 드러머 '로저 포프', 키보디스트 '제임스 뉴튼 하워드'를 영입했다.[196] 제프 바스터와 제임스 뉴튼 하워드를 제외한 나머지 멤버들은 1967~1971년 초기 작품들에 참여했던 세션 연주자이자 엘튼 존의 초기 동료들이다. 1975년 6월 21일 웸블리 스타디움 공연에서 처음 선보였지만, '제프 바스터'는 당시 공연 이후로 밴드에서 나갔고, 백보컬 '신디 벌룬스', '존 조이스', '켄 골드'를 영입시켰고, 1975년 9월부터 1975년 10월 26일 다저 스타디움까지 West Of The Rockies 투어로 진행되었다. 1976년에 진행된 Louder Than Concorde Tour (But Not Quite As Pretty!) 투어에선 여가수 '키키 디'가 참여해 "Don't Go Breaking My Heart"와 본인 대표곡 "I've Got The Music In Me"를 부르기도 했다. 역대 가장 강력한 사운드를 가졌던 엘튼 존 밴드 라인업이라서 일부 마니아들은 이 라인업을 최고로 꼽는다. 1976년 이후 밴드가 해산되었고, 데이비 존스턴은 1978년까지 팀에 있다가 이후 밴드에서 나와 1979년부터 1981년까지 2년 간 엘튼 존과 함께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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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드 5기 (1977). 1976년 8월 뉴욕 공연 이후, 1년 3개월 만에 밴드 투어를 열었다. 1975~1976년 밴드 4기는 이미 해산된 이유로 데이비 존스턴의 그룹 밴드인 'China'[197]의 멤버들로 급히 라인업을 차렸고, China 밴드의 멤버들 '데니스 콘웨이', 케니 파사렐리와 케일럽 퀘이를 대신하여 '존 쿠커 로프레스티', '조 파트리지'가 맡았다. 이 라인업으로 차린 공연은 단 1개 뿐이다. 1977년 11월 3일 웸블리 아레나에서 공연을 열었지만, 이 공연은 엘튼 존이 은퇴를 선언한 공연이기 때문에 당일 날에 급히 차려진 밴드는 하루 만에 해산된 것이다.[198] 하루 만에 결성되고 해산된 허무한 업적을 가진 라인업이라서 역대 가장 짧은 엘튼 존의 밴드 라인업으로 볼 수 있다. 이 공연 이후로 엘튼 존은 China의 멤버들과 작업한 적 없다.


밴드 6기 (1980). 1977년 이후로 3년 간 밴드 투어를 열지 않았다가, 1980년에 21 AT 33 투어를 열면서 3년 만에 밴드와 함께하는 투어를 진행했다. 1975년 초에 해고된 디 머레이와 나이젤 올슨이 다시 돌아왔고, 1978~1980년 세션에 참여한 두명의 기타리스트 '팀 렌윅'과 '리치 지토'가 영입되었다. 그리고 제임스 뉴튼 하워드도 돌아와 키보드를 맡았다. 1980년 이후로 나이젤 올슨과 디 머레이를 제외한 세션들은 밴드에서 떠났고, 팀 렌윅과 리치 지토는 다시 참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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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드 7기 (1982~1984). 데이비 존스턴이 1982년 초에 다시 합류했고, 이후 계속해서 자리를 지키는 중. 1972~1973년 이후로 무려 10년 만에 기존의 4명으로 구성되었다. 1982년 3월부터 1983년 10월 남아프리카 Jump Up! 투어까지 4명으로 구성되었지만, 1984년 2~12월 Too Low For Zero/Breaking Hearts 투어에선 키보디스트 '프레드 만델'이 참여해서 5명으로 늘어났다. 그리고 나이젤 올슨과 디 머레이는 10년 전처럼 1984년 12월~1985년 1월 사이에 다시 밴드에서 떠났다. 나이젤 올슨과 디 머레이는 1988년 21집 Reg Strikes Back에서 백보컬을 맡았지만, 디 머레이는 1992년 1월에 피부암으로 사망했다. 나이젤 올슨은 1992년 23집 The One에 백보컬로 다시 참여했지만, 2000년에 밴드의 드러머로 돌아오기 전까진 엘튼 존과 활동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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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드 8기 (1985~1986). 나이젤과 디의 해고 이후, 1985년 봄에 베이시스트 '데이비드 페이턴', 드러머 '찰리 모건'을 영입했다. 레이 쿠퍼가 1979년 이후로 다시 참여했고, 밴드의 멤버로 참여한 것도 1977년 이후 8년 만이다. 7기에선 호른 세션과 백보컬로 '앨런 카벨', '헬레나 스프링스', '셜리 루이스'가 영입되었다. 이 라인업을 처음 보여준 건 1985년 7월 13일 웸블리 스타디움의 AID 공연. 8기 라인업으로 Ice On Fire 투어를 진행했고, 투어의 첫번째 일정인 1985년 11~12월까지 영국과 아일랜드에서 조지 마이클이 참여해 "Wrap Her Up"의 백보컬을 맡기도 했다.

1986년 1~4월 유럽, 1986년 8~10월 미국에서도 동일한 라인업으로 진행되었지만, 1986년 11~12월 호주에서 멜버른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참여해서 진행된 초대형 투어 Tour De Force를 진행했다.[199] 7기는 역대 가장 커다란 규모의 밴드 라인업으로 볼 수 있다. 다만, 1986년 9~12월 엘튼 존의 성대결절로 인해서 1987년 1월 5일에 성대 수술을 받게 되었고, 그로 인해서 1987년에 정해져 있던 미국 일정을 모두 취소했다.[200] 그리고 1988~1993년 투어에선 롤랜드 전자 피아노를 사용했기 때문에 1993년 9~10월에 다시 그랜드 피아노를 사용하기 전까지 7년 간 사용하지 않았다.


밴드 9기 (1988~1990). 1987년 언론과 소송, 성대 결절 등의 각종 문제들을 겪고 나서, 1988년 7~9월부터 다시 투어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1988년부터 투어의 구성을 상당히 바뀌었는데, 스타인웨이 그랜드 피아노가 아닌 롤랜드 RD-100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좀 더 기계적이면서 전자 사운드로 옮겼다. 드러머 '조나단 모펫', 베이시스트 '로미오 윌리엄스'를 영입했고, 키보디스트 '가이 바빌론'은 이 투어부터 2009년까지 19년간 함께 했다.[201] 흑인 여성 백보컬로 '말레나 제터', '나탈리 잭슨', '알렉스 브라운'도 영입되었다. 이 라인업으로 1990년까지 2년간 Reg Strikes Back/Sleeping With The Past 투어로 진행되었고, 1990년 투어에선 드러머가 '찰리 모건'으로 바꿔졌다. 투어의 마지막 일정인 1990년 1~5월 오세아니아, 애틀란타 투어 이후 2개월 뒤인 1990년 7월에 재활 치료를 하게 되면서, 2년 간 밴드 투어를 진행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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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드 10기 (1992~1993). 재활 치료 이후로 1992년에 재기에 성공하게 되었고, 1992년 5월부터 2년 만에 밴드 투어를 진행했다. 데이비 존스턴, 찰리 모건, 가이 바빌론이 참여해 이전 라인업에서 그대로 이어왔고, 베이스는 '밥 버치'가 영입되어 2012년까지 20년 간 함께 했다. 그리고 기타/키보드로 '마크 타일러'도 영입되었고, 흑인 여성 백보컬도 그대로 영입되었다. 1992년 6~8월 영국의 웸블리 스타디움, 미국의 다저 스타디움 등에선 에릭 클랩튼이 참여해서 엘튼 존과 "Runaway Train"을 부르기도 했다. 10월 11일 매디슨 스퀘어 가든 공연은 또한 엘리자베스 테일러 자선 공연이기도 해서, 우피 골드버그, 조지 마이클[202], 브루스 혼스비, 라이오넬 리치가 참여하기도 했다. 1993년 1~6월 투어에선 믹 타일러가 밴드에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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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드 11기 (1994~1995). 데이비 존스턴, 밥 버치, 찰리 모건, 가이 바빌론으로 이전 라인업 그대로 이어왔고, 레이 쿠퍼가 8년 만에 다시 합류했다. 11기는 엘튼 존의 대표적인 1990년대 밴드로 꼽히기도 한다. 그리고 1993년 9~12월 레이 쿠퍼 투어에서 7년 만에 그랜드 피아노를 사용했고, 1994년 투어부턴 스타인웨이 대신에 야마하 디스칼리비어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20년 넘게 꾸준히 이 피아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94년 7월 8일 필라델피아부터 빌리 조엘Face To Face 투어를 진행하기 시작했고, 빌리 조엘 밴드와 함께 진행하던 구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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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드 12기 (1997~1998). 1996년에는 투어를 열지 않았고, 1997년 7월까진 간간히 작은 공연을 열었지만, 1997년 10월부터 The Big Picture 투어로 다시 밴드 투어를 열었다. 10기 라인업과 거의 같지만, 기타리스트 '존 조겐슨'을 영입했고, 퍼쿠션 '존 메이혼'이 영입했다. 존 메이혼은 1997년부터 20년 동안 함께 하는 중. 이 라인업으로 1998년부터 빌리 조엘과 합동 투어를 같이 진행하기도 했다. 1997년 10월부터 1998년 11월 만체스터까지 1년 1개월 동안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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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드 13기 (2000). 1999년 2~11월까지 엘튼 존은 피아노 솔로 투어를 열었기 때문에 밴드 투어는 1999년 12월 31일 라스베가스 공연을 제외하면 없었고, 2000년 2월 샌프란시스코부터 1년 반개월 만에 밴드 투어를 다시 열게 되었다. 이 투어에선 드러머 '커트 비스퀘이라', 백보컬 '빌리 트루델', 기타 '켄 스테이시'를 영입했고, 드러머 나이젤 올슨이 1984년 이후로 16년 만에 밴드의 드러머로 참여했다. 드러머가 2명이었기 때문에 당시 공연에서도 둘이서 드럼을 연주하거나, 나이젤 올슨이 백보컬을 맡았었다. 이 라인업은 2000년에 발매된 라이브 앨범 One Night Only에서 모습을 그대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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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드 14기 (2001~2009). 2001년부터 데이비 존스턴, 밥 버치, 나이젤 올슨, 가이 바빌론, 존 메이혼으로 8년 간 이어졌다. 엘튼 존의 대표적인 2000년대 밴드 라인업으로 볼 수 있을 정도. 그러나 2009년 9월 2일에 가이 바빌론이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1988년부터 19년동안 함께한 동료라서 엘튼 존은 이후의 공연에서 그를 추모하는 의미로 "Blues Never Fade Away"를 부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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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드 15기 (2009~2012). 2009년 10월부터 가이 바빌론의 사망 이후 키보드는 '킴 불러드'[206]로 교체했다. 2010~2011년에 30집 The Union 투어로 리언 러셀과 같이 합동 투어를 돌기도 했다. 2004~2009년까지 진행된 Red Piano 투어 이후로, 2011년부터 같은 장소인 라스베가스 시저스 팰리스의 콜로세움에서 Million Dollor Piano 투어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이 투어에선 투첼로스가 2011년부터 2014년까지 함께 했고, 레이 쿠퍼도 재합류했다.[207] 여담으로 2011년 10월 8일 라스베가스에서 진행된 공연이 엘튼 존의 3,000번째 공연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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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드 16기 (2012~). 베이시스트 밥 버치가 2012년 8월 15일에 본인의 저택에서 자살해 세상을 떠났다. 가이 바빌론 이후로 두번째로 사망한 밴드의 멤버이고, 엘튼 존은 추모의 의미로 밥 버치를 위한 솔로 공연을 열기도 했다. 밥 버치 생전 친했던 베이시스트 동료인 '맷 비저넷'을 영입해 밥 버치 자리를 대신 맡게 되었다. 참고로 킴 불러드와 맷 비저넷은 밴드의 다른 멤버들과 달리 엘튼 존의 정규 앨범에 참여할 일이 없었지만, 2015년 1~4월에 작업된 32집 Wonderful Crazy Night으로 처음으로 엘튼 존 정규 앨범에 참여하게 되었다.[209]

9.1 엘튼 존/레이 쿠퍼

1979년 5월 20~28일 구 소련


2009년 9월 22일 영국 런던의 로열 알버트 홀

엘튼 존은 밴드의 퍼커셔니스트 레이 쿠퍼와 둘이서만 함께하는 2인조 공연을 진행하기도 했다. 셋리스트에선 총 20~30곡 정도 수록되었고, 그중 절반 정도가 자주 부르지 않는 곡들이나 왠만하면 부르지 않는 희귀곡들로 수록되어 있다. 공연의 초반에는 엘튼 존이 피아노 솔로로 곡들을 부르지만, 중간부터 레이 쿠퍼가 무대에 올라 타악기를 연주한다. 레이 쿠퍼가 공연에서 타악기를 맡기 시작하는 곡은 Funeral For A Friend/Tonight 메들리[210]이고, 공연 끝까지 함께한다. 한마디로 피아노와 타악기 두가지의 요소만 구성되어 있는 독특한 형식의 투어.

엘튼 존/레이 쿠퍼 투어는 1977년 5월 1~7일 런던의 Rainbow 극장에서 처음으로 진행되었고, 1979년부터 A Single Man 투어로 한해동안 이 구성으로 진행되었다. 1979년 2월 5일 스웨덴 스톡홀름부터 시작해서 1979년 12월 7일 호주 퍼스까지 진행.[211] 레이 쿠퍼가 곡들에서 맡은 타악기들은 각각 다르고, 주로 탬버린, 콩가, 팀파니, 비브라폰, 자일로폰, 심벌즈, 공, 풍경, 튜불러벨스 등을 연주했다.[212] 1979년과 1993년 투어에선 Saturday Night's Alright For Fighting, "Crazy Water"에서 레이 쿠퍼가 타악기 솔로를 연주하기도 했다.

1979년 이후 14년 동안 엘튼 존/레이 쿠퍼 투어를 진행하지 않았지만,[213][214] 1993년 9월 30일 플로리다부터 다시 이 투어를 재개하기 시작했다.[215] 1993년 9월 30일부터 12월 10일 남아프리카 선 시티까지 진행되었고, 1994년 9월 9일 미국 애리조나 주 피닉스 공연부터 1995년 2월 20일 일본 부도칸까지 진행되었다.[216] 레이 쿠퍼는 1995년 5~11월 Made In England 투어에도 참여했지만, 1996년부터 밴드에서 잠시 자리를 비우게 되었고, 이후로 몇년간 또 다시 엘튼 존/레이 쿠퍼 투어를 진행하지 않았다.

14년 뒤인 2009년 9월 22일 런던의 로열 알버트 홀 공연으로 다시 이 투어를 진행하기 시작해 2009년부터 유럽에서만 진행되었다. 2010년 12월 15일 아일랜드 더블린까지 진행되었고, 2011년 5월 26일 스위스 제네바부터 5월 28일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2012년 3월 2일 멕시코 시티부터 3월 30일 노르웨이까지 진행되었다. 2012년 3월 이후로 이런 형식의 투어는 진행하지 않았고, 레이 쿠퍼는 2011년부터 라스베가스 시저스 팰리스의 콜로세움에서 진행되는 Million Dollor Piano 투어에서만 5년 간 참여하다가 2016년 9월 11일 런던 공연 이후로 일반 투어에서도 꾸준히 참여하고 있다.[217]

9.2 피아노 솔로 투어

1999년 3월 2일 미국 일리노이주 피오리아의 시빅 센터.

피아노 한대만 구성된 언플러그드 공연도 자주 진행했다. 1976년 9월 17일 스코틀랜드 에든버러Playhouse 극장에서 첫번째 피아노 솔로 공연을 진행했고,[218] 1977년부터 피아노 한대로 곡을 부르는 경우가 잦아졌다. 1976년 이후로 피아노 솔로로 공연을 진행한 경우는 많지만, 정작 피아노 한 대만 무대에 두고 진행한 건 1999년부터이다.[219]

1999년 2월 19일 버지니아 주 로아노크부터 시작해서 2013년까지 14년 간 진행되었다. 공연에선 약 30곡 정도 불렀고, 밴드 투어에서 찾기 힘들고 자주 부르지 않는 레파토리로 많이 추가했다. 예를 들면 Friends를 1971년 이후로 38년 만에 부르거나, 그동안 잘 부르지 않다가 1999년부터 정규 레파토리가 된 Come Down In Time, Talking Old Soldiers, "Amazes Me", Carla/Etude/"Tonight"[220] 등이 있다. 이 투어에선 엘튼 존의 보컬과 즉흥적이고 헌란한 피아노 연주가 크게 돋보이는데, 1999년 투어가 이러한 역량이 절정에 달았다고 평하는 이들이 많다.

1999년 이후 매년 간 꾸준히 진행되었지만, 2013년 3월 이후로 한동안 진행하지 않다가 2016년 9월 2일 모나코에서 한차례 진행했다.

10 학력

영국 왕립음악원(RAM)[221] 5년 중퇴, 명예회원(1997년), 명예박사(2002년)

왕립음악원이 1999년 9월부터 런던대학교 산하 단과대학으로 병합되었기 때문에, 2002년 받은 명예박사 학위는 런던대학교 명예 음악학 박사이다. 왕립음악원 역사상 명예박사학위는 이때 처음 주어졌고, 지휘자 故콜린 데이비스 경과 함께 받았다.[영어 위키피디아]


11 수상 및 서훈내역

11.1 명예의 전당

  • 1975년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헌액
  • 1992년 작곡가 명예의 전당 헌액
  • 1994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액[222]

11.2 수상

  • 골든글로브상(1995년)
  • 브릿 어워드 4회(1986, 1991, 1995, 1998년, 노미네이트 12회)
  • 아이버 노벨로 어워드 12회(1973~2000년)
  • 폴라음악상(1995년)
  • 그래미 레전드상(1999년)
  • 미국 케네디센터 공연 예술 평생